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명이 '병언'이었던 래퍼에 대한 내용은 장석훈 문서 참고하십시오.
유병언 兪炳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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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아해 |
본관 | 기계 유씨[1] |
출생 | 1941년 2월 11일 |
일본 교토부 교토시 | |
사망 |
2014년
5월 25일 ~
6월 2일 사이 (향년 73세)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학구리 매실밭 |
신장 | 160cm[2] |
학력 | 성광고등학교 (졸업) |
직업 |
종교인, 기업인,
아마추어
사진 작가[3], |
주요 경력 | 세모그룹 회장 |
형제자매 | 형 유병일, 동생 유경희, 유병호 |
배우자 | 아내 권윤자 |
자녀 |
장녀
유섬나 차녀 유상나 장남 유대균 차남 유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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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종교인이자 주식회사 세모의 前 회장.2. 출생
1941년 일본 교토시 출생으로, 해방 이후인 1946년 부모의 고향인 대구광역시(당시 경상북도 대구시)에 정착하였다.3. 종교인 활동
대구 성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2년 선교사인 길기수의 설교를 듣던 중에 마태복음 22장 설교를 듣던 중에 회심 경험을 하고, 권신찬 목사와 선교 사역을 함께 했다.[5]유병언은 같은 선교학교 출신이었던 안동 권씨 권신찬(權信燦)의 딸인 권윤자(權允子)와 결혼하였다. 초창기엔 대구 지역에 위치한 자신의 집 '칠성예배당'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후 서울, 인천, 안양 등지로 영역을 넓혔다. TEAM 선교부가 유병언이 속했던 평신도복음선교회와 한국어 방송 공동운영 계약을 맺으면서 유병언은 부국장으로 취임 했다. 부국장 취임을 위해서는 목사 안수가 필요하다는 선교사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극동방송국을 운영했던 TEAM 선교부 미국인 선교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81년 12월 필요에 의해 기독교복음침례회 교단 설립 당시 평신도 복음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한 유병언은 교단 설립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다.
4. 기업인 활동
유병언은 1974년 부도 직전의 부실 무역 기업인 삼우트레이딩을 인수해 1976년 사장으로 취임하고, 이후 1979년 세모그룹으로 상호를 바꾸었다.[6]1986년에는 한강 유람선 사업권을 취득하였다.[7]
1990년 태풍으로 떠내려온 경쟁업체의 유람선이 선착장에 정박 중이던 세모 유람선 2척에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8] 그로인해 세모 유람선이 표류하다가 마포대교 교각을 들이받고 침몰하여 세모 직원 1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기도 하였다.
1987년 발생한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에 유병언이 연관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연관성이 없음이 밝혀졌다. 반면 이 사건과 무관한 1983년경 무죄로 판결되었던 교인들 헌금과 관련한 상습 사기 사건으로 1992년 4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로 인해 유병언이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 자세한 내용은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관련 의혹을 참고하자.
1997년에 무리한 투자로 세모가 부도 났다. 부도 이후 세모의 해운 사업은 1998년 온바다해운(2006년 경영난으로 폐업)을 거쳐 1999년 3월 청해진해운으로 승계되었다. 한강 유람선 사업은 2004년 세양선박에 매각되었고 이후 이랜드그룹으로 넘어갔다.
부도 이후 유병언은 대외적으로 기업 활동을 중단하였다.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유병언은 언론보도에 의해 청해진해운의 실세이자 세모그룹의 회장으로서 세월호의 소유자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로 관련 주식을 소유한 사실이 없었고 이후 관련 재판이나 특조위 조사에서 소유 여부나 참사원인에 대하여 관련여부가 밝혀진 바 없다.
- 세월호 참사 의혹 관련 자세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 의혹 참고하자.
