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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9:57:06

남북 전쟁

미국 남북전쟁에서 넘어옴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이 문서는 19세기 미국의 남북 전쟁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문서입니다.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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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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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메리카 연합국 국기(1861-1863).svg 아메리카 연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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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 ~ 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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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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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 1902,
파일:필리핀 국기(1898-1901).svg.png 필리핀 제1공화국
의화단의 난
,1900 ~ 1901,
파일:의화단 기.svg 의화단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멕시코 국경 전쟁
,1910 ~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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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1933,
파일:니카라과 국기(1908-1971).svg 니카라과 자유주의자
아이티 점령
,1915 ~ 1934,
파일:아이티 국기(1859-1964).svg 아이티 반군
도미니카 점령
,1916 ~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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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1918,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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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소비에트 러시아 파일:극동 공화국 국기.svg 극동 공화국
제2차 온두라스 내전
,1924,
파일:온두라스 국기(1898-1949).svg 온두라스군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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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1941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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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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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 1945,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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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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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950 ~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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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레바논 위기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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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만 침공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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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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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내전
,1964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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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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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카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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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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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친이란 민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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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현재,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파일:인민동원군기.svg 인민동원군 }}}}}}}}}
남북 전쟁
American Civil War | 南北戰爭
파일:external/4.bp.blogspot.com/Civil+War+Soldiers.jpg
기간
1861년 4월 12일 ~ 1865년 4월 9일
장소
미국 남부 전역, 북부 일부
원인
미국 내 노예제 존폐에 관한 남북 간 지역별 갈등으로 인한 남부 7개 주 합중국 탈퇴
교전국
북군
[[틀:깃발|
기 명칭
미합중국
]][[틀:깃발|
깃발 명칭
미합중국
]][[미국|]]
남군
[[틀:깃발|]][[틀:깃발|]][[미연합국|]]
지휘관[1]
[[틀:깃발|]][[틀:깃발|]][[에이브러햄 링컨|]]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사이먼 캐머런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에드윈 M. 스탠튼
[[틀:깃발|]][[틀:깃발|]][[틀:깃발|]] 기디언 웰스
[[틀:깃발|]][[틀:깃발|]][[율리시스 S. 그랜트|
율리시스 S.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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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틀:깃발|]][[틀:깃발|]] 윈필드 스콧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조지 매클렐런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헨리 할렉
[[틀:깃발|]][[틀:깃발|]][[존 C. 프리몬트|]]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존 엘리스 울
[[틀:깃발|]][[틀:깃발|]][[윌리엄 테쿰세 셔먼|
윌리엄 테쿰세 셔먼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필립 셰리든
[[틀:깃발|]][[틀:깃발|]][[조지 미드|]]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조지 H. 토머스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데이비드 패러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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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틀:깃발|]][[틀:깃발|]] 조셉 E. 존스턴
[[틀:깃발|]][[틀:깃발|]][[틀:깃발|]] P. G. T. 보우리가드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브랙스턴 브래그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에드먼드 커비 스미스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존 벨 후드
병력
700,000명
총 2,200,000명
360,000명
총 1,000,000명
결과
아메리카 합중국(북군)의 승리
영향
미연합국 멸망, 미국 통일
'재건 수정안'에 의한 미합중국 헌법 개정
노예제 금지(수정 제13조)
├주의 적법 절차 및 평등 보호 규정(수정 제14조)
└인종 및 노예상태에 따른 참정권 제한 금지(수정 제15조)
피해규모
365,000명 전사 290,000명 전사
민간인, 군인 총합 100만명 이상 사망

1. 개요2. 명칭3. 원인
3.1. 노예제
3.1.1. 연방영토에서의 노예제 확대 문제
3.2. 남북전쟁 원인에 관한 논쟁 변천사
3.2.1. 도덕적 원인3.2.2. 건국 이념3.2.3. 경제적 원인3.2.4. 가치의 충돌
3.3. Lost Cause
4. 남북전쟁 전의 타협과 무산
4.1. 미주리 타협과 1850년 타협4.2. "캔자스-네브래스카 법"(1854)4.3. "유혈의 캔자스" (Bleeding Kansas)4.4. 섬너 의원 구타와 드레드 스콧 판결(1857)4.5. 존 브라운의 반란과 재판 및 처형4.6. 1860년 대선 - 링컨의 당선4.7. 남부(딥 사우스) 주들의 연방 탈퇴 및 남부연합 수립4.8. 섬터 요새 전투: 전쟁의 개막4.9. 전쟁 발발 이후 중남부 지역의 동향4.10. 남부에 가담한 주들
5. 전개
5.1. 미합중국(북부연방)5.2. 미연합국(남부연합)5.3. 동부전역
5.3.1. 1861년5.3.2. 1862년 초: 반도 전역5.3.3. 리의 북진: 앤티텀과 게티즈버그
5.4. 서부전역5.5. 전쟁의 종결5.6. 전후 재건시대
6. 분석
6.1. 미합중국6.2. 미연합국
7. 결과와 의의
7.1. 정치적 의의7.2. 외교적 의의7.3. 군사적 의의
8. 무장
8.1. 육군8.2. 해군
9. 주요 편제
9.1. 미합중국
9.1.1. 동부전선9.1.2. 서부전선
9.2. 미연합국
10. 주요 인물
10.1. 미합중국
10.1.1. 정부10.1.2. 육군10.1.3. 해군10.1.4. 기타
10.2. 미연합국
11. 주요 전투 목록12. 만약 영국 프랑스가 참전했다면?13. 왜 반란을 막을 수 없었는가?14. 대중문화에서15. 여담1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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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 전쟁은 국가를 만들기 위한 비싼 전쟁이었다.
제임스 러셀 로웰
남북 전쟁은 이 나라에서 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인 국가적 의식을 만들었다.
우드로 윌슨 미국 제28대 대통령, 1915년 메모리얼 데이 기념사 中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4월 9일까지 미합중국(북부 연방)과 미연합국(남부 연맹)사이에서 벌어졌던 전쟁으로, 북부가 승리했다.[2]

1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앵글로아메리카 최후의 전쟁으로, 역대 미국인이 가장 많이 죽은 전쟁이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 미국사상 최대의 위기였다. 미국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두 번째이자 마지막 반란이다. 양 군의 육군 군복 색상에서 착안해 청색(연방군) 대 회색(연합군) 전쟁(Blue and Gray War)이라 부르기도 한다.

2. 명칭

한국에서는 남북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해 한자문화권에서 현지화된 표현이다.[3]

이 전쟁을 부르는 명칭은 다양한데, 많은 경우 특정한 사상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보니 현대에 와서는 대부분 쓰이지 않는 편이다.

원어인 영어로는 "American Civil War"(미국 내전) 또는 그냥 " The Civil War"(내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후자는 보통 미국 내에서 주로 쓰는데, 종종 The조차 생략하기도 한다. 그러나 "The Civil War"는 본래 영국에서 찰스 1세와 의회가 싸웠던 내전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므로, 미국 밖에서는 혼동을 막기 위해 꼬박꼬박 American까지 붙여서 부른다.

남부 측에서 부르던 명칭은 "War between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아메리카 연합국-미합중국 전쟁)이나 이를 줄인 "War between the States"(주(州) 간 전쟁)이며, 좀 더 노골적으로 친남부적 관점을 보이는 사람들은 "Southern Revolutionary War"(남부 혁명 전쟁)이나 "Confederate War of Independence"(연합국 독립 전쟁), 혹은 아예 "War of Northern Aggression"(북부의 침략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남부에서 쓰이던 이름 중 그나마 온건한 것은 주 간의 전쟁이나 "War of Separation"(분리 전쟁) 정도이다. 이들 명칭은 공통적으로 남부 측에 반연방주의를 끌어와 이념적 정당화를 시도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으나, 연방 체제가 공고해지고 미국 흑인 민권 운동까지 성공한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남부 분리주의 운동 자체가 인기를 잃고 동력을 상실한지 오래인 까닭에, 지금은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다.

반면, 북부 측에서는 그냥 "War of the Rebellion"(반란 전쟁)이나 "War for the Union"(연방을 위한 전쟁), "Second American Revolution"(제2차 미국 혁명) 등으로 불렀다. 이는 기본적으로 북부 측 정당성을 지지하는 관점이고, 또한 연방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특히 제2차 미국 혁명은 "American Revolutionary War"( 미국 독립 전쟁)을 이어 미합중국을 완성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인 것은 반란 전쟁이고, 이는 종종 줄여서 "The Rebellion"(그 반란)이라고도 부른다. 이들 명칭도 대부분은 남부에 대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등 문제의 소지가 있기에 후대에는 중립적인 표현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미국 연방정부는 남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미국 연방정부에서 부르는 공식 명칭은 여전히 "The War of the Rebellion", 즉 "반란 전쟁"이다. 다만, 좀 더 중립적이고 온건한 표현인 "American Civil War"(미국 내전)이 민관을 통틀어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다.

3. 원인

3.1. 노예제

스스로 분열된 집안은 바로 설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절반은 노예로, 나머지 절반은 자유민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영속할 수 없음을 믿는다.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4] I believe this government cannot endure, permanently, half slave and half free.)
에이브러햄 링컨,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상원의원 후보직 수락연설을 하며(1858년 6월 16일). #출처
전문가들(미국 남북전쟁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노예제가 전쟁 전의 남부, 남부 노예주들의 분리 그리고 전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더이상 이론이나 반론이 있지 않습니다.
휴스턴 대학교 에릭 발터 역사학 교수
남북전쟁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노예제 존속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관세, 자치 제도, 연방제 구조 등등 여러 원인들이 있었으나 따지고 보면 부차적이거나 전부 그 근원이 노예제에서 비롯되었고, 남부의 독립과 전쟁은 노예제가 없었으면 일어날 수가 없었다.[5][6]

특히 관세 어쩌고는 역사적 미국 관세 차트[7]만 봐도 알 수 있으니 남북전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을 꺼내면 비웃음을 사기 딱 좋다. 애초에 남부가 그렇게 관세에 민감한 플랜테이션 농업 위주의 경제구조에 의존하도록 만든 것 자체가 노예제가 원인이다.

노예제는 연방 시작 전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노예제는 도덕적으로 '사악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미국 독립선언문의 영향으로 인간이 최소한 자유, 생명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퍼지기 시작했다.[8][9] 문제는 이 사상이 당시 미국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노예제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독립하자마자, 노예제의 수익성이 노예제를 유지할만큼 좋지 않았던[10][11] 북부에서는 노예제 폐지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뉴저지 주를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북부 주들은 1850년대까지 노예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노예제의 수익성이 더 좋았던 남부주는 상황이 달랐고 이 차이는 '3/5 협정', '20년간 국제 노예무역 허용' 등 각종 타협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부에서는 꾸준하게 노예제가 폐지되어 갔고, 초창기에는 필수노동의 형태로 노예를 착취해 남부의 개척과 농업경제를 다 만들어낸 이후 그 결과물인 담배 등 상품작물의 수익성이 떨어져 가던 버지니아 등 북쪽의 남부 주들도 슬슬 노예제 폐지로 여론이 기울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면기[12]가 덜컥 발명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때까지 면화는 수요는 많았으나 씨앗을 빼내기가 너무 성가셨기 때문에 수확을 해도 대량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가 없었는데, 조면기의 발명 이후 이 과정이 아주 수월하게 변한 데다가[13] 동시에 씨앗 제거에 종사하던 노예까지 모두 목화재배에 몰아넣을 수 있었기에 엄청난 수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목화는 공급만큼 수요가 창출되던 상품이라 다다익선이었고 그 재배에는 여전히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였던 까닭에, 수익성을 입증한 노예제는 계속 남부에 남아있게 된다. 흑인 노예의 전형적인 모습인 목화 따는 모습이 이때 가장 흔한 노예의 일상이었다.

기후 조건 때문에 면화 농장은 점점 남서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조지아가 중심이 되었던[14] 면화 농업은 다시 미시시피 앨라배마 주로 주도권이 이동했고, 이후에는 루이지애나가 급부상했다. 이 5개 주가 당시 미국 면화 생산량의 3/4 이상을 차지했고 미국의 면화 생산량이 당시 세계 면화 생산량의 3/4를 차지했다. 5개 주는 플로리다, 텍사스와 함께 가장 먼저 미합중국을 탈퇴하고 남부연합을 세웠다.

두 번째는 노예 자체의 가치이다. 이 시기는 미국 남부를 제외하면 유럽 등 소위 근대화된 국가에서는 노예 무역이 끝장난 시기였다.[15] 미국도 노예 수입은 이미 1808년에 법으로 금지되었기에 플로리다, 텍사스와 멕시코를 통한 불법 수입이 등장하였다. 이건 당시 주간 거래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가격 폭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고, 이후 노예 생산 단계로 접어들어서야 노예 가격 폭등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남북전쟁 시기까지도 노예 공급은 줄어 갔고 가격은 꾸준히 상승세였다.

면화 산업의 발달[16]이 더해지면서, 시장 원리에 따라 노예 가격은 꾸준히 치솟고 있었다. 담배 농업이 무너지고 면화 농업이 각광받기 시작한 1800년에서 1850년 사이 노예 가격은 인당 약 50달러에서 800~1,000달러까지 상승했다. 그러니까 갈수록 노예의 생산력보다 노예 자체의 가치가 좀 더 부각되고 있었다. 1850년대 무렵 노예들의 가치는 당시 화폐로 약 20억 달러 정도였는데, 이건 남부가 소유한 총자본의 약 1/4이며 연방 예산의 10배 정도였다. 면화 작물의 가치도 이것의 1/10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처럼 노예는 비싼 재산이었고, 노예제 폐지는 그 재산을 통째로 증발시키는 것이었다.

이 비싼 노예 가격 때문에 전쟁 직전까지도 남부에서 노예를 거느리던 사람은 백인들 중에서도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던 상위 5% 이상의 대부호들이었다.

노예를 가진다는 것 자체로 부유함과 우월함의 상징이 되는 것이 이 시기 남부 백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앤드루 잭슨처럼 가난한 백인 남성이 자수성가하여 플렌테이션을 사고 노예를 부리는 것이 이 당시 남부의 '아메리칸 드림'이였다. 게다가 이 시기 미국 남부는 유럽 귀족 사회를 모방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대부호들은 자신들과 노예를 통해 유럽식 귀족과 평민을 구현했고, 이런 상류층의 문화는 하류층으로 전파되었다. 백인 인구의 하위 80%를 차지하는 대다수 중소 자영농~빈농들은 노예를 부린 적도 부릴 일도 없었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노예제가 폐지되어 흑인들의 임금이 발생하는 편이 자신들의 임금상승이나 자영농들의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훨씬 이득이었겠지만,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노예제 폐지에 가장 격렬하게 그리고 가장 끝까지 저항한 부류였다. 사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하층계급에서 자신이 타인과 동등하게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것보다, 설령 자신이 향상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타인이 자신보다 더 아래에 있다는 데 위안을 삼는 것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남부를 지배하던 대농장 소유주들과 이들과 밀착한 남부교회들은, 어떤 면에서는 노예들보다 살짝 더 나은 처지밖에 못 되었던 가난한 백인 자영농들에게 너희들이 아무리 못나고 가난해도 깜둥이보다는 훨씬 우월하다라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하였다.

즉 이것은 남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가난에 시달리던 백인 하층민들의 분노가 대부호들을 향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장치였다. 따라서 북부에서 노예제 폐지론이 득세하자, 남부 엘리트들은 이걸 방치하면 자기들의 사회문화적 우위를 완전히 상실한다고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들로부터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주입당했던 남부의 하류층들은, 정작 자신들은 해방으로부터 지킬 노예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전쟁의 막바지까지 가장 격렬하게 싸웠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가난에 시달리더라도 '그래도 나는 저 깜둥이 노예보단 우월하고 고귀한 백인'이라는 자부심에 기대서 살아왔는데, 노예제가 폐지되면 해방된 노예의 자리에 내가 굴러떨어지도 모른다라는 공포가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들 상당수는 노예를 관리하는 자들로 노예 질서에 예속된 상태인데, 자신이나 깜둥이나 매한가지 대농장주들한테 시달리는 동급의 가난뱅이가 되는 걸 넘어 그 흑인의 자리까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도덕적 논란은 당시 미합중국이 브라질과 스페인령 카리브 섬들을 제외하면 백인 문명권에서 유일하게 노예제를 굴린다는 것 자체가 큰 원인이었다. 원래는 노예의 필요성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이것이 외부의 가치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흑인 노예들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의 인종적[17], 문화적 우월성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도덕적 잣대로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크 트웨인의 <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같이 당대가 배경인 소설들이다. 작중 핀은 친구인 흑인 노예 짐이 도망쳤다가 노예 사냥꾼에게 잡힌 것을 두고 이를 구해야 할 지 갈등하는데, 왜냐하면 도망나온 노예를 고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도덕과 신앙이 주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멋대로 사는 부랑아지만 최소한의 인륜도덕은 가지고 있는 핀이 고민 끝에 결국 내가 지옥에 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해야 친구인 도망 노예를 도와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 당시 남부의 해괴한 도덕관이었다.

즉 노예제는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좀 더 복잡한 가치관의 문제였다.[18] 그래서 미국 역사학자들은 전쟁 전 남부사회를 단순히 노예가 있는 사회(Society with slaves)가 아닌, 노예제 자체가 사회 구조의 핵심위치에 있으며 노예제 없이는 그 사회 자체도 유지될 수 없는 '노예 사회(Slave Society)'라고 정의한다.

3.1.1. 연방영토에서의 노예제 확대 문제

노예제 문제가 남북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는 하지만, 남부 주들의 노예제를 당장 폐지하자는 주장( 폐지주의)은 북부에서도 소수의견에 머물렀다. 독립 당시부터 노예제를 유지해 왔던 남부 주들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북부의 노예제 반대론자들이 현실적인 목표로 잡은 것은 남부 주들이 아니라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새로 획득한 영토 등 아직 주로 승격하지 않은 연방영토(territory)에서 노예제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부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이조차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북부의 폭거였다.

미국 정치의 가장 큰 장점은 타협이었다. 건국 초부터, 코네티컷 타협을 통해 양원의원 배정 등 국가의 기틀이 정해졌다. 미국의 하원의원은 주별로 인구에 비례해 배분되었는데, 북부와 남부가 타협한 결과 노예 인구의 3/5가 하원의원 의석수 계산에 포함되었고, 북부에 비해 인구가 적은 남부는 이를 통해 북부를 견제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북부의 빠른 경제발전 및 이민자들의 북부 선호로 인해 북부의 인구는 남부에 비해 훨씬 빨리 증가했고, 3/5 규칙으로 보정받은 의석수에서조차 남부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부의 정치적 발언권을 유지시켜 준 것은 각 주마다 동일하게 2명씩 배정되는 상원의원이었고, 이 때문에 남부 주에서는 노예주가 자유주와 최소한 같은 수를 유지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다. 미주리 협정, 1850년 타협,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등 남북전쟁으로 이어지는 많은 사건들은 새로 연방에 가입하는 주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지, 금지할 것인지를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했다.

하지만 연방영토에서의 노예제 금지는 더 이상의 새로운 노예제 허용주(slave state)의 탄생을 막으면서 연방정부에서의 남부의 발언권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연방영토에서 노예제를 금지한다면 연방영토로부터 새로 승격할 주들 또한 노예제를 금지하게 될 것이었고, 남부는 하원은 물론 상원에서조차 북부를 견제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서부 개척자들은 대부분 노예제를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전쟁 직전 10여년 동안 노예주의 수는 그대로인데 자유주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남부 주들은 이처럼 남부에 점점 불리해지는 정치적 상황에 큰 불안을 느꼈다.

서부의 연방영토는 노예를 가지지 못한 남부 하류층 백인들이 진출하여 노예농장을 세울 기회의 땅이기도 했으며, 남부의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이 사업을 확대하고 부를 늘릴 수 있는 땅이기도 했다. 실제로 남부 대농장주들은 노예농장 확대에 매우 적극적이어서, 이미 노예 노동과 플랜테이션 농업이 활발하던 스페인령 쿠바를 구매하거나 정복하는 것을 자주 시도했다. 윌리엄 워커 처럼 아예 용병을 모아 무력으로 중앙아메리카 정복을 시도한 경우도 있을 정도. 남부인들 입장에서 북부인 및 이민자 자작농들은 이러한 미개척지에 대한 경쟁자들이었으며, 노예제를 연방영토에서 금지하는 것은 남부인들의 서부 영토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또한, 남부 주들은 노예주가 남부에 고립되고 자유주에 둘러싸이면서 노예제 자체가 존속하지 못하고 고사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이는 실제로 연방영토에서의 노예제 금지를 주장한 에이브러햄 링컨 등 온건파 노예제 반대론자들이 노리는 결과이기도 했다. 남부인들은 연방영토에서의 노예제 금지를 실질적으로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금지하자는 것과 같은 위협으로 보았고, 이 때문에 링컨의 당선이 노예제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진 것이다.

3.2. 남북전쟁 원인에 관한 논쟁 변천사

남북전쟁의 원인이 무엇이었느냐에 관한 논쟁은 비교적 근래까지 있었다. 특히 20세기 후반은 미국 내에서 대중적인 의견이 몇 번 뒤집히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평범한 미국인에게 남북전쟁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세대별로 판이한 의견을 들을 수 있을 정도다. 때문에 등장했다가 스러져간 설들을 파악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고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2.1. 도덕적 원인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의견이다. 남북전쟁은 불의롭고 반기독교적인 노예제를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북전쟁 직후에 주류 미국인들이 가지던 인식이다. 다만 시대적으로 아직까지 영웅사관이 주류였던 시대였기 때문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감격한 링컨과 그랜트와 같은 초인적인 정치 지도자에 의해서 역사가 움직였다는 낭만주의적인 시각이 섞여 있었다.

이 시각의 약점은 지나치게 역사를 평면적이고 단조롭게 해석했다는 것이다. 후술된 소위 '재평가론'들이 끊임없이 생명력을 얻은 이유 중 일부가 바로 이 약점에 기인한다. 전통적인 도덕적 원인론 자체는 워낙 단순하고 평면적인, 좀 나쁘게 말하면 유치하게까지 보이는 것이기에 적지 않은 대중들이 그런 유치한 이유가 아니라 뭔가 좀 더 복잡하고 심오한 '진짜 이유'가 있다는 주장을 솔깃하게 여겼던 것.

물론 남부 반란군의 봉기라는 구체적인 사건의 직접적인 배경으로 설명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지 노예 해방 운동과 그것에 힘입은 공화당의 탄생과 같은 미국 내전의 근간에는 이 도덕적 원인이 배경이 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3.2.2. 건국 이념

전쟁이 끝난지 한세대가 지난 1890년대 무렵부터 대두되었던 의견인데, 미국 건국에서 부터 있었던 이념적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남북전쟁을 보는 의견이다. 아래서 소개되는 소위 "Lost Cause"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그 건국과정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의 연방(Federal)파와 토머스 제퍼슨의 민주(Democrat)파의 논쟁이 있었다. 간략히 말해서 중앙집권적인 연방 강화를 통한 영국과 같은 부강한 중상주의 국가로 성장하자는 뉴욕주를 중심으로한 북부 해밀턴 파와, 자유로운 자영농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기본단위인 시민을 이루는 고대 로마 공화정이나 아테네 민주정과 같은 분권적 국가를 만들자는 버지니아주를 중심으로한 제퍼슨파가 존재했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북군은 해밀턴파의 후계자로, 남군은 제퍼슨파의 후계자로 보는 의견이다. 건국이념 논쟁 자체는 명백히 존재했고, 미국사를 관통하는 중심주제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일반 미국인이 들으면 그럴듯하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그래서인지 잊혀질만하면 다신 미국 일반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고는 한다.

이 시각의 약점은, 뒷받침하는 물증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편지나 글은 풍부하게 자료가 남아있는데, 제퍼슨의 이념에 대한 언급은 거의 전무하며 오히려 노예와 인종주의적 주장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룬다.

굳이 이러한 주장이 나온 빌미를 찾아본다면 미연합국에 참여한 11개 주는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하면서 '자신들에게는 원할 때 연방을 탈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합중국의 연방정부는 ' 그 권리를 부정하면서 이들의 행위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했으니 이 전쟁이 결과적으로 미국 건국 당시 해밀턴파와 제퍼슨파의 논쟁으로부터 시작된 오랜 논란에서 하나의 중대한 변곡점이 된 것 자체는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남북전쟁을 두고 "국가를 만들기 위해 치른 비싼 대가"라거나, "이전에는 없었던 국가적 의식이 (남북전쟁의 결과로) 형성되었다"와 같은 평가도 그래서 나온 것. 하지만 '결과적으로 해당 논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끼쳤다'라는 것과 '해당 논쟁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엄연히 다른 문제이고, 좀 조야하게 말하자면 '의도가 없어도 결과는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건국 이념 문제가 남북전쟁의 원인이라고 말하려면, 위에서 지적한 대로 남북전쟁 개전 당시 남부주의 독립과 남부연합의 출범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우리는 제퍼슨과 민주(Democrat)파의 이념을 관철할 것이다" 라는 주장이 나왔어야 하는 것인데, 그런 것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남북전쟁 발발 이전 자유주의 주권을 침해하던 도주 노예법이나 탈퇴 직후 연방 탈퇴에 참여하지 않은 노예주-소위 경계주-의 주권을 군사력으로 침해하려 시도하는 등, 남부 11개주 역시 '연방의 권력이 주의 주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를 명분으로 내세우기에는 그 행적에 낮뜨거운 면이 너무 많았다. 물론 현실정치의 한계라는 것이 있으니 자신이 주장하는 이념이라 해도 종종 그에 충실하지 못한 경우는 생길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정도까지 노골적으로 '우리의 권리만 소중하다'는 태도를 보여서야 설령 실제로 그 이념을 주장했다 해도 아무도 신뢰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은 오늘날 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그보다는 전후 한세대 이상 흐른 뒤 남부연합을 정당화하려는 그 후예들이 미국사를 관통하는 중심주제인 주의 권리 문제에 묻어가서 물타기 하려는 목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한 상세한 비판은 이 주장을 보다 고도화시킨 아래 "Lost Cause" 문단에 상세하게 나와 있으니 참고하자.

3.2.3. 경제적 원인

노동자 중심의 산업을 기반으로 한 북부와 노예제 중심의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남부간의 경제적 구조에서 비롯된 충돌이 궁극적인 원인이었다는 의견이다. 21세기 미국 정치가 정체성 정치판으로 흐르면서 위 건국 이념 원인설이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바람에 요즘은 묻혔지만 사실 20세기 후반에는 학계에서나 대중적으로나 가장 강력했던 의견이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도입해서 해석하는 의견이다. 이 의견의 특징은 그 시대 사람들의 도덕, 종교와 같은 정신적인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런 것들은 물질적인 경제구조에서 파생된 결과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궁극적 원인이 아니라는 유물론적 시각을 가진다.

유물론 시각은 북부가 노예제를 반대한 것은 표면상 도덕주의지만, 그 도덕이 어디서 왔겠느냐 지적한다. 그들이 보기에 천부인권과 같은 시민 사회의 도덕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의해 발생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북부와 남부의 도덕이나 가치관을 비교하는 것은 현상에 머무는 피상적인 인식이라고 한다. 궁극적인 원인은 자본주의 경제를 가진 북부와 노예경제를 가진 남부의 차이에서 온다고 본다.

이 시각에 따르면 노예해방 전쟁은 자본가에게 큰 이익이 되는데, 노동자를 갈아넣어서 공장을 돌리는 자본가로서는 노동자들을 더 싸게 후려치기 위해서 남부 노예를 해방시켜서 노동자로 전환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남북전쟁 한참 후인 1910년대 이후 남부흑인들은 ' 대이주'라고 불릴 정도로 기차를 타고 대거 산업화된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 있기는 있었다.

한편 이 해석은 미묘하게도 위 '건국이념 원인설'을 수용한 부분도 가지고 있었는데, '관세논쟁'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건국 아버지들 중 해밀턴 파는 중상주의 입장에서 높은 관세를 통해서 영국의 공산품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반면에 제퍼슨파는 오히려 낮은 관세를 통해서 좋은 공산품을 싸게 수입하고, 담배와 목재와 같은 농산품과 원자재를 수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식 해석은 남북전쟁 직전에도 여전히 산업화된 북부는 해밀턴파 의견이 대세이고, 농업중심의 남부는 제퍼슨파 의견이 대세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종전의 것들에 비하면 지적으로 매우 세련된 점이 많았고, 또한 건국의 아버지 관련 관세에 원인을 돌리는 주장도 미국인이 보기에 매력적인 점이 있어서 학계에서나 대중적으로나 인기가 매우 많았다. 게다가 시대적으로 매카시즘에 시달린 세대가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1960년대에 연구하면서 대두된 면도 있었다. 특히 70년대 대학생이었던 베이비 부머 세대가 마르크스주의를 본격적으로 대학가의 주류로 만들었는데, 이들의 열정적인 교육을 받은 미국 X세대 중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시각을 가진 이들이 꽤 많다.

