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E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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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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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렌지 벨로드롬 (프랑스, 마르세유) | ||
주심: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 ||
관중: 55,000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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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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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 대한민국 | |
37'
필립 코쿠 (A.
데니스 베르캄프) 41'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A. 빔 용크) 71' 데니스 베르캄프 (A. 아론 빈터르) 80' 피에르 판호이동크 (A.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83' 로날트 더부르 (A. 빔 용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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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대한민국은 이 경기에서의 대패로 인해 남은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되었다.
2. 경기 전 예측
이변의 드라마를 꿈꾸며 옆의 링크는 당시 경향신문 프랑스 특파원이 네덜란드전을 앞두고 쓴 기사이다. 경향신문 프랑스 특파원은 최소 2:0 이상 승리를 예상했는데, 다른 외국 기자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며 한국은 그것이나 기대해 보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고 한다.해외 축구 자체에 대해 매우 무지하기 짝이 없었으며, 당시 대한민국은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이한 상태였다. 환경도 열악하다 보니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이나 방송은 멕시코전의 패배는 잊었다는 듯 앞다투어 네덜란드 해볼만 하다, 네덜란드 약점은?, 네덜란드 격파 비책 같은 제목으로 이른바 뇌피셜만 가득찬 축알못스러운 기사들만 주구장창 골라서 쏟아냈다. 한편 어떤 무속인[2]은 네덜란드에 3:1로 이긴다고 해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네덜란드에 3:1 승리 무속인
그나마, 유일무이하게 꿈이나 깨라고 예언 수준으로 예측한 것은 시사저널 딱 한 곳 뿐이었다. 시사저널은 "다들 꿈에 취해 있는데, 한국 축구 수준으로는 월드컵 16강은 커녕, 1승도 불가능하다. 잘해야 1무로 승점 1점만 얻는다. 이번 월드컵은 잘해봐야 승점 1점과 1무 2 패가 고작이며 네덜란드에게 대한민국은 4골차 이상으로 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측까지 해 버렸다. 이에 당시 시사저널은 악성 국뽕 중독자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들었지만, 경기 후에 경악스럽다고 독자들이 뭔 예언이라도 했냐고 반응했다.
경기 당일 신문 제목들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최용수는 네덜란드전에서 반드시 결승골을 넣겠다고 인터뷰했다. 최용수 반드시 결승골을 넣겠다 기사들 제목은 오늘 네덜란드 잡는다, 차범근 비책, 네덜란드 잡으면 16강 청신호, 44년 한 꼭 16강 간다 등이었으며 비겼을 때 경우의 수를 논하는 글들도 아주 드물게 있긴 있었다. 확실히 상대하는 3개국 중 제일 강팀이 네덜란드라는 것은 알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1차전인 벨기에전에서 비기는 것을 보고 우리도 해볼만 하다는 생각은 그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더욱 커진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선 일본과 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 일본이 0:1로 석패했지만 그나마 선전하는 것을 봤는데다 현지 유럽 언론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볼일 없는 모습을 질타하는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나서 그렇게 됐을 이유도 있다지만 그 당시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면서 한일 양국 정상이 이런 약속을 한 전례가 있었다.
유럽 언론은 차범근 전 감독이 월드컵에서 승리를 얻지 못해 자신을 질타하는 대한민국 팬들의 분위기를 전하며 일본과 비교했을 때 대한민국은 실망스럽다는 식의 기사를 실었다. 차범근 전 감독 압박 대한민국 관중들
이때의 네덜란드 vs 벨기에 경기의 결과는 순수히 양 팀의 실력만 보고 선수들의 멘탈을 좌우하는 양국 관계를 몰라서 나온 말이다. 비록 당시 벨기에는 대부분 30대가 넘은 팀이고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네덜란드에 처지는 상태였지만, 사실상 홈팀이었고(벨기에는 프랑스와 이웃나라다) 과거 벨기에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국가였고, 그것 때문에 네덜란드를 숙적으로 여겨 네덜란드와 경기를 할 때면 항상 자기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면이 있던 것이다. 실제로도 1974 FIFA 월드컵 서독,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유럽예선에서는 네덜란드가 벨기에를,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는 벨기에가 플레이오프 끝에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월드컵에 올라갔다. 그리고 4년 전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는 벨기에가 네덜란드를 잡았다.
심지어 네덜란드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흑백 갈등을 지적한 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나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두고 한 얘기였고 실제로 당시 악동으로 불렸던 클라위버르트가 훈련 중 다툼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있기는 했고, 팀 내에 흑백 갈등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히딩크가 그 문제를 잘 통제,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6] 정작 차범근 본인은 "네덜란드와는 비기고 벨기에를 꺾는 것이 목표다"고 말했다.[7]
최용수는 자신의 골 결정력이 네덜란드의 데니스 베르캄프에게 뒤지지 않고 네덜란드를 상대로 반드시 결승골을 넣고 마르세유에서 1승을 얻겠다고 호언장담했다.[8] 마르세유 1승 기적은 있다.
아무튼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같은 언론의 유언비어 보도를 믿었던 많은 국민들은 듣도보도 못한 나라 네덜란드 정도면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을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위성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이 널리 퍼지지 않았던 때였고, 해외 축구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시의 축구 전문가들 정도 뿐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른바 축빠들은 흔히 축구 잘 하는 나라라 하면 월드컵 단골 손님들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 이탈리아 정도를 생각했고[9], 유럽 만년 콩라인 네덜란드가 어느 정도로 강팀인지, 심지어는 네덜란드가 세계 지도의 어디에 있는지나 어느 대륙에 속하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10] 게다가 KBS에서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유럽 예선도 몇 경기 골라서 중계해줬고, 축구 잡지 베스트 일레븐에서는 본선 32개국 진출 예상 선수 개개인의 플레이 스타일까지 소개할 만큼 나름의 정보 제공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축구계는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었다.
한편,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을 당시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대한민국 언론들 및 이를 믿었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예상과는 완전히 딴판일 정도로 상당히 강력한 스쿼드를 갖춘 강팀이었다. 네덜란드 대표팀의 전성기로는 1974 FIFA 월드컵 서독과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서 연이어 월드컵 준우승을 이룬 시절, UEFA 유로 1988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시절,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준우승을 했던 시절 등이 꼽힌다. 전대회인 1994 FIFA 월드컵 미국 때도 네덜란드 대표팀은 매우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8강전에서 우승국 브라질을 만나 2:3으로 석패했지만, 이 경기는 전반전 내내 0:0으로 팽팽히 맞선 데다가 후반전에 들면서 0:2로 뒤지고 있다가도 곧바로 2:2까지 따라붙는 근성까지 보여주었을 정도로 대회 최고의 명경기로 꼽혔다.