5. 사망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후 경찰은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유병언과 그 가족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지만 유병언과 그 가족들은 경찰을 피해 도주했다. 경찰은 도주한 유병언을 체포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벌였다. 검찰이 처음에는 유병언에게 5천만 원, 그의 장남 유대균에게는 천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며칠 뒤 그 10배인 5억 원, 1억 원으로 각각 인상했는데 이는 한국 역대 최고 현상금이었다. 하지만 대대적인 수색과 고액의 현상금을 걸었음에도 유병언은 체포되지 못 하고 결국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9] 국과수 "변사자는 유병언…사인 판명은 불가" 최영식 국과수 원장 "아직도 유병언이 살아있다고 믿으시나요?" 사인 중에서 가장 유력한 추측은 고령으로 접어든 나이와 오랜 도피생활로 인해 체력을 다한 급사로 제시된다.6. 의혹
6.1.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관련 의혹
유병언은 1987년 발생한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언론보도를 통해 오대양 사건의 배후인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 유병언과 오대양 사건은 관련 없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검찰은 이 사건과 무관한 1983년 경 무혐의 처리한 적이 있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상습 사기 사건으로 별건 기소해서 1992년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유병언과 오대양 간의 관련 혐의를 찾지 못하자 뭐라도 체포할 거리가 필요해진 검찰이 이미 불기소한 과거의 사건을 들춰내어 억지로 혐의를 씌우고 형을 살게 했다는 평도 있다. #본래 상습사기죄는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다는 혐의인데, 유병언은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고 살아있는 동안 기회되는대로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유병언은 오대양 사건의 관련자로 오해받은 일이 상당히 억울했었는지 2014년에 오대양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증명을 다시 요청해서 2014년 5월 21일에 인천 지방검찰청이 공문을 통해 "당시 수사기록 검토 결과 집단자살이 구원파 측이나 유병언 회장과 관계 있다거나 5공 정권의 비호가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고 재확인 해주었고 해당 내용이 다시 한번 보도된 적도 있다. #
6.2.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의혹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청해진해운의 선원들과 선장이 구원파 신도라는 소문이 돌면서 논란이 커졌다. 심지어 선장과 선원들이 사람들을 버려두고 도망친 것도 구원받은 자신들은 구원받은 선민이고 다른 이들은 구원받지 않아서 신의 진노를 받아 죽을 자들이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겠느냐라거나, 내국인들의 경우 신도들만 뽑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부족한 실력의 인원도 선원으로 모집하여 악재가 겹쳤다는 추측도 있었다. KBS 뉴스9 동영상 1분 20초부터하지만, 이러한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먼저 퇴선했던 세월호 선장 및 승무원들은 모두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신도가 아니었다. 세월호 선원 26명 중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는 의사자로 지정된 정현선 씨를 포함해서 2명에 불과했다. 또한, 교인이 아니면 채용을 하지 않는다거나 종교 교육을 통해 교인을 만든다는 소문도 사실이 아니었다. #
유병언과 기독교복음침례회에 대한 잘못된 언론 보도들은 당시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참사의 구조 책임에 대한 따가운 여론의 질책을 무마하기 위해서, 기독교복음침례회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오보라는 의심도 있다. 링크 세월호 때 '유병언' 물타기 5년만에 세상에 드러나다, 천정배 “한국판 스노든 사건”
