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지존파 至尊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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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강동은, 백병옥, 강문섭, 김현양, 문상록, 이경숙.[1] | ||
조직원 | <colbgcolor=#000><colcolor=#fff> 두목 | 김기환 |
부두목 | 강동은 | |
행동대장 | 김현양 | |
문상록 백병옥 강문섭 이경숙[2] 송봉욱[3] | ||
결성 | 1993년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 |
활동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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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 | 1993년 4월 ~ 1994년 9월 | |
검거 | 1994년 9월 21일 | |
죄목 |
강도살인 살인 특수강간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 범죄단체조직 범죄단체가입 총포, 도검, 화약류등단속법위반 시체은닉 시체유기 시체손괴 강간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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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량 | 이경숙[4] 외 전원 사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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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0년대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연쇄살인 조직.일반적으로 연쇄살인은 단독 범행 혹은 2인조가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3명 이상의 다수가 집단을 결성하여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은 극히 드문데 지존파는 구성원의 수가 무려 8명이었고 범행의 잔혹성과 지존파 검거후 조직원들의 반사회적인 발언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다.[5]
2. 명칭
사실 스스로 지칭한 조직명은 지존파가 아니라 마스칸으로, 야망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단어를 따서 지었다고 진술했다.[6]지존파라는 이름은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이마에 지존(至尊)이라고 쓰인 두건을 두르고 훈련을 했다는 것과 두목인 김기환의 별명이 '지존'이었던 것을 바탕으로 이들을 검거한 고병천 수사과장이 붙여준 이름이다. 수사과장이 말하길 마스칸이라는 이름은 외국어라 입에 달라붙지도 않았고 야망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7]
당시 언론은 이들이 홍콩 영화인 지존무상을 보고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도했고 홍콩 영화를 좋아하던 청소년들이 덩달아 욕을 먹었다. 여기에 표창원도 낚여서 자신의 저서인 '한국의 연쇄살인[8]'에 무협영화 같은 대중매체의 안 좋은 영향의 예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이들이 홍콩 영화를 보고 지존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 건 사실이며 실제로 파벌의 대장이 지존이었기 때문에 아예 무관하다고 볼수는 없다.
3. 결성
지존파의 결성 계기는 대학 입시 부정 사건에 분노하여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들을 벌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실 지존파는 두 번 결성되었다.1992년 말 김기환은 고소득자들의 돈을 갈취하는 범죄 조직을 결성할 계획을 세우자고 결심했다. 탄광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조모 씨에게 범죄 계획을 알려 주며 설득에 나섰다. 평소 조씨의 경제적 여건과 성정을 알고 있던 김기환은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조씨의 친구, 도박을 하며 알게 된 사람 3명을 포섭해 조직을 결성했다. 하지만 그 범죄 계획에 살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조직원들이 이를 꺼려 결국 해체되었다.[9]
첫 번째 조직 결성 실패 후 1993년 초 갈 곳이 없어진 김기환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탈퇴한 전 멤버의 소개로 '가희산'이라는 비밀 도박장에서 도박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김기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더 못 배우고 부자에 대한 증오심이 훨씬 강한 자들을 포섭하려 했고 실패 요인을 없애기 위해 대화술 관련 서적을 읽으며 더 철저하고 견고한 조직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 해 3월, 고향 후배인 강동은과 접촉해 그에게 범죄 계획의 일부를 조금씩 흘려가며 차분히 설득에 나섰고 자기 의지로 가담할 수 있게 1개월이라는 유예기간도 줬다. 이후 강동은이 적극적으로 찬성을 외치자 강동은의 교도소 동기로 함평에서 포커를 치다 만난 문상록, 후배 송봉우도 동의하여 세 사람은 조직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전주로 이동해 함께 생활하며 조직 결성과 범죄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강동은이 교도소 동기였던 백병옥을 떠올리고는 당시 천안에서 막노동을 하던 백병옥을 합류시켰으며 문상록은 같은 곳에서 일했던 강문섭을 강동은에게 소개해 포섭했다. 이주현은 같은 해 6월 평소 "은행 강도가 되고 싶다"던 김현양[10]을 김기환에게 소개해 조직에 합류하도록 했다.
이렇게 조직은 그 해 7월 포커판에서 김기환을 중심으로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송봉우를 축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그들은 모여서 세상이 오염된 이야기를 하며 "더러운 인간들을 청소해 버리자"고 결의한 다음 노동으로 1년간 2천만원을 모아서 아지트의 설계는 김기환이 했고 아지트를 짓는 것은 동생들이 했다고 한다. 범행 대상에 대해 이들은 '잘 먹고 잘 살고 몸에 힘 주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중학교도 못 나왔는데, 그들은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1억원 이상 쓰는 사람들이다."라나.
이미 한 번의 실패 경험이 있었기에 김기환은 조직의 유지에 굉장히 신경썼는데 평소 '배신한 자는 반드시 처단한다.', '잘 때 내 가슴을 열어 놓고 잘테니 나가고 싶다면 내 가슴에 칼을 꽂고 가라. 다만 그러지 못하면 지옥까지 쫓아가 죽일 것이다.'라고 하는 등 조직의 기강을 흔드는 자에게 용서란 없으며 조직에 합류한 이상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이후 부두목 강동은이 피해자 이OO가 탈출한 이후 식사 준비와 잡일 등을 시킬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여자친구인 이경숙[11]을 합류시켰다. 하지만 이경숙이 가담한 지 이틀 만에 지존파 전원이 검거되었으며, 그녀가 살인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 확인되어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12]
4. 강령
5. 조직원
지존파 | ||
김기환 (두목, 당시 26세) |
강동은 (부두목, 당시 22세) |
김현양 (행동대장, 당시 22세) |
문상록 (당시 23세) |
강문섭 (당시 20세) |
백병옥 (당시 20세) |
이경숙 (홍일점, 당시 23세) |
송봉우 (일명 송봉은, 향년 1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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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1994년 검거될 당시 기준 (송봉우 제외) |
- 이경숙[15] : 검거 당시 나이 23세(1971년 2월 20일생). 강동은의 여자친구이자 절도 전과 1범. 조직원들 중 홍일점이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다방을 운영하던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났고 모 여중 2학년을 중퇴한 후 가출했다. 1992년까지 대전에서 일하다가 영광으로 내려와 어느 작은 주점에서 접대부 생활을 시작했고 그러던 중 주점을 찾았던 강동은과 인연을 맺어 연인이 되었다. # 강동은이 엄청난 범죄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함구했으며 인질이었던 이OO가 탈출하자 강동은이 잡일과 요리를 해 줄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주점 사장에게 진 빚 1,600만 원을 대신 갚아 줘서 풀려난 뒤 여성 조직원으로 합류했다.[16] 그러나 합류한 지 이틀 만에 검거되었고 직접적으로 살인에 가담[17]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됨에 따라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1998년 석방되었으며 검거 당시 강동은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이후 그녀의 행적은 불명이고 암으로 사망한 것으로만 알려졌다. 지존파 조직원 중 유일하게 사형에서 제외되었다.
- 송봉우[18] 사망 당시 가장 막내로, 나이는 18세였다.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조직에 합류했다. 1993년 7월 초순 밤 강동은, 백병옥 등과 함께 범행 모의를 하다가 홀로 걸어가던 최미자를 발견하고 인근의 다리 밑으로 끌고 가 성폭행한 뒤 함께 있던 강동은, 백병옥도 최미자를 성폭행했다. 그 후 최미자의 처분을 두고 강동은 등과 함께 고민하다가 강동은이 김기환에게 상황을 보고 하면서 김기환, 김현양 등의 합류 후 살해 지시를 받아 살해 과정에 동참했다. 자신의 몹쓸 짓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꿈에 귀신이 나온다며 한동안 괴로워하다가 1993년 8월 조직의 자금통장에서 300만 원을 빼내 도주하던 중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붙잡혔다. 용서해 주겠다며 "단합대회를 하고 개나 잡아 먹으러 가자"고 회유하는 조직원들에게 속아 인근 야산으로 유인당했고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김기환이 태도를 바꾸며 캐묻자 용서를 빌었지만 김현양이 벽돌로 머리를 가격해 기절한 뒤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곡괭이 등으로 살해당했다.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고 불에 태워진 뒤 암매장을 당했다. 형제 관계는 2남 1녀 중 막내로, 형 송봉은과 누나 1명이 있었다.