UEFA 유로 1988 우승 당시 네덜란드는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앞세운 오렌지 삼총사로 우승을 차지했는데 오렌지 삼총사 외에도 수비수 로날드 쿠만과 그의 형인 에르빈 쿠만, 얀 바우터스, 제랄트 바넨부르그, 아론 빈테르, 반 티그렌과 골키퍼 한스 반 브루켈렌 등이 포진될 정도로 막강한 스쿼드를 가졌다. 참고로 이때 네덜란드는 유로 대회 직전에 열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자국 명문팀인 PSV 아인트호벤이 거스 히딩크 전 감독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등의 면모를 과시해 나름대로는 절정의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스쿼드만 봐도 꽤나 화려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들은 섀도우 스트라이커의 교과서 데니스 베르캄프를 필두로, 세계 정상급 스피드 윙어였던 마크 오베르마스, 최강의 타겟맨 파트릭 클라위버르트[11], 중원의 싸움닭 에드가 다비즈와 프랑크 더부르- 로날트 더부르 형제[12], 루드 굴리트 이래로 네덜란드 최고의 테크니션이라 평가받은 클라렌스 세도르프, 다재다능한 만능 멀티플레이어 필립 코쿠, 캄펜의 바위라 불리며 강력한 피지컬로 상대 공격수들을 제압하는 수비수 야프 스탐, 그리고 이제는 전설이 된 최고의 골키퍼 에드윈 반 데 사르 등 당대 월드 클래스로 불릴만한 선수들이 즐비했다. 이렇게 탑클래스급 선수가 굉장히 많았는지 프리미어 리그에서 16골을 넣은 하셀바잉크가 오히려 서브 스트라이커였을 정도였다. 게다가 팀 구성도 포지션 편중은커녕 공수 전반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골키퍼까지도 완벽했던 것이 1998년 네덜란드의 스쿼드다. 한마디로 1998년 네덜란드의 스쿼드는 네덜란드 2번째 전성기였던 것이다.[13] 각종 게임이나 TV, 영상 매체로 축구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현 세대 입장에선 당시 각 리그 레전드들을 박박 긁어모은 수준의 압도적인 스쿼드다. 게다가 경험과 능력면에서 매우 뛰어난 거스 히딩크가 지휘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독일에서 선수로만 지낸 차범근이 지휘하는 한국과는 차원이 너무나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네덜란드 선수들 대부분은 각각 다른 팀에서 뛰고 있었지만 1994-199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을 이뤄낸 AFC 아약스 출신의 멤버들로 조직력 또한 문제가 없었다. 네덜란드는 결국 이 대회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을 만나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석패했지만 객관적인 경기력은 브라질을 앞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며, 히딩크가 이 대회 이후 사임한 것도 저렇게 훌륭한 스쿼드를 가지고도 4강 그것도 4위에 그쳐서 실망스러운 결과였기 때문이라는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니까 정말로 네덜란드가 콩라인만 아니었다면 우승을 논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강력한 스쿼드인 것이다.
물론 상기한 대로 당시는 비단 유럽 축구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하면 매우 무지한 시기였기에[14] 많은 국내의 축구팬에게 네덜란드가 얼마나 잘 하는지 모르던 시절이다. 유럽의 강호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잉글랜드, 독일, 브라질, 아르헨티나같은 팀에 비해서는 유명세가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15]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과 신문선도 자막의 다비즈의 로마자 스펠링만 보고 "다비드즈?"라고 잘못 발음했을 정도로 나름 국내 축구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조차 유럽 축구에 대해 매우 무지했다.
그러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공격력을 가진 네덜란드는 월드컵 전 평가전에서 파라과이, 멕시코,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모두 5골이나 넣는 가공할 공격력을 보여준 팀이다. 즉, 당시 16강 정도의 전력을 가진 팀을 상대로도 네덜란드는 5골을 넣을 수 있는 팀인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네덜란드에 5골을 실점한 것은, 유럽 축구를 어느 정도 잘 아는 사람에게는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네덜란드전을 앞둔 대한민국에 펠레는 컬럼을 통해 최소한 무승부를 거두어야 하는 경기지만 그렇다고 수비만 하지는 말라고 조언하며 하지만 네덜란드는 5골을 넣을 수 있는 팀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잘 못하면 네덜란드에 5골을 실점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은 해외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부 국내팬들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경기 전날의 연습 시간에 자신들의 연습 시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내주지 않고 슈팅 연습을 계속 해댔고[16][17], 강력하고 정교한 슈팅들이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 대한민국 선수들은 0:1로 뒤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정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이는 거스 히딩크의 전략으로, 후에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언급하였다.[18] 게다가 경기날 경기장 분위기도 대한민국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당시 55,000명의 관중 가운데 60% 정도가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은 네덜란드 응원단이었고, 대한민국은 완벽히 원정의 분위기에서 압도당한 채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19]
3. 경기 실황
네덜란드 선발 명단
4-4-2 감독: 거스 히딩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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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1. 에드윈 반 데 사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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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20. 아론 빈터르 |
CB 3. 야프 스탐 |
CB 4. 프랑크 더부르 |
LB 5. 아르투르 누만 ▼ 80' 15. 윈스턴 보하르더 ▲ 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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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W 14.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41' |
CM 6. 빔 용크 |
CM 11. 필립 코쿠 37' |
LW 16. 에드가 다비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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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7. 로날트 더부르 83' ▼ 84' 12. 바우데베인 젠던 ▲ 84' |
CF 8. 데니스 베르캄프 71' ▼ 77' 17. 피에르 판호이동크 ▲ 77' 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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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10. 최용수 26' |
CF 9. 김도훈 ▼ 69' 14. 고종수 ▲ 69' 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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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6px -11px;" |
LWB 6. 유상철 |
CM 11. 서정원 ▼ 77' 21. 이동국 ▲ 77' |
CDM 7. 김도근 |
CM 15. 이상윤 |
RWB 2. 최성용 ▼ 53' 13. 김태영 ▲ 53' |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CB 5. 이민성 |
CB 20. 홍명보 |
CB 4. 최영일 |
}}} | |||||
GK 1. 김병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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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발 명단
3-5-2 감독: 차범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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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하이라이트 영상 | MBC 하이라이트 영상 |
네덜란드 선발 및 교체 기록
에드윈 반 데 사르(골키퍼), 아론 빈터르, 아르투르 누만(80분 교체 → 윈스턴 보하르더), 야프 스탐, 프랑크 더부르, 로날트 더부르(84분 교체 → 바우데베인 젠던),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에드가 다비즈, 빔 용크, 필립 코쿠, 데니스 베르캄프(77분 교체 → 피에르 판호이동크)
대한민국 선발 및 교체 기록
김병지(골키퍼), 홍명보, 최영일, 이민성, 최성용(53분 교체 → 김태영), 유상철, 김도근, 이상윤, 서정원(77분 교체 → 이동국), 김도훈(69분 교체 → 고종수), 최용수
3.1. 전반전
김병지의 선방 |
참 이상해요, 왜 오늘 이렇게 서두르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당시 MBC 캐스터 송재익. 최용수가 프리킥 상황에 시간을 끌자 심판한테 경고를 받는 모습을 보고 한 말
프리킥 때는
최용수가 자꾸 킥을 하지 않고 도움닫기 거리를 최대치로 잡으며 무한정 뒷걸음질을 시전하다가 보다 못한 심판에게 경고를 먹기까지 했다. 결국 전반 37분 미드필더가 아닌 공격수로 출전한[21]
필립 코쿠에게 멋진 왼발 터닝슛 선제골을 허용한 데 이어 42분 역습 상황에서
마르크 오버르마르스에게 추가 골까지 허용하면서 0:2로 전반전을 마쳤다. 이때
이용수는 전반전을 마치고 아이, 37분까지는 잘 개겼는데~라고 말하기도.당시 MBC 캐스터 송재익. 최용수가 프리킥 상황에 시간을 끌자 심판한테 경고를 받는 모습을 보고 한 말
3.2. 후반전
[[데니스 베르캄프|{{{#ffffff 데니스 베르캄프}}}]]에게 세 번째 실점을 허용한 직후 허망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김병지|{{{#ffffff 김병지}}}]]와 [[김태영(1970)|{{{#ffffff 김태영}}}]] |
결국 대한민국은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에 0:5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김병지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5실점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며, 최악의 경우 미네이랑의 비극을 맞은 브라질이나 2002년에 최악의 스코어로 대패를 맞은 사우디아라비아에 필적하거나 그마저도 더욱 심각한 수준의 대패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경기에서 네덜란드의 슈팅 개수는 27개, 유효 슈팅이 17개였다.[24] 평범한 골키퍼였다면 두 자릿 수 실점이 나올 수도 있었다. 참고로 당시 대표팀의 후보 골키퍼는 서동명이었다. 서동명의 경우 김병지에게 밀렸으나 1년 전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세계 최고의 공격수 호나우두의 10번의 슈팅을 PK 실점을 제외하고 모두 선방한 경험이 있다. 만일 서동명이 나왔을 경우 실점을 더 많이 했을지 더 적게 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마찬가지로 패배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4. 요약
속수무책이네요.
