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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7:50:07

안디잔 학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상세3. 참고 자료

1. 개요


이슬람 카리모프의 통치 시기인 2005년 5월 13일 우즈베키스탄 동부 안디존(Andijon, 영어로는 안디잔(Andijan)[1])에서 일어난 학살.

2. 상세

이슬람 카리모프 통치 시기에 일어난 가장 유명하고 악명높은 악행으로 '우즈베키스탄 버전 5.18 민주화운동'이라고도 불린다. 워싱턴 포스트로부터 천안문 학살 이후 국가가 승인한 최악의 대량 학살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2016년 기사

이 사건이 일어난 안디잔은 무능한 정부 대신 이슬람 단체들이 활성화돼 있던 곳이었는데 이 지역의 이슬람 단체들은 무슬림 소기업가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과부들과 고아들을 도우며 소액금융과 구호활동 등을 맡아 했고 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높아지자 그 빈 자리를 메우면서 신망을 얻었다. 그런데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이슬람 해방당이라는 무슬림 그룹이 정부 전복과 테러공격을 꾀했다며 2004년 6월 이 조직 회원 23명을 잡아 가둬 버렸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미국의 대테러전 명분을 빌려 "극단주의 테러용의자 23명을 체포해 재판 중"이라고 밝혔으나 주민들은 이들이 이슬람 신용기관과 협력해온 사업가들[2]일 뿐이라며 반발했다. 이슬람 단체들과 주민들의 반발은 더욱 커졌고 반정부 시위가 계속됐다. 이듬해까지 이어진 시위는 갈수록 격해졌고 2005년 5월 10일부터는 반카리모프 계열 주지사 강제 축출까지 겹치면서 연일 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빈곤[3]과 실업,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은 시위를 더욱 키웠다. 5월 12~13일 무장한 사람들이 교도소를 습격해 교도관들을 죽이며 체포된 사업가들을 석방했고 안디잔 지역 행정청사도 점거하고 검찰청장과 세무조사국장을 포함해 최소 20명의 법집행기관과 정부 관계자를 인질로 잡고 카리모프에 대한 사임을 요구했으며 안디잔 지역의 국가안보국(SNB) 본부도 점거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2005년 5월 13일 카리모프는 안디잔에 계엄군을 투입하고 직접 자국민에 대한 발포를 명령했고[4] 여성과 어린이, 임산부, 노인이 포함된 비무장 평화 시위대를 향해 AK-47은 물론 중기관총, 탱크[5] 저격수[6], 헬리콥터 건쉽[7]까지 동원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해 엄청난 사망자가 나왔다. 발포 대상이 발포 대상이었으니 사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었다.[8] 특히 5월 13일 저녁 5~6시경 안디잔 중앙광장에서의 경고 없는 대규모 집단 발포는 치명적이었다고 하는데 학살 과정에서 군인들은 장갑차로 안디잔 중앙광장의 모든 출구를 막아 사람들이 해산되는 것을 막은 후 군중을 광장 인근 폐쇄된 거리인 철폰 애비뉴(Chulpon Avenue)로 몬 뒤 그곳에서 저격수와 경찰이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9] 사람들이 손을 들어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도 군인들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총을 쐈다고 한다.

덤으로 군인들은 부상자에게 생존자가 어딨냐고 물은 후 묻지 않으면 총으로 쏴 살해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 시위 참여자들을 구금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체포한 사람들에게 강제로 '극단주의 종교 단체에 속해 있고 무기를 소지했다'는 허위 진술을 하도록 강요하기까지 했고, 허위 진술을 받아들이고 경찰의 처우에 불만이 없다는 진술서에 서명해야 풀어줬다. #

정부 주장에 의하면 187명이 죽었다고 하지만 악행의 규모를 축소해 발표하는 경향이 있는 독재국가의 특성상 실제로는 400~600명에서 약 1,500명이 죽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고[10][11] 심지어 현지인들 중에는 2,500명 이상이 죽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만 학살 직후 우즈베키스탄 측에서 학살 피해자들의 시신을 표기도 없이 집단 무덤에 매장했기 때문에 정확한 사항은 불명이다.

