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원 임시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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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 |
미합중국 상원 임시의장
제임스 스트롬 서먼드 시니어 James Strom Thurmond Sr. |
|
|
|
출생 | 1902년 12월 5일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에지필드 | |
사망 | 2003년 6월 26일 (향년 100세)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에지필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정당 |
(~1948) [[주권민주당| 주권민주당 ]] (1948)(1948~1964) (1964~2003) |
학력 | 클렘슨 대학교 ( 원예학 / B.S.) |
종교 | 개신교 ( 침례회) |
재임기간 | 미국 상원 임시의장 |
2001년 1월 20일 ~ 2001년 6월 6일 | |
1995년 1월 3일 ~ 2001년 1월 3일 | |
1981년 1월 3일 ~ 1987년 1월 3일 | |
연방상원의원 (사우스캐롤라이나 클래스 2) | |
1956년 11월 7일 ~ 2003년 1월 3일 | |
1954년 12월 24일 ~ 1956년 4월 4일 | |
제103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 |
1947년 1월 21일 ~ 1951년 1월 16일 | |
가족 |
배우자 낸시 무어 슬하 자녀 5명 |
서명 |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군인으로서는 1942년에 입대해 미합중국 육군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전하는 등 활약해 총 18개의 훈장, 메달 및 상을 받은 바 있고 1964년 예비역 육군 소장까지 올랐다. 정치인으로서는 48년간 연방 상원의원 직을 지내면서 퇴임시 기준으로 역대 최장기간 연방 상원의원 역임 기록[1]을 세웠으며, 마찬가지로 퇴임 당시 나이 100세 29일로 역대 최고령 연방 상원의원 기록을 세운 바 있다. 또한 100세 6개월 21일의 수명을 기록하여 기존 기록인 알프 랜던(100세 33일)을 깨고 역대 미국 주요 정치인 및 전현직 연방 상원의원 중 가장 장수하기도 했다.[2][3]1964년까지는 민주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간에 해리 S. 트루먼의 인종 화해 정책에 반발해 주권민주당이란 이름으로 대선에 단독 출마한 적도 있고, 이후에는 흑인 인권 보장을 위한 연방 민권법 통과를 반대하여 아예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기기까지 했다.[4]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19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40년간 미국 남부의 정치적 지형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여주는 상징과 같은 존재다.
2. 약력
- 1921.6 W. Daniel 고등학교 졸업
- 1921.9 클램슨 대학교 입학
- 1923.6 클램슨 대학교 졸업(Bachelor of Science, B.S.)
- 1929. 에지필드 카운티(Edgefield County) 교육 이사회 이사
- 1933.1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의회 상원의원 (1933.1.10 ~ 1938.1.14)
-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권민주당 대통령 후보 (낙선, 3위)
- 제103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1947.1.21 ~ 1951.1.16)
3. 생애
서먼드는 1946년 민주당 당적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 당선되었지만 당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추진한 민권운동과 인종차별 철폐 정책에 반발해 주권민주당( 딕시크랫)을 창당해 1948년 대선에 출마했고 남부 4개 주에서 승리해 39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는 이변을 일으켰다.그 뒤 민주당으로 복당해 1951년까지 주지사로 재직하고 은퇴했는데[6] , 1954년 11월에 열린 사우스캐롤라이나 연방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지역 유권자들은 출마하지도 않은 서먼드를 투표용지에 기입하여 그를 상원의원에 당선시켜버렸다![7] 연방 상원의원이 된 서먼드는 주의 권리를 명분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앞장섰고 1957년에는 민권법안 통과 저지를 위해 24시간이 넘는 필리버스터를 감행했으며, 결국 1964년에는 민권법 통과를 추진한 민주당을 탈당해 배리 골드워터 지지 선언을 하며 공화당으로 입당했다.
