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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제2대 | 초대2 | 제4대 | 제4대 |
프레더릭 뮬렌버그 (1대,3대) |
조너선 트럼불 주니어 (2대) |
프레더릭 뮬렌버그 (1대,3대) |
조너선 데이턴 (4대,5대) |
시어도어 세즈윅 (6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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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7대2 | |
나다니엘 메이컨 (7대,8대,9대) |
조셉 브래들리 바넘 (10대,11대) |
헨리 클레이 (12대,13대,14대,15대,16대,18대) |
랭던 체브스 (13대) |
헨리 클레이 (12대,13대,14대,15대,16대,1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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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 제10대 | 제7대3 | 제9대2 | 제11대 | |
존 W. 테일러 (16대,19대) |
필립 펜들턴 바버 (17대) |
헨리 클레이 (12대,13대,14대,15대,16대,18대) |
존 W. 테일러 (16대,19대) |
앤드루 스티븐슨 (20대,21대,22대,23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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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존 벨 (23대) |
제임스 K. 포크 (24대,25대) |
로버트 M. T. 헌터 (26대) |
존 화이트 (27대) |
존 휘스턴 존스 (2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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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제21대 | |
존 웨슬리 데이비스 (29대) |
로버트 찰스 윈트롭 (30대) |
하웰 콥 (31대) |
린 보이드 (32대,33대) |
너새니얼 P. 뱅크스 (34대) |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제26대 | |
제임스 로렌스 오르 (35대) |
윌리엄 페닝턴 (36대) |
갈루샤 A. 그로우 (37대) |
스카일러 콜팩스 (38대,39대,40대) |
시어도어 M. 포메로이 (4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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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
제임스 G. 블레인 (41대,42대,43대) |
마이클 C. 커 (44대) |
새뮤얼 J. 랜달 (44대,45대,46대) |
조셉 워렌 키퍼 (47대) |
존 G. 칼라일 (48대,49대,50대) |
|
제32대 | 제33대 | 제32대2 | 제34대 | 제35대 | |
토마스 브래킷 리드 (51대,54대,55대) |
찰스 프레더릭 크리스프 (52대,53대) |
토마스 브래킷 리드 (51대,54대,55대) |
데이비드 B. 헨더슨 (56대,57대) |
조셉 거니 캐넌 (58대,59대,60대,61대) |
|
제36대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챔프 클락 (62대,63대,64대,65대) |
프레더릭 H. 질레트 (66대,67대,68대) |
니콜라스 롱워스 (69대,70대,71대) |
존 낸스 가너 (72대) |
헨리 토마스 레이니 (73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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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제43대2 | |
조 번스 (74대) |
윌리엄 B. 뱅크헤드 (74대,75대,76대) |
샘 레이번 (76대,77대,78대,79대,81대,82대,84대,85대,86대,87대) |
조셉 W. 마틴 주니어 (80대,83대) |
샘 레이번 (76대,77대,78대,79대,81대,82대,84대,85대,86대,87대) |
|
제44대2 | 제43대3 |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
조셉 W. 마틴 주니어 (80대,83대) |
샘 레이번 (76대,77대,78대,79대,81대,82대,84대,85대,86대,87대) |
존 W. 매코맥 (87대,88대,89대,90대,91대) |
칼 앨버트 (92대,93대,94대) |
팁 오닐 (95대,96대,97대,98대,99대) |
|
6 제48대 | 제49대 | 제50대 | 제51대 | 제52대 | |
짐 라이트 (100대,101대) |
톰 폴리 (101대,102대,103대) |
뉴트 깅리치 (104대,105대) |
데니스 해스터트 (106대,107대,108대,109대) |
낸시 펠로시 (110대,111대,116대,117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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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대 | 제54대 | 제52대2 | 제55대 | 제56대 | |
존 베이너 (112대,113대,114대) |
폴 라이언 (114대,115대) |
낸시 펠로시 (110대,111대,116대,117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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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존슨 (11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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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클레이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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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9대 국무장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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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eaa7a><colcolor=#fff> 출생 | 1777년 4월 12일 | ||
미국 버지니아주 하노버 | |||
사망 | 1852년 6월 29일 (향년 75세) | ||
미국 워싱턴 D.C.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재임기간 | 제7대 연방하원의장 | ||
