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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어드 러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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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어드 러스틴
Bayard Rustin
파일:베이어드 러스틴.webp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1912년 3월 17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웨드체스터
사망 1987년 8월 24일 (향년 75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파트너 데이비스 플랫 (1940년대)
월터 니글 (1977년~1987년)
학력 윌버포스 대학교 (졸업)
최종 당적
약력 미시시피 주 자유민주당 고문
미국 사회당 의장
AFL-CIO 필립 랜돌프 연구소 소장
1. 개요2. 생애
2.1. 청년기2.2. 동성애자 권리운동가가 되다2.3. 주류 민권운동과의 결별2.4. 신보수주의로의 전향2.5. 사후
3. 소속 정당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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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사회주의, 흑인 민권, 동성애자 권리 운동가. 미국 사회당의 전국 의장을 맡았으며, 구좌파 중심 흑인-동성애자 민권운동을 이끌었고 말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신보수주의를 지지한 매우 특이한 경력의 인물이다.

2. 생애

2.1. 청년기

1912년 펜실베이니아에서 12남매 중 9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 어머니를 친누나로 알았다고 한다. 비록 집은 가난했지만 흑인 민권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었고, 러스틴의 어머니는 W. E. B. 듀보이스의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다. 이런 영향으로 러스틴은 일찍이 흑인 대학에 입학하고 민권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20대에 미국 공산당의 청년위원회에 들어가 공산주의를 공부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흑인 민권 사상을 정립했다. 동시에 청소년기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이를 서슴치 않고 가족에게 말했는데, 그의 외할머니는 러스틴을 격려하며 동성애 권리 운동을 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1941년, 공산당에 입당한지 5년만에 탈당했다. 공산당이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이는 러스틴의 반전주의 입장과 상충되었다. 또 러스틴은 민권운동보다 대(對)파시즘 투쟁을 더욱 강조하며 민권운동을 방기하다시피 한 공산당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러스틴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계속 수용했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탈피한 민주사회주의를 추구하게 되었고 미국 사회당에 입당했다. 러스틴은 사회당으로 당을 옮긴 후에도 민권운동에 정력적인 활동을 벌여 사회당 대선 후보인 노먼 토머스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도 접견하며 흑인 민권운동의 리더로 부상했다. 러스틴의 노력은 결실을 빚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방위산업 내 인종 분리를 금지한 "행정 명령 8802호"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당시 미국은 징병제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러스틴은 완고한 평화주의자로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택하고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켄터키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석방되었을 때 러스틴은 흑인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운동가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러스틴은 비폭력 저항운동의 전술을 배우기 위해 1952년까지 인도, 가나, 나이지리아 등을 여행했다. 자신의 퀘이커 신앙심에 비추어 인도의 비폭력 투쟁술을 분석한 책을 1955년 발간하기도 하였다.

2.2. 동성애자 권리운동가가 되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해는 1953년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때였다. 1953년 1월, 러스틴은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젊은 남성 2명과 카섹스를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러스틴은 청소년기 때부터 동성애에 눈을 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공연음란죄 소도미법 위반 혐의를 당당하게 인정한 후 60일동안 감옥에 수감되었다. 유명 흑인 민권운동가의 구속은 즉각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당시 미국에서 동성애가 합법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러스틴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감추지 않았다.

물론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특히 침례회에 기반한 윤리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많은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러스틴의 동성애 취향을 좋지 않게 보았고,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비폭력 민권운동 단체에서 제명되는가 하면 흑인 민권운동 강연을 줄줄이 취소되는 시련을 맞았다. 그럼에도 러스틴은 죽을때까지 자신의 동성애자라는 성 지향을 밝힌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또 마틴 루터 킹 같은 또다른 많은 민권운동가들은 러스틴을 옹호하였으며 그가 계속 민권운동 조직에 남을 수 있도록 도왔다.

동성애 논란이 일어난 이후에도 러스틴은 예전처럼 흑인 민권운동에 계속 전념했는데, 1956년 셀마에서의 비폭력 투쟁에 참가하기도 했고, 1963년에는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을 마틴 루터 킹과 함께 주도하면서 전국적으로 주목받았다. 인종주의자 상원의원 스트롬 서먼드는 러스틴을 "공산주의자, 병역기피자, 동성애자"라고 비난했고 조작된 사진을 토대로 마틴 루터 킹과 베이어드 러스틴이 동성 연인 사이라는 가짜 뉴스를 뿌리기도 했다.

