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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민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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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620-freedom-summer-1964-civil-rights-signs.imgcache.rev1403113568564.web_.jpg
1964년, "우리에게 미국 국민의 권리를 달라"는 팻말을 든 흑인 시위자와 "깜둥이는 집에 가라"[1]는 팻말을 든 백인 시위자
파일:harlem-1964-police-street.jpg
1964년, 백인 전용 식당에 앉아서 '싯인(sit-in)' 시위를 하던 시위자를 끌어내 구타하는 경찰 기동대원
파일:selma-march.jpg
1965년, 셀마 행진
파일:흑인민권운동.jpg
W. E. B. 듀보이스[2], 말콤 엑스, 마틴 루터 킹, 로자 파크스, 메드가 에버스[3]
흑인 민권 운동의 주제가 격 노래였던 This little light of mine

1. 개요2. 배경
2.1. 노예 해방, 자유를 얻은 남부 흑인들 (1865 ~ 1877)
2.1.1. 콜팩스 학살 사건
2.2. 짐 크로우 법으로 고통받는 미국 흑인들 (1877 ~ 1964)
3. 저항의 시작
3.1.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1954)3.2. 에밋 틸 살해 사건 (1955)3.3. 로자 파크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1955-56)3.4. 리틀록 센트럴 하이스쿨과 리틀록 9인의 저항 (1957)3.5. 위험한 저항, 싯인 운동 (1955-60)3.6. 루비 브리지스 등교 투쟁 (1960)3.7. 프리덤 라이더 (1961)3.8. 워싱턴 행진 (1963)3.9. 미시시피 자유여름 (1964)
3.9.1. 미시시피 버닝, 희생된 민권운동가 3인
3.10. 몬슨 호텔 사건 (1964)3.11. 셀마 행진(1965)3.12. 미국의 약속, 마침내 쟁취한 투표권 (1965)
4. 의의 & 영향5. 창작물
5.1. 오페라5.2. 다큐멘터리5.3. 영화5.4. 드라마5.5. 게임
6. 관련 문서

African-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

1. 개요

1950~60년대에 일어난 미국 흑인들의 차별철폐 및 투표권 획득을 위한 민권 운동.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20세기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투쟁이자 시민 불복종 운동 중 하나로 꼽힌다.

사실 미국 흑인의 민권 운동은 1860~1940년대에도 있었으나 1950~60년대에 일어난 운동의 파급력이 매우 높으므로 현대에는 미국 흑인 민권 운동하면 1950~1960년대에 일어난 운동을 많이 떠올리는 편이다.

2. 배경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은 미국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던 노예제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노예제는 세계적으로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장되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달랐다.

목화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미국 남부 주들은 노예제를 고수하려고 했고 이로 인해 1861년 남북 전쟁이 발발하였다.

2.1. 노예 해방, 자유를 얻은 남부 흑인들 (1865 ~ 1877)

1862년 9월 22일 앤티텀 전투 며칠 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870년 미국 수정헌법 15조를 통해 흑인 남성들은 드디어 자유인의 신분과 참정권을 획득하였다.[4] 드디어 흑인들도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인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공화당 급진파의 정책들 덕분에 남부의 흑인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투표권도 행사할 수 있었다. 당시 남부 백인 우월주의 정치인들은 참정권을 제한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 최초로 미시시피 주에서 하이럼 로즈 레블즈가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조셉 레이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는 등 흑인 정치인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흑인들은 2명의 연방 상원의원과 14명의 연방 하원의원, 수백명의 주의회 의원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2.1.1. 콜팩스 학살 사건

그러나 당시 법률이 보호하던 대상은 주정부가 직접 흑인을 제도적으로 탄압하는 행위였다. 쉽게 말해 백인들이 개별적으로 흑인들을 공격하는 것은 보호 대상도 처벌 대상도 아니었다. 이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콜팩스 학살 사건(Colfax massacre)이다.

상단 문단에서 흑인들이 선거에 참여하고 투표권도 행사할 수 있었고 당선도 되었다는 시기의 투표 현장은 위의 기술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백인 집단의 흑인 투표 방해 행위는 단순히 방해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거친 것이었고 1868년 4월에서 11월 사이 기간 동안 1000명이 넘는 정치적 사망자가 발생[5]했고 대부분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흑인이었다.

이건 1873년 루이지애나주 주지사 선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선거는 부정선거와 폭력으로 얼룩졌는데 이 당시 흑인과 백인 인구는 각각 2400여명과 2200여명이었고 선거 결과를 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은 모두 스스로의 승리를 선언하고 취임식까지 하며 이중정부가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결국 법원 판결까지 가서 공화당 연방판사가 공화당 캘로그 후보의 승리를 선언했으며 민주당 지지 백인 집단은 무장을 시작했다.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베테랑을 포함한 흑인들이 주도가 된 주 민병대는 법원 주위에 참호를 파고 법원을 지키는 상황에 이르렀다. 일정 기간의 대치가 이뤄지던 상황에서 일요일인 동시에 부활절이었던 4월 13일 선거 결과에 불만을 품은 백인 민병대 500여명은 장총에 소형 대포까지 동원해서 법원을 공격했고 대포를 상대할 무기가 없었던 주 민병대는 일부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항복했던 이들이나 도망쳤던 이들도 대부분 결국 죽으면서 적어도 100여명, 많이 잡으면 150여명이 이 사건으로 죽었다. 공격측 백인 민병대의 사망자는 3명이었고 법원을 지키고 있던 주 민병대 사망자는 전원 흑인이었다. 참고로 법원을 지키던 백인들은 아무도 폭도에게 죽지 않았다.

폭도들은 공화당측 병력이 새로 도착하면서 진압됐지만 이 사건으로 처벌된 백인 민병대는 아무도 없다. 9명만이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연방대법원에 의해서 연방정부 법률로는 이 민병대들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9명에 대한 처벌마저 기각해 버렸다. 이 판결 이후 흑인들을 공격하기 위한 백인연합(white league)이 수도 없이 창설되기 시작했고 흑인들은 자신들이 정부에 의해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 당시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었던 흑인 학살의 전형이었다. 백인 민병대들은 이 사건으로 사망한 3명의 백인 동료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추모비를 세웠고 1950년대에 이 위치에는 콜팩스 폭동 진압을 기념하는 기념 팻말이 주정부에 의해서 세워졌다. 이 기념비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혔다.
Colfax Riot
On this site occurred the Colfax Riot, in which three white men and 150 negroes were slain. This event on April 13, 1873, marked the end of carpetbag misrule in the South.
콜팩스 폭동
이 위치에서 3명의 백인과 150명의 흑인이 전사한 콜팩스 폭동이 발생했다. 1873년 4월 13일에 있었던 이 사건은 남부에 있었던 카펫백[6]들의 악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참고로 이 팻말은 2021년에야 철거되었다.