1811년 3월 4일 ~ 1814년 1월 19일(1차) | |||
1815년 3월 4일 ~ 1820년 10월 28일(2차) | |||
1823년 3월 4일 ~ 1825년 3월 3일(3차) | |||
제9대 국무장관 | |||
1825년 3월 4일 ~ 1829년 3월 4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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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EAA7A><colcolor=#ffffff> 묘소 | 렉싱턴 묘지 | |
부모 |
아버지 존 클레이 (1781년 사별) 어머니 엘리자베스 클레이[1] |
||
의붓아버지 헨리 왓킨스 (재혼) | |||
형제자매 | 친형제 8명[2] | ||
이부형제 7명 | |||
배우자 | 루크레티아 클레이[3] (1799년 결혼) | ||
자녀 |
5남6녀[4]
|
||
학력 | 윌리엄 & 메리 대학교 ( 법학 / 학사) | ||
정당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국민공화당|국민공화당 ]]→ |
||
의원 선수 | 6 (연방하원) | ||
5 (연방상원) | |||
의원 대수 | 11, 12, 13, 14, 15, 16, 18 (연방하원) | ||
9, 10, 22, 25, 31 (연방상원) | |||
지역구 |
켄터키 5구 (제11대 / 1811 ~ 1813) →2구 (제12-16대 / 1813 ~ 1821) →3구 (제18대 / 1823 ~ 1825) (연방하원) |
||
켄터키 (연방상원) | |||
경력 |
버지니아주 법원 서기 윌리엄 & 메리 대학교 조지 와이스 교수 비서 버지니아 변호사 자격 취득 켄터키 변호사 자격 취득 트란실바니아 대학교 교수 켄터키 주하원의원 제9대 연방상원의원 (켄터키 / 민주공화당) 켄터키 주하원의장 제10대 연방상원의원 (켄터키 / 민주공화당) 제11대 연방하원의원 (켄터키 5구 / 민주공화당) 제7대 연방하원의장(1차) 제12대 연방하원의원 (켄터키 2구 / 민주공화당) 미영전쟁 평화회담 위원 제13-16대 연방하원의원 (켄터키 2구 / 민주공화당) 제7대 연방하원의장(2차)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제18대 연방하원의원 (켄터키 3구 / 민주공화당) 제7대 연방하원의장(3차) 제9대 국무장관 18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제22-24대 연방상원의원 (켄터키 / 국민공화당) 제25-27대 연방상원의원 (켄터키 / 휘그당) 1844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제31·32대 연방상원의원 (켄터키 / 휘그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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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 누적 임기 10년 196일로, 미국에서 2번째로 오래 재임한 연방하원의장이다.[5]19세기 민주당 vs 휘그당( 공화당의 전신), 남부 vs 북부의 대결 구도에서 휘그당을 이끌며 남북 전쟁 이전의 미국사에서 콩라인급 정치인 중 가장 중대한 영향을 끼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1820년대 이래 1850년대까지 감초처럼 활약했다. 미국 정치인들 중 인지도가 웬만한 대통령보다 높을 정도인 네임드급 정치인으로, 대선에도 3번이나 출마했었다.[6]
여러 중요한 타협안을 제시해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기에 그가 얻은 별명은 "타협의 명수(Great Compromiser)". 그의 동료 의원이었던 대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와 전직 부통령인 존 C. 칼훈(John C. Calhoun)과 함께 "불멸의 트리오(Immortal Trio)", "위대한 삼각동맹(Great Triumvirate)"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57년에는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가 주도하는 상원위원회에 의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5명의 상원의원'의 일원으로서[7]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
2. 초기 생애
버지니아주 하노버 카운티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법률의 뛰어난 이해력을 보여준 그를 의붓아버지[8] 조지 위드가 눈여겨 보고 당시 법무장관 로버트 브룩에게 정식으로 법률 교육을 받게끔 했다. 그리고 클레이는 1797년 법률 사무소를 설립했다.법률가로 있으면서 그는 명성을 높이게 되었고 결국 1803년 켄터키 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어른의 사정으로 그 자리에 오래있진 못했지만 켄터키의 노예들의 점진적 해방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런 그의 노력은 그가 죽을 때까지 빛을 못 보게 된다. 켄터키 주는 노예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그 원인에는 두차례(1820년, 1850년)나 남북부 타협에 나선 그의 행동이 결정적이었지만.
1806년 켄터키 주 상원의원을 시작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된다.[9] 물론 이때 했던 약속이 있어서 3개월만(12월 말 승계, 다음해 3월 초 퇴임)에 그만뒀지만 여하간 말 그대로 데뷔 때부터 젊은 정치 엘리트였던 것이다.
3. 정치 인생
3.1. 미주리 협정
잠시 켄터키 주 의회 하원의장으로 있다가, 데뷔 5년 만에 연방 하원의장[10], 상원의원[11] 등을 거치며 점차 거물로 커가던 그는 1820~1821년 미주리 협정(Missouri Compromise)을 통과시켜 분쟁을 막았다는 평을 듣게 된다. 미주리를 12번째 노예주로 가입시키는 대신 1823년부터 독립주이자 자유주인 메인 주가 매사추세츠에서 분리된 것. 이로서 미봉책이지만 전쟁은 수십 년 늦춰졌다.사실 클레이 개인은 노예 해방을 추구했지만 그보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직업정신에 더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애초에 그 자체가 최대 60명의 노예를 거느렸던 플랜테이션 노예주였으니까. 하지만 죽기 전에 노예들을 풀어주었고, 이 시대 미국인들 상당수가 그렇듯 개인은 선량했던 모양이다[12] 무하마드 알리다. 무하마드의 출생 시 이름이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였는데, 그가 뒷날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우리가 아는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달게 된 것이다.]. 하지만 노예 해방 소송(Slave freedom suit) 등에 분쟁을 빚기도 했다.
