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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3:48:34

콩가루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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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형
2.1. 가족 구성원 간의 사이가 좋지 않을 경우2.2. 가족의 관계가 비정상적인 경우2.3. 가족 구성원들이 악할 경우
3. 현실 속의 콩가루 집안들
3.1. 주요 사례
3.1.1. 한국 사회의 콩가루 집안3.1.2. 로마 왕족 황족 상당수3.1.3. 측천무후 일가3.1.4. 후세인 일가3.1.5. 고대 아일랜드 밀레시안 왕가: 기원전 1700년(?)~(?)3.1.6. 양무제 소연 일가3.1.7. 프랑크 국왕 일가( 메로베우스 왕조, 카롤루스 왕조)3.1.8. 오스만 황제 일가
3.2. 그 외
4. 픽션 속의 콩가루 집안들5. 관련 문서

1. 개요

Q: 63빌딩에서 일가족이 자살을 시도했으나 아무도 죽지 않았다. 왜일까?
A: 아빠는 기러기 아빠, 엄마는 새(bird)엄마, 큰아들은 비행(飛行)청소년, 작은아들은 날라리

-콩가루 집안과 관련된 블랙 코미디 중 하나.[1]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단어로 본래 가족 간의 사이가 매우 나쁘고 화합이 되지 않아 가정불화를 겪는 가족을 뜻한다. 콩가루는 웬만해선 서로 뭉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이 서로 들러붙지 않도록 콩고물로 쓰이는데, 콩가루의 이런 성질에 빗대서 '콩가루 집안'이란 말이 생겼다. 하지만 현재는 그 의미가 확장되면서 정상적인 범주에서 아주 심하게 벗어난 가족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모두 싸잡아 콩가루 가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2. 유형

이 문서에서는 콩가루 집안을 몇 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해 놨는데 심한 경우엔 저 유형 중 둘 이상이 나타날 때도 있다. 특히 옛날의 왕조들에서는 저 세 가지의 부류를 모두 발견할 수 있으며 한 사람이 모든 케이스를 섭렵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2.1. 가족 구성원 간의 사이가 좋지 않을 경우

가족 간에 분란이 일정 수준을 지나치면 욕설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 혹은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거나 자식이 부모에게 패륜을 저지르는 경우, 정신질환을 앓는 가족을 병원에 보내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환자 탓만 하며 병을 키우는 경우 등이다. 심지어는 가족 구성원끼리 서로 고소하고 존·비속상해, 살해 등으로 치닫는 경우도 드물게 나타난다. 이 케이스가 '콩가루 가족'의 본래 의미다.

즉, 혈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남보다 못한 경우를 말한다.

2.2. 가족의 관계가 비정상적인 경우

가족 간의 항렬이나 촌수 등이 엉켜 일반인이 보기에 심히 불쾌감을 느낄 지경일 때 이 표현을 쓴다. 이는 사람마다 취향이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쪽이 옳다고 정의하기는 힘들다. 한 가지 예로 겹사돈[2]이 있는데 유전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문제가 없지만[3] 많은 사람들이 겹사돈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고 있으며 보고 또 보고 넝쿨째 굴러온 당신 등의 드라마에서도 소재가 되었다.

이는 그나마 상식적인 범주이지만 몇몇 막장 드라마에서 나오는 출생의 비밀급의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면 이런 집안을 흔히 ' 개족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이보다도 더 시궁창으로 떨어질라 치면 가족 구성원 사이의 육체적 관계까지 가게 된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근데 따지고보면 지금이야 근친혼이 금기시되지만[4] 옛날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특히 왕족 및 귀족 계층에서 권력의 유지를 목적으로 한 근친혼이 성행했다는 점이나[5] 문화권마다 근친혼으로 인식하는 범위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6] 마냥 창작물 속의 얘기는 아니다.

2.3. 가족 구성원들이 악할 경우

위의 두 경우가 아니더라도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악질이라거나 아예 가족 단위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에도 이 표현을 쓰기도 한다. 가문에 흐르는 악의 피와도 관련 있는 경우일 수 있다.[7] 사실 이 경우는 콩가루 가족이란 말에는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족 단위의 범죄자들은 가족 구성원들끼리 잘 지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야 공범으로서 행동하기가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기술한다.

3. 현실 속의 콩가루 집안들

목록을 보면 왕족, 귀족, 정치인 가문 등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콩가루 집안 사례가 많은데,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과 권력 앞에 부모, 형제, 자식도 없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보여준다.

물론 높으신 분들이 다 막장이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워낙 대중의 주목을 받기 쉬운 자리에 있다 보니 그만큼 구설수에 오르내리기도 쉬워서 그런 측면이 있긴 하다.