2.2. 짐 크로우 법으로 고통받는 미국 흑인들 (1877 ~ 1964)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짐 크로우 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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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larksonstreetlynching.jpg
백인 군중들이 흑인 행인을 린치하고 목 매다는 모습의 일러스트

1877년, 남북 전쟁 이후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여파로 연방군이 구 미연합국의 영토에서 철수하며 재건 시대가 끝나자, 흑인들은 극심한 차별과 권리 박탈을 겪기 시작했는데 이를 짐 크로우 법이라고 한다. 흑인의 참정권이 박탈되고, 집회 및 시위 제한 등 민권이 말살되며, 흑인들의 투표를 차단하기 위한 문맹검사와 인두세 같은 제도가 도입되었다. 또한 짐 크로우법으로 시설 분리와 불평등이 '분리되나 동등하다'는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으로 정당화되었으며, 백인 우월주의 단체의 린치와 폭력이 만연했다. 이에 따라 흑인들은 북부 및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 흑인 대이동"을 겪었지만, 새로운 정착지에서도 차별과 폭력은 계속되었다.

3. 저항의 시작

20세기에 이르자 흑인 젊은이들 사이에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불만이 끓어오르고 있었는데 노예 생활을 경험한 세대들이 흑인 차별에 순응하고 살았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런 가운데 20세기의 흑인 차별은 여러 가지로 점점 무너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일차적으로 흑백 차별에 틈이 생긴 공간은 군대였다. 1,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은 많은 미군을 파병해야 했고 그를 받치기 위해 많은 물자를 유럽 전선으로 실어날라야 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과 같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아예 전시생산 체제로 변혔다. 즉 미국이 생산을 풀가동하여 고용이 폭발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었다. 전선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백인들만의 고용으론 턱도 없이 모자랐고[7] 이것 때문에 당시 징집에서 제외되어 있던 2등 시민 취급받던 흑인들과 가정을 지켜야 했던 여성들이 대거 노동시장에 투입되었으며 그들도 전시호황을 통해 돈을 만지기 시작했는데 그러고도 부족해 점점 병력까지 필요하게 되면서 그동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던 흑인 징병도 점차 확대되어 흑인 병사들도 참전하게 되었다. 흑인 최초의 장성과 수천 명의 흑인 장교들이 쏟아지고, 흑인들의 문해율도 90%까지 상승하였다.[8]

이 과정에서 법적으로 흑인 차별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과거 남북전쟁때 흑인의 입대는 법적으로 허락됐지만 흑인 부대의 활동이 적었던 것은, 그들이 군인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를 지급하길 꺼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은 달랐다. 미국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흑과 백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최전방이건 후방이건 그동안 2등 시민이었지만 미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일한 흑인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권리와 혜택을 지급해야 했다. 그러면서 군납계약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대통령령 8802호가 공표되었고, 평등고용위원회가 설치되어 노동에서의 인종차별문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미첼 vs 정부, 스미스 vs 올라이트 판결도 나왔고, 인권의 대모로 알려진 엘리너 루즈벨트가 흑인 민권의 향상을 지지하고 있었다.

또한 1930년대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정책을 펼치며, 그 혜택을 흑인들도 보게 되자, 흑인들의 지지가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향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민주당은 인종주의자들과 반인종주의자들이 같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되었다. 1930년대 이전에는 흑인들은 공화당을 지지하니, 민주당이 남부라도 건져야된다는 당리당락적인 이유로 인종차별이 유지된 측면이 강했지만, 흑인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니, 더 이상 인종차별을 통해 지지기반을 유지해야될 이유가 절실할 이유가 사라진것이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민권운동을 지지하며 중요한 두 가지 조치를 취했는데[9] 첫째는 법무부에 민권 담당 부서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군대 내에서 흑백 차별을 공식적으로 금지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들이 즉각 효과를 나타낸 건 아니었으나 이런 조치들은 후일 흑인 민권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매카시즘과 반공주의가 일면서 흑인 민권이 실추되었다고 알려졌지만, 마냥 그렇지만도 않았다. 애초에 당시 흑백문제는 공산주의와 직접적인 관련도 없었고 국제공산주의의 선전에 맞서 소련의 비판과 선전에 대응하여 '미국의 우월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기에, 흑인 민권 운동은 반공이라는 조건 하에서는 호의적이었다. 실제로 NACCP 같은 대부분의 인권 단체는 '우리는 반공'을 내세우며 민권 운동을 이어갔고 동조자들도 많았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안보 위협'으로까지 격상된 민권 운동가들은 공산주의자라는 의심 하에 FBI의 감시 하에 놓였지만 소련과는 거리를 두며 제도권 내에서 '합법적인' 개선을 꾀하는 NACCP 같은 조직들의 기세는 점차 커져갔다.

2차 대전의 전쟁영웅이기도 했던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트루먼의 조치들을 이어받았다. 흑백 차별 조치를 완화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그의 통치 기간 중 흑백 차별을 무너뜨리는 단초가 형성되었다. 한편 의회에서는 1948년 미네소타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휴버트 험프리가 민권법 제정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연방 민권법 제정이 힘을 얻게 되었다.[10]

냉전 위협이 가시화되면서, 미국이 전략적으로 끌어들여야 했던 유럽 바깥의 많은 국가들은 유색인종 국가였는데, 이들은 당연히 미국의 인종차별 때문에 미국에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더 이상 미국의 인종차별은 국내의 문제가 아닌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와 직결된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고, 이를 해결하려는 국가적인 압력이 더욱 커져갔다. 냉전이 시작되자 행정부, 특히 국무부는 흑인 인권 향상에 아주 우호적이었고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여기에 동참하였다. 시민들의 여론이야 민주주의 국가이니 여러 의견으로 갈렸지만, 적어도 옛날처럼 노예로 부려지는 게 합당하다는 주장은 남부 딕시들 빼고는 사라져갔다.

1950~60년대 특징적인 인종차별 사건이 두각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인종차별이 개선되기 시작했다는 뚜렷한 징후였다. 이전에었다면 '이의조차 제기되지 않았을 일'이 대통령과 국무부까지 나서서 개선할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당시 리틀록 사건이나 몽고메리 버스 사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몇몇 '특징적인 사건' 이 있었던 건 맞고 흑인에 대한 린치들이 있었던 건 맞지만, 이런 흑인 민권운동들은 결국 이겼고, 당시 대중의 지지도 민권운동에 우호적이었다. 당대 미국의 대중적인 흑인 인권에 대한 여론은 대충 '백인과 동급' ~ '추레한 열등인종' 사이의 어딘가, '백인과 동급이라기엔 꺼림칙하지만, 기초적인 인권 정도는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이 평균이라고 보면 된다.

파일:external/www.awesomestories.com/3414c46f16.jpg

재키 로빈슨 피 위 리즈.

