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요 정당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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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g Party | |
<colcolor=#1995D0,#fff><colbgcolor=#f5f5f5,#222> 창당 | 1833년 |
전신 | 민주공화당 (반잭슨파), 연방당 |
통합한 정당 | 국민공화당, 반메이슨당 |
해체 | 1856년 (23년) |
후신 | 공화당, 무지당, 민주당 (일부) |
당색 |
담황색 (#F0DC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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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1995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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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 |
반잭슨주의 빅텐트 보수주의 ( 미국) 전통적 보수주의 ( 미국) 중상주의 ( 미국 시스템) 보수자유주의 의회민주주의 엘리트주의 |
주요 지도자 |
헨리 클레이 대니얼 웹스터 윌리엄 헨리 해리슨 재커리 테일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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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미국에 존재했던 정당. 제2정당제[1] 시기 민주당과 함께 보혁구도를 이루었다.휘그당이라는 이름은 이 당의 사실상 모든 것을 함께 한 헨리 클레이가 붙인 것으로, 영국의 휘그당에서 따온게 맞다. 클레이는 앤드루 잭슨을 절대군주로, 휘그당을 절대군주를 견제하는 의회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칭하며 왕정의 이익을 수호하는 영국 토리당(현 보수당)에 맞선 영국 휘그당에서 이름을 따다 붙였다. 두 당은 시장의 원리를 중시하는 등 어느정도 비슷한 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영국 휘그당은 보혁구도에서 진보 포지션이었고 미국 휘그당은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보수 포지션이었다.
2. 역사
2.1. 연방당의 붕괴와 민주공화당의 분열
연방당은 19세기 초반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주장하며 주의 권리를 부르짖던 민주공화당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 해밀턴의 사망과 토머스 제퍼슨의 높은 인기, 연방당의 중앙은행 설립 정책을 수용한 민주공화당의 지지층 확대 등으로 인해 연방당은 구심점을 잃고 제퍼슨의 퇴임 이후에도 민주공화당의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에게 정권을 내어줬다. 뉴욕주지사 루퍼스 킹은 마지막 발악으로 1816년 대선에서 제임스 먼로에 대항해 출마했으나 그야말로 대참패했고, 이후 연방당은 사실상 붕괴 수순에 이른다. 1817년 먼로의 집권으로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민주공화당의 일당우위제가 이루어진다.[2]그러나 일당우위제는 얼마 안가 붕괴될 수 밖에 없었고,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식 지명을 얻고 출마한 윌리엄 H. 크로포드에 반발해 같은 민주공화당 소속이었던 존 퀸시 애덤스, 헨리 클레이, 앤드루 잭슨 모두가 출마했다. 4파전의 승자는 아무도 없었고 모두 선거인단 과반수 확보에 실패해 의회로 대통령 지명권이 넘어갔다. 이때 앤드루 잭슨은 4명의 후보 중 가장 많은 득표를 얻었고 선거인단도 가장 많이 확보했지만, 앤드루 잭슨의 성품을 개인적으로 매우 혐오하였던 헨리 클레이가 애덤스를 지지하면서 의회 표결 결과는 뒤집혔고 존 퀸시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다혈질 성격인 잭슨은 선거 결과를 참지 못하고 클레이와 애덤스의 타협을 미국 역사상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거래라고 부르며 선거 불복에 나섰다. 민주공화당은 그 즉시 잭슨의 선거 불복을 지지하는 세력과 애덤스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헨리 클레이와 같이 애덤스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주로 북동부 혹은 중부 출신의 구 연방당 출신 인사였다. 반면, 존 C. 칼훈 등 남부의 정치가들은 애덤스의 경제적 내셔널리즘에 반대해 잭슨에 붙었다.
