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DFDC><colcolor=#000> 빈디슈그레츠의 오토 공비 엘리자베트 마리 Erzherzogin Elisabeth Marie von Österre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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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독일어 |
엘리자베트 마리 헨리에테 스테파니 기젤라 (Elisabeth Marie Henriette Stephanie Gisela) |
헝가리어 |
에르제베트 마리어 헨리에터 슈테파니어 기젤러 (Erzsébet Mária Henrietta Stefánia Gizel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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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3년 9월 2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니더외스터라이히 락센부르크 프란젠스부르크 성 | ||
사망 | 1963년 3월 16일 (향년 79세) | |
오스트리아 빈 휘텔도르프 빈디슈그레츠 빌라 | ||
배우자 | 빈디슈그레츠의 오토 공 (1902년 결혼 / 1948년 이혼) | |
레오폴트 페츠네크 (1948년 결혼 / 1956년 사망) | ||
자녀 | 프란츠 요제프, 에른스트, 루돌프, 스테파니 | |
아버지 |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 |
어머니 |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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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제국 루돌프 황태자와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의 외동딸. 애칭은 에르치(Erzsi). 후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어 '붉은 여대공(The Red Archduchess)'로 불렸다.2. 생애
풀네임은 엘리자베트 마리 헨리에테 스테파니 기젤라(Elisabeth Marie Henriette Stephanie Gisela).[1]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황태자비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의 유일한 친손녀이다. 당대 왕족들 중 최고의 미녀로 유명했던 엘리자베트 황후의 손녀답게 할머니에겐 미치지 못해도 굉장한 미인이었다. 나름 미남+초미녀의 결합인 황제 부부의 유전자가 대패했는지 그 손자녀들 대부분이 박색(...)이라 평가가 더 높았던 듯도 하지만 일단 그들 중에서 가장 미녀였다.
아버지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했을 당시 엘리자베트 마리는 고작 6살이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아버지 루돌프가 자살했던 날을 충격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루돌프는 메이얼링에 가기 전 갑자기 딸 에르치를 보고 싶다며 찾았지만 황궁 스케줄 때문에 보지 못하고 떠났고, 그 다음날 미친 사람처럼 들이닥친 어머니 스테파니에게 다짜고짜 질질 끌려간 곳에는 아버지의 시신이 있었다고.
부모와 애정이나 애착 없이 유모에게서 자란 스테파니는 본인도 딸을 직접 키우지 않고 유모에게 일임했다. 일정에 따라 얼굴이나 보는 합스부르크 식 양육으로 별로 친하지 않던 어머니가 재혼한 뒤에는 조부인 황제 곁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살리카법[2]에 따라 여성인 그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조부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곁에서 자라는 유일한 손녀인 엘리자베트를 진심으로 귀여워하며 자주 무릎에 앉히고 놀아주었고, 아들 대신 손녀 바보가 되어 뭐든 들어주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곧장 굳어져 피하는 사람들을 보며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점차 다루기 힘든 아이로 자랐다. 우연히 아버지 루돌프의 개혁 의지나 어떻게 제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 했는지 알게 된 엘리자베트는 자기 말이라면 무조건 OK해주던 조부 프란츠 요제프에게도 '빈민들을 돕자'는 취지로 말을 꺼냈다고 한다. 그 순간 자애롭던 할아버지는 순식간에 돌변해 처음으로 "네 애비와 똑같은 소리를 하느냐!" 하고 날벼락을 내렸고, 엘리자베트는 죽은 아버지를 이상적으로 존경하고 그 정치사상에 동조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루돌프는 죽기 전 '내가 죽고 나서 남는 것은 나의 딸 에르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엘리자베트는 커서도 아버지의 사진을 응접실에 걸어 놓는 등 아버지 루돌프를 평생 그리워했다.