6. 범죄 행각
6.1. 첫 번째 범행 ~ 아지트 완공 전
1993년 7월 초순 밤 11시경 충청남도 논산군[19] 두계역(현 계룡역) 부근. 송봉우, 강동은, 백병옥은 한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다가 퇴근 후 홀로 걸어가던 23세 은행원 최미자를 발견했다. 송봉우는 그녀를 인근 다리 밑으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 함께 있던 강동은과 백병옥도 강간에 동참했는데, 계획에 없던 범죄를 저지르고 난 후 고민하다가 강동은이 숙소에 있던 김기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김기환은 얼굴을 보인 이상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최미자를 살해할 결심을 했다. 김기환은 포터를 몰고 김현양, 강문섭과 함께 현장으로 가 최미자를 차에 싣고 숙소에서 삽을 챙긴 뒤 논산의 한 야산으로 이동했다. 김기환은 현장에 도착해 최미자를 강간하고 김현양에게도 강간하도록 지시한 뒤 "사람 죽이는 시범을 보여 준다"며 피해자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그 와중에 증거인멸하는 방법까지 가르치고 조직원들이 교대로 구덩이를 파도록 지시해 시신을 암매장했다. 그렇게 그들은 '살인 연습'을 했고 최미자는 첫 피해자가 되었다.조직원들은 호기롭게 조직에 들어왔지만 막상 살인을 저지르고 나니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최미자 살해의 원인 제공자이자 최연소 조직원이었던 송봉우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악몽으로 괴로워했다. 이를 견디다 못해 조직을 이탈하기로 결심한 그는 1993년 8월 조직의 자금을 모아둔 통장에서 현금 300만 원을 인출해 도주한다. 김기환은 송봉우가 도주한 지 두 시간 만에 사태를 파악하고 송봉우가 경찰에 밀고할 가능성도 있고[20] 자신의 조직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조직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송봉우를 살해하기로 한다. 김기환은 조직원들과 송봉우 포획 작전을 세운 뒤 송봉우의 누이로부터 송봉우가 거주하고 있는 친척의 집 주소를 얻어낸 후 송봉우에게 용서해 주겠다며 조직에 다시 합류할 것을 설득했다. 마음이 약해진 송봉우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조직으로 복귀했다. 조직원들은 송봉우에게 "단합대회를 하고 개나 잡아 먹으러 가자"며 한 야산으로 유인했는데, 형들을 믿었던 송봉우가 장소에 도착하자 김기환이 책임 추궁을 하기 시작했고 용서를 빌던 송봉우의 뒤통수를 김현양이 벽돌로 후려쳐 기절시킨 뒤 나머지 조직원들은 미리 준비한 곡괭이 등의 둔기로 무참히 폭행한 후 살해했다. 다만 첫 범행 때와는 달리 김기환이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아도 두목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조직원들은 알아서 경쟁적으로 살해 행위를 했고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불에 태운 뒤 암매장까지 했다. 이들은 조직을 배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목격했기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첫 살해 당시 느꼈던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고 죄책감도 없었다.[21] 심지어 송봉우 살해 후 태연히 개를 잡아 먹었고, 김기환은 추후 법정에서 송봉우 살해에 대한 진술을 할 때 "하루에 개 두 마리를 잡은 것에 불과하다"고 발언해 장내를 술렁이게 했다.
그 후 이들은 본격적인 범행에 착수하기 위해 당분간 아지트 건설을 목표로 돈을 모으는 데만 전념하기로 했다. 이들은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대전 일대에서 막노동을 해 모은 돈으로 김기환의 어머니의 집을 차근차근 살인을 위한 아지트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김기환은 가족들과 이웃에게 "어머니께 효도하기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살 집을 새로 짓는다"고 말했다. 그들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젊은 청년들이 성실하게 일한다며 흐뭇해했다. 설마 그들이 등 뒤로 그런 끔찍한 범행을 모의하고 있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1994년 6월 중순 김현양의 생일 당일 김기환은 김현양에게 생일 파티를 열어준다며 조직원들과 모처럼 회식을 했다. 그러던 중 불현듯 아는 선배의 집 보일러를 수리해 준다며 자리를 비웠다가 선배의 집에서 잠자고 있던 선배의 여중생 조카를 강간해 구속되었다.
두목의 부재에 강동은이 부두목이 되어 조직을 이끌었다. 아지트 완공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중심을 잡아줄 두목이 없자 이들은 지옥 훈련을 받기로 했다. 7월 중 일주일 가량을 지리산에서 칼 한 자루와 생수 한 병으로만 버티기로 한 것이다. 강동은은 뒤처지는 조직원이 있으면 "너도 봉은이처럼 잔디 이불 덮고 싶냐?"며 채찍질했다.
6.2. 아지트 완공 ~ 검거 전
1994년 7월 말, 살인을 위한 그들의 아지트가 완공되었다.[22] 그들은 이곳을 '아방궁'이라고 칭했다. 아지트 완공 전까지는 주민들의 접근을 막았다가 아지트가 완공되자 그들은 태연히 이웃 주민들을 초대해 집들이를 했다. 이들의 아지트는 요새처럼 아주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집 외벽 전체를 분홍색 페인트로 칠하고 담벼락은 민트색으로 칠해 아기자기한 일반 가정집처럼 해 놨지만 지하에는 무려 3,000만 원을 들여 희생자들을 납치하고 감금해 둘 감금 시설과 시체를 소각하는 소각장을 만들었다.
아지트 완공과 동시에 조직원들은 김현양의 중학교 후배인 무기 브로커 이주현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범행 도구들을 완비했다.[23] 또 범행 대상 물색을 백화점 VIP 고객들을 대상으로 지정하기 위해 前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신용 판매부 직원이었던 김민경으로부터 백화점 고액 거래자 명단을 구입했다. 물론 지존파가 살인극에 쓸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넘겨주지는 않았겠지만 개인정보 유출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악의 사례[24]이기도 하다.[25] 준비가 다 되었다고 판단한 강동은은 김기환을 면회해 본격적인 범행에 착수할 것을 허락 받았다. 조직원들은 평소 김기환이 말했던 대로 그랜저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1994년 9월 5일 오전 12시 경 아지트를 떠나 서울로 출발한 뒤 당일 밤 서울 워커힐 호텔 부근에서 1박을 하고 7일에 범행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범행 실패 후 바로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낚시터 부근으로 장소를 옮겨 차를 주차한 뒤 도로 밑에서 범행 대상이 나타날 때까지 잠복했다. 몇 시간 뒤 도로에 그랜저가 나타나자 강동은이 승용차로 그랜저 차량을 가로막았고 나머지 조직원들이 가스총과 칼 등으로 그 안에 타고 있던 이종원(36세, 남)과 이OO(27세, 여)를 위협해 밖으로 끌어냈다. 테이프와 끈으로 두 사람의 손과 발을 결박하고 눈을 가린 채로 포터에 실어 아지트로 납치했다.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두 인질의 인적 사항 등을 취조했는데 타고 있던 그랜저 차량은 700만원을 주고 중고차로 구입한 차였고 둘 다 자신들이 원하던 부자들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이종원은 카페 악사였고 조수석에 타고 있다가 함께 납치된 이OO도 이종원와 같은 카페에서 근무하던 아르바이트생이었다.[26] 조직원들끼리 둘의 처분을 놓고 토론을 하다가 둘 다 살해하기로 했다.
다음 날 조직원들이 돌아가며 이OO을 성폭행하였고 이종원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한 뒤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사시키고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여자도 함께 죽이면 수상해 보일 수 있다"는 논리로 이OO도 함께 살해하려 했던 다른 조직원들을 설득시킨 김현양이 이OO을 살려주는 대신 공범 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이OO가 다른 조직원들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도록 이종원 살해 과정에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이OO은 극한의 공포에 떨며 이종원의 입을 막는 시늉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이종원을 넣은 골프백을 들고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교동리의 한 인적이 드문 도로로 이동했다. 이때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어 경찰에게 잡혔을 때 눈에 띌 확률이 높은 강문섭과 이OO만 아지트에 남아 강문섭이 "저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형들이 시켜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이OO을 강간하였다.[27] 하지만 이때까지 이종원은 살아 있었고 이를 확인한 조직원들이 전기충격기로 재차 충격을 줘 살해했다. 그 뒤 이종원의 시신을 그랜저 운전석에 태우고 차량을 계곡으로 밀어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처럼 위장했다. 더 치밀하게 위장하기 위해 도로에 스키드 마크까지 남겼다.[28] 범행을 마친 후 아지트로 복귀한 그들은 이○○을 또 한 차례 성폭행했다.
1994년 9월 13일, 경기 성남시 남서울공원 묘지(현 분당메모리얼파크) 근처에 주차된 검은색 뉴그랜저[29] 차량을 발견하고 성묘를 하던 중소기업 사장 부부 소윤오(43세, 남), 박미자(35세, 여) 부부에게 "차량 바퀴에 펑크가 난 것 같다"며 부부가 그 차량의 소유주임을 확인하고 공기총을 발사해 위협한 후 이전 범행 때와 유사한 방법으로 부부를 납치해 아지트로 이동했다. 14일 새벽, 피해자들을 취조해 보니 이전 피해자들과는 달리 소윤오는 자수성가한 중소기업 사장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자 "몸값을 지불하면 풀어 주겠다"는 말로 회유했다. 조직원들은 소윤오 부부의 몸값으로 1억 원을 요구했고 소윤오로 하여금 회사 직원에게 " 교통사고가 크게 났는데 피해자에게 1억 원을 지불해 합의를 보기로 했다"고 거짓말 해서 돈을 건네받도록 지시했다. 소윤오로부터 1억 원까진 지불할 수 없지만 8,000만 원까지는 된다는 확답을 받은 후 같은 날 오전 광천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경찰에게 범죄가 발각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차량에 다이너마이트도 구비해 놓았는데 김현양이 다이너마이트 조작을 잘못하여 손과 발에 부상을 입고[30] 아지트로 복귀했다.
