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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Rudolf, Kronprinz von Österre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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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 (Rudolf Franz Karl Joseph) |
출생 | 1858년 8월 21일 |
오스트리아 제국 락센부르크 | |
사망 | 1889년 1월 30일 (향년 30세)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메이얼링 | |
배우자 |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 (1881년 결혼) |
자녀 | 장녀 엘리자베트 마리 |
아버지 | 프란츠 요제프 1세 |
어머니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
형제 | 조피, 기젤라, 마리 발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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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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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동양의 사도세자랑 비슷할 정도로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보여준 비극적인 인물이다.[1] 뮤지컬 더 라스트 키스는 이 사람의 사랑과 죽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독일 제국의 황태손 시절 빌헬름 2세와 함께 찍은 사진.(1883년 촬영.) 나이는 비슷하지만 루돌프가 1살 많다.[2]
2. 생애
2.1. 불행한 어린시절
1858년 8월 21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루돌프의 친할머니인 조피 대공비는 루돌프가 태어나기 1년 전에 그의 큰누나 조피[3]가 부모와 동행한 헝가리 왕국 여행 중 장티푸스에 걸려 2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정신을 놓은 엘리자베트 대신 루돌프와 루돌프의 작은누나 기젤라를 자신이 데려가 키웠다. 가뜩이나 시집살이로 힘겨워하던 엘리자베트는 큰딸을 잃고 우울증이 심해져 차녀와 아들까지 그냥 할머니가 키우라고 내버려두고는 아이들에게 아예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 때문에 기젤라와 루돌프는 친할머니 밑에서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실질적으로 친손주들의 양육을 담당한 조피 대공비는 루돌프가 장차 황제가 될 몸이라는 이유로 7살 때부터 군대식 보육교사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그런데 루돌프가 받은 이 가르침이라는 것이 총소리에 놀라 기상, 차가운 눈밭 걸어가기, 찬물 끼얹기, 루돌프 혼자 외진 곳에 두고 알아서 집까지 돌아오기 등 7살 아이가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교육이었다. 이런 교육의 탈을 쓴 학대를 가한 이유는 좀 둔감한 군인 체질이었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도 어릴 때부터 이런 가혹한 훈련을 받고도 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황제로서 격무에 시달렸고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는 정신병 때문에 여행을 빌미로 바깥만 나돌았기에 그 사이에서 루돌프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은 받지 못한 채 할머니에게서 후계자 교육이라는 이름의 학대에 홀로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암울한 상황에서 그나마 2살 터울의 작은누나 기젤라와의 우애만이 힘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머니 엘리자베트가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프란츠 요제프에게 "교관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나를 내쫓아라!"라고 강력히 항의해, 그런 아내에게 탈탈 털린 프란츠 요제프도 이를 수락하여 조피 대공비를 설득해 교관을 좀 더 관대한 사람으로 바꿨다. 루돌프는 새 교육진을 아버지보다 더 가깝게 따랐지만 신분상 이들은 루돌프를 도와줄 세력이 될 수는 없었다. 나중에 루돌프는 이들에게도 감사의 작별 유서를 남겼지만,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넣은 아버지는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걸로 복수했다.
2.2. 갈등의 가속화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친독파이고 루돌프 황태자는 친불파에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에 항상 갈등이 잦았다. 또한 부자는 성향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아 단순, 둔감, 우직함 콤보인 아버지에 비해 루돌프는 지적이고 허약하며 예민 보스였다. 황제는 아들이 너무 공부를 잘 하는 걸 싫어했고(...) 머리에 든 게 많아지면 자신에게 기어오를까봐 감시했다고 한다.가정에 소홀한 워커홀릭이고 할머니 조피 대공비에게 찍소리도 못했던 마마보이 아버지와는 대화할 시간이 극히 없어서 서로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해 갈등은 깊어만 갔다.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 역시 본인이 궁정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안 그래도 예민한 정신이 불안정해진 관계로, 부자 관계를 조정해보려는 노력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니들이 알아서 해라' 하는 식으로 방관하며 자신의 심신을 달래고자 도피성 여행이나 다녔다. 자연히 부자간의 불화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편애하던 막내딸 마리 발레리를 빼면 기젤라보다 루돌프에게 좀 관심을 갖고 애정 있게 대했던 엘리자베트는 기분 내키면 궁에 들러 아들을 낚아서 같이 여행을 하기도 했으나 루돌프의 교육진을 손수 뽑아 바꿔준 후에는 이제 낫겠거니 하면서 또 아들에게 관심 끊고 나돌기 시작했다(...) 이미 우직한 꼴통인 아버지를 그냥 포기한 루돌프는 어머니의 변덕스런 관심에도 감지덕지하며 애정을 갈구했으나 엘리자베트가 남편과 아들이 얼마나 불화했는지 알게 된 건 마이얼링에서 일이 난 다음이었다. 그만큼 가정이나 남편, 자식들에게 아예 관심이 없었다는 뜻.