스포츠 분야에서도 중요한 흐름이 나타났다. 이때까지 흑인은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에서 뛸 수 없었고 흑인만의 리그인 니그로리그에서 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적지 않은 프로 선수들이 징집되면서 당시 최고의 프로스포츠였던 야구에서도 점점 선수 부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때 브루클린 다저스의 단장인 브랜치 리키는 과감하게 흑인 선수를 메이저리그에 데뷔시켰는데 그가 바로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이었다. 리키가 로빈슨을 데뷔시킨 시점은 1947년으로 시대를 앞서간 과감한 조치였다.[11][12] 로빈슨의 활약으로 미국의 다른 야구팀들도 흑인 선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종합적으로 1940~50년대는 흑인에 대한 인권 의식 개선이 획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도적인 개선을 이루기 위한 인권 운동이 세간의 화제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진보 성향의 백인들도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이때의 인권 의식 개선이 1960~70년대 유명한 인권 운동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반대파들간의 갈등은 오히려 나아지는 과정이기에 나타난 것이다. 흑인이 백인에게 묻지마 살해를 당해도 신문에 오르지 않을 정도로 당연했던 시대에서, 흑인을 부당하게 쫓아냈다는 이유로 신문에 오르는 시대가 도래하는 과도기였던 것이다. #

3.1.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1954)

이런 가운데 하나의 소송이 미국 사회에 흑백 차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한 흑인 소녀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1951년 캔자스 주 토피카에 살던 린다 브라운이라는 소녀는 집에서 바로 가까운 섬너 초등학교를 놔두고 1마일이나 떨어진 흑인 전용 초등학교에 다녀야 했다. 린다의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은 딸을 가까운 섬너 초등학교로 전학시키려고 했지만 거부당했다. 흑인은 백인 전용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이유었다.

당시 미국은 '분리하되 평등하게'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즉,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교육에서도 이런 원칙이 고수되어 흑인과 백인은 따로 학교를 다녀야 했으며 연방대법원에서도 이를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취급이 하늘과 땅 차이였고 유색인종 전용이라고 해도 우선권은 백인에게 있는 등 말만 평등하게였지 분리하고 불평등하게나 다름없었다.

이때 올리버 브라운은 바로 앞에 있는 학교에 다닐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전미 유색인 연합(NAACP)의 도움을 받아 연방대법원에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고소하기에 이른다.

물론 올리버 브라운 이전에 흑백 분리에 문제를 제기하는 소송은 여러 번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미국 연방대법원은 1896년 분리하되 평등하게라는 개념을 못박은 플래시 대 퍼거슨 재판[13]에서 흑인과 백인이 분리됨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고 이후 미국 법정은 흑백 차별에 대한 재판마다 플래시 대 퍼거슨 재판의 판례에 기반하여 흑백 분리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청구인 측 변호인인 서굿 마셜[14]은 기존의 흑백 분리 재판과는 다른 전략을 구사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한 것이다.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되 시설과 교육 면에서 평등하게 대우하면 문제가 없다는 주류적 생각과는 달리 미국 사회과학은 이미 흑백 분리는 사회과학적으로 볼 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지 오래였다. 마셜은 이런 사회과학자들의 광범위한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흑백 분리의 무용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던 것.

결국 1954년 5월 17일 연방 대법원장 얼 워렌과 대법관들은 공립학교의 인종 차별은 위헌이며 모든 공립학교는 흑백 분리 교육을 시정하고 통합하라는 판결을 만장일치로 내렸다. 특히 워런 대법관은 마셜이 제출한 광범위한 사회과학 연구를 수용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제11번 각주"에 인용된 내용이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의 판결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일부 주들은 흑인 밀집 지역의 흑인 학생들을 백인 전용 학교로 실어나르면서 판결을 수용했으나 남부 주들은 이 판결을 씹어 버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조차도 수백년 동안의 관습을 하루아침에 바꾸긴 힘들다면서 대법원 판결 시행을 거부하는 주 정부들에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15] 1950년대 후반까지도 흑인 어린이 중 단 1%만이 흑백 통합 학교에 다녔을 정도로 이 판결에 대한 저항은 엄청났다. 또 판결이 공립학교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사립학교들은 적용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은 미국 사회에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공립학교에서 흑백 분리가 위헌이라면 다른 부분에서도 흑백 분리는 위헌이 아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한 것이다. 결국 이는 이어질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과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 사태에서 중대한 작용을 했다.

3.2. 에밋 틸 살해 사건 (1955)

시카고 출신 흑인 소년이었던 에밋 틸(1941~1955)이 미시시피 주의 삼촌 집으로 놀러갔다가 백인들에게 납치되어 끔찍한 고문, 구타를 당한 끝에 살해된 사건이다.

당시 14세였던 틸은 시카고에서 자랐기 때문에 남부의 흑인 차별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방문을 만류하던 어머니를 뿌리치고 미시시피 주 머니(Money) 시에 사는 어머니의 삼촌[16] 댁으로 놀러 갔다. 그는 물건을 사려고 소매점에 들어가 풍선껌을 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백인 상점 주인인 로이 브라이언트의 아내인 캐롤린 브라이언트에게 휘파람을 불고 추근거리며 손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흑인이 백인 여자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건 남부에선 크게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나흘 뒤 로이와 이복동생 마일럼은 머니 옆동네인 드류로 틸을 납치하여 죽을 때까지 구타하고 눈을 한 개 도려낸 뒤 머리에 총을 쏘아 살해하고 강에 그의 시체를 유기했다. 그의 시신은 3일 뒤에 발견되었는데 심하게 손상된 것은 물론 3일 동안 물에 있어서 심하게 부풀어 버린지라 신원을 아예 인식할 수 없었고 그의 어머니가 틸에게 끼워 준 반지로 겨우 신원을 알 수 있었다.

틸의 죽음은 당시 차별로 불만이 높아지던 흑인 사회에 결정적인 저항의 방아쇠를 당기게 하였다. 틸의 어머니는 틸이 끔찍한 고문을 당한 얼굴을 그대로 공개해서 장례식에서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는데 적어도 10만명의 흑인들이 이 장례식에 참가했다.

체포된 범인 로이와 마일럼은 재판을 받았으나 백인 배심원들은 2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나중에 로이와 밀란은 무죄가 확정됨에 따라 보상금까지 받았으며 무용담처럼 틸을 죽인 것에 대해 잡지사와 인터뷰하기도 했다. 당시 미시시피 주의 연방상원의원이었던 존 C. 스테니스 민주당 의원은 틸의 아버지 루이스 틸의 강간살인 범죄 기록을 공개하기도 했다.[17]

틸의 어머니인 메이미 틸(1921~2003)은 이후 흑인 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했으며 북부의 도시계층 흑인들이 남부의 흑인 차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계기가 됐다.

2004년 미국 법무부는 이 사건을 다시 수사하기 시작했고 2005년 PBS를 통해 다큐멘터리 < The Untold Story of Emmett Louis Till>이 방영된 후 FBI의 주도 하에 유해를 발굴해서 사인과 DNA 검사를 실시하여 신원을 확인하였으며 이를 통해 공범 여부도 주목되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새로운 수사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았고 틸의 시신은 새로운 관에 다시 묻었다. 틸의 옛 관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우드론에 있는 에멧 틸의 생가는 2021년 시카고 시의회로부터 공식 명소로 지정되었다.