애덤스를 지지하는 민주공화당 내 파벌은 "애덤스의 사람들"로 불렸다. 이들은 18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애덤스의 재선을 지지했지만, 민주당을 창당해 독자출마를 감행한 앤드루 잭슨에게 크게 밀렸다. 잭슨의 압도적인 당선은 국회 내 반잭슨주의자들의 단결을 촉진했고, 잭슨에 대항해 국민공화당이라는 정당을 세웠다.[3]
2.2. 잭슨 행정부 시절의 개편
앤드루 잭슨 행정부는 잭슨의 즉흥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큰 위기에 자주 내몰렸으며 국민공화당의 주요 지도자들은 잭슨의 민주당이 금방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트들은 그렇게 생각했을지언정, 국민들은 잭슨을 확고하게 지지했으며, 1832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잭슨의 압도적인 재선으로 끝났다. 헨리 클레이가 반잭슨 후보로 출마하긴 했으나 반메이슨당, 무효당 등 제3지대 세력이 덩달아 출마했고, 특히 남부 노예주의 88%가 노예제도에 대해 미묘한 입장을 보인 클레이 대신 잭슨을 지지했다. 이는 헨리 클레이가 이끌게 된 잭슨의 반대파가 통일된 전국정당을 세워야한다는 확고한 목적의식을 갖게 만들었다.잭슨 2차 행정부 시기, 반잭슨파와 친잭슨파는 다시 개편되었다. 잭슨은 1차 임기 만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연방법 무효화 사태를 일으켰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관세법에 저항해 연방법을 무효화시키려 하자, 잭슨은 "주의 권리"를 강조하는 민주당 출신 답지 않게 강력 대응을 시사했으며, 이는 남부에서 잭슨의 여론을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반면 대니얼 웹스터 등의 중립파는 친잭슨 쪽으로 기울었다. 헨리 클레이는 잭슨에 실망한 존 C. 칼훈을 끌여들여 잭슨-웹스터 대 클레이-칼훈의 동맹 구도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잭슨이 중앙은행에 예치된 연방정부 예금을 빼내고, 미국 제2은행의 기한을 연장시키지 않으면서 알렉산더 해밀턴의 유산이었던 중앙은행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헨리 클레이를 비롯한 해밀턴주의 세력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고, 대니얼 웹스터는 잭슨의 조치에 반발해 클레이와 동맹을 구성했다. 또한 버지니아 주의 존 타일러, 뉴욕의 윌리엄 H. 수어드 등 일부 민주당 및 제3지대 정당 인사가 클레이를 지지하며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 제한적으로나마 엘리트 이미지를 떨쳐내는데도 성공한다. 제2차 잭슨 행정부 시기, 클레이는 반메이슨당을 포함한 제3지대 세력을 지속적으로 통합하면서 광범위한 반잭슨 빅텐트 연합을 구성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런 배경 하에서 1833년, 국민공화당은 휘그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3. 마틴 밴 뷰런 행정부 시기
1833년 휘그당 창당으로 휘그당은 여러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8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의 정권 교체를 노렸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경제가 회복되면서 마틴 밴 뷰런 민주당 후보의 승리 확률이 급상승했다. 또한 휘그당은 민주당과 달리 전국적 조직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각 주별로 다른 후보자를 옹립했고, 북부의 윌리엄 헨리 해리슨, 남부의 휴 L. 화이트, 뉴잉글랜드의 대니얼 웹스터, 무효당의 지지를 받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윌리엄 P. 맨검 등으로 분열되었다.[4] 그 결과 마틴 밴 뷰런은 단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4,222표 차이로 승리하며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휘그당이 패배했다.그러나 이 패배는 휘그당에게 큰 이익이었다. 1837년, 밴 뷰런 대통령이 취임한지 단 5주만에 잭슨의 제2은행 폐지의 부작용으로 1837년 공황(Panic of 1837)이 일어나며 마틴 밴 뷰런 대통령의 인기가 수직하락했기 때문이다. 이 공황은 1873년 장기불황, 1929년 대공황, 1978년 오일쇼크, 2008년 대침체 등과 더불어 미국 역사상 최악의 경제공황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민주당은 휘그당에 비해 전국적으로 더욱 확고한 조직력과 지지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며 1840년 대선이 다가올수록 경기가 회복되면서 밴뷰런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1840년 대선을 앞두고 출사표를 던진 것은 휘그당의 당수 헨리 클레이와 정치력은 부족했지만 전쟁영웅으로서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은 윌리엄 헨리 해리슨, 마찬가지로 전쟁영웅인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이었다. 밴뷰런 대통령의 인기가 회복되면서 1840년 대선에 엘리트 이미지가 있는 클레이가 나가면 패배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휘그당 당원 사이에 퍼져있었고, 단순다수득표제로 인해 전국적으로 지지율이 고르게 높았던 클레이에게 룰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런 경유로 1839년 휘그당의 첫 전당대회에서 3위를 차지한 윈필드 스콧이 2위 해리슨을 지지하면서 해리슨이 클레이를 밀어내고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다.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남부의 지지도 얻기 위해[5] 민주당 탈당파 존 타일러를 부통령 후보로 임명했다. 해리슨은 효과적인 선거 캠페인으로 1840년 대선에서 밴 뷰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고 상하원 모두에서 휘그당이 과반을 차지하며 휘그당의 시대가 열리는듯 싶었다.