오후 2시경 조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윤오는 회사의 총무부장 심성수으로부터 8,000만 원이 든 돈가방을 건네받았다. 이때 남편 소윤오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아내 박미자가 인질로 잡혀 있었고 또 당시에는 돈만 지불하면 정말 풀어주리라 믿었기에 돈만 받아왔다. 단, "납치됐어, 따라오지 마!"라는 짤막한 말로 구조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돈가방을 받고 아지트로 복귀한 그들은 그날 밤 처음 만져 보는 큰 돈에 기쁨에 취해 소윤오 부부의 처분을 놓고 토론했다. 살려주자, 죽이자는 의견이 반으로 나뉜 적도 있으나 원칙대로 죽여 없애야 한다는 의견으로 모아져 부부를 살해하기로 했다.[31]
이들은 부부에게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며 술을 먹여 물리적으로 저항하지 못할 때까지 취하게 한 뒤 이OO을 확실하게 범죄에 가담시킬 목적으로 총을 발사하여 소윤오를 살해하도록 지시했다.[32] 김현양이 소윤오를, 강문섭이 박미자를 맡아 시신을 해체했고 나머지 조직원들은 이OO이 고개를 돌리고 있자 조직원 중 일부가 이OO의 머리를 잡으며 "죽기 싫으면 봐"라는 말과 함께 강제로 이 끔찍한 광경을 보게 했다. 이 과정에서 김현양은 사체의 일부[33]를 도려내어 먹는 기행을 보인다. 이때 김현양이 이OO에게 "사람 고기 처음 보죠? 맛있어요" 라며 인육을 건넸지만 이OO은 거절했다. 절단한 사체를 소각하는 과정이 오래 걸려 3개 조로 편성까지 했다. 이들은 사체를 소각할 때 나는 냄새를 희석시키기 위해 마당에서 일부러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이웃 주민들에게 구운 고기를 나눠 주는 태연함과 치밀함을 보였다.
이들은 소윤오로부터 빼앗은 8,000만 원 중 일부를 1,500만 원 상당의 총기 2자루를 청계천에서 구입한 후 현대자동차에서 포터 냉동 탑차를 비롯해 갤로퍼, 쏘나타Ⅱ 등의 차량들을 다른 사람의 명의로 구입할 계획을 세울 뿐만 아니라[34] 중국으로 가 전지 훈련을 받은 후 최후에 두목 김기환을 체포한 전남도경 영광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관들을 죽이고 총기를 탈취하여 MBC를 습격할 계획을 꾸몄다.[35]
7. 검거
양수리 부근에서 3번째 희생자인 이종원과 드라이브를 하다 함께 납치된 카페 여종업원 이OO(당시 27세)의 극적인 탈출 덕분에 지존파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OO은 납치되었을 당시 지존파의 아지트에 감금된 후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살려주지 않을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처음 잡혀 왔을 때 김현양이 "당신이 이제부터 우리가 하라는 대로 따르면 우리는 당신을 살려줄 것이고 아니면 죽일 것이다"라고 했을 때도 이미 그녀는 자신들이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기에 어이가 없어서 픽 웃어 버렸는데 이런 그녀의 반응에 김현양은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현양이 이OO에게 연정을 품게 되어 이OO을 죽이려는 조직원들을 설득시키면서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37] 목숨은 부지하게 됐으나 입막음용으로 살인에 가담할 것을 강요받은 이OO는 조직원들이 억지로 피해자의 손을 갖다 대는 식으로 이종원과 중소기업 사장 부부를 죽이는 것에 동참당했다.[38] 두 차례의 범행 현장에 있음으로 문상록을 제외한 지존파 조직원들에게 얼추 신임을 얻었으나 그녀를 끝까지 믿지 못했던 문상록이 김현양과 심하게 갈등을 빚으며 언제든 지존파에게 희생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이OO의 탈출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다이너마이트를 잘못 다뤄 손과 발에 부상을 입은 김현양이 실밥을 풀고 상처 부위에 소독을 받기로 한 날, 이OO은 김현양에게 병원에 동행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김현양은 흔쾌히 그러자고 답했고 그렇게 이OO은 그와 병원까지 동행하게 됐다.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던 중 김현양은 현금 50만 원이 든 지갑과 휴대전화를 이OO에게 맡기고 진료실로 들어갔다.[39]
이OO은 그렇게 극적으로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빠져나와서[40] 택시를 잡았다. 지존파의 행동 반경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택시 기사에게 해남경찰서로 가 달라고 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하차하고 포도밭 인근의 농가에 숨어들었다.[41] 비닐하우스 안 평상 밑에 몇 시간 동안 숨어 있던 이OO은 집주인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집주인 지인의 차를 얻어 타 대전까지 이동했으며 대전 톨게이트에서 택시를 잡아 서울의 한 모텔에 도착한 뒤 자신이 일하던 카페에 연락을 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OO은 서초경찰서에 카페 주인의 남동생과 동행하여 경찰들에게 사건에 대해 말했으나 경찰들은 관할이 아니라며 사건 담당을 거부했다. 분노와 공포가 극에 달한 이OO를 보던 카페 주인의 남동생은 평소 카페를 즐겨찾던 고병천 반장(당시 서울서초경찰서 강력4반장)에게 연락했다.
강력반장이었던 고병천 반장조차 피해자의 진술이 매우 충격적이라 처음엔 믿지 못했으나[42] 이종원이 전북 장수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과 소윤오-박미자 부부의 실종, 납치 사건에 대해 이OO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고 반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게 되었다.[43]
체포 작전은 수월했다. 먼저 강동은이 이른 아침 포터 트럭을 타고 마을로 가다가 경찰의 미행을 눈치채고 경찰과 1.5km 추격전을 벌인 끝에 검거되었고 형사가 강동은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걸어[44] 김현양과 이경숙, 문상록을 유인해 냈다. 경찰이 파 놓은 함정임을 눈치 챈 문상록이 도주하다 형사에게 제압당하고 김현양, 이경숙은 대우 르망 승용차를 타고 도주하려다가 20km 추격 끝에 검거된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아지트에 있다가 아지트를 급습한 경찰들에 의해 모두 검거되었다. 표창원이 쓴 저서에 따르면 전남도경 영광경찰서 형사들과 공포탄을 쏘며 공포감을 조성하면서 진입했다고 한다.[45]
이OO의 탈출 후 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아지트를 떴으면 검거되지 못했거나 검거되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테지만 이OO이 탈출했음에도 아지트에 남아 있었던 이유는 이OO의 탈출 성공 후 그들이 영광경찰서 앞에 3일 동안 잠복하며 경찰들의 동태를 살폈으나 평소와 같았고 이OO이 범행에 가담했기 때문에 쉽사리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어서 이OO이 신고하지 않고 그냥 도망간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멀리 서울까지 달아나서 신고한 기지가 발휘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와는 다르게 당시에는 중범법자는 검거 즉시 신상 공개를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으므로 범인 체포 후 얼굴이 그대로 나왔고 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돈 없다고 무시하는 것들. 압구정동 야타족들! 모조리 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라고 말하며 사회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KBS 보도. 또 강령에 고급 중대형차들을 범행 대상으로 지정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고급 중, 대형차 판매량이 일시 감소했으며 고급차들의 중고 매물이 갑자기 늘었다. 언론플레이와 광적인 취재 열기가 잘못 퍼진 좋은 예.[46]
이들은 중국에 가서 전지 훈련을 하려 했고 '야인'이나 '뺑끼통'과 같은 책을 교재로 삼았다고 자랑했다.[47] 더 나아가 압구정 야타족과 백화점 고객 등 돈 많은 이들을 살해하고 심지어는 경기도 일대 러브호텔까지 송두리째 쓸어 버리려고 했다는 미친 소리까지 했다. 그리고 백화점 우수 고객 1,200명 명단 리스트가 지존파 손에 들어간 것이 확인되자 우수 고객들이 백화점 측에 항의하여 백화점 상담 전화가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MBC 보도 1, MBC 보도 2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김현양은 자랑스럽게 인육을 맛봤다고 했고, 왜 식인을 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인간이길 포기하기 위해서라고 황당무계한 궤변을 지껄이는 등 반성의 기미는 눈 씻고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없었으며 살인의 이유를 불평등한 사회 모순 때문이라며 사회 탓으로 돌리고 자신들의 가치 전도 현상을 정당화하려 했다. 김현양은 체포되어 끌려갈 때 "2,000만 원 이상[48]의 자동차를 가진 놈들은 다 죽여야 해! 그래야 내 원한이 풀려!"라고 소리를 쳤다고 주민들이 증언했으며 이들은 현장 검증에선 "잘난 놈들을 죽이려 했다"고 거듭 말했다.
당시 경찰이 지존파로부터 압수한 무기는 다이너마이트 23개, 뇌관 14개, 망원렌즈가 달린 공기총 1정, 가스총 1정, 등산용 지팡이칼 7개, 대검 4개, 전기충격기 1개, 전기충격봉 1개, 무전기 2대, 호출기 5개 등이었다.