엘리자베트가 잘못했다는 얘기도 많은데 사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시집왔을 때부터 어머니 조피 대공비와의 갈등이 있었던 엘리자베트를 위해주거나 어머니와 아내 사이를 중재하기는커녕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서 그러는 거니 당신이 참으시오."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 아들의 저러한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 조피 대공비는 어린 며느리에게[4]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킬 수 있었고, 엘리자베트는 남편과 가정에 진절머리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엘리자베트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프란츠 요제프나 조피 대공비 역시 문제가 많았으니 루돌프의 인생 전반부는 누구 한 사람만 탓할 것 없이 집안 어른들이 죄다 문제였다 한 마디로 정리된다.
2.3. 사랑 없는 결혼, 그리고 갈등의 절정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황태자비 |
루돌프 황태자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딸인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했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의 루돌프 황태자와 외향적인 성격의 스테파니 황태자비는 성격 차이로 많이 부딪혔다. 거기다 시어머니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당한 것처럼 극심한 시집살이를 시킬 수는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 사이는 루돌프 황태자와 프란츠 요제프 1세와의 사이만큼이나 악화되었다.[6] 즉 개혁적인 루돌프와 보수적인 스테파니는 처음부터 잘 맞지 않았고 사고방식도 매우 달랐다. 예로 사치하고 놀기 바쁜 궁정 귀족들을 경멸하던 황태자는 영국 여행 후 영국 상류층 자제들과 비교하며 자국 귀족들이 하는 짓을 아예 논문으로 써서 공개적으로 까버렸다. 요약하면 "니들은 왜 사냐? 영국 애들은 놀 땐 놀아도 공부나 운동도 의무로 자기 단련하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하더라. 그런데 니들은 잉여짓 말고 하는 게 뭐임? 그만 쳐놀아! 누리는 만큼 공부든 일이든 뭐든 해라!"
팩트 폭력에 뼈를 쳐맞은 귀족들은 열 받아서 반격하고 황제에게 깨지고 궁정에서 욕 먹기 루트가 반복되면서 귀족들과 그 중심인 황제를 공격하는 루돌프는 황태자임에도 황궁에서 왕따가 되기 시작했지만, 이럴 때 스테파니는 정적인 궁정과 귀족들, 시아버지 편을 들고 남편을 다그쳤다고 한다. 그러니 부부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지식인인 루돌프에 비해 교육도 짧은 스테파니는 남편이 가진 개혁 사상을 위험하게 보았고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얼마나 힘든지도 알지 못했다. 궁정은 루돌프를 따돌리며 일부러 술과 약, 여자를 찾는 것만 허가했는데, 그런 상황을 이해할 생각도 능력도 없던 스테파니는 주색잡기로 의무를 등한시하고 게으르다며 루돌프를 모두 앞에서 망신주거나 공개 장소에 쫓아다니며 부부 싸움을 해댔으니 평판이 좋을 수 없었다.
루돌프는 자신의 사상이나 처지를 이해도 못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정적들을 옹호하는 아내에게 정 붙이기 힘들어했다. 일단 루돌프가 하고 다니는 짓거리에 스테파니는 아내로서 딥빡치는 게 당연했고 궁에서 찍히고 다니니 걱정해서 하는 잔소리였지만, 그런 방식이 루돌프를 더 한계로 몰고 남편 잡아먹은 악처로 찍히는 계기가 되었으니 서로에게 악연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부부는 양가 부모가 자신들을 외면한 것과 똑같이 자기들의 딸 에르치에게도 관심 없이 방임했고,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빠 자녀와의 사이도 어색했다. 나름 잘 생긴 외모와 지성, 황태자라는 지위로 제국 내에서 아이돌 정도로 인기는 있었지만 정치나 가정, 궁정에서는 하대당하는 이상한 포지션이었던 셈.
사실 루돌프는 결혼 전부터도 스테파니가 '별로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않다'며 탐탁지 않아했지만 이미 다른 신부 후보들[7]과의 혼담을 전부 내쳐버렸기에 남은 상대가 없었고, 무조건 장가 가라는 압박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스테파니와 결혼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스테파니가 고대하던 아들 대신 딸 엘리자베트 마리( 1883년 9월 2일~ 1963년 3월 16일)를 낳은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병약해져 아이를 더 이상 낳지 못하게 되자 부부관계는 극도로 나빠졌다.[8] 결국 루돌프는 이런 스트레스와 싸움에 지쳐 쪼아대는 가족과 궁정을 피해 심심하면 궁 밖으로 도망치고 평민들과 어울리며 위로 받았다.
