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21:15:07

그로버 클리블랜드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투수에 대한 내용은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D164A 20%, #0D164A 80%, #0D1635); color:#ffc22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윌리엄 헨리 해리슨 존 타일러 제임스 K. 포크 재커리 테일러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A. 가필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체스터 A.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벤저민 해리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우드로 윌슨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제45대 제46대
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
그로버 클리블랜드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letter-spacing:-0.5px"
초대
조지 클린턴
제2대
존 제이
초대2
조지 클린턴
제3대
모건 루이스
제4대
대니얼 D. 톰킨스
제5대
존 테일러
제6대
드윗 클린턴
제7대
조셉 C. 예이츠
제6대2
드윗 클린턴
제8대
너새니얼 피처
제9대
마틴 밴 뷰런
제10대
에노스 T. 스루프
제11대
윌리엄 L. 마시
제12대2
윌리엄 H. 수어드
제13대
윌리엄 C. 바우크
제14대
사일러스 라이트
제15대
존 영
제16대
해밀턴 피시
제17대
워싱턴 헌트
제18대
호레이쇼 시모어
제19대
마이런 H. 클라크
제20대
존 A. 킹
제21대
애드윈 D. 모건
제18대2
호레이쇼 시모어
제22대
루번 펜턴
제23대
존 T. 호프먼
제24대
존 애덤스 딕스
제25대
새뮤얼 J. 틸던
제26대
루시어스 로빈슨
제27대
알론조 B. 코넬
제28대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9대
데이비드 H. 힐
제30대
로스웰 P. 플라워
제31대
리바이 P. 모턴
제32대
프랭크 S. 블랙
제33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제34대
벤저민 오델
제35대
프랭크 W. 히긴스
제36대
찰스 에번스 휴스
제37대
호레이스 화이트
제38대
존 앨든 딕스
제39대
윌리엄 슐저
제40대
마틴 H. 글린
제41대
찰스 S. 휘트먼
제42대
앨 스미스
제43대
네이선 L. 밀러
제42대2
앨 스미스
제44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45대
허버트 리먼
제46대
찰스 폴레티
제47대
토머스 E. 듀이
제48대
W. 애버럴 해리먼
제49대
넬슨 록펠러
제50대
맬컴 윌슨
제51대
휴 캐리
제52대
마리오 쿠오모
제53대
조지 퍼타키
제54대
엘리엇 스피처
제55대
데이비드 패터슨
제56대
앤드루 쿠오모
제57대
캐시 호컬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미합중국 제22·24대 대통령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Stephen Grover Cleveland
파일:Stephen Grover Cleveland.jpg
출생 1837년 3월 18일
미국 뉴저지 주 콜드웰
사망 1908년 6월 24일 (향년 71세)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
재임기간 제22대 대통령
1885년 3월 4일 ~ 1889년 3월 4일
제24대 대통령
1893년 3월 4일 ~ 1897년 3월 4일
서명 파일:그로버 클리블랜드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리처드 클리블랜드(1804 ~ 1853)
어머니 앤 닐(1806 ~ 1882)
형제자매 여동생 로즈 클리블랜드(1846 ~ 1918)
배우자 프랜시스 클리블랜드 프레스턴(1864 ~ 1947, 1886년 결혼)
자녀 루스 클리브랜드(1891 ~ 1904)
에스더 클리블랜드(1893 ~ 1980)
매리언 클리블랜드(1895 ~ 1977)
리처드 F. 클리블랜드(1897 ~ 1974)
프랜시스 그로버 클리블랜드(1903 ~ 1995)
학력 페이엣빌 아카데미
클린턴 리버럴 아카데미
종교 개신교 ( 장로교회)
신체 180cm / 체중 125kg[1] / O형( Rh-)
정당

( 버번 민주당)
문장 파일:Grover_Cleveland_Arms.png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astman_Johnson_-_Grover_Cleveland_-_Google_Art_Project.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약력3. 생애
3.1. 초기 생애3.2. 정계 입문과 대선 도전3.3. 대통령 시절
3.3.1. 1번째 임기: 1885 ~ 18893.3.2. 재선 실패 후, 와신상담: 1889 ~ 18933.3.3. 2번째 임기: 1893 ~ 1897
3.4. 이후
4. 평가5. 한국과의 관계6. 가족
6.1. 아내
7. 기타

[clearfix]
제24대 미국 대통령의 육성[2]

1. 개요

파일:$1000 front.jpg
1934년 1천달러 지폐 속 초상화
미국의 제22대·제24대 대통령.