8. 처벌
이경숙은 가담 이틀만에 체포되었는데 살인 행각과 관련이 없다는 점이 참작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지존파 일당 전원은 1994년 10월 31일 서울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 사체유기, 사체손괴, 인육섭취, 범죄단체 조직 및 가입죄, 특수강간 등이 적용되어 구형대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모두 연이여 사형을 선고받고 1995년 11월 2일 두목 김기환을 포함해 조직원 6명에 대한 사형 집행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49]보통 기존 대한민국 대통령 임기 중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사형 집행 결정도 최소 2년은 기다려 주는 게 관례임을 생각하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인데 원래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은 그가 무고할 가능성도 감안하고 또한 마음을 정리하고 뒤늦게나마 교화될 기회를 주기 위해 정권이 바뀐 뒤에, 즉 수년 뒤에 이뤄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사건은 온보현[50]이 저지른 강도강간 살인 행각과 더불어 워낙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준 예외적인 경우이며 무고할 가능성도 전혀 없기 때문에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문민정부 시절 저질러진 살인 사건의 범인 중에 사형이 집행된 경우는 이 두 사건과 장위동 일가족 살인 사건의 범인 이호성, 그리고 1994년 사형이 집행된 전직 안기부 직원 일가 및 동거녀 살인사건의 범인 이필완[51]과 박기태뿐이었고 그 유명한 박한상이나 악질 유괴살인범들조차도 사형 선고는 받았을지언정 집행은 피해갔을 정도이니 얼마나 사회적 충격이 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제보자였던 여성은 본인도 피해자이며 모두 강요당해 저지른 일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제외되었다. 대한민국 검찰청 측에서는 결정적 제보자인 여인이 처했던 상황을 불가항력적이었던 것으로 인정하여 기소조차 하지 않고 지방으로 피신시켜 집과 직업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일종의 신고자 및 증인보호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
한동안 영광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영광 사람이라는 것을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고 하며 영광 사람들이 객지에 나가면 살인자와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해코지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지존파의 아지트는 사건 이후 철거되어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9. 피해자 이 모 여인
1967년 12월 14일[52]생([age(1967-12-14)]세)이며 (사건 당시 27세) 경찰 제보자이자 지존파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OO은 언론에 당시 상황을 여러 번 증언해 주었다. 종종 당시 강동은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여성 조직원이었던 이경숙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이며 대화까지 한 적 있다.[53]이하 내용은 피해자의 개인 신상과 관련된 정보나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종류의 서술은 작성하지 않고 언론에 보도된 피해자의 증언이나 인터뷰만 서술한 것이다.
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1994년에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 시사저널 당시 기사에 따르면 언론 추적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
2015년 9월 11일 한겨레에서 피해자의 증언록을 연재했다. 피해자의 정신적 외상과 이를 치유해가는 과정, 그리고 사회적 관심을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1인칭으로 연재되었으며 담담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경험을 할 수 있으니 읽을 사람은 마음의 준비를 하자. 심신이 약한 사람은 안 읽는 것이 좋겠다. 강력 범죄 피해자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특별한 사례이다. 1화, 2화, 3화, 4화, 5화, 6화.
2015년 11월에는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21년 만에 방송 인터뷰를 했다. 해당 인터뷰는 2015년 11월 6일 방송되었으며, 인터뷰에서 이OO는 극심한 PTSD로 21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경우 현재 범죄 피해자에 대한 사후 대책들이 거의 없다시피하거나 있어도 도움이 안 되는 수준의 것만 있어서 이OO뿐 아니라 세종시 편의점 총기 난사 사건의 피해자 김OO의 사례도 보여주면서 관련 정책들을 비판하였다. 특히 지존파 사건의 피해자 이OO의 경우 위에 링크된 한겨레 증언록을 연재하면서 달린 악플들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2020년 11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에서 근황이 언급되었는데 한때 가정을 이루었으나 극심한 PTSD에 의한 스트레스로 오래 가지 못했고 현재는 말기암 투병 중이라고 한다.[54]
그리고 한동안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2024년 4월 과학수사대 스모킹 건에서 근황이 짧게 언급되었는데, 암투병 중인 만큼 사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일각의 추측과는 달리 2024년에도 생존해 있으며, 천주교에 귀의해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시금 안정을 찾고 있다고 한다. 영상 23분 20초에 언급된다.
10. 여죄의 가능성
경찰들은 피해자가 최소 2명에서 3명 정도는 더 있을 것이란 이OO의 진술을 토대로 최미자, 송봉우 살해 후 본격적인 범행에 들어가기 전의 공백기 동안 추가 범행은 없었는지 수사했다.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압수한 증거물 중 지존파가 평소 이동할 때 몰고 다니던 르망 뒷좌석에서 유골가루가 담긴 비닐봉지가 뒤늦게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또 다른 피해자의 것은 아닌지 추가 조사에 들어갔다. 일당은 그 유골이 김기환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조사 결과 마을 주민인 강OO이 김기환의 부탁으로 김기환의 부친의 묘소에서 김의 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유골을 직접 수습해 김기환에게 건네준 것이 확인되었으나 강OO은 차에서 발견된 유골이 자신이 준 유골인지는 알 수 없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지존파의 아지트가 있던 금계리 마을 일대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였으나 특별한 단서는 얻지 못했다.
또 1994년 4월 5일 강릉에서 일어난 신원 미상의 38세 여성 토막살인 사건과 8월 28일 대관령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위장 타살 사건의 범행 수법이 유사하다고 보아 경찰이 추가 조사를 한 바가 있다. 이OO이 납치되었을 당시 김현양이 이OO에게 자신들이 31세의 여성을 납치해 죽인 적이 있었다고 했지만 수사 결과 밝혀진 것은 없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살인 이후 밝혀진 범인들의 알리바이나 수사에 협조적이었던 그들의 태도, 이OO이나 소윤오 부부와 같이 억류된 피해자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공범이 더 있다고 허풍을 떨었던 김현양의 태도를 종합했을 때 또 다른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으로 결론난 것이다.
하지만 수사가 지존파 일당의 자백과 생존자 이OO의 말에 의존하여 진행되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여죄 여부에 대한 수사가 일주일만에 종결되어 그 때문에 이OO가 납치되기 전에 저질렀던 여죄를 두고 이에 너무 급하게 수사를 종결시킨 것이 아니냐는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
11. 대중문화계 여파
이 사건과 온보현 부녀자 연쇄 납치 살인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영화계, 특히 본의 아니게 폭력과 파괴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액션 영화계가 몰매를 맞으면서 초비상이 걸렸다. 1994년 9월 28일 공연윤리위원회가 그동안 포르노 영화에만 집중된 사전검열을 폭력물에도 더 치중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한국산 액션영화 제작이 감소하는 파국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박성배 감독 영화 <해적>은 검열 과정에서 전체 장면 중 93컷이나 잘려 개봉되었고 배용준 데뷔작인 <삘구>도 1차 심의에서 떨어져 상영이 취소된 바 있으며, < 테러리스트> 역시 검열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바 있었다. 그리고 이때 나온 게 바로 ' 12세 이용가, 15세 이용가, 18세 이용가'다. 다만 실제 도입은 1999년에 이루어졌다.지상파 드라마는 SBS에서 1994년 9월 26일 방송한 작별 30회에 식칼까지 등장하는 폭력장면을 다루어 시청자들의 항의를 받아 큰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그냥 초토화됐는데 일체의 폭력이나 성적인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그야말로 전체 연령 관람가 수준의 드라마만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2020년 시점에서 보면 일상물 드라마만 제작된 것.
게임도 마찬가지여서 1999년까지 한국에 정식 발매되는 FPS 게임은 손에 꼽다시피 했다. 1990년대 둠의 영향을 받은 '둠 클론'들은 폭력성을 강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동한 웬만한 FPS 게임들은 한국에 정식 발매되는 일이 상당히 드물었다. 공연윤리위원회에서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은 둠의 후속작 둠 2는 심의 거부로 발매에 실패했다. 스타워즈: 다크 포스 FPS 게임도 혈흔 표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소자 관람 불가 등급으로 나왔으며 듀크 뉴켐 3D는 기존 수정판에 피 색깔까지 흰색으로 고친, 호주판을 간신히 수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소자 관람 불가 등급을 받았다.[55]
한편 범인들이 평소 즐겨 읽었다는 공포 소설, 공포 영화의 제목들이 돌면서 이러한 지존파들이 즐겨본 매체를 비난하는 뉴스도 있었다. # 일설에 따르면 그 공포 소설 중에는 당시 해적판으로 출간된 유수의 명작 해외 호러 소설도 있었다.
이로 인해 1994년 11월 10일자 동아일보에선 지존파 사건의 여파로 액션 영화 출시가 감소하고 코미디나 인간미 넘치는 가족 영화가 늘어나 '탈액션' 조짐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이런 현상은 당시 공윤의 폭력물 규제 강화로 된서리를 맞은 제작사들이 액션 영화의 출시를 미룬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화평론가 이동연은 <상상> 1994년 겨울호에서 당시 비디오가게 사이에 홍콩 영화 <지존무상>이 재평가됨을 언급하며 지존파와 같은 흉악한 이들에 대한 동정론과 미화를 언급하며 아래와 같이 반박했다.
1994년 추석을 강타한 지존파 사건으로 우리 사회에 벌어진 대단한 법석은 유사한 사건이 계속되면서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 흉악함에 대한 전율로부터 은근한 동정론, 심리학적 동기 분석 등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복습하던 사람들의 대화는 최근 비디오 가게에서 때 아닌 ‘지존무상’이 재평가되고 있는 사회학적 현상 쪽으로 넘어가다 보면 애초의 심각하던 길을 벗어나 복수와 의리의 세계, 무술과 도박의 내기, 암흑가 영웅들의 신나는 활약 이야기에 다시 함몰되기 일쑤이다.