2017년 티모시 타이슨 작가가 쓴 <The Blood of Emmett Till>이 나오면서 또 한 번 파장이 일었는데 에밋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캐롤린이 거짓 증언을 했다고 8년 전에 고백한 내용이 실렸다는 점이다. 이듬해에 미 법무부가 재수사했으나 작가 측이 제출한 인터뷰 녹음 테이프에는 캐롤린의 진술 번복 내용이 없고 캐롤린 측도 검찰 조사 당시 진술을 조작하지 않았다고 이를 부인했다. 결국 2021년 12월 법무부 측이 책 내용만으론 캐롤린에게 위증죄를 물을 수 없다며 수사를 종결시키면서 영구 미제사건이 되었다. #( 한국일보 기사)

이 사건은 2022년 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었고 2023년 3월 한국에 개봉되었다.

2023년 7월 에밋 틸을 기리기 위해 그의 죽음과 관련된 주요 장소를 국가기념물로 지정했다. #

3.3. 로자 파크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19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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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로자 파크스라는 사람이 몽고메리 버스에서 체포당한 사건을 계기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흑인 사회가 품고 있던 불만을 한번에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이에 KKK단이 흑인들을 테러하는 등 점점 미국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 이 시기 활동한 인물들이 바로 마틴 루터 킹 맬컴 엑스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 몽고메리시에 살던 여성 로자 파크스는 직장인 몽고메리 페어 백화점에서 일을 마친 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앨라배마주는 흑백 분리가 일상화된 지역이었다. 버스에서도 백인 전용 좌석과 흑인 전용 좌석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관례적으로 앞 네 줄은 백인 전용이라는 것이 당시 통용되던 원칙이었다. 버스가 다 차지 않으면 흑인은 버스 중간 좌석에 타도 무방했으나 백인이 요구하면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로자가 탄 버스에 백인들이 많이 타면서 버스기사는 유색인 전용 표시를 로자가 탄 좌석 뒤편으로 밀어 버린 후 로자를 비롯한 네 명의 흑인 승객들에게 뒤편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세 명의 흑인 승객은 뒤로 이동했지만 로자는 이를 거부했다. 버스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로자는 흑백 분리에 관한 몽고메리시 조례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18]

경찰 조사에서 로자가 앉아 있던 곳이 원래 유색인 전용 좌석이란 점이 감안되어 그녀는 저녁에 풀려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 사건으로 인해 행동할 것을 결심했다. 로자의 친구인 E.D 닉슨은 앨라배마 주립대학 교수인 조안 로빈슨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문의한 후 보이콧 운동을 실행에 옮겼다. 3만 5천여 장의 버스 보이콧 유인물을 만든 후 이를 몽고메리 전역에 살포했다.

12월 4일에 이르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교회들에게 알려졌고 몽고메리의 흑인 교회들은 잇달아 버스 보이콧 운동에 동참할 것을 선언했다. 이들의 요구조건은

1. 버스에서 흑인이 평등하게 존중받을 것
2. 흑인 운전기사를 고용할 것
3. 먼저 탄 순서대로 버스 중간 좌석에 앉을 수 있게 할 것

이었다. 흑인 교회들은 다음날인 12월 5일 하루 동안 버스 탑승을 거부하기로 결의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흑인들은 버스를 타지 않고 직장까지 걸어다녔으며 버스는 대부분의 좌석이 텅텅 빈 채로 운행했다. 하루 투쟁 후 향후 투쟁 방안이 논의되었고 "몽고메리 진보협회"가 결성되었다. 회장에는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의 목사가 뽑혔는데 그가 바로 흑인민권운동의 상징적 인물 마틴 루터 킹이었다.

이후 흑인들은 대대적으로 버스 보이콧을 전개해 나갔다. 일련의 사태에 앨라배마주는 로자 파크스를 불법적으로 보이콧을 행하고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기소했고 법정은 그녀에게 10달러의 벌금과 4달러의 법정 비용을 물도록 판결했다. 당시 흑인들의 경제력으로 14달러라는 벌금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었고 로자에 대한 판결은 흑인들을 더욱 분노하게 하여 버스 보이콧의 움직임을 더욱 활발하게 했다. 5만에 달하는 흑인들이 버스 보이콧에 동참했다.
짐승 같은 압제의 발길에 걷어차이고 사는 건 지긋지긋하다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할 때가 왔다. - 마틴 루터 킹.
앨라배마 주는 이런 사태에 당황했고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하던 인사들을 체포하고 참가자들을 탄압하면서 강경하게 나섰다. 로자 파크스와 그녀의 남편은 보이콧 운동을 주도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참가자들도 해고되거나 해고 위협을 받았다. 심지어 일부 자가용을 소유해 카풀로 이 운동에 참여하던 흑인들에게 앨라배마 주정부는 자가용 면허를 말소하거나 자동차 보험을 취소하는 등의 조치로 온갖 불이익을 주기도 했고 운동을 주도하던 킹 목사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흑인들은 보이콧 운동을 이어나갔고 전 미국에 버스 보이콧 운동이 TV 전파를 타기에 이르렀다. 몽고메리의 버스 회사들은 무려 65%에 달하는 손실을 입기에 이르렀다. 자가용을 가진 경제력이 있는 백인과는 달리 흑인들은 대부분 버스를 이용했는데 몽고메리 버스 승객 중 75%가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과 마찬가지로 NAACP와 흑인 민권운동가들은 연방대법원에 버스에서의 흑백분리에 대한 위헌심판을 청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1956년 연방대법원은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엄청난 손실을 입은 몽고메리 버스회사들의 아우성에 결국 앨라배마주는 백기를 들기에 이르렀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 민권 운동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었고 이후 흑인 민권 운동은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3.4. 리틀록 센트럴 하이스쿨과 리틀록 9인의 저항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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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제101공중강습사단 병사들의 호위하에 등교하는 흑인 학생들.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1957년 9월 아칸소 리틀록 교육위원회는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흑백 통합 교육이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1954년에 있었던 미국 대법원 판결 347 U.S 483( Brown vs Board of Education of Topeka)에 의한 것으로,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1896년 자신들이 Plessy vs Ferguson (163 U.S 537)에서 내렸던 결정을 뒤집어 학교에서의 흑백분리가 미 수정헌법 제 14조에 위반되며 학교에서의 흑백분리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판결한다.

하지만 이 판결은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았고 대법원이 방안을 제시하기에는 시간이 꽤 걸렸으나 남부의 주민들은 이 판결을 결코 환영하지 않았고 결국 리틀록에서 사건이 터졌다. 사건은 불만을 품은 한 백인 주민이 지방 법원에 명령 정지 신청을 내면서 시작되었다. 그해 9월 3일부터 흑백 통합 교육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법적인 근거가 되었지만 아칸소 주지사 오벌 포버스는 9월 2일 주 방위군에 명령을 내려 학교를 포위, 흑인들의 등교를 강제로 막았다.