2.4.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급서와 1844년 대선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폭우가 내리던 취임식 날 폼을 잡고 몇시간에 걸친 연설을 하다가 걸린 감기가 급성폐렴으로 전이되어 30일만에 사망한다. 헨리 클레이는 해리슨의 취임식날만을 기다리며 국립은행 복원 등 야심찬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해리슨의 급서로 물거품이 되었다. 후임자 존 타일러는 민주당 탈당파였기 때문에 클레이가 추진한 많은 정책들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1841년 8월, 취임 4달만에 타일러는 클레이의 중앙은행 복원법을 위헌 소지가 있다며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에 반발한 내각 장관들은 내각총사퇴를 감행했다. 대니얼 웹스터만이 웹스터-애시버튼 조약(Webster-Ashburton Treaty)[6] 체결을 위해 내각에 잔류했고 나머지는 모두 사퇴했으며, 웹스터도 조약 체결 직후 사임하며 존 타일러는 고립무원이 되었다.1841년 9월, 타일러 행정부 수립 5개월만에 휘그당 지도부는 존 타일러 대통령을 제명하였다. 존 타일러는 배째라식의 태도로 나갔으며, 민주당 소속인 존 포터(James Porter)를 전쟁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당 출신 인사를 장관 자리에 앉히고 텍사스 합병을 추진해 노예주 수를 늘리면서 민주당 대통령이나 다름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휘그당은 타일러 대통령 탄핵안까지 계획했지만 명분이 부족했고 부결되면 역풍이 불 것을 우려해 탄핵안을 추진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타일러는 심각한 레임덕에 시달렸으며 대법관 인준안도 몽땅 부결되는 굴욕을 겪는다.
휘그당 역시 타일러 대통령의 무능함과 똥고집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842년, 휘그당은 중간선거에서 역대급의 참패를 당했는데, 기존 142석에서 절반에 가까운 70석을 잃고 72석만을 건졌으며 상원은 민주당 13석 획득 대 휘그당 4석 획득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다. 타일러 대통령은 이를 자신의 승리로 받아들였지만 민주당은 타일러가 안중에도 없었고 휘그당 강경파와 손을 잡고 타일러 때리기에 열중했다. 타일러는 1842년 중간선거 이후 거의 아무것도 못한채 백악관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84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그 어느때보다도 치열한 선거가 되었는데, 민주당과 휘그당 모두 야당으로서 팽팽하게 격돌했다. 휘그당은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을 다시 후보로 지명했고, 민주당은 앤드루 잭슨의 후계자인 다크호스 후보 제임스 K. 포크를 자당의 공식 후보로 지명했다.[7] 선거의 화두는 텍사스 합병과 영토 확장이었다. "54도 40분 아니면 전쟁!"이라는 공격적 슬로건을 내세운 포크와 달리, 클레이와 휘그당은 새로운 영토 확장이 새로운 노예주를 의미한다며 확장을 반대했다. 포크에 비해 클레이는 영토 확장이나 노예제 존속에 대해 모호한 의견을 내비쳤다. 미국 국민들은 포크의 입장에 더 공감했고, WASP 중심 정당이었던 휘그당에 대한 이민자들의 반감도 더해져 포크는 간신히 클레이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클레이의 정권 탈환은 물거품이 되고 휘그당은 여전히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
2.5. 포크 행정부와 1848년의 승리
클레이의 초기 우세를 뒤집고 힘겹게 출범한 포크 행정부의 길은 험난했다. 포크 행정부 기간 동안 국경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한 것도 이때였다. 휘그당은 전쟁에 격렬히 반발했으며, 추가적으로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얻은 새 땅을 노예주로 할 것인가 자유주로 할 것인가에 대해 또다시 논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헨리 클레이의 아들이 전사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헨리 클레이는 눈물을 삼키고 민주당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 민주당 심판을 외쳤고, 184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하원 의석 30여석을 잃어 소수당이 되는 참패를 당한다.그러나 1848년 대선을 앞두고도 휘그당은 안심할 수 없었다. 1847년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고, 여전히 휘그당은 영토 확장 문제와 노예제 문제에서 매우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며 중부와 북부의 지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840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헨리 클레이나 대니얼 웹스터와 같은 당의 지도자보다 대중에 잘 알려진 전쟁영웅을 대선 후보로 내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전쟁이 대승으로 끝나면서, 전쟁을 반대했던 후보를 내세운다면 선거에서 패배할 우려가 컸다. 그렇게 미멕전쟁에서 활약한 재커리 테일러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테일러는 남부 버지니아주 출신이었고 이는 휘그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었던 북부와 중부를 분노하게 했다. 또 정치 경력이 없는 사람이어서 휘그당과 상충되는 입장을 내비치곤 했다. 유권자들은 테일러의 노선에 혼란을 느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테일러는 남부 여러 주를 민주당으로부터 뺏어오면서 성공적인 선택이 되었다.