- 상상 1994년 겨울호. <무협소설의 현 단계> p136.
다행히 이런 흐름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2년 후인 1996년 10월 4일 영화 사전심의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났기 때문이다. 이 위헌 판결을 시작으로 검열 제도 자체가 하나하나 사라지면서 규제도 다시 풀리게 되었다.- 상상 1994년 겨울호. <무협소설의 현 단계> p136.
12. 이후
본 문단은 각종 기사와 서적,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 그리고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고병천 전 강력반 반장의 논문에 기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OO과 이경숙은 대면한 적은 없으나, 통화한 적이 있다. 이 씨가 탈출하기 며칠 전, 강동은이 이OO에게 "여성 조직원을 들이려 하는데 어떠냐"고 물으며 이경숙과 통화하도록 했다. 이경숙은 이OO에게 "충고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동은 씨를 도와주기로 했으면 끝까지 도와 달라. 신이 있다면 동은 씨를 도와줄 것이다."라고 부탁했고 이OO은 황당해 하며 자신이 지금 납치되어 있는 상태라고 태도를 분명히 했다.
- 지존파는 자신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단가(團歌)도 있었다. 나중에 김기환은 '야망'이란 이름의 책까지 쓸 계획이었다고 한다.
- 요즘 젊은 세대는 왜 벤츠나 BMW같은 더 비싼 차가 아니라 그랜저를 타는 사람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냐고 의구심을 가질수 있는데, 당시 외제차는 국내에서 거의 보이지도 않았고 그랜저는 요즘같은 국민차 이미지가 아닌 부의 상징인 최고급 차였다. 그러나 피해자 이종원이 탔던 그랜저는 중고로 구입한 중고차였으며 평소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역할을 맡았던 백병옥이 그냥 그랜저라는 이유로 범행 대상으로 지목했다. 중소기업 사장 부부 납치 당시에도 주차되어 있던 소윤오의 그랜저가 "3,000cc인 것 같은데 돈 좀 있을 것 같다"고 했으나 소윤오의 그랜저 차량도 겉만 3,000cc로 개조한 차였고 소윤오가 남긴 편지 내용을 보면 회사는 인수한지 1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은 적자 운영 중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들은 소위 강남에 사는 부자들을 범행 대상으로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들 중 부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나마 "사장"의 직함을 달았던 소 씨 부부의 집도 강남이 아닌 서울 중랑구의 아파트였다. 이러나 저러나 그랜저 같은 고급차를 타면 무조건 부자라고 보는, 즉 차만 좋으면 부자라는 마인드로 범행 대상을 지목한다는 것, 그리고 부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매우 단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56] 이들에게 희생당한 무고한 피해자들만 안타깝다. 실제로 지존파 일행 중 한 명이 "그 사람은 왜 그랜저를 탔냐. 그랜저가 아니라 쏘나타를 탔었어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범인들이 대놓고 범행 대상을 그랜저 등의 비싼 차를 탄 사람이라고 언급하면서 그랜저를 타면 범행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함께 그랜저 및 타 제조사들의 고급 세단들의 이미지가 곤두박질치자 현대자동차에서는 당시 그랜저의 리무진 모델과 차세대 그랜저로 개발되던 모델에 그랜저의 이름을 유지하지 않고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57] 각각 다이너스티와 에쿠스.
- 이OO이 탈출한 후 조직원들이 영광경찰서 앞에 잠복할 때 김현양이 아지트에 남아 다이너마이트를 쌓아 놓고 책임을 지겠다며 자결하려 했지만 강동은이 만류했다. 최종적으로 이OO이 전남도경 영광경찰서에 신고한 정황이 포착되지 않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검거 전날 회식을 했다.[58] 김현양은 검거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날 처음으로 노래방에 가 봤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해장용 콩나물국을 끓이려고 강동은이 콩나물을 사러 나갔다가 붙잡혔다.
- 평소 지존파가 범행에 사용했던 포터는 김현양이 조직 합류 전 착실히 돈을 모아 마련한 트럭이며 굴비 장사 때 사용한 차이기도 하였다.
- 경찰이 아지트를 급습했을 당시 방 한쪽 구석에 돈다발이 그대로 있었는데 김기환이 출소하면 그대로 주려고 필요한 만큼만 쓰고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조직원은 돈을 쫙 깔아 놓고 그 위에 드러누워 한풀이를 했다.
- 지존파가 현장 검증을 할 때 형사들을 끌어안고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려 동반자살할 생각도 했으나 그러지 못한 이유가 조사 과정에서 형사들이 자신들에게 따뜻하게 대해 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이 살면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인간적인 대우였다면서. 또한 재판 과정에서도 검사나 변호사들이 자신들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는 등 인간적으로 대해주어 법조계 인사들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며 감사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 지존파의 증거품 공개 및 압수 당시 맨 앞줄에 있던 여성 취재기자를 붙잡아 인질극을 벌일 생각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 지존파의 아지트의 지하실에서 현장검증을 할 때 참혹한 광경과 지독한 악취 때문에 현장에 있던 대부분이 곤혹스러워했고 일부 여성 기자들은 혼절하기도 했다. 심지어 베테랑 형사들도 현장을 보며 공포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 지존파 검거 직후 지나치게 과열된 취재 열기로 인해 조사 중에 몰상식한 기자들이 경찰서 유리창을 깨고 들이닥쳐 조사가 번번이 중단되기도 했다. 도저히 조사를 진행할 여건이 되지 않자 형사들은 지존파 일당들과 유치장 안에서 같이 생활하며 조사를 진행했다.
- 범죄자들에게 미디어가 따라붙으면 범죄자들은 흥분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존파도 미디어 앞에선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보이며 전혀 뉘우침이 없는 언동으로 세간의 분노를 샀다. 그런데 오히려 형사들 앞에서는 유순해졌다고 한다. 죄질로 보나, 태도로 보나 악질 중의 악질들이라 강하게 나가려고 했던 형사들이 오히려 당황했을 정도.
- 조사 중 식사 시간에 무엇을 먹고 싶냐는 물음에 짜장면이라고 대답했는데 고병천 전 반장이 돈 좀 쓴다며 잡탕밥을 시켜줬다. 7,000원짜리 잡탕밥이 자신들이 먹어 본 음식 중에 제일 비싼 음식이라고 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먹어 본 제일 비싼 음식은 6,000원짜리 뷔페였다고. 이후 고병천 전 반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뒤로 지존파가 생각나 잡탕밥을 먹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 강동은은 재판 내내 이경숙은 잘못이 없다며 감쌌다.
- 사형 선고가 내려진 후 김현양이 이OO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내자 이OO이 답장을 보내 줬으며 그렇게 두 사람은 사형 집행 전까지 편지를 주고받았다.
- 지존파 검거 후 지존파 조직원이나 공범을 사칭한 범죄가 몇 건 일어났다. 1994년 10월 대구에서는 한 약사가 자신의 약국에 납품을 하는 김OO의 집에 김현양의 이름으로 "지존파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 2,000만 원을 준비하지 않으면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내용의 협박 편지를 보내 구속되었다. 이 약사는 약국 이외에도 사업을 벌리다가 돈이 부족해지자 범행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또 1997년 7월 육군 모 부대 상근예비역 병장과 그의 지인이었던 정육점 종업원이 지존파와 막가파의 선배를 자처해 부유층 부녀자를 납치해 금품을 갈취했다가 긴급체포되기도 했다.
- 지존파 조직원들의 IQ는 대부분이 90점대였고 유일하게 김기환만이 100 이상이었다. 90~110 정도가 평균 수치이기 때문에 특별히 지능이 낮다고 볼 순 없으나 이들의 지능 수준이 결코 높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토리 키 재기지만 일각에선 그들 중 지능이 제일 높은 김기환이 상대적으로 지능 수준이 낮은 부하 조직원들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존파의 교도소 동기들이나 교도관들이 김기환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에 대해 "그렇게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지르던 녀석들이 일부러 그러나" 싶을 정도로 의외로 어리숙하고 순진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 김현양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탈주 행각을 벌이며 권총으로 자살했던 지강헌"이라며[59] "그렇게 죽고 싶어 권총을 구입하려 했다"고 답했다. 그 외에도 수사 과정에서 프로살인마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진술하는 등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보였다.
- 김기환이 여중생 강간치상죄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을 때 재소자들에게 구타를 당할 때마다 "형님, 나중에 저희 아지트로 한 번 놀러오십시오"라고 하곤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아동 성폭행범이 타 재소자들한테 더 하등하고 악질 죄수처럼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 지존파 일당이 이OO에게 "여자 때문에 배신한 조직원을 죽인 적이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송봉우 외에 살해당한 조직원이 있다고 밝혀진 바가 없는 것으로 보아 김기환이 현 조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초창기 멤버 중 한 명이 배신해서 죽인 적이 있다고 허풍을 떨었고 나머지 조직원들은 이를 그대로 믿은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이전 조직 결성에 실패한 이유도 여자 때문이 아니라 잔혹한 범죄 계획에 모두 겁을 먹고 발을 뺀 것이기에 '여자 때문에 배신한 자'에 대한 말이 거짓말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아니면 조직원들이 단순히 이OO을 겁박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송봉우가 사귀던 여자 때문에 조직 자금을 인출해 도주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진실을 알 길이 없다. 아무튼 그것이 김기환의 선견지명이었는지 김현양은 결국 여자 때문에 조직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머지 조직원들은 그를 응징하지 않았다.