이 의견의 약점은, 남부에서 분리주의를 정치적으로 주도한 지역과 노예경제 중심 지역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마르크스주의 사관에서 보면 노예제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일수록 노예제에 목숨을 걸어야 할텐데, 실제로는 오히려 이미 플랜테이션 산업이 한물간 동부해안 지역이 전쟁을 주도했다. 한편 북부에 관해서도 똑같은 문제가 있는데, 마르크스 시각에서 보면 자본가 계층과 산업화 지역이 전쟁을 주도했어야 하는데, 실제 현실에서는 가장 산업화된 뉴욕주는 전쟁 내내 타협을 주장하거나, 더 나아가 남부가 독립하게 내버려두자는 주장을 하고는 했다. 반면 뉴욕에 비하면 소가 풀뜯으며 낙후된 뉴잉글랜드 지역은 가장 강경하게 반노예주의를 기치로 내걸며 전쟁을 주도했다. 한편 관세 문제도 실증적으로 관찰된다고 보기에는 전쟁 시점하고 수십년씩 동떨어져 있어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이는 마르크스 사관 자체가 실증적으로 조사를 한다기보단 마르크스 이론에 현실을 끼워맞추는 경향이 강하기도 하거니와, 이념이나 도덕 등을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손쉽게 통치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보고 그 영향력을 경시하면서, 경제적 요인만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9세기 벽두부터 유럽에서 시작된 노예 무역 금지와 노예제 폐지에 대해서도 노예제가 경제성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로버트 포겔 등이 주도한 근래의 연구들은 노예제는 폐지 시점까지 경제성을 잃지 않았으며 노예제 폐지의 주된 동기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에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의 실수가 남북전쟁 해석에서도 반복된 셈.

3.2.4. 가치의 충돌

남북전쟁의 가장 큰 원인을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 충돌로 보는 의견이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노예제를 혐오한 북부인과 인종적인 우월감과 더불어 귀족적이고 우아한 삶을 추구한 남부인이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라고 본다. 이 의견의 특징은 인간이 각자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가치관도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고 보는 다원주의 시각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종전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 모두 경제문제로 환원시켜 버렸다는 것에 깊은 반성으로 나온 것이다.

대략 말하자면, 북부인들은 미국 노예제의 문제를 기독교인으로서의 양심을 지키냐 못 지키냐의 문제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반노예제를 주도한 것이 대부분 북부 교회들의 목사들과 그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들이었다는 점,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판결이 북부에 온 도망노예를 남부인이 쫓아와서 끌고 갈 수 있다고 해석된 것이 북부 여론의 결정적인 브레이킹 포인트였다는 점, 반노예제 문학이 유행한 점 등을 근거로 꼽는다. 반면에 남부인들은 노예제를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과 같이 바라봤다고 본다. 노동에서 해방되어서 여유롭고, 높은 수준의 교양과 유흥을 유유적적하게 누리는 삶을 남부 상류층은 즐겼고, 다른 남부인들은 이를 보면서 자신들도 곧 그와 같이 되기를 꿈꾸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남부인에게조차 이것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꿈으로 여겨졌는데, 실제로 대부분의 남부 상류층은 경제 확장기에 시류에 잘 편승해서 불과 한 세대도 안 되는 단기간에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공담은 하나같이 노예 하나로 시작해서 잘 경영해서 수백명의 규모로 키워나갔다는 노예만 빼놓고 보면 전형적인 자수성가의 스토리였다. 이러한 남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그들의 기회를 빼앗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한편 소위 연방주의자라고 불리는, 노예제 자체에는 중립적이지만, 강제로라도 남부의 분리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이 존재했다고 파악한다. 그 이유로 당대 미국인들은 아직까지 미국이라는 정치체계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실험적이고 취약한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위기감은 건국시기부터 존재했는데, 이를 놓고 미국인들이 벤자민 프랭클린의 일화를 통해 자주 인용하는 말이 있다.
미국이 국왕제를 하느냐 공화제를 하느냐 놓고 회의한 마지막날에 한 여성이 물었다.
프랭클린 박사님!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정입니까 공화정입니까?
공화정이요. 우리가 지켜나갈 수만 있다면. (A republic if you can keep it)

현재는 천조국에 빗댈 만큼 강력한 국가이지만, 독립 초기는 물론 남북전쟁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은 그저 신생국가에 불과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독립한 남미 식민지들이 연방을 유지하지 못하고 공중분해된 그란 콜롬비아의 선례가 이미 존재했다. 그래서 당장은 노예제를 놓고 미국이 두 개로 나뉘는 것이지만, 그대로 나가면 각 주가 모두 독립국가를 이루는 사태로 번져나가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위기감을 정치인부터 일반 미국인까지 광범위하게 공유했다. 게다가 이들은 연방을 선조들이 만들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지켜서 자신들에게 물려준 유산으로 여기는 인식도 존재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손에서 연방을 지키지 못한다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방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남부는 연방해체주의자들로서 선조를 배반하는 배은망덕한 자들로 보여졌다.

이러한 역사해석은 당대 사람들의 신문, 편지, 일기, 심지어 광고찌라시(...)까지 사료로 동원해서 풍부한 근거를 들이내밀고 있고, 가장 일관된 설명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인 학자들은 이 의견을 지칭할 때 "노예제 그 자체가 원인"이라는 표현을 할 때가 많다. 이전에 경쟁한 의견들이 다른 외적원인을 찾는데 주력했던 것에 대비시키기 위해 그렇게 부른다.

3.3. Lost Cause

'잃어버린 대의' 또는 '패배한 대의'라 번역이 가능한 'Lost Cause'란 남북전쟁의 원인은 노예제 따위가 아니었고, 남부 주들은 주와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독립했다고 주장하는 과거 미국내 역사수정주의 시각, 또는 현재의 역사왜곡을 말한다.

초기에는 전후에 일부 남군 생존자들과 주발 얼리에 의한 사모임이나 남부 지역신문에 실리는 수준의 뻘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쟁직후보다도 이후 반세기가 남부인들게는 더 끔찍한 시간으로 펼쳐지면서 추세는 점차 뒤바뀐다.

이와 같이 반발심이 남부인들 마음속에 자라날 수밖에 없었고, 쿠 클럭스 클랜이 결성되어 활동하면서 조직과 그들의 분노의 감정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 주장은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전쟁에 참전했던 당사자였던 전쟁세대는 다수가 이 주장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엉뚱하다고 여겼다. 남부군 출신자들조차 이 전쟁은 노예제 때문에 일어났다는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의 유명 남군 지휘관들은 전후로 자신들의 정당성에 관해 부끄러움에서 침묵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와 같은 일부는 아예 흑인 해방과 새로운 사회를 지지하는 연설을 공개적으로 행하기도 했다. 반면 반성하지 않는 인물들 경우에는, 흑인은 자연이 정한 열등한 존재라 백인의 지도와 보호를 필요로 하므로, 노예제는 정당했다는 인종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전쟁을 이끌었던 세대가 차츰 사라지고, 그들의 기억이 같이 잊혀져가면서 부터이다. 전쟁이 끝난지 한세대가 지난 1890년대 무렵부터 남군 전우회 연합(United Confederate Veterans)와 남부 연방의 딸들(United Daughters of the Confederacy)이라는 단체들이 결성된다. 남군 전우회 연합은 전쟁에 병사로써 참전했던 사람들이 참여했고, 남부 연방의 딸들은 전쟁때 중장년층으로 지도층 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여성 자손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두 집단의 공통점은 노예제가 잘못된 제도였다는 것에는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가 되었는데,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들이 노예제와 같은 반기독교적이고, 부도덕한 가치를 위해서 피흘렸고, 그래서 역사의 죄인이라는 도덕적 비난을 당하면 대대손손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했다. 그들이 이러한 심리상태에 놓여있었다는 것은 비교적 근래의 연구에서 잘 나타났는데, 요약하자면 "내가 알던 아버지는 악한 사람이 아니었어!" 정도로써, 20세기 2차대전 독일 및 일본의 전범 후손들과도 유사하다.

이들은 토마스 제퍼슨과 그의 이념을 끌고와서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했다. 대략 말하자면 남북전쟁은 결코 노예제와 반노예제의 전쟁이 아니었으며, 개개 시민의 독립성과 자유로운 삶을 해치려는 중앙정부의 폭정에 맞서서 싸운 것이었다는 것이다. 노예제에 비하면 훨씬 추상적이고, 이념적이면서, 건국의 아버지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이유를 들은 것인데, 어찌되었든 그들의 논리는 광범위하게 인기를 얻으면서, 20세기 중반까지 남부에서는 일반 대중의 믿음으로 굳어져갔다.

이들의 역사수정주의는 곳곳에 손을 뻗쳐 남군의 전과와 지휘관들을 전설적인 이야기들로 끌어올리는 한편, 북군 지휘관들과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폄하하고, 깎아내리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근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의 주 타겟은 다름아닌 율리시스 그랜트였는데, 북군의 승리를 이끈 지휘관이면서도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좋은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랜트는 지휘관으로서는 무식하게 부하들을 갈아넣는 전술만 반복했던 똥별이자 '도살자'로써, 정치인으로서는 부정부패의 백화점이었다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그랜트는 동시대 인물들에게서는 엄격하면서도, 자비롭고, 고뇌하는 정치지도자로써 미국뿐만아니라, 전세계에서 존경을 받았다.

지금은 미국 남부의 학자들도 그런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 현재 친남부적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전문사학자가 아니다. 남북전쟁과 관련해서 권위를 널리 인정받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등의 남부 대학들에서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노예제가 전쟁의 주 원인이라는 것에 확고하게 동의하고 있다. 리치먼드 소재 남부연맹 박물관 (Museum of Confederacy) 또한 노예제가 근본적인 원인이란 학계의 정설을 명시하고 있다.

현재의 학계에서 폐기된 학설에서 주로 나타나는 주장은 남부에 불리한 관세 문제나[19] 연방정부의 주의 권리 침해 등을 전쟁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전쟁 전인 1857년에 북부와 남부가 합의한 관세법으로 인해[20] 관세율은 1830년대 이후로 미국 역사상 거의 최저치를 찍었으며, 전쟁 바로 직전에 통과된 모릴 관세법은 이미 일부 남부 노예주들이 탈퇴를 하는 통에 노예주 민주당원들이 의원직을 사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참고로 미국 상원은 민주당이 다수당이었다. 민주당원들이 그대로 남았으면 그대로 통과되지 못했고 타협안이 나왔을 수밖에 없다. 민주당원들조차도 연방정부가 지속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저들이 정권을 잡았다면 어느 정도 조정은 불가피했다. 게다가 1830년대 관세분쟁이 증명한 것처럼 사우스캐롤라이나같은 매우 소수주들을 빼고 분리독립을 추구할 정도로 큰 불만은 아니었다. 남부연맹 부통령인 알렉산더 스테펜은 관세는 메사추세츠와 타협했기에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21]

남부 주들은 '주 정부의 권리'나 '남부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라는 명분도 노예제의 맥락에서만 들이댔다. 일단 남부 노예주들은 1850년 도망노예법을 밀어붙일 때 저항하는 북부 주들의 '주 정부의 권리'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주 정부의 권리'란 결국 노예주가 노예를 마음대로 하는 권리에 불과했고, 근본적인 문제는 노예제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들이 말하는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차이' 또한 결국 근본적으로는 노예제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이들이 말하는 남부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차이란 결국 우리는 이제까지 노예제를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후대 컬럼비아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친남부 역사학자들은 더 나아가 "남북 전쟁은 노예제를 두고 남부가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 각 주의 권리를 짓밟기 위해 북부 연방 정부가 시작한 전쟁이다"라는 극단적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막상 전쟁 이전과 당시, 직후에서 남부 동맹측 주요 정치인, 언론인, 장군들의 발언들을 조합해 보면 남부 동맹의 대의는 주의 자치권보다는 노예제와 백인 우월주의의 사수와 백인 인종의 생존권 사수에 방점이 찍혀있었다.[22] 노예제와 상관없이 주의 자주권이 문제였다면 앤드루 잭슨 시절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 드립을 쳤을 때 같은 남부 주들이 전부 다 이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부, 특히 영국과의 교역에 깊게 의존하던 뉴잉글랜드 지방의 주들도 미영전쟁 당시 주의 자주권 드립을 치며 연방의 전쟁에 비협조적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뉴잉글랜드가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잃어버린 대의'는 단순히 전쟁의 원인을 북부에 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쟁 이전 남부 사회 및 남부연합 자체를 낭만화시켰다. 로버트 E. 리, 스톤월 잭슨으로 대표되는 남부의 용감하고 고귀한 군대가 승승장구하다가 북군의 머릿수와 산업 능력에 밀려 장렬히 패배하는 서사가 대표적이다.[23]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로 대표되는 남부 귀부인(Southern belle) 및 남부 상류층 사회의 미화, 가혹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북부 노동자들과 대조되는 충성스럽고 잘 대접받는 흑인 노예 등의 이미지가 모두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사관에 비판적인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관이 노예제 문제를 희석해 남부동맹을 미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 제퍼슨 데이비스 같은 남부 인사들의 사후 변명과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에드워드 폴러드, 더글러스 프리먼 등 친남부적 역사학자들이 확립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국가의 탄생 같은 프로파간다성 대중 매체를 통해 재생산된 관점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과 반박에 대해서는 아메리카 연합국 문서에서 더 자세히 읽어볼 수 있다.

4. 남북전쟁 전의 타협과 무산

4.1. 미주리 타협과 1850년 타협

연방 내 북부와 남부 갈등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자유주와 노예주의 숫자였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북부 자유주들과 남부 노예주들의 숫자를 맞춰서 정치적 밸런스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와중에 1818년 서부의 미주리 준주가 주 승격 요건을 충족하여 미 의회에 연방 가입 신청을 하였다. 문제는 미주리가 노예주로 연방 가입 신청을 하였고, 이로 인해 당시 11:11이던 자유주와 노예주 사이의 균형이 깨질 위기에 처한 북부의 자유주들이 미주리의 연방 가입을 거세게 반대하고 반대로 남부의 노예주들은 미주리의 연방 가입을 지지하면서 벌써부터 남북 간에 분열사태가 터져나올 판이었다.

이런 양측의 갈등을 중재한 것이 남북전쟁을 적어도 50년 이상 늦췄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이었다. 클레이는 자유주와 노예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미주리의 연방 가입 문제와 당시 한창 시끌시끌하던 매사추세츠주 북부 월경지의 분리독립 문제를 접목시켜 1820년 '미주리 타협'이라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즉 매사추세츠 주 북부를 메인주로 승격시킴으로써 자유주의 수를 늘리고, 미주리는 원래대로 노예주로서 연방 가입을 시켜주면서 남북간의 균형을 맞춘 다음, 루이지애나 구입으로 얻은 지역 중 아직 주로 승격되지 않은 지역에 대해서는 위도 36도 30분선을 기준으로 그 이남은 노예주로, 이북은 자유주로 합의함으로써 양측간 비율을 1:1로 맞춰 갈등을 수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남부 주들은 오래전부터 노예반란을 매우 두려워했다. 이는 토마스 제퍼슨도 언급했을 정도로 꽤나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마침 1791년 아이티에서 흑인 혁명이 일어나서 소수 백인 지배자들이 남녀노소할 거 없이 몰살을 당했기에, 1800년대 내내 노예반란은 분명한 상수로서 존재했다.[24] 버지니아주에서 일어난 냇 터너(Nat Turner)의 반란(1831)같은 노예들의 저항은 이들에게 현 실태로 보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이후 멕시코에게 새롭게 삥듣은 땅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다. 미주리 타협은 어디까지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얻은 땅에만 유효한 법안이었기 때문에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얻은 땅에 대해서는 새롭게 법을 만들어야 했다. 여기에 북부는 북서부 조례(The NorthWest Ordianance)를 예로 들면서 멕시코와 전쟁을 통해서 새롭게 얻은 땅에 노예제를 폐지하자고 윌몬 법안(Wilmot Proviso)을 제안하였다.[25] 당연히 남부는 반발하였지만, 캘리포니아(1850)는 일부 지역이 위도 36도 30분선 아래에 있었음에도[26] 노예제를 금지하는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하려고 하였다. 남부주들은 캘리포니아의 연방가입을 늦추며 새로운 노예주를 찾으려고 하였지만, 대부분 노예노동이 동원되는 플랜테이션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들이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 균형이 깨져, 결국 노예제 폐지가 전국적으로 옮겨 갈 것을 우려한 남부의 반발로 연방 붕괴의 조짐까지 보인다. 이때 백가쟁명으로 각종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는데, 헨리 클레이는 30년 만에 다시 타협안을 제안한다.

클레이의 안은 다음과 같았다.
1)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편입한다.
2) 유타 뉴멕시코는 주민투표에 의하여 노예주의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3) 워싱턴 D.C.의 노예주 지위는 유지하되, 노예 시장을 없앤다.
4) 텍사스는 현 뉴멕시코의 절반, 콜로라도의 상당 부분 등 미국이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얻은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철회하고, 정부는 그 대가로 텍사스주에 재정적 보상을 지불한다.
5) 도망노예단속법을 강화한다.

클레이의 안은 대니얼 웹스터 등 휘그당 온건파, 민주당 온건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존 C. 칼훈 등 남부 민주당 강경파, 윌리엄 H. 수어드 등 북부 휘그당 강경파의 반대를 받아 통과에 어려움을 겪었다.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 또한 타협에 부정적이었고 남부 노예제 지지자들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테일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남부에 동조적인 휘그당 온건파 밀러드 필모어가 대통령이 되었고, 민주당 온건파 스티븐 A. 더글러스는 칼훈 사후 클레이의 안을 5개의 법안으로 쪼개어 각각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5항에서 다시 갈등이 발생한다. 강화된 도망노예단속법으로 소위 노예사냥꾼들이 등장하면서 자유주라 할지라도 도망친 노예를 잡는단 핑계로 마음대로 가택수색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심지어 주정부 공무원이 노예수색에 강제적으로 협조하게 만들어버렸다. 이에 북부 주들은 체포당한 노예에게 재판받을 권리를 주거나 시간을 끌 수 있게 하는 주법을 만들거나 버몬트 주의 경우처럼 아예 주정부와 공무원이 탈출노예를 돕도록 의무화하게 하는 연방법과 대립되는 주법률을 만들어 대항했다.[27] 거기다 작가 해리엇 스토우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로 노예제의 비도덕성을 꼬집었고, 소설이 널리 알려지면서 남북전쟁을 가속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4.2. "캔자스-네브래스카 법"(1854)

전술하듯 미주리 협정에 따라 준주에서 주로 승격될 캔자스는 협정의 경계선 36도 30분선의 북쪽이었기 때문에 자유주로 편입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스티븐 더글러스는 자신의 지역구인 일리노이를 지나가는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하기 위해서 캔자스 등이 주로 승격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남부 민주당 정치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인민주권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각 주의 주민들이 노예제 존폐여부를 인민주권에 따라 투표로 결정하게 하자는 내용을 담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통과시키면서 또다른 갈등이 시작된다.

안 그래도 각 주의 자치권을 매우 침해하는 도망노예단속법 때문에 불만이 많았던 북부 자유주들은 이 법안이 통과되자 일제히 남부 노예주들이 약속을 어겼다면서 남부 노예주들을 맹렬히 비난한다. 투표로 결정하자는 것 자체가 이미 30년 이상 받아들여지던 미주리 타협을 깨는 것이었고, 남부 주들이 캔자스를 노예주로 만들려는 의도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캔자스보다도 북쪽인 네브래스카는 주민 투표로 자유주가 될 것이 기정사실로 여겨졌고, 남부에서도 네브래스카를 노예주로 만들려는 시도는 별로 하지 않았다. 결국 캔자스를 투표로 자유주가 될 것인지 노예주가 될 것인지 결정하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4.3. "유혈의 캔자스" (Bleeding Kansas)

그럼에도 캔자스에서는 노예제가 별로 인기가 없었고, 그 캔자스를 노예주로 만들기 위하여 바로 옆 주였던 미주리에 사는 노예 주인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를 막기 위해 이번에는 북부의 노예 해방운동가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며 맞불을 놓았다. 이들 모두 무장을 한채 왔고 개중엔 심지어 대포를 끌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양쪽 모두 개표 조작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고, 결국 미주리 상원의원까지 합세해 부정선거를 한 끝에 캔자스는 노예주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캔자스 땅의 대부분의 농부들과 주민들은 노예주의자가 아니었다. 결국 또 문제가 터지는데 캔자스가 노예주가 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자유주의 마을 로렌스가 노예제 지지자들에게 약탈당해 마을의 중심지에 있던 프리 스테이트 호텔이 불태워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로렌스 약탈, Sacking of Lawrence).

1855년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노예제 찬성파가 소집한 의회를 승인하고, 노예제 반대파가 토피카에 만든 '그림자 주정부'와 기본법(토피카 기본법)을 불허하였다. 1857년엔 후임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역시 노예제 찬성파들이 만든 기본법(르컴튼 기본법)을 승인하였으나, 르컴튼 기본법은 스티븐 더글러스도 반대할 만큼 막장인 법률이었다. 결국 연방 의회가 캔자스의 재선거를 명령하였고, 외부 유입된 극렬 노예제 찬성파들이 그 재선거를 보이콧함으로써 결국 1859년 노예제 폐지자들에 의한 와이앤도트 기본법이 캔자스의 헌장으로서 승인되었다. 과연 외부 유입이 사라진 캔자스 내부 표결로는 찬반이 2:1이었다.

결국 캔자스는 1861년 1월 19일 자유주로 승격되었고, 그해 4월에 벌어진 남북전쟁에도 북부로 있었다.[28]

4.4. 섬너 의원 구타와 드레드 스콧 판결(1857)

전술하였듯이 남부는 북부 노예 반대론자/폐지론자들이 노예반란을 부채질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북부 자유주들을 매우 증오했다. 프레드릭 더글러스 같은 도주 노예출신 흑인 노예 폐지론자들의 대두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1852)'같은 반노예제 문학작품들의 인기[29] 등으로 노예 폐지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이들은 노예제에 대해서 점점 더 방어적으로 변해간다.

이러한 남북의 대립이 악화되면서 이전까지는 비교적 이성적으로 타협을 시도하려고 했던 정치인들마저 분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노예주 의원들은 당을 가리지 않고, 노예제에 대한 국민들의 청원을 미국 국회에서 토론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는 횡포를 부렸고("Gag rule"), 노예제 반대/폐지론이 담긴 신문들을 배포하는 것을 남부에서 근본적으로 막았으며, 냇 터너(Nat Turner)의 반란 이후로는 노예 관련 법들을 더 잔혹하게 강화했다. 심지어 북부 주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1850년 탈주노예법 같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탈주 노예를 잡기 위해 온 노예 사냥꾼들에게 협력할 것을 강제하기도 했다.[30]

남부 정치인들의 횡포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사건이 1856년 상원에서 일어난 찰스 섬너 의원(Charles Sumner)의 구타 사건이다. 남부인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하원 의원 프레스톤 브룩스가 자신의 친척인 앤드류 버틀러 상원의원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북부인 찰스 섬너 지팡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한 것이었다. 이때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은 주위를 둘러싼 채 서로 희희낙낙거리며 구경했으며, 브룩스와 함께 입장한 동료 하원의원들은 권총으로 다른 의원들을 위협하는 등 의회마저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 섬너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이르렀고, 이후 약 3년 동안 공직을 수행하지 못한 채 혼수상태에 빠졌다.[31]

설상가상으로 1857년, 미주리 협정을 파기하는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내려졌는데, 이것이 바로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Dred Scott v. Sandford) 판결이었다. 판결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 내에서 흑인은 남의 자산은 될 수 있어도 시민이 될 수가 없고, 미국은 헌법적으로 노예를 인정하니, 미국 연방정부가 연방영토에 노예제를 금지할 수 없다. 노예주들은 노예를 노예주든 자유주든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다.' 라는 내용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문서 참조. 이 판결은 일부 북부 주에서 흑인을 주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걸 무시한 처사였으며, 연방이 노예제를 일부 연방영토 및 해상에서 금지한 사례도 무시했고, 미국은 그냥 노예 국가라는 걸 연방대법원이 인증한 꼴이 되어 버렸으므로 자유주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북부 자유주들 입장에서는 '노예 권력(slave power)'이 실존하며, '중앙정부도 노예제 편이다. 정부를 갈아치워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불만을 근거로 남부 노예주들은 북부 자유주들 역시 노예제에 대해서 중앙정부에 굽힐 의사가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4.5. 존 브라운의 반란과 재판 및 처형

존 브라운(John Brown)은 강경한 폐지주의자로, 여러 사업을 전전하다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뒤 동료 폐지주의자들과 교류하며 나머지 일생을 노예제 반대 운동에 바쳤다. 지하철도 활동에 참여하여 노예들을 몰래 북부로 탈출시켰으며, 1850년 타협으로 도망노예단속법이 강화되자 존 브라운은 도망노예들을 무력으로 해방시키는 비밀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제정 이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캔자스로 이주하여 '피흘리는 캔자스'의 혼란 속에서 폐지주의자 민병대를 이끌고 노예주들과 유혈충돌을 벌였다. 이때 포타와터미에서 포로로 잡은 노예 사냥꾼 5명을 살해하면서 악명을 높이기도 했다. 오사와터미에서는 친노예제 민병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하여 패하고 마을이 약탈당하고 불태워지기도 했다.

캔자스에서 양측 민병대가 해산 명령을 받은 뒤 존 브라운은 노예제 자체에 대한 무장 투쟁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는 오랜 준비 끝에 비밀 지원자들을 모집하여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했고, 1859년 10월 아들들과 지지자들을 규합해서 하퍼스 페리의 연방정부의 무장창을 습격, 점령하였다. 브라운의 계획은 근처의 흑인노예들을 연방군 무기로 무장시켜 대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지만, 브라운의 동료들의 머릿수 자체가 20명 정도에 불과했을 정도로 너무 적었고, 지나가던 기차를 막았다가 그냥 보내 주면서 반란 정보가 곧바로 전신으로 알려져 버렸다. 브라운과 지지자들은 연방군에 포위당해 절반이 전사했고 브라운을 포함한 생존자들은 체포당했다.

브라운의 습격 자체는 어설프게 실패했지만, 브라운을 진정으로 유명하게 한 것은 전국적으로 중계된 그의 재판이었다. 버지니아 주지사 헨리 와이즈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브라운은 버지니아주에 대한 반역 혐의로 재판받게 되었다. 변론 과정에서 그는 그를 광인이라고 매도하던 일부 주장과 달리 이성적이면서도 기독교 윤리에 기반한 열정적인 태도로 노예제를 공격했다. 버지니아주 법원은 그에게 빠르게 사형을 선고했다. 주법에 따라 사형 선고부터 집행까지는 한 달의 간격이 요구되었고, 브라운은 인생 마지막 한 달 동안 전 세계의 폐지주의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활발하게 교류했다. 무력으로 브라운을 탈출시키려 하거나 빅토르 위고 등이 브라운의 사면을 요청하려 하는 등의 시도가 있었지만 브라운은 이를 모두 거부했다.

브라운은 미국에서 반역죄로 사형당한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브라운이 사형당한 당일 북부 여러 도시에서는 조기를 내걸었고 교회에서는 조종을 울렸다. 북부에서 브라운이 순교자 취급을 받는 것을 본 남부 노예주들은 '북부 자유주들이 흑인 노예들을 자극해서 인종 대전쟁을 일으켜 우리를 다 죽이려고 한다.'라는 의심병이 더 심해졌다. 브라운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암살 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노예제 갈등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북부 자유주들과 남부 노예주들이 반목하면서 대망의 1860년 대선이 열린다.

4.6. 1860년 대선 - 링컨의 당선

1850년대 초까지 주요 양당이었던 미국 민주당과 미국 휘그당에서도 남부계와 북부계의 분열이 극심했으나, 민주당이 스티븐 더글러스가 어정쩡하고 어중간하게나마 중도 노선을 취할 수 있었던데 반해 휘그당은 에이브러햄 링컨 등이 탈당하여 신생 공화당에 입당하는 등 당 자체가 와해 위기로 몰리기에 이르렀다. 1856년 선거에서는 민주당, 미국당, 공화당의 3파전이 벌어졌다. 휘그당은 일단 존재 자체는 남아 있었으나 대부분의 세력이 공화당으로 빠져나갔고, 단독으로 대선 후보조차 내지 못해 반이민, 반가톨릭 미국당의 밀러드 필모어 후보를 공동으로 지지해야 할 정도로 몰락했다.

1856년 선거, 1858년 선거를 거쳐 미국당(무지당)이 몰락하고 1860년에는 공화당 vs 민주당의 구도가 되었는데 당시 신생 공화당은 북부 지역당이었다. 정확하게는 확고한 이념을 가진 정당이라기보다는, 망한 휘그당, 반이민자 성향의 무지당, 반노예제 자유토지당 등 서로 성향이 다른 정치집단들이 단지 '반노예제, 남부 노예주들의 횡포 타도'를 위해 뭉친 연립정당(Coalition)에 가까웠다. 공화당에서는 서로 다른 계파에 속한 여러 대선 후보들이 경쟁했고,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 온건파 에이브러햄 링컨이 선택되었다.