그러나 정작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긴 1970년대부터는 인종차별주의 노선을 버리고 흑인 보좌관을 채용하였고 ' 마틴 루터 킹의 날' 제정에도 앞장서는 등 전향적인 행보를 보였다. 다만 이에 대해선 서먼드 본인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기보다는, 민권법의 제정으로 투표권을 법적으로 보호받게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흑인 유권자들을 의식할 수 밖에 없어서 그렇게 행동한거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한다. 당연히 다른 분야에서는 남부 공화당원답게 일관적으로 경제적 자유주의, 사회보수주의, 매파적인 투표를 했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뉴트 깅리치의 지휘 아래 '미국과의 계약'을 내세워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에 서먼드는 최고참 의원 자격으로 연방 상원의 군사위원장을 맡았으나, 고령으로 인해 저하된 판단력과 활동력은 숨길 수 없었는데 이때문에 군사위원회는 서먼드가 위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1996년 무려 연방 상원의원 9선에 성공했다.
2002년에는 전례없는 100세 상원의원이 되었고 마지막까지 이라크 전쟁 파병안 등 의정활동을 놓지 않았다. 2002년 12월 5일, 미 의회에서는 서먼드 상원의원의 100세 생일잔치가 열렸고 이 자리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까지 참석해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트렌트 로트 의원(미시시피)이 축사에서 "서먼드 의원이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미시시피 주민들은 그를 뽑았다. 우린 그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만약 미국의 다른 주들 모두가 우리를 따랐다면 지금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지 않았을 것" 이라는 내용으로 그의 인종차별 정책을 옹호했다는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15일 뒤 상원 원내대표직을 사임해야 했다.
2003년 1월 3일, 서먼드 의원은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80년의 정치경력을 마감했으며, 6개월 뒤인 6월 29일 한 요양병원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 였다.
여담으로, 서먼드가 100세까지 9선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같은 지역구의 어니스트 '프리츠' 홀링스(Ernest 'Fritz' Hollings) 민주당 상원의원은 무려 36년이나 주니어 상원의원으로[A] 머물러야 했다. 프리츠 홀링스는 민주당 소속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 당선되어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9], 1966년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뒤 2004년까지 7선 상원의원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대표했다. 갈수록 민주당의 험지가 되어간 사우스캐롤라이나였지만 홀링스 상원의원의 지역구 장악력은 굳건했고 1984년에는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런 엄청난 중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서먼드 때문에 은퇴하기 2년 전에야 시니어 상원의원이[A]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먼드와 홀링스 둘 간의 관계는 가끔 드러나는 철학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좋았으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지역발전을 위해 추진한 사업들도 많았다. 상원에서도 손꼽히는 거물급 의원 두 사람이 같은 주에, 그것도 양당에 1명씩 있었으니...
4. 여담
- 24시간 18분으로 미국 연방 상원 역사상 개인 필리버스터 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11] 1957년 미국 연방 민권법 통과를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법이 미국 흑인의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해 제정하려던 법인지라 현재까지 이 경력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대표적인 인종차별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
- 중증 인종차별주의자였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흑인 미성년자 캐리 버틀러(Carrie Butler)를 의제강간해 낳은 사생아인 에씨 워싱턴윌리엄스를 평생 숨겨왔고, 이 사실이 그가 죽은 지 반년이 된 시점에 공개되어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 비록 에씨 본인은 아버지를 정치인으로서도, 부친으로서도 존경해 이 사실을 무덤까지 안고 갈 생각이었지만 정작 서먼드는 그녀를 버리다시피 해 이모의 손에 크게 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할 따름.[12]
- 인종차별주의적 성향과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의 당적 변경 등 미국 남부의 정치 지형 변화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의외로 이 사람 외에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경향을 보인 남부 민주당원 상원의원들 대다수는 은퇴할때까지 민주당 소속으로 남았다.[13] 어찌보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꾼 이 사람이 더 예외적인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미국 남부에서 본격적으로 공화당 지지세가 강해지고 보수주의 성향의 민주당원들이 민주당에서 이탈하고 대거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꾸는 변화가 일어난건 90년대-00년대로, 이미 이때쯤에는 민권법등의 이슈가 쟁점이 되던 시기를 한참 지난 시점이었고, 당적을 바꾼 남부 민주당원 정치인들 역시 노골적인 인종주의자들은 아니었다.[14]
- 조지 월리스와 비슷하게 친민권 민주당 후보에 맞서 "반군" 후보로 출마했지만 정작 1948년 대선에서 월리스는 트루먼을 지지했고 1968년 대선에서 서먼드는 닉슨을 지지했다.