- 강동은은 검거 후 한 인터뷰에서 범죄를 저지르며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이경숙과 비슷한 처지의 접대부들을 최대한 풀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 전국 각지에서 김현양에게 위로를 건네고 회개를 독려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 중에는 김현양에게 편지와 함께 일기장을 보내 일기를 써서 보내 달라고 요구했던 한 여인과 여학생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었다. 김현양을 이용해 베스트셀러를 노렸던 한 출판사의 직원들이 꾸민 짓이었던 것. 그들이 보낸 일기장과 편지는 구치소 교무과에서 '교화상 불허'라는 이유로 불허가되어 영치되었다가 사형 집행 후 지존파 일당들의 유품 정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 지존파들은 종교를 꽤 강하게 거부해서 전도하기 힘들었으나 김현양이 제일 먼저 종교에 귀의하여 전도하자 그를 포함한 강동은, 백병옥, 강문섭은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김기환, 문상록은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김기환이 가장 나중에 종교를 받아들였다.
- 이후 지존파의 아지트는 완전히 철거되어 없어졌다. 한 대형교회[60]에서 아지트 자리의 땅을 사서 교회를 세우려고 한 바 있는데[61] 이 계획이 무산되었는지 현재까지 아지트 터는 빈 땅으로 방치되어 있다. 다만 영광군에서 아지트 주변의 땅을 매입해 공원을 조성했다.
- 지존파 조직원들은 아지트를 '아방궁'이라 칭했으며 철근 등 기본적인 자재들을 제외한 아지트 건축용 자재들 중 부족한 것은 자신들이 일하던 건설 현장에서 조금씩 훔쳐 왔다. 그러면서도 자재를 사느라 진 빚 1,000만 원을 갚기도 했다. 물론 그 1,000만 원 역시 소 사장 부부의 몸값 8,000만 원 중 일부였다.
- 김현양은 검거 직후부터 각종 인터뷰에서 사죄의 의미로 장기기증을 하고 싶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사회의 냉대를 되갚아 줘서 후련하다는 등 여전히 사회에 대한 강한 불만을 내비치고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 의중을 의심한 대중들은 장기기증의 숭고한 의미를 알고나 떠드는 것이냐며 질타했다. 첫 공판 당시엔 이미 극형을 각오했는지 진지하게 피해자들과 유족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생존자 이OO의 생일을 기해 사형 선고 전에라도 신장 한 쪽을 산 채로라도 기증하고 싶단 뜻을 밝혔다.[62] 하지만 산 채로 장기기증을 하는 것은 규정에 위반되기 때문에 정식으로 장기기증서에 서명한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사후에 안구와 신장 등을 기증을 하고 싶다고 말해 왔다. 김현양에 이어 다른 조직원들도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고 기증서를 제출했다. 김기환은 끝까지 거부하다가 사형을 앞두고 역시 장기기증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들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기 때문에 인수를 거부당한 것인지, 절차상 문제가 발생했던 것인지 뚜렷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63] 한편, 지존파와 같은 날 사형이 집행되었던 사형수들 중 일부는 장기기증이 이루어졌다.[64]
- 이경숙을 제외한 지존파 일당의 사형이 집행되고 지존파 일당 중 문상록의 시신을 인수할 유족이 없자 고병천 반장의 배우자가 문상록의 시체를 대신 인수해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었다. #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사람의 경우 유족들이 사형수와의 혈연 자체를 아예 부정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시신 인수를 거부하는 사례가 많다.
- 희생자 중 하나였던 소윤오 사장이 운영하던 삼정기계공업은 울산 온산공단에 위치한 중소기업인데 사장의 피살 이후 직원들이 살리겠다고 애를 썼다. 처조카가 회사를 이어받았으나 1차 부도 이후 잠적하였고 이후 1년도 안 돼 18억원의 어음을 막지 못하여 최종 부도가 났다.
- 이 사건을 최초로 특종 보도한 언론사는 MBC인데 당시 입사 1년차였던 경찰 출입기자 김은혜는 밤중에 불 켜진 경찰서 강력반 사무실 창문에서 새나오는 '묘지, 부자, 카드, 인육' 등 4단어로 추리해냈고 조사를 마친 강력반 형사를 남자화장실까지 따라가 탐문한 끝에 특종을 잡아냈다고 한다. 이후 다음날 아침 6시 <MBC 뉴스와이드>에서 첫 보도가 나갔으나 '인육'이란 수위 높은 단어 때문에 혼이 나 근신하기도 했다. 해당 비화는 2008년 4월 23일자 MBC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서 소개됐다.
- 지존파의 사형 집행 때 이들의 집행 순서가 공개되었다.[65]
- 지존파가 검거된 후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부자를 더 죽이지 못해 한이 된다.', '이것들 다 죽여버려야 했었다.'는 말을 하였는데 훗날 사이코패스 점수가 가장 높게 나온 것으로 유명한 살인범 정남규, 김일곤, 강윤성이[66] 검거 후 이와 비슷한 대사를 하였다.
- 이 사건으로부터 몇 년 후 일어난 사건들인 사바이 단란주점 살인사건, 1999년 파주 택시기사 살인사건도 이 사건처럼 상대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있으면 이유없는 적대감을 품게 된 것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997년 외환 위기 직후라서 그런지 굳이 이 두 사건들이나 지존파가 아니더라도 상대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있으면 이유 없이 적대감을 품는 경우가 적잖게 생겨나던 때이기도 했다.
- 무기 브로커였던 이주현은 1971년생으로,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는데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3. 대중매체에서
2019년 10월 23일 지존파 사건이 영화화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관상의 한재림 감독이 제작을 맡으며 관상의 각본을 담당했던 김동혁 작가의 감독 데뷔작이 될 것이라고 한다. 시나리오가 완성 단계에 들어갔으며, 주요 배역 캐스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다만 영화화 예정 소식으로부터 2년이 되어 가는 2021년 5월 시점까지 추가 정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여파로 제작이 연기되었거나 아예 제작 자체가 무산된 것으로 추정된다.기본적으로 한국산 창작물에서 살인집단이 등장하면 지존파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안에 여성 생존자가 있으면 거의 확실한 수준. 영향을 받지 않았어도 해당 창작물에 대한 리뷰나 인터뷰에서 지존파가 한 번씩은 언급된다.
지하철에서 파는 어느 성인지에서는 지존파가 잡히지 않고 근교에 놀러온 재벌 회장과 애인을 잡아먹은 다음 서울로 직행하는 대체 역사 소설이 연재된 바 있다.
- 1994년 어느 늦은 밤: 유현산의 장편 소설로 지존파를 모티브로 한 '세종파'라는 조직을 핵심 소재로 하는 소설이다.
- 고객명부: 허수정의 장편 소설로 이 조직이 중심 소재로 나온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 SBS의 프로그램으로 2020년 10월 22일자에서 지존파에 대해 방송했다. 다만 이OO은 유 씨라는 가명으로 언급되었으며, 소윤오 부부는 윤 씨 부부로 각색되어 거론되었다. 아마도 피해자들의 이름을 가명 처리한 듯. 또 실제 김현양과 같이 검거되었던 이경숙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으며[67] 조직원을 6명이라고 이야기하고[68] 아지트에서 잡힌 조직원들의 순서가 바뀌는 등의 오류도 보인다.
- 논픽션 다이어리: 2012년 제9회 광주비엔날레 출품작인 정윤석의 작품으로 지존파 사건을 통해 자본과 권력, 그리고 사형제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담고 있다.
- 뉴 바이블: 2018년 귀귀의 작품으로 사형당하기 직전에 주인공 제이한테 납치 당해 폐가에서 25년간 제이가 가져다 준 범죄자 인육을 먹으며 노예[69]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결국 마지막에 식량이 부족해서 강문삽(강문섭) 한 명을 먹어 치우고 5명 모두 제이한테 참수당한다.
- 데드 캠프: 1편 초반에 주인공 중 한 명이 신문에서 봤다면서 'chijon family (지존파)' 를 언급한다.
- 마스칸: 해당 소재를 다룬 아마추어 독립영화로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 무법자: 감우성 주연의 영화로 과거 장면으로 나오는 살인 집단은 지존파를 모티브로 했다. 김철한 감독도 시사회장에서 지존파 사건을 언급하였고( 기사), 항목 상위에 링크된 방송 히스토리 후에서도 지존파 사건을 다룰때 참고 영상으로 영화 무법자의 장면을 쓰기도 했다.
- 범죄의 재구성: 2008년 tvN 개국 초기에 방영되었던 프로그램으로 해당 사건의 내용을 상황극 형식으로 다뤘다. #
- 악마를 보았다: 장경철과 장경철의 친구 태주의 범죄 방식과 거주지 등의 설정은 '지존파가 현재까지 살아남아 있었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 야후: 윤태호의 만화로 지존파를 모티브로 한 범죄 집단이 등장한다.
- 인질: 2021년 개봉작으로 범인들이 고급 차를 보고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등 지존파를 연상시킨다. 제작사인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는 염두에 둔 건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답했다. #
- 채널 식스나인: 1996년 개봉한 영화로 등장하는 전파테러단의 이름을 '지존파'로 붙였다.
