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이 대한민국에 파견한 간첩을 뜻한다.[1]북한에서는 연락군관[2], 남한에서는 간첩으로 부른다.
북한 공작원들은 장비 전달과 사진 촬영을 주 임무로 하는 북파공작원과 달리 실제적인 암살, 테러, 납치를 실행하거나 전쟁에서의 승리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파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북파공작원은 먹을 것이 많고 침투하기 쉬운 여름철에 침투하지만, 북한 공작원은 북한이 자랑하는 기갑사단이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겨울철에 침투한다.
조선로동당 3호 청사는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을 모아놓은 곳으로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정찰총국 육·해상정찰국, 통일전선부 문화교류국가 있다. 이들 기관 모두 공작원을 양성했다. (예: 작전부 산하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통일전선부 문화교류국) 그 외에도 제8군단, 정찰총국 해외정보국 등에서 보낸 무장공비가 확인된다.
2011년경 기밀해제된 문건에 따르면, 정치인 이진삼 의원[3]이 현역 군인(당시 대위)이던 1960년대 후반에 방첩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예하 609특공부대에서, 대남 도발에 대한 보복 작전을 위한 인원을 추릴 때 전향한 전직 북한 공작원들을 데려다 쓰기도 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1997년까지는 잠수정을 통해 내국인 무장간첩을 잠입시킨 것이 확인된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이 그런 예이다. 2000년대 이후로도 1년에 간첩 10여명, 협조자 3~5명씩은 꼬박꼬박 잡힌다. 협조자의 예를 들면,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된 대북 사업가가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이산가족 명단, DMZ 부근 지역의 지형이 자세히 기재된 'DMZ 평화공원 개발계획' 자료 같은 것들을 팔아 넘기고 심지어 카이샷까지 팔아 먹으려다가 잡혔다. 1998년까지는 무장공비가 잡힌 기록이 있으나, 2000년대 이후 잡히는 간첩은 무장 공작원보다는 신분을 위장한 쪽이 많이 잡힌다. 2012~2016년 체포된 북한의 남파 간첩은 13명이었는데 이 중 12명이 탈북자였다.
2. 역사
이 행위를 막기 위해 지금도 대한민국 경찰청, 대한민국 검찰청과 국가정보원, 국군방첩사령부에서는 간첩을 색출해서 검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간첩을 통한 대남 정보 수집이 있다. 이를 위해 북한의 대남공작을 담당하는 부서는 정찰총국이라고 해서 2009년에 기존의 관련 부서들을 통합시켜 새로 만들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남 무장 공작원들이 밤에 몰래 간첩선을 타고 넘어오거나, 중간과정에 어민들이 발견해서 로또급 상금을 타는 일이 신문에 보도되곤 했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해안초소 인원들이 마을 잔치에 참석한다고 땡땡이쳐서 쉽게 침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간혹 조총련을 통해 재일동포로 위장해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으나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이후에는 힘들게 되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군의 기강이나 경계방식은 전근대적인 부분이 많았다. 당장 1996년에도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1997년에 서해안에서 일어난 일명 " 백소령사건"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간첩의 소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있다.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어가면서 북한간첩이 남한의 영해를 통해 들어오는 일은 확연하게 감소했는데. 이는 2000년대 이후 국군, 특히 해안방어를 맡는 대한민국 해군이 연안해군 수준을 벗어나 현대화, 첨단화되어 해안경계 태세가 굳어지고 군 기강이 바로 서게 되어서 해군 및 해양경찰의 경비함정 및 전탐감시대 등의 감시망을 뚫고 내려올 방법이 없어서이다. 후방 해안은 이제 철책도 다 철거하고 사실상 철수했고, 해안경계 협약을 해군과 해경만이 맺을 정도로 해상방어태세가 강화되었다. 그리고 철책이 쳐진 강원도 및 경기도 전방 해안은 해군은 물론 지상의 육군과 해병대 경계병의 눈을 못 피한다. 물론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이나 삼척항 목선 귀순 사건 등의 사례가 있다.