세월호 참사 직후 책임에 대한 많은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대통령부터 나서서 유병언과 그 관련 종교단체를 부각시켰다.이것은 유병언과 그 아들에 대한 현상금 규모 하나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당시 구조 책임에 대한 여론을 돌리기 위한 청와대의 의도는 이정현 홍보수석과 KBS보도국장과의 녹취 대화에서 확인 할 수 있으며, 세월호 특별조사 위원회에서 발표한 세월호 보도와 구원파 관련 날짜별 보도 횟수 추이를 봐도 확인할 수 있다. #
이후 유병언이 사망한 채 발견되자 많은 언론들이 정부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돌리고자 했다는 식의 평가를 내기도 했다. 기자의 시각 '돼지머리 수사', 조선일보
2014년은 유병언 회장과 구원파에 관련해 방송기자연합회에서 '저널리즘의 침몰'이라는 반성의 보고서를 낼 만큼 오보가 많았던 해로 꼽히기도 한다.[10] 세월호 보도 저널리즘의 침몰
6.2.1. 유병언 책임 논란
현재까지 나온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유병언의 배임, 과실치사 혐의는 모두 수사기관 발표 자료에 근거한다. 과거 보도들에 의해 유병언 및 유병언 일가는 회사 자금 등을 횡령/배임했고 유령 회사를 세워 '자문료', '상표 사용료' 등의 명목으로 터무니 없는 금액을 책정해 청해진해운(주)의 돈을 챙긴 것처럼 오해하게 하는 보도들이 있었지만 실제 내용은 청해진해운이 아니고 다른 회사들에 대한 내용이다. 세월호 사고책임과는 무관하다. 또한 청해진해운 직원의 급여 수준은 다른 선사에 비해 열악했다고 보도가 나왔으나 실수령액은 적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 또한 직원 안전 교육에 쓰인 돈은 1년에 1인당 4천원이라고 보도했지만 안전교육은 국가에서 무료로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선사도 마찬가지이다. # 또한 추후에 알려진 바로는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선박비상대응훈련에 약간의 소홀함이 있었다는 의견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이러한 정도가 아니고, 대다수의 승무원들이 여객선 상급교육을 이수했고 간부 선원들은 상급안전 구명정수교육을 받았음이 확인되는 등 법정 이수조건 교육은 모두 충족하였던 것으로 목포해양경찰서 수사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세월호 침몰의 핵심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증개축(에 따른 배 안전성의 저하)을 지시할 만한 사람이 유병언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것도 검찰의 언론 플레이에 의한 오보였다. 증개축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졌고 유병언이 아닌 청해진에서 도입하면서부터 계획한 것이었다. #
유병언이 자신의 자랑을 위한 사진 전시 갤러리 등 전부 자신의 이기심과 허영을 채울 목적으로 증축을 지시한 것처럼 검찰이 언론 플레이를 하고 언론이 그대로 받아썼으나 사실이 아니라는 보도가 나왔다. #
당시 박근혜 정부에 대한 책임론이 커지자 "유병언은 세월호의 실질적 소유주이자 청해진해운의 실질경영자로서 지위계통상 최고경영자로서의 도의적 책임, 회사 경영을 부실하게 한 간접책임 뿐 아니라 사고의 핵심 원인을 제공한 자로서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하다는 여론을 만들어 비난을 유병언에게 돌리는 기획을 국정원에서 하고 중앙일보에서 실행했다. #
편향된 자료를 바탕으로 죄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살인이나 강도와 같이 인과관계가 분명한 범죄라면 모를까, 배임/횡령 행위와 승객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유병언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다면 모를까, 법적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11]
주주와 경영자는 다르다. 물론 현행 상법상 회장의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 업무지시자로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규정이 있지만, 회장의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만으로는 안전관리 소홀의 책임을 대주주에게 물을 수 없다. 이와 비교할 만한 사안이 삼풍백화점 판례이다.
이 사안에서 대법원은 이준 회장이 1. 대표이사 겸 위 회사 소유의 삼풍백화점 회장으로서 이 사건 건물 신축공사 및 유지관리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자이고, 2. 당초 용도와는 달리 이 사건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3. 붕괴 위험이 있었음에도 고객 및 직원들을 대피시키지 않은 것이 업무상 주의의무를 위반하였으므로 업무상과실치사죄의 유죄라고 보았다. 96도1231.