- 화이트채플: 영국 드라마로, 시즌 4의 식인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조사하는 에피소드에서 참고 사건으로 언급되었다.
- 히스토리 후: MBC LIFE의 프로그램으로 2011년 8월 30일 방영분서 이 사건을 다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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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1]
사진에서 지존파의 두목인 김기환이 안보이는 이유는 지존파 검거 이전 김기환은 이미 강간상해죄로 투옥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2]
유일한 여성으로, 지존파가 검거되기 전 고작 이틀전에 조직에 합류했다.
[3]
지존파가 세간에 알려지기 이전 조직원에 의해 살해 당했다.
[4]
징역3년, 집행유예 4년
[5]
세계 범죄사적 관점에서도 상당히 특수한 사례였던 만큼
CNN 등 외국 언론에서 취재하러 오기도 했다.
[6]
그러나 그리스어로 '야망'은 필로독시아(φιλοδοξία)이며 마스칸(مسكن)은 집이나 숙소를 뜻하는
아랍어,
우즈베크어 단어다. 저학력자(구성원들의 최종 학력은 초졸(당시에는 국졸) 내지 중졸이었다)였던 구성원들이 잘못 주워 듣고 지은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7]
이렇듯 대게
범죄 조직을 뜻하는 XX파라는 이름은 경찰이 관리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것으로 조직에서 자칭한 명칭이 아니다.
[8]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06.15.
[9]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김기환의 보복이 두려워 외지로 피신했다고 한다.
[10]
사건 1년 전
영광에서 트럭 운전을 할 때 알게 되었다고 한다.
[11]
피해자 이OO와 혼동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OO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합류 전에는
영광의 한 주점에서 접대부로 일하고 있었다.
[12]
즉, 이경숙 역시 한 건의 살인에라도 가담했다면 사형을 면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13]
조직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송봉우가 조직원들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14]
물론 본인이 조직원인 이경숙은 제외. 후술하겠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김현양이 이 규칙을 어겨 검거된 것이다. 즉, 김현양이 자신을 비롯한 나머지 조직원들 전부를 간접적으로 검거당하게 한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김현양 본인은 어머니를 못 죽여서 한이라고 한다. 물론 두목 김기환도 아동 성범죄로 징역형을 살게 된것도 이를 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15]
李
京
淑
[16]
이 1,600만 원은 지존파가 희생자 부부로부터 뜯어낸 8,000만 원 중 일부였다.
[17]
만약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면 그녀 또한 사형은 쉽게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다.
[18]
이름이 송봉은으로 알려진 이유는 생전에
형 송봉은의 주민등록증을 빌려 도용했기 때문이다.
[19]
現
충청남도
계룡시. 논산군은 1995년에 논산시로 승격되었고 2003년에는 그 일부가 계룡시로 분리되었다.
[20]
만약 밀고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송봉우는 특수강간 및 사체유기, 살인, 범죄단체조직죄로 구속된다.
[21]
김현양은 "내가 특별히 예뻐하던 동생이라 죽일 때 마음이 아팠다"고 했지만 나머지 조직원들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고 진술했다.
[22]
지존파 아지트의 위치는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114번지, 영광불갑테마공원 특산품판매전시관 맞은편이다.
[23]
이주현은 지존파 합류를 권유받기도 했다고 한다.
[24]
훗날
송파 전 여자친구 가족 살인사건에서도 돈에 눈 먼 공무원이 스토커의 의뢰를 받은
흥신소에 집 주소라는 개인정보를 넘겼고 스토커는 이를 통해
스토킹 피해자의 집에 쳐들어가 가족들을 습격해 살인을 저질렀다. 단돈 2만원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끔찍한 일을 당해 1명이 목숨을 잃고 1명이 크게 다쳤다.
[25]
다만 이 문제는 당시 그렇게 큰 이슈는 되지 못했는데 개인정보 유출 문제가 크게 부각된 것은
인터넷으로 인해 개인정보가 손쉽고 무분별하게 복제가 가능한 세상이 온 이후다. 이때는 개인정보 복제라고 해 봤자 종이에 쓴 명단을 복사기로 복사하는 정도였다. 또한 방송과 언론에서도 초상권이나 개인정보 유출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썼던 시절도 아니라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의 신문이나 TV 뉴스,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미성년자거나 특별한 상황이나 사전 요청이 있는 경우가 아닌 이상 이름이나 주소,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 직접적 피해자가 되지는 않았던 것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명단에 있던 현대백화점 VIP고객들은 상당히 불쾌해했다.
[26]
이OO은 피해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지존파 검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기존에 이OO과 이종원이 연인 사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이OO은
한겨레에 연재되었던 인터뷰에서 이종원은 절친한 직장 동료였다고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에서는 '유수정'(정확히는 진행자들은 '유 씨'로 불렀고, 사건 이야기를 하면서 김현양이 전화를 걸어 '수정아'라고 불렀다고 나온다)이라는 가명으로 나온다.
[27]
이OO의 증언록에 의하면 이들은 이OO을 감금했던 8일간 내내 강간하지는 않았으며 첫 이틀 동안 집중적으로 마치 의식을 치르듯이 돌아가며 성폭행했다고 한다.
[28]
지존파 검거 전 이 사건은 지존파가 의도한 대로 단순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사건으로 종결될 뻔했다. 피해자의
허벅지에 지존파에게 납치될 당시 저항하다 생긴 자상도 있었는데 말이다.
[29]
MBC 뉴스데스크에 마구잡이로 분해되어 뼈대만 남은 해당 차량의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30]
이 일이 후일 이OO가 탈출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31]
이OO의 처분도 함께 논의되었지만 이OO을 살려 주자고 주장한 김현양과 이OO을 경계하던 문상록이 몸싸움을 했고 결과적으로 이OO은 생존했다.
[32]
김현양이 이OO의 신체를 속박해 강제로 총을 발사하도록 했다.
[33]
유방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 퍼진 것이고
다리 부분이다.
[34]
이 중에서 포터 냉동탑차는 강동은의 명의로 구입했다. 당시 강동은이 현대자동차 대리점에서 작성한 차량 구매 계약서가
MBC 뉴스데스크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35]
계획을 펼쳐 보기도 전에 검거되자 김현양은 인터뷰에서 "더 죽이고 싶었는데, 지금 못 죽여서 한이 맺힌다. 내가
MBC 한 번 가 보려고 했는데, 못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만약 이 계획이 진짜 실현되었다면
만민중앙교회 MBC 습격 사건 이전에 당시 여의도 MBC 사옥에서 그것보다 더 심각한 유혈 사태가 발발할 수도 있었다.
[36]
다만 여기선 1974년생인 백병옥이 1969년생(25세)으로 나와있다.
[37]
김현양이 이OO에게 가진 감정이 연정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다.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여성을 향한 혐오로 번졌던 김현양이었지만 그만큼 연상 여성=어머니에 대한 사랑에 결핍되어 있어 이OO을 특별대우한 것이다. 이OO은 김현양이 자신에게 OO 씨라고 부르며 존댓말로 자신의 개인사도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38]
이것은 범행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OO은
불기소 처분을 받았으며 중요 제보자 및 증인으로 보호받게 되었다.
[39]
이 부분이 김현양이 의도적으로 이OO에게 탈출할 기회를 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만한 것인지가 논쟁거리이다. 이때 보인 김현양의 행동이 인질을 잡아둔 보통의 범죄자들이 보이는 행동 양상과는 다른 것이 사실이다. 1990년대의 화폐 가치를 감안하더라도 50만 원은 현재의 100만 원에 달하는 거금이고 현재도 50만 원이라는 돈은 외출 시 소지할 여윳돈 치고는 꽤 큰 액수다. 또한 휴대전화는 당시로서는 보급률도 매우 낮았고 고가였던 귀중품이었다. 거금과 귀중품을 인질에게 맡긴 채 자리를 비우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기에 당시 김현양의 심리에 대해 아직까지도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는데 이OO의 회고록에 따르면 자신을 동행으로 데리고 가는 김현양에게 조직원들이 의문을 품자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으며 병원으로 향하는 중에도 진료 대기 중에도 이OO에게 수시로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라"고 했다고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에서는 해당 발언이 "도망갈 테면 도망가 봐라"라는 뉘앙스로 나왔다.
[40]
이후 이OO은 인터뷰에서 병원에서 빠져나왔을 당시에 "거기서 죽(으)나 아니면 탈출하다가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일단 탈출)해 보겠다는 생각(이) 피해자들에 대한 보답일 거라고 생각했어요."라는 심정이었다고 밝혔다.
[41]
당시 택시 기사의 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지존파 편' 유튜브 영상에 댓글로 남긴 증언에 따르면 그 당시엔 시골에 차가 많이 없던 시절이라 동네 사람들이 해당 택시 기사의 택시를 많이 이용했고 그 때문에 지역 토박이가 아님에도 주민들 대부분을 알고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피해자에게 납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 동네 사람은 내가 다 아는데 어떤 놈들이 납치를 하지? 백수 놈들 짓인가?" 라는 말을 혼잣말 하듯이 내뱉은 것이다. 동네 주민 중에 범죄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고 당시 백수읍에 깡패들이 많았기에 '백수읍에 사는 건달들이 불갑까지 와서 나쁜 짓을 하는구나' 싶었던 것뿐이었다고 하며 그게 살인까지 얽힌 극악무도한 사건인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다고 한다. 영광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런 일을 경험해 보기는커녕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피해자 이OO에게 혼잣말처럼 말한 그 한 마디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생각 없이 한 농담이나 겁을 주려고 한 말은 결코 아니었는데 그 말이 의도치 않게 피해자에게 큰 공포를 준 듯 하여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라고 밝혔다. 참고로 그 택시 기사는 2013년에 사망하였다 한다.
