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V. 데브스 관련 틀
|
|||||||||||||||||||||||||||||||||||||||||||||||||||||||||||||||||||||||||||||||||||||||||||||||||||||||||||||||||||||||||||||||
|
미합중국의 사회주의자 유진 빅터 데브스 Eugene Victor Debs |
|||
|
|||
<colbgcolor=#8D342E><colcolor=#fff> 출생 | 1855년 11월 5일 | ||
미국 인디애나주 테러호트[1] | |||
사망 | 1926년 10월 20일 (향년 70세) | ||
미국 일리노이주 엘름허스트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서명 |
|
||
링크 | [공식]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342E><colcolor=#fff> 묘소 | 하이랜드 잔디 묘지 | |
부모 |
아버지 다니엘 데브스 어머니 마거릿 마리 베트리히 데브스 |
||
형제자매 | 동생 시어도어 데브스 | ||
배우자 | 케이트 메첼 (1885년 6월 9일 결혼) | ||
학력 | 공립 고등학교 ( 중퇴) | ||
소속 정당 |
|
||
지역구 | 인디애나 제17선거구 | ||
경력 |
반달리아 철도 청소부 식료품 도매점 직원 화부형제단 월간지 부편집장 화부형제단 총서기 겸 월간지 편집장 테러호트 시 서기 인디애나주 하원의원 (제17선거구 / 민주당) 초대 전미철도노조 위원장 사회민주당 집행위원 초대 사회당 당수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창립자 |
}}}}}}}}} |
[clearfix]
"나는
노동자들의 지도자가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나나 또 다른 이의 뒤를 따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자본주의의 황야에서 여러분을 해방시킬 모세를 찾고 있다면 지금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머리와 손을 사용해 스스로가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야 합니다." - 1906년의 연설 중
#
"나에게는 싸울 나라가 없습니다. 내 나라는 지구이며, 나는 세계의 시민입니다."
-1915년 9월 11일의 연설에서
-1915년 9월 11일의 연설에서
1. 개요
미국의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 정치인으로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미국내 좌익과 진보 운동권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여러차례 대선에 출마했으며 버니 샌더스 이전까지 미국 내에서 가장 성공한 사회주의 정치인을 꼽으라면 단연 유진 데브스가 꼽혔다.
2. 생애
2.1. 노동운동에 투신하다
데브스와 전미철도노조 동지들[3] | 데브스를 비난하는 신문 만평[4] |
화부형제단에서 활동하면서 유진 데브스는 기존의 조직보다 더 열성적인 노동조합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가 다니던 철도형제단은 노동조합의 성격보다는 친교모임 혹은 길드의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화부형제단을 그만두고 1893년 독자적으로 '전미철도노조'를 조직했다.[6] 전미철도노조는 모든 철도노동자들을 대변하여 철도회사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싸웠고 1894년 4월에는 거대 철도회사를 상대로 한 18일 간의 파업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전미철도노조는 첫 승리 이후 또 다른 파업에도 참여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철도회사인 풀먼 사[7]를 상대로 부당한 임금 삭감을 항의하는 대대적인 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처음에 데브스는 이 파업에 대하여 기업과 정부의 극심한 탄압과 그로 인한 노동조합의 약화를 우려했지만 곧 수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자 자신도 파업에 동참했다. 데브스는 물론이고 전미철도노조의 조합원들도 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전국적으로 8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며 기업과 정부기관을 보이콧했다. 데브스는 이 파업을 이끄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2개월 간의 투쟁을 이끌었다.[8]
파업이 지속되자 미국 연방정부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이 파업을 분쇄했다. 이로 인해 데브스는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가 만들었던 전미철도노조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2.2.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
유진 데브스의 대선 포스터 | 연설하는 데브스 (1912) |
1884년의 파업이 실패하고 유진 데브스는 6개월 동안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전국의 사회주의자들이 그를 지지하며 편지나 서적들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읽으면서 미국의 현 체제에 대한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고민했고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특히 그는 한 사회주의 신문 주필이 보내준 < 자본론>을 열심히 탐독했고, 1885년 출감했을 때에는 완전한 사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전에 민주당 정치인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었던 데브스는 1895년 옛 전미철도노조 조합원들과 동지들을 모아 사회민주주의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그럼에도 그는 1901년 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이후 사회당으로 개칭하여 미국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선두주자로 1900년대 초반 내내 활동했다.[9]
※ 유진 데브스의 대선 출마 결과
대선 | 정당 | 득표율 | 득표 수 | 선거인단 득표 | 결과 |
1900년 대선 | 사회민주주의당 | 0.6% | 87,945 | 0 | 낙선(4위) |
1904년 대선 | 사회당 | 2.98% | 402,810 | 0 | 낙선(3위) |
1908년 대선 | 사회당 | 2.83% | 420,852 | 0 | 낙선(3위) |
1912년 대선 | 사회당 | 5.99% | 901,551 | 0 | 낙선(4위) |
1920년 대선 | 사회당 | 3.4% | 913,693 | 0 | 낙선(3위) |
또한 유진 데브스는 국제적인 노동운동을 위한 거대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노동운동가들과 사회주의 정당, 시민단체, 사회운동가 등을 만났다. 그리하여 1905년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10]을 조직했다. 하지만 IWW의 조직 유지는 쉽지 않았다.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 사이의 간극을 원인으로 하여 파벌이 갈라져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데브스는 두 파벌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두 파벌은 갈라졌고 이는 그가 이끌던 사회당의 약세를 가져왔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데브스는 뛰어난 연설실력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 해나갔다. 그는 사회주의적 신념에 대해서는 열렬하게 카리스마 있는 연설을 했고, 인간관계에서는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또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에도 직접 나가 파업을 응원하고 노동자들을 지원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가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로서 투쟁했던 활동은 미국 노동조합운동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2.3. 반전운동과 수감
감옥에 수감된 데브스 | 출감한 데브스 (1921) |
존경하는 재판장님, 몇 년 전 본인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나의 친족임을 깨달았고, 제가 지구상에서 가장 대단치 않은 자들보다 나은 것이 털 끝만치도 없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본인은 그때 이리 말했고, 또 지금 이렇게 말합니다. 하층계급이 존재한다면 내가 바로 그 계급에 포함될 것이요, 범죄분자가 존재한다면 내가 바로 그 분자일 것이요, 감옥 안에 단 하나의 영혼이라도 갇혀 있다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고 말입니다.