3. 황태자의 러브(?)스토리, 마리 폰 베체라
3.1. 갈등의 폭발, 사랑(?)을 만나다
마리 폰 베체라 여남작 |
루돌프 황태자는 사랑 없는 결혼에 신물이 났고 가족사에 신경을 안 쓰고 어머니처럼 방황하다가 라리쉬 백작 부인에게서 알빈 폰 베체라 남작의 딸 '마리 알렉산드린 폰 베체라 여남작(Marie Alexandrine Freiin von Vetsera, 1871년 3월 19일~1889년 1월 30일)'을 소개받았다.
라리쉬 백작부인은[9]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친정 오빠 루트비히 빌헬름( 1831년 6월 21일~ 1920년 11월 6일)이 귀천상혼해서 얻은 딸로 루돌프 황태자의 사촌이었다. 라리쉬 백작부인의 주선으로 루돌프 황태자는 마리와 사랑에 빠졌고, 당연히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두 사람의 사이를 반대했다.
황실이 필사적으로 마이얼링에서의 진상을 파묻어서 오랫동안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처럼 알려졌지만, 현재는 루돌프가 그저 동반자살용으로 베체라를 이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루돌프가 조카뻘의 순수한 어린애를 꼬드겨 같이 죽은 것처럼 소문 났지만 확실히 밝혀진 바로는 마리는 순진하고 멋모르는 어린 소녀가 절대 아니라 루돌프에 맞먹는 싸이코였다(...)
마리 폰 베체라는 엄연히 자식까지 있는 유부남인 루돌프 황태자를 그루피(Groupie)처럼 쫓아다녔고 일국의 황태자였으니 진짜 스토킹은 못하는 대신 루돌프의 사촌인 라리쉬 백작부인을 통해 근황을 알아내고 먼저 루돌프에게 접근했다. 이렇게 마리가 적극적으로 달라붙자 그걸 덥썩 문 루돌프가 동반자살에 써먹었다는 것이다. 당시 여러가지로 궁지에 몰려 거의 제정신을 잃어가던 루돌프는 만나는 여자마다 같이 죽어달라고(!) 찔러보고 다니던 중이었는데 황태자의 열혈 빠순이였던 마리가 루돌프의 자살 제안을 감격해 승낙했다는 것.
루돌프는 모든 여자들의 아이돌 같은 인기남이었기에 마리가 처음 그를 좋아할 때는 다들 그러려니 했지만, 마리의 팬질은 곧 지인들과 어머니 베체라 남작부인도 위협을 느낄 정도로 병적인 집착이 되었다. 마리의 지인들은 저게 황태자에게 접근하면 크게 사고칠 것 같다고 예상해 뜯어말렸고 저러다 집안을 말아먹겠다 싶었던 어머니 베체라 남작부인은 마리를 잠깐 외국으로 쫓아내거나 소개팅, 폭력까지 써본 듯 하지만 어린 나이에 이미 생각 이상으로 나쁜 데 머리를 잘 굴린 마리는 라리쉬 백작부인을 끌어들여 둘이 손잡고 모두를 속였다. 베체라 남작부인은 마이얼링의 동반자살이 일어난 직후에야 자신이 눈 뜨고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어머니의 말도 안 듣는데 주변 사람들의 온갖 설득과 야단이 먹히지 않은 건 당연했다.