3.2. 1824년 대선, 캐스팅 보더가 되다
그리하여 그는 1824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당시 후보는 앤드루 잭슨, 존 퀸시 애덤스, 윌리엄 크로퍼드 등이었다.[13]하지만 이 선거는 누구도 선거인의 과반을 획득하지 못했고 결국 의회로 넘어가게 되는데 가장 선거인을 적게 얻은 클레이는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고 2등 득표를 한 존 퀸시 애덤스를 지지하여 1등인 앤드루 잭슨을 엿먹였다.[14]
그리고 그 대가로 애덤스 정권에서 그는 국무장관으로 발탁된다. 당연히 잭슨은 이걸 두고 더러운 거래라며 맹비난한다. 근데 의미심장한게 헨리 클레이는 자신의 선거인단을 고향인 켄터키, 미주리, 그리고 대선의 승부가 갈린다는 오하이오에서 얻었다.
3.3. 두 번의 대선에서 낙선하다
그러나 다음 대선인 1828년 선거에서 잭슨이 민주당으로 갈라져 나와 승리하자, 그는 대통령이 된 잭슨과 사사건건 충돌하게 된다. 예를 들면 클레이의 주도를 통과시킨 법안을 잭슨이 거부하거나 합중국 은행을 없애려는 잭슨을 막기 위해 은행권 대출을 막게끔 한다.[15] 1831년 상원의원에 당선된 그는 1832년에는 아예 국민공화당을 차리고 후보로 출마해 잭슨의 재선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클레이는 37.4%로 득표하며 매사추세츠와 고향 켄터키 정도에서만 승리하며 대패했다. 이후 절차부심한 클레이는 앤드루 잭슨을 반대하는 세력을 통합해 휘그당을 세운다.1836년과 1840년은 윌리엄 해리슨에 밀려 후보 지명에 실패하게 되며, 1844년 드디어 다시금 대통령 후보가 된다. 상대당 후보는 제임스 포크로 이 때까지만 해도 잭슨의 지지로 후보가 된 낙하산이란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게 당시 포크는 테네시 주지사 선거에 2번이나 낙선한 상태였기 때문.
하지만 포크는 당시의 대세에 걸맞게 명백한 운명을 내세워 미국의 적극적 영토 확장을 추구했고,[16] 클레이는 전쟁을 유발할 것이라고 하면서 반대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쨌건 당시 시대적 흐름을 따른 포크가 간발의 차(49.5% vs 48.1%. 170명 vs 105명)로 당선되었는데, 이번에도 클레이는 오하이오와 북동부 해안 상당수 지역에서 이겼지만 승기를 잡지 못했다.
3.4. 마지막 영광, 1850년의 타협안
결국 대통령 후보보다는 의회에 더 익숙했던 그는 상원의원으로 복귀하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임기(임기 중 사망했다)였고, 동시에 그가 빛을 발하는 마지막 순간이 된다.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얻어낸 새 영토의 노예제 허용여부를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이 빚어지자 그는 1850년의 타협안을 제시하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편입한다.
2) 유타 주와 뉴멕시코는 주민투표에 의하여 노예주의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3) 수도 워싱턴 D.C.의 노예제는 계속 허용하되, 노예 시장을 없앤다.
4) 텍사스의 일부(36도 30분 이북 선)를 뉴멕시코 준주에 양도하고, 정부는 그 대가로 텍사스 주에 멕시코와의 전쟁에서부터 나온 비용 1000만 달러를 부담한다.
5) 도망노예 단속법을 강화한다.
6) 이 타협안은 주간의 노예 무역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2) 유타 주와 뉴멕시코는 주민투표에 의하여 노예주의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3) 수도 워싱턴 D.C.의 노예제는 계속 허용하되, 노예 시장을 없앤다.
4) 텍사스의 일부(36도 30분 이북 선)를 뉴멕시코 준주에 양도하고, 정부는 그 대가로 텍사스 주에 멕시코와의 전쟁에서부터 나온 비용 1000만 달러를 부담한다.
5) 도망노예 단속법을 강화한다.
6) 이 타협안은 주간의 노예 무역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타협안은 남북 모두에게 불만을 샀다. 서로에게 불리한 점이 있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타협안을 통과시킨 직후 결핵으로 인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며, 1852년 사망한다.
사후 렉싱턴의 그의 집은 박물관이 되었다고 한다.