신문선
신문선
완전히 오늘, 완패입니다.
이용수
이용수
이 경기를 지켜보신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참담한 심정, 저와 똑같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좌절을 해서는 안됩니다.
한국 축구는 꼭 다시 일어설 겁니다. 성원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네덜란드전을 직관한 이경규가 침통한 말투로 남긴 마지막 멘트[27]
네덜란드전을 직관한 이경규가 침통한 말투로 남긴 마지막 멘트[27]
5. 경기 평가
대한민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 한 경기에 5실점 이상을 기록하고 또 5점 차 대패를 당한 것은 대한민국이 최초로 진출한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28] 이후 44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내용과 상황을 보면 이번이 더 비참했다. 1954년엔 비록 헝가리에 0:9로, 터키에 0:7로 대패해 이 경기보다 점수 차는 더 컸을지언정 내용은 훨씬 더 선전한 경기이다.1954년 스위스 월드컵은 6월에 개막했는데, 6.25 전쟁이 휴전된 게 1953년 7월 27일이니 전쟁이 휴전되고 만으로 1년도 채 되지 못한 시점에서 지역예선에서 라이벌 일본을 이기고 16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한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1인당 GDP는 고작 67$로 세계에서 2번째로 굉장히 못사는 나라였다.[29] 전후 복구하기도 힘든 판국에 축구 따위에는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비행기표는 커녕 선수단 단복 맞출 돈조차도 없어서 축구협회 임원 한 사람이 양복점 운영하는 지인에게 사정사정해서 외상으로 겨우 맞춰 입었으며[30] 스위스까지 갈 때에도 돈이 없어서 선수단 전원이 입성하지 못하고 1진, 2진이 나눠서 가야 했다. 그나마도 마침 태국에 여행 와 있던 영국인 신혼부부가 자기 좌석을 양보해줘서 간신히 갈 수 있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스위스에 도착하니 개막식은 이미 다 끝난 상태였고, 헝가리전 킥오프까지 겨우 10시간 남은 상태였다. 여독도 제대로 풀리지 못한 상태에서 시차 적응도 못하고 그대로 옷과 신발만 환복한 다음 바로 뛰었다. 거기다 1950년대 당시 헝가리는 지금의 프랑스, 아르헨티나급의 세계 최강팀이었다. 그런 팀을 상대로 신생 독립국이 9골만 내준 것은 오히려 굉장히 선전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이 예측한 그 경기 스코어는 최소 20:0 이상이었다. 그런데 9:0으로 끝나자 오히려 대한민국의 선전을 칭찬했다. 헝가리를 비난하는 말도 있었지만, 당시 월드컵 최다 득점으로 이긴 터라 그렇게 많이 욕은 먹지 않았다.
그런데 1998년은 지난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FIFA 랭킹 5위 & 전대회에서 1:3 패배를 안겨준 스페인을 상대로 2:2 무승부 승점 1점, 남미 예선 3위 볼리비아에게 0:0 승점 1점[31], FIFA 랭킹 1위 &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상대로 2:3 석패를 기록해 어느 정도 유럽 강팀과도 맞붙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던 때였다. 그러한 희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뜻밖의 졸전을 벌였으니 많은 한국 축구팬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제대로 안겨준 경기가 되고 말았다. 홍명보는 네덜란드전에 대해 후일담에서 경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고 회고하였고, 당시 경기를 생중계하던 KBS 캐스터 서기철 역시 5번째 골이 들어가자 망연자실하여 차라리 경기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요...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때 새벽잠을 설쳐가며[32] 경기를 시청한 사람들 대부분 역시 맨정신으로 끝까지 경기를 지켜볼 수가 없었고, 많은 축구 팬들에게 네덜란드 트라우마를 제대로 안긴 경기이다. 이 경기 이후로 네덜란드는 국내 팬들의 관심 팀이 되는데, 잊힐만 하면 유로 예선에서 중하위권 팀들에 대량 득점을 하며 "역시 네덜란드는 양민 학살의 달인"이라는 평을 하게끔 만들었다.
특히 당시 국내 최고의 준족을 자랑하던 날쌘돌이 서정원이 앞이 탁 트인 상황에서 공을 잡았음에도 뒤따라 오던 에드가 다비즈에게 따라잡히는 모습을 보이는 등, 지역 예선의 선전으로 우쭐해 있던 대한민국 축구가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물론 당시 서정원은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 아들을 안아주다 옮은 수두 때문에 정상 컨디션이 아니기는 했다. 근데 설령 서정원이 정상 컨디션이었다고 해도 유럽 내에서도 타고난 운동 능력을 가진 다비즈를 따돌리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서정원은 다비즈에게 따라잡히기 전에 이미 네덜란드 선수 하나를 제치는데 성공하고 드리블을 시도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기량은 이미 충분히 보여준 상황이었다. 이후 다비즈가 이후에 준결승 브라질전에서 당시 이 대회 골든볼 수상자이자 신체적으로 최전성기를 맞이한 호나우두를 상대로 쫓아가서 커트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정도로 굉장히 뛰어난 운동 능력을 보여준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서정원이 다비즈에게 따라잡혔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
당시 이 경기를 광화문에서 단체 관람한 초창기 붉은 악마들은 새벽 이슬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프로그램 촬영차 마르세유 현지에서 직관한 이경규는 네덜란드전에 대해서 멕시코전 녹화분을 보고 2차전에서는 울어서 감동을 줘 보자고 생각했는데, 경기를 보고 진짜로 울게 되더라며 이때를 회고했다. 그리고 경기를 직접 보러온 김흥국도 방송 카메라로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하며 보던 게 찍혔다. 이 경기가 대한민국 시간으로 새벽 6시경에 끝났는데, 패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경기 종료 직후에 시작된 아침 뉴스 오프닝에서 앵커가 사색이 된 얼굴로 잠시 말문을 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6. 대한민국의 패인
거스 히딩크는 이 경기가 대한민국 대표팀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파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 것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일단 첫 번째 문제는 체력으로, 한국 선수들은 전반 30분을 넘기고서 확실히 지친 모습이었다. 지난 월드컵에서는 독일과의 경기에서 비록 지기는 했어도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지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 독일을 긴장시키기도 했는데, 이번 네덜란드전의 선수들은 압도적으로 차원이 달랐다. 연장 전반이 아닌 그냥 전반전도 안 끝난 시점에 지친 것은 적장의 눈으로도 체력이 약점임이 드러난 경기였다.[33]두 번째는 상대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다가, 정신적으로 쉽게 흔들리는 선수들의 모습이다. 다음은 거스 히딩크 문서의 각주를 일부 따온 것이다.
