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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 소휘옥(蘇輝玉)[1] |
자 | 선옥(先玉) |
본관 | 진주 소씨[2] |
출생 | 1887년 2월 6일 |
경기도
양성현 원당면 칠곡리 (현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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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1년 3월 27일 |
경기도 안성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49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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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소휘태는 그의 4촌 형이고, 소휘선은 그의 4촌 동생이다.
2. 생애
소후옥은 1887년 2월 6일 경기도 양성현 원당면 칠곡리(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에서 아버지 소원술(蘇元述, 1854. 9. 4 ~ 1933. 10. 23)과 어머니 고령 박씨 박고원(朴高媛, 1864. 2. 15 ~ 1951. 2. 14)[3] 사이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경기도 진위현 송장면 이충동(현 평택시 이충동)과 용인현 상동면(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등지에 살았는데, 조부 소수능(蘇洙能, 1818. 1. 20 ~ 1907. 6. 9) 대부터 양성현 원당면 칠곡리로 이주해 와 살기 시작했다.그는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안성군 원곡면, 양성면 일대에서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4월 1일 오후 8시경 외가천리에 있던 원곡면 사무소 앞에서 1천여 명의 만세시위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했다. 도중에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에 이르러 이유석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취지를 연설하고 양성면과 원곡면내의 경찰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등을 파괴하고, 일본인 거주자를 축출시키기로 결의했다.
그날 밤 9시 30분경,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수백명의 만세시위대가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9시 50분경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원곡면에서 행진하여 오던 만세시위대와 합세하여 오후 10시경 재차 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때 그는 선두에 서서 투석으로 주재소의 유리창을 부수고, 부엌에 쌓아 둔 솔잎에 방화했다. 이어서 성 우편소를 습격하여 집기류를 앞마당에 끄집어내어 태워버렸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안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1년 3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소후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2017년 5월 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