특히 재벌 가문들은 상속 문제나 경영권 문제로 형제자매끼리 사이가 나빠지는 일이 흔한데, 돈과 권력 말고도 부모가 자녀들을 편애한 결과 성인이 된 자녀들 사이에 상속문제가 생기기 이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경우도 많다. 편애가 없었다면 서로 타협점을 찾기가 그나마 수월했겠지만 편애로 인해 서로 타협은 커녕 법정 싸움으로 이어진 것이다.

범현대가는 형제간의 우애는 범LG가와 마찬가지로 좋은 편이지만 왕자의 난으로 인하여 현대그룹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그룹 등으로 쪼개지는 일이 생겼다.

3.1. 주요 사례

3.1.1. 한국 사회의 콩가루 집안

3.1.1.1. 연개소문 일가
연개소문은 642년 영류왕과 100여명의 중신들을 한꺼번에 살해하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고씨의 나라인 고구려를 사실상 연씨의 나라로 만들었다.

연개소문 본인이 살아있는 20여년 동안은 어떻게든 나라를 유지했지만, 문제는 그가 늙어 죽은 후에 터졌다.

연개소문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구심점이었던 그가 사라지자, 연개소문의 세 아들을 비롯한 연씨 일가는 서로 의심하며 싸웠는데, 차남 연남건과 삼남 연남산이 승리하자, 장남 연남생 당나라에, 삼촌 연정토 신라에 성을 바치며 항복했다.

결국 이들이 불러들인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의 700년 사직이 무너지는 건 연씨 일가가 집권한 지 불과 26년만의 일이었다.
3.1.1.2. 신라 하대 국왕 일가
통일신라의 지배층인 진골은 모두 혈연으로 엮여 있었는데, 이는 김알지[8] 또는 김성한[9]을 시조로 하고 18대 내물 마립간 이래 왕위를 독점하던 기존 신라계 김씨 일가는 물론이고, 이전의 왕실인 박씨 일가[10] 김유신[11]으로 대표되는 금관가야계 김씨 일가도 마찬가지였다.[12]

통일 이전의 28대 태종 무열왕부터 시작된 신라 중대 왕실은 36대 혜공왕 치세까지 부계 혈통으로 세습을 이어갔고, 덕분에 신라는 200여년에 걸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혜공왕 치세에 일어난 온갖 사건사고로 인해 정국이 불안해졌고, 급기야 국왕이 살해되기에 이르렀다.

혜공왕이 누구에게 살해당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13], 이로써 신라 중대는 막을 내리고 신라 하대가 시작되었다.

신라 하대의 첫번째 국왕인 37대 선덕왕 김양상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은 후, 38대 원성왕 김경신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왕위 계승 서열이 더 높았던 김주원을 제치고 즉위했으며[14], 그의 아들인 39대 소성왕 요절한 후 즉위한 어린 손자인 40대 애장왕은 삼촌인 41대 헌덕왕에 의해 살해당했다.

헌덕왕의 동생으로서 왕위를 계승했던 42대 흥덕왕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을 때는 김균정과 김제륭이 왕위를 다투다가, 김제륭이 김균정을 살해하고 43대 희강왕으로 즉위했으나, 협력자였던 김명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살해하고 44대 민애왕으로 즉위했다.

그런데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을 이끌던 군벌 장보고에게 의탁하며 와신상담하고 있었고, 그가 장보고와 함께 민애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45대 신무왕으로 즉위했다.[15]

이후에는 유혈사태를 동반한 왕위 계승권 분쟁이 더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나, 이미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고, 결국 호족이 급성장하여 문무왕 이래 통일국가를 유지하던 신라는 다시 셋으로 쪼개졌다.

셋으로 쪼개진 신라에서는 52대 효공왕 사후, 왕위가 53대 신덕왕 박경휘에게 넘어가면서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 왕이 즉위했다.

이후에는 박씨 일가가 신라를 지배했지만 55대 경애왕 서라벌을 침공한 후백제 국왕 견훤에 의해 살해당하는 참사가 터진 후, 다시 왕위가 김씨에게 넘어갔다가, 56대 경순왕 김부가 935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며 박혁거세 이후 천여년을 이어온 신라의 사직을 마감했다.
3.1.1.3. 견훤 일가
3대에 걸친 콩가루 집안이다.

아들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이 된 이후에도 아버지 아자개 상주[16] 일대에서 독립 세력을 유지하다가, 아들의 라이벌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그 땅을 바쳤다.

견훤 본인도 장남 견신검 대신 넷째 견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다가 결국 신검이 그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까지 금산사에 유폐시켰다.

곧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과거의 주적인 왕건에게 귀순했고, 왕건과 함께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본인이 세운 나라를 스스로 멸망시켰다.