- 100세까지 장수한 만큼 건강 관리에 매우 철저했다. 매일 푸룬주스를 한 컵씩 마시면서 푸시업 등의 각종 운동을 꾸준히 한 것은 물론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으며, 특히 튀긴 음식과 과다한 탄수화물 섭취를 피했다. 출처
- 197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존 레논이 조지 맥거번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콘서트를 개최하려고 하자, 그의 영향력을 감안해 닉슨에게 존 레논의 추방을 고려해야한다는 쪽지를 보냈다. 존 레논은 이 사실을 알고 격노했으며, 조지 맥거번이 압도적으로 패배하자 더욱 격노했다는 후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 정치에 관심이 많은 비틀즈나 존 레논 팬들에게는 서먼드가 불구대천의 원수나 마찬가지다.
- 흑백문제 관련하여 스트롬 서먼드의 의외의 미담이 하나 있다. 당시 루즈벨트 고교를 간신히 졸업한 가난한 흑인 청년인 버티 보우먼(Bertie Bowman 1931~2023)이 명문 흑인대학인 하워드(Howard) 대학에 진학하려다 성적 미달로 보충 교육(Remedical courses) 이수를 통보받았다. 좌절한 보우먼에게 서먼드가 입시결과를 들었고, 그의 사정을 듣자마자 당장 대학에 전화를 걸어 따졌다. "밥(bob), 내 곁에 젊은이(young man)가 한 명 있는데, 당신네 학교에 지원했다가 거절을 당했다더군, 당신 학교 예산의 80%를 정부가 대준다는 것을 모르나?" 보우먼은 하워드 대학 행정학에 입학하여 2년 후에 중퇴했고, 후에 "역대 최장수-최고령 연방의회"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여러 정치계 거물들과 교분을 쌓았고, 후에 연방상원신용조합(USSFCU)는 조합의 신청사를 "버티 보우먼 빌딩"으로 명명했다. 보우먼은 2012년 전국 공영 라디오(NPC)에서 서먼드는 그 전화에서 보이(boy, 흑인을 얕잡게 부르는 말)가 아닌 젊은이(young man)으로 자기를 불렀다고 회상했다.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32 |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선거 | 에지필드 카운티 |
|
- (-%) | 당선 (1위) | 초선 |
1936 |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선거 | - (-%) | 재선 | |||
1946 | 미국 주지사 선거 | 사우스캐롤라이나 | 26,520 (100.0%)[단독] | 초선 | ||
1948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주권민주당| 주권민주당 ]]
|
1,175,930 (2.41%, 39명) | 낙선 (3위) | |
195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사우스캐롤라이나 |
|
143,444 (63.13%) | 당선 (1위) | 초선[16][17] |
1956 |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 245,371 (100.00%)[단독] | 재선 | |||
196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330,167 (99.97%)[단독] | 3선 | |||
미국 부통령 선거[20] | 미합중국 |
[[남부 민주당원| 선서하지 않은 선거인 ]][21]
|
- (-%, 14명[22]) | 낙선 (3위) | ||
196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사우스캐롤라이나 |
|
271,297 (62.19%) | 당선 (1위) | 4선 |
197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415,806 (63.29%) | 5선 | |||
197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351,733 (55.56%) | 6선 | |||
198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644,814 (66.79%) | 7선 | |||
199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482,032 (64.21%) | 8선 | |||
199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620,326 (53.38%) | 9선 |
[1]
지금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1959년부터 2010년까지 51년간 임기를 지낸
로버트 버드 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기록을 가지고 있다.