노예제로 분열된 것은 민주당도 마찬가지였다. 마틴 밴 뷰런 전 대통령은 노예제 반대와 영토 확장 반대의 신념을 가지고 자유토지당이라는 신생 제3지대 정당을 만들어 독자 출마를 감행했다. 이로 인해 북부 민주당 조직이 분열되었고, 재커리 테일러는 북부 중 중서부(북서부)에서 모두 패했지만 남부 선거인단의 과반수를 가져갔고, 북동부에서는 뉴햄프셔와 메인을 제외한 모든 주를 이기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6. 노예제 갈등, 혼란의 1850년대
1850년대 들어 노예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민주당 남부파와 휘그당 남부파는 노예제 존속을 요구하고 있었고, 휘그당 북부파는 노예제의 점진적 혹은 단계적 폐지를 지지했다. 휘그당은 노예제 문제에 있어 확고한 입장을 취하지 못했고, 노예제 존속을 지지하는 남부의 목화솜 휘그당원(Cotton whigs)과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북부의 양심 휘그당원(Conscience whigs)으로 쪼개졌다.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연방이 쪼개지면 안된다고 보는 입장이었고, 노예제 문제에 대해 주로 폐지론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이는 테일러가 버지니아 출신 노예 소유주여서 친노예제 입장일 거라 믿었던 남부 노예제 지지자들에게 있어 큰 배신이었다. 헨리 클레이는 타협을 지지했다. 한편 대니얼 웹스터는 타협을 지지하긴 했으나 비교적 노예 폐지론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새디어스 스티븐스 등 당의 북부 급진파는 더욱 강경한 즉각적 노예제 폐지 주장을 내세웠고, 남부파는 민주당과 다름이 없는 노예제 존속안을 지지했다. 이런 다양한 이해관계가 겹쳐 휘그당이 분열되는 와중에 테일러 대통령은 상한 우유와 체리를 과식하다 식중독으로 급서, 밀러드 필모어가 대통령 직위를 계승한다.
필모어는 계파 안배로 북부 유권자들과 대니얼 웹스터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부통령 후보 지명을 받은 뉴욕 출신이었지만 노예제 문제에 관해서는 타협파 입장이었다. 필모어 대통령의 힘을 얻은 클레이는 1850년 타협안(Compromise of 1850)을 1850년 9월 통과시켰다. 이 타협안은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편입하되, 뉴멕시코, 유타, 네바다, 캔자스와 같이 새로 편입되는 주는 주민투표를 통해 노예제 존속 여부를 결정하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 타협으로 도망노예법이 강화되어 북부 자유주로 도망친 노예를 다시 남부로 잡아오는 것이 완전히 합법화되었다.