[42]
고 반장은 이후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정신이상자가 말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개요 문단에서도 서술했듯 범죄 수법 자체가 매우 엽기적이고 잔혹했던 데다 6명이라는 다수가 연쇄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은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 관점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OO으로부터 사건에 대해 들은 카페 주인은 경찰이 아니라
안기부에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시대 분위기로는 이런 흉악한 행위를 저지를 만한 집단은 일반인이나 동네 조폭 정도는 어림도 없고 입막음을 하려는
남파 간첩 집단 뿐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43]
2015년에 한겨레를 통해 연재된 '피해자의 증언록'에 따르면 형사가 이OO의 말을 100% 믿게 된 이유는 김현양이 맡긴 휴대전화의 명의가 강동은의 것이었는데, 이OO이 강동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4]
이때 경계심을 약화시키기 위해 미리 현지 파출소 경찰을 섭외해서 현지 사투리 억양으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에는 강동은이 가지고 있는 서류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고 답변했다.
[45]
다만 경찰의 검거 과정이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인질이었던 이OO까지 데리고 형사 6명만 출동했던 점에서 당시 경찰의 전문성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보여준다.
[46]
1990년대의 한국은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갓 벗어난 뒤 언론이고 사회고 외부 가치관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연히
미국 등지에서 문제가 되던 과열 취재 경쟁과 시청자들의 생각은 고려하지 않는 자극적인 언론 보도도 받아들였는데 그 첫 번째 목표가 바로 지존파가 된 것이다. 게다가 지존파는 그때까지 흔하던 가족 살인범이나 연쇄살인범 혹은 친구 단위의 살인 집단 등이 아니라 별다른 안면이 없던 제3자들의 연합이라 더욱 주목을 받았다.
[47]
그래서 그 책들의 판매량이 급증했다. 이걸 자랑하는 사람이 뺑끼통의 저자 이진수. 이 사람은 나중에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의 이름도 뺑끼통으로 지었고 희대의
불쏘시개 '거짓말 선생님'이라는 책도 냈다.
[48]
당시 2,000만원으로
뉴 그랜저(단, 익스큐티브 팩이 적용되지 않은 2.0 깡통 모델은 1,850만원이었다),
포텐샤,
브로엄(브로엄은 2.2 모델의 거의 풀옵션 모델만 2,000만원이 조금 넘었다.) 등 한국산 E세그먼트 준대형 세단이나 D세그먼트급 외제차를 구매할 수 있었다. 물론 프리미엄 E세그먼트였던
아카디아는 3,000만원 중후반대였다. 중형차인
쏘나타 II,
마르샤,
콩코드,
크레도스,
프린스 등의 웬만한 D세그먼트 중형차는 풀옵션이어도 2,000만원을 넘기는 어려웠다. 2010년대 물가로 약 4,000만 원대에 해당한다.
현대 그랜저,
기아 K8과 같은 E세그먼트
준대형차나
제네시스 G70,
BMW 3시리즈,
아우디 A4 등 프리미엄 브랜드의 D세그먼트
중형차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49]
단, 김기환,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은 만장일치로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뒤처리 담당이었던 강문섭, 백병옥은 선고를 내릴 때
목숨만은 살려주자는 판사들이 있었고 다른 조직원 4명도 둘의 감형을 요청했지만 결국 둘 다 사형을 선고받았다. 검거 후 1년 2개월만에 집행되었다. 1989년에 강도살인을 저지른 임천택, 같은 해에
아동 성폭행 후 살인을 한 이재철이 다음해 12월에 이와 비슷한 간격으로 처형되었다.
문서 참고.
[50]
사실 온보현의 경우에는 화를 자초한 측면도 있다. 실상 비슷한 시기 저질러진 사회에 충격을 준 살인 행위가 한두 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온보현만 사형을 당한 것은 '지존파와 자신을 비교해 달라'는 등 화를 자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온보현과 비슷한 사건 자체에 대한 사형선고는 그 이전이나 이후나 많았고 현재도 이들 중 상당수가 사형수 신분으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51]
이필완은 공범마저 자신의 단독 범행임을 인정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유언을 남겼다.
[52]
음력 11월 13일
[53]
이경숙이 피해자 이 씨에게 강동은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피해자 이 씨는 자신은 납치된 것이라면서 선을 그으며 거부한 적이 있다.
[54]
정황상 해당 근황이 2015년 증언록 및 방송 인터뷰의 내용과 매우 흡사한 걸로 보아 2020년 당시의 근황이 아니라 2015년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 쓴 걸로 보인다. 추후 다시 근황을 알렸다면 반드시 기사에 실릴 텐데 인터뷰 후로 그녀의 근황에 관련된 내용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므로 사실상 위 내용도 2015년도의 근황이라고 보는 게 옳다.
[55]
다만 당시는 게임들은 정식 출시보다는 불법 경로로 들어온 복제판도 상당했던 시기여서 위에 언급된 게임들은 정식 출시만 안 되었지 웬만한 게이머들은 다 구해서 할 수 있었다.
[56]
중소기업 사장들은 설령 회사가 어렵더라도 무리해서 고급 차를 운용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 과시욕이 아니라 거래처나 은행에 갈 때부터 대우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 21세기에도 그러한 면이 아직 남아 있는데 90년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이때는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기 전이라 금융업계에서 정확한 대출 심사나 관리가 이뤄지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곤 했는데 일반 승용차를 끌고 은행을 가서 대출 상담을 받으면 당장 은행원부터가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고급 차를 끌고 오면 '오 사장님 돈 좀 있으신가 보네?'라고 생각하고 대출 등에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즉, 차만 좋으면 부자라는 마인드는 지존파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었고 소윤오 역시 그 사회적 인식에 맞추어 거래처나 은행 등지에서의 협상을 좀 더 유리하게 하고자 그랜저를 중고로라도 무리해서 샀던 것이다.
[57]
하지만 1998년에 그랜저 XG를 출시하면서 이미지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그랜저 브랜드는 4세대(TG), 5세대(HG), 6세대(IG)를 거쳐 현재 7세대(GN7)까지 이어지고 있다.
[58]
이경숙 합류 기념 환영회로 추측되기도 한다.
[59]
정확히는 지강헌은 자살로 숨진 건 아니고 자살 기도를 했지만 경찰이 쏜 총에 맞아 과다출혈로 죽은 것이다. 참고로 지강헌은 탈옥범이긴 했으나 도망치면서 살인은 하지 않았으며 은거지 주민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그들을 절대 다치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더구나 그는 지존파처럼 살인 조폭이 아니라 절도죄 초범이었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자신의 입장에서 겪은 불공정한 법집행에 대한 항의로 저지른 범죄지 "돈 있는 놈 잡아 죽이겠다"고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무작정 살해하고 정작 본인들이 사형에 처해지자 벌벌 떠는 지존파와 비교 자체가 모욕이다.
[60]
일명 '지존파 전도 특공대'를 조직해 사형 집행 전 지존파 일당에게 전도를 했다.
[61]
김기환은 사형 집행 당시 집(아지트)을 교회 설립하는 데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62]
김현양이 그녀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이 발언은 곧바로 가십거리가 되어 그녀가 이OO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방청했던 기자들에 의해 기사화되었다.
출처(PC로 열람 바람).
[63]
신속하게 사형 집행이 진행됐기 때문에 절차를 밟지 못해서라는 추측도 있다. 장기기증 신청을 하려면 신청서에 본인의 모인을 찍어야 하고, 가족이 동의하고, 또 신청이 접수되면 신체 상태에 대해 검진을 받아야 하고, 허가 판결이 나야 한다. 그리고 사형장에서 마지막으로 본인의 의사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 참조.
[64]
박성규, 이두견, 최명복은 안구와 콩팥을 기증했고 신민철은 시신을 기증했다.
[65]
1995년
11월 2일 서울구치소에서 1. 김기환 2. 김현양 3~4. 불명 5. 이호성 6. 온보현 7. 강동은 8~12. 불명 13. 강문섭 14. 문상록 15(마지막). 백병옥의 순서로 집행되었다. 온보현은 지존파 조직원이 아니였지만 온보현의 사망이 확인되고 5분도 지나지 않아서 강동은이 사형 집행장에 들어갔으니 온보현은 강동은의 직전인 6번째이다.
[66]
셋 다 지존파와 같이
강도살인 혐의를 가지고 있다.
[67]
상술했듯 조직에 가담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상태에서 검거 되어 직접 범죄를 저지를 틈이 없었기에 징역형만 살고 출옥한 점이 감안된 듯 하다.
[68]
실제 조직원은 검거 이틀 전 들어온 이경숙까지 합해 총 7명이었다.
[69]
말이 노예지 다르게 말하면 사체처리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