마리는 나이 많은 유부남 황태자와의 불륜이 장애물(아내, 신분)을 뛰어넘으려는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이라고 믿으며 심각하게 도취된 상태였고 누구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베체라 남작부인은 날 잡아서 마리를 무지막지하게 재교육했고 그 결과 궁정에서 발에 채이게 널린 남작의 어린 딸 따위는 누구도 황태자의 연인으로 인정해주거나 알아주지도 않음을 깨달은 마리는 '죽음으로 맺어지는 비극적이지만 진정한 사랑'을 이루겠다면서 더욱 루돌프와의 동반자살에 매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리와 사랑에 빠진 황태자는 당시의 교황 레오 13세에게 ' 스테파니 황태자비와의 혼인무효[10]를 인정해달라'는 부탁을 했고[11] (당연히) 대경실색한 레오 13세는 미친 소리 말라며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문제는 레오 13세가 이 사실을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말해버렸다는 것이다.[12]
3.2. 비극으로 끝난 사랑
격노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루돌프 황태자를 불러내서 그의 면전에서 "너 같은 놈의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다. 제발 가정에 충실해라!!!"라고 한 후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13]결국 어릴 적부터 축적되어 왔던 각종 스트레스와 분노, 외로움이 한 순간에 쏟아져 나오면서 루돌프 황태자는 마리와 함께 사냥용 별장이 있는 메이얼링으로 밀월여행을 가서 마리를 죽인 뒤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 동반자살했다.[14] 일종의 정사(情死). 이때 루돌프의 나이는 만 30세였고 마리 폰 베체라의 나이는 겨우 만 16세였다.[15] 이 동반 자살 사건은 이후 '마이어링 사건'으로 언급된다.[16]
하지만 다른 이야기도 있다. 애초에 루돌프는 외도가 잦았던 탓에 정부가 많았고, 그 중 미치 카스파(Mizzi Kaspar, 1864년~ 1907년)라는 창부와 인간적으로 가깝고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미치 카스파가 그의 동반자살 제안을 거절하자 대타(?)로 베체라와 함께 자살했다는 것이다. 미치는 설마하면서도 경찰에 황태자가 자살하려 한다고 신고해서 구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상황 종료.
심지어 루돌프가 자살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루돌프의 누나 기젤라는 "루돌프의 머리에 난 총상 근처에 화상이 없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는 루돌프가 직접 머리에 총구를 대고 총을 쏘지 않았다(일정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사람이 총으로 루돌프의 머리를 쏴서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카를 1세의 황후인 부르봉파르마의 치타 역시 루돌프 황태자는 사실 살해당했다고 언급했다. 위의 화상 증언도 어렸을 때 지타가 기젤라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장남 오토 대공이 증거를 물려받았다고 했지만 정작 대공의 반응은 평생 안알려줌. 무엇이 진실이든 혼자서는 죽지도 못하는 찌질남과 중2병 걸린 사생팬이 벌인 이 행각으로 제국은 물론 유럽 전체가 뒤집혔다. 특히 눈 뜨고 당한 거나 다름 없는 베체라 가문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나버리고 투명인간 취급당했으니 결국 둘 다 끝까지 민폐. 마리의 급 높은 또라이력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많은 편지와 유서에서도 느껴지는데 그 정점은 라리쉬 백작부인에게 남긴 중2병 넘치는 편지에서 "정말 고맙고 우리 때문에 당신도 폭망할 거예요. 그럴 때 젤 좋은 방법은 미련없이 우릴 따라오는 거예요."라는 부분(.....)
저 두 사람의 증언과는 별개로 피살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루돌프 황태자의 장례 미사를 가톨릭 교회에서 허락해 준 점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자살을 큰 죄악으로 여겨서 당시 교회법은 자살자에 대한 장례 미사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루돌프가 살해당했다는 증거를 오스트리아 황실이 가톨릭 교회에 극비리에 제시하고 이를 수용했다는 주장이다. 다만 대외적으로 황태자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황실의 명예 문제로 끝날 리가 없기 때문에 비밀로 덮었다는 설이다. 살해의 배후는 제각각으로, 루돌프의 즉위를 반대하는 황실 내 보수파, 혹은 황실을 증오하는 공산주의 세력 등이 후보에 있다. 다만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자살의 경우 자살이 아니라 병사로 보아 장례 미사를 허용했기 때문에, 장례 미사가 거행된 것이 피살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교회가 장례 미사조차 단칼에 빠꾸 먹였는데 암살이라서, 혹은 자살이 맞지만 황실이 바티칸에 미친 듯이 로비를 넣어 정신병으로 꾸며 허락을 얻어냈다는 설도 있다. 생전 루돌프가 교회를 상대로 심히 어그로를 끌었던 전력 때문에 완전 찍혀있었던 것도 한몫했고.