이후 신검은 왕건에 의해 사면받았지만 더 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아서 비밀리에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견훤은 후백제 멸망 이후 등창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하는데, 신검이 사면받은 것에 울분이 터져서 그랬다는 설이 잘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3.1.1.4. 백두혈통 김씨 일가
백문이 불여일견. 형제끼리는 김정남 피살 사건이 발생하고 부자간에는 김일성 암살설 같은 괴소문까지 돌 정도로 가족 구성원 간의 불화가 매우 심한 데다 여성편력으로 비정상적인 관계도 여럿 있다. 다만 현재 김정은과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은 김정은이 요직에 앉힐 정도로 사이가 좋으므로 예외.
3.1.1.5. 일부 재벌
재벌은 그 지나치게 큰 재산과 이권을 가족의 확대로 나눠갖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재산권 분쟁이 발생하고, 이 중 상당수는 이후 그룹이 찢어지고 나서 원수지간이 된다.

왕자의 난으로 유명한 삼성그룹 2세 승계가 그러하고, 형제들끼리 일일이 그룹을 이리 찢고 저리 찢은 롯데그룹 신격호와 그 형제 및 아들들의 분쟁도 잘 알려져 있다.[17] 물론 이들도 범한진가에 비하면 약과다.

한진그룹 범한진가가 콩가루 재벌 가문 중 가장 극심한데 아버지 조양호부터 비리를 저질러서 전혀 깨끗하지 못한 인물인 데다 조남호를 비롯한 동생들과의 분쟁으로 한진그룹이 찢어지게 만든 과오를 저질렀다. 장녀 조현아 땅콩 회항으로 대한항공의 명예에 먹칠을 했고, 아들 조원태 누나보다 더 심각한 울트라 막장 행실을 보여줬다. 막내 겸 차녀 조현민 언니의 행패를 임직원 전부에게 책임전가를 하는 듯한 발언 같은 경박하고 무책임한 언행들로 물의를 빚었고, 내부고발에 대한 복수를 암시하는 문자를 보내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가 회사 직원과 광고대행사에 갑질과 욕설로 물의를 일으켰다.

특히 콩가루 집안의 끝장은 그룹 오너가 노쇠해서 경영을 못 하게 될 때 2세로 승계하는 과정에서 비리, 횡령 등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검/경에서 수사할 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오너가 고령에 노쇠하면 형 집행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해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비리혐의를 다 떠넘기고 치사하게 자기들만 살려는 후레자식들이 재판정에서 속출한다. 대표적으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뇌물 혐의로 수사를 받던 신동빈이 청탁과 뇌물 출처에 대해 아버지 신격호가 시켰다고 떠넘기거나, 2008년 차명계좌 비자금 수사 때 돈의 출처를 아버지 이병철의 돈이라고 떠넘긴 이건희 등이 있다. 이건희는 아이러니하게도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2020년에 작고하기까지 6년 동안 공식석상에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못한 가운데 3세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다스 소송비 대납 사건 수사 과정에서 아들 이재용이 대납한 다스 소송비의 자금 출처를 아버지의 것이라고 떠넘기면서 10년 전 자신이 했던 걸 고대로 돌려받았다.
3.1.1.6. 박정희 일가
1974년 광복절 행사 당시 배우자 육영수 문세광 총격에 사망하고, 5년 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본인이 자기 부하에 의해 피살된 후 자녀들이 육영재단의 운영권을 두고 두 차례씩이나 싸움을 상당히 벌였다.

그나마 박정희와 전처인 김호남 소생의 장녀 박재옥과 박근혜, 박지만, 박근령, 박재옥의 사촌누나/언니이자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형수 조귀분의 딸인 박영옥[21][22], 육영수의 여동생, 박정희의 처제이자 박근혜와 박근령, 박지만의 작은이모 육예수, 육영수의 언니, 박정희의 처형이자 박근혜와 박근령, 박지만의 큰이모 육인순의 딸, 이종사촌언니/누나인 홍소자는 현재 이들과 달리 별다른 구설수나 논란거리 없이 조용히 살았거나 살고 있지만[23] 이들 박정희 가문과 육영수 가문의 여인 4명은 박근혜, 박지만, 박근령 등 박정희 - 육영수 소생의 자식 3남매들과는 거의 남남 수준으로 거리를 두었거나, 전술한 1979년 10.26 사건과 1974년 문세광이 저지른 총격 테러로 사망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남긴 국가 재산들을 놓고 일으킨 그들의 싸움에 불개입으로 일관했다. 그나마 박지만과 박근령은 현재에 와서는 논란과 비판거리를 일으키지 않고 있다.

3.1.2. 로마 왕족 황족 상당수

로마 기원전 753년[24]부터 기원후 1453년까지 2,206년에 이르는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였고, 그만큼 다양한 형태의 콩가루 집안이 있었다.