주지사는 이게 시민들의 폭력적인 대응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둘러댔으나 사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결국 교육위원회는 연방 법원에 도움을 청했고 법원은 계획대로 추진하라고 명령했으나 주 방위군은 그 명령을 무시했다. 9월 10일에는 법무장관 등이 포버스 주지사에 대한 직무정지 명령을 연방 법원에 신청하는 단계까지 가고 만다. 9월 20일의 법원 명령으로 간신히 주 방위군은 철수했지만 9월 23일 학교 문을 다시 열자 이번에는 백인 군중들이 흑인 학생들을 막고 강제로 집으로 끌고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부터 백악관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그날 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리틀록에 "어느 누구도 정의를 방해하지 말라."라는 포고문을 발표했고 이튿날 아침 리틀록 시장과의 협의에 따라 아이젠하워는 아칸소 주 방위군을 강제로 연방군에 편입시켜 주지사의 손에서 군 통수권을 빼앗음과 동시에 연방군 최정예 부대인 제101공수사단을 리틀록에 투입시켰다. 연방 법원의 명령은 회복되었고 흑인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지만, 흑인에 대한 분노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아 몸싸움이 벌어져 일부 시위 참여자가 군인들에게 연행되는 사건도 있었다. 1958년 6월 한 학년이 끝날 때까지 연방군은 근처에서 흑인 학생들의 보호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에서 공립학교의 흑백차별의 위헌 판결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고 여전히 대다수의 흑인 학생들은 흑인 전용 학교에 다녀야 했으며 초등학교 입학마저 흑인 어린이들은 흑인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이렇게 되자 전미 유색인 연합(NAACP)은 대담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는데 백인 전용 학교에 흑인 학생들을 입학시켜 흑백 차별의 공고한 벽을 깨부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NAACP는 이 계획을 실행할 곳으로 아칸소주의 리틀록에 있는 센트럴 하이스쿨을 선택했으며 9명의 흑인 학생들을 센트럴 하이스쿨에 지원하도록 도왔다. 이들은 어니스트 그린(Ernest Green, 1941년~), 엘리자베스 엑퍼드(Elizabeth Eckford, 1941년~), 제퍼슨 토머스(Jefferson Thomas, 1942년-2010년), 테런스 로버츠(Terrence Roberts, 1941년~), 칼로타 월스 라니어(Carlotta Walls LaNier, 1942년~), 미니진 브라운(Minnijean Brown, 1941년~), 글로리아 레이 칼마크(Gloria Ray Karlmark, 1942년~), 텔마 머더셰드(Thelma Mothershed, 1940년~), 멜바 빌스(Melba Beals, 1941년~)로 이들을 가리켜 리틀록 9인이라고 부른다.[19]

리틀록 교육위원회는 흑백 통합 교육 시행을 선언했고 1957년 9월 2일부터 이를 시행하기로 했다. 리틀록 9인에 대한 입학도 허가되어 이들은 학교에 등교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등교는 백인들의 거센 저항을 불렀다. 리틀록의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백인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에 흑인들이 들어오는 걸 용납할 수 없다면서 리틀록 9인이 등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칸소 주지사인 민주당 소속 오벌 포버스도[20] 흑백 통합 교육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주 방위군을 동원해 리틀록 9인의 등교를 차단했다. 이렇게 되자 NAACP는 연방항소법원에 아칸소주를 고소했고 연방항소법원은 "흑백 통합 교육 시행을 막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오벌 포버스는 판결의 시행을 거부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결국 9월 14일 아이젠하워와 포버스는 사태 해결을 위한 회담을 열어 논의를 거듭했으나 합의에 이르는 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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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21] 폭도들에게 고립된 엘리자베스 엑퍼드.[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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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지사 포버스씨, 우리의 기독교 미국을 지켜 주세요.>, < 인종 혼합은 공산주의다!>

9월 23일에 백인 폭도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리틀록 9인에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 FBI를 통해 위급상황을 보고받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결국 결단을 내혔다. 리틀록 시민들에게 리틀록 9인에 대한 위해 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한 후 연방군을 투입해 학교를 차단하고 있던 아칸소 주방위군을 연방군 지휘하에 두도록 했다. 이에 따라 미 연방육군 101공수사단이 리틀록으로 출동해 아칸소 주방위군을 통제한 후 리틀록 9인을 보호해 학교에 등교하도록 했다.

비록 아이젠하워는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결과를 따르지 않는 주들에게 압력을 넣지 않았으나 리틀록에서 보여준 그의 결단은 흑백 통합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리틀록 9인은 제101공수사단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학교를 다녔고 학교 운동장에 주둔하여 이들을 보호했다. 이런 호위는 반 년 간 지속되었다. 이후에는 리틀록 9인들만 등교했지만 근방에 101공수사단이 주둔해 언제든지 위급 상황이 오면 출동하도록 대기했다.

리틀록 9인들은 백인 학생들의 온갖 멸시와 차별을 당했다. 살해 협박은 우스운 수준이고, 백인 성인들이 위해를 가하려다가 군인들에게 진압당한 뒤 연행되는 사건도 있었고, 다이너마이트 막대에 불을 붙여 던진 후 학생들을 살해하려던 시도도 폭도들에 의해 꾸준히 일어났다. 학교 밖에서도 이런데 학교 안에서 다른 백인 학생들의 대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무자비한 핍박을 견뎌내며 리틀록 9인은 학교에 다녔고 마침내 1년 간의 노력 끝에 리틀록 9인 중 한 명인 어니스트 그린이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 최초의 흑인 졸업생이 되었다. 하지만 어니스트 그린이 졸업한 후 오벌 포버스는 센트럴 고등학교의 문을 닫으면서까지 남은 흑인 학생들의 졸업을 막았다. 결국 1960년에 다시 문을 연 후 졸업한 칼로타와 제퍼슨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다른 학교에서 졸업해야만 했다. 참고 도서로 리틀록 9인의 한명인 멜바 빌스가 쓴 "전사는 울지 않는다"를 읽어 보길 추천한다.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다.

3.5. 위험한 저항, 싯인 운동 (195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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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보로의 백인 전용 식당 울워스에서 벌어진 싯인 운동

흑백 차별과 인종 분리에 대한 저항은 백인 전용 식당에서도 일어났다. 소위 싯인(Sit in) 운동이 일어난 것. 본래 싯인이라는 말 자체는 어떤 장소에서 하는 연좌농성을 일컫는 말이다.

싯인 운동의 핵심은 흑인이 백인 전용 식당에 들어가 앉아서 주문하는 것이었다.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문제는 이들이 앉아 있는 곳이 백인 전용 식당이란 점이었다. 식당 주인이나 점원은 흑인에게 음식을 내 오길 거부했고 흑인 운동가들은 음식이 나올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운동이기도 했다. 당장 흑인이 백인 전용 식당에 들어가면 백인의 공격을 받을 수 있었고 설령 앉았다고 해도 역시 공격받기 일쑤였다. 자리에 앉은 흑인에게 백인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거나 구타했으며 흑인을 질질 끌고 식당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23] 그러나 흑인 운동가들과 청년들은 무지막지한 폭력과 공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운동을 이어나갔다.

