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발 얼리 Jubal Ear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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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주발 앤더슨 얼리 Jubal Anderson Early |
출생 | 1816년 11월 3일 |
미국 버지니아주 프랭클린 카운티 | |
사망 | 1894년 3월 2일 (향년 46세) |
미국 버지니아주 린치버그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아메리카 연합 육군 |
최종 계급 | 아메리카 연합 육군 중장 |
복무 기간 |
1837~1838 1847~1848 1861~1865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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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버지니아주 프랭클린 카운티 출신으로 1837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하지만 1년만에 제대해 휘그당 소속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프랑클린 카운티 하원의원을 지냈다. 이후 미국-멕시코 전쟁당시 군으로 복귀해 제1버지니아의용연대장으로 전투를 치렀고 전후 정계로 복귀했다.1850년 총선에서 낙선했고 강경 노예론자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남군 소속 제24버지니아보병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제1, 2차 불런 전투, 7일 전투, 앤티텀 전투, 프레데릭스버그 포위전, 게티즈버그 전투등 큰 전투에 참가했다.
로버트 E. 리의 추천으로 임시 중장으로 승진했고, 오버랜드 전역에서는 병에 걸린 A. P. 힐을 대신해서 3군단장을 임시로 맡았다가 리처드 유얼 대신 2군단장이 되었다. 셰넌도어 계곡을 침공한 데이비드 헌터의 북군에 맞서 린치버그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리와 북버지니아군이 피터스버그 포위전으로 몰린 뒤, 얼리는 휘하 2군단을 중심으로 한 셰넌도어 계곡 방면군의 지휘권을 얻어 북부를 침공했다. 이는 남부연합의 마지막 북부 침공이었다. 얼리는 모노커시 전투에서 루 월러스의 북군과 싸워 승리하기는 했지만 진군이 지체되었고, 워싱턴 코앞의 포트 스티븐스까지 도달했다가 후퇴했다. 이후 얼리는 1864년 7월부터 8월 초까지 셰넌도어 주변 지역에서 활발한 게릴라 및 파괴 공작을 벌였다.
연방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얼리를 저지하기 위해 필립 셰리든을 셰넌도어 계곡으로 파견했다.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던 얼리는 제3차 윈체스터 전투, 피셔스 힐 전투에서 패배하며 계곡 위쪽으로 쫓겨났다. 10월 19일 시더 크릭 전투에서 얼리는 셰리든이 자리를 비운 틈에 북군을 기습하여 와해시킬 뻔 했지만, 보급이 부족하여 약탈에 열중하던 남군은 돌아온 셰리든이 규합한 북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후 얼리의 병력 대부분은 피터스버그의 리에게 다시 소환되었고, 얼리는 일개 여단급 소규모 병력으로 항전하다가 1865년 3월 웨인스보로 전투에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에게 궤멸되었다. 얼리는 겨우 리에게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리는 이미 2군단장으로 얼리의 옛 부하 조지 B. 고든 소장을 신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리는 지휘권을 잃었다.
1865년 4월 리와 북버지니아군이 항복했을 때 얼리는 항복을 거부하고 텍사스로 도망친 뒤 국외로 탈출해 멕시코, 쿠바, 캐나다로 옮겼다. 앤드루 잭슨의 사면으로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죽기 전 강경한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남부연합을 정당화하는 'Lost cause(잃어버린 대의)' 주장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공화당을 지지한 제임스 롱스트리트를 변절자라고 비난하고 율리시스 그랜트를 백정이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1894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