3.1.3. 측천무후 일가

측천무후 본인은 물론이고 3대에 걸쳐 아들, 딸, 손자, 손녀 할 것 없이 정치적 암투와 숙청으로 얼룩진 집안이다.

측천무후 본인은 자신의 소생인 장녀 안정공주와 장남 의종을 죽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으며[34] 차남인 장회태자를 쫓아냈다. 그 이후 끝내 자신의 아들들인 삼남 중종과 사남 예종을 차례로 폐위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35]

측천무후가 노쇠하자 신하들이 그녀를 태상황으로 물러나게 하고, 중종을 재옹립하며 안정을 찾아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중종의 황후인 위황후가 막내딸 안락공주와 모의하여 태자 이중준을 모함 끝에 죽이고 정치를 어지럽히기 시작한다. 급기야 모녀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황제인 중종을 독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정치적 능력은 측천무후에게 뒤떨어졌고, 이번에는 예종의 아들인 이융기가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위황후와 안락공주를 제거한 후 아버지인 예종을 다시 옹립한다. 그 이후 이융기는 태평공주마저 정치적 암투 끝에 숙청해 버리고 최후의 승자가 되어 당 현종으로 즉위한다.

이후 현종은 개원지치라는 태평성대를 열었으나, 웃기게도 현종 말년에 이르러 당나라는 점점 기울기 시작한다.

3.1.4. 후세인 일가

3.1.5. 고대 아일랜드 밀레시안 왕가: 기원전 1700년(?)~(?)[40]

밀레시안은 투어허 데 다넌을 축출한 뒤 에린의 패권을 잡았지만 데 다난과 싸우는 도중 왕인 에베르 돈이 마나난 막 리르의 마법에 걸려 사망해버렸다.

그래서 이후 에베르 돈의 동생인 에레원과 에베르 핀이 공동으로 통치를 했는데 에베르 핀이 반쪽 왕으로는 만족을 못하고 형을 공격했다가 패배, 모가지가 잘린다.

이후 에레원계와 에베르계가 피똥싸게 싸우며 서로서로 번갈아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위키백과( #)에 서술되어 있다. 에베르 핀에서부터 후임자 링크를 타고 계속 내려가면 된다.

3.1.6. 양무제 소연 일가


앞서 황족들끼리 황위를 노리고 논쟁을 벌였던 사건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며 양나라는 이를 겪고 얼마인가 무너졌다. 황태자로 임명된 소통은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황제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했으며 소종은 북쪽으로 망명했다. 때문에 삼남인 소강은 후경(侯景)에 의해 즉위했으며 소적과 소속은 그전에 죽었다. 한편 소윤과 소역, 소기는 황위를 다투었고 이 과정에서 소윤이 후경에 의해 피살되었고 소역과 소기는 황위를 위해 다투어 이때 소기는 소역에게 피살되었다. 후에 소강이 살해되고 소역이 황제로 올랐으나 얼마 안 가 서위에 의해 피살되었다.

3.1.7. 프랑크 국왕 일가( 메로베우스 왕조, 카롤루스 왕조)

프랑크 왕국 게르만족의 분할 상속 관습으로 인해 초대 국왕 클로비스 1세 사후 아들들이 넷으로 갈라먹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분열과 통합이 반복되었다.

이 과정이 절대 평화적이진 않아서, 분할 상속으로 나눠 먹은 영토를 통합하는 데는 내전이 수반되었고, 그렇게 내전에 승리한 자도 아들들에게 분할해서 물려주고, 그 아들들이 또(...) 내전을 거쳐 다시 합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왕족들이 땅따먹기에 열중하는 동안 왕궁 집사장에 불과했던 궁재의 권한이 강화되어 나중에는 궁재가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슬람 제국 서유럽 정복을 저지하는 업적을 세워 군사적 명성과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종교적 권위를 동시에 획득했고, 그의 아들 피핀 교황의 승인을 받아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기존 왕실인 메로베우스 왕조를 대체하는 카롤루스 왕조를 세웠다.

카롤루스 왕조는 피핀 - 카롤루스 대제 - 루도비쿠스 1세의 3대에 걸친 세습을 이어갔으나, 루도비쿠스의 아들들이 내전을 벌인 끝에 나라를 셋으로 쪼갰다.

이때 형성된 세 왕국 가운데 서프랑크 프랑스, 동프랑크 독일, 중프랑크 이탈리아[42]의 기원이 되었고, 지금까지 세 나라는 각자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3.1.8. 오스만 황제 일가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트 1세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힌 후, 그의 다섯 아들들이 각자 술탄이라 주장하며 내전을 벌였는데, 그 중에서 메흐메트 1세가 모든 형제들을 처단하고 내전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이게 영 좋지 않은 교훈을 남겨서 이후의 오스만 술탄들은 내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즉위하자마자 남자 형제들을 모조리 살해해야 한다는 악법이 생겼고[43], 이는 1453년에 오스만 군주가 술탄에서 황제[44]로 격상된 후에도 지속되었다.