사실상 2020년대에 접어든 현재시점에서 현대화까지 된 한국으로서는 철책에 적외선카메라까지 설치하고 있는데, 그것까지 피하고 간첩이 오기는 상당히 힘들다.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도 CCTV가 굉장히 많이 깔린 편이고, 간첩 침투뿐 아니라 민생 치안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네이비 씰 출신 출연자가 현지 경찰과 사전 합의 하에 도주하는 자신을 제한 시간 내 붙잡고 사후 강평을 통해 취약한 보안 요소를 지적하는 TV 프로그램에서도 제주도 경찰이 출연자가 선착장에 발을 디디자마자 CCTV를 통해 추적, 끝내 그를 잡아낸 바가 있다.
물론 감시가 철저하다고 해서 간첩이 아예 안 들어오는 건 아니니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그런 감시를 뚫고 잠입하는 게 전세계 간첩들의 일이고 무엇보다 한국보다 더 철저했던 냉전 시대 소련과 미국은 수도 없이 서로에게 성공적으로 공작원을 보냈다.
때문에 2000년대 이후로는 탈북자, 조선족, 필리핀인 등으로 위장하는 식으로 들어오고, 안 들키고 들어온 이후에도 타국과 비슷하게 직접 공작활동을 하기보다는 한국인을 포섭해서 공작활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다만 2019년에 북한의 간첩을 국정원이 체포한 사례가 있다. #
2021년 이후부터는 위와는 다르게 직접 대남 간첩을 파견하는것보다는 해외에 공작원을 보낸 뒤 그곳에서 한국내 조력자들을 포섭 및 접선하여 지령과 공작금을 주고받거나 사이버상에서 공작활동을 벌이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4] 대표적으로 충북의 기자단에게 지령을 보내 기사를 작성한 기자 4명에게 국가보안법 4조가[5] 적용되는 일이 벌어졌으며. * 다만 하는 짓마다 뻘짓이어서 NL정당인 진보당에서마저 징계를 받자 탈당했고, 공작금 절반을 삥땅치고 다녔다.
또 2022년에는 현역 대위 군사기밀 유출 사건이 발생했다. 무려 북에 매수된 육군 현역 장교가 가상 화폐를 대가로 군사 기밀을 넘기려다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발각되어 체포된 것이다. #
황장엽이 간첩이 5만 명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황장엽은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 실제 파악된 북한의 남파 공작원의 수는 1953년부터 1999년까지 6,446명이다. # 물론 파악되지 않은 간첩도 있을 수도 있고 2000년대 이후에 탈북자의 수가 엄청 늘었기 때문에 탈북자 틈에 섞여 한국으로 들어온 간첩들의 수도 많이 늘었을 지도 모른다. 2014년 탈북한 김국성 전 정찰총국장도 2021년 10월 영국 BBC 인터뷰에서 1990년대 초반 당시 청와대에도 고정간첩이 있다고도 주장했으나 국정원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했다.( 서울신문 기사)
2014년 국정감사(이철우 의원) 자료에서는 2003~2013년 10년간 24명의 한국인이 북한 간첩에 의해 포섭되어 협조하거나 정보를 누출하였으며, 그 외에도 30여 명의 한국인이 북한 이외의 국가(우방국 포함)에 포섭되어 협조했음이 드러났다. 아버지는 방아쇠를 당겼다, 국정원, 'PC방 간첩 체포' 확인...간첩 행위 배경 집중조사
3. 식별
3.1. 일반인 간첩 식별
원래 사람이 작정하고 속이면 찾아내기 정말 힘들다. 간첩도 아니고 교육도 받지 못하고 지원도 받지 못하는 공상허언증 환자조차도 6년씩 함께 살아온 남편을 철저히 속일 정도였다. 그런데 현대 정보기관에서 보내는 간첩이라는 건 거기다가 추가해서 선발, 교육, 지원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지원을 한다. 선발부터 가장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게 생긴 사람을 선택해서 3~5년씩 전문적인 교육을 한다. 남파공작요원 정수일과 8년씩 함께 살아온 아내조차도 남편이 중동계 동남아인이라고 의심없이 믿어, 검거 직후에는 안기부에 모함이라며 격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정수일의 생활 방식은 이슬람을 따랐으며, 잠꼬대까지도 아랍어로 했고 과격한 정치적 발언은 철저히 삼갔다. 결혼생활 중에도 비밀리에 4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각종 첩보[6]를 수집해 중국으로 보내는 등 간첩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아내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1990년대까지만 해도 간첩 식별법은 대다수 내용이 애매모호했는데, 예컨대 일정한 직업 없이 배회하거나, 납북됐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오거나, 화폐 단위를 헷갈렸으며 그 외에 익숙한 데 오고도 처음 온 것처럼 낯설어하는 등 21세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사례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거동이 몹시 수상하고 기이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간첩보다는 거동수상자로 보면 된다. 물론 국가정보원에서도 간첩 식별 요령은 배포했지만 여기 다 들어맞는 사람이라고 해도 간첩, 협조자, 잠입 중인 요원일 확률은 생사람 잡고 욕 먹을 확률보다 훨씬 낮다.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서 누가 보더라도 정황증거상 간첩이 확실해 보인다면? 절대 추궁하거나 내색을 보이지 말고 간첩신고를 해야 한다.