최초의 싯인 운동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월 20일 메릴랜드 볼티모어에 있는 리즈 약국(Read's Drug Store)에서 인종분리에 저항하기 위해 모건 주립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코어라는 단체가 리즈 약국에 들어가 싯인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 이들은 30분 정도 리즈 약국에 머물며 평화적으로 시위했다. 경찰은 이들을 체포하지 않았고 이틀 후 결국 리즈 약국은 인종차별 조치를 철폐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리즈 약국 싯인은 성공했다.

2년 뒤인 1957년 6월 23일 노스캐롤라이나 더럼에서 싯인 운동이 일어났다. 로열 아이스크림이라는 가게에서 벌어진 운동은 흑인 목사 더글러스 E.무어[24]가 이끄는 시위대가 로열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무어 목사를 포함한 7명의 시위대는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고 가게주인은 7명에게 백인 전용 좌석이니 일어나 달라고 요구했으나 무어 목사와 시위대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가게주인은 경찰에 신고했고 7명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의 기소로 이들은 재판을 받았고 불법침입 혐의로 10달러의 벌금을 판결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와 시위대는 더럼 카운티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7월 16일 고등법원은 불과 30분도 안 되는 심의를 거쳐서 오히려 1심보다 더 무거운 25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후 무어 목사는 더럼에서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싯인 운동에 대한 최초의 공권력의 법적 처벌이 이뤄진 사건이기도 했다.[25]

더럼 로열 아이스크림 싯인 운동은 흑인 민권 운동의 노선을 두고 논란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때만 해도 NAACP(전미 유색인 연합)은 법적 투쟁을 통한 흑인 민권 신장이란 투쟁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고 이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싯인 운동은 온건한 법정 투쟁 노선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흑인 사회 내부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그래도 싯인 운동은 기본적으로 비폭력 노선을 견지하였다.

이후 1958년 캔자스주 위치타에서 싯인 운동이 벌어졌다. 위치타의 NAACP 청년위원회 회장이었던 론 월터스는 자신의 사촌인 캐럴 팍스 한과 함께 백인 전용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주문했다. 점원이 백인 전용 식당이므로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하자 그들은 하루 내내 식당에 앉아 있었고 백인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3.6. 루비 브리지스 등교 투쟁 (1960)

루비 브리지스라는 흑인 여자 아이가 백인 학교에 등교하려고 하자 흑백분리를 깨지 말라며 백인 부모들이 대규모로 시위하였다. 관련 기사

그러나 루비의 부모는 이런 격렬한 저항을 헤치고 루비를 등교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 사건은 리틀록 사건 이후에도 각종 차별과 편법으로 흑인 등교를 막던 미국 학교의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점점 학교 역시 흑백통합이 되고 인종분리가 철폐되기 시작했다. 관련 기사2

3.7. 프리덤 라이더 (1961)

민권 운동가와 대학생들이 흑백 분리에 반대해 이것을 없애기 위해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이 함께 장거리 버스를 타고 미국 남부 지역을 순회하는 프리덤 라이더(자유의 기수들)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은 여러 곳에서 폭행당하고 KKK단 무리들이 던진 화염병에 버스가 불탔으며 심지어 이들을 지켜 줘야 할 경찰도 수수방관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권 운동가들은 끊임없이 활동했다.

3.8. 워싱턴 행진 (1963)

..자유의 종이 울리게 될 때, 이 자유의 종 소리가 모든 마을, 모든 촌락, 모든 주, 모든 도시에서 울리게 될 때 우리는 신의 자손으로서 흑인이건 백인이건, 유대인이건 아니건, 개신교이건 가톨릭이던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를 함께 부르는 날을 향해 나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자유 얻었네! 나 자유 얻었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유 얻었네!
워싱턴 행진에서 마틴 루터 킹은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했다. 이후 그의 연설 녹취본과 대본은 미국 의회도서관에 영구보존되어 있다.

1963년에 일어난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과 '버밍햄 운동(Birmingham Movement)'을 기점으로 1964년 마침내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민권법(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에 서명하면서 흑인들은 드디어 법적으로 완전한 평등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 법은 의회를 통과하면서 효력이 많이 약해져서 법의 통과 이후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결국 1965년에 앨라배마[26] 셀마 시에서 흑인들의 투표등록과 통합에 반대해 백인들이 평화 시위를 하고있던 흑인들을 공격해 흑인 한 명이 사망하는 큰 사건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후에도 존슨 대통령의 새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8)과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 제정으로 1964년의 법을 보완하면서 흑인들은 법적인 권리를 완전하게 되찾았다.

1963년 흑인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던 A.필립 랜돌프는 전 운동 세력을 광범위한 전선에 결집시킬 수 있는 강력한 행동으로 워싱턴 행진을 제안했다. 그러자 흑인의 능력과 자제심, 규율성을 믿고 집회를 추진하자는 쪽과 그런 엄청난 집회를 하기에는 흑인의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쪽으로 갈렸는데 찬성파의 열기가 더 강해 워싱턴 행진 강행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8월 28일 마침내 워싱턴에서 총 집결한 흑인과 이 운동에 동조하는 백인들이 에이브러햄 링컨 동상에 도착해 모였고 그 수는 무려 25만 명이나 되었다.

킹은 27일 밤 10시에 워싱턴에 도착했고 28일 연단에 서서 연설하게 될 때 본래 이 날을 위해 따로 준비한 원고가 있었지만 수많은 인파를 보자 마음이 바뀌어 평소 그가 즐겨 하던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 유명한 '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이다. 이 워싱턴 행진을 통해 진지한 활동을 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전국의 미국인들이 보게 되었으며 흑인들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전 세계에 방송되기도 하였다.

이 워싱턴 행진에서는 놀랍게도 백인 교회도 참가했으며 미국노동총연맹과 산업별회의 전국협의회는 행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대신 중립을 선언했고 대신 수많은 국제 노조들이 지지성명을 보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수천 개의 지역노동조합이 행진에 참여했다.

이때 흑인들의 집회를 반대하던 지역에서는 공공연히 보복적 폭력 행위의 조짐을 보였다.

3.9. 미시시피 자유여름 (1964)

1964년 미합중국 의회는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권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교육, 주택, 접객업소, 직장 등에서 흑인 차별을 금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방기구까지 만들어졌지만 아직까지도 투표권은 행사되지 못하고 있었다. 민권 운동가들은 투표권에 주목했고 1964년 6월 미시시피 자유여름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에는 무려 천여 명의 백인 대학생들이 흑인의 유권자 등록을 돕기 위해 미시시피로 내려왔다. 치과의사이자 민권 운동가인 로버트 헤일링(Robert Hayling)은 플로리다에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초대하였고 헤일링은 대학생들에게 방학기간동안 해변에 갈것이 아닌 시위에 참여할것을 요청했다.