이는 당장 황제의 정통성을 위협할 만한 형제가 없다는 점 덕분에 황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으나, 정작 황제가 갑자기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해서 황실의 혈통이 끊어지는 참사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17세기 초에 즉위한 아흐메트 1세는 형제들을 죽이진 않는 대신 새장이라고 불리는 밀실에 유폐시킨 후 황족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하여 정치에 개입할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100% 죽음 뿐이었던 이전에 비해 나아졌을 뿐 밀실에 감금된 남자 황족은 언제든지 황제의 입맛에 따라 처형될 가능성이 존재했고, 실제로 밀실에 감금됐다가 끌려나와 처형된 황족도 꽤 있었다.

황제가 갑자기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는 바람에 밀실에 감금되었던 황족이 새 황제로 즉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수십년 동안 방구석 폐인으로 살아서 정치 이전에 일상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기대할 수 없는 인물이 황제가 돼서 삽질을 일삼는 바람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형제 간 골육상쟁과는 별개로 모자 간 갈등과 고부갈등도 오스만 제국 정치를 막장으로 몰아간 원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브라힘 황제의 어머니이자 섭정으로서 통치하던 쾨셈 술탄은 친아들과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그를 살해하고 손자 메흐메트 4세를 옹립했다.

그런데 쾨셈 술탄의 며느리이자 메흐메트 4세의 어머니인 '투르한 하티제 술탄'이 '아들도 죽였는데 손자라고 못 죽이겠냐'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떨다가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게 성공하여 쾨셈 술탄은 자신의 며느리에 의해 살해당했다.

3.2. 그 외

4. 픽션 속의 콩가루 집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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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프로레슬링에서

프로레슬링에서도 콩가루 집안 각본들이 꽤나 많은데 주로 형제, 자매끼리 그런 사례들이 많고, 사촌간에도 그러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그리되기도 한다.

프로레슬링에서의 콩가루 집안 각본들은 갈등과 화해가 반복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들도 실제로는 원만한 가족이거나, 각본상 가족이라도 실제로는 매우 친한 경우가 많다. 진짜 콩가루 그 자체인 헐크 호건은 예외이다.

보통 프로레슬링에서 콩가루 집안 각본이 나올 경우 어느 한쪽 또는 구성원 모두한테 싱글로서의 푸쉬를 주거나 하이 미드카더 또는 메인이벤터로 키우기 위해 그러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 경우는 비혈연 태그팀이나 스테이블에 대해서도 어느 한명 혹은 구성원 모두한테 싱글로서의 푸쉬를 주거나 하이 미드카더 또는 메인이벤터로 키우기 위해 태그팀이나 스테이블을 해체 시키는 일들이 많다.

특히 WWE에서는 이런 콩가루 집안 각본이 잊을만하면 나오곤 했다.

프로레슬링에서의 대표적인 콩가루 집안 각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5. 관련 문서