아내 스테파니는 루돌프의 사후 11년 후인 1900년에 헝가리의 귀족과 재혼했다. 제국의 전 황태자비가 일개 귀족과 재혼하겠다고 하니 아버지 레오폴드 2세와 전 시가인 오스트리아 황실 모두 곤혹스러워 했지만 스테파니가 루돌프 때문에 워낙 고생을 많이 한 데다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서 결국 결혼을 허락했고, 레오폴드 2세는 딸과 연을 끊었다. 루돌프는 아내에게 보낸 유서에서 이제 자신이라는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하라는 말을 남겼고
4. 가정사의 비극
※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은 ☆ 표시- 할아버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 할머니: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
- 어머니: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 큰누나: 조피(1855년 ~ 1857년)☆
- 작은누나: 기젤라( 1856년 ~ 1932년)[17]
- 루돌프 황태자 본인(1858년 ~ 1889년)☆
- 아내: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1864년 ~ 1945년)
- 딸: 엘리자베트 마리(1883년 ~ 1963년)
- 여동생: 마리 발레리( 1868년 ~ 1924년)[18]
- 숙부: 막시밀리아노 1세(1832년 ~ 1867년)☆
- 숙부: 카를 루트비히 대공
- 사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1863년 ~ 1914년) ☆
- 사촌: 오토 프란츠 대공(1865년 ~ 1906년)
- 당조카: 카를 1세(1887년 ~ 1922년)
상단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라는 별표시가 꽤 많다는 걸 봐도 알겠지만, 당대 합스부르크 황가의 비극은 루돌프 황태자로만 끝난 것이 아니다. 황태자에게는 그저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미 루돌프 황태자 이전에도 여행에 동행했던 큰딸 조피가 어린 나이에 병사한 걸 보아야 했으며, 이름뿐인 멕시코 황제 자리에 올랐던 남동생 막시밀리아노 1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막시밀리안은 어머니 조피 대공비가 가장 사랑한 아들이었고, 실제로 부고를 들은 조피 대공비는 충격을 받고 칩거하다 죽었다.
제수씨인 벨기에 공주 샤를로트는 진심으로 사랑한 남편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미쳐버리는 바람에 친정오빠인 레오폴드 2세[19]라는 말종의 명령으로 감금당한 채 60년 가까이 살다 외롭게 죽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자신을 황위에 앉힌 어머니를 배려하느라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방치하는 바람에 부부 사이가 소원해졌고, 여기저기 여행으로 스트레스를 풀던 엘리자베트 황후는 스위스에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의 칼에 암살을 당하고 만다.
막시밀리아노 1세 뿐만 아니라 또다른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 역시 위장병으로 일찍 사망했으며, 루돌프 황태자 사후 후계자로 낙점한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카를 루트비히의 아들) 역시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서거하기 2년 전에 사라예보에서 부인과 함께 암살당하는 바람에 늙은 황제는 다시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황실의 가족사도 그렇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공적으로도 국제사회에서 이미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후계자들을 연이어 잃게 되자 본래는 황제가 될 일이 없었던 방계 황족을 황제이자 왕으로 만들어야 했고, 1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어 멸망했다.
이렇듯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불행한 황제였다.
5. 가족 관계
5.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Rudolf, Crown Prince of Austria) |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츠 요제프 1세 (Franz Joseph I) |
<colbgcolor=#ffffe4,#323300>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Archduke Franz Karl of Austria) |
|
프란츠 2세 (Francis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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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Princess Maria Theresa of Naples and Sici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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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Princess Sophie of Bav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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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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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a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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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Duchess Elisabeth in Bav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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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에서의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 (Duke Maximilian Joseph in Bav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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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에서의 공작 피우스 아우구스트 (Duke Pius August in Bav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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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베르크의 아멜리 루이제 공녀 (Princess Amélie Louise of Aren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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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루도비카 공주 (Princess Ludovika of Bav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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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
|||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aden) |
5.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빈디슈그레츠의 오토 공비 엘리자베트 마리 (Elisabeth Marie, Princess Otto of Windisch-Graetz) |
1883년 9월 2일 | 1963년 3월 16일 |
슬하 3남 |
레오폴트 페츠네크 슬하 1녀 |
엘리자베트 마리 여대공 |
아내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정식 이름은 엘리자베트 마리 헨리에테 스테파니 기젤라 "에르치" 폰 외스터라이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특이하게도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당원으로 입당하여 사회주의자로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로 붉은 대공비 또는 붉은 황녀.
엘리자베트 마리는 인생사가 참으로 다이나믹한데 오토 추 빈디슈그래츠 남작에게 반해서 결혼시켜 달라고 했는데, 이 오토라는 남자는 약혼자도 있던 사람이라 당연하게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명령에 의해 반강제로 결혼한 엘리자베트를 사랑하지 않았다. 오토는 대놓고 창녀와[20] 바람을 피우는 등 아내의 심기를 뒤집어놨고, 결국 엘리자베트는 이혼 신청을 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적십자 간호부로서 병사들을 간호하는 역할로 모범을 보였으며, 오토와 이혼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까지 망하면서 잠시 굶기도 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때 자녀들의 양육권 분쟁이 있었는데 사실 오토나 엘리자베트나 둘 다 딱히 아이들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엿먹이기 위해 이혼소송이 걸리게 된다. 이때 사회민주당원들이 이혼 소송에서 도와줘서 사회당에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직접 입당, 연애도 레오폴트 페츠네크라는 평민 사회주의자와 했다.[21] 귀천상혼으로 고생한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생각하면 아이러니.