그러나 1. 유병언은 대표이사의 직에 있지 않았으며, 단지 회장이라는 명칭만 사용하였을 뿐 청해진해운의 모기업의 경영자에 불과하고, 2. 청해진해운의 직접 경영자가 아닌 이상 사진갤러리를 위한 증축에 관해서 안전하게 증축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3. 선박 운행 중 안전관리의무는 원칙적으로 선장 및 선원들에게 있는 것이지 경영자도 아닌 대주주가 부담하는 것이 아니므로 업무상과실치사죄를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책임이 없을 뿐 본인의 종교에 대한 운영방식 따위나 직접적인 운영은 하지 않지만 횡령과 관련된 여러가지 정황과 물증들이 발견됨에 따라 살아있었다면 그도 추궁 정도는 당했을 것이다. 또한 결국 죽어버리는 바람에 오히려 더 이슈가 되어 수사 진행 상황에 혼란을 초래했다.
해운업은 다른 사업 부분과 다르게 운행부터 상당한 위험부담을 가지는 업종이다. 때문에 현재의 과학 기술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 부분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도록 경영상 노력을 했다면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이다. 항공업의 경우 사전예방체계가 워낙 잘 되어있어, 사고가 난다 하더라도 경영진이 형사상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청해진해운이 경영상 사전 예방 의무를 충분히 이행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다. 비상 탈출용 보트가 모두 불량이었다는 사실과, 승객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선원들이 가장 먼저 배에서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롯이 그들을 탓하기 어려운 것은 정말 선사측의 결함으로 배가 가라않게 되었다 할지라도 해경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퇴선명령을 했거나 #, 혹은 선원을 구조하지 않고 현장에 복귀시켜 구조하게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월호 사고가 참사가 된 것에는 정부의 구조 부실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장에 출동했던 해경 123정장 외에 해경지휘부 중 여전히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부가 세월호 참사 수습 비용을 돌려받기 위해 고(故)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차명 의혹 주식을 확보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판결] 정부, '유병언 차명의혹' 10억대 주식 인도 항소심도 패소 (사건번호 : 서울중앙지방법원 2017가합547161, 사건번호 : 서울고등법원 2021나2011679)
2014년 10월, 청해진해운은 항로반납권을 두고 소송에 들어갔다. 하지만 계속 위에도 설명하고 있듯이 유병언만의 문제는 아닌데, 이런 상황이 되도록 유병언의 문제라고 여기는 것을 그냥 두거나 밍기적거리는 진행으로 인해 중요한 기회를 많이 놓친 관련 부처들의 문제 또한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 밍기적거리는 태도 덕에 유병언 키즈라는 유병언 장학재단의 도움(장학금)으로 공직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인원들의 음모라는 소리까지 떠돌게 되었지만 이는 추후에 정정보도가 되었고 그로인해 정작 중요한 문제들은 이러한 이슈들에 묻힌 경향이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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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들어서 코로나 바이러스19와 관련해서 이만희의 신천지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자 유병언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차이점이라면 인지도에선 이만희가 더 높으며, 이만희는 코로나 바이러스19가 유행하기 이전에도 인지도가 높았는데 비해 유병언의 경우 세월호 사건 이전엔 유병언이나 구원파에 대해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았었다.