이 타협은 오랫동안 의회를 주도한 헨리 클레이, 대니얼 웹스터가 머리를 맞대어 만든 최후의 타협안이었다. 한편, 의회 삼두정의 다른 한 사람인 칼훈은 연설문 대독까지 시키며 타협안에 반대해 미국의 분열상을 보여주었다. 2주 후 칼훈은 숨을 거두었으며, 2년 내에 클레이와 웹스터 모두 세상을 떠났다. 칼훈 사후 타협안은 스티븐 A. 더글러스의 손질을 거쳐 겨우 통과되었다. 어찌 어찌 이루어진 임시 방편의 1850년 타협은 애초에 의원들에게 타협안 전체에 대한 동의를 물은 것이 아니라 타협안을 구성하는 법안들 각각에 대해 어떻게든 과반수 표를 긁어모은 것이었기에 출범과 동시에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1850년 타협은 남부에게는 "너무 북부에게 관대한 타협"이었고 북부에게는 "도망노예법을 강화한 비인격적인 타협"이었다.[8]
2.7. 해체와 그 이후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이 적절하게 노예제 논란에 대처하지 못하며 휘그당은 더욱 분열되었다. 필모어 대통령은 북부 휘그당보다는 남부 민주당에게 더 환호를 받았고, 1852년 대선을 앞두고 휘그당은 필모어의 재선을 거부했다. 윌리엄 H. 수어드를 비롯한 북부의 타협 반대 폐지론자들은 윈필드 스콧 장군을 후보로 밀었다. 하지만 스콧도 민주당의 강령과 별 다를바 없는 캠페인을 벌였고, 선거 결과 50% 대 43%로 스콧은 프랭클린 피어스에 참패했다.스콧의 낙선은 사실상 휘그당의 해체를 의미했다. 휘그당의 지도자들은 휘그당 분열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얼마 안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논쟁이 다시 휘그당을 분열시키면서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캔자스 주가 투표를 통해 노예주/자유주 여부를 결정하게 되자, 북부와 남부에서 노예제 폐지파와 지지파 시민이 위장전입을 해 주민투표에 참여하는 막장사태까지 일어났고 노예제 존속 지지자와 폐지 지지자 간 패싸움도 일어나며 "피의 캔자스"라 불리는 전대미문의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대니얼 웹스터의 타협에 반대해 찰스 섬너를 상원의원으로 지지하며 이루어진 자유토지당과 휘그당 북부파의 연합은 전국적 단위로 발전했고, 이들은 "반 캔자스-네브래스카법 동맹"을 구성했다. 이 동맹은 1852년~1854년 사이 " 반대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후일 공화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으로 발전한다.
한편, 급증하던 아일랜드계 인구와 유대인 인구에 반대하는 극우 반이민 정당인 무지당이 많은 휘그당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무지당은 공화당으로 탈주하지 않고 버티고 있던 많은 여남은 휘그당원들마저 끌어당겼으며, 이 분열로 인해 1854년 중간선거에서 휘그당은 겨우 54석만을 얻는 참패를 당했다. 민주당도 83석 밖에 얻지 못했다. 무지당이 51석, 반네브래스카당과 공화당, 자유토지당이 합쳐서 36석을 얻었고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던 인디애나 주의 지역정당 "인디애나 인민당"[9]도 9석을 얻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다당제에 가까운 선거 결과였고 이 때문에 의장을 뽑는데만 113차례의 투표가 걸리는 촌극이 일어났다.[10][11] 이후 무지당은 1856년 대선 후보로 당과 별 관련이 없던 밀러드 필모어 전 대통령을 추대하였지만, 노예제 문제로 당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부 무지당은 당을 뛰쳐나와 공화당의 존 C. 프리몬트를 지지한다.
1854년 중간선거 이후 휘그당의 지도자들은 휘그당이 소생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당을 포기했으며, 휘그당의 잔존 세력은 1856년 대선에서 존 C. 프리몬트를 지지하는 북부 공화당과 밀러드 필모어를 지지하는 남부 무지당으로 나뉘었다. 휘그당의 분열로 1856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제임스 뷰캐넌이 당선되었으나, 프리몬트 지지자들은 필모어 지지자들을 혐오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둘이 단일화했더라도 뷰캐넌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나마 남은 휘그당의 부스러기들을 존 벨 전 하원의장이 수습해 1860년 대선에서 "입헌연합당"을 창당하지만, 남부 3개 주에서만 승리했다. 존 벨의 노예제에 대한 애매한 스탠스는 경계주 이북의 북부 전역에서도, 브레킨리지를 지지한 딥 사우스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해 오직 중남부 일대에서만 경쟁력을 가졌고, 북부에서는 링컨이나 스티븐 A. 더글러스의 유의미한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12] 노인층 이외의 연령대에서 지지를 끌어모으는 데 실패하여 노신사들의 정당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공화당이 급진 노예폐지론자 윌리엄 수어드와 새먼 P. 체이스가 아닌 온건 노예폐지론자 에이브러햄 링컨을 지명해서 유권자가 이탈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링컨의 당인 공화당은 같은 날 치러진 하원의원 선거에서도 승리하며 휘그당의 자리를 대체하는 정당으로 자리를 굳혔다. 존 벨의 입헌연합당에 소속된 남부 휘그당원들은 민주당으로 당을 옮기면서 휘그당은 1860년대 완전히 해체되었다.