최후 변론 전문
최후 변론 전문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몇 년 후인 1918년, 미국도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고자 했다. 이에 유진 데브스는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에 나섰다. 여기서도 그는 미국 정부와 전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이는 참전을 준비하고 독려하던 미국 정부에게는 눈엣가시였다.[11] 1918년 6월 16일에 데브스는 징병에 저항하자는 논지의 연설을 했고, 2주 후 방첩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법정에 가게 되었다.[12] 증인도 허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홀로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2시간에 걸쳐 그는 감동적인 자기 변호[13]를 펼쳤지만 그는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그는 수감되었으나 1920년 옥중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여기서 그는 100만 표에 조금 못 미치는 표를 받았다. 이후 그는 1921년 12월까지 애틀랜타 연방감화원에 수감되어 있어야 했다.[14] 마침내 데브스는 대선 이후 워런 하딩 대통령에 의해 1921년 12월 25일 감형되어 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사회당의 잔재를 이끌며 다른 진보파와의 협력을 도모했고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을 발족, 좌익 통합 후보 로버트 라폴레트를 내세우는등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진보당은 선거 직후 사실상 와해되었고 좌익 연합 노동 대중정당이라는 뎁스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수감생활로 인해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치료를 받다 1926년 10월 20일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3. 기타
버니 샌더스가 이 사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다.[15]도널드 트럼프가 성추문 입막음 돈 관련해서 유죄판결을 받자 유진 데브스가 옥중 출마한 사례가 언급되고 있다. #[16] 물론 유죄 평결 자체는 받았으나 실제 징역형인지, 혹은 벌금 또는 집행유예인지 정하는 형량 선고는 아직 내려지지 않은 상태라 실제 징역형을 받을지 아닐지는 아직 미정이고, 결국 재판부에서도 대선에 개입하려 한다는 비판에 못이겨 형량 선고 자체를 미국 대선 이후로 연기해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의미없는 가정이 되었다.
[1]
Terre Haute, 테레호테라고도 한다.
[공식]
유진 V. 데브스 재단 공식 홈페이지
[3]
유진 데브스는 이 사진 앞줄 맨 오른쪽에 있다.
[4]
이 만평에서는 데브스를 '데브스 왕(KING DEBS)'라 부르면서 철도 파업을 이끌던 그를 조롱하고 있다. 이 만평은 친기업 논조를 띠던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 실렸다.
[5]
그는 주로 화부형제단의 정기 간행물에서 간부직을 맡았다.
[6]
이 조직은 미국 최초의 비숙련 노동자 산별노조였다.
[7]
이 회사의 본명은 풀먼팰리스카 회사로 미국 철도의 전성기를 이끈 철도회사였다.
[8]
이에 친기업 논조를 보이던
뉴욕 타임즈는 그를 향해 "인류의 적"이라며 공격했고, 이 파업을 '데브스의 난'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9]
유진 데브스는 자신의 대선 출마에 정치적 목적을 두지 않았다. 대신 그는 대선 출마를 사회주의 사상의 홍보와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10]
이 조직은 후술할 갈등으로 크게 줄었었으나, 최근 들어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하여 지금은 1만여 명의 조직원을 지닌 국제 노동조합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11]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데브스를 향해 '역적'이라고 맹비난했다.
[12]
당시 미국은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부터 소위 적색공포라는 것에 빠져 있었는데, 유진 뎁스 또한 이 적색공포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3]
한 기자의 말에 따르면 "영어로 만들어진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장 중 하나"였다고 한다.
[14]
그 이전에도 그의 사면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왔으나 매번 사법당국과 윌슨 행정부의 반대에 의해 무산되었다.
[15]
자서전 <버니 샌더스: 우리의 혁명>에서 밝혔다.
[16]
다만 트럼프와 데브스의 정치적 성향은 정반대라 만약 동시대 사람이었다면 데브스는 트럼프를 싫어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