전 황태자의 딸이지만 잊혀졌다가 할머니 엘리자베트 황후의 장례식에서 슬퍼하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첫 등장한 이 '에르치'는 곧 미모와 물려받은 유산,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유일한 친손녀라는 지위 덕분에 유럽 왕실에서 가장 촉망받는 신붓감으로 떠올랐다. 여러 나라의 왕자들과도 혼담이 오가고 할아버지 프란츠 요제프는 손녀가 빌헬름 2세의 장남인 빌헬름 폰 프로이센과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트가 선택한 남편은 일국의 황태자나 왕자도 아닌 슈탄데스헤어 출신 오토 추 빈디슈그레츠(Otto zu Windisch-Grätz)였다.
무도회에서 처음 만난 이 남자는 황실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이 부족했지만 엘리자베트가 첫 눈에 반해버려 오토가 등장하는 행사에 쫓아다니며 눈도장을 찍었다. 명목상으로는 슈탄데스헤어들도 신성 로마 제국 연방 제후 가문이라 동등결혼 자격이 있지만, 그가 일개 군인에다 실제 인식은 그렇지 못해서 당연히 황실 가족들은 이 결혼을 결사반대했지만 엘리자베트 마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웃픈 건 이 간택남에게는 당시 약혼녀도 애인도 따로 있었고(...) 엘리자베트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약혼녀와 결혼하겠다고
하지만 루돌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을 느끼는 황제의 압력에 강제결혼한 남편은 아내의 어마어마한 재산과 호화로운 생활에 맛들려 씀씀이가 커지고 전형적인 셔터맨 남편이 되었다. 또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엘리자베트는 남편에게도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거나 노조에 가입하라고 권유했는데, 귀족인 오토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진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해군의 U보트 함장 에곤 레르히와 바람을 피웠는데, 꽤 진지한 관계였고 이혼 후 레르히와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레르히는 1차 세계대전 중 죽었고, 이 소식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며칠 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슬퍼했다. 레르히의 유품인 단추와 모자 장식을 선물받았는데, 재혼하고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1차 세계대전 중 직접 부상병의 간호에 나서기도 했다. 4남매를 낳은 엘리자베트는 남편과 여배우가 검열삭제 중인 현장을 덮쳐 총기난사(!) 등등 몇몇 스캔들을 겪었고, 황제 사후에 별거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정식으로 이혼했다. 남편은 그녀의 재산과 자녀 양육권을 요구해 어마어마한 양육권 싸움 등으로 화제가 되었다. 루돌프를 닮았는지 사회주의자 성향을 가졌던 엘리자베트는 노동자들과 사이가 좋았는데, 그들의 도움으로 양육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3] 원래는 둘씩 나눠서 데려가기로 했지만 4명과 다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이들과 사이가 좋아서 엘리자베트의 자식들은 어머니와 있게 되었음을 좋아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 엘리자베트는 직접 사회주의 행진에 참가하기도 하고, 공장 앞에서 붉은 카네이션을 나눠주며 열성적인 당원이 되었다. 당에 많은 후원금을 내기도 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당원 레오폴트 페츠네크와 사랑에 빠졌다. 그에게는 정신이상으로 별거 중인 부인과 자녀가 있었는데, 엘리자베트는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짓고 부인이 받아들였다.엘리자베트는 휘텔도르프에 빌라를 구입해서 20년 동안 페츠네크와 살았고, 여러 집회와 사민당 회의에 참가하며 사회주의자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4] 또 자신의 저택 정원을 개방하여 직접 채소를 길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지만 몇몇 당원들은 엘리자베트를 '전하'라고 부르기도 했다.합스부르크의 황녀가 고아 출신 사회주의자와 사귀어 전향한 것은 당시 큰 스캔들이었다. 이러한 행보 때문에 "붉은 여대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페츠네크가 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됐을 때, 엘리자베트는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라는 잡지에 자신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군주제가 회복될까 봐 두렵고, 히틀러 같은 독재 체제를 혐오하며, 민주정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라 생각한다.'고 인터뷰했다. 또한 지금 세상은 증오가 지배하고 있지만, 사랑 외엔 중요한 것이 없고 사람들이 곧 이를 깨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엘리자베트는 전쟁 중 사민당 간부들이 탈출할 수 있게 지원했는데, 집에 찾아온 군인들에게 들킬 뻔한 적도 있었다.[5]
페츠네크는 다하우에서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엘리자베트는 페츠네크를 고생시킨 나치에게 분노하고, 돌아온 남편을 존경심으로 지극정성 돌봤다고 한다. 나치는 엘리자베트를 좋게 보지 않았지만 아직 합스부르크家의 향수가 사람들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들지는 못했다. 전쟁 중, 비엔나를 점거한 소련군이 두 사람이 살던 휘텔도르프 빌라에서 퇴거시켰고, 후에는 연합군 점령지가 되어서 1955년까지 둘은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엘리자베트는 점성술이나 심령술에 의지하고 모임에 나가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비엔나의 한 우편 등기소에서 페츠네크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페츠네크는 의장이 되고 남은 자녀들인 프란츠와 스테파니가 간간히 엘리자베트를 보러 왔다.[6] 결혼하고 몇 년 뒤, 페츠네크는 심장마비로 죽어버리고 엘리자베트는 통풍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 않으며 6년 동안 칩거하다가 죽었다.