6.2.2. 세월호 사고 관련 유병언 일가 수사 요약
유병언 일가의 청해진해운 부실 운영이 참사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검찰이 용산구 삼각지에 위치한 구원파의 본부, 그리고 유병언 가의 기업들이라며 몇몇 회사들을 전격 압수 수색을 했다. 전격 압수 수색을 하는 과정에서 유병언의 최측근 참모라며 모두 나이가 50~70대인 여자 5명이 보도되었다. 당시 뉴스보도에 의하면 유병언 구원파 조직원들을 조직하고 도피를 지휘하는 '김엄마'라고 불리는 여성이 존재한다고 전해졌으나, 엄마라는 호칭은 결혼한 여신도들을 편하게 부르는 말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며, 김엄마는 도피 총괄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나중에 정정보도 된 적이 있다. #
당시 무차별적인 체포, 가택 수색 등을 신도들이 많이 당했고, 이에 불안해져 금수원에 모이기도 했다고 한다. #
2014년 5월 기준으로 유병언과 그의 아들인 유대균은 특경법 위반 혐의로 각각 현상금이 5억, 1억이 걸렸다. 현상금은 세금을 떼지 않고 전액 현찰로 지급된다. 구원파는 세월호는 잊히고 유병언 회장만 뇌리에 남는 상황이 현재 벌어지고 있다며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의 규명을 위해 세월호사건 진실 규명 포럼을 개최하겠다고 5억원을 내걸었다. #
2014년 6월에는 구원파 신도가 사회 전반에 분포되어 있어 검,경찰 요직내에서도 유병언 일당을 돕고 있다라는 식의 추측성 보도가 나올 정도로 시국이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 부분 역시 검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그 결과 사실이라고 확인될만한 근거가 없었음이 확인되었고, 국과수를 통해 유 전 회장의 사망 시점이 확인됨에 따라서 기독교복음침례회에서 유 전 회장의 도피를 조직적으로 도왔던 사실은 없음이 밝혀졌다. #
2014년 7월, 유병언으로 추측되는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국과수의 부검 결과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사인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가 밝혀진 바 없다. # 자세한 사항은 유병언/도피기록에서 보도록 하자.
유병언이 계속해서 살아있을 거라는 추측과 루머에 답답했는지 국과수에서 2018년에 기사를 통해 다시 한번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며 기사가 보도된 적도 있다. 유병언요? 사망 확인했습니다 진실의 메스, 이야기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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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 D-DAY
경찰의 진입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새볔경에 경찰 6천여 명[12] 금수원주위 배치 보도. 정문주위로 여경 50여명이 배치되었으며 이유는 연행시 남성 검,경 성추행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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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0분경 YTN보도 기준
구원파의 공식 입장 발표가 시작되었다. 성명 발표자는 당시 조계웅 대변인.
성명 내용 요약에서 구원파 입장에 따르면 세월호는 금수원과 관련이 없으며 피해자임을 호소했다. 앞서 언급했던 세월호 진실 규명 자금 중 신도들의 모금으로 2억원이 모였다고 발표했으며 5억원이 모이면 진실을 규명하는 자에게 5억원을 지급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그외에는 검찰에 대한 불신을 밝힌 상태이며 국민의 호소를 요구하였다.
5억원이 모일 경우 다음 주 중에 포럼을 개최해서 검찰을 제외하고 논의를 한다는 계획을 세운 상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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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분경 YTN보도 기준
금수원 진입 작전시 사용되는 영장은 압수수색 영장, 체포 영장이라고 한다.
YTN보도 기준으로 집회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가 장착된 확성기 차량을 사용중이고 범죄자 호송차량이 목격되었으며 경찰 기동대가 거의 진입포인트에 붙어있을 정도였다.
YTN 헤드라인 보도로 경찰 특수차량이 도착하였으며 경찰, 소방헬기가 상공을 선회하였는데 혹시모를 사고를 대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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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17분 YTN보도 기준
경찰 진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목표는 유병언일당의 신변과 '두엄마' 라고 불리는 핵심 조력자 체포다.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신분증을 지참한 상태에서 기자의 진입 또한 허락하였다. 경찰 측은 총력전을 벌일 예정으로 보도서 추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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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미디어측의 견해, 향후 작전
물리적 충돌이 거의 없었으나 체포대상 외에 일부 신도연행이 있었다. 그 과정중 온건파 신도가 개입돼서 경찰 수사에 협조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디까지 협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유혈사태는 막은 것으로 보인다.
검경은 6월 12날 날이 밝는 대로 금수원내에 수색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밝혔으며 혹시모를 유병언의 금수원 잠복을 대비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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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진실 규명 세미나
예고한데로 6월 15일 세월호 진실 규명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부실한 내용을 걷어내느라 2명만 참가하게 됐다고 한다. 보도 내용으로는 예상외로 상당히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구원파 측은 앞으로 1주마다 집회를 개최하겠다고 한다.