휘그당의 해체 이후, 휘그당 출신의 많은 정치가들이 공화당에서 활동했고 일부 남부 휘그당원은 민주당으로 이동해 활동했다. 공화당은 전후 로스코 콩클링이나 스카일러 콜팩스 같은 휘그당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되긴 했으나 이들은 휘그당의 전통과 큰 접점이 없는 사람이었고, 1870년대에는 제임스 G. 블레인 같이 휘그당 출신이 아닌 순수 공화당 출신의 정치가들이 공화당의 지도자가 되면서 휘그당의 잔재는 사라지게 된다.
3. 이념
연방당과 여러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중상주의를 표방한 연방당과 마찬가지로 휘그당도 중상주의를 표방했으며, 해밀턴의 숙원사업이었던 중앙은행 설치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클레이는 해밀턴의 목표 의식을 계승해 "미국 시스템"(American system)이라는 중요한 경제 정책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 외에는 대체로 보호무역을 지지했으며,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민주당에 비해 회의적이었다. 해외 영토 팽창에 관해서도 비교적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일관된 입장은 없었고 지역별로 정치인 간의 입장이 크게 다른 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클레이가 평생에 걸쳐 추진한 중앙은행 재설치는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후대의 민주당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 때에 가서야 연방준비위원회(FED)라는 이름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일반적인 보수 - 개혁의 구도로 보았을 때, 중상주의적 입장에서 대도시 상인과 기업인의 이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친기업, 금융 보수주의 성향이었고, 민주당의 농민 기반 포퓰리즘에 맞선 의회민주주의 중심의 엘리트주의적 면모가 강했다. 헨리 클레이나 대니얼 웹스터 같은 휘그당의 대표 인사부터 의회에서 평생 활동한 사람이었고 이 당에서 나온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성향이 애매모호하고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친금융적인 성향은 공화당으로도 계승되어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린백 화폐를 발행하며 중앙정부의 경제적 기능을 강화하는 모습으로도 표출되었고, 1873년 도금시대 도래 이후에는 더욱 노골적이게 되어 금본위제와 보호무역을 강경하게 옹호하는 보수우파 정당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13]
전반적으로 반잭슨주의, 반포퓰리즘, 엘리트주의 중심의 빅텐트 정당이었다보니 민주당에 비해 이념적 결속력이 약했고, 1840년을 제외하고는 대통령직, 상원 과반수, 하원 과반수를 동시에 차지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1824년부터 1860년까지 미국 정치는 민주당이 우위인 가운데 휘그당이 치고 올라오는 구도를 보였다.[14]
3.1. 노예제도에 대한 입장
이런 한계도 있었지만, 특히 노예제 문제에 대해 미묘한 스텐스를 취한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당의 지도자였던 헨리 클레이는 개인적인 신념으로 노예제도에 반대했고 점진적으로 노예가 해방되어야한다고 믿었던듯 하다.[15] 그러나 그 역시 노예를 수백명이나 부리는 노예주였고, 노예 해방보다는 연방의 결속에 더 관심이 많았다. 대니얼 웹스터는 클레이보다 더 보수적인 입장이어서 1850년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목화솜 휘그당원"에 속했고 이는 그의 지역구인 매사추세츠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역대 휘그당 대통령 중 노예제 폐지론자라고 볼만한 사람은 재커리 테일러 한명 뿐이고 나머지는 노예제도에 미묘한 입장을 취했고, 이것은 노예제도로 인해 급박해져가던 당시 정세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한마디로 노예제도에 대한 "애매모호한" 스텐스 때문에 휘그당은 그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찰스 섬너, 새디어스 스티븐스, 새먼 P. 체이스 등 급진 노예폐지론자 뿐 아니라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비교적 온건한 견해를 가진 노예제 폐지론자들마저 공화당이 창당되자 당을 깨고 우르르 달려갔고, 급격하게 노예제 찬성-반대의 균형이 기울자 남부 휘그당 잔존파는 미련 없이 당을 버리고 민주당에 붙어버리면서 노예제도에 대해 미묘한 입장을 취한 것이 휘그당에게는 엄청난 독이 되었다.