사실 가정 면에서는 매우 불행한 인물이었다. 애인(?)과 동반자살한 아버지야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가 일개 백작과 재혼하자 이에 반대한 엘리자베트 마리는 어머니와 연을 끊어버렸다. 애초에 어머니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는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아서 좀처럼 보는 일도 없었다. 스테파니는 친정 어머니와 똑같이 아이를 직접 키우거나 애정을 주지 않고 유모에게 다 맡겨서 방치했었다. 아버지를 존경하던 엘리자베트는 스테파니가 아버지의 개혁적인 정치 사상이나 보수적인 황실, 궁정에서 죽음까지 내몰리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궁정에 맞추라는 잔소리와 바가지 긁기로 아버지를 괴롭혔다는 점, 자신을 두고 재혼한 것 등에 반발했고 매년 루돌프의 기일마다 아버지와 '연인' 베체라 양을 커플로 기리곤 했다.
그래도 딸의 이름을 스테파니로 짓고 아이들과 함께 만나기도 했으나 결국 1934년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는 자신에게 의지가 되기는커녕 계속 빅엿을 날리던 딸의 상속권을 박탈해버렸다. 사실 스테파니가 직접 기르지 않았고 재혼 문제로 다투다 딸을 두고 갔기에 모녀간이라도 정을 쌓을 틈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또한 할머니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은 자신이 '할머니'로 생각되는 게 싫어서[7] 손자녀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할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하나뿐인 친손녀를 엄청나게 예뻐했고, 할머니 엘리자베트도 가깝지는 않았으나 개인 재산 중 딸들의 상속분과 황실 보물 등 개인이 처분 불가능한 것들을 뺀 나머지(루돌프에게 주었을 상속)를 이 손녀에게 물려줬다.
조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살아있을 때는 기세등등해 차기 황제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부인 조피를 무시하더니, 정작 자신도 임자가
남편과는 막장 드라마를 찍었고 자녀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이는 엘리자베트 마리에게 책임이 크다. 엘리자베트 마리 자신의 사회주의적 이념에 따라 아들 루돌프는 학교에서 나와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아들이 1939년 32세 나이에 차 사고로 죽었을 때 엘리자베트와 남편 페츠네크는 자신들이 무심했던 틈에 그가 나치에 가입했음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엘리자베트의 딸은 자신이 첫 남편과 결혼한 이유가 '어머니가 딸의 남편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엘리자베트는 생전에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는데 자녀들에게는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8] 페츠네크와 의붓아들은 그래도 자녀들에게 얼마쯤은 주라고 설득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엘리자베트가 소유했던 합스부르크 유물 500점과 개인 소장품들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기부되었다.[9] 비엔나 박물관들에서 흔하게 엘리자베트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는 죽기 전 자신이 아이들보다 애지중지하던 애견 저먼 셰퍼드들을 전부 안락사시키도록 지시했는데, 이유는 자신보다 이 개들을 사랑하고 돌봐줄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 결국 엘리자베트의 유언대로 개들은 수의사의 손에 안락사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집 근처에 있던 휘텔도르퍼 공동묘지에 레오폴드 페츠네크와 함께 묻혔는데, 묘비에는 이름도 설명도 없다. 이유는 자신의 무덤이 황실 복위 주장자들이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성지가 되는 것이 싫다는 것.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죽은 뒤 위인으로 추앙받거나 황실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잊히길 원했다.