설사 당신이 의심한 사람이 진짜 정보기관원이라 할지라도 상대는 몇 년간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이기에 절대 자백하지 않는다. 심지어 고문을 한다고 쳐도 제대로 된 정보를 분다는 보장은 전혀 없기에 일반적으로는 잡아도 고문을 하지 않는다. 또한 방첩기관에서도 법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에 표정이나 행동만으로는 체포할 수 없고, 몇 달 가까이 미행하고 도청기 붙이고 만나는 사람 감시해야 겨우 1, 2건의 증거가 잡히는 게 보통이다. F-35 도입 반대 운동 간첩 개입 사건처럼 무려 21년을 추적하고 나서야 겨우 구속한 사례도 있다.
이 정도 정보력이 없다면 함부로 시도하면 안 된다는 거다. 30년 전에나 먹혔을 만한 무의미한 내용은 삼가기 바란다.
- 탈북자, 외국인, 재외동포가 자신의 이름/직업/국적 등 전혀 속일 이유가 없는 신상정보를 속이거나 거짓 증명서를 제출하다가 발각된다.
- 인기없는 남성에게 탈북자, 외국인 여성이 먼저 접근한다. → 일단 마음을 쉽게 놓지는 않는 게 좋다.
- 자신이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인기 없는 여성인데 외국인 남성이 먼저 접근한다.
하지만 생사람을 잡지 않기 위해 항상 주의해야 한다.
- 중국 동북 3성[7]에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인데 그 지역에 자주 방문한다. → 역사학자, 사업가, 선교사일 수도 있다. 동북3성은 고구려와 발해의 주 무대였으며, 지금 중국은 대한민국과 우호협력국이다. 당연히 중국을 상대로 활동하는 무역업 종사자들이 아주 많다.[8] 또 요즘은 관광도 발달되어 있어서 중공 취급하며 중국여행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옛날과는 다르다. 백두산 관광은 중국 측 영역을 통해 이뤄진다는 걸 기억하자. 즉, 역사학자, 사업가, 선교사가 아니고 관광 목적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자주 갈 때만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에서 남한에 관한 정보가 없었던 90년대까지만 해도 몇 년에 걸쳐 철저히 교육을 받은 간첩들조차 실수를 했다. 예컨대 1984년 대구 간첩 사건 때는 버스요금을 몰라서 만원권 지폐를 내는 등 남한의 물가 개념을 전혀 모르는 모습을 보였고, 1997년의 부부간첩단 사건의 경우에도 10년간 간첩 교육을 받았지만 버스 요금 내는 법, 메밀소바 먹는 법 등을 몰라 실수를 연발했고 식당 종업원에게 말을 걸다가 '젊은 사람이 말투가 이상하다'고 들키자 경악해서 식당을 뛰쳐나오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북한에서도 남파공작원을 훈련 시키기 위해 납북 민간인들을 이용하여 서울말을 교육하고 훈련소 내부에 서울 시내를 재현한 세트장까지 만들어서 남한 민간인 생활을 훈련 시키기도 했다.