2.3. 주류 민권운동과의 결별

전국적으로 유명 인사가 된 러스틴은 1964년 민주당으로부터 정계 영입 제의를 받았고, 러스틴은 사회당 당적을 유지하면서도 미시시피 주 자유민주당(Freedom Democratic Party)의 고문이 되었다.[1] 린든 B. 존슨 휴버트 험프리는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했으나, 민주당 남부가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1964년 전당대회에서 미시시피 주 자유민주당에게는 2석의 참관인 대의원단만을 배분했고 나머지 대의원을 모두 미시시피 주 민주당에 할당했다. 흑인 민권운동가들은 이를 거부하자고 했으나, 베이어드 러스틴은 민주당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그래야 추후 더 많은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이 사건으로 러스틴은 처음으로 주류 민권운동 세력과 갈등을 빚게 된다.

이 시기 러스틴은 신트로츠키주의의 영향을 받아들여, 대외적으로는 소련에 반대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경제적 투쟁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의 입장을 강하게 띄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흑인 내셔널리즘이나 분리 조치 철폐 등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다른 흑인 민권운동가와 차별화되었다. 러스틴은 1964년 민권법이 통과된 직후 형식적 분리는 철폐되었지만 경제적 격차로 나타나는 실질적 분리가 철폐되지 않았기에 흑인 민권운동이 새로운 목표인 "흑인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 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러스틴은 AFL-CIO 등 노동조합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AFL-CIO의 지도부는 휴버트 험프리 같은 민주당의 민권 세력을 지지했지만, AFL-CIO의 조합원들은 보수적인 중부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지 월리스의 포퓰리즘에 호도되는 면이 있었다. 민권운동가들은 월리스를 지지하는 중부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꺼렸지만, 러스틴은 노동자들이나 흑인이나 모두 자본주의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적극적으로 백인 노동자와 흑인 노동자의 단결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러스틴은 주류 민권운동 세력과 더더욱 분리되었고, 일부 민권운동가들은 그를 배반자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2.4. 신보수주의로의 전향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스틴의 사회당 및 노동조합에 대한 헌신은 강해졌으며 미국 사회당의 전국 의장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러스틴이 이끄는 사회당은 매우 특이한 위치에 있었다. 소련을 파시즘적 체제라고 부르며 반대했으며, 조지 맥거번을 지지하는 신좌파 세력에도 반대했다. 러스틴은 사회당의 의장으로서 "사회당"이라는 명칭이 "사회주의자"를 암시하기에 친 소련적인 면이 있다고 주장하며 당명 개정을 주장했고, 1972년 사회당은 러스틴의 의견대로 당명이 "사회민주당"으로 바뀌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러스틴은 표면적으로는 맥거번과 닉슨에 모두 반대했지만 청년좌파와 흑인 민권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얻고 있었던 조지 맥거번을 더욱 경계하였다. 특히 러스틴은 맥거번의 평화주의가 소련의 야욕으로부터 흑인과 소수인종의 인권을 지킬 수 없는 무책임한 고립주의라고 생각했다. 같은 맥락에서 헨리 M. 잭슨의 행보를 지지했고, 1970년대 중반에는 그와 함께 손을 잡고 소련 내 유대인 탄압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70년대 후반 이후 러스틴은 아프리카 흑인 민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아프리카 흑인 민권의 가장 큰 적을 소련 공산주의로 규정했다. 그는 로버트 무가베와 같은 일부 아프리카 흑인 지도자들이 진정한 민권의 적이라 생각했고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프리카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흑인 정권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시오니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자세를 취했고, 이 과정에서 제시 잭슨을 비롯한 많은 동료 민권운동가들과 결별해 사실상 신보수주의자로 전향했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 정권 수립으로 러스틴은 레이건에 호감을 느끼고 그와 협력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당 출신이었던 진 커크패트릭과도 동맹 관계를 맺었다. 1980년대 말에는 남미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보수주의적 국제주의자로 거듭났다. 우익 인사와 어울리고 보수적인 발언을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말년까지 노동권을 옹호하며 대내적으로는 사회주의적인 신념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1987년 아이티 관련 업무를 맡다가 뉴욕시에서 숨을 거두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러스틴의 흑인 민권에 대한 헌신을 칭찬했다.

2.5. 사후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자유의 메달을 수상받았다. 7년 후인 2020년에는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의해 몇십년만에 자신의 동성애로 인한 유죄를 사면받았다. #

3.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기간 비고

1936 - 1941 입당

1941 - 1972 입당

1972 - 1987 당명 변경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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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미시시피 주 민주당은 인종주의자들이 점거하던 관계로 민권운동 세력은 "자유 민주당"이라는 별개의 조직을 꾸려 당권 세력에 맞섰다. 앨라배마 주에서도 조지 월리스의 주 민주당 조직에 맞서 "전국민주당"이 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