[1] 80~90년대 버전으로 똑같은 상황에서 아빠는 바람둥이 혹은 강남 제비, 엄마는 날라리, 딸은 비행 청소년, 아들은 덜떨어진 애...라는 것도 있다. [2] 한 집안이 다른 집안이랑 두 명 이상의 혼인 관계를 맺는 것. [3] 이 때문에 유교의 영향으로 근친 문제에서 가장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도 겹사돈의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4] 사촌간 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국가들도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가능은 하다일 뿐이지, 사회적으로는 경멸과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올라프 5세처럼 특수 신분에 속하는 인물은 당연히 논외다 [5] 그 때문에 유럽 일부 왕조에서는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이 상당히 많았다. [6] 가령 사촌간의 결혼은 법적으로 가능하더라도 꺼리는 문화권이 적지 않지만(유럽권의 경우 과거에는 드물지 않았지만 현대에는 상당히 감소) 이슬람권의 경우에는 전혀 꺼리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오히려 흔하다. [7] 단, 이는 어디까지나 도시전설에 불과하다. [8] 삼국사기, 삼국유사, 족보에서 언급되는 시조 [9] 금석문에서 언급되는 시조 [10] 8대 군주 아달라 이사금 이후로는 군주를 배출한 적이 없지만 꾸준히 왕후를 배출하는 외척으로서 세력을 유지했다. [11] 태종 무열왕의 아내이자 문무왕의 어머니인 문명왕후가 그의 여동생이었다. [12] 김씨, 박씨와 함께 돌아가면서 이사금을 배출하던 석씨는 통일되기 훨씬 이전에 중앙정계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13] 정사에는 김지정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를 진압하고 즉위했다고 기록된 김양상 김경신이 혜공왕 살해의 진범이고 김지정은 죽은 뒤에 억울하게 뒤집어썼다는 설도 있다. [14] 홍수로 인해 입궐을 못하는 바람에 왕위를 포기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선수를 쳐서 조정을 장악한 김경신에 의해 반강제로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15] 덕분에 장보고는 신무왕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킨다는 약조를 받았으나, 정작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에 의해 암살당해서 실현되지 않았다. [16] 지금의 경북 상주시보다는 범위가 넓은 지역이었다. [17] 다만 롯데그룹의 창립자 신격호는 존경을 받지만 형제들과 아들들은 오만 쌍욕은 다 들어먹는다. [18] 동네 어린이들에게 용돈을 줬는데 이걸 가지고 별장에서 음란 파티를 벌였다고 음해했다고 한다. [19] 현재는 사면되어 사실상의 고향인 대구광역시로 낙향해서 거주 중이다. [20] 박근령이 류청 풍산그룹 회장과 이혼한 후 신동욱과 재혼하려고 하자 박근혜는 여동생 박근령이 신동욱과 재혼하려는 것에 대해 결사반대하였다. [21]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다. [22] 다만 박영옥과 박계옥, 박준홍 등 박상희와 조귀분의 자녀들도 박정희와 육영수의 자녀들처럼 부모가 사망한 후에 콩가루 집안 수준으로 싸워대지 않았을 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박상희의 외동아들인 박준홍은 그 동안 뻑하면 사고를 치며 매형 김종필과 누나 박영옥과 박계옥, 어머니 조귀분의 속을 썩일 정도로 행실에서도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는데 자세한 건 김종필/사건사고 및 논란, 박준홍, 박상희 문서 참조. 다만 박준홍은 비리 혐의로 교도소에 갔다 온 후 말년에 노환으로 죽어가는 누나 박영옥, 매형 김종필 부부와 화해하고 누나 박영옥이 사망했을 때 누나의 장례식에서 상주 역을 담당하는 등 어느 정도 개념 있는 행보를 보였다. [23] 박영옥은 2015년에 노환으로 투병 중 사망했다. 이어 박재옥도 2020년에 타계했으며, 육예수와 홍소자는 아직 모두 생존 중이지만 이들도 나이가 무척 많은 고령의 노파인지라(육예수 - 1929년 생, 홍소자 - 1939년 생) 박영옥과 박재옥처럼 언젠가 노환으로 임종할지도 모른다. [24] 로마 건국 신화 기준 [25] 로마는 왕위를 반드시 부계 혈통으로 세습해야 한다는 원칙이 없었고,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세습이 아니라 선거로 뽑힌 왕이었다. 후대의 로마 제국 황제를 선거로 뽑진 않았지만 사위가 장인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게 합법적인 계승으로 인정받았고, 피가 섞이지 않은 양자에게 물려주는 것도 가능했으며, 동로마 제국에선 황제가 죽은 후 황후가 재혼하여 새 남편을 황제로 추대하는 것도 가능했다. [26] 동로마인들은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게르만 왕국들을 '야만 왕국'이라고 부르며 멸시하고 있었다. [27] 그러나 니키포로스 왕조는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초대 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전사하는 등 온갖 불운에 시달리는 바람에 겨우 11년만 존속했다. [28]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이나 북마케도니아와는 상관 없으며, 성씨 마케도니아인 게 아니라 시조의 고향이 '마케도니아 테마'라는 행정구역이라서 붙은 명칭이다. [29] 아이러니하게도 니키포로스 2세와 요안니스 1세는 둘 다 뛰어난 군사적 