훗날 인터뷰에서 경기 전 한국 선수들의 매우 무지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한 듯한 모습을 보고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다만 그렇게 대승을 할 지는 본인도 예상 못했다고. 2002년 이전 월드컵만 나가면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쩔쩔매다 자멸했다던 많은 국대 선수들의 인터뷰와 일맥상통한 이야기다. 이렇게 무지한 대한민국 선수들을 네덜란드 선수들은 일부러 쫄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한국과 네덜란드는 같은 연습장을 썼는데, 한국 대표팀이 도착한 후에도 히딩크는 일부러 훈련을 계속했다. 그런데 30분이 넘도록 대한민국 쪽에서 아무런 항의가 없어서 '얘네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라고 확신했다고. 당시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건지 외국만 나가면 뭘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서 쩔쩔매는 매우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다. 지금은 다 정보가 공개되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저렇게 외국에 나가서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준비를 제대로 안 하고 나가서 버벅대니, 한국 대표팀의 성적이 바닥을 기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선수들조차 대부분 국내나 아시아 무대 정도에서만 뛰었으니 개인 경험도 없어 저런 모습을 보인 것과 잘못된 훈련 방식과 상대 팀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도 문제였다.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출판된 거스 히딩크의 자서전 <마이웨이>에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에 대한 소감을 정확하게 적어놓았다.
...당시 월드컵에서 만난 대한민국 대표팀에 대한 느낌은 간단했다. 개인적으로는 잘하는데 조직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선수들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었고, 공수 협력이 제대로 안돼 우왕좌왕했다. 조직력에 문제가 있다보니, 선수들이 각자 혼자서 뭔가를 해보려 한다는 인상마저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 선수들은 몸이 굳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전원 공격, 전원 수비의 토탈 사커 및 압박 축구와 같은 당시의 축구 전술 흐름에도 완전히 무지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선수 시절 유럽물을 제대로 먹은
차범근이 감독이었어도 당시의 정보력으로는 세계적 흐름을 읽는 데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애초에 차범근이 몸담았던 독일의 축구 스타일 자체가 이 시기엔 이미 한참 뒤쳐져서 녹슨 전차군단이라며 조롱받던 시절이었음을 생각해 보자. 차범근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9년까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했다. 따라서
아리고 사키의
밀란 제너레이션이 몰고 온
압박과 공간이라는 현대 축구의 큰 흐름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히딩크가 간격과 공수 협력을 지적했듯이 당시 국내 축구계는 니폼니시를 제외하면 공수 간격 유지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차범근호 항목에도 나오듯이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전술은 빠른 윙어들의 측면 돌파 → 무한 크로스 → 최전방의
황선홍 or
최용수의 받아먹기가 전부였고, 중앙은 사실상
유상철 혼자 버티기였다. 이게 아시아에서는 통했지만 본선에서는 탈아시아급 상대들의 압박에 완전히 녹아내려서 속수무책이 되어버린 것이다.[34]세 번째는 차범근의 경험 부족과 자질 문제였다. 일단 차범근의 경험 부족이 제일 큰 문제로, 초보 감독인 차범근을 덜컥 대표팀 감독에 앉힌 것부터가 문제였다. 히딩크가 그가 문제라고 본 것이 전부 차범근의 경험 부족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당장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현역 시절 뛰어난 선수였다고 해서 명감독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35][36] 차범근이 지도자로서 어떤 자질을 가졌던, 1998년 시점에선 3년 간 울산 현대의 감독을 맡은 것이 전부였으니 대표팀 감독이라는 중책을 맡기에는 차범근의 지도자 경험부터가 분명 지나치게 짧았다. 차범근은 대표팀 감독직을 맡으면서 나름 선전해 도쿄 대첩이라는 업적도 세웠지만, 월드컵에서는 언론 통제를 제대로 못한 본인의 실수까지 겹치면서 결국 0:5 대패를 기록하는 단초를 마련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 실력 차이가 가장 크다. 마치 KBL 올스타와 NBA 올스타와 겨루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그 당시 1998년의 사정을 보면 해외 축구의 사정에 익숙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 유럽파가 늘어났음에도 여전히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알제리 쇼크로 최악의 광탈을 기록했다. 그나마 2002년 4강 이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제외한 나머지 월드컵 본선에서 꾸준히 1승과 월드컵 19위 이상은 했다는 것이 고무적인 성과이다.[37] 아시아 축구 대부분이 유럽, 남미에게는 힘든 게 현실이며, 설사 차범근이 아닌 그나마 더 능력 있는 다른 지도자가 감독이었다 해도 패배하는 건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네 번째로 대한축구협회의 실책이 컸는데, 사실 차범근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상술했듯 차범근은 감독으로써는 초보였고 감독 경험도 국내 리그만 3년 한 채 국가대표 감독이 되었다. 원래도 파리 목숨이었던 대표팀 감독직을 맡으면서 눈앞의 아시아 예선에 신경쓰느라 월드컵 본선 경기에 대비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최소한 차범근호는 아시아 예선에서는 나름 강력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차범근 본인은 지금도 알려진 기독교 관련 구설수 같은 것들만 언론에 나와서 곤욕을 치렀고 대한축구협회의 사내 정치에 휘둘리는 쪽이었다. 대한축구협회가 월드컵 개최지인 프랑스로의 출국 바로 전날 중국과 친선 경기를 잡은 게 대표적인데[38], 이 당시 중국의 거친 플레이로 주요 선수 황선홍이 월드컵 본선에 나오지 못할 정도의 큰 부상을 입는, 그야말로 굉장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중국은 당시 대한민국과 월드컵에서 상대해야 될 팀과는 레벨도 완전히 낮았으며 결국 아무 쓸모없는 경기로 체력과 전력만 무의미하게 소모한 꼴이 되었음은 물론, 이후 본선에서 멕시코 및 네덜란드전에서의 잇단 패배와 그에 따른 조기 탈락 확정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이 때문에 대한축구협회도 큰 비난과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차범근의 경질은 몇몇 실책은 대한축구협회도 같이 만들었음에도 그 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다 떠넘기고 꼬리자른 셈이라는 견해도 있다.[39][40]
7. 경기 후
경기 후 나온 석간판[41] 신문 제목들은 흔한 클리셰 중 하나인 "세계의 벽 높았다." 일색… 그나마 일간지들은 저 정도였지, 이날 저녁에 나온 스포츠신문 석간판 1면은 온통 "이 치욕 잊지 말자"느니, "김병지가 불쌍했다"느니 "이날 전국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등등, 원색적인결국 차범근은 네덜란드전 대패 직후 월드컵 중에 전격 경질되었고[43], 대표팀은 수석 코치 김평석을 감독 대행으로 올려 마지막 벨기에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이에 앞서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감독으로,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가 프랑스에 0:4로 대패한 직후 대회 도중 경질된 바 있다.
당시 경기 장소가 마르세유 오렌지 벨로드롬이라 마르세유의 치욕, 마르세유의 굴욕, 마르세유의 비극 등으로 불린다.