3.9.1. 미시시피 버닝, 희생된 민권운동가 3인

그러다가 선발대로 내려간 민권 운동가 3명[27]이 6월 22일 미시시피 네쇼바 카운티에서 실종되었는데 실종된 지 44일 만에 그들은 댐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에는 구타와 총상이 남아 있었다. 이 죽음을 계기로 미시시피 자유여름 운동은 더욱 거세어졌다. 그러나 KKK단과 백인 시민 협의회(Citizens' Councils)는 이런 움직임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자유여름 운동가들을 방화, 구타, 퇴거, 해고, 살인, 감시 및 기타 형태의 협박 및 괴롭힘을 통해 방해하였는데 그 결과로 미시시피 자유여름 운동이 진행되는 2달 동안 흑인 6명이 살해되었고 천 명이 체포되었으며, 80여명이 구타당했다. 30채의 집이 폭탄 공격을 당했으며 30여 채의 흑인 교회가 불길에 휩싸였다, 미시시피 자유여름에 관한 도서로는 "프리덤 서머, 1964"가 있다.

3.10. 몬슨 호텔 사건 (1964)

파일:monson motor lodge incident.jpg

인종차별 반대 시위자들이 들어간 풀장에 염산을 붓는 호텔 주인 제임스 브록.

플로리다 주 세인트 오거스틴에 위치한 몬슨 호텔의 풀장은 백인 고객들만 사용이 가능했는데 1964년 6월 18일 인종차별 반대 시위자들은 인종 분리 법규를 어기고 이 풀장에 들어가 시위를 벌였다. 그걸 본 호텔 주인 제임스 브록(James Brock)은 시위자들이 들어간 풀장에 염산 한 통을 전부 부어 버렸다. 당시 시위자 중에 풀장 크기에 비해 적은 양임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중단되지는 않았다. 몬슨 호텔은 2003년 철거되어 사라졌다. 제임스 브록은 1999년에 인터뷰로 이때의 일을 두고 정당한 짓이라며 '흑인들이 무단으로 들어와 수영장에 들어가서 경고해도 나가지 않아 한 것이라며 난 정당했다'고 죽을 때까지 일절 후회하지 않았다.

3.11. 셀마 행진(1965)

현지 시간 1965년 3월 7일 미국 앨라배마 주 셀마 시에서 600여 명의 시위대가 흑인 투표권을 요구하며 몽고메리 시까지 행진하기 위해 80번 고속도로를 걷고 있었다. 셀마 시는 남북전쟁 당시 노예 해방에 반대했던 남군이 마지막까지 북군과 맞서 싸운 도시로, 역사적으로 흑인 차별이 심했다. 이 때문에 도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던 흑인은 헌법에 보장된 투표 권리도 가질 수 없었다.

흑인들의 시위 행진은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에드먼드 페터스 브리지를 건널 때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고 폭행하여 부상자가 잇따라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셀마 시로 내려갔고 이틀 뒤인 9일 킹 목사가 주도하는 2차 시위가 열렸는데 시위 참석자 한 명이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로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시위대의 대의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백인과 유색인을 가리지 않고 참여하여 시위대는 점점 불어나갔다. 같은 달 21일에 예정된 3차 행진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에 의한 폭력 사태가 우려되자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이 연방 군인 2000명을 파견해 시위대를 보호했다.

킹 목사가 이끄는 2만 5000여 명의 시위대는 나흘 후 몽고메리 시에 마침내 도착할 수 있었다.

3.12. 미국의 약속, 마침내 쟁취한 투표권 (1965)

마침내 1965년 8월 6일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흑인 투표권 법에 서명했다. 출처 1619년 버지니아주의 제임스타운에서 흑인 노예 20명이 거래된 후 시작된 미국의 흑인 노예 역사상 무려 346년만에 미국 흑인들도 참정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 연방 투표권법이 통과되는 법 서명식에 마틴 루터 킹 박사도 참석하였다. 이 법안은 주와 지방 정부로부터 선거 자격을 한정하거나, 투표에 필요한 요건, 표준, 관행, 또는 절차를 요구하는 것을 금지한 법안으로, 인종이나 얼굴색 때문에 미국 시민의 권리로 선거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정하거나 줄이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또 그 법의 중요한 집행 수단으로 역사적으로 흑인 참정권을 방해했던 주들이나 군들이 선거법이나 정책을 변경하려고 할 경우 연방 법무부나 연방법원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두었다. 더불어 수정헌법 24조를 제정해 인두세 등의 조세 납부 여부를 통한 투표권 제한 역시 불가능하게 했다. 사실상 주 선거법과 정책으로 흑인의 정치 참가를 찍어누르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무기를 무력화시킨 셈이다.

이는 3년 뒤(1968년) 민권법 개정안의 통과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4. 의의 & 영향

흑인 민권 운동은 이후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완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특히 흑백분리를 명시한 짐 크로우 법의 폐지와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의 성립으로 '합법적'인 탄압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흑인 사회에 가해진 억압 등에 대항하는 운동이 이루어졌고 그 중 하나로 미국 경찰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과잉 진압에 반대하는 Black Lives Matter 운동도 일어났다. 이러한 경찰 폭력과 인종차별이 원인이 되어 LA 폭동(1992)과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한 소요(2020)가 일어나는 등 이러한 갈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1960년대 미국인의 전반적 분위기는 흑인 민권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갤럽 조사에 따르면 당시 여론은 대부분 민권법이나 흑인 인권 향상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분위기가 반대보다 좀 더 강했지만 흑인들의 시위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이였다. # 즉, 당시 흑인 민권 운동이 자유와 평등을 위한 보편적 가치로의 투쟁으로 보편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5. 창작물

5.1. 오페라

5.2. 다큐멘터리

EBS 다큐멘터리 강대국의 비밀 5편 미국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흑인 민권 운동을 통해 본 미국의 인종에 대한 관용 정신이 현재의 미국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