4. 지지 기반
휘그당의 지지 기반은 영국계 미국인이었다. 농민들의 지지를 받은 민주당과 달리 휘그당은 엘리트의 정당을 표방했고, 보스턴 브라민과 같은 뉴잉글랜드 상류층에게 주로 지지 받았다. 지역별 구도는 뚜렷하지 않았으며 몇몇 주를 제외하면 양당은 거의 모든 주에서 대등한 세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대체로 영국계 미국인이 밀집된 뉴잉글랜드를 기반으로 했으며, 헨리 클레이의 홈스테이트인 켄터키도 휘그당이 강세를 보인 지역 중 하나였다.미국 남부에도 일정부분의 지지 기반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노예제 폐지 문제에 있어 온건하거나 혹은 민주당의 노예제 폐지 반대론에 동조했다.[16] 켄터키, 테네시, 메릴랜드, 델라웨어 등 중남부 지역이 대표적이었다. 휘그당 남부파는 1850년대 민주당으로 대부분 당적을 옮겼다. 공화당은 휘그당의 잔재가 약간은 남아있었던 1870년대 초반까지 일부 남부주에서 연약한 기반을 유지하긴 했으나,[17] 재건 및 군정이 종료된 1876년 대선을 기점으로 남부를 완벽하게 잃었고 일러도 1928년, 늦으면 1990년대 중후반까지 남부를 다시 되찾지 못했다.
5. 선거 결과
5.1. 대통령 선거
연도 | 결과 | 후보자 | 득표수(득표율) | 선거인단 | |
대통령 | 부통령 | ||||
1836년 | 낙선 | 윌리엄 H. 해리슨 | 프란시스 그렌저 | 550,816표(36.6%) | 73/294명 |
휴 로슨 화이트 | 존 타일러 | 146,109표(9.7%) | 26/294명 | ||
대니얼 웹스터 | 프란시스 그랜저 | 41,201표(2.7%) | 14/294명 | ||
와일리 파선 맨검 | 존 타일러 | 0표(0%) | 11/294명 | ||
1840년 | 당선 | 윌리엄 H. 해리슨 | 존 타일러 | 1,275,390표(52.9%) | 234/294명 |
1844년 | 낙선 | 헨리 클레이 | 시어도어 프렐링후이슨 | 1,300,004표(48.1%) | 105/275명 |
1848년 | 당선 | 재커리 테일러 | 밀러드 필모어 | 1,361,393표(47.3%) | 163/290명 |
1852년 | 낙선 | 윈필드 스콧 | 윌리엄 A. 그레이엄 | 1,386,942표(43.9%) | 42/296명 |
6. 당내 주요 정치인
6.1. 대통령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9대 대통령
- 존 타일러 - 10대 대통령
- 재커리 테일러 - 12대 대통령
- 밀러드 필모어 - 13대 대통령
이후 대통령이 된 에이브러햄 링컨, 러더퍼드 헤이스, 체스터 A. 아서, 벤저민 해리슨은 정치 커리어를 휘그당에서 시작했다.
6.2. 부통령
6.3. 기타
- 헨리 클레이
- 대니얼 웹스터
- 윌리엄 H. 수어드
- 프란시스 그렌저
- 휴 로슨 화이트
- 윌리 퍼슨 맨검
- 테오도르 프레링훼이센
- 윈필드 스콧
- 윌리엄 A. 그레이엄
- 앤드류 잭슨 도넬슨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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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정당 |
■ 민주공화당, ■ 연방당, ■ 휘그당, ■ 사회당, ■ 반메이슨당, ■ 국민공화당, ■ 무효당, ■ 진보당 ( 1912년 · 1924년 · 1948년), ■ 자유토지당, ■ 국민민주당, ■ 주권민주당 | |
과거의 계파 | ■ 급진파 공화당, ■ 민주당 주전파, ■ 버번 민주당, ■ 비타협파, ■ 록펠러 공화당, ■ 뉴딜연합, ■ 보수연합 | |
( 중앙 정당 · 지역 정당 ) |
[1]
1824년부터
1856년 사이 휘그당-민주당 양당제를 의미한다.