정작 연애기간에 비해 결혼이 늦었는데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페츠네크가 다하우 수용소로 끌려가서 결혼은 만나고 한참 뒤인 27년 후 1948년에 했다고 한다. 이후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인생사는 엘리자베트 마리 문서로.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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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빌헬름 2세와 비교가 많이 되는데 일단 둘 다 같은 세대로 나이가 비슷하고, 어머니와 할머니가 사이가 안 좋았고 어렸을 때 학대를 당했으며 할머니의 품에서 자랐다. 차이점이 있다면 루돌프 황태자는 할머니
조피 대공비한테 (후계자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학대당했고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아들에게 거의 무관심했다. 빌헬름은 반대로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한테 (왼쪽 팔을 치료한다는 명목 하에) 학대당했으며 이를 보다 못한 할머니
아우구스타가 손자를 데려와서 직접 키웠다. 재밌게도 루돌프 황태자와 빌헬름 모두 아버지와 정치 성향이 정반대여서 갈등이 잦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프란츠 요제프 1세-루돌프 황태자 부자는 각각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였던 반면,
프리드리히 3세-빌헬름 2세 부자는 정반대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였다. 참고로 부자 간의 수명도 정 반대인데 프란츠 요제프 1세는 80세가 넘도록 장수했고 루돌프 황태자는 자살로 단명한 반면 프리드리히 3세는 57세의 나이로 비교적[22] 이른 나이에 사망한 반면 빌헬름 2세는 82세까지 살아서 증손까지 볼 정도로 장수했다.
루돌프 황태자 부부와 빌헬름 2세 부부.
또한 루돌프 황태자는 정략결혼한 스테파니와 사이가 나빴고 베체라를 만난 후 혼인무효를 하려 했지만 허락받지 못하고 욕만 퍼먹고는 결국 마리와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만난 지 몇 달도 안 된 마리와 재혼은 신분상으로도 불가능 그 자체였기에 그냥 사망 전 스테파니와의 관계를 확실히 끝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슬하에 외동딸만 있어서 루돌프 황태자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반면 빌헬름 2세는 아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 부부관계가 좋았고 슬하에 6남 1녀를 낳는 아들부자의 끝판왕으로 호엔촐레른 가문은 현재에도 빌헬름 2세의 직계 후손으로 내려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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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으로야 술, 약, 여자에 절어 엉망진창이었지만 실제로는 원체 똑똑해서 5살엔 놀랍도록 성적이 좋아 할머니 조피가 자랑하기도 했다. 실제 군인도 아니고
똥별이면서 굳이 전장에 쫓아다니며 폐만 끼치고 거하게 깨지던 아버지와 달리 군인 활동보다는 공부 쪽이 적성에 잘 맞고 무지막지한 교육으로 단련되어 제국의 실정도 잘 꿰뚫고 있었지만, 이 때문에 황제는 아들을 경계하고 대학도 못 가게 난리치고 방탕하게 살도록 고의로 방치해 점차 육체적, 정신적으로 다 드러나게
와르르맨션 급의 폐인이 된 것이라고. 가정에서도 아버지와 불화, 어머니의 부재와 아내까지 루돌프의 정신을 심하게 갉아먹어서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실제로 죽기 전 지인들의 기록이며 초상화 등은 보정을 해도 있는대로 맛이 간 상태를 드러낼 정도니, 이쯤이면 애비가 아니라 웬수라고 봐야할 정도.