1977년 석래명 감독 영화 <고교얄개>에선 수 톰슨의 <Sad Movie (Make Me Cry)>를 개사한 '간첩송'이 있는데, 해당 노래는 MBC 창사50주년 특별기획 다큐 <타임> 2011년 6월 23일 방송분 엔딩에서도 나온다.
3.2. 방첩기관 식별
자세한 내용은 방첩기관 문서 참고하십시오.이렇게 간첩 잡는 게 어렵지만 한국에서도 1년에 간첩 10여명, 협조자 3~5명 정도는 검거된다. 국정원의 경우 간첩 사건 하나당 5~8명 정도의 부서를 구성하며 2, 3년씩 한 간첩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도청, 미행[9] 등 초법적인 감시수단, 주민등록 기록 등 정부 차원에서나 얻을 수 있는 개인정보를 동원한다. 하지만 방첩기관에서도 쉽게 잡지 못한다. 정수일의 경우 1984년 시민으로부터 북한 간첩인 것 같다며 간첩신고가 들어온 적이 있으나, 전혀 수상한 점을 찾지 못해 수사가 종결되고 기록을 파기해버렸다. 잡을 수 있었던 건 1996년이 되어서였다. 화폐 단위를 원화가 아닌 '환'으로 착각하여 일차적으로 의심을 샀고, 그 후 사투리, 연락처 등으로 의심을 받아 신고를 받았었으나 국내 이슬람 지도자들이 신원보증을 해줘서 의심이 풀렸다.
3.3. 무리한 방첩 수사
남북한 특수부대원이 동시에 한 자리에 와서 진실을 말하는 영상. 생각보다 간첩 기준이 두리뭉실하다는 뜻이다.[10]] 이 사람들은 유사시에 "박정희 목따러 왔수다" 같은 일을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다. (물론 평상시에도 기계마냥 감정을 숨기고 사는 건 아니니까 어이없음의 기준이 딱히 높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 두사람이 서로 어이없어하며 깔깔깔 웃는걸 보자. 간첩들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동시에 빵터진건 흔한 증언이 아니다. 오히려 북한보다 중국으로 기술정보를 빼내는
산업스파이가 훨씬더 위험하다. 북한 간첩 따위보다 훨씬 심각하다.
한국에는 과거 간첩을 잡는 것보다는 만드는 것에 더 혈안이 되었던
흑역사도 있다. 간첩이 내려오는 일이야 뭐 늘 있었기는 했지만 당연히 나 잡아봐라 하면서 순순히 붙잡힐 행동을 아무때나 할일은 당연히 없다. 독재정권차원에서 권력을 강화하거나 불리한 이슈가 돌아다닐 때 손쉬운 정국전환 방법이 공안정국 조성이었던데다가, 대공수사기관 입장에서도 예산확충이나 특진 등의 이익이 많았기 때문에 손쉬운 길을 택한 것으로
남파간첩이 없으면 남파간첩을 만들면 되지라는 시도로 국내 민주인사와 반체제 인사는 물론이요, 일반 국민들 중 만만하거나 일찌감치 찍어놓은 무고한 사람을 영장 없이 잡아다가 간첩으로 몰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수요를 창출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유학온 재일교포 유학생이 간첩이라며 억울하게 옥살이하거나 보수여당 국회의원임에도 간첩혐의로 사형당한다거나 살인사건 피해자가 난데없이 간첩으로 둔갑해서 가족들이 고통받는 등 별의별 일이 많았다.이들은 수사기관에 영장 없이 불법체포되어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재판 때도 '간첩' 누명으로 변호사마저 구할 수 없었다. 심지어 본인만이 아니라 부모, 형제, 아내, 자식, 사돈의 팔촌까지 '불고지죄'로 엮여 잡혀가 곤혹을 치르는 경우가 흔했으며, 출소 후에도 요시찰 인물로서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고 사회로부터 '빨갱이' 취급을 받으며 가정이 파괴되고 연좌제 때문에 취업길이 원천 봉쇄되기도 했다. ( 참고)
무려 2010년대에 발생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의 경우를 보면, 민주화 시대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민주화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검찰 공안부, 국가정보원, 경찰 보안수사대, 기무사 등의 수사 및 정보기관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원정화 간첩 사건에서도 원정화의 주장이 그때 그때 달라서 뭐라고 단정짓기 곤란한 상황이다. 왕재산 사건만 해도 오길영 신경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디지털 포렌식 측면에서 검찰이 제시한 디지털 증거에 대한 문제가 많으며, 디지털 증거의 증거 능력에 대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간첩 관련 수사에 대한 여론이 국내에서는 좋지 않은 편이다. 