업적으로 동로마의 중흥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황제다. [30] 조이는 콘스탄티노스 9세보다 먼저 사망했고, 콘스탄티노스 사후에는 테오도라가 여제로 복위했는데, 테오도라의 죽음을 끝으로 마케도니아 왕조가 단절되었다. [31] 물론 장님이라서 실권을 행사할 순 없었다. [32] 니케아 제국(라스카리스), 트라페준타 제국(콤니노스),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앙겔로스의 방계) [33] 이후 디미트리오스는 오스만 황제 메흐메트 2세에게 토사구팽당해 가택연금 상태로 살다가 죽었고, 토마스는 교황령으로 망명하여 명목상의 황제 대접은 받았으나, 그의 아들 안드레아스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로마 황제 작위를 프랑스 국왕 샤를 8세 스페인 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 부부왕에게 팔아넘기고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여 명목상의 계승권마저 단절되었다. [34] 다만 의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고종과 측천무후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의종이 죽자 고종 부부가 크게 상심하여 황제로 추존했다는 기록도 있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다만 차남과 몇몇 손자, 손녀들을 자신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고 죽여 버린 건 사실이다. [35] 다만 중종은 후술하듯 위황후 때문에 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36] 물론 옳은 선택은 아니었다. [37] 축구선수들에게 맨발로 몇 시간씩 콘크리트 축구공을 차라고 했다고 한다. [38] 그나마도 죽이겠다고 펄펄 뛰는 걸 아내 사지다와 요르단 국왕이 뜯어말려서 겨우 참았다고 한다. [39] 정확히 말하자면 사담이 무기개발 혐의를 죄다 카멜 형제에게 전가하면서 제대로 역관광을 태워 버렸다. [40] 에린 침략의 서가 출전인데 오늘날에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기독교색이 들어간 신화라고 보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밀레시안 부분은 완전히 기독교적인 부분. [41] 크룸 크루어히에게 살해. 이후 7년간 왕위 공석. [42] 남부는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아서 프랑크 왕국과 접점이 없었지만, 통일을 주도한 건 북부 세력이었다. [43] 그래서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이복동생 오르한 첼레비는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한 후 동로마군 소속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함락 이후 처형되었다. [44] 로마 황제라는 의미를 가진 '카이세리 룸'과 페르시아어로 '왕들의 주인'을 뜻하는 파디샤를 칭했다. 기존 군주의 칭호였던 술탄은 황족이나 고위 귀족에게 하사하는 칭호가 되었고, 여성 황족들도 수여받을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 '발리데 술탄'은 황제의 어머니가 받은 칭호였다. [45] 성경에 언급되는 내용으로는 에서와 야곱 형제 중 에서의 후손 측인 에돔 족속의 후예라고 한다. [46] 헤로디아 역시 멀쩡히 살아있던 남편을 버리고 헤롯 안티파스에게로 갔다. [47] 백성의 노여움을 산 며느리를 보호하려 한 움직임일지도 모른다는 시각도 있다. [48] 물론 장남 르우벤과 차남 시므온은 완전히 저주를 받았고, 삼남 레위는 두 형과 마찬가지로 저주를 받긴 했지만, 후손 모세와 아론의 대활약으로 약간의 저주를 빗나가게 되었고, 사남 유다와 11남 요셉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많은 축복을 받았다. [49] 압살롬이 죽은 이후 다윗은 너무나 슬퍼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50] 역시 콩가루인 코무로 케이와 결혼했다. [51] 나루히토 천황과 마사코 황후, 아이코 공주 아키히토 상황과 미치코 상황후, 마사히토 친왕과 하나코 비 등은 가족관계가 원만하므로 해당하지 않는다. [52] 문희진, 박사무엘. [53] 사실 미나모토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내분이 이어진 집안이다. [54] 결국 본인이 사망하기 전까지도 끝까지 사과 한마디 없이 사망해 죽기 전에 아들을 통해 뒤늦게나마 사과의 뜻을 전한 절친 노태우보다도 인식이 훨씬 좋지 않다.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 사죄의 뜻을 전한 것도 할아버지의 사망으로부터 1년도 더 지난 후의 일이다. 게다가 MBC PD수첩의 취재에 응하면서 집안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55] 다만 이는 시대적 필요도 존재했는데 예카테리나 2세까지만 해도 차르 계승은 지명제라서 차르가 지명하면 아내가 즉위하는 것도 가능했다. 문제는 이렇다 보니 힘 좀 있으면 즉위하는 것도 가능해서 앞서 말했듯 예카테리나 2세 역시도 그런 식으로 즉위했고 때문에 당대 볼테르는 이를 두고 '점령제' 라고 비웃었을 정도로 러시아의 귀족들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도로 러시아의 계승방식이 후졌던 건 사실이다. 물론 프랑스와 혈연적 근친도가 없다시피했던(보통 살리카법은 프랑스 혈통의 왕조에서 나왔다. 애초에 살리카법에 근거한 계승 방식부터가 프랑스왕 필리프 5세가 침소붕대하여 만든 것이다.) 