제2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4년간 재임한 뒤 재선에 도전하였으나 벤저민 해리슨 공화당 후보에게 패하였으며, 세 번째 대선 도전 때 해리슨의 재선 도전을 꺾고 승리하여 제24대 대통령으로 또 4년간 재임했다. 이에 따라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유일하게 두 번의 임기를 나누어 수행한 소위 '징검다리 임기'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다만 1950년대까지는 그냥 제22대 대통령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임기인 제24대 대통령 시절도 제22대 대통령인 것으로 쳤다는 소리. 이 때문에 후임인 윌리엄 매킨리는 제24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제25대로 계산되는 식으로 1950년대까지 대통령 대수를 올렸다고 한다.

본명은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이지만, 소년 시절 스티븐이란 이름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미들네임인 '그로버'를 자신의 대표 이름으로 사용했다.

2. 약력

3. 생애

3.1. 초기 생애

1837년 3월 18일 뉴저지 콜드웰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장로회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콜드웰 지역에서 목회자로 나름 명성 있는 가문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해 페이엣빌 아카데미(Fayetteville Academy)와 클린턴 리버럴 아카데미(Clinton Liberal Academy)에서 수학했지만, 1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집안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3]하고 숙부와 함께 살며 잡화점 점원으로 일했으며 한동안 뉴욕 맹인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바쁘게 일하면서도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만은 포기하지 않았고, 숙부의 배려로 버팔로시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독학으로 법학 공부에 매진하여 1859년 변호사가 되었다.[4]

변호사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사망 후 과부가 된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기에 남북전쟁 중에도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했다. 변호사 수임료만으로는 소득이 부족하여 법조계에서 일자리를 얻으러 다닌 끝에 부지방검사로 재직했고, 1870년 뉴욕주 이리 카운티 보안관에 당선되어 국장으로 재임했다. 보안관으로 일하던 이 시기 두 번의 사형 집행을 주관하기도 했다.[5] 남북전쟁 당시 북부연방에 적용된 징병법에는 "본인이 병역 의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대리인에게 보수를 지급하여 병역을 대신하게 하고 면제받을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는데, 당시 친형 두 명이 먼저 입대해 복무 중이어서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이 법 조항에 따라 150달러를 지급하는 대가로 폴란드 출신의 한 이민자를 대리인으로 입대시키고 병역을 면제받았다. 불법은 아니었지만 조국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엄연히 병역 의무를 지지 않은 것이었고, 이 점은 훗날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네거티브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3.2. 정계 입문과 대선 도전

1881년 44세의 나이로 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고, 그 해 "공공의 신뢰를 받는 공공기관"을 핵심 가치로 내걸고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버팔로시장에 당선되었다. 2년 뒤인 1883년에는 뉴욕주지사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한껏 강화했다. 주지사 재임 당시 공직사회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주정부 개혁을 단행해 꽤 성과를 거두었으며, '정직'함과 '성실'함을 모토로 내세워 '소신 있는 원칙주의자' 이미지로 호평받았다.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가 크게 상승하면서 대권주자로 급부상, 뉴욕주지사로 임기를 시작한 지 1년여밖에 되지 않은 1884년 대통령 선거에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상대 진영인 집권 공화당에서 대선후보로 지명된 제임스 G. 블레인 전 국무장관과 본선에서 격돌하게 되었는데, 당시 공화-민주 양당의 정책과 공약, 당론은 관세법 찬반[6] 외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때문에 1884년 대선의 선거 유세는 정책 대결보다 상대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공방전으로 점철되었고, 이는 서로를 향한 무차별적 의혹 제기로 하나라도 더 흠집 내고 트집 잡으려는 진흙탕 싸움으로 비화하였다. 이로 인해 선거 기간 내내 남북전쟁 당시 대리인을 입대시키고 병역을 면제받은 전력에 대한 '병역 기피' 공격 등 온갖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공화당을 지지하는 일부 언론사들로부터 "버팔로시에 사는 한 과부와 부적절한 관계였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스캔들 기사가 터지기도 했다.