그래도 이 경기에서 빛났던 대한민국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17개의 유효슈팅 중 겨우 5골만 먹힌 김병지. 그리고 당시 19세의 이동국은 후반에 교체로 들어가 네덜란드의 골문을 위협한 날카로운 중거리슛과 코너킥에서 골키퍼 정면으로 향하는 강한 헤더 슛을 날리면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다음 대회를 기약하는 희망을 주기도 하였다.[44][45]
경기가 끝난 후 외신과 네덜란드 언론이 김병지와 이동국만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상이 심했으나 혹시 나을지도?" 하는 생각에 데려간 황선홍은 벤치에서 분루를 삼키며 진통제를 맞고라도 뛰겠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차범근이 이 대회가 끝이 아니라면서 만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편, 같은 조에 속한 멕시코와 벨기에는 대한민국 대 네덜란드 경기를 치르기 전에 이미 2:2 무승부를 기록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결국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조기 탈락이 네덜란드전 대패 직후 확정되고 만 것이다. 같은 조 4팀 중 대한민국만 유일하게 패배, 그것도 2패가 있기 때문이다.[46][47]
이 경기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당시 네덜란드의 감독 거스 히딩크는 이 때까지는 대한민국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비수를 꽂은 적장(敵將)이라는 인식을 만들게 하였다.[48] 이 때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은 거스 히딩크는 월드컵 이후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에서 사퇴했고, 스페인으로 건너가 레알 마드리드 CF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 1년 만에 경질되었고, 레알 베티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어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거스 히딩크에게 대한축구협회가 오퍼를 보냈고, 거스 히딩크는 마르세유에서 맞붙었던 대한민국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 대회를 앞두고 당시 적장이던 그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어서 4강 신화까지 이룩하게 만든 대한민국 축구의 영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으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다.[49]
이 경기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처음으로 문화 충격을 받은 경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킥오프 직전 관중석을 온통 오렌지색으로 뒤덮은 스타디움의 장관이 중계 화면을 통해 비춰지면서 사람들은 그야말로 시각적 쇼크를 받은 것이다. 지금이야 응원 팀과 같은 유니폼을 입거나 같은 색깔로 깔맞춤을 하고 경기장을 찾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는 붉은 악마같은 응원단체가 아닌 일반 관중이 응원 팀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응원한다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인 때였다. K리그 서포터즈 문화도 이제 막 태동하던 단계였다.
프로야구 조차도 아직 유니폼을 상품화해서 제작, 판매한다는 개념을 상상조차 못하던 때였다. 하여튼 경기 킥오프 전부터 그라운드 관중석 전체가 오렌지 빛으로 뒤덮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선수들도 선수들이지만 시청자들조차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경기였다.[50] 여러모로 대한민국 축구사에 임팩트를 안겨 준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당시 대한민국을 무너뜨린 적장이 여러 모로 대한민국 축구의 변화를 유도한 건 사실이다.
이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뛰었는데[51] 이 날의 대패를 기점으로 이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들은 대체적으로 결과가 좋지 못해 결국 월드컵에서의 마지막 파란색 유니폼 착용이 되었다.[52]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때, 우승이 확실하다고 설레발쳤다가 우루과이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 이에 충격을 받아 결국 흰색 유니폼을 아예 없애버린 브라질처럼 대한민국도 빨강 홈 - 흰색 원정 유니폼으로 바꾸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아예 공식화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53]
여담으로 2023 카타르 아시안컵에서도 요르단과의 4강전에서 흰색이 아닌 원정 유니폼(검은색)을 입었으나 전력차를 감안하면 이 경기 이상의 치욕적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54][55]
이후 이 조에서는 네덜란드와 멕시코가 16강에 진출했다. 멕시코는 16강에서 만난 독일을 상대로 분전끝에 16강 13위로 주저앉은 반면 네덜란드는 8강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인 아르헨티나를 침몰시키고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1980년 이후 잉글랜드 최강이라 불리던 선수인 데이비드 베컴이 이끌었던 잉글랜드를 16강에서 승부차기로 잠재우고[56] 올라온 아르헨티나였던지라 상당히 강한 팀이었는데 그런 팀을 누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브라질과 4강전에서 피터지는 승부차기까지 간 접전 끝에 장렬히 산화했다. 공교롭게도 네덜란드가 브라질에게 탈락한 경기장이 바로 이 오렌지 벨로드롬 경기장이였다. 이러한 오렌지 군단의 성과를 본 이후에야 네덜란드가 대한민국을 대파할만 했다는 여론이 생겼다.
그리고 2002년에는 네덜란드전과 동급의 난이도의 경기를 16강에서 치렀고 승리하여 4강에 올랐으며, 2022년에 이와 동급 이상급의 상대인 브라질에 맞섰지만 체력차와 전력차가 합쳐진 상황이라 결국 패배했다.
8. 중계
국내 중계 | ||
박영웅 | 이용수 | |
송재익 | 신문선 | |
손석기 | 허정무 |
9. 여담
- 이 경기를 끝으로 경질된 차범근은 훗날 SBS 축구 해설위원이 되었는데,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준결승전에서 벌어진 미네이랑의 비극을 보고는 남의 일 같지가 않다면서 이 날의 충격을 곱씹으며 브라질을 동정했다.[57] 생각보다 비슷한 점이 많기도 하고.[58]
- 차범근이 중계한 미네이랑의 비극과 이 경기를 비교해보면 주전 선수의 결장[59], 선수들의 경험 미숙[60], 국민들의 과도한 기대[61], 조국의 위태로운 경제 상황[62] 등의 공통점이 거론된다.
- 조별리그가 1조당 4팀이 속해 각 팀당 3경기, 총 6경기를 치르는 현재의 방식으로 정착된 이래 FIFA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대한민국이 조별리그에서 단 두 경기만에 조기 탈락이 확정된 월드컵은 이 경기가 있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유일하다.[63] 44년 전 최초로 대한민국이 16개국 본선에 진출했던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는 1경기~2경기, 승자전, 패자전으로 팀당 2경기를 치른 뒤 승자전 패배팀과 패자전 승리팀끼리 동률이 발생했을 시에만 재경기로 조별리그 3차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64] 무엇보다 그때는 대한민국이 월드컵에 낯설은 때였고, 시차 적응은 커녕 시합에 대한 준비조차도 제대로 못한 상황이었다.[65]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도 32강 조별리그에서 일찌감치 2패를 적립하긴 했지만 두 번 다 16강 경우의 수가 아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1990년 대회는 24개국 체제라 마지막 상대인 우루과이를 3점 차이로 이기면 조 3위 상위 4팀에 들어 24강 조별리그를 통과할 가능성은 남아 있었고,[66] 2018년 대회에서는 독일과 스웨덴이 후반 추가시간까지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대한민국의 조기 탈락이 재현될 상황이었으나, 종료 직전 독일이 토니 크로스의 극적인 역전골로 승리하면서 마지막 상대인 독일을 2점차 이상으로 이기고, 멕시코가 스웨덴을 이긴다면 멕시코를 뺀 세 팀이 모두 1승 2패로 물리며 대한민국도 조 2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67] 2026 FIFA 월드컵부터는 조별리그가 48강으로 확대되어 조 3위 상위 8팀에게도 조별리그 통과 가능성이 열리게 되며 이에 따라 2패를 기록한다고 해서 탈락이 바로 확정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먼 훗날 조별리그가 64강으로 확대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이 1986년[68] 이후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단 두 경기만에 탈락이 확정된 대회는 거의 영원히 이 대회가 유일하게 되었다.