로마노프 왕조에서 살리카법을 도입한 것은 정말 파벨 1세가 어머니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56] 이것과 관련해서는 파벨 1세의 부계가 독일계인 것과 연관짓기는 한다. [57] 가끔 송병준이 구용서의 외할아버지라고 언급하는 기사가 있는데 정확히는 처외할아버지, 즉 처의 외할아버지다. [58] 구용서의 아내가 우범선의 아내의 여동생이었다. 우범선의 아내는 우장춘의 어머니이기도 한데, 우장춘도 친일 행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으며, 오히려 유명한 생물학자로서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59] 조선은행의 도쿄 지점에서 근무하긴 했으나 이 정도로는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오지 않는다. 시인 이상이 한때 조선총독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했음에도 친일인명사전에 오르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다만 아버지의 직책 덕분에 조선인임에도 도쿄에서 근무하는 특혜를 받는 등 집안 내력으로 인한 특혜를 누린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당연히 귀국 후에는 자신의 집안 내력을 철저히 감춰야만 했다. [60] 조피 왕비는 영국 국왕이었던 조지 1세가 어머니랑 강제로 이혼하여 오빠 조지 2세와 함께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한다. [61] 특히 삼남 프리드리히 대왕과 장녀 빌헬미나 공주가 피해를 많이 입었다. [62] 얼마나 악랄했는지 그가 집권할 동안 인구가 30만 명 남짓이던 적도 기니에서 그 어떠한 전란도 없이 5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해외로 도피하여 인구 손실이 인구의 절반에 달할 정도였다. 참고로 응게마가 집권한 기간은 고작 11년이었다. [63] 2006~2009년 대한민국에서 생활하기도 했으며 2013년 '모니카 마시아스'라는 이름으로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회고록을 출판해 한국에서는 아버지 이상으로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64] 일제강점기 & 대한민국 [65] 궁내부대신 & 대법원장 [66] 한일합방 & 인민혁명당 사건 [67] 이용구 & 이석규 부자, 조병갑 & 조강희 부자도 다른 체제(여기서는 조선 & 일제강점기)에서 악행을 저지른 부자들이지만 적어도 이들은 2대가 최고위직을 역임한 사람까지는 아니다. [68] 그나마 매국노의 후손이 최고위직에 오른 경우는 민복기와 (을사삼흉 이하영의 손자인) 이종찬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없으며, 나머지 매국노 후손들은 모두 해방 후 일제강점기의 입지를 완전히 잃었다. 정미칠적 이재곤의 아들 이순용이 내무부 장관에 오르긴 했으나 애초에 이순용은 한국광복군과 협업한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논외. [69] 가규: 후한, 가충: 조위, 가남풍: 서진 [70] 다만 가규만큼은 조조의 부하였던 데다가 조위의 건국공신으로 볼 여지도 있어서 아들과 손녀와 동렬에 놓기에는 다소 억울한 감이 있다. [71] 심지어 아들에게 동성 연인이 생기자 이를 질투해 그 동성 연인을 유혹해 둘 사이를 갈라놓기까지 했다. [72] 다만 원래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는 비워두면 안 되는 자리여서 영조도 60 넘은 나이에 새왕비를 들였다. [73] 단, 조식은 조비와 계승 문제로 얽혀 있어서 좀 그럴 만한 사유가 있긴 하다. [74] 다만 정식 입양은 안 했다. 친구 아빠가 사업가인데 혜택 받으려고 입양한다는 시선이 싫었다고 한다. [75] 형뿐만 아니라 동창들도 이은석의 형과 입장이 비슷했다. 결국 당대로서는 사형선고를 받아도 모자랄 범죄인데도 사정이 감안되어 무기징역이 내려졌다. [76] 부모가 형만 편애해서는 아니고 그냥 형이 좀 더 부모에게 반항해서 부모도 반항 안 하는 동을 학대했고, 특히 아버지는 정말로 형을 지나치게 편애했다. [77] 이유는 사랑 없는 중매혼이었던 데다가 남편 쪽의 잦은 출장 및 출타+적은 봉급+성격차+나이차+아내 쪽의 과한 욕심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78] 아버지는 전형적인 군인 스타일(직업 자체가 대한민국 해병대 군인이었다. 이은석의 어머니는 군인이라는 점을 보고 결혼했는데,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라 영부인 자리를 노리고 결혼한 거였다고 한다. 하지만 해병대 출신인 이상 그럴 일은 없었고, 그마저도 전역해 버려 그 대신이라고 선택한 게 자식들의 출세였다고 한다.)+원칙주의+자기중심적+가부장적+나르시시즘+내로남불+이기주의+결벽증, 어머니는 사이비 종교 신자(그래서 남편을 사탄이라 욕한 적이 있고 자식들에게 회개 기도를 강요하기도 했다.)+자존심 강한 성격+원칙주의자+욕구불만과 그에 따른 좌절과 분노+히스테릭+스파르타식 교육 [79] 이런 막장 인간이 된 이유도 가관인데 이들도 이들 못지않은 막장 부모 밑에서 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들 뒤에 숨겨진 진짜 원흉들은 조부모들과 그 친척들이다. 실제로 이은석의 형이 동생의 구명활동을 벌일 때 친척들은 모두 모른 척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친척 전체가 콩가루 집안. [80] 조형기는 풀려난 뒤 한동안 잊혀졌으나, 인터넷의 발달로 사건이 재조명되어 입지가 점점 좁아지다가 사촌 동생 미투 사건에 말려듦과 동시에 연예계에서 사실상 매장되었다. 결국 사촌 동생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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