파일:external/charlespaolino.files.wordpress.com/ma_ma_wheres_my_pa.jpg
당시 폭로된 스캔들을 풍자한 만평. 이 스캔들이 보도되자 블레인 후보와 공화당은 만평 속 울고 있는 아기의 말을 비틀어 "엄마, 엄마, 우리 아빠 어디 갔어요?(Ma! Ma! Where’s my pa)"라는 선전 구호로 쓰면서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하다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를 부인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백악관에 가셨단다, 하하하!(Gone to the White House, Ha! Ha! Ha!)"라는 구호로 맞받아쳤다(...).

염증이 날 정도의 혼탁한 선거전에 결국 그 과부와의 스캔들을 인정했는데, 당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상대 여성도 과부였기에 엄밀히 말하면 불륜은 아니었다. 다만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 분위기는 남녀 간 성 문제에 매우 보수적이어서 그 자체로 트집 잡힐 일이 되었던 것. 혼외정사 혼전임신을 매우 금기시하던 것이 당시 사회 풍토였던 탓에 "정식으로 결혼하지도 않고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자체가 남녀 간 순리를 어긴 것으로 비쳐졌고, 이 역시 선거 기간 내내 논란이 되었다. 여하튼 스캔들을 사실이라고 인정한 뒤 책임을 지고 아기의 양육비를 지급하겠다고 선언[7]하면서 정면돌파를 택하자 그 의연함에 일부 유권자들은 '정직'함을 내세운 모습에 부합한다며 오히려 지지를 보냈다. 게다가 병역 면제 논란은 제임스 G. 블레인 후보도 똑같은 방식으로 남북전쟁 때 병역을 면제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의혹 제기와 폭로로 얼룩진 1884년 대선 개표 결과 박빙 승부 끝에 간발의 차이[8]로 당선되어 백악관에 입성할 수 있었다. 민주당으로서도 남북전쟁 이후 처음 집권하게 되는, 기념비적인 승리였다.

3.3. 대통령 시절

3.3.1. 1번째 임기: 1885 ~ 1889

그가 대통령이었을 때 주된 문제는 관세 무역과 노동운동이었는데, 클리블랜드는 당론인 관세인하정책에 따라 관세를 낮추고 자유무역을 장려하여 시장을 확장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금본위제를 정착시키는 데 노력했다. 또한 행정부를 효율적으로 조직하였고 그 강직함으로 공직사회의 부패를 일소한 점은 그의 업적 중 하나이다. 이 점으로 첫 번째 임기를 수행할 무렵에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였다. 1886년 미국노동총연맹이 결성된 이래 노동운동은 조직화, 거대화되어갔으며, 특히 같은 해인 1886년 일어난 헤이마켓 사건은 그의 재임기에 일어난 최대의 노동운동 중 하나였다. 그러나 클리블랜드의 정강정책은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여 정부의 개입을 막고 있었고, 클리블랜드 본인 역시 "국민이 정부를 돕더라도, 정부가 국민을 도와서는 안 된다."[9]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노동자에게 그닥 우호적이진 않은 인물이었다.

또한 여러 정책을 펼쳤으면서도 국민의 교육과 복지를 위한 조치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이 점도 비판을 많이 받았다. 사실 이 당시 민주당 자체가 지금의 민주당하곤 결이 좀 다른 것도 있었고..[10] 클리블랜드 다음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낸 윌리엄 J. 브라이언 때부터 슬슬 기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3.3.2. 재선 실패 후, 와신상담: 1889 ~ 1893

1888년 재선을 노리고 공화당의 벤저민 해리슨과 격돌했는데, 이 때 클리블랜드는 득표수에서는 해리슨을 5만 표 차이(0.6%)로 눌렀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뒤지는 바람에 백악관을 해리슨에게 내 줘야 했다. 이런 사태가 초래된 데는 당시 주미 영국 대사였던 라이놀 웨스트의 발언도 한몫 했는데, 뭔 소린가 하면 공화당 측 선거참모가 웨스트에게 선거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지만 웨스트는 "우리는 영국에 호의적이고 자유무역과 관세인하를 모토로 하는 클리블랜드를 선호하는데 굳이..?" 라는 식으로 조언을 거부한다.