공화당에서도 온건파였던 링컨은 바로 노예제 폐지를 공약하진 않았지만 개인적인 신념은 노예제 폐지였다고 볼 수 있다. 공화당은 미 헌법이 중앙정부가 노예제가 현재 이미 존재하는 지역들은 간섭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되, The Northwest Ordinance 등 사례를 들면서 연방정부가 아직 주 정부가 성립되지 않은 연방정부의 땅들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반 노예제 당으로써 현재 연방정부 땅에서는 노예제를 폐지하겠다라는 것을 공약으로 삼았다. 즉 공화당의 목적은 노예주들이 정치적으로 앞으로 우위에 설 수 없게 정치적 사형선고를 내림과 동시에 장기적으로 노예주들을 자유주들로 둘러싸서 노예주들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노예제를 포기하도록(put it in course of ultimate extinction) 만드는 것이었다. 이 당시 링컨 및 공화당의 입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헌법적으로 이미 노예제가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 노예제를 폐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부로 노예제의 확장을 막는 건 연방정부가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자유주들에게 둘러싸인 노예주들은 노예제라는 시스템의 약점 때문에 차례대로 알아서 무너질 것이다.'[32]

한편 민주당은 북부와 남부 간에 의견 통일이 안 됐다. 북부 민주당은 노동자들의 당이자, 아일랜드 이민자들 및 해외 이민자들의 당이었다. 이들은 노예제에 대해서 소극적 지지 혹은 현상유지에 가까웠고, 관심은 대륙횡단 열차 등 경제적인 곳에 더 많았다. 물론 노예제를 선거에 써먹지 않은 건 아니라서 공화당을 '흑인 공화당'이라고 비난하고 집요하게 북부 백인들의 백인 우월주의에 호소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남부 민주당에게는 이것조차 부족했다. 남부 민주당, 실질적으로 강경 노예제 찬성론자들이자 남부주 분리독립론자들('Fire-Eaters')은 북부 민주당의 소극적 지지가 아니라 완전하고 적극적인 노예제 지지를 원했다. 그런데 남부 노예주들의 횡포가 너무 심해서, 북부에서는 아무리 보수적이라고 해봤자 이미 '자유주의' 사상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노예주 지지는 인기가 없었다. 이런 민주당 남부와 북부의 차이로 인해 민주당의 패배는 이미 예정되어 있던 수순이었다.

북부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러스가 끝까지 어정쩡한 위치에서 어물적대자 폭발한 남부계 민주당이 존 C. 브레킨리지(John C. Breckinridge)[33]를 따로 후보로 내놓는 등 대분열이 일어났다. 구 휘그당 세력 중 남부에 동정적이고 연방의 현상유지를 주장하는 입헌연합당(Constitutional Union Party)의 존 벨(John Bell)이 남부에서 브레킨리지와 대결하고, 공화당의 에이브러험 링컨이 북부에서 북부민주당의 더글러스와 맞서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선거 결과 공화당의 링컨이 북부지역의 표만 가지고 39.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렇게 공화당의 링컨이 남부주에서 선거인단을 단 1명도 얻지 못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선을 이기자 남부주 주민들은 권력의 추가 남부에서 북부로 넘어갔음을 느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공화당 같은 북부의 공세에 노예제가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느끼며 전율하게 되었다.

4.7. 남부(딥 사우스) 주들의 연방 탈퇴 및 남부연합 수립

상원의장 각하,[34] 저는 미시시피 주의 주민들이 모여 내린 엄숙한 결단에 의거해, 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확보하였음을, 의회에 공표하기 위하여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I rise, Mr. President, for the purpose of announcing to the Senate that I have satisfactory evidence that the State of Mississippi, by a solemn ordinance of her people in convention assembled, has declared her separation from the United States.)
제퍼슨 데이비스, 미국 의회에서 미시시피 주의 연방 탈퇴를 선언하며(1861년 1월 21일). #출처
그리고 이에 따라 남부에서는 링컨의 인형을 불태우면서 연방 탈퇴의 여론이 빗발치고 있었다. 이미 의석수도 북부 공화당에게 뺏긴 상황에서 민주당은 분열되고 대통령직까지 공화당에 넘어가게 되자 불안을 느낀 남부 주들에서는 연방 탈퇴론이 득세하여 1860년 12월 전부터 툭하면 연방 탈퇴한다고 징징대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결국엔 가장 먼저 연방을 탈퇴하였고 뒤이어 조지아, 플로리다,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텍사스[35]가 연방을 탈퇴하여 1861년 2월 4일, 제퍼슨 데이비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2월 8일, 기존의 미 헌법에서 본을 딴 헌법을 제정하여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를 수도로(후에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로 이전) 아메리카 남부맹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36]의 건립을 선언하였다. 남부연맹의 초기 7개 주는 모두 대선에서 브레킨리지와 남부민주당을 지지한 주들, 그 중에서도 미국 동남부에 치우치고 농업과 노예제에 의존적인 경제를 가진 주들이었다.

이들 남부주들은 링컨이 대통령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적극적으로 연방정부의 조폐국에 있던 금을 훔치고, 연방정부의 항구와 요새들을 점령하며, 친 연방정부 성향의 정치인들을 폭력으로 쫓아내는 동시에 군대를 모집하는 등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그리고 미국 부통령이었던 존 C. 브레킨리지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자 대통령 앞에 사표를 제출하여 부통령 직에서 사퇴하고 남부에 가담하였다.[37]

이에 링컨은 첫 번째 취임식 연설에서 남부 노예주들의 명백한 반란활동들은 무력을 불사해서라도 진압할 것을 경고하면서도, 헌법적으로 본인은 남부 내의 노예제에 대해서 간섭할 생각이 없으니 연방으로 돌아오라고 남부 노예주들을 설득하려 시도하나, 결국 같은 취임식 연설에서 링컨이 연방 영토 내의 노예제 폐지에 대해서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타협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남부 노예주들이 원하는 건 최소한 연방영토에서 노예제가 허용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 자기들처럼 북부도 스스로 노예제 문제에 대해서 언론 통제하는 걸 원했다.

이 두 포지션은 양립이 불가하였고, 남부연맹측이 연방정부의 영토였던 섬터 요새를 포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된다.[38]

4.8. 섬터 요새 전투: 전쟁의 개막

"갈라진 집안은 바로 설 수 없다"며 강력한 연방 유지파임을 천명했던 링컨은 취임식에서 남부에 대해 탈퇴를 취소할 것이며 불응시 무력사용을 불사하겠다는 경고를 보냈고, " 우리 깃발에서 별이 하나라도 줄어드는 일이 벌어진다면 난 죽어버리고 말 테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39] 여기에 반발한 남부는 자국 내 연방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국내의 연방군 요새와 병기창 등을 차례로 무력점령한다. 하지만 그 중 한 곳의 요새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였으니 바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항 인근에 있는 섬터 요새의 연방군이었다. 본래 찰스턴 항에 기지를 두고 있던 이들은 남부연합의 민병대가 빠르게 다른 연방군 요새들을 점령하기 시작하자 가족들을 북부로 돌려보내고 섬터 요새로 들어가서 농성을 벌이기 시작한다. 남부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웨스트포인트 교장이었지만 고향 루이지애나가 남부로 붙자 남부 연합에 가담한 P. G. T. 보우리가드 준장을 보내 이들을 포위, 철수를 압박하도록 하였다. 뷰리가드 준장은 섬터 요새의 연방군 지휘관이었던 로버트 앤더슨 소령의 제자였기 때문에 여러차례 사절단을 보내 철수할 것을 권고했으나 앤더슨 소령은 거부한다. 하지만 앤더슨 소령과 섬터 요새의 영웅적인 농성에도 연방군은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북부 언론이 앤더슨 소령의 농성을 띄우고 있을 때 백악관에서는 섬터 요새를 포기할지 유지할지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오갔다. 문제는 섬터 요새가 강 한가운데 위치해있고 남군이 포병대로 포위하고 있던 터라 보급선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보급선을 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군 선박을 같이 동원해야 했는데 잘못하면 이는 남부에게 전쟁을 도발하는 행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뇌부 인사들은 철수를 주장했다. 하지만 링컨 대통령의 강한 의지로 소수의 해군 병력을 동원하여 보급을 강행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통보한다. 당연히 이를 들은 제퍼슨 데이비스는 북군이 보급을 받을 경우 지속적으로 농성도 가능해지고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남부의 위신이 떨어지기에 강공을 지시하였다. 결국 1861년 4월 12일 연방군 해군의 접근을 감지한 남군이 04시 30분을 기점으로 포격을 실시하며 남북전쟁이 발발한다.[40]

이때 섬터 요새에서의 에피소드 하나. 섬터 요새는 남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워낙 요새가 튼튼해서 사상자는 없었다. 하지만 탄약이 다 떨어지고 요새도 크게 파손되자 연방군 지휘관인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요새를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요새를 포기하는 대가로 북군 병력이 무사히 철수하는 것을 남군에게 허락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깃대에서 성조기를 회수하며 연방군 포대가 예포를 발사했는데, 이때 폭발 사고가 나서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는 등 연방군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남북전쟁의 최초 사망자는 교전이 아닌 폭발 사고로 인한 것이라는 특이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요새와의 교전에서 남군의 피해는 전무했다). 참고로 교전으로 인한 최초의 사망자도 연방군이다.

4.9. 전쟁 발발 이후 중남부 지역의 동향

전쟁이 시작되자 링컨은 아직 연방을 탈퇴하지 않은 남부 주들을 포함해 모든 주들에 남부 반란 진압을 위한 민병대 소집을 요구했다. 이에 반발하여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아칸소가 남부에 가담하게 되었으며,[41]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는 곧 신생 남부연합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노예제 허용주들이 남부로 간 것은 아닌데 버지니아의 서부( 웨스트버지니아), 델라웨어 주,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는 연방에 잔류했다. 이렇게 연방에 잔류한 노예제 허용주를 '경계 주'(border states)라고 부른다. 마침 이들 경계 주는 정치적 의미 뿐만 아니라 실제 지리적으로도 기존 연방과 남부연합의 경계에 속했다.

앤드루 존슨의 지역 기반이기도 했던 테네시주 동부의 경우 버지니아주 서부와 비슷한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으로, 연방 탈퇴를 반대하는 주장이 우세했다. 링컨은 이들을 지원하고 웨스트버지니아처럼 연방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으나, 워낙 교통이 불편하고 남부연합 지지파에 둘러싸인 지역이어서 연방군의 지원이 닿기가 매우 어려웠다. 결국 남부연합은 1863년 중반까지 동부 테네시를 세력권으로 두는 데 성공했고, 게릴라 전투와 연방 지지파 테네시인들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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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이 북부, 붉은색이 남부. 연보라색은 연방에 잔류한 노예제 허용주인데 이를 경계 주(Border States)라고 한다. 흰색은 아직 주로 승격되지 않은 영토(Territory)로서, 인구가 많지 않고[44] 산업기반도 그리 발달하지 않은 지방이다.

파일:attachment/남북전쟁/civil_war_map.jpg
좀 더 정확한 지도. 정확히는 1863년 웨스트버지니아가 분리되고 1864년 네바다 주가 승격된 최종 국면의 지도다.

4.10. 남부에 가담한 주들

당시 미국의 34개 주 중에서 11개 주가 이탈하였다. 상술한 대로 모든 노예주가 이탈하지는 않았고 연방에 잔류한 '경계 주'도 있었다.

최초의 7주
주기 이름
파일:사우스캐롤라이나 주기(1861-1910).svg.png 사우스캐롤라이나
파일:미시시피 주기(1861-1865).svg.png 미시시피
파일:플로리다 주기(1861).svg.png

파일:플로리다 주기(1861-1865).svg.png
플로리다[45]
파일:앨라배마 주기(1861, 앞면).svg.png
(앞)
파일:앨라배마 주기(1861, 뒷면).svg.png
(뒤)
앨라배마
파일:조지아 주기(1861,_red).svg.png 조지아주
파일:루이지애나 주기(1861년 2월).svg.png 루이지애나
파일:텍사스 공화국 국기(1839-1879).svg 텍사스

남북 전쟁 발발 이후 가담한 4주
주기 이름
파일:버지니아 주기(1861-1865).svg.png 버지니아주
(없음)[46] 아칸소
파일:노스캐롤라이나 주기(1861-1865).svg.png 노스캐롤라이나
파일:테네시 주기(1861).svg.png 테네시

명목상 가입한 2주: 켄터키, 미주리

5. 전개

파일:external/www.civil-war-journeys.org/map_of_civil_war_battles.htm_txt_civil_war_map.gif

푸른색 땅이 북부(미합중국), 회색 땅이 남부(미연합국) 영역이다. 흰색 선 및 파란 글씨로 표시된 것이 북군의 작전 및 기동, 붉은색 선 및 붉은 글씨가 남군의 작전 및 기동을 나타낸다.

5.1. 미합중국(북부연방)

파일:미국 국기(1861-1863).svg
United States of America
1861년 7월 4일~1863년 7월 3일 국기[47]
북부, 곧 미 연방은 정부조직이 이미 잘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체제에 익숙해져 있었고 따라서 의사결정이 신속하고 유연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그래서 물자 동원도 훨씬 수월했다. 국력도 공업의 발전으로 전쟁물자 생산에서 우세했는데 당시 총기생산량의 97%가 북부에서 나왔다. 여기에 힘입어 북군은 미니에 탄 등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을 많이 도입하여 더 우월한 무장을 갖출 수 있었다. 반면 남군은 총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를 갖추는 데에 애로점이 있었다.

여기다 전쟁 중에 4,000km 이상의 철도를 가설했고, 기존의 철도망도 계엄령을 통해서 국유화를 실행한 결과 잘 갖추어진 철도망과 효율적인 운용 덕분에 병력이나 물자 수송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인구의 측면에서도 압도적이라 농업이 주 산업인 남부보다 식량 생산량이 많았고 인구는 2배 넘게 차이가 났으며 자유민만 따지면 4배나 차이가 났다. 당시 북부의 농장들에는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콤바인이 도입되었으며 덕분에 주요 노동 인구였던 남성들이 군대로 빠져나갔어도 남은 여성들만으로도 충분히 농업 활동이 가능하여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아 전시 중에도 영국에 식량을 수출할 정도였다. 남부 또한 농업 비중이 높았고 대부분이 목화, 담배와 같은 상품 작물이었으나 식량자급을 할만큼 생산량은 충분했다. 그러나 철도망의 부족과 철도에 여러 궤를 같이 쓴 것 등 식량 수송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이는 분명히 북군에 비해 불리한 요소였다. 즉 남부가 상품작물 위주로 생산이라고 식량이 모자랐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북부가 식량 공급에 유리했다.

자유민 인구만 따져도 4:1로 연방이 우세했는데, 당시 미국의 주요 항구가 모조리 북부 손에 있었고 제해권도 북군이 장악했기에 유럽에서 넘어오는 이민자들은 전부 다 북부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미합중국 정부는 전쟁중에도 지속적으로 이민을 받았고 도착한 이민자들은 돈받고 정착하는 대가로 북군에 입대해 싸웠으므로 병력 차가 더 벌어지게 된다. 다만 이로 인해 북군의 병사의 질은 남군보다 낮았으며 이는 초반의 남군의 선전과 양측 전사자 비율 격차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민자 출신을 마구 군대에 넣어서 사기가 형편없을 것이라는 편견과는 다르게 북군의 사기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아일랜드인들 다음으로 남북전쟁에서 가장 많이 자발적으로 참전한 병사들이 독일 이민자 출신 병사들이었는데 이들은 유럽의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열렬하게 노예 해방을 지지했다. 모든 북부 병사들이 노예해방을 찬성하는 건 아니었지만, 많은 병사들이 남북전쟁을 노예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여겼다. 북부(연방)측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인 " Battle Hymn of the Republic"를 들어보면 이해가 쉽다. "As He died to make men holy, let us die to make men free."( 그 분께서 죽으시사 인류를 거룩케 하셨듯, 우리도 죽어 인류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가사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일개 병사가 고향에 '우리 군대는 우리 선조들보다 좀 더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우리는 다른 인종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같이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이고 계몽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48] 당시 북부인들은 교육 수준과 문자 해독율이 전반적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미국 특유의 민주주의(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연방)에 대한 자부심도 매우 높았다. 미 연방과 미국 독립전쟁으로 탄생한 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열기는 고향을 수호하는 남군의 전투의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도망 노예들이 북군에서 복무를 시작하자 안 그래도 우위였던 수적인 우세가 더 강화되었다. 매사추세츠 주에서 편성된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54th Massachusetts Volunteer Infantry)가 대표적인 흑인 부대였다. 이들을 다룬 영화로 1989년에 개봉한 영광(Glory, 국내개봉명은 영광의 깃발)이 있다. 와그너 요새 전투에서 54연대의 선전으로[49] 이후 흑인들의 모병이 적극적으로 시작되었고 18만명의 흑인들이 입대하여 복무하였다. 54연대는 프레드릭 더글러스[50]와 같은 당시 노예제 폐지운동계에 활동하던 유명인사들이 징집운동을 하기 위해 자원하던 것으로 유명했으며, 미군 최초의 유색인종 부사관이자 역시 최초로 유색인종으로 명예 훈장을 받은 윌리엄 H. 카니 상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의회 명예 훈장은 전쟁이 끝나고 35년이 지난 1900년에 수여되었다. 상사는 국기를 들고 돌격하였으며 적의 진지에서 저항하다 퇴각 과정에서 4발의 총탄을 맞았지만 다른 병사들을 무사히 퇴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북군에는 전쟁 시작 때 육군 16,000명, 해군은 7,600명, 42척의 전함이 있었다. 그 방대한 영토를 지키기에는 군대의 규모가 너무 적었는데, 이는 민병대 전통이 강했던 미국에서 연방 중심의 상비군은 소수만을 유지했었고, 미국-멕시코 전쟁을 끝으로 주변에서 미국에 대결할만한 강국 자체가 사라져서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기 역시 미국 독립전쟁 때 쓰던 구식조차 더러 섞여있었다. 그러다보니 얼마 전에 해외 원정까지[51] 한 국가라고 하기에는 매우 적은 군대만 존재했고 전반적으로 병력의 질이나 경험도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장교단의 질이 군사학교가 위치해있던 버지니아가 남부로 가고 남부 출신 장군들이 고향을 위해 싸우겠다며 남부로 가서 질이 떨어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래에서 후술하겠지만 웨스트포인트를 비롯해서 대부분 장교단은 2:1~3:1 비율로 북군쪽에 더 많이 남았다. 당시 상술했듯이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지 않던터라 사단이나 여단을 지휘할 수 있는 중견급 장교단에 전투경험이 없고 인맥을 사용하여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전술, 전략적 식견이 떨어지는데 정치적 대의를 부르짖으며 무리하게 기동하거나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기동했다. 또한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남아있던 육군 최상급 지휘관의 경우 나이가 너무 많았다. 북군의 최고사령관 윈필드 스콧은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해군을 활용하여 멕시코시티를 점령하는 등 굉장한 능력자였지만 남북전쟁 발발시점에서는 완전한 노인장으로 야전지휘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북군은 남군보다 장교 숫자도 많았지만 남부연합의 존스턴, 보우리가드, 리, 잭슨같은 명장들에 비해 적극적인 전술구사 능력이 매우 떨어졌었다. 하지만 육군과 달리 해군 장교진은 북군이 압도적이었다. 대부분의 원로 장교들이 남부 해군이 아닌 북부 해군에 잔류했었고 그 덕에 중공업 산업시설을 기반으로 찍어낸 해군을 통해 효과적인 봉쇄작전을 계획할 수 있었지만 전쟁초기 주요 해군기지인 노퍽이 남군에 넘어가며 다수의 주력함을 자침해야했다. 객관적으로 남부보다 국력이 우세했지만 연방도 전쟁 준비가 안 되었고 그 우세를 전쟁에서 실제로 가용하게 동원하려면 시간이 걸렸기에 전쟁 발발 시점에선 남부에 비해서 딱히 우세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북군 장교단의 진짜 문제는 정치군인의 존재였다. 링컨은 북부의 여러 정치 세력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야전군사령관과 같은 고위 직책에 군사 경험이 없는 정치인 출신 인물들을 임명하는 일이 많았고, 이들은 거의 항상 무능한 지휘로 북군의 수적 우세를 말아먹었다. 하지만 이는 군사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는데, 미국의 역사적 전통 정치체제를 고려한다면 가장 민감한 권력수단인 군사력에 관해서도 지분을 보장해줄 필요가 있었다.[52] 오늘날 의원내각제 연립정부에서 정당별로 내각에서 자리를 나누어 맡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당시 인사체계가 엽관제로 운영되었으므로 군대를 포함한 여러 공직도 정당별로 분배한 것이었다. 따라서 링컨은 민주당 전쟁파나 공화당 급진파 등 자신의 반대파를 회유하기 위해서, 혹은 프란츠 사이겔(Franz Sigel) 등 일부 독일계 인사들처럼 독일인 이민자들을 징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기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남부연합측도 마찬가지여서, 대통령 데이비스와 친한 장군들을 중용하거나 경계주 주민들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정치인 출신 장군들을 임명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존 C. 브레킨리지가 있다.

북부의 목표는 연방의 재통일과 반란군인 남부의 진압이었다. 전략 목표는 명확하게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였다. 북부의 대전략은 전쟁 시작 당시의 북군 총사령관이었던 윈필드 스콧 장군[53]이 남부를 경제적으로 말려버리기 위해 입안한 소위 아나콘다 계획(Anaconda Plan)이 중심이었다. 남부의 전 해상을 봉쇄한 후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남부를 동/서로 쪼개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론적으로 매우 타당한 계획이지만 남부를 포위하기 위해 장기간의 봉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원이 많이 든다는 게 문제였다. 이에 빠르게 전쟁을 끝낼 목적으로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먼드가 있는 동부의 주공 방향에서 단기결전 형태의 육상 작전들이 입안되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방어용 화력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을 도외시한 공세 작전들이 입안된 탓에 전쟁을 초기단계에 해결할 희망이 불런 전투에서의 패배로 막혀버리고 점점 더 지지부진하게 끄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 계획은 나중에 스콧의 뒤를 이은 조지 B. 매클레런(George B. McClellan)[54]이 실행에 옮겼으며, 이로 인하여 남부의 수출/수입량의 95%가 막혔다. 정리하면 동부에서 적극적인 공세로 남군의 주력을 붙들어 매면서 수도인 리치먼드를 공략하는 동시에 연방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방어하고, 서부는 대전략의 핵심으로 서부 남부주들의 물자가 동부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 한편 서부의 주를 탈환해서 남부의 전쟁 수행 역량 자체를 감소시키는 데 있었다.

수도인 워싱턴 D.C.가 최전선에 근접하다보니 남군이 약간만 북진하는 것으로도 정치적, 군사적으로 위기에 처한다는 게 전략적으로 약점이었다. 다만 여기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 워싱턴 D.C.가 최전선에 근접하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안전했다. 남북전쟁 발발 이전부터 연방군은 이미 버지니아 북부 지역을 점령해서 요새화하고 있었고, 남군은 이 북부 지역의 방어선을 뚫는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남군은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쪽으로 우회해서 워싱턴 D.C.를 포위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앤티텀 전투와 게티즈버그 전투도 이 과정에서 벌어졌다.

5.2. 미연합국(남부연합)

파일:아메리카 연합국 국기(1861-1863).svg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1861년 11월 28일~1863년 5월 1일 국기[55]
아메리카 연합국, 일명 남부연합은 태생부터가 주의 발언권과 자주성에 의거해 탈퇴한 주들이 모여 결성된 만큼 각 주들의 발언권이 상당히 강력한 지방자치제 국가였다. 이로 인해 새로 구성된 정부조직은 주 정부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기 어려웠고 아예 주 정부들이 중앙 정부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가령 애틀랜타가 북군에 포위당했을 때 과감하게 포기하지 못하고, 그때까지 잘 먹히던 '상대방을 자신들이 구축한 진지로 끌여들여 조금씩 피해를 주던 방식'을 버린 다음 전면적인 역공을 강행해야 했다.[56] 그래서 남부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이를 조정하고 남부 정부의 지침을 확정하느라 고생 좀 해야 했다. 허나 그렇다고 이 사람이 일을 잘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전쟁 중에 일부 장군들만 편애하고 일부 장군들은 싫어하는 성향을 보이면서 전쟁을 말아먹었다.

남부는 영토도 인구도 북부에 밀리는 데다가 노예제도를 통한 목화농업 위주의 사회였던 탓에, 생산력도 빈약했고 군수물자 생산도 어려웠다.[57] 농업 생산력에서는 당시 남부가 (풍부한 일조량과 높은 기온 등 대체로 농업에 유리한 기후조건을 기반으로) 민수와 군수를 불문하고 자체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충분했으므로 크게 불리한 처지는 아니었으나, 이 생산력을 전쟁 수행 능력으로 전환하는데 필수적인 수송역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58] 특히 북군이 점점 활발한 공세에 나서고 남군의 보급로를 적극적으로 타격하여 차단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농업 기계화가 북부와 비교하면 거의 안되다시피 해서 남성들을 대량으로 징병하면서부터 식량 생산량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래도 부족한 철도망은 상당수가 농지와 수출항을 연결하는 노선 위주로 건설되어 주간 보급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궤간마저 표준화가 안되어서 표준궤 광궤가 섞여 있어 그 종류가 4개에 달했으며, 그 부작용으로 철도 활용능력이 떨어졌다. 하필 궤간이 바뀌는 지역이 남군의 최전방으로 가는 경로의 중간이었는데,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려고 할 때마다 중간에서 궤간이 바뀌어서 환승하느라 시간을 다 까먹는 바람에 타이밍을 계속 놓쳤다고 한다. 또 북부는 철도의 효율성을 위해서 철도를 국유화했지만 남부는 전쟁 전처럼 민간에게 맡겼던지라 효율성이 떨어졌다. 전쟁 중에는 철도를 추가로 까는 것도 겨우 600km 정도에 그쳤다.

북군 병사들이 커피, 베이컨밖에 없는 단조로운 짬밥을 두고 배부른 불평을 하고 있을 때,[59] 남군 병사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셔츠를 물어뜯고 있어야 했다.

보급이 이토록 절망적인 데다 설상가상으로 공업화가 덜 되었던 사정 탓에 남군은 식량이나 무기 뿐만 아니라 모든 물자가 부족했고 있는 것들마저 뒤죽박죽이었다. 남군 하면 흔히 떠올리는 회색 군복은 대부분 지급품이 아니라 병사 개개인이 스스로 마련한 것들이었고 아예 군복이 아닌 민간인 복장에 계급장만 부착하고 참전한 군인도 있을 정도였다. 군화도 지급받지 못한 채 자비로 마련하거나 맨발로 가야 할 지경이라, 북군의 보급부대를 습격했을 때 장병들 모두 군화가 있는지 찾아다녔을 정도였다.

군대도 이미 조직이 된 북부와 달리 새롭게 구성해야 했으며 기병의 경우 말 주인이 자기 소유의 말을 가지고 참전하는 등 민병대적인 성향도 강했다. 특히 남부 사회는 ‘민병대(Militia)’의 전통이 강한 탓에, 군은 스스로 자원해서 가는 곳이었지 억지로 끌려가는 곳이 아니다보니 초반에는 징병조차 힘들었다. 당시 싸우고 있던 지원병들도 1년 복무를 조건으로 군에 자원한 것이었다. 병력 부족을 느낀 남부 정부는 1년 병사들이 만약 복무를 연장하면 60일 휴가와 50달러의 급료를 주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부대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부대장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자 병사들이 당연히 기병이나 포병 등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부대를 골라 가고, 엄격하고 유능한 지휘관보다는 친근하지만 무능한 지휘관을 선출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결국 3월 28일에 대통령 데이비스는 남부 의회에 징집령이 포함된 법안을 상정하였는데, 대다수의 의원들은 이 법안이 주(州)들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의사를 표할 정도로 중앙정부가 주정부를 통제할 힘조차 없었음을 반증한 것이다. 물론 상황이 절박해서 의원들도 할 수 없이 대통령의 법안에 동의하여 1862년 4월 16일, 징집법안이 남부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 징집령으로 1861년에 32만 5,000명이었던 남부의 총병력은 45만으로 늘어났다. 물론 대리인을 세울 수도 있고, 일부 직업인들은 징집에서 제외시키는 예외 사항을 두는 바람에 돈 많은 부자들이 징집을 피하고[60] 특정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학원’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있었지만, 이 징집령은 남부의 절박한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침략자 북군을 물리쳐서 자기 주와 노예제를 지켜야 한다"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는 높은 편이었다. 거기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유럽에 비해 낙후된 국가여서 측량에 의한 정확한 지도가 부족했으므로, 남부 측이 고향을 방어하는 처지에서 지형지물을 이해하는 수준도 높았다는 것도 강점이었다.

남부에 나름 전통있는 군사학교 등이 위치한 버지니아가 가담하였고 따라서 각 사관학교 출신들이[61] 고향을 지킨다는 이유로 돌아갔을 때 남부가 더 장교단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건 사실이 아니다. 북측이나 남측이나 모두 장교진들은 대부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더 많은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들이 북부(연방)측에 가담하였고, 장교의 질이나 장교의 숫자나 북부가 훨씬 우세했다. 예로 최고참 장성급들 중에서 7명 중 5명이 북부편이었고, 2명만 남부편이었다. 다만 이들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62] 실질적으로 복무한 사람들은 1~2명밖에 안 되고 그나마도 죄다 남북전쟁 도중에 죽거나 은퇴한다. 참모진들은 10명에 8명이 북부편이었고, 그 중에서 2명만 남부편이었다. 남부연맹 측의 이 2명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국-멕시코 전쟁 때부터 활약한 로버트 E. 리[63]였고 다른 하나가 패장이라는 이유로 남부 팬덤에게 평가절하당하는 조셉 E. 존스턴[64]이었다.

