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영국 내의 자영농들을 보호하고자 수입산 곡물에 관세를 매기는 법안.2. 내용
비슷한 내용의 법안은 중세 이후부터 계속 존재했지만,[2] 역사상 주로 얘기하는 곡물법은 1815년에 만들어진 법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도시화와 산업 혁명에 따른 인구(특히 도시 노동자) 증가와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인해 영국 내에서의 식량 수요는 크게 증가한 상황이었다. 농업생산량도 농업 혁명을 통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지만 아직 식량 수요를 전부 커버할 정도는 아니라서 곡물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덕분에 지주 계층들은 막대한 이득을 거둬들인다.그런데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 수요가 줄어들자 곡물 가격이 이번에는 추락을 거듭하게 된다. 당시 지주 귀족 계층이 다수였던 영국 의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고자 '소맥 1쿼터(약 12.7 kg)당 가격이 80 실링(4 파운드)[3]이 될 때까지는 외국산 소맥의 수입을 금지한다.'라는 규정이 만들어진다.
문제는... 이 80실링이라는 기준액에 법안 상정 후 곡물가격이 수십년이 지나도록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1828년, 영국산 곡물의 가격 변동에 따라 관세율도 변하도록 규정한 '신곡물법'이 제정되었지만, 곡물법이 지주계급의 이익만을 위하는 법임에는 변함이 없어 도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민들은 작황과 관계없이 늘 비싼 빵을 사먹어야 했기 때문에 이 법에 대한 격렬한 반대운동이 벌어진다.
게다가 산업가 계층에게도 곡물법은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1830년대가 되면 1차 산업 혁명을 이끌었던 섬유 공업이 점차 레드오션이 되면서 이윤율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는데, 산업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이 이윤율 하락을 매우려고 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냉혈한 자본가일지라도 임금을 최저 생계비 이하로 깎아버릴수는 없는 노릇이었는데(굶어죽은 시체는 일을 못한다!)[4], 최저 생계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식비가 곡물법으로 인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5] 1839년 맨체스터에서 결성된 자본가 중심의 반-곡물법 단체가 결성되었고, 이 단체를 선두로 몇몇 정치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마침내 곡물법은 1846년 폐지된다.
3. 영국 역사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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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물법은 영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법안이기도 한데, 우선 이 곡물법의 타당성을 논하는 과정에서
자유무역이라는 경제학적 개념이 등장한다.
데이비드 리카도와 같은 일련의 경제학자들이 외국산 곡물의 수입과 이를 통한 영국산 공업품 수출등을 연구하면서
비교우위라는 개념이 창출한 것이다.
문제는 보호무역이 다수이던 당시 사회에서 씨알도 안 먹혔다는 거... - 또한 보통 선거가 도입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 법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인 도시민에게는 이 법을 폐지할 정치권력이 없었기에[6] 선거권과 관련된 문제의식이 생기게 된 것이다.
- 또한 이 법이 폐지된 시점이 아일랜드 대기근의 시기와 겹친 덕에 사태 해결에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었었다.[7] - 이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곡물법의 혜택을 주로 본 것은 아일랜드의 대지주들이었다. 대기근을 계기로 곡물법을 폐지하자 잉글랜드에 곡물을 수출하던 아일랜드에도 인클로저 현상이 생겼다. 수익을 유지할 수 없게되어 굶주리던 소작농들을 쫓아내고 목축업으로 급속히 전환하는 '축출'이 대거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굶주리게 된 아일랜드인들이 대거 더 발생하게 된다. 전환에 실패한 지주들은 땅을 잃고 함께 미국 이민길에 오르기도 했다.
-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발발할 때, 영국이 중립을 지키는 점에도 영향을 주었다. 곡물법의 폐지로 영국에서 소비하는 곡물중 미국 북부산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30% 가까이 되면서 남부 편을 대놓고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 남부는 농업지대 주제에 면화 재배한답시고 자국군을 굶기는 상황이었다.
[1]
여기서 corn은
옥수수가 아니라 곡물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2]
1689년에도 수입산 귀리 및 밀 등에 관세를 매기는 법안이 있었다.
[3]
2세기 동안의
인플레이션을 거친 21세기 현재 기준으로 약 202 파운드이다. 한화로는 40만원 정도.
[4]
그게 아니더라도 자본가들이 지나치게 임금을 깎아버리면 노동자들은 산업노동자가 되느니 지주 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자본가와 지주는 경쟁 관계일 수밖에 없는걸 감안하면 이는 지주와의 파워게임에서 밀린다는 의미가 된다.
[5]
이런 것과 비슷한 문제는 60~70년대
대한민국에도 있었는데 당시 저임금 정책을 밀어붙이던 박정희 정부가 국민들의 쌀 수요 증가에 골머리를 앓아
혼분식 장려 운동과
통일미 개발에 나섰던 것, 이쪽도 마찬가지로 저임금을 밀어붙여야 하는데 쌀 수요가 증가해 쌀가격이 오르는 마당에 아무 대책도 없이 저임금을 밀어붙이면 안되어서 대책으로 이런걸 내놓은 거다.
[6]
요새야 도시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문제지만, 중세의 봉건적 관습체계가 아직 잔존한 당대 영국에서 권력은 지주들에게 있었고 지주들의 거점이 어딘지를 생각해보면...
[7]
정확히 말하자면 도움을 줬다기보다, 미미하게나마 아사자를 줄여주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곡물법이 폐지되었다고 해도, 기근에 시달리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그것을 돈을 주고 구입할 여유는 별로 없었을 테니. 사실은 곡물법 폐지로 아일랜드 농업의 구조조정이 앞당겨지며 더 많은 소작농들이 대거 일을 잃게 된다. 문제는 싼 농산물 공급이 아니라 아일랜드에서 돈을 벌 일거리가 필요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