그러자 공화당 측에서는 이를 역으로 이용해 "영국은 클리블랜드를 원한다!"는 식으로 대대적인 프로파간다를 퍼뜨렸는데 이게 결국 클리블랜드에게 악재가 되었다. 특히 당시 인구가 많던 뉴욕 주에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유권자들이 상당했는데, 알다시피 영국과 아일랜드는 (특히 당시에는 더) 숙적이었으니 클리블랜드에게 좋을건 없었다. 결국 이 선거도 뉴욕주에서 고작 7187표(0.54%)로 승부가 갈렸다.

그렇게 '자연인'이 된 클리블랜드는 이시기 뉴욕에 법률사무소를 열고 지냈는데, 사무소 일보다는 별장에서 낚시하는 걸 더 좋아했던 듯하다. 첫째 딸 루스를 얻은 것도 이때. 이 당시 정치활동은 1891년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에게 매킨리 관세와 셔먼 반독점법에 항의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등의 소소한 정도였다. 그래도 대통령 재선을 포기한건 아니라 여전히 준비를 하곤 있었다.

3.3.3. 2번째 임기: 1893 ~ 1897

4년 동안 와신상담하며 백악관 탈환을 준비하던 클리블랜드는 189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어 결국 당선에 성공했고 기어코 두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임기는 그야말로 악순환이었다. 해리슨 정부 당시부터 악화되던 경제상황이 결국 공황으로 확산되면서 실업률이 증가하고 디플레이션이 와 농업이 피폐화된다. 그리고 이런 공황에 힘입어 압도적 다수당을 4년간 차지했던 민주당은 중간선거에서 다시 대패하여 전체 의석의 1/3 이하로 쪼그라들고 만다.

6백개의 은행이 파산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1895년에는 국가보유금이 떨어져 급히 존 피어폰트 모건 등 거대 은행그룹에 돈을 빌려야 했다. 그 와중 광산,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다시 일어났으며, 이에 대한 클리블랜드의 강경진압에 여당의 인기는 더욱 곤두박질친다. 여기에 구강암까지 발견되어 치과치료를 명목으로 비밀리에 암수술까지 받고 회복하는 등 건강도 좋지 않았다. 결국 이런 위기 속에서 허덕이다가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마치게 된다.

3.4. 이후

파일:external/www.history.com/grover-cleveland-older.jpg
1908년의 모습. 사망하던 해에 촬영된 사진이라서인지 현역 시절에 비해 살이 많이 빠지고 해쓱해졌다.

퇴임 이후 뉴저지의 프린스턴에서 살았으며, 1908년 만 71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 평가

현재 대통령 시절 업적에 관한 평가 및 인기 순위는 엄청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난한 수준이다. 높이 평가받는 점은 원칙과 소신, 강직함으로 부패를 근절했다는 것이지만 위에서 언급된 노동운동 탄압과 집권 2기 경기침체를 초래한 점은 그에 대한 평가를 깎이게 하는 부분. 사실 경기침체는 그가 초래했다기보다는 쌓이고 쌓이던 것이 그의 재임 시기에 터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전 경제정책을 딱히 수정한 것도 아니었다. 이래서 오즈의 마법사에서 클리블랜드의 경제적인 무능함이 풍자받았다는 추측도 있다.

그래도 뒷날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링컨 사망 이래 1894년 사이의 대통령들 중 미국에서 가장 주도적이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미국의 몇몇 역사가들도 에이브러햄 링컨부터 시어도어 루스벨트 사이의 대통령들 중에선 그나마 가장 중요하고 뛰어난 대통령이었다는 평가를 한다. 실제로 학자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그를 꽤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개혁을 앞세우며 행정부에서는 지도력을 발휘했지만, 입법부는 일정기간 여소야대를 맞이하기도 해 태클거는 의회와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지나치게 강직했던 나머지 다소 독선적인 면도 보여서 비전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기도 했고, 1기 행정부 때는 의회의 가결 법안을 414개나 거부하기도 해 한 임기(4년) 중에 가장 거부권을 많이 행사한 대통령이 되었다. 연설이나 글도 서투른 편이었고, 개혁 정책을 내세운다고는 했지만 그 정책도 장기적인 비전이나 융통성이 없었다는 점에선 평가가 깎이는 편이다.