그렇다면 총 장교들 숫자를 살펴보자. 웨스트포인트, 버지니아 군사대학 등을 포함한 군사학교 졸업생들 중에서 남부측에는 약 280명, 그중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은 184명이 가담했고, 북부측에는 809명, 웨스트포인트 출신은 640명이 가담했다. 즉 고위 영관급 사관급 장교진만 보더라도 북부측이 훨씬 많았다. 대신 위관급이나 부사관급 등 하급장교들은 버지니아 군사대학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이들의 대다수가 남부 측에 붙었다. 그러나 북측에서도 버몬트에 위치한 노리치 대학교[65]가 있었으며 600명 이상의 하급장교들을 배출했다.

그리고 북부의 장교단에는 교육자나 정치가, 사업가 등이 비교적 많았다. 중간에 연방군 총사령관이 되는 매클레런은 철도 기술자 경력이 있고 제20 메인연대를 이끌었던 조슈아 체임벌린은 보든 칼리지의 대학교수였다. 이렇게 개전시점에서 종전까지 장교단조차 질적으로든 숫적으로든 북부가 남부보다 밀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국가 체급이나 국력의 단순비교로는 남부가 크게 열세에 있었지만, 개전 초기 전략적 상황에서는 오히려 남부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북부의 목표는 남부연합에 가담한 13개 주 반란의 완전 진압인 반면 남부의 목표는 연방에서 독립하여 아메리카 연합국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북부 입장에서는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는 물론, 반란을 지속하는 다른 주들까지 하나 하나 다 진압하고 평정해야 할 막중한 부담이 있었지만, 남부의 경우 북부 여론과 엘리트들이 지쳐서 남부의 분리를 받아들일 때까지 버티면서 북부를 물먹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대전략이나 전략목표 설정은 부실했는데, 전반적으로 "고향에 쳐들어 온 양키"를[66] 각 주, 각 지방에서 격퇴하고 고향을 지키는 형태의 자치방위 작전이 주로 이루어졌다. 북부의 영토를 공격하는 북진의 경우 각 주의 자주권을 내세우며 독립한 남부의 정치적 성향상 북부의 다른 주를 침략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도 있었고 다른 주의 주권을 침탈하는 점에서 남부연맹 성립의 명분과도 어긋났다. 게다가 남부의 주들은 전쟁 이전에 북부의 주들과 교류가 있었다. 심지어 전쟁 도중에도 남부와 북부 사이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초반에 남군의 선전으로 남군이 주도권을 가져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주도권을 우월한 국력을 가진 북부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리가 감행한 북진을 위한 두 차례의 전략 기동이 앤티텀 전투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각각 막힌 뒤로 전략적 우세를 점하지 못하였다.

상대적으로 형태를 갖춘 남부의 대전략이라면 역시 북진하여 북부 본토에서 연방군 주력을 격파, 북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끊겠다는 리 장군의 전략인데, 결과론적이지만 남군의 보급사정이나 남부 사정을 무시한채 진행한 지나치게 무리한 계획이었다는 비판 또한 존재한다. 리는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포토맥 남쪽에서 싸울 때는 북군에게 훨씬 나쁜 교환비를 강요했지만, 북진했을 때는 그 입장이 반대가 되어 훨씬 수월한 정보와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건 북군이었고 보급면에서도 우월한 북군에 고전을 면치 못해 안 그래도 보충이 쉽지 않은 피같은 병력을 소모했다. 리가 완승을 거둔 경우에조차 북군 주력 포토맥군의 괴멸이라는 목표는 항상 이루어지지 않았고, 포토맥군은 패배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증강되어 돌아왔다. 또한, 리와 북버지니아군의 북진은 국가적 차원의 대전략이 되지 못해 다른 남군 장군이나 군단급 이상 제대의 도움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서부전선에서 남군이 연전연패, 각개격파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특히 1863년 게티즈버그 전역에서 리의 남군은 서부전선에서 빅스버그에 포위된 남군이나 중부 테네시의 남군에게 지원될 수 있었던 병력이 리의 요구로 동부전선으로 돌려진 것이었기 때문에 패배의 충격이 더 컸다.

남북전쟁은 북군은 200만 넘게, 남군은 100만 가까이 동원된 총력전이었으니 끝없는 소모전이 벌어지면 결국 말라죽는 것은 남부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남북전쟁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터진 내전으로 국민들의 전쟁 지지 여론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는 반론도 강하다. 전쟁 기간에도 2년을 주기로 한 양원 선거, 4년을 주기로 한 대통령 선거는 계속 이루어졌으며, 선거에서 전쟁 반대파가 승리한다면 북부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애틀랜타가 함락되어 서부전선에서 남군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1864년 대통령 선거 직전 상황에서조차 매클레런은 공화당과 전쟁민주당이 연합한 링컨을 상대로 45%나 되는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바로 리 본인이 북버지니아군이 한참 약해지고 피터스버그에 틀어박힌 상태에서도 소모전으로 절반에 가까운 북부인들을 전쟁 반대파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방어전으로 우세한 교전비를 계속 유지하여 북부의 반전여론을 자극하고 유리한 평화조약을 맺고 종전하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인 목표가 아니었고, 돌이켜 보았을 때 오히려 남부의 최종 목표인 종전과 독립에 가장 가까운 전략이었다. 이렇게 국력이 약한 국가가 소모전을 유도하여 독립을 쟁취한 아주 가까운 사례가 있었는데, 바로 리의 먼 친척인 조지 워싱턴이 지휘한 미국 독립 전쟁이었다. 워싱턴은 아메리카의 파비우스로 불릴 정도로 파비우스 전략을 활용하여 훨씬 강한 영국군을 상대로 미국의 독립을 이끈 바 있다. 또한, 전쟁 당시 남군에서도 제임스 롱스트리트나 조셉 E. 존스턴처럼 공격적인 북진에 반대하고 대신 서부전선을 지원하며 병력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 장군들이 있었다. 결국 서부전선에서 북군이 계속 성과를 내며 영토와 인구를 탈환하고 남부연합을 무너뜨린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게티즈버그 직후 급하게 서부로 보내진 롱스트리트의 지원군이 치카모가 전투에서 남군이 승리하는 데 기여하며 일시적으로나마 북군의 서부전선 진군을 막는 데 성공했음을 생각하면 이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남부연합의 국력과 병력이 북부에 미치지 못했고 남군 내부적으로도 의견이 통일되지 못한 점은 분명히 있지만, 리의 공세적인 북진 전략 자체도 학계와 일반인 양쪽에서 비판받는 일이 많다.

하지만 결국 전쟁의 양상은 바로 그 소모전대로 흘러갔다. 당장 북군은 남군의 배나 되는 병력이 동원되었고, 공업력과 철도를 통해 끊임없이 남부에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다. 애시당초 내전의 성격을 띠고 있으니 인기가 있을 리 없는 데도 결국 링컨은 재선에 성공했다.[67] 즉, 초반에 남부가 아무리 전쟁에 유리했다고 해도 결국은 말라죽을 상황이라는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병력을 보존해서 남부 각지에 분산시키는 전략이야말로 각개격파당하기 딱 좋다. 애시당초 남부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로버트 E. 리같은 유능한 장군이 있어서 북군이 남부 핵심 지역으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기 때문이지 단순히 각지를 방어하는 전략만으로는 승리하기 어렵다. 리가 공세적인 북진 전략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북부에는 위기 자체가 오지 않았을 테고 더 쉽게 각개격파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68]

물론 결국 앤티텀과 게티즈버그에서 패배해서 북부를 협상으로 몰아넣을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 것도 리 본인인만큼 ‘잃어버린 대의’ 지지자들처럼 ‘리는 완전무결했는데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기도 하다. 현대 기준으로 과거를 가정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결국 리 자신이 주장한 전략을 실행한 결과 실패했으니 후세에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리의 북진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리가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공격적인 지휘로 많은 병력을 잃은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리와 서부전선 남군 지휘관들이 조금만 더 병력을 보존해서 어떻게든 1864년의 서부전선 붕괴를 막았다면 링컨을 낙선시킬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역사가들이 인정하고 있다.[69]

또한 남부의 외교술은 전쟁 초반에는 나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북부에게 뒤쳐지게 된다. 남부의 외교 전략은 바로 미국이 영국과의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를 끌어들여 영국을 치게 만들어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강대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는 꽤 그럴듯한 전략이었는데, 유럽의 강대국들은 아직은 국력은 낮지만 북부를 중심으로 공업화를 진행하면서 발전속도가 빨라지는 미국을 보며 미래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고, 이에 미국을 둘로 갈라 놓는 것이 이득일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게다가 남부 측은 전쟁 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면화 공급원으로 시장을 독점하는 중었이기에 산업혁명으로 원자재 수요가 막대했던 유럽에 실제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실제로 전쟁 초반에는 유럽 각 나라들은 남부를 응원할지 북부를 지지할지 간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남부는 이 점을 이용해 유럽 열강들, 특히 당시 세계 최대의 면 수요국인 영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국제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아 북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을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영국이 이 제안에 귀를 기울이며 먹혀드는 것 같았으나, 북부가 제해권을 잡고 윈필드 스콧이 제시한 아나콘다 작전을 통해 해상을 봉쇄해버리자 면화를 팔고 싶어도 팔 수가 없게 되어버리며 실패한다. 게다가 남부가 봉쇄되는 동안 이 틈을 타 면화 산업에 뛰어든 이집트가 남부의 면화 공급이 끊긴 틈을 타 어부지리로 대박을 치며 유럽의 면화 수요 물량을 공급해주자 유럽 열강들은 남부를 지지할 이유가 줄어 버렸다. 또한 이 시점에서는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은 노예제를 폐지한지 오래고, 이미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는 노예 제도가 야만적인 풍습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유럽에게 면화라는 실용적인 이익을 주지 못하게 된 남부의 지지 요청에 대한 대답은 날이 가면 갈수록 차가워졌고, 결국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강대국들은 전세가 천천히 기울기 시작하자 남부를 아예 못본 것 마냥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 외 유럽 열강들, 특히 엘리트 귀족사회였던 프로이센 왕국조차도 북부를 지지했다.[70] 외교적으로 불리해지자 미연합국은 패망 직전인 1865년 2월 던컨 패러 케너(Duncan F. Kenner) 하원의원을 비밀리에 영국과 프랑스에 특사로 보내 노예제 폐지를 대가로 미연합국의 외교적 승인을 목표로 하였으나, 패망 직전인 미연합국에 대해 어느 나라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남부의 외교 실패의 또 다른 원인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북부에서 옥수수를 수입하고 있었던 점도 있다. 옷감이야 아쉬운 대로 아껴쓰면 되지만 곡물이 없으면 굶어죽을 수도 있다. 영국이 수입산 곡물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곡물법을 폐지한 게 약 20년 전이라 식량의 상당수(약 20~30%)를 미국, 그것도 북부에 의존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남북전쟁 시기의 유럽은 흉년기였다. 이를 두고 농반진반으로 남부의 킹 코튼(King cotton, 목화왕)을 북부의 킹 콘(King corn, 옥수수왕)이 이겼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의외로 남부 출신이지만 북군 편을 든 연방주의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앤드루 존슨 미국 대통령이나 남군 출신이었다가 탈영해서 미시시피 주에서 존스 자유주를 만든 뉴턴 나이트의 사례가 있다.[71] 이 외에도 남부맹방의 모든 주(사우스캐롤라이나 제외)에서 연방을 신봉하는 많은 백인 주민들은 북군에 입대해서 전쟁에 참전했는데 그 규모가 10만명에 달했다.[72] 위에서도 소개되었지만 버지니아 서부 지방은 아예 웨스트버지니아로 주를 따로 만들어서 연방에 가담했다.

5.3. 동부전역

동부전선(Eastern Theater)은 현 버지니아 웨스트버지니아,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워싱턴 D.C.,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 동부 해안 일부를 그 범위로 한다. 서로 지리적으로 인접한 연방 수도 워싱턴과 남부연합 수도 리치먼드 주변의 많은 전투들, 셰넌도어 계곡 지역의 전투들이 대표적으로 포함된다. 서부전선에 비해 훨씬 그 범위가 좁지만, 수도 및 인구 밀집 지역에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격렬한 전투들이 일어났고 언론으로부터도 큰 관심을 받았다.

5.3.1. 1861년

전쟁 초반 동부 전역의 남군은 고향을 지키겠다는 열의로 모인 병사들과 명장 로버트 E. 리 장군 등으로 대표되는[73] 우수한 지휘관들의 기여 등에 힘입어 승승장구했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웨스트버지니아의 이탈을 막지 못했으며, 잭슨의 계곡 전역의 성과는 눈부시기는 했지만, 결국 북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그쳤고[74] 워싱턴 D.C.를 위협하는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특히, 반도 전역은 로버트 E. 리의 전략적 승리임이 분명하나 이 와중에 매클레런을 상대로 비슷한 병력을 가지고도 2배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다.

전쟁 초기 남군이 버지니아를 탈퇴한 웨스트버지니아를 점령하기 위해 움직이면서 전장은 웨스트버지니아 일대가 되었다. 하지만 북군은 윌리엄 S. 로즈크랜스의 지휘하에 남부 민병대의 공격을 전부 요격해내는데 성공한다. 로즈크랜스의 상관이었던 조지 매클렐런은 이후 전쟁 내내 보여주게 될 모습처럼 상대 전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소극적으로 움직였는데, 더 적극적이었던 로즈크랜스가 세운 주요 전공을 자신의 공으로 포장하였다. 이는 매클레런이 핵심 야전군 포토맥군 사령관과 연방군 총사령관까지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로버트 E. 리는 그가 지휘한 첫 번째 전투였던 치트 산 전투에서 산 위의 연방군을 포위하려 했으나 예하 부대들의 공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하였고, 대서양 연안 방위를 맡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리는 리치먼드 주변의 방어 시설을 건설하기도 했고, 언론은 그가 삽질만 한다며 비꼬았지만 리의 진지 구축은 이후 피터스버그, 리치먼드 방어전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군단급 부대들이 벌인 첫 회전은 전쟁 발발 3개월만인 1861년 7월 1차 불 런(매너서스) 전투였다.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승리를 거두며 사기가 오른 북군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맥도웰의 3만 5천 전력과 찰스타운 부근에 주둔 중이었던 패터슨의 1만 8천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점령하고 조기에 전쟁을 종결시키려 하였다. 당시 리치먼드와 워싱턴 D.C. 사이에서 남군은 P. G. T. 보우리가드 휘하 2만 3천명 규모의 병력과 존스턴의 지휘 아래 셰넌도어 계곡에 주둔하던 1만 2천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는데 북군은 수적 우세를 활용하여 이들을 꺾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력이었던 맥도웰이 이끄는 부대는 지나치게 행군속도가 느렸고[75] 찰스타운의 패터슨은 존스턴이 기습할 것을 우려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존스턴은 전쟁초기 쥐고 있던 철도를 활용하여 부대들을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한다. 북군의 기동이 지나치게 느렸던 덕에 남군은 시간을 벌었고 유능한 사단장이었던 토마스 잭슨이 뷰리가드의 우측방인 헨리 힐을 노리고 스톤 브릿지로 몰려든 북군의 맹공을 끝까지 버텨낸 것에 더해, 존스턴의 남군 지원군이 철도를 통해 도착해서 전장에 가세하며 전세를 뒤집었다. 또한 북군은 어리석게도 포병대를 남군 보병 앞에 전진배치하여 그대로 피탈당했고 당시 제복이 통일되지 않은터라 남군의 총돌격에 아군인줄 착각했다가 조기 대응에 실패하며 완전히 붕괴된다.[76]

웨스트버지니아 전역의 성공 때문에 전투 직전까지도 전쟁이 앞으로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 내다볼 정도로 전황에 낙관적이었던 연방 수뇌부는 큰 충격에 빠진다. 경제력도, 인구 수도 북부에 상대가 안되는 남부 농사꾼들의 반란이니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분위기가 충격과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전투를 구경하기 위해 소풍을 나왔던 많은 북부인들이 후퇴하는 패잔병들과 패닉 상태에 빠져 워싱턴으로 도망친 일화가 유명하다. 하지만 남군 역시 버지니아주를 침공한 북군을 격퇴하기는 했으나, 결정적인 피해를 주는데 실패했다. 이때는 양쪽 군인들이 다 경험이 부족하고 훈련이 덜 된 상태였다. 남부는 전투에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상자를 냈기에 이겼지만 북군을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하지 못한다. 남부연합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스 데이비스는 존스턴과 뷰리가드에게 공격을 촉구했지만 사상자와 더불어 때마침 내린 비로 인해 워싱턴 D.C.까지의 기동로가 엉망진창이 되며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처럼 북부, 남부 양쪽 다 충격을 받은 전투였고, 양측은 전쟁이 예상보다 훨씬 길고 잔혹해질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병력을 더 모집한다.

링컨은 1차 불 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인 8월 20일 셰넌도어군의 맥도웰 대신 웨스트버지니아 전역에서 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조지 매클레런을 재편성된 주력군인 포토맥군의 사령관에 임명한다. 매클레런은 앞선 1차 불 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사기가 떨어진 북군을 성공적으로 재건했고 의회에서도 링컨의 전쟁 정책에 지지하는 여러 법안을 통과시킨다. 11월, 매클레런은 의회에 압박을 넣어 자신과 대립하던 북군 총사령관 윈필드 스콧을 은퇴시키고 자신이 총사령관까지 겸하게 되었다. 하지만 매클레런은 여전히 남군 병력이 자신보다 많다고 믿고 있었고, 1861년의 남은 기간 내내 남군을 상대로 먼저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링컨과 행정부는 빨리 진격하라고 매클레런을 계속 압박했고, 매클레런은 부하들이나 통수권자 링컨을 무시하는 오만한 행보를 보였다. 정작 남군을 지휘하던 신중한 조셉 E. 존스턴은 워싱턴 주변까지 진격한 남군의 위치가 방어하기 불리하다고 여겨 먼저 후퇴한 뒤였다. 1862년 초 매클레런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매클레런이 10만 남군이 온갖 방어 준비를 끝마쳤을 거라고 장담한 매너서스에서는 훨씬 적은 수의 남군의 흔적과 더불어 통나무로 만든 가짜 대포(Quaker Gun)만 발견되어 매클레런은 망신을 당했다. 연방 수뇌부에서는 매클레런을 서서히 불신하기 시작했지만, 매클레런은 군 조직을 만들고 재건하는 데 있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일반 병사들도 그를 매우 좋아했으며, 정치인들과의 연줄도 있었기 때문에 해임하기 어려웠다.

한편 개전과 동시에 노퍽을 비롯한 주요 해군 거점을 상실한 북부 해군은 빠르게 포함과 장갑함을 위주로 재건을 성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윈필드 스콧이 최초 계획한 아나콘다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한다. 아나콘다 계획에 따라 연방 해군은 기존의 해군을 브라운 워터 네이비, 즉 강상해군과 블루 워터 네이비, 즉 해양 해군으로 나누었고 큰 규모의 주력함을 블루 워터 네이비에, 그리고 상대적으로 작지만 기동력이 좋은 포함들을 강상 해군에 배치하고 주요 남부 무역항과 군사항구를 공략했다. 1861년의 북부 해군 작전은 주로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등 대서양 연안의 남부 항구들을 목표로 했다. 북군은 몇몇 주요 해안 요새 및 항구를 점령하는 성과는 거두었지만, 봉쇄해야 할 해안선은 너무 길고 항구도 너무 많아 봉쇄 자체에는 한계가 있었다.

5.3.2. 1862년 초: 반도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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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북군의 동부 전역 주력인 포토맥군의 사령관 조지 매클레런은 북군의 압도적인 해상 우세를 활용, 체서피크 만 건너편의 포트 먼로에 북군을 상륙시켜 남부 수도 리치먼드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려 했다(반도 전역: Peninsula Campaign). 링컨은 워싱턴이 노출된다는 점을 들어서 반대했으나,[77] 결국 수용하게 되었다. 초기 전투에서 매우 조심스러운 성향의 남군 사령관이었던 조셉 존스턴은 방어하기 불리하다는 걸 깨닫고 지속적으로 후퇴했으며, 포토맥군 사령관 매클레런 역시 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돌격전술을 시행하기 보다는 말려죽이는 포위전술을 구사하면서 별다른 전투없이 남군은 리치먼드 코 앞까지 몰리게 됐다.

이렇게 반도 전역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남부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1862년 6월 1일, 하루 전날 벌어진 세븐 파인즈 전투[78]에서의 존스턴의 부상을 핑계로 웨스트버지니아에서는 실패했지만 더 공격적인 로버트 E. 리를 사령관으로 삼는다. 이처럼 상황은 북군에게 상당히 유리했고 제1차 불 런 전투 이후 다시 한번 북군은 남군의 주력을 격파하고 전쟁을 조기에 끝낼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매클레런은 자신이 놓인 상황을 오판하고, 9만명 규모의 남군을 2배인 20만명으로 13만명 규모의 포토맥군보다 더 많다고 생각하여 링컨에게 지속적으로 추가 병력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북군은 앞선 불 런 전투가 치러졌던 매너서스 정션에 방어군을 남기고 웨스트버지니아와 매릴랜드 일대에 분산되어 있던 병력들을 셰넌도어 계곡을 통해 움직여 풍족한 곡물지대를 점령하면서 리치먼드 동쪽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포토맥군과 함류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앞서 제1차 불 런 전투에서 스톤 브릿지를 방어해낸 토마스 잭슨이 이끄는 남군이 과감한 기동을 통해 각개 기동하던 북군을 전부 요격해버렸다(잭슨의 계곡 전역). 잭슨이 워싱턴을 위협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링컨은 잭슨의 섬멸을 우선시하여 지원군의 남하를 취소시켰고, 매클레런은 지원군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북쪽으로부터 위험이 제거되자 로버트 리의 남군 주력 북버지니아군은 과감한 기동을 통해 반도 전역의 일부인 7일 전투(6월 25일 ~ 7월 1일)에서 북군에 충격을 준다. 이 7일 전투에서 남군을 과대평가하고 소극적으로 나오던 매클레런은 앞서 오판한 대규모 남군이 공세중이라고 판단하고 질서정연하게 철수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리는 과감히 북군을 공격하지만 잘 짜여진 북군 후미 대형의 방어 탓에 엄청나게 큰 피해를 입었다. 전술적으로는 남군의 피해가 더 컸던 7일 전투였지만 어쨌든 수도 리치먼드 인근에서 어느 정도 북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북군에게 유리했다. 7일 전투 과정에서 남군은 지속적으로 매클레런이 잘 만들어놓은 방어적인 진형에 저돌적인 공격을 계속 감행해서 피해가 누적된 상황이었고 북군은 여전히 수적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매클레런은 상대를 과대평가해 남군 20만명이 있으니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대규모 반격을 주저한다. 매클레런의 지지부진한 전과에 화가 많이 난 링컨은 7월, 매클레런에게 후퇴를 명령한다.[79]

5.3.3. 리의 북진: 앤티텀과 게티즈버그

북군의 포토맥군은 다시 포토맥 강 북부로 후퇴하지만, 리는 북군의 후퇴 과정에서 생긴 병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1862년 8월 2차 불 런(매너서스) 전투에서 포토맥군의 빈자리를 지키던 존 포프 휘하 북군을 격파하고 이어 북부의 메릴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리의 작전계획이 죄다 매클레런의 손에 들어가 버렸고, 초기 매클레런이 없고 토마스 잭슨이 두 배의 병력으로 포위공격을 하여 북군을 거의 다 포로로 잡은 하퍼스 페리 전투(Battle of Harper's Ferry, 1862년 9월 12~15일)를 제외하고 매클레런과 리가 제대로 붙은 사우스 마운틴 전투(Battle of South Mountain, 1862년 9월 14일)에서 매클레런이 승리하고 리가 더 많은 피해를 입으며 패배함으로써 리의 침공은 끝이 난다.[80] 그럼에도 리는 포기하지 않고 앤티텀 전투(Battle of Antietam, 1862년 9월 17일)에서 2배가 넘는 북군을 상대로 어떻게든 방어에 성공했지만,[81] 그럼에도 비슷한 수준의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만 했다. 링컨은 이에 맞추어 노예 해방 선언(1862년 9월 22일)을 선포했다. 하지만 매클레런은 계속해서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공격하지 않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유지한다. 10월 4일 링컨은 포토맥군 사령부를 찾아 매클레런에게 공격을 촉구했지만 매클레런은 무시한다. 이러한 매클레런의 태도에 이젠 링컨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이젠 매클레런의 우유부단함에 북군 총사령관이었던 헨리 할렉과 공화당 정치인들 그리고 심지어 언론이 나서서 비난을 하고 나섰다. 시카고 트리뷴에서는 도대체 어떤 악마가 포토맥군을 가로막고 있는 것인가? 대통령은 정말 누가 반역자인지 모르는 것 인가?라는 내용의 사설로 매클레런을 강도 높게 비판, 해임을 촉구했다. 언론까지 나서서 매클레런을 비난했지만 메클레런에게 링컨은 기회를 주었다. 10월 13일 리가 하퍼스 페리에 있는 지금이 기회라며 공격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매클레런은 링컨의 공격 요구를 묵살한다. 10월 26일 계속되는 압박에 매클레런은 포토맥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는데 무려 9일이나 소비하며 시간을 낭비한다. 결국 링컨은 매클레런이 전투를 치를 의도가 없다는 확신을 하고 번사이드로 포토맥 사령관을 교체하기에 이른다.

남부 정부는 메릴랜드와 켄터키 침공 등을 통해 기세를 올려 독립국으로 인정받고자 했지만, 외교적인 오판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승인을 얻는데 실패했다. 당시 남부에서 수출하는 목화는 전세계 생산량의 75%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를 빗대 킹 코튼(King Cotton)이라고 불렀으며, 남부의 외교술은 이 목화를 중심으로 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직전인 1861년에 남부에서는 목화를 많이 수입하는 영국의 개입을 노리고 목화를 수출하지 않았는데,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북부의 해상봉쇄로 인해 수출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남부의 경제력을 크게 깎아먹은 것은 물론 영국의 지지를 얻는 데도 실패해버렸다. 영국은 남부의 목화를 수입하지 못하자 이집트[82]와 인도에서 생산량을 늘리는 것으로 대응해 일시적인 목화 부족사태를 넘겼다. 또 당시 영국은 자국에서 소비하는 식량의 상당량을 북부에서 수입하고 있었는데, 만약 영국이 남부 편을 들면 당장 먹을 것이 없어질 판이었다. 프랑스는 내부 사정도 좋지 못하고 멕시코 원정을 하다가 실패한 탓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있는데, 영국 정계는 실제로 남부에 상당히 우호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미국이 분열되는 게 유리했기에 실제로 남부를 거의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국의 반노예제적 국민여론 때문에 노예 해방 선언 이후 승인이 좌절되었다. 프랑스도 당시 나폴레옹 3세 치세에서 보수화되던 시대였고, 따라서 귀족적인 남부에 더욱 우호적이었다. 다만 프랑스 혼자서는 개입이 부담스러웠고, 따라서 영국이 개입할 경우 함께 개입할 작정이었다. 결국 영국이 노예해방선언으로 개입을 포기하면서 프랑스도 개입하기가 어려워진 것이었다. "영국이 개입하면 영국과 라이벌인 프랑스가 북부 편 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역사상 거의 유일할 정도로 친밀했다. 참고로 프랑스는 미국 내전 타이밍을 노리고 멕시코에 개입하지만 별 소득 없이 물러나게 된다.

또한 북부의 외교전술도 주효했는데, 앤티텀 전투에서 남군의 북진을 저지하자마자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해 이 전쟁을 부당한 노예제에 맞서는 성전으로 만들어 영국, 프랑스가 끼어들 명분을 없애버렸다. 유럽에서는 이때 이미 천부인권 사상이 널리 퍼져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농노제, 노예제를 폐지한 상태였다. 참고로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개혁속도가 느렸던 제정 러시아의 농노 해방이 1861년.

링컨 대통령은 1862년 9월 앤티텀 전투의 승리 이후 남부에 대한 반격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포토맥군 사령관 매클레런에게 공격을 종용했지만 매클레런은 반도 전역의 실패 때문인지 피해에 민감하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862년 11월 매클레런은 앰브로즈 번사이드로 교체되지만 그는 12월 프레드릭스버그 전투에서 리의 잘 구축된 방어선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대패하며 대군의 지휘에는 소질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1863년 1월에는 '파이팅' 조 후커가 신임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는데 리는 1863년 5월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후커를 패퇴시켰지만, 리 자신의 군대도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이긴 것 자체가 기적이지만 문제는 이겨도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다. 아무튼, 리는 다시 한 번 북부로 진군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버지니아 농장들이 봄-여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북부로 진격한다. 하지만 챈슬러스빌에서 토마스 잭슨이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어이없이 전사하면서 리는 가장 유능한 수하를 잃는다.

리는 챈슬러스빌의 승리 이후 1863년 6월 3일, 워싱턴 D.C.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섀넌도어 계곡을 통해 북상했다( 게티즈버그 전역). 리는 메릴랜드를 넘어 6월 말 펜실베이니아주 요크[83]까지 북상하는데, 이는 남북전쟁을 통틀어 남군이 가장 멀리 북상한 것이었다.