공부를 잘 하고도 가고 싶었던 대학도 못 간 루돌프와 정반대로, 의외로 프란츠 요제프 못지 않은 상꼰대 이미지인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 부부는 아들 프리드리히를 대학에 처넣다시피 하여(...) 억지로 갔지만 그냥저냥한 성적으로 졸업이라도 시켰다. 루돌프는 이 때 자유주의 학풍에 물든 프리드리히 3세와 친했는데 프리드리히가 일찍 가고 꼴도 보기 싫은 빌헬름이 즉위하면서 엄청 좌절하고 더 약물, 주색에 빠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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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중한 인물임에도 공부도 못 하게 하고 정치에 끼워주지도 않는 스트레스와 보수적인 궁정에 반항하듯 자주 궁을 탈출해 자유주의자와 개혁파들과 어울렸다. 궁정에서야 밉상으로 찍혔지만 루돌프는 빈의 서민 술집 등에 종종 출몰해 술꾼들하고도 소탈하게 놀아 평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약쟁이에 눈 돌아가게 문란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그들과 직접 어울리면서 하층민들의 희망없는 생활을 보며 그 처우나 제국 체제 개선 등을 주장하고 사치스런 귀족들과 싸우던[23] 루돌프의 비극에 신민들은 진심으로 슬퍼했고, 그 반동으로
스테파니는 안 그래도 인기 없는데 남편을 못 살게 굴며 바가지 긁는 악처로 욕 먹고 딸
엘리자베트 마리조차 아버지에게 동의하고 존경하면서 아버지를 이해 못하고 괴롭혔다고 스테파니를 원망했다. 아들이 망가지는 동안 신경도 안 쓰던
엘리자베트 황후는 이 일로 완전히 비정한 엄마로 찍히고 여생을 진짜 정신병자라고 의심 받을만큼 우울에 빠져 지냈다. 그러고는 며느리 스테파니를 면전에서 욕하고 "쟤가 어떤 여자인 줄 알면 루돌프가 왜 그렇게 타락했는지 제국의 누구든 이해할 거다. 저런 게 황태자비라니 국민들한테 수치스러워 얼굴을 못 들겠다!" 같은 폭언도 했지만
세간의 반응은 싸늘 그 자체라
셀프빅엿만 먹었다.
정작 제일 큰 책임자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욕을 안 먹은 이유는 딱히 잘 한 게 없어도 아들이 죽고 장례식 기간에도 집무실에 박혀 사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성실함 하나만 끝내줬기 때문(...) 사실 황후나 다른 황족들이 하도 의무나 체면을 팽개치고 나도는 사람이 많다보니, 잘하든 못하든 상대적으로 궁에 틀어박혀 일하는 황제가 더 돋보일 수밖에 없긴 했다. 황제는 아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지만 가족과 친구들에게 일일이 유서를 보낸 루돌프는 황제만 없는 사람처럼 유서도 안 남겨서 자신이 먹은 빅엿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돌려줬다.
[1]
유럽의
아동심리학자들은 이 사람의 인생을 아동교육의 부정적 사례의 집합체라고 평가할 정도다.
[2]
친불파인 루돌프는 반프랑스 성향의 빌헬름 2세를 극혐해 공석에서만 어울렸고 빌헬름도 루돌프를 고까워 해서 서로에게 굴욕 주기 배틀을 즐겼다. 루돌프가 빌헬름을 만나러 가기 전 "징글징글한데... 그냥 쏴죽이고 사고인 척 연기할까?"하고 농담 같은 진담으로 쓴 편지도 있다고. 루돌프는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와 친했는데 빌헬름은 자기 외삼촌에게도 있는대로 개겨서(무려 사탄이라고 불렀다) 에드워드 7세도 루돌프 심정을 잘 이해했다. 이렇듯 서로 사이가 안 좋은데다 루돌프가 친불파에 자유주의자인게 거슬려서 빌헬름 2세도 루돌프 사후 암살설의 배후 중 하나로 종종 언급되기도 했다.
[3]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의 맏이이자 장녀. 풀네임은 조피 프리데리케 도로테아 마리아 요제파(Sophie Friederike Dorothea Maria Josepha).
[4]
원래 조피 대공비가 며느릿감으로 낙점한 것은 엘리자베트의
언니인 헬레네였으나 프란츠 요제프가 엘리자베트에게 반해 고집을 부려 결혼했다. 결혼 당시 엘리자베트는 만 16세밖에 안 된 어린 나이였고 시골에서 태어나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피 대공비가 보기에 황후의 재목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골에서 태어나 자유분방 환경에서 자란 건 헬레네도 똑같은데 기준이(...)
[5]
벨기에의 공주라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손녀인
마리 헨리에테였기에 격이 영 안 맞는 것도 아니었다.
[6]
왜
루돌프의 아버지를 예를 들었는지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생각해 보자.
[7]
지체 높은
가톨릭 가문들인
작센 왕국의
베틴 가문,
스페인의
보르본 왕가,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가, 오를레앙 가문 등의 공주들과 혼담이 오갔었다.
[8]
이 '병약해진' 것이 사실
성병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다. 황실 생활에서 얻는 스트레스를 여성편력으로 풀었던 루돌프가 그 과정에서 얻은 성병을 스테파니에게 옮기는 바람에
불임이 되고 말았다는 주장으로, 뮤지컬
엘리자벳에서는 이 이야기가 루돌프의 부모인 엘리자베트와 요제프의 이야기로 각색되어 나온다. 실제로 스테파니는 루돌프와 사별한 후
재혼했으나 재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했기에 이 설이 사실이라는 주장도 있다.