- 대한민국은 1986년, 1994년을 제외하면 20세기에는[69] 대체로 월드컵에서 동네북 신세였지만 의외로 4골 이상의 점수차로 패배하거나 3골 이상의 점수차에 골을 넣지 못하고 패배한 적은 최초로 대한민국이 본선에 진출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16개국 본선을 제외하면 다른 월드컵 전 경기 중에 이 경기의 패배가 유일하다. 2010년 아르헨티나전에서는 4골을 내줬지만 최종스코어는 3골차에 1골을 넣은 상태로 패배했으며, 2014년 알제리전에서도 역시 4골을 내줬지만 2골을 넣음으로써 최종 스코어는 2골차다. 2022년 16강 브라질전에서도 우려했던대로 전반전에 4골을 내줘서 이 경기의 악몽이 재현되는 듯 했으나, 후반전에 들면서 1골을 만회한데다가 아예 무실점으로 틀어막기까지 하며 이 경기 수준의 대패를 면했다. 또, 이로부터 얼마 전에 치렀던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도 5골이나 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1골은 만회했다.
- 9년이 지난 2007년 6월 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A대표팀 친선 경기로 다시 만났는데 라파엘 반 더 바르트가 혼자서 31분( 페널티킥)과 71분에 각각 득점하면서 0:2로 패배해 설욕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와의 역대 A매치 전적은 현재 2전 2패 7실점 무득점인 상태다.
10. 관련 문서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 E조 독일 vs 사우디아라비아 (8:0): 당시 독일은 지역예선에서 잉글랜드에게 1:5로 대역전패를 당해 플레이오프로 떨어져 우크라이나를 꺾고 겨우 본선에 올라왔었는데 본선 진출 후 그 첫 경기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8:0으로 대파해 자신들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독일에게의 대패 이후 카메룬에게도 0:1, 아일랜드에게도 0:3으로 잇달아 져서 결국 월드컵 32강 조별리그 3전 전패 + 12실점에 무득점 + 한일 월드컵 전체 진출국 중에서도 32등 꼴찌라는 불명예 종합 세트를 받고 말았다.[70][71]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 G조 포르투갈 vs 북한 (7:0): 브라질과의 첫 경기에서 1:2로 비록 졌지만 비교적 선전했던[72] 북한이 포르투갈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는 무려 0:7로 참혹하게 발려버리며 일찌감치 떨어지고 말았다. 코트디부아르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0:3으로 지며[73] 결국 남아공 월드컵 전체 진출국 중에서도 32등 꼴찌라는 수모도 받았다.
- 8강 독일 vs 아르헨티나 (4:0): 당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디에고 마라도나의 삽질 때문에 대패를 하지 않을 수 있던 경기를 대패하게 만들었다.[74]
- UEFA 유로 2012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 A조 카메룬 vs 크로아티아 (0:4): 카메룬이 이 경기에서 완전히 개막장을 선보이며[75] 결국 조기 탈락이 확정되는 치욕을 맛보았고 최종적으로 전체 참가팀 중에서도 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 B조 스페인 vs 네덜란드 (1:5): 이것도 네덜란드에 5실점이나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이 무려 스페인이다. 다만, 스페인은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은 넣었다.[76]
- C조 일본 vs 콜롬비아 (1:4)
- H조 대한민국 vs 알제리 (2:4): 대한민국이 세계 최초로 아프리카 팀에게 4실점 이상 당한 경기.
- 준결승 브라질 vs 독일 (1:7): 무려 위 네 경기 결과들을 단숨에 잊게 만들 정도.[77]
- 2017년 EAFF E-1 풋볼 챔피언십
- 결승전 대한민국 vs 일본 (4:1): 일명 도쿄 대첩. 반대로 대한민국이 알제리 쇼크 감독의 일본을 원정에서 4:1이라는 스코어로 이긴 경기. 일본이 기록한 1골은 PK 선제골이다.
-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 D조 아르헨티나 vs 크로아티아 (0:3):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위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독일전 이상의 참패. 그런데 여기서도 두 팀 모두 16강에 진출했다.[78]
- 2019 FIFA 여자 월드컵 프랑스
- A조 대한민국 vs 프랑스 (0:4): 역대 남녀 성인 대회를 통틀어 첫 원정 개막전. 전반에만 3골을 내주는 등, 경기력에서도 아무것도 못 해보고 처참하게 패했다. 마르세유의 치욕 파리 버전 또는 파리 대참사.
- 2020 AFC U-23 챔피언십 태국
- A조 태국 vs 바레인 (5:0): 제 아무리 개최국이었다고는 하나 태국을 위시로 한 동남아 대표팀들은 상대적으로 서아시아에 비해 약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무려 5:0으로 발렸다.
- 8강 우즈베키스탄 vs 아랍에미리트 (5:1): 아랍에미리트가 조 1위로 통과했지만 상대는 대한민국과 이란이라는 죽음의 조에서 이란을 밀어내고 2위로 통과한 우즈베키스탄이었고, 결국 어찌어찌 선제골을 넣었으나 전반전에 3골을, 후반전에 2골을 먹혀 1:5 대패를 하고 만다.
- 2020-21 UEFA 네이션스 리그
- 4조 6차전 독일 vs 스페인 (0:6): 독일은 스페인과의 이 경기에서 무재배만 해도 조 1위로 토너먼트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0:6이라는 엄청난 점수차로 대패해 역대 UEFA 네이션스 리그 전체 최다 득실차 타이 기록을 세우고 대회를 망치고 말았다. 반면, 스페인은 이 경기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독일을 상대로 메이저 대회 3연승을 달성하였다.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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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결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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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vs 스페인 0:1 (연장) 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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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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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vs 대한민국 5:0 승 |
(2006) vs 포르투갈 0:1 패 |
(2014) vs 스페인 5:1 승 |
(2022) vs 아르헨티나 2:2 무 (PSO 3:4 패) |
[1]
후에 네덜란드는 야구에서도 2013년 WBC, 2017년 WBC에서 대한민국 상대로 오대영 스코어를 만들어 냈다. 특히 2017년때는 네덜란드 선발 투수가 2014시즌 삼성 라이온즈 에이스이자
거스 히딩크와 동향인
릭 밴덴헐크.
[2]
1차전인
멕시코전에서 대한민국이 1:3으로 패한다고 예언했는데, 운 좋게 적중했다.
[3]
김영삼 전 대통령, 하시모토 류타로 전 일본 총리, 월드컵 공동 개최 입장 표명
[4]
김영삼 전 대통령 하시모토 류타로 월드컵 결승전서 만나 멋진 맞대결 펼치자
[5]
대한민국은 결승 진출 문턱에서 독일에 발목이 잡혔고, 일본은
미야기 스타디움에서 열린 16강전에서 터키에 0:1 일격을 당하며, 결승 진출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6]
실제로
차범근 전 감독의 아들
차두리는 한때 스포츠 기자를 희망했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지만, 1998년 당시 아버지를 반쯤 매장에 가까운 기사를 써재낀
기레기들에게 학을 떼고 꿈을
축구선수로 바꿨다고...
[7]
이것도
계란으로 바위치기 수준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이긴 했지만, 이미 1패를 안은 상황에선 딱히 방법이 없었고, 저게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목표였다. 더욱이 네덜란드 대 벨기에 경기 결과가 무승부로 끝났기 때문에 당장 다음 경기인 네덜란드전 결과는 최소 무승부 이상이 필수 조건이었다. 1점차라도 지면 그 즉시 탈락이 확정되기 때문이다.