리의 의도는 북군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수도 워싱턴 D.C.를 압박 포위하여 링컨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종전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하여 남부에게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려는 것이었고, 이는 경제력과 인구가 빈약한 남부로서는 북부를 상대로 결전을 시도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84] 하지만 이 와중에 리의 군대는 자유민 흑인들을 마구 잡아 노예로 팔아넘기고, 방화 및 약탈을 자행하면서 보상이랍시고 남부연합 달러를 주는 등[85][86] 전쟁범죄들을 저지른다[87]. 한편, 후커는 한참 리를 추격하는 도중 게티즈버그 전투 사흘 전에 경질되고 상대적으로 무명에 가까웠던 조지 미드가 포토맥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전역의 전환점이자, 남북전쟁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인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리의 남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남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88]

5.4. 서부전역

서부전선(Western Theater)은 미시시피강과 동부전선 사이의 광활한 내륙 지역을 모두 포함한다. 한 예로, 전쟁 말기 캐롤라이나 전역의 배경이 된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내륙 지역은 동부전선이 아닌 서부전선으로 분류된다. 미시시피강 서쪽의 전투들은 트랜스미시시피 전구(Trans-Mississippi Theater)로 따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상당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관심도 많았던 동부전역에 비해 남북전쟁의 서부전역은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나콘다 계획에 따른 서부 대전략이 충실하게 이루어지면서 남부연맹의 서부는 북부의 손에 넘어간다. 서부전역 전체를 통틀어서 남군은 의미있을 만한 승리는 단 한 번( 치카모가 전투, 1863년 9월 조지아 주)밖에 거두지 못했고, 전쟁의 승패는 서부에서 결정되었다는 견해도 많다.

개전 초기 남군은 북군보다 전략적 우위에서 전선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남군은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장군이 아칸소부터 컴벌랜드 협곡까지의 남군을 모두 지휘하는 통일된 지휘체계를 갖춘 반면, 북군의 지휘체계는 1861년 11월 시점에서 데이비드 헌터 소장 휘하 캔자스군, 헨리 할렉 소장 휘하 미주리군, 돈 카를로스 뷰엘 소장 휘하 오하이오군으로 삼분되어 있었다.[89] 그 결과 1862년 1월까지도 북군은 서부전선에서 통일된 전략적 목표에 대해서 합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남군은 통일된 지휘체계 하에 멤피스 및 오하이오 철도를 통해 군대와 물자를 수송하면서 상호지원체제를 굳혀가고 있었다.

북군은 총사령관이었던 윈필드 스콧이 계획한 '미시시피 강을 봉쇄하여 남부의 무역을 완전히 봉쇄'하는 아나콘다 작전 시행을 위해서 일리노이 주와 인디애나, 오하이오 주 방면에서 아칸소 주와 테네시 주 방면으로 공세를 가하여 루이지애나 방면에서 북상한 강상 해군과 접촉, 남부를 미시시피 강을 기준으로 반토막 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일리노이와 인디애나, 오하이오 주에서 아칸소, 테네시 주 방면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남부와의 경계주였던 미주리 주와 켄터키 주를 지나가야 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켄터키 주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앞서 노예주나 자유주냐 문제로 유혈충돌을 빚었던 미주리 주에서는 어느쪽에 붙느냐를 가지고 주민들 사이에서 심한 갈등이 벌어졌다. 미주리 주지사 클레이븐 잭슨은 연방탈퇴주의자로 남부연합에 합류하기를 원했지만 주의회의 경우 연방 잔류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전쟁 발발과 동시에 주 자체적으로 주지사 파와 주의회 파간의 유혈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상황이 악화되자 클레이븐 잭슨은 5만명의 민병대를 소집하겠다는 명령을 하달하며 미주리 주의 남부연합 움직임을 노골화했다. 그러자 북군도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세인트루이스에 주둔하던 너새니얼 라이언 준장이 53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미주리로 진입, 주지사파 민병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남부 역시 아칸소 주로의 진출로를 제공할 수 있는 미주리 주를 순순히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아칸소 주의 남군을 투입한다. 이렇게 북상한 남군과 미주리의 친 남부 민병대가 합류한 1만 2천여명의 병력이 라이언이 이끄는 5300여명의 북군을 상대로 1861년 8월 10일 윌슨스 크릭에서 격돌했다. 북군은 무려 2차례에 걸친 남군의 총공격을 격퇴하며 예상외로 선전했지만 3번째 남군의 돌격과정 중 너새니얼 라이언 준장이 전사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하였다. 이때 전사한 너새니얼 라이언 준장은 북군의 전쟁 발발 이후 첫 장성급 전사자였다. 하지만 남군도 피해가 적지 않았고 아칸소 주에서 온 남군이 그대로 아칸소 주로 복귀하면서 미주리에는 미주리 출신 친남부 민병대만 남게 되어 연방으로부터 미주리를 탈환하지 못했다. 연방군 지원 병력이 계속 미주리로 들어오면서 친남부 민병대들은 1862년 2월경 미주리에서 쫓겨났고, 3월 7-8일 피 릿지(Pea Ridge) 전투에서 남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하며 북군이 미주리와 아칸소 북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북군의 서부 방면군 사령관 존 C. 프리몬트 소장은 커다란 삽질을 저지르게 되는데 윌슨스 크릭 전투 당시 후방에서 너새니얼 라이언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고[90] 군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91] 노예주였던 미주리 주에서 멋대로 노예해방선언과 함께 계엄령을 발표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노예주였던 미주리 주의 주민들은 격렬히 반대했고 링컨 역시 프리몬트에게 해당 명령을 취소할 것을 명령했다.[92] 하지만 프리몬트는 링컨의 명령을 거부하였고 동시에 연방 내부의 노예 해방주의자들이 링컨에게 미주리 주의 노예해방명령을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링컨은 직접 프리몬트에게 명령을 내려 프리몬트의 노예해방 조건을 수정시켰으며, 프리몬트가 월권행위를 했다고 판단하여 1861년 10월 프리몬트를 서부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93] 링컨은 이 일로 공화당 급진파의 불만을 샀다.

남군 역시 실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주리 주가 북부의 손에 넘어가자 아칸소 주와 테네시 주는 본격적으로 미시시피 강과 테네시 강의 주요 요충지를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남군의 레오니다스 포크 장군이 미주리 주에서 테네시 강과 미시시피 강으로 나뉘는 분기점을 차지하여 북군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켄터키 주의 콜럼버스 마을을 점령하면서 중립을 표방했던 켄터키 주가 연방에 가담해 버렸다.[94] 이렇게 되자 남군은 당초 미주리 주에서 남하하는 북군을 저지만 하면 되었던 전략적 이점을 상실하고 켄터키 주의 북군까지 상대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1862년 초부터 남군의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할렉에 대한 끊임없는 요청 끝에 허가가 떨어지자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이끄는 북군은 1862년 2월 포트 헨리 요새, 포트 도넬슨 요새를 함락시키며 컴벌랜드 강과 테네시 강을 장악했고, 이에 포크는 열심히 요새화하던 콜럼버스를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랜트는 남군이 사용하던 철도를 끊어 상호간의 지원을 어렵게 해버렸다. 한편 이 와중에 동부전선에서 P.G.T. 뷰리가드 장군이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측으로 배속되었는데, 뷰리가드가 미시시피 강과 테네시 강 사이의 남군을 지휘하도록 임명되면서 통일된 지휘체계는 오히려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그리고 3월 11일 링컨의 명령으로 할렉이 미주리 강에서부터 테네시 주 녹스빌까지의 모든 북군을 통솔하게 되면서 오히려 북군은 그동안 나뉘어 있던 지휘체계가 통합되었다. 1862년 4월 6일, 샤일로 전투에서 피츠버그 랜딩에 포진해 있던 그랜트의 군대를 뷰리가드와 존스턴이 이끄는 남군이 기습해 막대한 피해를 입히지만 북군은 끝내 버텨내었고, 이 과정에서 혼란스러운 남군을 통제하던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이 총탄에 맞아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남군은 이튿날 그랜트가 예비대를 포함한 증원군을 투입하면서 수가 거의 배로 불어난데다가 밤사이 재정비한 북군의 반격에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95][96] 4월 8일 존 포프가 이끄는 북군은 미시시피강 중류의 남군 요충지인 10번 섬(Island No. 10)을 함락시키고 7,000여명의 남군을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같은 달 말에는 북군 해군에 의해 남부 최대의 도시 뉴올리언스가 함락되었다. 곧 빅스버그 주변을 제외한 미시시피 강 전체를 사실상 북군이 통제하게 된다. 이로써 남부는 사실상 두동강이 나고 만다.

1862년 8월에는 남군의 브랙스턴 브래그 에드먼드 커비 스미스가 연합하여 북군 돈 카를로스 뷰얼의 군대를 우회하고 켄터키를 침공, 켄터키를 남부연합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남군은 켄터키의 대립 주지사를 세우고 뷰얼을 상대로 페리빌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브래그는 앤티텀과 코린트에서의 남군 패배 소식을 듣고 후퇴를 선택했다. 이후 켄터키는 전쟁 내내 연방 소속으로 남았다. 일시적으로 북군 세력이 중부 테네시와 앨라배마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전반적인 결과는 남군의 전략적 실패에 가까웠다. 한편, 이 전역에서 굼뜬 모습을 보인 뷰얼은 윌리엄 로즈크랜스로 교체되었다.

1862년 연말부터는 빅스버그 전역에서 북군의 그랜트가 미시시피 강 유역의 마지막 남부 요새 빅스버그를 점령하기 위한 첫 작전에 나섰다가 실패했다. 한편, 컴벌랜드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로즈크랜스 휘하의 북군은 비슷한 시기 스톤스 리버에서 서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끝에 브래그의 남군 테네시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브래그는 테네시 중남부의 요충지 털라호마를 중심으로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로즈크랜스는 오랜 준비 끝에 훌륭한 기동으로 브래그를 따돌리고 1863년 7월 적은 피해로 털라호마를 점령했다. 하지만 이 전공은 빅스버그 함락, 게티즈버그 전투와 비슷한 시기였기 때문에 정부나 언론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브래그는 테네시 동남쪽 끝, 조지아 코앞의 채터누가까지 후퇴했다. 한편 6월 남군은 모건의 습격이라는 북진 교란작전을 시도해 인디애나 주 남부를 거쳐 오하이오주까지 북상했으나, 북군에 가로막혀 7월 26일 샐린빌에서 모건이 포로로 잡히면서 끝났다.[97] 모건의 습격은 남부연합에 이렇다 할 이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1863년 7월 4일, 빅스버그 전역의 빅스버그조차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함락된 빅스버그 포위전은 남북전쟁의 주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이 전투로 인해 미시시피 강 전체를 북군이 완전 통제, 간당간당하던 남부의 동/서가 단절되어 서쪽의 텍사스 아칸소 주에서 남부의 다른 지역에 지원을 해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7월 3일 동부전역의 게티즈버그 전투에서도 북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은 이를 분기로 뒤집히기 시작한다.

빅스버그 함락, 게티즈버그 전투 패배 직후에는 오히려 서부전역의 남군이 일시적으로 강화되었는데, 빅스버그가 함락되면서 빅스버그로 보내졌던 남군 지원군이 귀환하고 게티즈버그 전투 패배 이후 제임스 롱스트리트 휘하 부대가 리 장군의 북버지니아군에서 서부전역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1863년 9월 치카모가 전투에서 증강된 남군은 행운의 도움과 롱스트리트의 활약으로 로즈크랜스의 북군을 상대로 승리하지만 '치카모가의 바위' 조지 토머스 장군의 끈질긴 방어로 전과를 확대하는 데는 실패한다. 11월, 남군은 로즈크랜스를 추격하여 채터누가에서 포위하지만 그랜트와 셔먼의 지원군이 도착, 포위가 풀리고 남군이 물러나며 지금까지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딥 사우스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98]

1864년 봄, 북군 총사령관으로 그랜트가 임명되었고, 서부전역 사령관에는 그 후임으로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임명되었다. 그랜트와 셔먼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부의 전쟁수행능력과 의지를 완전히 꺾어야만 한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셔먼은 총력전의 개념을 시행에 옮겼다. 그랜트는 동부전역으로 이동, 조지 미드의 포토맥군을 직접 통제하며 끊임없이 리에게 싸움을 걸었고, 셔먼은 채터누가에서 조지아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남군의 조셉 E. 존스턴은 지연전을 펼치며 셔먼의 보급과 진격을 방해했지만 셔먼이 애틀랜타에 접근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고, 곧 젊고 공격적인 존 후드가 새로운 지휘관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후드의 공격은 압도적인 셔먼의 병력을 막지 못했고, 결국 후드가 애틀랜타를 포기하면서 1864년 5월부터 9월까지 벌어진 애틀랜타 전역은 셔먼의 승리로 끝난다. 이때 셔먼은 도시 시민들을 소개시키고 도시의 관공서와 군사시설을 완전히 파괴한다. 한편 후드가 끊임없이 셔먼의 보급선을 위협하고 기회가 된다면 북쪽으로 진군할 것처럼 보이자 셔먼은 후드는 토머스에게 맡겨버리고, 오히려 동진하면서 보급선을 포기하고 물자를 현지조달하며 진군 경로의 전쟁수행능력, 의지를 꺾고자 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March to the Sea, 1864년 11월 15일 ~ 12월 21일)이다. 이때 셔먼의 북군은 애틀랜타에서 출발해 대서양 연안의 서배너(Savannah)까지 진군하며 가는 길마다 생지옥을 만들었다. 후드는 셔먼을 추격하는 대신 테네시로 북진하여 전쟁의 일발 역전을 노리지만, 프랭클린-내슈빌 전역에서 토머스와 스코필드에게 내슈빌 전투에서 대패하고(1864년 12월) 안 그래도 부족한 남군 병력을 크게 깎아먹었다.[99]

몇몇 남부측 역사학자들은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은 셔먼이 애틀랜타를 점령한 시점에서 서부전역의 남군은 박살났으며,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의 패배는 이에 쐐기를 박았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바로 그 바다로의 진군의 프리퀄격인 전장이 애틀랜타였고,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으로 남부의 후방을 들쑤셔놔서 급해진 후드가 프랭클린-내슈빌에서 불리한 병력을 가지고 싸움을 걸어 남부측 서부전선이 완전히 붕괴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걸 상기하면 의미가 없다고 하기 매우 힘들다.[100] 그리고 남군이 북군의 보급을 방해하려고 우월한 기병대를 동원해서 북군의 물자를 끊임없이 약탈하고 파괴했는데, 이 피해가 어마어마했다. 결국, 셔먼 입장에서는 애틀랜타를 점령한 이후에 보급로를 사수하기 위하여 후방으로 되돌아가 철도 및 보급로를 보호하면서 후드와 지루한 숨바꼭질을 하던가, 아니면 그대로 앞으로 진격하면서 중간중간 현지에서 보급을 조달하면서 남군의 방해 없이 보급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항구로 갈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당연히 셔먼은 "바다로의 진군"이라는 논리적인 선택을 했다.

남군은 남부의 교통의 허브이자 주요 보급도시였던 애틀랜타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게 전쟁을 결정지은 결정적인 패배였다는 시각이 있다. 이 패배가 없었으면 후방이 털리지 않은 남군은 어느 정도 전역유지가 가능해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링컨이 1864년 11월 대선에서 패배했을 가능성이 있다. 허나 실제로는 셔먼의 북군에게 1864년 7월 애틀랜타 전투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1864년 9월 애틀랜타를 상실하여 전쟁지속능력을 잃어버렸으며, 남은 전력도 11~12월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후드의 남군이 토마스와 스코필드 휘하의 북군에게 완패했다.

애틀랜타 전투가 전세를 기울어지게 한 전투였다면, 프랭클린-내슈빌 전투는 남군이 전쟁을 이길 수 있는 눈꼽만한 가능성마저 완전히 날려버린 전투라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으로 남군의 후방을 휘젓고 있긴 했으나 북군이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남군 역시 무주공산이 된 북군의 후방을 휘저을 수 있게 되므로 전쟁이 장기화되어 남부 정부가 원하는 대로 북부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가능성도 있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애틀랜타 전역에서 큰 패배를 당하여 전력이 많이 줄어든 시점에서 남군의 패배는 필연적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이때의 패배로 후드는 woodenhead란 별명을 얻었다. 본래 뜻은 공세를 펼치는 모습이 마치 통나무로 밀어붙이는 듯 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으나, 이 패배 이후엔 머리가 나무로 가득 찬, 즉 돌대가리와 같다는 모욕어린 뜻으로 바뀌었다.[101] 결국 남군은 이런 서부전역에서 열세로 말미암아 서부의 물자와 인력이 동부를 지원하기는커녕 동부의 주전력으로 서부를 지원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

후드가 서부전선의 지휘권을 잃고 나서 결국 조셉 E. 존스턴이 다시 서부전선에 복귀하여 지휘권을 가지게 되나, 이미 존스턴 휘하의 군대는 없는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도 20,000명을 조금 넘는 수준밖에 되지 못했고, 심각한 수적 열세 하에서 노스캐롤라이나로 진군하던 셔먼을 막아야 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5.5. 전쟁의 종결

동부전역에서는 그랜트의 지휘 아래 북군의 대병력이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다방면에서 공격해 압박하기 시작했다. 야전에서 의 남군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리치먼드를 바로 뒤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이 더 용이했으며, 대부분 축성전, 방어전[102]에 치중함으로써 그랜트를 상대로 전술적 승리를 몇 번 거두기는 하나, 그랜트는 지속적으로 리를 떠나지 못하게 묶어놓는 한편, 제임스 강을 건넘으로써 리는 어쩔 수 없이 피터스버그에서 농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 결정은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데, 전술적인 승리로 전략적 열세를 만회하던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많은 인구와 물자를 이용해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소모전으로 바뀌자 리가 계속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연방의 주력인 포토맥군을 완전히 '증발'시키는, 그러면서 자신의 북버지니아군은 온존하는 수준의 대승리가 없이는 북군을 내쫓을 수 없게 된다. 전쟁터가 남부 한가운데가 되었고 그랜트가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우회하면서 끈질기게 리치먼드로 진격하자 리는 더이상 기동전을 할 수 없게 되고 야전 축성을 해서 농성전을 치르게 된다.

남부의 곡창지대이자 북침 통로로서 북군의 측방을 위협했던 셰넌도어 계곡에 대해 그랜트와 링컨은 처음에는 독일계 이민자로 같은 독일계 이민자들을 징병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프란츠 시겔(Franz Sigel)을 지휘관으로 배치했다. 하지만 군사 비전문가였던 시겔은[103] 1864년 5월 뉴 마켓 전투에서 존 C. 브레킨리지 버지니아 군사대학 학도병들에게 패하고 데이비드 헌터(David Hunter)로 교체되었다. 6월 피드몬트 전투에서는 헌터가 이끄는 북군이 남군 사령관 존스를 전사시키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서부전선에서는 5월부터 셔먼이 존스턴의 남군 테네시군을 계속 밀어붙이며 남하하여 9월에는 애틀랜타를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북군이 북쪽과 서쪽에 이어 남쪽까지 삼면으로 압박해오자 리의 명령을 받은 주발 얼리(Jubal A. Early)가 리로부터 받은 병력을 이끌고 6월부터 셰넌도어 계곡의 지휘권을 잡았다. 7월 얼리는 헌터를 따돌리고[104] 1만 5천의 군대로 포토맥 강을 건너 워싱턴을 기습 공격을 시도한다. 이때 남군은 백악관 4마일 이내 코앞 포트 스티븐스 요새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이때 무려 링컨이 직접 전선에 나서 남군을 바라보며 '저 반군 놈들을 당장 격퇴하라'라고 명령,[105] 사기가 오른 방어군과 그랜트의 신속한 증원군에 가로막혀 바로 후퇴하였다.[106]

헌터에게 인내심을 잃은 그랜트는 뛰어난 기병 지휘관으로 정평이 나있던 필립 셰리든을 보내 철저히 셰넌도어 계곡을 초토화 시키도록 한다. 8월부터 헌터를 대신해 지휘권을 잡은 셰리든은 제3차 윈체스터 전투, 피셔스 힐 전투에서 얼리에게 승리하고 남군을 계곡 위쪽으로 몰아붙였다. 10월 시더 크릭 전투에서 셰리든은 얼리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셰넌도어 계곡을 완전히 장악하였다.[107] 이는 링컨 대통령의 재선에 도움이 되었다.

한편 셔먼도 11월부터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으로 조지아주를 초토화했으며,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를 거쳐 버지니아주 쪽으로 진격해 리를 남북에서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108]

1865년 2월 3일 버지니아 주 햄프턴로즈의 북군 선박 리버퀸호 선상에서 비공식적 평화 협상(Hampton Roads conference)이 있었다. 링컨 대통령, 수어드 국무장관이 미연합국 대표단 스티븐스 부통령, 헌터 상원의원, 캠벨 국방차관과 만나 협상을 벌였지만, 입장 차이가 너무 커 결렬되었다.

1865년 3월 25일 북군의 피터스버그 포위망을 뚫고 리를 지원하기 위해서 존 고든 소장이 이끄는 남군이 스테드먼 요새에 기습 공격을 가했지만 북군은 이 공격을 격퇴시키며 남군은 4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기록하게 된다. 이 전투로 남군은 더 이상 북군의 포위망을 돌파할 희망을 완전히 잃게 된다. 4월 1일 필립 셰리든이 이끄는 북군이 피터스버그 남서쪽에서 벌어진 파이브 포크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남군의 우측방이 북군에게 노출되게 되었다. 4월 2일 새벽 4시 북군은 최후의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공격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새벽 5시 경 급히 전선 시찰을 온 A.P 힐이 펜실베이니아 138보병연대 낙오병 2명을 사로잡으려다가 이들의 사격에 목숨을 잃고 만다. 2일 오후 연방군 6군단이 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자 리는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피터스버그와 리치먼드를 포기한다고 전하고 서부전선의 존스턴과 합류하는 것을 목표로 남쪽으로 탈출하였다. 4월 3일 새벽 피터스버그를 북군이 점령하였으며 오후 리치먼드가 마침내 북군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리는 존스턴과 합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댄빌을 향해 남하하였지만 4월 5일 셰리든 휘하 헨리 데이비스 여단이 선수를 쳐서 댄빌로 향하는 길을 차단해버렸다. 리는 황급히 경로를 틀어 린치버그에서 보급품을 받아 재정비하고자 시도를 하였지만 북군은 야금 야금 남군의 후미를 공격하고 있었다. 결국 리는 애퍼매톡스에서 셰리던의 군단에게 따라잡혔고 4월 9일,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이 버지니아주 애퍼매톡스(Appomattox)에서 그랜트가 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조인하면서 남북전쟁은 사실상 종전을 맞았다.[109][110] 소식을 들은 서부전선의 존스턴 장군도 곧이어 항복하였고, 그 외 다른 짜잘한 남군 지상군들은 모두 6월까지 항복하였다. 산발적인 남군 게릴라의 저항이 있었지만 이들도 곧 제압되었고 9월 태평양에서 연방 포경선을 공격하던 남부 해군의 CSS 셰넌도어가 9월 영국에 항복을 하며 모든 저항이 끝났다.

한편 미연합국 정부는 끝내 북군에게 4월 3일 리치먼드가 점령당하자 급히 댄빌로 옮겨갔지만 5월 5일 해산되었고, 남부의 대통령으로 역임하였던 제퍼슨 데이비스가 5월 9일 연방 기병대에게 체포되는 등 주요 정치인들은 곳곳에서 연방 토벌군에게 체포되거나 외국으로 도주하였다.[111]

5.6. 전후 재건시대

북부의 승리로 남부연합은 해체되어 연방에 다시 통합되었다. 연방의 일원으로 다시 된 남부와 우호 관계를 기대한 북부 정치인들은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고, 남부 정치인들이나 군인들이 크게 처벌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방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참정권이 제한되고 남부 출신들은 연방공직에서 쫒겨났으며, 군정이 실시되어 북군이 남부 주에 대한 통제를 실시했다.

이후 전후재건과 노예해방 정책이 링컨 정부 아래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남부 강경지지자인 존 윌크스 부스에 의해 링컨이 암살되는 바람에, 부통령에서 대통령으로 부임한 남부 출신 앤드루 존슨이 이어받게 된다. 그러나 존슨은 노예해방에는 어물쩍한 태도를, 남부에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뿌리깊은 인종 차별의 씨앗은 해결되지 않았다. 전후에도 남부인들의 심적 반발로 KKK 등 창설되었고, 이후 후임 대통령에 의해 흑인 남성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진 뒤에도 선거에 참여한 흑인들에게 KKK단이 테러를 가하는 등 전반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았다.[112]미국 흑인들이 진정으로 시민으로써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는 무려 100년이 지나 마틴 루터 킹의 명연설과 민권운동이 있던 린든 B. 존슨 행정부 때즈음에 와서의 일이다.

또 노예경제가 한방에 해체되면서 목화를 주산업으로 한 남부 대농장 플랜테이션들은 크게 타격을 받아 경제적 격변이 일어났다. 재산을 잃고 몰락한 백인 농장주들의 북부에 대한 증오는 미국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오죽하면 남부의 경제적 혼란은 20세기 후반 제조업이 이 지역에 대거 진출할 때까지 이어졌다.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남부와 민주당이 러더퍼드 B. 헤이스의 석연치 않은 당선을 인정하는 대가로 남부의 연방 주둔군이 모두 물러나고 남부 주들의 '자치'가 보장되는 1877년의 타협이 일어나 재건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10년 남짓의 시간 동안 참정권을 인정받아 투표와 주정부, 연방정부에 참가하기 시작했던 흑인들은 조직적, 폭력적으로 다시 참정권이 배제되었고 남부 주정부는 다시 민주당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런 남부의 시대착오적 행보는 약 1세기가 흘러 충분히 성장한 흑인들의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을 통해서야 막을 내렸다.

한편, 이 후에 진행된 서부개척시대엔 남군 패잔병과 몰락한 노예주, 노예상인들이 무법자의 기원이, 북군 참전 용사들과 해방 노예들[113]이 보안관의 기원이 됐단 점을 감안하면 국가 형태의 전쟁은 끝났지만 개척시대의 끝까지 두 세력의 싸움은 계속됐다고 볼 수 있다.

내전, 그것도 대규모 총력전을 치렀음에도 (비교적) 남아있는 불씨나 지역갈등이 적다는 면에서 사회사적 의의도 크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역시 지금까지 연구대상이다.

6. 분석

6.1. 미합중국

'그리고 비록 그대가 가난할 지라도'
'그대는 절대 노예가 되지 않으리!'
당시 연방 지지자였던 조지 프레더릭 루트가 작사, 작곡한 연방군의 군가, '자유의 함성 ( Battle Cry of Freedom)'[114]

북부는 전쟁 초반에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에 그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야전에 투입할 수 없었고 초반에 남부연합에 계속 패배하여 포토맥 강 근처까지 밀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본적인 국력의 우위로 인해 몇 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고 장비나 보급에 있어서도 항상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북군은 전쟁 내내 남군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무기로 싸울 수 있었으며 언제나 전력상 우위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에 연방은 정치적 혼란과 인기없는 전쟁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전쟁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여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공화당원들 뿐만 아니라 노예제 비간섭주의를 내세웠던 북부 민주당의 연방주의자들도 협조도 그 역할이 컸다. 스티븐 더글라스로 대표되는 북부 민주당원들은 연방을 유지해야 한다며 남부 연합을 규탄하고 링컨 아래 북부가 한데 모아 남부를 통합시켜야 한다고 호소하여 연방 내부 여론을 결속시켰다. 연방 대통합을 위해서 남부의 항복이라는 목표를 우선 확인하게 했고 그를 위해서 장기적으로는 아나콘다 계획으로 서부와 동부를 분리한 후 수출입을 막아 고사시켰으며, 단기적으로는 동부의 포토맥군이 리치먼드 함락 혹은 동부전역 남군의 주력인 로버트 E. 리의 북버지니아군 섬멸을 목표로 끊임없이 공세를 지속했다. 또한 연방 내 외교관들을 통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여 유럽에서 남부의 편을 들거나 남부 측 채권을 구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연방의 채권을 판매했다. 그 결과 남부연합을 고사시키면서 전쟁 수행 능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으며 결국 셔먼에 의해 서부가 완전히 박살나는 동안 동부에서 그랜트의 소모전에 말린 남군은 남부 한가운데서 결전을 강요받고 패배했다.[115]

하지만 연방은 비단 초반 뿐 아니라 그랜트 취임 이전까지 지휘관들의 역량이 남부연합에 처지는 것에 더해서 소극적인 지휘 때문에 우세한 전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전술적 문제를 갖고 있었다. 제1차 불런 전투도 북군이 초기 과감한 기동에 실패하여 남군의 응원군 도착을 허용한 것이 전세를 뒤집었고 능력이 있고 병사들에게도 인기가 있던[116] 매클레런은 소극적인 지휘로 하마터면 리가 연방 수도로 진격하는 것을 허용할 뻔 했다. 너무 소극적이었던 매클래런을 교체한 이후 부임한 번사이드는 무언가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에 너무 과격하게 나섰다가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리에게 샌드백 마냥 얻어터졌고, 번사이드의 후임 후커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좋은 위치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전투 직전에 리에게 쫄아서 압도적인 전력으로도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패했다. 심지어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지휘관인 미드마저도 전투가 끝난 후 링컨의 추격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나서서 리의 남군을 끝장내는 데 실패했다. 이런 소극적이면서 고전적이거나 너무나 과격한 지휘로 북군은 상당히 오랫동안 리가 이끄는 동부 전역의 남군에게 계속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동부에서의 이러한 상황은 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해결되었다. 반면 해군과 서부 군단의 경우 남군에 비해 질적으로 양적으로 모두 우수했다. 해군과 서부 군단은 육해군 합동 작전으로 미시시피 강을 따라 형성된 남부의 요새들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아갔고 동부 군단이 고전할 때 연방의 전쟁 여론을 지탱하고 남부의 경제력을 철저히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들의 공이었다.