그래도 정치적으로 다소 답답한 점은 있었지만, 자신의 모든 정책 결정에서 도덕적 기초를 생각했고 정직성과 근면성은 평가를 받았다 또 권위나 공직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추구하진 않았다. 전임자인 체스터 A. 아서와 함께 행정부의 도덕성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시킨 인물로 꼽힌다.

5. 한국과의 관계

한국 역사상 최초의 주미공사인 박정양이 미국에 파견된 것이 바로 그의 재임기였다.[11] 1888년 1월 17일 박정양은 백악관에 가서 클리블랜드를 만나고 국서를 제출했다. 이 때 박정양은 사모, 관대를 착용하고 신하의 대례복인 흑단령을 입은 채로 백악관을 방문했다고 한다. 고종의 이름으로 된 당시의 국서는 이러했다.
대조선국 대군주는 대아미리가(大亞美里加, America의 음차)합중국 대백리새천덕(大伯理璽天德, President의 음차)에게 글월을 올린다. 짐은 본국과 귀국이 먼저 조약을 체결, 우의가 돈독하고 두터워 사절이 왕래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중략)... 이에 짐은 신애하는 종2품 협판내무부사 박정양을 뽑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귀국에 파견, 바라건대 성실히 서로 믿고 종우접대하기 바라며, 아울러 수시로 입관하여 짐의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대신 아뢸 것이다. - 개국 496년(서기 1887년) 8월 7일
이에 클리블랜드는 다음과 같은 답사를 했다.
"미합중국 정부는 양국이 조약에 규정된 바와 같이 상호외교교섭관계의 확립을 확인함으로써 양국이 바라던 우호적 교섭을 하게 되어 크게 만족하는 바입니다."

6. 가족

6.1. 아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Frances_Folsom_Cleveland.jpg
프랜시스 폴섬 클리블랜드.[13]

클리블랜드의 행적에서 이색적인 것 중 하나는 아내와의 나이 차이가 무려 27세라는 점이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864년 프랜시스 폴섬이 처음 태어난 해. 클리블랜드와 프랜시스 폴섬의 아버지인 오스카 폴섬은 동료 변호사 사이로 친밀한 사이였다. 클리블랜드는 프랜시스 폴섬이 태어나자 선물로 유모차를 선물했다고 한다. 그런데 1875년 프랜시스가 11세가 되던 해 오스카 폴섬이 마차 사고로 사망하자 클리블랜드는 직접 폴섬 가의 재산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해줬다. 그는 프랜시스를 어린 시절부터 '프랭크'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귀여워했고 프랜시스의 교육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랜시스도 이 뚱뚱한 아저씨를 '클리브 아저씨(Uncle cleve)'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프랜시스가 대학에 들어가자 클리블랜드는 프랜시스의 어머니인 에마 폴섬에게 "따님과 계속 연락해도 될까요?" 라고 물었고, 그날 이후 프랜시스의 방에는 클리블랜드가 보낸 꽃다발로 넘쳐 흘렀다나...

파일:external/www.presidentprofiles.com/prh_01_img0049.jpg

1885년 대통령에 당선된 클리블랜드는 48세였다.[14] 그런데 그가 이 때까지도 총각이었기에 영부인 역할은 여동생인 로즈가 대신했다. 그러나 이 해에 프랜시스에게 청혼하여 곧 이듬해 6월에 백악관에서 결혼했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 영부인으로 뉴욕의 웰스 칼리지를 졸업한 당시 나이는 만 21세. 당시 언론들은 대통령이 결혼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클리블랜드와 폴섬가의 친분을 알고 있어서인지 "분명 폴섬 가문의 미망인인 에마 폴섬이 상대겠지." 라고 예상했지만 정작 대통령 결혼식날에 대통령의 딸뻘 되는 아가씨가 나타난 것을 보고 당황했다고 한다.

젊은 프랜시스는 영부인이 된 후에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계속해서 받았고 인기와 평판도 나쁘진 않은 편이었는데 한편으론 당돌한 면도 있었던 모양이다. 한 일화를 소개하자면, 1888년 벤저민 해리슨에게 백악관을 내어 주었을 때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구와 장식들을 잘 관리해 주세요. 4년 뒤에 다시 돌아올 테니까요."