당시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이 봉기는 외세(서방 정부)가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에서와 유사한 반란을 우즈베키스탄에서 수행할 목적으로 선동한 폭동이라고 주장하며 학살의 사망자 대다수가 '테러리스트'들이고 사망한 민간인 60명도 정부군이 아닌 무장 테러리스트들이 죽인 거라고 허위 날조하며[12] 외신들의 현장 취재를 철저히 봉쇄했을 뿐 아니라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국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들까지 내보냈다. 우즈베키스탄에 들어가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도 모두 내보내졌고 외국인 관광객들의 우즈베키스탄 방문을 극도로 제한함과 동시에 외국 언론의 자유로운 취재활동도 사실상 봉쇄되었다.

물론 자국민에 대한 탄압은 두말할 필요가 없어 안디잔의 비극의 진실을 전달하려고 시도한 인권 운동가, 독립 언론인, 정치 활동가들은 극단주의자, 스파이, 테러 선동자로 모함을 받으면서 '가짜 뉴스' 유포 혐의로 체포되어 감시와 협박, 구타는 물론 강제적인 공개 비판이나 가택연금, 구금까지 당했을 뿐만 아니라 학살 직후인 2005년 여름 우즈베키스탄 텔레비전은 시위에 참여하다가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오해'를 하여 시위에 참여한 것을 '회개'하고 카리모프에게 용서를 구한 후 부모를 만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방송했는데 당연히 이는 미리 짜여진 대본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그 사업가들의 친척들과 그들의 고향인 주민들은 모두 구금되었고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245명이 비공개 재판에서 5~21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현재도 이 사건에 대해선 신군부하의 5.18 민주화운동처럼 철저히 보도통제가 이루어져 자세히 알려져 있지 으며 우즈베키스탄인들도 어떤 참극이 벌어졌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증언하려는 자들에게[13] 갖은 방식의 보복을 자행했으며 외국인이 우즈베키스탄 현지에서 이 사건 이야기를 하면 코렁탕을 마실 수 있으니 주의하자. 카리모프가 죽고 나서 그나마 개혁주의자인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민주화 및 자유화 조치가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한 전면적인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일반 국민들이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도 금기시되고 있다.[14] 참고로 안디잔 출신인 무굴 제국의 창건자 바부르의 시에서 따 온 "안디잔에 나의 영혼이 남아 있다(Andijonim qoldi mening)"는 그 해 우즈벡어 인터넷[15]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문구가 되었다. #

웃긴 사실은 이 사건을 대하던 강대국들의 태도다. 2005년에 이 사건이 벌어졌을 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치안유지를 위한 조치는 정당했다."며 카리모프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중국은 "남의 나라 일엔 끼어들지 않는다."며 침묵을 지켰다. 국제사회에서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가자 당시 미국 백악관 대변인은 "사태의 원인이 시위대에게 있다."며 카리모프를 두둔했으머 유럽연합(EU)의 비난은 형식에 그쳤다고 한다. 기사 심지어 학살 직전인 2005년 5월 10~12일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원개발 교류 등을 위해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해 카리모프 대통령을 만나 외신의 빈축을 산 바가 있는데 이는 2007년 송민순 외교통상부장관의 우즈베키스탄 방문을 앞둔 시기 문화일보 기사에 언급된 바 있다.