6.2. 미연합국

남부연합은 북부 이상으로 전쟁 준비가 안된데다가 기본적인 국력이 북부에 한참 미달하였지만 북부도 당장은 상황이 비슷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그렇게까지 불리하지 않았다. 남부는 각 주를 지키기 위해서 모인 자발적인 병력이 근간이어서 '침략군'인 북부를 몰아내자는 병사 개개인의 목표 의식이 강했고 전투의지도 높았다. 북군에 비해 모든 게 부족한 상황에서 끝까지 전투를 치른 남군의 감투정신은 이런 기반에서 나왔으며 그 결과 신발도 없어서 맨발로 행군하면서도 전술 단위의 전투력에서는 항상 뛰어난 전과를 보여주었다. 북부 측에 더 많은 웨스트포인트 졸업생들이 가담하였고, 상급 장교들의 수도 북군 측이 더 많았다. 가령 최고위 장교들은 알버트 시드니 존스턴 명예 준장, 조셉 E. 존스턴 준장, 로버트 E. 리 대령 정도만 빼면 죄다 연방 측에 붙었음에도 전쟁 시작 당시의 최고위 장교들 중 실제로 전선지휘를 맡아 두각을 드러낸 것은 남군측에 가담한 소수의 그나마 젊은 장교들이었고, 연방측에 잔류한 대부분의 고위 장교들은 절대다수가 60대로 은퇴할 나이에 접어들어 아나콘다 계획을 입안한 윈필드 스콧 정도를 제외하면 전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남군의 명장들이 뛰어난 병력과 합쳐진 덕분에 초반에는 강력한 북군을 말 그대로 관광태우고 다녔다. 그래서 전쟁 초기 북군의 연이은 패배는 연방에 충격을 주곤 했다. 압도적인 국력으로 남부를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그 뛰어난 장교단도, 전쟁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실력의 간극이 좁혀진다. 율리시스 그랜트나 윌리엄 셔먼, 조지 토머스 등 북군에서 유능한 장군들이 계속 등장한 반면, 남군의 장교단은 스톤월 잭슨이 죽는 등 지속적으로 소모되고 있었다. 북군의 고급 장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장교들도 경험이 쌓이면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오르게 된다. 거기다 점점 전쟁이 불리해지니 남부측은 정치적인 이유 등 여러가지 빌미로 유능한 장교들을 해임시키고, 위관급 장교 출신에게 별을 달아주는 등 아주 개판이었다.

초기의 사기높던 의용병들도 점점 숫자가 줄어들자 1862년 징병제를 통과시켜 18~35세까지의 백인 남성들을 징병했다. 그리고 62년 말에는 징집 연령을 확대시켜, 17~50세까지 징병 대상에 포함시켰다. 다만 18세 미만과 45세 이상은 자기 주에서만 복무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 노예 20인 이상 농장의 관리자나 기술자 등 중요하다고 여겨진 직종을 가진 사람들은 면제되었다.

외교전에서도 남부연합은 패배했다. 남부는 연방에서 벗어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서 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승인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전술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외교적으로 승인을 얻는 전략은 독립전쟁 당시와 비슷한 방법이었는데, 영국과 미국 사이 있었던 몇번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이집트에서 대체 목화 수입로를 확보하면서 남부연합산 목화의 경제적 가치가 줄었고, 앤티텀 전투 후에 노예 해방 선언으로 유럽 국가들의 개입 명분까지 상실하면서 실패했다. 오히려 연방정부의 해양 봉쇄로 목화 수출이 중단되어 경제적 어려움만 커졌다.

남부연합 대통령인 제퍼슨 데이비스는 전쟁 초기에는 북부보다 훨씬 모자라는 전력을 가진 남부연합이 방어전을 펼쳐야 이길 수 있다고 보았고 북진 공세에 소극적이었다.[117] 애초에 남부가 전쟁에서 우월한 교환비로 계속 이길 수 있던 이유는 대부분 전장이 남부연합이었고, 남부연합은 공세가 아니라 주로 방어하는 측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전술적으로 아무리 승리해도 전략적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니[118] 북부는 계속 병력을 모아서 밀어붙이고 남부는 이걸 겨우 저지하는 형태가 되면서 전쟁의 주도권은 북부 쪽으로 넘어갔다. 그나마 로버트 E. 리가 이끌던 동부전선은 전선유지라도 했지, 서부전선은 빅스버그 전투 이후로 상태가 개판이었다. 아무리 장교단이 좋아도 병력이 부족하고 물자가 부족한데,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정치질하기 바쁘고 주 정부들은 서로 따로 노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리 전술적으로 승리해도 상대방은 좀 쉬면 금방 다시 공세에 나서고 이를 지난번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막는 상황이 이어졌다.

막강한 전력의 북군이 남부연합에 쏟아지지 않고 남부 영토가 전장에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북부로 진격해서 북군을 붙들어매고 북부 영토를 휘젓고 다닐 필요가 있었다. 만약 리가 북진해서 대승을 거두었다면 북부의 수도권이 전부 남부연합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때문에 링컨은 어쩔 수 없이 종전 협상에 나서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다음 선거에서 패배하여 실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냥 전선유지만 해도 어차피 미국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국가였으니 돈 많이 들어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전쟁에 지친 국민들이 링컨을 재선시켜주지 않으면 남부연합이 이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의 그렇게 될 뻔 했다.

방어전 위주의 전략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준비없는 방어전략은 결국은 소모전만 강요하게 될 뿐이었다. 반전여론을 지피기 위해서라도 연방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야 하는데, 리는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부에 있는 북군 주력인 포토맥군을 전멸시키는 수준의 승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가 포토맥군을 상대로 몇 번 승리를 거두기는 했어도 포토맥군 괴멸에는 근접하지 못했고, 오히려 게티즈버그에서의 대패로 북진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 1864년 그랜트가 동부전선에 부임한 뒤, 리는 전략적으로는 수세에 몰리면서도 전술적으로는 그랜트에게 큰 피해를 계속해서 강요했고, 이 때문에 애틀랜타를 점령하기 이전에는 차기 선거에서 링컨의 실각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동부전선이 고착된 상황에서 덜컥 셔먼이 남부연합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애틀랜타를 점령하며 군대의 사기가 확 오르고, 북부의 전쟁 의지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빅스버그 전투로 확보한 미시시피 강을 기반으로 진격이 훨씬 더 쉬워진 서부전선을 통해 북군이 남부 심장부로 진격할 수 있었고, 애틀랜타를 점령한 이후에는 오히려 남부연합의 후방을 휘저으면서 남부의 전쟁의지를 완벽하게 꺾어버렸다. 반면 남군의 북부 진격은 전력상 한계와 전술적 실책으로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북부 정권 교체도 링컨이 재선에 성공하며 물거품이 되었다.

게다가 상황이 그 지경인데도 흑인 노예들을 끝까지 멸시하여 군사력으로 활용하지도 않다보니 군사력의 열세는 면할 수가 없었다. 북부 2200만의 절반도 되지 않는 남부의 인구 900만명 중 1/3 이상이 흑인이었으며, 몇몇 주들은 흑인 노예 인구가 주 인구의 절반가량이었다. 흑인 노예들을 군재로 동원하려면 해방을 시켜주어야 하고, 그러면 남부연합의 건국과 독립 시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여러모로 태생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남부의 명분은 이렇게 취약했다. 1865년 3월에 와서야 흑인을 입영시키는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뭔가 하기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다만 북부와 같이 흑인들의 대규모 입대는 없었어도 남군에 흑인 병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남북전쟁 시기의 사진을 살펴보면 남군 출신의 흑인 병사가 찍힌 사진들도 꽤 나온다. 다만 오해를 하면 안 되는 게, 전쟁 최후반까지 흑인 노예들의 입대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흑인 병사들은 대부분 집안에서 데려온 노예였다. 남군의 1/3이 노예를 소유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후 직전 흑인의 입대가 허가되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데 그 어느 흑인들이 노예로 계속 살기위해 이미 전쟁에서 패배가 확정된 국가를 위해 싸우겠는가?

또한 경제적으로도 남부연합은 연방에 압도적으로 밀려났다. 전쟁 이전 부터 북부 연방은 중공업이 매우 발전한 지역이었고 연방의 본채였기 때문에 자본과 생산력 모두 남부는 열등했기에 남부는 연방군의 패배가 연방 내부의 여론 분열로 이어지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연방은 동부에서의 수많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체급으로 버텨냈다. 링컨 역시 중간선거와 대선에서 연거푸 승리하며 전쟁 여론이 우세했고 채권 발행 등으로 전쟁 자금을 원할하게 조달했지만 남부연합은 그렇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남부의 주 고객과 상품은 유럽과 면화였는데 노예 해방이라는 명분과 북부가 쥐고 있는 식량과 채권, 식민지의 면화 생산이라는 실리에서 남부는 북부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영국과 프랑스가 수면 아래에서 지원을 해주었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연방 측이 알지 못하게 대놓고는 할 수 없었기에 어려운 남부의 사정을 개선해주지 못했다. 거기에 더불어 강상해군과 대양해군으로 주요 항구를 연방에서 다 틀어막아 놓았기 때문에 남부 사람들은 전쟁 중반부부터 굶주림을 겪어야 했다. 이는 수도 버지니아도 심각했는데 버지니아의 여인들이 배고픔에 분노하여 식량 창고와 관공서를 공격하는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119]

지폐 문제도 심각했다. 당시 지폐기술은 현대와 같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위조지폐 생산에 취약했다. 북부 쪽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해내어 그린 백이라고 불리는 지폐를[120] 유통 중이었지만 중공업이 딸리는 남부가 그런 기술이 있을 리가... 그렇기에 남부는 위조에 취약한 그레이 백이라고 불리는 구시대의 지폐를 발행했다. 위조에 취약했던 그레이 백이었던 만큼 위조 지폐가 판쳤는데 위조 지폐가 판치게 된 사연도 기가 막히다. 남부쪽에서 신규 지폐를 발행하자 당연히 북부쪽에서는 '우와 신기하다'하면서 보도했는데[121]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던 새뮤얼 업햅이라는 사람이 신문에 실린 그레이 벡 사진을 보고 이를 복제해서 기념품으로 팔기로 결정한다. 북부 사람들은 이게 반란 종자들의 지폐구나 하면서 그레이 백을 사가기 시작했고 그들 중에는 연방군의 감시를 피해 남부와 무역을 하던 밀수 업자들도 있었다. 남부 연합 달러를 구하기 어려웠던 밀수꾼들은 업햄이 발행한 그레이 백을 가지고 남부와 거래를 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남부 내부로 위조 지폐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위조 지폐의 유통으로 남부 연합의 달러는 안그래도 무역 봉쇄와 전황 악화로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데 더 떨어졌고 이에 남부 사람들이 남부 달러를 거절하고 북부의 달러를 내놓으라고 한다던가 아니면 아예 물물 교환을 하기에 이른다.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던 남부였지만 북부에서 사용하는 그린 백 발행 기술은 남부에 없었고 결국 새로운 도안으로 지폐를 발행했지만 금세 유출되어 위조 지폐가 돌아다니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는 남군이 북진할 때 그대로 문제점으로 노출되었는데 배고파 죽을 것 같던 남군은[122] 전화에 휩쓸리지 않은 북부 농장들을 닥치는대로 약탈했고 약탈을 당한 농민들이 남부에 좋은 감정을 느낄리가 없다. 북부가 동부 전역에서 전황을 뒤집었다고 평가하는 게티즈버그 전투도 남군과 북군의 첫 충돌은 다름아닌 게티즈버그 인근 마을을 약탈하던 남군과 북군 정찰대가 만나서 시작된 것이다. 게티즈버그 전투이후 북부로의 진군은 불가해지고 그랜트와 할렉이 이끄는 서부 군단이 미시시피 강을 통제하면서부터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남부의 곡창지대 셰넌도어 계곡은 셰리든의 등장으로 초토화 되었고 셔먼은 조지아 주를 휩쓸며 철저히 털어가면서 군수품과 물자가 딸리자 남군은 최후의 발악으로 닥치는대로 민간에서 물자를 징발해갔는데 이는 남부연합 농장주들의 많은 반발을 사 남부연합 정권에 대한 지지를 더 떨어트리게 되는 원인이 됐다.

게다가 명분인 각 주의 주권 운운도 모두에게 먹힌 것도 아니었다. 남부연합에 가담한 주는 총 11개인데 중요한 점은 노예제를 시행하고 있는 주는 그보다 더 많았다. 앞서 보았듯 이른바 '경계 주'라고 불리던 지역들은 노예제는 옹호하나 각자의 사정으로 가담하지 않은 주들로 한 마디로 노예제 사수를 외치는 주들간에도 손발이 맞지 않는 경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123] 게다가 이 남부연합의 주들 중 대표적인 주 중 하나인 버지니아 주의 경우에는 아예 둘로 쪼개졌다. 버지니아가 웨스트버지니아와 버지니아로 쪼개져 웨스트버지니아는 미 연방, 버지니아는 남부연합에 가담했던 것이다.[124] 안 그래도 남부연합이 북진하기 어려운 조건인데 이렇게 북부에 있는 노예제 옹호 주들이 외면하니 따블로 손해일 수밖에 없었다.

7. 결과와 의의

이제 그만하게. 반란군(Rebel)[125]들은 다시 우리 동포가 되었어.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 북군의 일부 병사들과 장교들이 승전을 축하할 때 남군 패잔병들을 폭행하려는 것을 제지하며

7.1. 정치적 의의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자국민이 목숨을 잃은 전쟁[126][127]이었으나 미국은 이를 바탕으로 민주국가로서의 대외적인 '간판'을 세울 수 있었고, 이전과 달리 정치적, 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적 통합을 이루게 됨으로써 이후 미국이 제국주의 열강 국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명목이었던 '노예제 폐지'가 이루어졌으며[128], 흑인의 지위가 마침내 백인과 동등해지고 공직에 진출하는 등 장밋빛 전망이 펼쳐졌으나, 흑인 지위 상승과 함께 남부의 '옛 반란군'을 박살내려던 전쟁장관 스탠턴, 하원의원 새디어스 스티븐스, 상원 의원 찰스 섬너 등의 공화당 급진파[129]가 몰락하고 공화당이 보수화되면서 1876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을 덮기 위해 민주당과 타협한 끝에 결국 흑인의 지위가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남북전쟁은 남부주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재앙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전쟁으로 인해서 늘어난 연방정부의 지출, 전쟁을 통한 기술의 급속한 발전, 그리고 그에 따른 금융시장의 팽창으로 북부는 엄청난 경제적 황금기를 맞게 된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존 피어폰트 모건이 죄다 이 시기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치적 타협과는 별도로 전후 미국 민주당은 내전을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받아 미국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아 공화당의 독주 체제가 공고화되어 전후에 치러진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매번 낙선하였다. 1872년 대선에서는 아예 민주당에서 후보조차 내지 못하고 공화당에서 분당한 자유공화당(남부에 대한 탄압이 주 레퍼토리)의 호레이스 그릴리를 지지하는 촌극까지 벌인다. 공화당이 장기집권한 약 70년의 기간 동안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그로버 클리블랜드 우드로 윌슨 밖에 없으며, 그마저도 클리블랜드의 경우에는 연임이 아니라 당선된 후 한 번 낙선한 뒤 재당선되었으며, 우드로 윌슨은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진보당을 따로 창당해서 출마하여 공화당의 표를 갉아먹어 어부지리로 당선된 경우이다.

게다가 남부 지역 전체가 군부의 지배를 받는 등[130] 그 처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독립 이후 특정 지역이 군부의 지배를 받은 것은 이때가 유일하며, 이 조치는 편법을 써서 대통령이 된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의 공약으로 해제된다. 이조차 헤이스 대통령이 득표는 지고 선거인은 이기는 뭔가 찜찜한 대통령이 된지라, 남부의 지지라도 받을 필요가 있었기에 이뤄진 조치였다.

실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 중에는 오키나와의 중심지 ' 슈리 성'에서 대공식별용 성조기가 없자 해병들 중 한 명이 휴대하고 다니던 남부기를 게양해 당시 미군 지휘부가 황당해한 에피소드[131]가 있으며,[132] 심지어 6.25 때도 남부기를 달고 다니는 미군 전차부대를 본 한국군 포병대가 발포를 망설이다가 미군 군사 고문단 장교가 말려서 아군인 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베트남전 때는 남부 출신 백인 미군들이 남부기를 달고 다니다가 흑인 및 북부출신 미군들과 패싸움이 터지는 일도 잦았다.

미국 남부주 흑인들과 인권운동가들이 남부 주청사에 게양된 남부기의 영구폐기를 강력히 주장해 성공한 일도 있지만 이에 반해 계속 게양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는 세력의 반발 역시 만만치 않다. 2015년 딜런 루프에 의한 총격 사건으로 남부기는 잠재 테러집단인 백인 우월주의 인종주의의 상징으로 낙인찍힌 상태. 아마존, 이베이, 월마트 등의 기업들은 남부기가 찍힌 상품을 취급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미국의 국기 제조 회사들도 더 이상 남부기는 생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이 깃발을 두고 찬반 논란이 팽팽했던 구도인데, 퍼거슨 사태, 에릭 가너 폭행 치사 사건, 딜런 루프의 테러 사건 등으로 근 몇년 사이 인종 문제가 미국 사회의 주요 담론으로 다시 재부상하면서 혐오, 증오 상징으로 단속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 커지고 있다.

현재도 미국은 연방 탈퇴에 관한 성문화된 법이나 성문 헌법의 조항이 없는데, 남북전쟁은 어떤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할 시 연방정부가 전면전을 불사하고 무력으로 진압/토벌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연방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선례로 남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연방 탈퇴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33] 실제로 초기에 연방정부와 마찰이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주축이었던 유타주가 얌전히 협상을 통해 연방에 합류한 것도 남북전쟁의 영향이 있었다.

7.2. 외교적 의의

대외적으로 아시아에서 미국의 개입 능력이 약해지는 원인이 되어 조선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 이후 5년이나 지나서야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고, 일본에는 쿠로후네 사건 이후 미국의 영향이 적어져 메이지 유신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134]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남북전쟁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본문에 서술된 부분까지 파악하게 되면 "참 뜬금없는 전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다. 미국의 건국에서부터 서부개척, 남북전쟁, 미국의 제국주의화까지 전부 연관되어 지속된 역사인데 그 일부분만 떼어놓고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몰라도 근현대사 시험치는 데는 지장없었다.[135]

특히 한국의 경우, 신미양요의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로, 남북전쟁을 겪은 미국이 원정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꼽히고 있다. 당시 조선의 강화도 수비군은 궤멸당했으며,[136] 그 상태로 한성이 함락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남북전쟁의 결과는 중남미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쪽도 노예운용을 중심으로 플렌테이션 농장과 광산을 운영했던 곳이며, 무엇보다도 카스타 제도가 이어져서 노예를 부리는 것이 일종의 정체성이자 사회, 문화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전쟁동안 남부의 외교적 고립은 중남미 국가 전체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고, 1888년 브라질을 마지막으로 노예제를 서서히 철폐하게 된다.

7.3. 군사적 의의

미국 내에서만 벌어진 전쟁이라 잘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나, 최초의 근대적인 총력전이다. 미국 남북전쟁은 세계사 적으로 이전과 이후 시대의 전쟁을 비교하면 과도기적 모습이 많이 보이는 전쟁이었다. 전열보병 위주의 전투 방식은 과거에 비하면 그 위력이 많이 사라졌지만 이 때까진 유효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산개와 엄폐, 그리고 원시적 참호전의 양상이 선보여졌고 속사가 가능한 연발 화기의 제식화도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총력전의 요소인 관료제를 통한 전쟁수행능력의 증대와 체계적 실행으로 이를 통한 범국민 및 산업적 역량의 총동원이 구현된 전쟁이기도 했다.[137] 후술하겠지만 남북전쟁의 군사학적 최대 의의는 기존과는 판이한 '전술의 변화'일 것이다. 당장 이전의 나폴레옹 전쟁, 크림 전쟁만 해도 전열보병이 주축이 돼서 싸웠다. 그러나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전열보병이 주축이 돼서 전투를 벌이는 양상은 빠르게 쇠퇴해가고 있었다. 당장 남북 전쟁 도중에 벌어졌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 프로이센과 덴마크 군은 참호전을 벌였으며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또한 전통적인 전열보병 전투 비중이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다.[138] 또한 기병 역시 전통적인 충격력을 이용한 돌격전만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기계화보병처럼 활용되어 하마 상태로 싸우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유럽에서는 1차 세계 대전 때나 경험하게 되는 현대전의 모습들이 비행기[139]와 전차[140]의 존재만 빼고 대부분 여기서 벌어졌다고 보면 된다. 총기 기술과 정밀도의 발전으로 보병 전술이 이전과는 달라짐과 동시에 최초로 샤프슈터라는 병과가 탄생해 전장에 투입되고[141] 수동식 기관총이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미 미니에 탄이 사용되고 있어서 총기의 명중률과 연사력이 높아진 데다, 전쟁 말기의 연방 서부군에선 스펜서 소총, 헨리 소총같은 연사화기가 주력으로 보급되었기에 나폴레옹 시대와 같이 개활지에서 대오를 갖춰 일제사격을 노리는 전투는 상대측에게 사격 연습 타겟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고, 엄폐의 개념이 매우 중요해진다.

가장 극적인 사례로는 이전 시대라면 한방 맞아주고 착검돌격 와중에 넘어갈 수 있었던 돌담 하나의 차이로 1대 30의 교환율을 찍은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및 피켓의 돌격과 같은 사례도 있으며, 양쪽 군대는 대부분 산능선이나 나무 등의 엄폐물이라도 끼고 싸우는 걸 선호했다. 더 나아가 빅스버그 포위전과 피터스버그 전투의 경우 아예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같은 참호전 및 터널 전쟁의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남북전쟁을 참관했던 유럽 군인들은 하나같이 "역시, 촌놈들은 전쟁을 무식하게 하는구만ㅋㅋㅋ."이라고 했다.[142] 그들 입장에서는 보병들이 전열도 갖추지 않고, 총소리만 들리면 죄다 흩어져서 여기저기 숨기 바쁘고, 땅만 파놓고 적이 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전투 양상은 50년 후에 유럽에도 똑같이, 아니 더 야만적으로 재림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무기가 발전했음에도, 보병들끼리의 전투 양상 자체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전열보병식 전투로 이루어진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남북전쟁 이전의 몇몇 군사이론가들은 이론상 미니에 탄과 강선식 머스킷 총이 기존의 활강식 머스킷 총보다 사거리가 늘어나고 정확해졌다는 이유로 보병 전술의 혁명을 예언했고 전투가 더 빨리 시작되고 더 넓은 지역에서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다.[143] 하지만 정확도를 수백미터 단위로 늘렸는데도, 상당수의 남북전쟁의 보병전은 지근거리에서 벌어진 경우가 많았다. 113개 전투를 표본으로 하면 이 중 62%의 교전이 100야드(91m)내에서 이루어졌다.[144]

아마도 시야가 불분명한 경우도 꽤 많았을 뿐더러 병사들이 사격을 잘 못하거나 실수를 할 가능성 등 여러가지 요소 때문에 그 당시 지휘관들은 근접해서 쏘는 것을 선호하였다. 미니에 탄을 쏘는 총도 전장식 머스킷이었고, 한 발 쏘면 재장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신중히 쏴야 했다.[145]

물론 결과는 막대한 사상자의 발생이었지만, 철도의 존재로 기계화된 보급 수송수단을 가진 관계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물자와 병력을 전투에 투입 가능했던 전쟁이기도 하다. 최초의 장갑열차 열차포도 이때 등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국가의 모든 능력을 전쟁에 동원한다는 총력전의 개념이 처음으로 서기도 했고, 상대국의 전쟁수행능력 자체를 목표로 삼아 전략적으로 공격하는 행동 양상도 이때 생겨났다. 이 '바다로의 진군'을 수행한 셔먼 장군을 최초의 현대전을 지휘한 장군으로 평가하는 문서는 유럽에서도 종종 나올 정도. 심지어는 최초의 철갑선끼리의 포격에[146] 잠수함까지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이 시기 미국을 방문하여, 최초의 현대전이 총력전으로 가고 있음을 체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가 이끈 프랑스는 비슷한 행동과 비슷한 대응들이 이어졌다.

워낙 미국이 드넓어서 전장이 넓고 전선이 길다 보니 기병대 또한 크게 활약했다. 주된 임무는 정찰과 상대 정찰 저지, 철도 등 보급선 위협, 상대 후방 지역에 대한 사보타주 등이 있었다. 북버지니아군, 포토맥군 등 양측의 주요 야전군에는 기병군단(Cavalry Corps)이라는 군단 단위의 대규모 기병대가 함께 편성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남군이 북군에 가지는 주요 우위 중 하나로 작용했고, 젭 스튜어트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 등 유명한 남군 기병대장들이 눈에 띄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남군 기병대는 병사 개인이 말을 관리하다 보니 북군의 체계적인 관리에 비해 효율이 떨어졌고, 말 자체가 워낙 돈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경제적으로 우월한 북군이 장기적으로는 유리했다. 그 결과 전쟁 후기로 갈수록 북군 기병대도 남군에 못지않은 경쟁력을 보여주었고, 필립 셰리든,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제임스 H. 윌슨 등의 북군 기병대장들은 북군의 최종적인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남북전쟁 이후로 1차대전을 거쳐 대규모 전쟁에서 기병대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었다.

8. 무장

8.1. 육군

8.2. 해군

9. 주요 편제

9.1. 미합중국

연방군은 주로 강 등 자연지물을 기준으로 야전군 이름을 정했다.

9.1.1. 동부전선

9.1.2. 서부전선

9.2. 미연합국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약하고 분권적인 특성상 연방군에 비해 훨씬 지휘가 파편화되어 있어 각 주별로 부대가 따로 존재하고 연계가 힘든 경우가 많았다. 부대 이름에 주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았다.

10. 주요 인물

10.1. 미합중국

10.1.1. 정부

10.1.2. 육군

10.1.3. 해군

10.1.4. 기타

10.2. 미연합국

11. 주요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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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만약 영국 프랑스가 참전했다면?

이것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떡밥이다. 실제로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기 전까진 남부의 목화를 지속적으로 자국 시장에 공급시키고 싶어했던 영국[155]과 프랑스[156]가 참전을 고심했지만 인권을 유린하는 흑인 노예제를 고발하는 해방 선언을 발표한 이후에는 남부 지지를 철회했다. 그럼 만약에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했다면 어땠을까?

이러한 이야기에서는 온갖 주장이 오고가는데, 이들 두 나라가 총력전을 벌이듯이 했더라면 북부가 패하고 남부가 독립해 미국 역사가 달라졌겠지만, 당시 프랑스는 유럽 내부적으로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간의 통일 경쟁에 간섭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을 비롯하여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있는 여러 식민지에 진출하여 신경쓸 게 많았고 영국도 아프리카, 아랍을 비롯하여 여러 식민지에서 프랑스처럼 저항을 신경써야 했으며 당시 강력한 적국으로 여기던 러시아 견제해야 했기에 미국에 군사력을 오롯이 쏟아붓는 총력전을 벌이긴 힘들었으리라 하는 의견이 많다.

다만 남북전쟁 초기에는 북군이 열세였고, 이에 가장 강력했던 영국의 로열 네이비와 프랑스 육군이 북부를 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군을 지원하며 북부를 틀어막기만 했어도 북군은 지속되는 열세를 버티지 못하거나 국지전만 펼치다가 남북전쟁 자체가 흐지부지하게 되었을 것이란 관점이다.

더군다나 북부의 바로 위에는 캐나다란 대영제국의 거대한 군사기지 역할도 수행이 가능한 국가가 있었기에 안 그래도 남부와의 전선에서 병력들을 소모해가던 상황에서 북부에 새 전선이 생겼다면 더더욱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캐나다를 통해서 영국군이 남하해 북부의 주요 산업 지대를 타격했다면 북부가 남부를 이긴 가장 결정적인 원동력이었던 거대한 산업력 역시 타격을 입었거나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을 수도 있다. 게다가 로열 네이비가 참전하면 미합중국 해군은 남부에 대한 해상 봉쇄를 할 수 없으니 남부의 경제 사정도 더 좋아질 것이므로 북부와의 경제력 격차는 더욱 줄어든다.

그러나 이 당시 미국은 북부의 국력만으로도 이미 영국, 프랑스도 쉽게 건드리기 어려운 레벨이었다. 캐나다가 군사기지 역할을 수행한다고 해도 당시 캐나다는 인구 100만명에 불과한 대부분이 그저 동토에 불과한 땅이라 미국 입장에선 병력 좀 보내서 오는 족족 때려잡으면 그만이다. 그게 아니라도 캐나다 동부의 주요 도시들 몇 개만 함락시켜도 이미 캐나다의 자체적 전쟁 수행능력은 그냥 마비다. 캐나다에 배치된 영국군은 현지군을 합쳐서 1만명이 되지 않았고, 캐나다에서 참전 반대 여론이 높았던 것도 영국이 전쟁에 참전하면 캐나다는 미군에게 그대로 밀려버릴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2,200만이 넘는 북부의 인구는 당시 국가들 중에선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산업 생산능력 또한 이미 북부만으로도 명백히 열강 레벨이었다.[157] 실제로도 남북전쟁 동안 북부의 연 누적 동원병력은 무려 220만명에 달한다. 물론 당시 세계 1, 2위의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국운을 걸고 총력전을 벌인다면 미국을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설령 성공한다고 한들 엄청난 손실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대서양 건너 수십만 단위의 대규모 육군을 파병하고 보급하는 것 자체로 악몽이다. 크림 전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피똥을 싸게 될 것이 자명하다.