6.2.3. 도피기록
자세한 내용은 유병언/도피기록 문서 참고하십시오.금수원을 나가 도피한 것으로 알려진 유병언은 끝내 사체로 발견되었다. 2014년 6월 12일경 전남 순천 송치재 인근 매실밭에서 발견된 시체는 사체 부검 결과 유병언과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 근거 자료 : 국과수 발표 최영식 국과수 원장 "아직도 유병언이 살아있다고 믿으시나요?"
6.2.4. 사망 및 사인 관련 의혹
임시반상회까지 할 정도로 검거 자체가 전국민의 화두였지만, 사망한 지 한참 후에야 무연고 변사체가 유병언으로 확인되면서 유병언의 죽음을 두고 자살이냐, 타살이냐에 대한 의혹이 많았다. 하지만 국과수에서도 정확하게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를 밝히지 못했다. 당시 언론에서도 워낙 현상수배금이 쌨기에 신도들이 유병언 회장을 타살한 것이 아니냐는 식의 자극적인 보도를 내보냈었다. 하지만 구원파 신도들이 유병언 회장을 죽였다는 것은 결국 확인되지 않은 찌라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MBN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및 유병언 전회장에 대한 정정보도방송2023년 4월 19일 KBS ' 과학수사대 스모킹 건'이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신도에 의해 타살되었을 거라는 의혹도 언급하였으나 간이나 콩팥, 폐에서 독극물 반응이 나오지 않아 타살의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6.2.5. 신고 포상금 관련 내용
기사: 날아간 유병언 포상금 5억
매실밭의 주인이던 박모 씨는 발견 당시 시신 훼손이 너무 심해서 알아볼 수가 없어 신원미상 시신으로서 유병언을 발견했기 때문에 결국 포상금 지급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상식적으로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운데, 국과수가 그 시체를 유병언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설령 발견순간엔 신원미상이었다 하더라도, 판명 순간 포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시신의 신원은 유병언이라고 결론 내렸으면서도 발견자에게 포상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정부 스스로 이 시체의 신원이 유병언이 아니라고 눈가리고 아웅 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다.
포상금 지급 규정상으로는 최초 신고자의 '의도'가 중요시되고, 결과보다는 이 의도에 따라 포상급 지급여부가 결정된다. 박모씨가 최초로 신고한 내용은 유병언을 발견했다는 제보가 없는 '단순 변사체 신고'였기 때문에 포상금 지급을 받지 못한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이 때문에 국과수 감정결과도 유병언의 시신이라고 판명했는데도 정부에서는 5억이란 돈을 지급하기 싫어서 이런 억지를 부린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따지고 들면 맞는 말이지만 신고자에 한해 소정의 보상이라도 취했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하는 뒷담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후, 2017년 8월에 법원마저도 국가의 손을 들어주면서 포상금 지급의 희망은 사라졌다. 2018년 1월, 2심이 기각 당해버렸다. #
6.3. 재산 관련 의혹
유병언은 1997년 자신이 이끄는 세모 그룹이 무너진 이후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고 기독교복음침례회 내에서 자문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언론 보도를 통해 세모 그룹이 무너진 지 10여 년만에 재산을 다시 확보하고 해외에까지 부동산을 보유했다고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으나 이 재산은 개인의 재산이 아닌 대부분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들이 만든 영농조합의 재산이었던 것으로 정정보도 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보도들로 인해 현재까지도 유병언이 세월호 침몰 사고의 배후라거나 수천 억대의 자산가였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6.4. 사진전 관련 의혹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유의 공원과 베르사유 미술관에서 '아해 사진전'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이는 해외 박물관과 미술계 관련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프라하 국립미술관 총관장인 밀란 크니작은 아해의 사진들에 대해 “매우 심플하면서도 아름답고 자연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완벽하다”라고 평했으며, 아해의 사진은 그 외에도 베르사유궁 관장 등 현지 전문가들이 인정한 내용의 인터뷰를 한 바 있다. 인터뷰 영상 그러나 국내전문가/평론가들에 의하면 그의 사진은 예술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아직 국내 미술시장에서 가치가 형성되지 않은 이유로, 작품들 대부분이 일종의 뒷돈을 위해 겉으로는 사고 파는 것처럼 위장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돈의 힘이었다며 전시회 성사를 위해 거액의 후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이는 전시 성사를 위해서가 아닌, 전시 성사 후 감사 표시의 기부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스포츠 조선 정정보도 실제 삼성전자의 경우에도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키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스트리아 궁전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후원한 바 있다.7. 관련 문서
[1]
아내의 족보에는 본관이 '강릉 유씨'라고 오기되어 있다.