대한민국의 관련 부서는 과거 끔찍한 악행들을 수도 없이 저질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렸고 이는 도저히 쉴드의 여지가 없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거로 인해 신뢰도와 이미지에 극심한 타격을 받은 상태고, 옛날 이야기라고만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과 같이 민주화된 뒤에도 비슷한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뭔 사건만 터졌다 하면 이 사건을 이용해 정부가 무언가를 하려 한다는, 의혹 제기나 수사 태도에 대한 비판 등이 쏟아지는 상황. 남파간첩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존재임에도 국가가 지속하여 이러한 조작사건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양치기 소년 이야기처럼 진짜 북한 간첩에 대한 수사에서도 또 가짜 아니냐는 식의 부정적 기류가 형성될 수 있다. 즉 국가기관에서 국가안보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이를 정권 유지를 위해 이용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매국 행위라고 봐도 된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간첩을 색출하고 검거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무조건 음모론으로 몰아가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보기관의 탈정치화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국가의 숙제지만, 그렇다고 정보기관의 활동 의의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 따라서 가장 현명한 방법은, 1차적으로 수사를 진행한 정보기관의 내용을 주시하면서 언론의 보도, 사건의 양상 등을 보면서 조심하는 것일 것이다. 즉 사건의 실체에 대한 섣부른 판단보다는 경각심을 가지면서 다시 한 번 간첩의 위험성 등을 상기하자는 것이다. 무조건 믿는 것, 무조건 믿지 않는 것 둘 다 해롭다.
4. 목록
가나다순으로 배열.5. 관련 사건사고
자세한 정보는 국가정보원 과거 자료를 참조.모든 정보가 공개되는 민주주의 국가라면 일반적 수준의 군사정보도 당연히 공개되기 마련이다. 대간첩작전도 언론에 의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어, 라디오만 있으면 적 정규군의 배치를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한국군이 매우 애를 먹은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책 '공수부대 이야기'의 저자가 작중에서 한 평가는 시X 내가 간첩이면 라디오부터 뽀리겠다라며 그 정도로 정확했다고 한다.[11]
6. 관련 문서
[1]
자발적으로 북한 당국에 협력하는 자, 남한 출신이지만 간첩에 의해 포섭된 자는 일반적으로 남파공작원으로 분류되지 않고 "
종북주의자"로 칭한다.
[2]
북한에서 공작원은 장교이다.
[3]
육군참모총장(육군 대장) 예편
[4]
사이버 드보크나 스테가노그래피, 혹은 클라우드와 같은 방식으로 접촉한다는것.
[5]
간첩죄.
[6]
단 이 첩보는 그렇고 그런 내용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이 아랍 관련 연구 내용이라 북한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는 말이 있다.
[7]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8]
특히 미중유 이 셋은 무역업자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곳이다. 시장가치가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9]
일반인이 시행하면 불법이나,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10]
아닌 게 아니라 두사람 모두 상술하였던 블랙옵스의 범위 중 하나인 직접 무력투사를 수행하는 군 정보기관 소속 특수임무대이다. 방첩이 주 임무는 아니었지만 수년간 임무 수행을 위해 혹독한 훈련을 거쳐온 이들이다. 일반 특수부대는 군복이나 CQC라도 공개되지만 이사람들은 조직명을 제외한 모든것이 기밀인(심지어 개인화기도 불분명하다) 정보기관 직할 요원들이다.
[11]
다만 강릉 사건은 군과 언론의 협력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 국군의 경우 공개해도 무방한 정보는 (특히 인사정보) 보안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으면서 정작 공개하면 안 되는 정보는 그냥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