조지 소로스는 2005년 6월 3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오렌지 혁명과 안디잔 학살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레오니드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에게 시위대에게 발포하라고 조언했으며, 쿠치마는 이를 따르지 않았으나 카리모프는 이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물론 러시아 정부는 이를 날조라면서 전면 부인했다. #

2015년 기준으로도 안디잔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외국으로 도피한 사람의 친척들을 정부 측에서 도청, 감시당하고 있으며, 주민들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2005년 5월 13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여전히 말하지 않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망명자들도 고향에 남은 친척들의 위해를 염려하여 안디잔 및 카리모프 정권에 대한 얘기를 함구한다고 한다. #

3. 참고 자료

안디잔 학살에 대한 휴먼라이츠워치의 보고서 1 보고서 2

2016년 4월 작성된 안디잔 학살 연구글


[1] 안디잔은 러시아어 표기(Андижан, Andizhan)에서 유래했다. 우즈베크어는 옆동네의 페르시아어의 영향으로 원래 'a' 발음이 'o'에 가깝게 변하고 모음조화가 깨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는데 러시아식 표기는 이를 반영하지 않은 표기가 많아 이렇게 된 것. 이슬롬 카리모프가 이슬람 카리모프로 쓰이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이다. [2] 실제로 이들은 일자리와 물품 지원, 빈민 구제로 지역 주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3] 2005년 기준으로 우즈베키스탄의 1인당 GDP는 고작 547달러도 되지 않았는데 캄보디아 라오스가 470달러 안팎이었던 데다가 방글라데시가 493달러, 감비아가 (우즈베키스탄보다 높은) 619달러, 인도 파키스탄도 700달러 안팎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우즈베키스탄이 학살 당시 얼마나 빈곤한 나라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심지어 세계 평균(약 7286달러)과 비교하면 학살 당시 우즈베키스탄은 그야말로 극빈국을 가까스로 면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 [4] 이는 2007년 영국으로 망명한 우즈베키스탄 비밀정보국 소령 이크롬 야쿠보프(Ikrom Yakubov)가 폭로한 내용이다. # 고문을 당한 일부 수감자들은 경찰이 "대통령으로부터 총을 쏘아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 것을 증언하기도 했다. [5] 심지어 탱크가 시위대에 대포를 쐈다는 증언도 있다. # [6]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건물 옥상, 군용 트럭, 장갑차 안, 바리케이드 뒤에서 매복 공격을 퍼부었고, 단순히 시위대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까지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7] 증언에 따르면 헬리콥터가 시위대의 머리 위를 선회한 후 총격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8] 심지어 5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까지 총을 쏴 죽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우즈베키스탄군은 아이를 돕기 위해 달려간 어머니에게까지 총을 쏘기도 했으며 익명의 현지인은 대학 건물에 50구의 시신(주로 여성과 어린이)이 안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9] 애초에 순수히 폭동 진압을 위한 고육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발포를 명령한 것이었다면 광장을 틀어막은 후 민간인들을 일부러 광장 구석으로 몬 뒤 이들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안디잔 학살이 '폭동 진압을 핑계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기 위한 폭동적 시위진압'이었단 것을 잘 보여주는 증거다. 이는 1979년 방기 학살, 1980년 광주 학살,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와도 비슷하다. [10] 우즈베키스탄 현지 의사는 영안실에서 최소 500구의 시체를 봤다고 증언했다. # 기사에 따르면 한 중년 여성이 학살 전 트럭 한 대 분량의 보드카가 군인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11] 우즈베키스탄의 비합법적 야당이던 자유농민당은 실종자 친척들과 대화를 통해 안디잔과 인근 파크타바드에서 745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비슷하게 5.18 민주화운동도 군 조사당국자가 실제 사망자는 정확히 832명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12] 이와 비슷하게 전두환, 셰이크 하시나도 시위 중 사망한 민간인들은 자신이 아닌 북한군/야당이 죽인 거라고 우겼다. [13] 해외의 외신기자들도 포함 [14] 특히 미르지요예프도 카리모프 정권 치하에서 국회의원, 총리직을 지내며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한 사람인 데다 안디잔 학살 사건 당시 카리모프의 진압을 지지했던 태생적 한계가 분명한 인물이다. 노태우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조사하는 것을 건드리지는 않았다는 것과 무척이나 대비되는 태도다. [15] 2005년 기준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전체 인구 30명 중 1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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