5.3. 영화

5.4. 드라마

5.5. 게임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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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표현은 유색 인종이 원래 출신 대륙인 아프리카, 아시아 혹은 중남미로 돌아가라는 뜻으로도 많이 쓰인다. 보통 Go back to~ (Asia/Africa/Mexico...) 등 대륙/국가명을 붙여서 사용하는데 2019년 7월 도널드 트럼프가 트위터에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를 비롯한 4명의 민주당 초선 의원을 두고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인종차별 논란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여담으로 비정상회담에 나온 조승연 작가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Go back to Mexico(멕시코로 꺼져라)"라고 쓴 팻말을 들고 시위하던 중 나바호들이 나타나 "You guys go home(니들이나 꺼져라)"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온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2] 1868~1963(향년 95세). 미국의 사회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인권 운동가.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흑인이며 애틀란타 대학교의 교수로서 학계에 몸담으며 4천권이 넘는 저서에 참여할 정도로 열성적인 연구를 했다. 그는 그의 저서 《흑인의 영혼》 , 《The Negro》 (미국 시민들에게 흑인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지은 저서. 흑인과 아프리카 이해의 출발점을 제공하는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등에서 미국의 인종 문제의 역사적 배경과 이유를 분석했으며 미국 흑인들의 완전한 시민권과 흑인들의 문화적, 학문적 권리 향상을 요구했고 범아프리카주의를 제창한 지식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의 유서 깊은 인권 단체인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를 공동 창립했으며 인종 평등에 목소리를 냈으나 노년에는 인종차별적인 미국 사회에 대한 환멸과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가해지던 핍박 때문에 가나의 시민권을 취득하여 수도 아크라에서 사망했다. [3] NAACP(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의 현장 비서로 미시시피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권 운동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육군으로 유럽 전선에 복무하였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전한 이력이 있다. 1963년 백인 우월주의자의 총에 암살된 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매장되었다. [4] 물론 이 노예 해방 선언 전에도 미국 흑인의 약 5~7%는 자유민이었다. 이들은 주로 북부 주에 거주하였다. 남부 주들에 거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5]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역시 루이지애나에서 벌어졌던 오펠루사스 학살로, 이 사건으로만 약 2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6] 카펫벡, 정확하게는 카펫배거(Carpetbagger)는 소위 재건 시기에 남부로 이주한 북부인들을 의미했다. 카펫천으로 만든 여행가방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흑인들에게 동정적이었던 남부 일부 백인들 및 해방된 흑인들과 협력해서 남부에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7] 전시였기 때문에 외국인 근로자를 투입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8] 2차대전 당시에는 인종을 가리지 않고 군대에서 글을 배운 병사들이 많았다. 원인은 대공황으로 인해 유년기 교육체계가 붕괴되어 제대로 못 배운 사람들이 속출했기 때문. [9] 트루먼 대통령은 딕시크랫 출신임에도 인종문제와 국내 정치에서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 루즈벨트가 4선 때 부통령으로 픽업한 인물이다. 딕시크랫 출신이 민권법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민권법에 대한 시대적 흐름을 엿볼 수 있다. [10] 후일 휴버트 험프리는 미국의 부통령직에 올랐는데 그의 부통령 재임 기간 도중에 연방 민권법이 결실을 맺었다. [11] 이때 피 위 리즈의 저 유명한 로빈슨 어깨동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피 위 리즈가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 [12] 야구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야구보다 2년 빠른 1945년 NFL 로스앤젤레스 램스에서도 최초의 흑인 선수인 우디 스트로드와 케빈 워싱턴을 받아들였다. NBA는 1950년 얼 로이드, 척 쿠퍼, 너새니얼 클립턴 3명의 흑인 선수가 최초로 입단했다. [13] 8분의 7 백인 혈통, 8분의 1 흑인 혈통이었던 흑백혼혈 호머 플래시가 백인 전용 객실에 타고 있다가 차장에게 적발되어 흑인 전용 객실로 쫓겨난 일이 있었다. 플래시는 이에 격분해 루이지애나주 법원에 이를 고소했으나 패소하자 다시 연방대법원에 자신에게 패소 판결을 내린 루이지애나주 법관 존 하워드 퍼거슨을 고소했다. 그래서 플래시 대 퍼거슨 재판이라 부른다. [14] 훗날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관이 된다. 린든 B. 존슨 대통령과도 절친한 관계였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일화도 여러모로 흥미롭다. 자세한 건 린든 B. 존슨 항목 참조. [15] 다만 이런 아이젠하워의 행동이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아이젠하워와 워렌 간의 관계에서 나왔다는 설이 꽤 유력하다. 실제로 아이젠하워는 얼 워렌의 대법원장 임명을 두고 '자기 인생 가장 큰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16] 삼촌의 이름은 모세 라이트. [17] 루이스 틸은 군인으로 2차대전 참전 중에 이탈리아에서 강간살인 범죄자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군법으로 교수형을 당했다. 즉 스테니스는 실제 성범죄 전과가 있던 아버지를 언급함으로서 누명을 쓰고 죽은 에밋 틸을 두 번 죽인 셈이었다. [18] 이런 사례는 로자만 겪은 건 아니다. 흑인 최초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도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단 이유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19] 대법원 소송. 이에 지역 백인 사회는 격렬한 반발을 하며 온갖 협박을 했다. 원래 11인의 흑인 학생들이 참여했으나 결국 2인은 중도 포기했다. 등교 후 결국 이들은 졸업장을 받았는데 이때도 백인들의 살해 협박이 이어져 오죽하면 교장이 이들에게 안전을 위해 졸업식에 오지 말 것을 부탁했다. [20] 물론 민주당에 남아 있던 남부 보수파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21] 이때 엑퍼드네 집에 전화기가 없어 함께 등교한다는 사실을 전달받지 못하고 혼자 등교했다. [22] 엑퍼드와 뒤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는 백인 여성의 이름은 헤이즐 매서리 (Hazel Massery). 훗날 1990년대에 인종차별 관련 강의가 있었던 대학에서 같이 만나 서로 화해했다. 이미 언론을 탄 후 북부 주에서는 엄청난 항의 메일을 보냈는데 이후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지"라고 생각하다가 가정을 꾸린 후 진심으로 반성했다고 한다. 다른 가해자인 남성은 1997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직접 사과했다. [23] 그나마 기자가 취재를 나왔을 때는 카메라 앞이라서 그런지 폭력사태는 없었지만 여봐란 듯이 머리에 맥주나 설탕을 부어 버리기도 했다. [24] 마틴 루터 킹 목사와는 보스턴 신학대 동기였다. [25] 다만 로열 아이스크림을 타깃으로 선택한 걸 두고 흑인 사회 내부에서 논란이 일었다. 로열 아이스크림의 주인은 남부 주류인 영국계가 아니라 그리스 이민자 출신(미국에 이민 온 그리스인들이 많이 한 직업이 바로 요식업이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미국에 남아 있는 편) 백인이었는데 같은 백인 중에서도 영국계나 독일계가 아니면 미묘하게 차별받았고 온건 운동가들은 이들이 자신들과 대립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차별받는 입장에서 같이 협력하여 차별에 맞서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6] 전쟁 영화 크림슨 타이드에서 흑인 부함장과 백인 함장의 대립에 인종대결적 요소를 넣기 위해서 일부러 핵잠수함 이름으로 앨라배마를 선택할 정도로 인종 문제에 있어서는 유명한 곳. [27] 실종된 사람들은 백인이었던 마이클 슈워너, 앤드류 굿맨, 미시시피의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제임스 첸이었다. [28] 사회 모든 분야에서 완전한 평등과 차별 철폐 조치를 강제하는 말 그대로 혁명적인 민권법. 단순히 차별을 철폐하는 걸 넘어 소수자들에게 적극적 우대조치를 시행하도록 강제하고 정부에서 제시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경우 강력한 법적 처벌을 받도록 만드는 등 처벌 조항까지 꼼꼼하게 만들어둔 법안이다. 지나치게 급진적인 나머지 나치인 프랜시스 파커 요키가 반사이익을 누릴 정도다. 대표적으로 미국 공산당 대선 후보인 거스 홀이 당선된 경우 통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