[9]
본명은 마리 루이즈 라리쉬 폰 멘니히(Marie Louise Larisch von Moennich). 문제의 마리 폰 베체라를 몰래 빼돌려 루돌프와의 불륜을 적극적으로 돕고 은폐하는 대가로 수입을 보장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루돌프의 자살 이후 둘 사이를 이어준 것이 들통나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쫓겨나고 사교계에서도 매장당했다. 말년에는 고모 엘리자베트 황후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황실 이야기를 팔며 빈곤하게 살다가
1940년에 사망했다.
[10]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예외적으로 '혼인무효'라는 것이 있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
[11]
루돌프와 스테파니는 더 이상 서로를 찾아가지도 않을 정도로 부부관계가 파탄이 나 있었다.
[12]
물론 교황이 루돌프를 의도적으로 궁지에 몰려고 그런 건 아니고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어쩌면 좋겠는가" 하고 상담한 정도였지만.
[13]
심지어 신임 대사를 접견하는 자리에서는 황태자가 경의를 표하러 나오자 돌아서버렸다고 한다.
[14]
이 때문에 장례식 때 공개된 루돌프의
사진(흑백 사진이고 평온한 표정이라 충격은 덜하지만, 그럼에도 시신 사진이므로 클릭 주의)을 보면 시신의 머리에 있는 총상의 흔적을 붕대로 가려서 장례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15]
베체라는 사후에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1945년
소련군이 빈을 점령했을 때에 관이 파헤쳐졌고, 이 때에 두개골에 총상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정확한 진상은 더 이상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녀의 유골을 누군가가 훔쳐가는 일이 생기는 등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
[16]
루돌프의 외사촌 라리쉬 백작부인 역시 대가를 받고 둘의 뚜쟁이 역할을 한 것부터 메이얼링 전날 행적까지 전부 털리면서,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분노를 사 오스트리아의 궁정과 사교계에서도 완전히 쫓겨나고 남편에게도 초스피드로 이혼당했다. 조카인 라리쉬를 한 때 매우 아꼈던
엘리자베트 황후도 큰 충격을 받아 이후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라리쉬는 영영
이름조차 불러선 안될 자가 되었다.
[17]
루돌프의 누이들 중 그나마 가장 평온한 삶을 살며 장수했다. 16세에
정략결혼한 10세 연상의 남편과도 원만히 해로했고, 4명의 자녀들도 어느 하나 요절하지 않고 잘 자랐다.
[18]
루돌프와 달리 심한 편애를 받아서 빈정상한 오빠와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다. 자라면서 나아지기는 했지만, 결혼 건으로 다시 틀어지는데 언니와 달리 한참 처지는(그렇다고 마냥 처진다고 볼 수는 없는 게 남편인 프란츠 잘파토어 대공 역시 같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출신이었다. 남편의 가문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분가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로트링겐토스카나 가문으로 프란츠 잘파토어의 조부는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 2세였고 백부는 마지막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4세였으며 어머니도
양시칠리아 왕국의 공주였다. 망국의 왕족인데다 그마저도 군주의 자녀가 아니라 황제의 딸인 마리 발레리에 비하면 처지는 신분처럼 보이는 거지 남편 역시 황실의 혈통을 적통으로 잇고 있었던 만큼
귀천상혼은 아니었다.) 신분의 남편과
연애 결혼을 했다. 더 좋은 조건의 신랑감이 정략 결혼 상대자로 내정된 상태라서 반대가 심했지만 마리 발레리를 유독 편애한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 덕분에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고 루돌프 사망 1년 후 결혼해 그렇게 결혼한 남편과 10남매를 낳고 잘 사는 듯했다. 그러나 말년에 남편이 외도를 하고
사생아를 낳아 장인의 이름인 '프란츠 요제프'를 붙여주기까지 하자 가문이 모욕당했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고, 50대 중반에 병사했다.
[19]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식민지로 삼은
콩고를 지옥으로 만든 끔찍한 인간 폐기물이다.
[20]
마리 지글러라는 사람으로 오페라 가수라는 설도 있다.
[21]
페츠네크는 심지어 고아였다. 즉 오스트리아 제국이 살아 있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결혼인 셈.
[22]
아버지랑 아들이 워낙 오래 살아서 그렇지 프리드리히 3세는 손주도 봤다.
[23]
실제로도 루돌프는 1880년대에 태동한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 개편안을 지지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