오스트리아 빈에는 엘리자베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엘리자베트가 생전 살았던 윈디쉬그레츠 빌라와 500m 떨어져 있는데, Elisabeth Petznek Gasse라고 적힌 명판 아래에는 "황실의 일원이자 사회에 헌신했던 여성 운동가"라는 설명이 있다.
여담으로 일본에는 엘리자베트 일생을 다룬 순정만화가 있다. 작가는 미즈노 히데코.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마리 여대공 (Archduchess Elisabeth Marie of Aust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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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Rudolf, Crown Prince of Aust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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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1세 (Franz Joseph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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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10] (Archduke Franz Karl of Aust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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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조피 공주[11] (Princess Sophie of Bav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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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Duchess Elisabeth in Bav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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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에서의 막시밀리안 요제프 공작 (Duke Maximilian Joseph in Bav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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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루도비카 공주[12] (Princess Ludovika of Bav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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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 (Princess Stéphanie of Belgi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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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2세 (Leopold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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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1세 (Leopold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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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도를레앙[13] (Princess Louise of Orléa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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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여대공 (Archduchess Marie Henriette of Aust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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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14] (Archduke Joseph of Aust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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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템베르크의 마리아 도로테아 여공작 (Duchess Maria Dorothea of Württemberg)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프란츠 요제프 공자 (Prince Franz Joseph) |
1904년 3월 22일 | 1981년 1월 1일 |
아르스홋 스훈호번 여백작 기슬라이너 슬하 1남 1녀 |
2남 |
에른스트 공자 (Prince Ernest) |
1905년 4월 21일 | 1952년 12월 21일 |
슬하 1남 1녀 |
에바 이즈바리 슬하 2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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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
루돌프 공자 (Prince Rudolf) |
1907년 2월 4일 | 1939년 6월 14일[15] | |
1녀 |
스테파니 공녀 (Princess Stephanie) |
1909년 7월 9일 | 2005년 9월 7일 |
피에르 달칸타라 케리유 백작 슬하 1남 |
칼악셀 뵤르클룬드 슬하 1남 |
[1]
할머니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의 이름을 땄고 할머니가 평생 헝가리에 애착이 깊었던 연유로 가까운 사람들에겐 엘리자베트의 헝가리식 이름인 '에르제베트'를 줄인 '에르치'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례 때문에 의아할수 있겠지만 카를 6세가 사망할 당시에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 말고는 계승할 남자황족이 아예 없었기에 예외사항을 추가한것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그 예외사항도 적용할수 없던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남편을 황제로 세우고 황후로서 통치해야했다. 엘리자베트 마리의 경우에는 아버지 루돌프 황태자 사망 이후에도 친척 남자 황족들이 많이 생존해있었기에 적장녀임에도 불구하고 계승권이 없던것이다.
[3]
자살한다고 협박하기도 했고 무장한 사회주의자들이 저택 앞을 에워쌌다고 추정된다
[4]
이와 반대로 귀족들은 페츠네크가 오만하다며 싫어했다고 한다.
[5]
신고한 사람이 전남편 오토라는 소문이 있다.
[6]
엘리자베트는 스테파니의 두 번째 남편은 좋게 보았다.
[7]
미모에 집착했기 때문에 자신이 나이를 먹어감을 못 견뎌했고 할머니가 됨도 반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8]
자녀가 막장 자녀가 아니었음에도 유산을 남기지 않아서 본인이 믿는 사회주의 이념 때문에 자녀들에게 부의 대물림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9]
황실 재산이 경매에서 팔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공동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0]
프란츠 2세의 3남이자
페르디난도 1세의 외손자이다.
[11]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5녀이다.
[12]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7녀이다.
[13]
루이필리프 1세의 장녀이자
페르디난도 1세의 외손녀이다.
[14]
레오폴트 2세의 5남이자
카를로스 3세의 외손자이다.
[15]
차 사고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