[8]
2022년(월드컵 본선 이전)의 척도로 따지면
황의조,
황희찬,
조규성 등등의 공격수가
해리 케인,
모하메드 살라,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급의 선수와 자신을 비교하며 그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감을 드러내 보인 격이다. 황의조나 황희찬도 유럽 빅리그에서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나름 괜찮은 활약을 펼친 선수들이지만 그럼에도 저런 발언을 했으면 미쳤다고 욕먹을 판인데 그 당시 아시아와 유럽의 수준차를 생각하면 진짜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자신감을 표현하여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절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냉정히 보면 실력차가 현격한 상대를 두고 가능성 낮은 필승을 장담한 셈이 됐다.
[9]
이 4개국 대표팀은 그 당시로서도 모두 월드컵에서 이미 2차례 이상 우승한 경험이 있다.
[10]
그래도 이원복의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에 네덜란드가 있어서 그걸로 아는 사람은 있었다. 사실 네덜란드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보다는 인지도가 좀 낮아서 그렇지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대항해시대 같은 게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난학이라는 단어도 네덜란드 학문이다. 물론 네덜란드 축구에 대해서는 모르는게 당연했다. 인터넷 시절도 아니니 정보 파악은 어려웠다.
[11]
다만, 클라위버르트는 1차 벨기에전에서 다이렉트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하는 바람에 2차 한국전과 3차 멕시코전 그리고 16강 유고슬라비아전에서는 결장했다.
[12]
일란성
쌍둥이다.
[13]
첫 번째 전성기는 위에 언급된
UEFA 유로 1988이었다.
[14]
그나마 월간축구(현
베스트 일레븐)를 통해서 유럽축구가 조금은 알려지긴 했다.
[15]
그나마 해외 유선방송이나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유럽 축구를 어느 정도 아는 재외교포들이나 유럽에 거주하는 축구팬들은 대한민국이 1점~2점 차로 진다면 정말 잘 한 것이라고 예상했다.
[16]
놀랍게도 다른 유럽, 남미 심지어 아프리카 국가들 같으면 노발대발 하면서 항의를 해야 정상인데 대한민국은 네덜란드 측에 항의하러 온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선수나 선수단들이 뭘 어떻게 해야될지도 모르는 안일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였으니 이 때부터 승부가 판가름나기 시작한 건 당연지사였다.
[17]
사실 이는 당시 선수단이 경험이 부족해서 제 목소리를 못 낸 탓도 있다.
[18]
거스 히딩크는 이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적용하여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에도 연습 시간이 지났음에도 연습장을 내주지 않고 훈련을 계속했다.
[19]
이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는 홈 그라운드 이점으로 붉은색 옷을 입은 대한민국 응원단이 압도적인 숫자로 나와서 응원했고, 그것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대한민국은 4강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20]
사실 지금 시대에 캐스터가 저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비난받는 멘트다. 저런 멘트는 해설자가 가볍게 이야기하는 정도여야 되는데, 송재익은 지나치게 감정적인 멘트를 했다.
[21]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의 징계로 인한 출전 정지와 코쿠의 멀티플레이어 능력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22]
데니스 베르캄프의 전매특허인 간결한 볼 컨트롤만으로 수비수들을 제쳐버렸다.
[23]
2019 FIFA U-20 월드컵 폴란드에
오세훈이 아르헨티나전에서 넣은 선제골과 같은 궤적이었다. 당시 경기 결과는 대한민국의 2:1 승리.
[24]
지금도 김병지의 뛰어났던 활약상 때문인지 유효 슈팅을 27개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유효 슈팅이 27개였다면 세이브는 22개라는 이야기인데 그런 기록은 월드컵 역사에 없다. 1경기에 가장 많은 세이브를 기록한 것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벨기에와 미국의 16강전에서 나온
팀 하워드의 16개이다.
[25]
그러나 이런 말이 오히려 축구팬들의 분노와 비난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벨기에전을 치르기도 전에 대한축구협회에 의해 감독직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다만 차범근 본인도 경질되기 이전에 네덜란드전 대패의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26]
훗날
거스 히딩크가 다음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대한민국 감독이 된 것을 생각해 보면, 운명이란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김병지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이운재에게 밀렸다.
[27]
이경규가 간다에서 그대로 방영되었다.
[28]
당시 16개국 본선 진출 체제.
[29]
1953년 당시 독립국 기준으로 가장 못 살았던 나라는
인도였다. 이 당시 아프리카 국가들은 아직 대부분
식민지 상태였고,
북한도 우리보다 더 잘 살았다.
[30]
그나마도 질이 나쁜 탓에 바짓단이 금방 닳아서 7부 바지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31]
대한민국 월드컵 도전 역사상 첫 무실점 경기였지만
황선홍의 연이은 골 찬스 무산의 아쉬움이 더 크게 남았던 경기였다.
[32]
그나마 이 경기가 한국시간으로 일요일 새벽에 치러졌기 때문에 학교와 직장에서 이 경기 참패의 후유증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33]
히딩크가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조차도 대한민국의 강점은 체력과 정신력, 투지고 단점을 기술, 전술 및 인프라로 꼽았다. 그러나 거스 히딩크는 부임 후 대한민국의 최대 장점은 양발잡이가 많고 기술이 상당히 훌륭한 수준이며 반대로 약점을 체력으로 꼽아 정반대의 평가를 하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말을 바로 행동으로 옮겨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은 고도의 체력 훈련을 매일같이 받았다고 한다.
[34]
당시 네덜란드 중앙 미드필더진에는
에드가 다비즈,
필립 코쿠,
아론 빈터르 등이 포진해 있었다. 유상철 혼자 버틴 한국의 중원을 간단히 잡아먹은 네덜란드 미들진은 넘치는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국의 측면까지 압박하기 시작했고, 상술한 대로 한국은 윙백들이 중앙 수비 라인보다 더 후퇴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35]
특히
디에고 마라도나의 경우 선수 시절에는 어느 누구도 막기가 어려울 정도로 거의 신적 존재와도 같은 최고의 선수로 자리매김했지만, 감독 시절에는 현지 적응 훈련 등과 같은 기초적인 것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 외에도 현역 시절 차범근 다음가는 한국 축구의 전설이자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 모두 소화가 가능했던
최순호도 지도자 경력은 현역 시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고, 해외 선수들 가운데서도
유틸리티 플레이어의 대명사격인
루드 굴리트도 지도자 경력은 현역 시절에 비해 매우 안 좋은 편이다. 그리고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독일의 전설적인 미드필더이자
인테르의 에이스였던
로타어 마테우스도 빛난 현역 시절에 비해 지도자 커리어는 정반대로 안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36]
물론 반례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인 예시로는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가 있다. 이들은 현역 시절 선수로서도 역대급이었지만 감독으로서도 매우 큰 성과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받는다. 그 외에도
지네딘 지단,
펩 과르디올라,
카를로 안첼로티,
유프 하인케스,
디디에 데샹,
디에고 시메오네,
안토니오 콘테,
신태용 등도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내고 감독으로서도 크게 성공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신태용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시절에 당시 디펜딩 챔피언이자 이제까지 월드컵 1라운드 조별리그에서 단 한번도 탈락한 적이 없었던
독일을
무실점으로 완전히 꺾으며 독일 축구 및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1라운드 조별리그에서의 탈락을 기록하게 만든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이라는 타이틀까지 가지고 있다.
[37]
2006년 독일 월드컵 17위,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5위(16강), 2018년 러시아 월드컵 19위, 2022년 카타르 월드컵 16위(16강).