4. 여담
- 공교롭게도 전쟁과 악연이 많았다.
- 무하마드 알리의 먼 조상이 헨리 클레이의 노예였기 때문에 이슬람식으로 개명하기 전에는 성이 클레이였다.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806 |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 켄터키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58 (-%) | 당선 (1위) | 초선 |
181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켄터키 제5구 | 무투표 당선 | |||
181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켄터키 제2구 | 3,164 (100.00%) | 재선[20] | ||
181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무투표 당선 | 3선[21] | |||
1815 | 미국 연방하원의원 보궐선거 | 무투표 당선 | 4선 | |||
181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2,493 (57.58%) | 5선 | |||
1818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1,633 (100.00%) | 6선 | |||
182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켄터키 제2구 | 2,992 (100.00%) | 7선 | ||
182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국민공화당| 국민공화당 ]]
|
1,438 (100.00%) | 8선 | ||
미국 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2 (0.77%) | 낙선 (6위) | |||
미국 대통령 선거 | 47,532 (13.06%, 37명) | 낙선 (4위) | ||||
183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켄터키 | 무투표 당선 | 당선 (1위) | 재선 | |
1832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484,205 (37.42%, 49명) | 낙선 (2위) | ||
183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켄터키 |
|
무투표 당선 | 당선 (1위) | 3선[22] |
1844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1,300,004 (48.08%, 105명) | 낙선 (2위) | ||
1849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켄터키 | 92 (67.15%) | 당선 (1위) | 4선[23] |
[1]
혼전성은 허드슨
[2]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은 클레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3]
혼전성은 하트
[4]
1835년까지, 6명의 딸은 모두 사망했다.
[5]
1위는 제43대
샘 레이번 의장으로, 17년 이상을 하원의장으로 지냈다.
[6]
한국 현대사에 굳이 빗대면
김종필 전 총리에 빗댈 수 있다. 중부 지역의 지지를 받아, 자력으론 대통령이 될 수 없었지만, 약세 후보와 연대하여 내각의 서열 2위 자리를 얻었고, 의회에서 오래 활동하며 중요한 중재안들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7]
나머지는
대니얼 웹스터,
로버트 A. 태프트,
로버트 M. 라폴레트,
존 C. 칼훈이다.
[8]
그의 친아버지는 4살 때 사망한 상태였다.
[9]
사실 이건 당시 상원의원 브레킨리지가 국무장관이 됨에 따라 자리가 빈 것을 그가 채운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의 나이는 29이었기에 피선거권 연령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가 취임 전에 30세가 되면서 문제가 해결됐지만.
[10]
1811~14, 1815~20, 1823~25. 연달아서 15년, 햇수로는 10년간, 서른 살 때부터 마흔 다섯 살 때까지 하원의장을 했다는 이야기다.
[11]
당선 직후에 관두고, 또 잠시 보궐승계해서 1810년 잠시하다 관두고, 이후로 하원의장으로 활약하다가 1831년부터 1842년까지 재선하고, 대통령에 출마해서
제임스 포크와 싸워 낙선해서 잠쉬 쉬었다가, 1849년부터 죽을 때까지 3년을 더했다.
[12]
여담으로 헨리 클레이 덕분에 자유를 얻은 노예들 중 한 사람의 후손이 바로 전설적인
권투선수인
[13]
참고로 이 시기에는 정당이
민주공화당 하나 뿐이었다. 덕분에 당내 계파 싸움으로 다음 선거에서는 두 쪽 나지만.
[14]
자신의 성향이 잭슨보다는 애덤스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생각이 맞았다는게 입증된다.
[15]
결국 이건 1837년의 공황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16]
가장 대표적인게
오리건 지역의 미국 영토를 54º40'(
알래스카 바로 밑이다.)까지 끌어올리자고 주장했던 것. (이는 무산되었고
밴쿠버에 접한연안으로
캐나다는 태평양 출구를 얻게 되었다.) 그 외에도
텍사스 공화국 합병 등이 있었다.
[17]
하지만 당시 미국은 노예제를 두고 극심한 갈등에 휩싸였기 때문에 타협이 먹혀들 상황이 아니었다. 괜히 남북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던 것.
[18]
특히 5번 조항이 문제로 남부의 노예주들은 노예사냥꾼들을 보내서 북부 자유주를 유린하는 일까지 있었다. 북부 자유주로서는 자기네 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9]
그리고 둘 다 취임 직후 사망했다. 여담으로 간신히 대선후보가 된 1848년에는 단독후보여서 그랬다.
[20]
1814.1.19. 영국 주미 대사 임명으로 사직
[21]
영국 주미 대사로 주지사는 클레이가 국외에 있었기 때문에 자리가 공석이라고 선언했습니다.
[22]
1842.3.31. 사직
[23]
1852.6.24.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