또한 노예해방 선언 이전 남군이 북군보다 승률이 높았지만 여전히 북부가 공세를 가하고 남부가 이를 맞아 격퇴하는 상황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불 런 전투 전후 매클레런이 이끄는 연방군은 웨스트버지니아를 향한 남군의 공세를 격퇴하였으며 남군보다 우월했던 해군을 이용하여 뉴올리언스를 점령해 서부 전선에서 압박을 가하고 있었고 노퍽 해군기지로 들어가는 햄프턴 로드를 점령했다. 햄프턴 로드 점령과 함께 개시된 반도 전역에서 매클레런이 남군을 과대평가하여 리치먼드를 공략하지 않고 어영부영하다가 리의 일격으로 7일 전투에서 패배하며 리치먼드 조기 점령에 실패하였지만 북군은 성공적으로 철수하며 전력을 보존했다. 그나마 리가 7일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메릴랜드로 과감한 기동 작전을 펼치면서 앤티텀 전투 이전까지 북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것이 남북전쟁기 유일한 북부의 위기였다.

1860년대 프랑스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라이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 사이의 고조되는 갈등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설사 참전했다 한들 프로이센을 옆에 두고 수십만의 전력을 차출해서 미국으로 보낼 사정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독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영국의 개입 여부를 지켜보며 멕시코를 찔러본 것이다.

영국은 총리 파머스턴 자작이 '미국을 분열시켜 놓지 않으면 수십년 내에 영국의 패권을 위협할 강국으로 성장할 것이다'라고 미래를 정확히 예견한데다, 트렌트 사건 등 양국간의 이런저런 갈등으로 그나마 참전 가능성이 높았으나, 전통적으로 영국은 해군 강국이지 육군 강국이 아니었다. 섬나라에 해운국이었던 영국은 해군을 위주로 군대가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앞선 미영전쟁 때도 그리 많은 군대를 파견하지 못했고 국운을 걸고 코앞이던 유럽에서 싸우던 나폴레옹 전쟁 때도 최대 전력이 10만을 넘지 않았다. 더 멀리 가면 독일과 영혼을 걸고 싸우던 1, 2차 세계대전때도 전쟁 초반에는 해외원정군이 10개 사단 안팎이었다. 참전을 했다면 캐나다와 카리브 해의 해군을 동원하여 북군 해군을 수세로 몰아넣고 남부의 보급을 호전시켜 줄 수 있겠지만 결국 승패가 결정되는 지상전은 남부의 손에 달려 있었다. 게다가 명분상의 문제도 있었다. 영국은 미국보다 30년 일찍 노예제를 폐지했고, 자국의 이득과 명분을 위해 노예제 폐지운동을 주도하는 국가였는데, 그런 영국이 노예제를 지키코자 하는 남부를 대놓고 지원하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파머스턴 자작은 남부가 불리해질 경우 세력균형 유지를 위해 남부를 도와 북부를 군사적으로 위협할 계획이 있었으나 국가원수인 빅토리아 여왕이 강경한 도덕주의자여서 파머스턴도 어찌할 수 없었다.

마지막 유럽의 열강 프로이센은, 남부가 소중히 여기던 귀족 중심의 사회였음에도 노예에 관심도 없었고 1860년대 오스트리아와 독일 통일 문제로 경쟁 중이었으며, 프랑스나 영국과 달리 미국을 압도할 해군도 없었다. 이러한 이유에, 인도를 비롯한 신규 식민지 개척을 통해 남부에 대한 경제적 필요성이 없어지고, 앤티텀 전투 이후 노예해방선언으로 정치적 명분이 북부로 넘어가면서 유럽은 초반의 중립에서 북부지지로 굳어졌다.

다만 영프는 병력만 안 보냈지 남부를 어느 정도 도와줬다. 영국은 남부의 주문으로 비밀리에 CSS 앨라배마호 등 몇 척의 무장한 함선을 건조해주었고 남군은 2년간 공해상에서 50척 이상의 북군 선박을 공격했다.[158] 프랑스의 에밀에를랑제 회사(Emile & Erlanger Co.)는 1863년 남부가 면화를 담보로 발행한 채권[159] 600만 달러를 매입하여 남부 정부가 이를 전비로 사용할 수 있었다.

13. 왜 반란을 막을 수 없었는가?

남북전쟁은 남부의 주정부들이 연방정부에 반기를 들며 나라가 둘로 쪼개지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수많은 반란과는 달리 남부가 일으킨 반란은 '거사일까지 낌새를 철저히 감추고 최적의 순간에 기습적으로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 오히려 남부의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반란 몇 년 전부터 아주 대놓고 연방정부를 향해 온갖 불손한 언행을 내뱉으며 '내 요구 안 들어주면 탈퇴할 거야!(말이 좋아 탈퇴지 사실상 반란 일으키겠다는 소리이다)'라는 망언을 서슴없이 내뱉는 상황이었으며[160] 이미 사방에서 남부가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는 징후가 포착되고 있었고[161] 대통령을 비롯한 연방정부의 높으신 분들이 결코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연방정부는 아주 대놓고 보이는 이런 불온한 움직임과 반란 징후를 사전에 차단하지 못하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나라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162] 그 대가는 피로 피를 씻는 동족상잔의 비극과 초토화된 국토, 미국인들의 시산혈해였다.

그렇다고 반란을 쉽게 진압한 것도 아니었다. 상술했듯이 진압군은 반란군보다도 훨씬 더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고 반란군은 그야말로 약점투성이였으나 그런 문제투성이, 약점투성이의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정작 진압군이 반란군보다 더 많이 죽었으며 피해도 진압군이 훨씬 더 컸다. 모든 좋은 조건, 우월한 조건을 전부 다 갖추고도 이렇게나 문제와 약점이 많은 적을 상대하면서 훨씬 더 큰 피해를 보고 온갖 생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렇게 반란의 징후가 보임에도 반란을 막지 못한 연방정부의 대통령과 수뇌부가 무능한 게 아닌가 싶겠으나 이는 연방정부의 대통령과 수뇌부들이 무능해서 반란을 막지 못했다기보다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의 크나큰 허점 때문에 막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미국은 건국초기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직접 때려잡은 위스키 반란이래 한번도 군사반란을 겪은 적이 없는 세련된 문민통제를 가졌으며, 연방정부가 다 해먹기보다는 지방정부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인정하는 연방국가라서 지방정부가 행정권은 물론이고 입법권, 사법권, 군권까지 가진 나라이다. 이런 시스템은 군대의 반란을 막고 지방정부가 가진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나라를 발전하게 하는 좋은 방향으로도 작용했으나, 지방정부가 연방정부와 반목하고 지방정부가 연방정부가 마음에 안 든다고 아주 대놓고 반기를 들자 문민들이 군인들을 통제하는 문민통제와 지방정부의 권한을 최대한 인정한 연방제는 지방정부가 연방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도 막을 수 없는 최악의 함정카드가 되고 말았다. 미국이 자랑하는 세련된 문민통제는 군대를 통제하며 반란을 막아야 하는 그 문민이라는 작자들이 연방정부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자 그 문민들이 통제하는 군대가 그대로 그 반역자 문민들의 편에 붙어 함께 반란에 가담해 국가와 국민에게 총칼을 겨누는 끔찍한 사태를 일으켰고,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지방정부가 행정권만이 아니라 입법권, 사법권, 군권까지 가지게 한 시스템은 지방정부가 연방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킬 때 아주 수월하게 군대를 모으고 입법, 사법의 권한을 악용해 자기들만의 나라를 손쉽게 만들게 했다.

즉 남북전쟁은 남부의 반란군들이 미국의 문민통제와 연방제가 가진 시스템의 허점을 최대한 이용, 악용하고 자기들이 가진 '자유'를 최대한으로 악용, 남용하여 일으킨 반란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하고도 기막힌 점은 연방정부의 수뇌부들이 무능한 게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이 기가막히는 꼴을 실시간으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면서도 당한 것이다. 이 정도면 눈 뜨고 코 베인 정도가 아니라 눈 뜨고 몸이 두 동강난 것이다.

이 반란은 미국인들에게 '문민이 군대를 통제한다면 그 문민은 누가 통제하는가?', '군대를 통제하는 문민이 반란을 일으키면 그건 누가 막을 수 있는가?',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군권을 가진 지방정부가 연방정부에 반기를 들면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의 뼈아픈 교훈을 준 사건이다.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아야 하며 군대를 통제해야 하는 문민들이 자기 권한을 악용하여 작정하고 자기 휘하의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니 막을 수 없었으며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군권을 가진 지방정부들이 합심해서 연방정부에 반기를 들자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렇게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 대가는 결국 같은 미국인들끼리 피로 피를 씻는 끔찍한 동족상잔과 전쟁뿐이었다.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당나라 절도사가 외교권만 없는 상태에서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해 당나라를 뜯어먹다 결국에 독립된 왕국으로 공중분해된 것과 마찬가지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내전이 종결된 지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의 문제로 계속 남아 있다. 미국인 가운데서는 반연방주의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 많고, 이런 사람들 중에는 연방정부가 악이라는 사상을 지닌 사람도 많다. 9.11 이전 미국 최악의 테러였다는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의 범인들이 이런 사상의 극단주의까지 간 사례다. 또한 트럼피즘 등장 이후, 그야말로 나라가 두 쪽났다라는 말이 재연될 정도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골이 깊어진 것도 마찬가지이며 2024년 텍사스 국경 갈등 같은 사건은 여차하면 내전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다.

14. 대중문화에서

현대 미국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 가장 큰 사건으로서 미국인들의 관심사도 대단하다.