[2]
1991년 안양교도소 수형기록에 적혀있다. 생전 자신의 작은 키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나이를 감안해도 단신이다.
[3]
루브르 박물관에 사진전을 한 적이 있고 그 외에도 사진전을 여러 차례 가졌다.
[4]
세모그룹 등 자신이 소유한 회사 이름,
세월호 같은 선박 이름, 금수원 같은
구원파 산하 시설물 이름, 본인의 아호(雅號) '아해' 등을 유병언이 손수 작명했다.
[5]
"20대 청년이었던 유병언씨는 젊은 나이에 신앙생활과 현실과의 갈등으로 고민해 오던 중 역시 같은 네덜란드 선교사 길기수씨의 집회설교 중 마태복음 22장 1-14절을 듣게 되었다. 그중에 특히 22:8-12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이 말씀을 듣는 중에 예복은 사람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의임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를 깨닫고 의의 옷을 입고 거듭나”는 경험을 했으며 그는 미국의 또 다른 선교사 딕 요크 씨가 운영하는 선교학교에서 평신도 전도인의 훈련을 받았다. 그 후 유병언과 권신찬은 함께 '평신도복음선교회'(기독교복음침례회 전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도인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교인수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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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모라는 이름은 삼각형의 순 우리말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에 언론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모세를 거꾸로 했다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으나 사실 정정보도 되었다.
[7]
당시에 사전 공개된 유람선이 호랑이 형태라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측은 호랑이 이외의 다양한 동물 형태의 유람선을 만들겠다고 얘기했지만 반응이 너무 좋지 않아 일반적인 형태의 유람선으로 바뀌고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었던 호랑이는 서울 대공원에 전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8]
당시에는 원광유람선이라는 회사에서 운영했으나 이 사고 이후 세모그룹에 매각, 1997년에 폐업하였다. 참고로
원광대학교와는 관련이 없다.
[9]
용의자 사망에 따른
공소권 없음 처리되어 범죄자 분류가 붙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자를 기소한다고 무덤에서 걸어나올 리가 없고 설령 부활한다해도 체포를 해야 기소-재판-형 선고의 절차를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
사고 일주일째,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방송 뉴스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세월호의 실소유주인 유병언씨와 그가 속한 구원파에 맞추기 시작했다. 특히 구원과 관련 뉴스에는 종교적인 신비주의가 더해지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 시점부터 점차 '세월호'뉴스는 '유병언과 구원파' 뉴스로 변하기 시작했다. 안전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윤지상주의, 방만하고 무책임한 관리감독 체계, 전혀 작동하지 않는 매뉴얼, 무능한 정부기관간의 불협화음 등 '세월호 참사'로 드러 난 온갖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특정 종교의 문제로 몰아가고, 여기에 이단종교라는 분위기까지 더한 전형적인 본질 희석' 보도였다._세월호 보도 저널리즘의 침몰 내용 중에서
[11]
업무상 횡령/배임은 제외. 그러나 언론에서는 이 부분보다는 과실치사범 정도로 취급하는 데에 중요점을 뒀었다.
[12]
대부분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