[2]
헨리 키신저가 2023년 12월까지 생존하면 이 기록을 깨게 되는 등 상당히 근접했지만 2023년 11월 29일 사망하면서 이 기록은 깨지지 않게 되었다. 단, 역대 의원 중 최장수 기록은 아닌데, 이 기록은
레스터 L. 울프
#(102세)가 가지고 있다.
[3]
제임스 L. 버클리 전 뉴욕 상원의원이 100세 5개월 1주 2일의 기록을 세우면서 역시 상당히 근접하기도 했지만, 2023년 8월 18일 사망했으므로 앞으로도 오랜 기간동안 이 기록은 깨지지 않을듯 하다.
[4]
그와 거의 유사한 정치적 행보를 걸은
조지 월리스는 그대로 죽을때까지 민주당 당적을 유지했던 것과 상반된다.
[5]
총 48년 재임, 역대 최고령 상원의원이자 최장 재임기간 2위.
[6]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이 보수적이지 않다고 여겨 공화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지지했다.그러나 56년 대선에서는 둘 다 지지하지 않고 반란표 운동을 주도했다.
[7]
이 기록은 2010년
리사 머코스키가 기명투표로 당선될때까지 다시 나오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서먼드는 민주당 내 비주류라 낙천 후 기명투표로 당선되었다면 반대로 머코스키는 공화당 내 비주류라 낙천 후 기명투표로 당선되었다.
[A]
같은 주에서 먼저 당선된 연방 상원의원을 시니어 상원의원으로, 나중에 당선된 연방 상원의원을 주니어 상원의원이라고 부른다. 만약 상원의원 본선거와 보궐 선거가 동시에 치러진 경우에는 본선거로 당선된 쪽이 시니어, 보궐선거로 당선된 쪽이 주니어다.
[9]
선거 전 정치적 수사와 다르게 주지사 재임시절 주립대학의 흑백통합 등을 추진했다.
[A]
[11]
한국 기록인
윤희숙 전 의원의 기록이 12시간 47분이니 그보다도 12시간 가까이가 더 많다.
[12]
다만 서먼드가 아예 자기 딸을 버린 건 아니었고, 그의 인생 내내 재정지원을 해줬다.
[13]
대표적인 케이스로
웨스트버지니아의
로버트 버드가 있다. 단 버드는 말년에 본인의 인종차별주의적 과거 행보를 공개적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흑인이었던
버락 오바마를 지지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다만 버드는 인종차별주의를 제외한 사회문화적 입장에서는 이라크전 반대 등의 몇몇 예외적인 행보를 제외하면 끝까지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전형적인
보수주의 민주당원이었다.
[14]
사실 인종주의적 면모보다는 개신교 근본주의, 재정보수주의 성향이 더 강했던 경우다. 즉 복지제도와 낙태, 동성애등을 흑인보다도 더 혐오했다고 보면 된다.
[단독]
단독 입후보
[16]
당의 공식 후보로 지명을 받지 못했으나 기명식 투표를 통해 당선되었다.
[17]
1956. 4. 4. 공약 이행을 위해 사임
#
[단독]
단독 입후보
[단독]
단독 입후보
[20]
대통령 후보는
해리 F. 버드
[21]
불충실한 선거인단과 달리 처음부터 특정한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선거인이다. 다만 1960년의 선서하지 않은 선거인은
딕시크랫 후보에 가까웠고 정부통령 후보도 미리 추대했다.
[22]
오클라호마주의 닉슨
불충실한 선거인단은 대통령 후보로는 버드를 찍었으나 부통령 후보로는
배리 골드워터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