[2]
먼로의 집권기 동안에는 야당이 딱히 존재하지 않았고 국론이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호감 시대(Era of Good Feelings)라고 불린다.
[3]
1824년부터 세력이 존재했지만 국민공화당이라는 이름이 붙은건 1828년 대선을 전후했고 1830년 즈음에 국민공화당이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4]
물론 밴 뷰런이 과반 선거인단을 얻지 못하면 결선투표 격인 하원 표결에서 세력을 합치면 되었으므로 실질적인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아니었다.
[5]
마틴 밴 뷰런이 노예제 폐지 지지 성향이라 남부에서 인기가 없었고 1837년 공황은 남부 목화밭의 상황을 그야말로 폐허로 만들기 충분했다.
[6]
메인 주와
뉴브런즈윅 주의 국경 분쟁을 처리하기 위한 중요한 조약이었다.
[7]
포크가 2번이나 테네시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했음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잭슨이 대타를 내보내 클레이와 리턴매치를 한거나 다름이 없었다. 당 내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마틴 밴 뷰런은 노예제에 대한 반대 입장 때문에 남부에서 끔찍하게 인기가 없어서 지명에 필요한 충분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해 포크가 타협 후보로 결정된 면도 있었다.
[8]
실제로 매사추세츠 주 휘그당 조직 중 일부는 대니얼 웹스터의 타협안에 반발해
찰스 섬너를 대체 상원의원으로 밀어주기도 했다.
[9]
올리버 P. 모턴, 헨리 S. 레인,
스카일러 콜팩스가 이끌었으며 민주당과 휘그당 양당의 폐지주의자들이 합쳐 만들었다.
[10]
무지당의
너새니얼 P. 뱅크스가 의장으로 당선되었고, 그는 북부 무지당 세력을 공화당으로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으며 남북전쟁에서는 연방군 장군이 되기도 했다.
[11]
역사상 이정도로 의장 뽑는데 오래 걸린적은 양당제가 확립된 이후로는 미국사에서 4차례 정도 밖에 없었는데, 1855년, 1859년, 2023년 1월과 2023년 10월 투표가 그것이다.
[12]
캘리포니아, 매사추세츠, 코네티컷을 제외한 모든 북부(비남부) 주에서 3% 미만의 득표율에 머물렀다. 유일하게 10%를 넘긴 매사추세츠는 부통령 후보 에드워드 에버렛이 매사추세츠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13]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노예제도에 대한 문제 때문에 1860년대 공화당을 진보로, 민주당을 보수로 두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휘그당의 보수성과 1890년대 금본위제 옹호를 연결하기가 어려워져서 미국사를 이해하는데 혼란이 생긴다. 이 시기
공화당 급진파는 노예제도 폐지, 사회적 소수자인 흑인 보호와 이를 위한 연방정부의 적극적 역할 옹호 등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진보주의적 면모가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산업주의-농본주의, 엘리트-포퓰리즘의 구도에서 휘그당-공화당 급진파-1890년대 공화당이 꾸준하게 보수 중상주의→산업주의를 표방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14]
남북전쟁 이후 이 구도가 뒤집혔다가, 1932년 대공황으로 다시 뒤집혔고, 197~80년대 레이건 혁명으로 민주당 강세가 약화되어 현재와 같은 공화-민주당의 대등한 구도가 만들어졌다.
[15]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이때 해방된 노예 중 한명이
무하마드 알리의 조상이다.
[16]
당시 휘그당 남부파는 민주당 북부파에 비해 노예제도에 긍정적이었다.
[17]
이마저도 남부 휘그당의 잔재보다는 흑인 해방노예들의 표와 재건 시대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카펫배거(carpetbagger)들에 힘입은 것이 컸고, 기존 남부 백인들로부터는 대부분 적대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