15. 여담

16. 같이 보기


[1] 북부와 남부의 대통령, 전쟁장관, 해군장관, 육군 총사령관, 해군 최선임자를 기재. 기타 육군 지휘관들의 경우 북군은 정규군 소장(Major General - Regular Army)까지, 남군은 대장(General)까지 기재. [2] 남부에 대한 군정이 해제된 1877년까지로 잡는 시각도 있다. [3]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를 남북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대한민국과 북한의 교전 상황을 남북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간혹 있다. [4] 링컨의 굉장히 유명한 명언이다. 링컨이 킹 제임스 성경 마르코 복음서 3장 25절("If a house be divided against itself, that house cannot stand.")에서 따온 말로 추정된다. [5] 예를 들어 관세같은 것도 북부는 유럽과 경쟁하면서 공업제품을 만들어다 수출했기 때문에 보호무역을 주장했지만 남부는 목화를 생산하는 족족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그런데 목화 재배는 대표적인 노예제 노동에 해당되었다. 자치제도 및 연방제 역시 마찬가지로 국가 이미지를 떨어뜨리고 국민의 단결을 저해하는 노예제를 없애려는 링컨의 공화당 연방정부와 우리 맘대로 하겠다는 남부의 대립이 나타났다. [6] 더 정확히 말하면 중앙 정부를 둘러싼 노예제 관점을 두고 갈라진 북부와 남부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역대 대통령들은 노예제에 대해서 꼭 우호적인건 아니었지만 업무상 노예제 폐지보다 더 중요한 연방 유지 때문에, 그게 아니라면 대통령 스스로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모두들 즉각적인 노예제 폐지에는 소극적이었고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폭탄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허나 반대로 노예제 자체는 나쁘다고 본 사람들이 많아 다들 남부측 시각을 무조건적으로 쉴드쳐주지도 않았다. [7] 전쟁 터지기 전의 관세율이 역사상 최저치였는데 높은 관세 때문에 전쟁이 났다고 하는 바보들이 미국에 아직도 너무 많다. 그리고 들고 오는 게 이미 남부주들이 독립한 다음 통과된 Morrill Tariff이다. 심지어 상원은 민주당이 다수당이었던지라 남부주 출신 상원의원들이 알아서 사퇴하지 않았다면 통과될 수도 없었다. 애초에 현대 미국 극우층이 좋아하는 주제가 남부연맹 옹호, 왜곡된 의미에서 작은 정부 숭배(한마디로 세금 적게 들어가는 작은 정부여야 하지만 동시에 패권국가 미국이어야 한다는 것.), 세금이랑 공권력 혐오이기에 팔리는, 19세기 중반 당시의 역사하곤 전혀 상관없이 현대 미국 정치지형으로 인해 팔리는 설이다. [8] 북부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주류가 영국 청교도- 퀘이커교도, 아일랜드 가톨릭교도, 독일계 망명 자유주의자 같은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자유 추구자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북부와 자연환경이 정반대인 남부에선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부유층 상인들을 중심으로 개척이 이루어져 노예제와 자유방임주의에 대해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t5YrmNLaiTE [9] 사실 남부 출신이라고 모두 생각이 같은 것도 아니라서 예를 들어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노예제가 나쁘다고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 남부 출신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10] 그래도 북부에서도 노예무역은 수익이 괜찮게 나오는 사업이었지만, 다른 사업도 많은데 굳이 욕을 먹거나 양심을 속여 가면서까지 노예 장사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쇠퇴해가는 중이었다. 19세기 구미권의 노예제 폐지를 오로지 경제문제로 설명하면서 노예무역은 돈이 되지 않았다느니, 노예제는 생산성이 너무 떨어졌다느니 하면서 노예제를 오로지 돈낭비로 보는 수정주의가 흥한 적이 있지만 최소한 남북전쟁 시기 직전까지 남부에서 노예제는 경제적으로 돈이 되는 제도였다. 노예제 폐지에는 분명히 종교적, 윤리적 동기가 매우 강력히 작용했다. [11] 다만 노예 문서에서 보듯 노예제 자체가 그리 효율성이 뛰어난 제도는 아니었다. 즉 효율이 너무 떨어지는데도 어쨌든 수입이 났고 후술하겠지만 남부 사회는 노예제가 떠받치는 경향도 있어서 유지가 된거였을 뿐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효율 측면은 어디까지나 노예 가지고 플렌테이션 농업을 하는 쪽 이야기로 그 외의 경우 그냥 노예를 파는 게 수입이니 효율이고 자시고 할 건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결국 사주는 쪽이 노예가 필요없다고 느꼈다면 파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더는 노예제도가 유지될 순 없었을 것이다. [12] 당시 미국에서 기르지 않던 장모종용 조면기는 고대 인도에서 발명된 이후 계속 있어 왔으나, 개량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미국에서 기르던 단모종을 위한 조면기는 없었고, 그래서 손으로 씨앗 제거 작업을 해야했다. [13] 최초로 개량된 조면기 하나가 30 ~ 50명 분의 수작업만큼 일을 처리할 수 있었고, 후에 개발한 모델은 또 초창기 모델의 50배만큼 효율이 좋았다. [14] 기아자동차 미국 현지 공장이 있는 조지아 주의 웨스트 포인트가 한 예로 주력 산업이 방직업이었다가 사장된 지역이다. [15] 이는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이 노예 무역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16] 면화 생산은 본격화된 시기를 기준으로 10년마다 2배씩 증가하였다. [17] 이 시기 남부에서는 수많은 사이비 인종학자들이 흑인 열등론을 전파하고 있었다. 이들은 흑인은 가장 저급한 부류이자 퇴화한 존재였기 때문에 이들을 구제할 방법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 [18] 기실, 노예제 자체는 남북전쟁 말기 워낙 궁지에 몰리자 남부 대통령이던 제퍼슨 데이비스가 맞불로 해방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람이 온건파이거나 한건 당연히 아니고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19] 공업지대가 많았던 북부 주들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원했지만 주 산업이 농업이었던 남부주들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사탕수수같은 환금작물만 고관세로 보호받기를 원했고 공산품같은 경우 외국, 특히 영국의 보복관세를 우려해 고관세를 반대했다. 즉 북부는 고관세, 남부는 일부만 고관세 + 대부분 저관세를 원했다. 웃기게도 전쟁 터지기 전인 1857년에 양쪽이 합의한 관세법 때문에 미국의 관세율은 사상 최저치를 찍었으며, 민주당이 집권한 연방정부는 심각한 재정적자에 시달린다. 당연히 남북전쟁이 터지고 난 후에는 전쟁자금 마련을 위해서라도 연방 정부는 관세를 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잃어버린 대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때의 높은 관세를 핑계로 삼았다. [20] 1857년부터 1861년까지 유효 [21] 공화당이 전쟁 이후 국가 부채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북부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고관세율을 유지한 면이 적잖아 있으나, 이것은 남부가 노예제 보호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원래는 불가능했고 또 불필요한 일이였다. [22] 노예 인구가 너무 불어나 어떤 주들에서는 흑인 노예인구가 백인 자유민 인구를 넘어서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런 노예들의 아이티 혁명같은 반란을 두려워하며 노예제 사수를 백인 인종의 생존권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23] 후술하겠지만 동부 전역에서 남부군이 북부군을 상대로 방어전에서 승리한 것이지 엔티텀 전투, 게티즈버그 전투, 맬번힐 전투 등 공격전에서는 그리 실적이 좋지 않았다. 아예 서부전역에서는 할렉과 그랜트, 셔먼에게 방어전, 공격전 상관없이 거의 시종일관 탈탈 털렸다. [24] 사우스캐롤라이나 같은 주들은 흑인 노예 비율이 50%에 근접하여 이런 대규모 인종 전쟁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래서 인구 대비 노예 비율이 높을수록, 인구 대비 노예를 소유한 가구가 많을수록 연방에서 더 빨리 탈퇴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25] 사실 폐지 운운하기 이전에 애시당초 멕시코에서는 노예제가 불법이라 그 땅들은 이미 노예제가 없던 지역이었다. [26] 물론 캘리포니아는 루이지애나 구입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주리 타협 경계선의 대상은 아니었다. [27] 기실 북부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 남부측의 '주의 권리' 운운을 위해선 북부주들의 권리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주에서 다른 주에 멋대로 넘어가 가택수색을 한다든가 하는 행위는 명백히 주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다. 그나마 자기 노예를 되찾는 것이라면 남부 입장에서도 '내 재산을 되찾는 건데 재산 되찾는 것도 내 권리 아님?' 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들은 자기들 소유였던 노예만이 아니라 엄연한 자유주 주민인 해방 노예들까지 멋대로 잡아갔다. [28] 네브래스카는 오래 전부터 자유주로 결론이 났지만, 남북전쟁 때문에 가입이 미뤄져 1867년에야 가입하게 되었다. [29] 미국 국내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베스트셀러였다. 남부연맹 대표가 영국 가서 본국에다가 대놓고 영국(잉글랜드) 시민들은 노예제 때문에 독립전쟁(반란)을 일으킨 남부연맹에 우호적이지 않다고 보고한 바 있다. [30] 남부 주들이 노예제 보호에만 관심이 있었지, 각 주의 권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대표적인 사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남북전쟁의 발발 이유가 각 주의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남부의 주장은 현재까지도 근근히 나오고 있는데, 이게 얼마나 헛소리인지를 잘 보여주는 반례이다. [31] 브룩스는 이후 섬너의 동료 앤슨 벌링게임의 도발에 넘어가 결투를 신청했다가 갑자기 시시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결투를 거부하여 망신과 조리돌림을 당하고 스스로 정계에서 물러난 뒤 곧 죽는다. 섬너는 남북전쟁 이후 남부를 벌하자고 주장하는 공화당 급진파의 핵심 인물이 된다. [32] James Oakes (2012). Freedom National: The Destruction of Slavery in the United States, 1861–1865. W. W. Norton. p. 12. [33] 당시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밑의 미국 부통령이었다. 미국 역대 최연소 부통령. 나중에 남부연합에 가담하여 남군에 장성으로 입대한다. [34] 존 C. 브레킨리지. 영미의회는 의원이 말할 때 상대의원 이름을 호명하고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장을 향해 말하거나, 의장에게 전언해달라는 형식을 갖춘다. 중세시대 영국의회 귀족들이 언쟁이 격해져서 칼을 뽑은 전례가 많아서 호명을 금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35] 거의 전부 연방정부와 북부주들의 노예제에 대한 적의와 반감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는 탈퇴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중 문단 최상단에 인용된 미시시피 주의 탈퇴선언문이 특히 유명한데, 이유는 다름아닌 훗날 남부연맹의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제퍼슨 데이비스가 미 의회에서 직접 낭독한 선언문이었기 때문이다. [36] 혹은 아메리카 연합국, 미연맹국, 남부연맹, 남부동맹, 남부맹방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한다. [37] 하지만 대통령이 브레킨리지의 사직서를 반려하는 바람에 공식적으로 사퇴가 처리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브레킨리지는 이미 남부연합에 가담할 결심을 굳힌 상태였기 때문에 브레킨리지의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았음에도 백악관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브레킨리지의 부통령 임기는 정상적인 만료일인 1861년 3월 4일까지로 되어 있다. 브레킨리지가 남부연합에 가담하여 부통령직을 태업한 기간에는 국무장관인 제러마이아 S. 블랙(Jeremiah S. Black)이 부통령직을 대행했다. [38] 섬터 요새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정부가 1836년 공식적으로 연방정부에게 양도한 땅이다. 정확히는 연방정부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정부의 요청에 따라서 모래뻘에 요새를 세웠는데,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자기 땅이라고 틱틱거렸고, 연방정부가 연방정부 땅도 아닌데 왜 연방정부 자금으로 요새를 세우냐고 건설을 중단하니까 사우스캐롤라이나가 공식적으로 연방정부 땅이 맞다고 인정한 것이다. 요새 자체가 연방정부 자금으로 세워진 것이다. [39] 미국 깃발에서 별은 연방의 주 숫자만큼 존재한다. 별이 줄어든다는 것은 주의 연방 탈퇴를 의미한다. [40] 놀랍게도 공격개시에 대해서 엄격한 보안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찰스턴에서는 4월 12일 새벽에 있을 불꽃 놀이쇼를 보러오라며 광고했고 많은 시민들이 연방군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는 것을 구경했다. [41] 버지니아와 테네시는 1860년 선거에서 분리주의를 반대하는 존 벨을 지지하는 등 앞서 연방을 탈퇴한 주들에 비해 유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특히 앞의 세 주는 기존 남부연맹(미연합국) 주들보다 인구가 많은 편이어서 남부연맹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를 수도로 정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해당 주들은 전쟁 발발 이후 남부연맹의 동원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42] 1860년 당시 메릴랜드 흑인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49%가 자유인이었다. [43] 잔류 98표에 탈퇴 1표. 비추실명제 [44] 영토가 하나의 주로 승격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 "현재 있는 주들중 가장 적은 인구수를 가진 주보다 더 인구수가 많을 것"이다. 2017년 기준으로는 와이오밍 인구가 기준이고, 저 당시에는 보통 인구 5만 ~ 6만 명을 기준으로 했다. [45] 전쟁 중 주기가 바뀌었다. [46] 당시 주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47] 별이 34개로, 현재의 국기와는 별의 개수가 다르다. [48] 이는 당시 유럽의 정치사회적 분위기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인데,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십여년 전 유럽에서는 (결국에는 실패했지만) 1848년 혁명이 일으킨 자유주의 내셔널리즘의 물결이 전 유럽을 휩쓸어버린 바 있다. 특히 독일의 사례를 보면 3월 혁명의 실패에 실망한 사람들이 대거 신대륙으로의 이민을 선택했음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목표로 제시하고, 사회주의적 경향까지 그 맹아를 드러내기 시작한 혁명의 실패에 실망하여 이민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노예 해방이라는 북부측의 대의를 강경히 지지했을 확률이 지극히 높은 것이다. 특히 지식인 계층에서 이러한 지지는 명확하여,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으로 48년 혁명 당시 독일의 혁명가이자 연설자로 이름을 날렸던 프리드리히 해커 같은 인물은 혁명의 실패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남북전쟁 당시에는 북군 대령(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또한 유럽에 남아있던 이들 사이에도 북부에 대한 지지는 명확하여, 독일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해커와 심하게 사이가 틀어졌던 카를 마르크스 같은 인물조차 그가 미국 이주 후 북군 소속으로 참전했다는 소식에 과거의 앙금을 털어내고 현재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지지의사를 보였다고 할 정도. [49] 남북전쟁의 시발점인 섬터 요새가 위치한 찰스턴 항을 방어하는 요새 중 하나였던 와그너 요새는 북군이 찰스턴 항을 점령하기 위해 수차례 공격했지만 전쟁이 끝날 때 까지 함락되지 않고 버티는데 성공했다. [50] 그의 아들도 입대하였다. [51] 1801에 있었던 1차 바르바리 전쟁과 1815년에 있었던 2차 바르바리 전쟁. [52] 이 내전 전이나 후나 상비군의 존재를 극도로 경계하였다. 특히 뭍의 향토방어와는 직접적 관련이 적으면서 돈은 많이 잡아먹는 해군의 경우, 그 필요성이나 여러 전쟁과 대외분쟁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독립전쟁 이후에는 아예 해체되었으며 미영전쟁이나 1차 바르바리 전쟁 등에서도 해체나 군축의 위기를 겪다가 이 내전 직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상비전력을 보유하고 증기선 철갑선도 도입할 수 있었을만큼 예산 편성도 인색하였다. [53] 1812년 영국과의 전쟁에도 참전한 노장으로 당시에 이미 74세였다. 이 사람도 버지니아 주 출신이지만 연방군에 계속 남았다. [54] 자칭 나폴레옹이었는데 군사적 재능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막상 전선에 나서면 리에게 끌려다니는 게 일상이어서 결국 조셉 후커로 교체되었다. 매클레런은 이 일에 앙심을 품었는지 1864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고 여기서 패배하자 곧바로 유럽으로 떠나버렸다. [55] 보통 사람들은 주로 X자 모양 안에 13개의 별이 박혀있는 깃발이 아메리카 연합국의 국기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군기(Confederate Battle Flag)이자 후기 국기이다. 위와 같이 적, 백, 적색 순서의 문양 및 좌측 위의 푸른 바탕에 13개의 별이 원을 만드는 깃발이 초기의 아메리카 연합국의 국기이다( 관련 문서(영문 위키백과)). [56] 지구전을 펼치던 존스턴 장군이 여론에 떠밀려 물러나고 젊고 저돌적인 후드 장군이 임명되었는데, 정작 후드도 역공을 시도하다 실패한 후 애틀랜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했고, 북군은 애틀란타에 무혈입성하게 된다. 후드는 이후로도 지나치게 공격적인 지휘로 북군의 승리에 혁혁히 기여한다. [57] 심지어 국가를 운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화폐조차도 남부는 북부에게 철저히 밀렸다. 1860년대 미국의 화폐는 "그린백(Greenback)"으로 불렸다. 그린백 도입 이전 화폐인 그레이백은 종이에 인쇄를 하는 방식이라 위조에 매우 취약했다. 이에 캐나다의 토마스 헌트 교수가 특수 녹색 잉크를 사용한 그린백을 개발하였고, 북부에서 이것을 도입한 것이다. 한편 조폐창을 비롯한 대부분의 재정 기관이 북부에 남아있었고 그린백 인쇄기술도 부족하였기 때문에, 남부는 구식 제조 방식으로 만든 그레이 백을 사용하였다. 심지어 지폐 종도 통일되지 않아서 전쟁 기간동안 총 72총의 지폐가 발행되었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덕에 남부 화폐의 가치는 땅을 치게 되었고 심지어 북부의 필라델피아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던 새뮤얼 업햄이라는 기업가가 신문지에 실린 그레이 백을 보고 기념품 용도로 그대로 복제하여 발행한 지폐보다 그 질이 조잡하여(...), 아예 밀수업자들이 남부연합에서 공식발행한 그레이 백이 아닌 업햄의 기념품 화폐를 가지고 사기를 치고 돌아다녔을 정도였다. 이때 업햄이 그레이 백 100달러를 5센트에 팔았다고 하며 남부연합의 화폐가치는 완전히 나락으로 가고 말았다. [58] 종종 '남부의 농업은 면화, 담배 등 상품작물 재배에 중점을 두었기에 막상 식량 생산에서 북부에 비해 열세였고, 이것이 남군의 부족한 식량보급의 원인이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정확하다고 보기 어렵다. 인구에 비해 광대한 경작지에서 규모의 경제를 통한 농업 경영이 가능한 미국의 특성상 남북부 모두 당시 세계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충실한 농업 생산력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남부의 식량작물 생산력은, 곡물을 대규모로 수출하여 막강한 외교적 카드로까지 활용하기까지 할 수 있던 북부에 비하면 열세였다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 자기네 군민을 부양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반론] (전쟁 말기에 이르러 남부연맹이 영역의 대부분을 점령당함으로써 생산력을 상실하고 붕괴 직전에 처한 이후는 논외.) 이 점은 농촌보다 식량 보급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도시인데도 애틀랜타를 비롯한 남부의 주요 도시에서 북군 병사들의 불평 못지 않게 배부른 불평이 나왔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양고기나 쇠고기는 부자들이 아니면 입에 대기도 어려울 정도로 비싸졌고, 밀가루 가격 역시 봉쇄 이전에 비해 10배 이상 폭등했다.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옥수수 가루와 야채, 닭고기뿐이었다."고. 진짜 문제는 후방에 아무리 식량이 충분히 있어도 이를 전선이나 도시로 운반할 여력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이었다. [59] 당시 유행한 것이 "오늘 아침은 커피 베이컨 빵, 점심은 베이컨 빵 커피, 저녁은 커피 빵 베이컨(...)과 같이 순서만 바꾸며 노래 부르는 거였다. 실제로 이 식단은 당시의 유럽 중산층의 식생활보다도 더 나은 수준이었다. 물론 고기라 해도 신선한 고기가 아닌 장기보존용 훈제나 염장 고기( 베이컨 등)이고, 군대 식단의 특성상(...) 명목상의 식단보다 실제 나오는 요리의 질은 좋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60] 돈 많은 부자들은 징집을 피하는 예외는 북부도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더 심각해서 뉴욕에서는 폭동까지 터졌다. [61] 로버트 E. 리, 토마스 잭슨, 제임스 롱스트리트 등의 장군들은 모두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이다. [62] 1780년대생, 즉 18세기 사람도 섞여 있었다. [63] 당시 계급은 대령. [64] 장성들 가운데 극히 드문 1800년대생이었으며 동시에 최초의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성이었다. 고위급인 장성들 중에서 유일하게 현장지휘가 가능한 나이였고, 실제로 남부로 붙자마자 남부측 장교단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장성으로 곧바로 진급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현역이었다. [65]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군사대학으로 미국 ROTC 제도의 산실. [66] 본디 이 '양키'란 말은 남부 사람들이 북부인들을 경멸하여 부르던 멸칭이었다. [67] 그리고 미국은 간선 선거제이므로 선거인단 수가 중요하지 유권자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앨 고어나 힐러리 클린턴이 지지하는 유권자 수는 많았어도 결국은 낙선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단, 애틀랜타 함락 이전에는 링컨이 진지하게 재선이 어렵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던 상황이기는 했다. [68] 애시당초 이대로 가면 남부가 불리했기 때문에 로버트 E. 리는 전황을 바꾸려고 참수작전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69] 대표적으로 제임스 맥퍼슨의 Battle Cry of Freedom. [70] 당시 독일계 국가들은 노예노동에서 손절하고 산업혁명으로 국력을 키워가던 시기였다. [71] 이는 2016년 영화 프리스테이트 오브 존스로 묘사된다. [72] 테네시 주: 31,000명, 버지니아 주: 21,000~23,000명, 노스캐롤라이나 주: 10,000명, 아칸소 주: 9,000명, 그 외의 주들은 각 5,000명 이하. [73] 의외지만 리는 초창기에는 패전을 경험했고 한동안 참모장 격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리가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은 데이비스 대통령과 손발이 잘 맞는다는 면에서 발탁된 반도 전역부터이다. 하지만 그전에도 남군의 존스턴, 보우리가드, 잭슨, 롱스트리트 같은 지휘관들은 대체로 북군 지휘관들보다 우수했다. [74] 이것만 해도 3배가 넘는 군대를 상대로 대단한 업적이기는 하다. [75] 당시 연방군은 민병대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막 전쟁이 개전한 시점이고 전쟁 자체를 북부는 크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나머지 3개월로 계약기간을 정해놓았다. 그러나 운이 없게도 제1차 불 런 전투는 전쟁 발발 3개월 시점이라 정확히 민병대 계약 만료기간이었다. 전역을 코앞에 앞둔 민병대는 당연히 전투에 나서는데 적극적이지 않았고 맥도웰 역시 이런 민병대를 장악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76] 토마스 잭슨은 이 덕분에 스톤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잭슨은 부상을 입었으며, 그의 사단은 50%가 넘는 피해를 입었다. [77] 전략적으로는 매클레런이 옳았고 링컨이 틀렸다. 지형적으로 버지니아를 관통하는 루트는 매우 위험하고, 동서로 흐르는 강이 많아 방어하는 측에게 지리적으로 딱 좋은 반면, 해상에서 돌입하는 상륙작전은 더 안전하고 더 적은 피해로 리치먼드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후임인 미드나 그랜트도 이쪽을 선호했으나, 이미 전임자가 실패한 마당에 링컨이 까라면 까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오버랜드 캠페인을 시작하게 된다. 단, 오버랜드 전역에서 그랜트의 주력군이 육상으로 남하하기는 했지만 벤저민 버틀러의 별동대는 그랜트의 남하와 동시에 반도 전역과 유사한 상륙작전을 진행했다. [78] 양쪽 모두 피해가 비슷비슷하며 전술적 피해가 크게 차이나진 않았지만 북군은 그 자리에서 진출을 멈추고 눌러앉는다. [79] 매클레런이 조금만 용기가 있었거나, 링컨이 조금만 참을성이 있었어도 전쟁은 여기서 끝이었다. 리치먼드-피터스버그 철도는 북군에게 노출되어 있었으며, 몇 마일을 더 물러나긴 했지만 여전히 북군은 리치먼드를 위협하고 있었다. 거기다 모니터와 메리맥 해전(1862년 3월)의 성공으로 제해권을 장악한 북부 해군 덕택에 매클레런은 보급에 지장이 크게 없었으며, 남군의 보급 항구들은 하나 둘씩 북부 해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있었다. 즉 매클레런이 슬금슬금 다시 리치먼드-피터스버그를 포위하고 그냥 거기서 죽치고 있었을 경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북군을 몰아내기 위해 잘 짜여진 진형에 돌격하여 2:1 교환비를 강요당하던 남군 입장에서는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80] 엄청나게 중요한 전투였고, 동부전역에서 더 많은 피해를 주었을지언정 어쨌든 '패배'를 거듭하고 있던 북군의 동부전역에서의 오랜만의 승리였다. 하지만 매클레런은 이 승리 이후 또다시 너무 느리게 움직여 리가 샤프스버그에 전군을 집결시키고 방어선을 구축할 여유를 주면서 남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81] 사우스 마운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리의 메릴랜드 캠페인은 이미 전략적으로 실패한 것이었다. 특히 앤티텀에서 북군의 승리는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의 발판이 되었다. [82] 이때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이집트는 전쟁 덕분에 목화가격 폭등으로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남북전쟁이 종전되고 남부의 목화가 수출시장에 쏟아져 나오자 가격폭락에 직격탄을 맞아 경제위기에 빠져 후일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83] 워싱턴 D.C.로부터 북북동쪽으로 120km 지점이며, 주도 해리스버그(40km 거리)까지 넘볼 수 있는 지점이다. [84] 이후로는 비록 남군이 아무리 북군과의 개별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북부는 압도적인 생산력과 인구로 계속 병력과 장비를 철도를 통해 보낼 수 있었고, 빈약한 남부의 생산력으로는 이를 만회하기가 불가능했다. [85] 남부연합 군대니까 남부연합 달러를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시기 그레이 백이라고도 불리던 남부연합 달러는 북부의 필라델피아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던 새뮤얼 업햄이 그저 신문지를 보고 기념품 용도로 만든, 이른바 '그레이 백'이 밀수업자들에 의해 유통되면서 화패 가치가 폭락해버린 상태였다. 당연히 북부 농민들 입장에서는 값어치도 없는 그레이 백을 몇 장 쥐어주면서 가축을 가져가니 말 그대로 약탈로 볼 수밖에 없었다. [86] 나름 그래도 회유해보겠답시고 메릴랜드 북상 중 남군은 '메릴랜드, 나의 메릴랜드'를 연주했지만 이미 노예주의자들은 토벌된지 오래였고 약탈로 인해 메릴랜드 주민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87] 이를 기억한 북군은 나중에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를 휩쓸 때 그대로 갚아준다 [88] 이 전투 이후 남군은 북진할 동력을 상실해 더 이상 공세를 펼치지 못하고 종전까지 방어전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89] 존 C. 프리몬트의 서부 군관구가 프리몬트 해임 이후 캔자스 군관구와 미주리 군관구로 쪼개졌다. [90] 사실 지원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라이언에게 후퇴를 명령하고 후퇴 예정지였던 일리노이주 카이로로 지원군을 보냈다. 하지만 라이언은 후퇴 대신 더 많은 수의 남군과 맞붙는 선택을 했고 잘 싸웠지만 결국 전사했다. [91] 프리몬트는 군관구 본부인 세인트루이스에서 유럽 귀족마냥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여러 불필요한 물품들을 공적자금으로 자신의 친구들로부터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구매했다고 비판받았다. [92] 링컨은 무엇보다도 당시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켄터키의 민심을 자극할 것을 우려했다. [93] 프리몬트는 이후 동부전선의 산악 군관구로 이동하지만 스톤월 잭슨의 계곡 전역에서 잭슨에게 털린 3명의 북군 장군 중 하나가 되었다. 1862년 6월에는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존 포프 휘하가 되기 싫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났고 이후 다시는 지휘관 보직을 받지 못했다. [94] 당시 켄터키 주지사는 남부연합에 심정적으로나마 동조하던 사람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병사를 모집해달라는 링컨의 요청에 "단 한 사람도, 단돈 1달러도 자매인 남부의 주들을 제압하려는 사악한 목적을 위해 보낼 수 없다"며 거절했다. 물론 남부연합의 모병 요청도 거절하긴 했다. 반면 주의회는 주로 북부의 미 연방을 지지했고, 이러한 양자의 충돌 속에 양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이 중립이었다. 그러던 와중 포크 장군 하의 남군이 모빌 및 오하이오 철도의 종점이자 미시시피 강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콜럼버스를 점령하고, 이에 대응해 그랜트 지휘하의 북군이 파두카를 점령하자, 미 연방을 지지하던 주의회는 남군에 대해서만 철수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버렸다. 물론 분리주의자들은 여전히 켄터키 주 남부~서부에 많이 있었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남부연합을 지지하는 켄터키 주 정부 러셀빌에서 설립되었으며, 남부연합은 1861년 12월에 이들을 남부연합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의하였다. [95] 이때 전사한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은 남군 내부에서 유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 입장에서 굉장히 큰 인적 손실이었다. [96] 사일로 전투에서 죽은 존스턴은 불 런 전투에서 활약한 남군 사령관 조셉 존스턴이 아니라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이다. 조셉 존스턴은 5월 북군의 매클레런을 맞아 요크타운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고 5월 31일 세븐 파인즈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로버트 리로 교체당한다. 존스턴은 전쟁 내내 죽지 않고 잘 살다가 적장이자 친구였던 셔먼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폭우를 그대로 맞으며 추모하다 이로 인해 폐렴에 걸렸고 장례식 10일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97] 모건은 포로로 잡혔다가 탈옥해서 켄터키를 거쳐 남군으로 복귀한 뒤 1864년 9월 전사했다. [98] 이때 18살 북군의 한 소위는 채터누가 전투에서 남군의 중앙을 돌파하는 작전에 큰 공을 세워 최연소 명예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이 18살 소위의 이름은 아서 맥아더 주니어였고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 필리핀 전쟁,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중장까지 오른 아서 멕아더 주니어는 1880년 아칸소 주의 리틀록 병영에서 셋째 아들을 얻었다. 그가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이다. [99] 전역의 막바지를 장식한 프랭클린 전투에서, 후드는 내슈빌로 북군이 후퇴해 토머스와 합류하는 것을 막는답시고 방어진지에서 갖추고 기다리던 스코필드의 지휘 하의 북군에 정면돌격을 명했다가 북군이 약 2,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동안 6 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남북 양측을 통틀어 최고의 사단장급 인재 중 하나로 평가받던 패트릭 클레번(다만 패트릭 클레번은 흑인을 해방시켜서 징병하자는, 당대 남부 정계에 있어 과격한 의견을 내놓았고 이걸 빌미로 상부에 찍혀서 군단장급으로 중용받지 못했다. 클레번의 군사적 재능은 로버트 리가 인정했을 정도였다)이 사망한 것은 물론, 클레번을 포함한 장성급 지휘관 14명, 여단장급 지휘관 무려 55명이 다치거나,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전역의 마지막인 내슈빌 전투에서는 섣부르게 공격을 하지는 않고 수비를 굳혔지만, 약 2대 1의 수적 우위를 가지고 있던 토머스와 스코필드 휘하 북군에게 대패하였다. 그 결과 전역의 시작 때 4만을 넘던 남부의 테네시군은 전역이 끝난 1865년 1월 후드의 상관인 뷰리가드가 남부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에 편지를 보내 15,000명도 되지 않는다고 경고할 정도에 이르렀다. 후드는 얼마 후 테네시군의 지휘권을 내려놓은 이후 다시는 야전지휘권을 받지 못한다. [100] 후드가 셔먼을 쫓는 대신 셔먼의 보급선을 노리고 북쪽으로 진군한 것이 셔먼의 진군을 도와준 꼴이 되어버렸다. [101] 직역하면 나무로 된 머리. 적당히 현지화하면 돌대가리 정도로 번역 가능하다. 단, 이 별명 자체가 후세의 창작이라는 설도 있다. [102] 원래 이게 리의 장기였다. [103] 시겔이 군사 경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앞선 1848년 독일 혁명 당시 시겔도 혁명군 참전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혁명군 정도의 군사경력은 당연히 충분하지 않았고 이후 여러 차례 벌어진 전투에서 연거푸 패배한 정황상 시겔은 여느 정치 군인처럼 통솔력은 좋았을지언정 군사적 재능은 처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104] 헌터는 셰넌도어에서의 게릴라전을 걱정하여 계곡 위로 올라가지 않고 후퇴를 선택했는데, 문제는 워싱턴 방향 길목을 버리고 웨스트버지니아 방면으로 후퇴해서 얼리의 진격로를 제대로 열어준 꼴이 되어버렸다. 헌터는 이 결정에 대해 변명하며 여생을 보내야 했다. [105] 이때 남군의 샤프슈터들의 공격이 링컨쪽으로 집중되었는데 얼마나 극심했는지 위관급 장교 중 하나가 내려오라고, 이 빌어먹을 멍청아라고 소리지를 정도였다고... [106] 얼리의 공격은 그야말로 백악관 문 앞까지 도달한 것으로 얼리가 하루만 빨랐다면 워싱턴에 발을 들일 수 있었을 거라고 그랜트 본인이 직접 언급했을 정도이다. 물론 워싱턴 함락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링컨 정권에 타격을 주고 11월의 선거에서 반전파가 유리해지도록 영향을 미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참고로, 얼리의 워싱턴 D.C. 진격을 저지하는 전투로 하루를 벌어준 북군의 장군이 훗날 미국 최장기 베스트셀러중 하나인 벤허를 집필한 루이스 월러스 소장이었다. [107] 워낙 셔먼의 초토화 정책이 강렬해서 그렇지 셰리든 역시 셰넌도어 계곡의 남부 마을들을 철저히 약탈하고 방화했다. [108] 이때 셔먼이 이끄는 북군은 최초로 연방 탈퇴를 선언했던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조지아주에서의 바다로 행군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약탈하고 파괴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남북전쟁의 시작점이던 섬터 요새 역시 함락된다. 반면 노스캐롤라이나는 사우스캐롤라이나만큼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109] 당시 애퍼매톡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전쟁을 피해 도망간 상태였고 당초 북군쪽에서는 항복 장소로 빈집을 모색하였으나 상태가 좋지 않자 도망가지 않은 한 주민의 집을 징발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110] 당시 항복 조건으로 그랜트는 무조건 항복 그랜트라는 그의 별명과 달리 리와 그의 군단에게 굉장히 자비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군대를 해산하고 병사들은 무기를 반납할 것이며 더이상 연방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것을 요구했던 그랜트는 덤으로 리 장군을 비롯한 남부군 장교들의 개인 무장을 압수하지 않는 엄청난 호의를 배풀었다. 재밌는 건 회담 시작 당시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겠다고 그랜트가 리 휘하에서 멕시코 전쟁 당시 복무했던 이야기를 꺼냈는데 리의 반응은 난 니 들어본 적도 없는데?였다고 한다. [111] 게티즈버그 전투 3일차에 일명 피켓의 돌격이라고 불리는 남군의 대돌격을 이끌었던 조지 피켓도 대표적인 해외 도주자로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뉴베른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사로잡은 제2 노스캐롤라이나 의용 보병 연대 소속 포로 22명을 탈영죄로 총살하였는데 이것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서 캐나다로 도주하였다. 1866년 피켓과 친분이 있던 그랜트가 그를 해당 사건에 대해 사면하면서 귀국하였고 1874년 연방에 대한 반역 행위에 대해 완전 사면되었다. [112] 역설적으로 KKK단을 창설한 네이선 포레스트 장군은 말년에 흑인 차별 주의자에서 전향해 흑인 참정권과 인권운동을 지원하고 참여하여 자신이 창설한 KKK단으로부터 제명당했고 그가 사망했을 때 많은 흑인들이 모여 그들의 민권을 위해 싸운 포레스트를 추모했다. 또한 리에 묻혀서 그렇지 남군의 명장 중 한명이었던 롱스트리트 역시 전후 친구 그랜트를 지지하였으며 경찰과 흑인 민병대를 이끌고 인종차별주의 백인 시위대를 진압하기도 하였다. [113] 특히 남북 전쟁 당시 탈주한 흑인 노예였다가 연방보안관으로 임명돼 평생 무법자를 사냥한 배스 리브스가 대표적인 예다. 서부극에서 출신이나 과거를 알 수 없는 흑인 총잡이는 이 사람을 모티브로 봐도 무관할 정도. [114] 원문: And although he may be poor, he shall never be a slave. 이 노래는 남부연합군 병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물론 가사는 그들 입장에 맞게 개사했다. [115] 이를 제일 잘 요약한 문장이 있는데 바로 링컨의 '그랜트가 곰을 붙들고 있는동안 셔먼이 산채로 그 곰의 가죽을 벗겨버렸다'가 바로 그 것이다. [116] 본인 기록이나 후대의 평가를 보면 병사들이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것에 심리적인 부담감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함부로 돌격 앞으로! 를 하지 않아서 사병들은 장군을 좋아했지만 빨리 성과를 내야 하는 정치인들은 싫어했다고 한다. [117] 단, 데이비스는 공세적이었던 동부전선 사령관 로버트 리와 사이가 양호해서 결국 리의 북진 전략을 허가하고 병력까지 몰아주었으며, 오히려 소극적이고 병력 유지를 중요시했던 조셉 E. 존스턴과의 사이가 최악이었다. 전쟁 말기에는 아예 로버트 E. 리도 너무 무모하다고 비판할 정도로 공격적이었던 존 벨 후드를 테네시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북부에 대한 역공에 나서는 등 끝까지 공세에 소극적이기만 했다고는 볼 수 없다. [118] 남군이 계속 패하기만 한 서부전선은 말할 것도 없고, 동부전선의 리도 계속 이기기만 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앤티텀, 게티즈버그에서 패하면서 동력을 잃었을 뿐더러 이긴 전투에서도 피해가 막심했으니 전략적 상황이 나아지기 힘들었던 면도 있다. [119] 이 경제력과 생산력 문제는 당연히 남부의 무기 생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 초기에는 어찌어찌 자체생산을 하거나 유럽에서 밀수해오거나 하면서 버틸수 있었지만 전쟁이 지속될수록 모든게 부족해져서 총을 만들려해도 원자재(목제, 철강등)가 부족해서 무기 공장에 주문을 넣어도 도저히 생산도 못하는 상황이 나오고 부족하게라도 생산된 무기에 대한 돈조차 제때 못주는 막장스런 상황이 나오고 있었다. 탤러시 카빈 콜롬버스 카빈 빌하츠, 할 카빈등의 남부연합 총기 소개에서 꼭 나오는 말이 원자재, 인력, 공장이 부족해서 계약 수량을 못채웠다 라는 말이다. [120] 녹색 계열의 특수 잉크를 사용하여 만들어졌기에 그린백이라고 불렸다. [121] 그것도 실물과 동일한 크기였다.(...) [122] 당시 한달 남군 1명에게 공급되던 고기의 양이 250g이었다. 북군쪽에서는 딱딱하다고 건빵 못 먹겠네 하고 짜증내고 있을 때 남군은 한달에 250g 고기를 오매불망 기대해야 했던 것이다. [123] 대다수는 분리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연방에서 사전에 제압해버렸지만 켄터키처럼 침략당해서 그 반동으로 연방에 남은 경우도 있었다. 어쩌면 남부연합이 북진공세에 소극적이었던 것에 영향을 줬었다. [124] 웨스트, 이스트도 아닌 이런 애매한 명칭이 그 흔적. [125] 북군에서 남군을 흔히 비하할 때 구사한 호칭으로 연방정부가 남부연맹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반란집단으로 규정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군 스스로는 딕시(Dixie)라고 불렀다. [126] 당시 인구가 3000만 명을 갓 넘긴 상태의 미국이 남북 합쳐서 군인만 65만 명 이상이 죽었고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1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127] 전쟁을 제외하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사망자가 가장 많다. 그러나 그때에 비해 인구가 10배나 불어난 뒤의 일이라 비율로는 따라오지 못한다. [128] 뒤늦게 남부에서도 전쟁 말기에는 '독립을 위해서라면 영국 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예 해방도 가능하다'란 주장을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미 전세를 뒤집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129] 다만 링컨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인해 이들 급진파들의 관점에 힘이 크게 실렸고 한동안은 남부지역의 통치가 이들의 뜻대로 영향을 받는다. 밑에 후술하듯이 10년이 넘는 군정과 남부인들의 권리제한 등. [130] 연방 공직 임명시 남부인은 무조건 배제에 충성 서약을 하지 않을 시 참정권 등의 시민권 행사 불가는 덤. [131] 사단장이 새 국기를 보내줘서 이틀만에 성조기로 교체했다. [132] 더 퍼시픽의 모티브가 된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에도 이 일이 언급되는데 남부기가 슈리성에 게양했다는 것에 남부 출신 병사들은 환호했는데 이를 듣고 북부 출신 병사들이 매우 크게 화를 내서 남부 출신 병사들이 어쩔줄 몰랐다고 한다. [133] 미국의 옆나라인 캐나다 퀘벡 주와 앨버타 주, 서스캐처원 주 등지에서 연방 탈퇴와 분리독립에 대한 주장이 한때 나왔거나 나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 심지어 캐나다는 자국 헌법에 연방 탈퇴에 관해서 주와 준주 지역의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주민투표 시행을 거쳐야 한다는 내용의 헌법조항까지 있다. 실제로 퀘벡 주가 이를 이용해 1980년과 1995년에 두 번이나 연방 탈퇴, 분리독립을 시도하려 한 바 있었다. [134] 이 공백기간 대정봉환 무진전쟁이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조선도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의 개입으로 일본의 영향이 적어진 몇년 사이에 광무개혁의 성과가 꽤 나오기도 하였다. [135] 애시당초 미국의 서부개척사는 대한민국 학생들 입장에서 봤을 때 '미국이 서부로 진출했다'정도만 알아도 아무 문제 없다. [136] 강화도에서 조선군은 상대에게 극소수의 피해를 입혔을 뿐, 지휘관이 전사하고 군기까지 빼앗기며 패했다. 이때 전리품이 된 어재연 수자기는 136년 만에 돌아왔다. [137] 모든 국가적 역량을 동원해서 싸우는 총력전은 이미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가 완전하지는 않아도 선보인 바 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총력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138] 특히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과 달리 후장식 소총을 도입하면서 포복 사격을 채택하는 등 빠르게 전술이 변화하고 있었다. [139] 비행기는 없지만 열기구를 통해서 정찰을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140] 철도를 두고 벌어진 싸움에선 장갑열차가 전차의 역할을 했다 [141] 저격수 자체는 미국 독립 전쟁 시대에도 켄터키 라이플을 들고 산병전을 벌이던 미닛맨들이 있었던 만큼 예전부터 있었고, 이후 영국이 아예 라이플 연대를 창설하며 별도 경보병 편제를 해왔지만, 샤프슈터처럼 일반부대에 섞여 저격을 하는 개념과는 달랐고, 당시 전열보병 교리상 허용될 수 없는 개념이었다. [142] 남북전쟁 최대 기병전이었던 브랙디벅역 전투에 참관한 유럽무관들은 양 군의 기병대가 유럽처럼 세이버를 뺴들고 뒤엉켜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권총을 쏘아대다가 전열이 무너지자 마침내 세이버를 들고 싸우는 것을 보고 매우 어처구니 없어했다고 한다. [143] 아마도 그들은 20세기 방식의 을 예측한 것 같다. [144] 출처: 전쟁의 재발견, 마이클 스티븐스 저. 개인화기가 극도로 발전한 현대전에서도 보병들끼리의 교전은 의외로 근거리에서 벌어지는 사례가 많다. KCTC에서 지금까지 벌어진 보병 교전을 분석한 결과 주간 전투 평균 교전거리 50m 이내 70%, 100m 이내 30%, 공격자 평균 48m, 방어자 평균 51m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145] 현대전에서도 탄약이 부족할 경우, 최대한 근접해서 쏘는 것을 선호한다. 더욱이 당대 사용되던 흑색화약은 매연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한발만 일제사격해도 시야가 많이 가려졌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한 롱 웨이 홈(Long Way Home)이라는 이라크전 배경의 실화 드라마에서 분대장이 분대원들이 고립되어 탄약이 고갈될 위험에 처하자 150m 밖의 적은 쏘지 말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있다. [146] 저 유명한 USS 모니터와 CSS 버지니아가 노퍽 앞의 햄프턴 로드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어느 한쪽도 침몰하지 않았고 서로 탄약 부족의 문제로 철수하며 무승부로 끝났다. 다만 CSS 버지니아의 전략 목표가 노퍽을 포위하는 연방 해군을 격퇴하는 것이었으나 봉쇄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북부의 전략적 승리였다. [147] 문제는 육각형 탄환이 육각형 총열에 정확하게 밀착되기 때문에 장전할 때마다 망치를 이용해 꽂을대를 때려가며 장전해야 해서 퍼커션 캡을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전속도가 최소 1분에 달하는 소총이었다. [148] 저격을 두려워하던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이 거리라면 코끼리도 맞추지 못할 거라며 몸을 훤히 드러내다 900야드(약 822m) 밖에 있는 샤프슈터에게 머리를 맞아 전사했다. [149] 지휘관이 자주 바뀌었다. 첫 지휘관인 매클레런은 너무 신중해서, 북버지니아군을 몇번 끝장낼 수도 있었지만, 매클레런이 퇴각하는 북버지니아군을 몇번이고 링컨이 추격해서 끝장내라는데 추격을 안하자 해임되었고, 그 다음으로는 번사이드가 지휘관이 되었지만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패배 후 해임, 그 다음으로 후커가 지휘를 맡았지만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리보다 2배 정도 많은 133,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패배해서 해임, 미드는 게티즈버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후에 미시시피 강이 빅스버그 포위전의 승리로 북군 수중에 떨어지자, 링컨이 그랜트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150] 정식 명칭은 미시시피 군관구(Military Division of the Mississippi) 사령관. 서부전선의 모든 야전군을 총괄했다. [151] M551 셰리든 전차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152] 인디언 전쟁 당시 초토화 전술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진압하면서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라는 희대의 발언을 남겨 좋은 XX는 죽은 XX라는 말의 유래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153] 이후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154] 패러것급 구축함이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155] 당시 총리는 파머스턴 자작. [156] 당시 통치자는 나폴레옹 3세. [157] 본토 산업력으로 비교하면 이미 1860년의 미국은 프랑스는 확실하게 앞서고 영국과 엎치락뒤치락 하는 상황이었다. [158] 미국(북부) 정부는 영국 때문에 전쟁이 더 길어졌다고 분노하며 영국에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이에 영국도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국제 중재를 거쳐 1871년 워싱턴 조약을 맺어 영국이 1550만 달러 상당의 금을 미국에 배상했다. 이에 대해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은 "보상액은 (영국이 얻게 될) 도덕적 가치에 비하면 먼지에 불과한 수준"이라 말했다고 한다. [159] 이른바 Erlanger Loan이라고 한다. [160] 더 심한건 이 짓거리가 비단 남북전쟁 때만이 아니라 남부 주들이 연방정부에 불만 가지면 내놓는 레퍼토리였다는 거다. 밀러드 필모어 때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탈퇴드립 쳐서 필모어가 그럼 군대 보낼테니 해보시든가로 나와서 무산시키게 만든 바 있다. [161] 전술했듯이 전쟁의 시작인 섬터 요새 전투도 숨어있던 남부군이 짜짠하고 튀어나와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이미 차례로 연방군 요새를 접수하던 남부군들이 철수를 요구하며 수개월 대치하던 것이 북부의 보급 시도가 기폭제가 된 것이다. [162] 그 덕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노예를 철폐한 링컨은 워싱턴과 함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전 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은 국가를 둘로 쪼개지는 걸 방치한 무능한 인간으로 까인다. 다만 제임스 뷰캐넌이 남부 주의 편을 들어줬지만 남부의 무력행동에 대해선 단호했다. [163] 또 다른 가정은 미국 독립전쟁 정도가 될 수 있지만, 이건 너무 민감하다 싶었는지 생각보다 자주 쓰이지 않는다. 조지 워싱턴의 입지는 한국으로 치면 거의 세종대왕+ 이순신이기 때문. 물론 미국 독립 전쟁에서의 패배를 소재로 하는 작품도 상당수 있다. 해리 터틀도브의 The Two Georges, 해리 해리슨의 A Transatlantic Tunnel, Hurrah! 등이 대표적. [164] 300달러의 면제비를 내거나 대리복무자를 입대시키면 면제가 가능했다. [165] 다만 당시에는 PTSD의 개념이 뭔지도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66] 당시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문헌에서 특정 단어가 문맥에서 어떻게 쓰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글로 쓰고, 해당 글들을 검토하여 퇴고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글들을 집단지성에서 얻기 위해, 머리는 대영제국 국민이라면 누구든 편지를 보내 참여할 수 있도록 홍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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