또한 클리블랜드가 아내를 구타한다는 정적들의 모함에 대해 직접 언론에 나서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로써 프랜시스는 최연소 영부인이라는 것 외에 직접 언론에 나서 공식해명을 한 최초의 영부인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나이차가 많은 결혼이었지만 부부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던 모양으로 2남 3녀의 자식을 두었다. 부부는 1897년 두 번째 임기를 마친 후 뉴저지의 프린스턴에서 살았으며, 1908년 클리블랜드가 세상을 떠나고, 6년 뒤 프랜시스는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 토머스 J. 프레스턴 주니어와 재혼했으며[15] 1947년까지 살았다. 프랜시스는 클리블랜드 사후 여성은 아직 참정권을 획득할 만큼 현명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며 여성 참정권 운동을 반대하기도 했다.[16]

7. 기타


[1] 고도비만이다. [2] 두 번째 임기에 도전하던 1892년 선거 캠페인 당시 연설. [3] 이로 인해 클리블랜드는 훗날 정계 진출 이후 무학으로 알려졌는데, 두 아카데미를 다닌 것을 감안하면 최소 고졸 정도는 되는 학력이다. 그럼에도 두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증명서가 없어 무학 취급을 받았다. 클리블랜드는 일생 동안 세 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학력을 입증할 서류(졸업장 등)를 제시하지 못했다. 다만 이 점이 정치적 약점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는데, 19세기까지 미국 정치권에서는 유력 정치인의 무학 이력이 저학력이 아닌 자수성가의 증거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번의 대선 내내 상대 정당인 공화당 인사들은 이를 꼬투리 잡지 않았다. [4] 미국 역사상 '독학'으로 학업을 마친 대통령 중 한 명이다. [5] 이 사형 집행 이력으로 인해 훗날 공화당 정적들에게 '버팔로 시의 교수형 집행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6] 공화당은 높은 관세를 부과하여 미국의 산업을 지키는 보호무역을, 민주당은 관세를 인하하고 국가 간 교류를 촉진하는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7] 양육비를 지급받으며 자란 이 아이는 훗날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8] 클리블랜드 자신의 정치적 본거지인 뉴욕주에서조차 단 575표차(0.05%p차)로 승리했다. [9] "Though the people support the government; the government should not support the people." [10] 앤드루 잭슨의 창당 당시만 해도 농민 등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이었고 이때문에 노예제를 옹호한 적도 있었으나,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후 남부의 지지를 얻긴 해도 북부 출신 친자본가 인사들이 장악한다. 클리블랜드도 그 중 하나. 이때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기껏 보호무역과 자유무역 논쟁 정도였다. [11] 보빙사 일행이 처음 미국 대통령을 만난 건 전임이었던 체스터 A. 아서 시기. [12] 반대로 장녀 루스는 아버지가 낙선했지만, 재선을 준비하던 시절(23대 벤저민 해리슨 시절)에 태어났다. 그나마 차녀 에스터와 3녀 매리언이 아버지의 재선 시절에 태어났으며, 딸들 모두 백악관에서 살았던 건 같다. [13] 영문 성명은 Frances Folsom Cleveland. 생몰년도는 1864년 7월 21일 ~ 1947년 10월 29일. [14] 당시 기준 율리시스 그랜트 전 대통령 이후 간만에 당선된 40대 대통령인 셈이다. 물론 이전에 가필드가 있긴 했지만, 가필드는 임기 중 사망. [15] 미 대통령의 미망인이 재혼한 첫번째 사례기도 하다. 2번째는 재클린 케네디. [16] 참고로 미국에서의 여성 참정권은 소위 진보 시대라 불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각 주에서 점진적으로 실현되다, 1920년 미국 수정 헌법 제19조의 통과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7] 클리블랜드와 태프트의 중간에 재임한 대통령들 중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비만에 속하기 때문에(다만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운동을 좋아했다는 일화나 각종 기행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한 비만이 아닌 체지방과 근육량이 모두 평균 이상으로 많은 경우로 보인다.) 중간의 벤저민 해리슨을 제외하면 1881년부터 1913년까지 거의 뚱뚱보 대통령들만 재임한 셈이다. [18]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으나 이 당시만 해도 민주당은 보수 성향이 강했기에 클리블랜드가 노동운동에 비판적이었던 것과 달리, FDR은 뉴딜정책으로 지금의 리버럴 성향 민주당을 만드는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