[38]
출국일은 1998년 6월 5일이었고 중국과의 친선 경기는 1998년 6월 4일이었다. 심지어 차범근조차도 반대한 친선 경기였다. 주전이 나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전들은 다 뛰었고, 부상만 쌓인 채 아무런 성과 없이 무승부로 비겼다.
[39]
그 때문에 차범근의 아들
차두리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홍명보가 형편없는 성적을 거뒀음에도 아버지처럼 월드컵 도중에 경질되지 않고
2015 AFC 아시안컵 호주까지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에 대해 자신의 SNS에 에둘러 불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홍명보에 대한 불만이기보다는 대한축구협회 측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범근은 이를 엄중히 제지시켰다고.
[40]
그러나
차범근과
홍명보는 대회가 끝나고도 서로 연락도 안 하는 상황임을 봤을 때, 차두리가 단순히 축협에 대한 불만만 표현한 건 아닌 듯 보인다. 차범근은 대회가 끝나고 본인에게 연락을 안 한 선수는
하석주와
홍명보뿐이라고 직접 밝혔다. 하석주는 차범근이 본인 때문에 대표팀 감독직에서 경질된 것 같아 너무 죄송한 마음에 만나지 못했다고 하며, 차범근은 경기 중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하석주를 포옹해주고 다독거리며 잘 풀었다.
[41]
이 경기가 열린 시각이 대한민국 시간으로 일요일 새벽이었다.
[42]
사실 냉철하게 본다면 제대로 네덜란드의 수준을 파악하지 못한 언론의 잘못도 있다. 1998년 당시는 인터넷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고, 지금처럼 해외 축구에 정통한 사람들도 많이 없었다. 그리고 유럽파가 사실상 없고, 유럽 팀과의 경기도 그 당시에 많이 가지지 못한 것도 있다. 이 당시 네덜란드는 당연히 우승 후보로 꼽힐만큼 무시무시한 전력이었고, 대회가 끝난 직후 히딩크는 이 팀으로 4강까지밖에 못 갔다며 폭풍같이 까였다. 애초에 지는 게 당연했던 거다.
[43]
물론, 차범근 본인도 네덜란드전 대패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44]
이동국이 교체로 들어오고 강력한 슈팅을 날렸을 때,
송재익은 이름을 헷갈려 김동국(?), 좋습니다라고 멘트했다.
[45]
그러나 이동국은 이 경기 이후 무려 두 대회나 건너뛰고 12년 후에야 다시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그의 커리어에서 월드컵 본선 경기를 뛴 시간은 이 경기를 포함하여 51분이 전부였다.
[46]
산술적으로 조별리그에서 무승부 경기가 하나라도 있는 상태에서 한 팀이 2패를 하면 그 팀은 마지막 남은 1경기에서 아무리 큰 점수차로 승리를 해도 2위조차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100% 조기 탈락이 확정된다.
[47]
멕시코와 벨기에간의 경기에서 무승부가 아닌 멕시코의 승리 또는 벨기에의 승리로 끝났다고 해도 이미 네덜란드와 벨기에간의 경기 결과가 0:0 무승부로 끝났기 때문에 이 역시 대한민국이 탈락하기는 마찬가지다.
[48]
농담 하나 안 보태고, 이때는 거의
카를로스 케이로스나
알제리 쇼크를 안긴
바히드 할릴호지치 취급을 받았다.
[49]
이는 훗날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 대한민국을 세 번째로 2라운드 16강 토너먼트로 이끈
파울루 벤투 감독 역시 마찬가지이다.
선수 시절에는 자신에게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탈락(21등)과 국가대표팀 은퇴라는 최악의 기억을 선사한
그 팀을 이끌고서 20년 후 감독 자격으로 월드컵 16강을 이끌었고, 특히 이 대회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맡은 팀을 16강 토너먼트 진출에 성공시킨 외국인 감독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자신이
조국의 국가대표팀을 이끌 때에도 해내지 못했던 월드컵 16강이었고, 이후 잇다른 실패로 인해 감독 커리어가 하락세였을 때 이 성공으로 커리어를 반전시켰으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표현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다른 팀도 아니고 자신의 조국을 이기고 극적으로 16강(16위) 진출을 일궈냈으니...
[50]
물론, 이 경기에서 먼저 '신천지'를 본 것만은 아니다. 1997년 11월 1일 잠실 서울종합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최종 예선 일본전에서 많은 관중들이 빨간색 옷을 입고 오는 등, 자발적으로도 빨간색 옷을 입는 응원이 태동하고 있었다.
[51]
4년 전 독일에 2:3으로 석패했을 때도 파란색 원정 유니폼을 입었는데, 이 날의 경기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심어준 반면 네덜란드전은 그야말로 국민들에게 절망을 닥치는대로 마구 퍼부어주고 말았다.
[52]
덤으로 FIFA 규정에 따라 홈과 원정 유니폼은 명도와 채도가 다른 색상의 유니폼을 채택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우리가 더 이상 빨간색과 명도와 채도 면에서 비슷한 파란색 유니폼을 착용할 수 없는 것도 한몫했다. 때마침 우리의 최대 라이벌인
일본이 파란색 유니폼을 홈 유니폼으로 채택한 것도 물론 한몫하기는 했고...
[53]
그러나 2022년 이후부터는 원정 유니폼의 색상이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물론 홈 유니폼의 색상은 빨강색 그대로다.
[54]
점수 상으로는 0:2 패배지만 경기 내용 면에서 패스 성공률과 점유율이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효슈팅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완벽한 졸전이었다.
[55]
원정 유니폼을 입은 이유가 매우 충격적이었는데 대한축구협회 직원이 홈 유니폼을 횡령하여 판매하는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56]
참고로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더불어 승부차기에 특히 약한 불명예를 갖고 있다.
[57]
분데스리가 생활로 인해 독일 대표팀에 대한 애정을 가진 차범근조차도 이런 말을 했을 정도였으니 이 경기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58]
그런데 브라질 입장에서 저 경기는 우리로 치면 경술국치급이라고 볼 정도다. 브라질은 홈에서 독일한테 1:7로 크게 진 탓에 그 경기 이후 대혼돈에 빠졌고, 결국 그 다음 경기에서도 네덜란드한테 0:3으로 또다시 졌다. 그에 비해 1998년의 대한민국은, 그래도 네덜란드와 수준 차이가 애초에 매우 컸기 때문에...
[59]
브라질은
네이마르 주니오르와
티아고 실바가 각각 부상과 경고 누적으로, 한국은
황선홍과
하석주 등이 부상과 퇴장 징계로 결장했다.
[60]
브라질은 베테랑 선수가 많이 빠져서 정신적 역할을 할 리더가 부재했고, 대한민국은 당시 세계 축구 흐름에 완전히 뒤떨어져 해설자들도 해외 선수들을 잘 모를 지경이었다.
[61]
브라질은 월드컵 6회 우승과
마라카낭의 비극 극복, 대한민국은 아시아 최종 예선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부푼 16강 진출 기대감이 선수단을 무겁게 압박했다.
[62]
브라질은 악화일로인 경제 상황으로 월드컵 개최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1997년 외환 위기로 국가 경제가 엉망이었다.
[63]
물론 1990, 2014, 2018, 2022 대회처럼 비록 가능성은 남아 있으나 무조건 이겨야 하는 마지막 상대가 하필 조 최강자일 뿐더러 자력 진출도 불가능하여 다른 팀들의 변수까지 고려해 가며 복잡한
경우의 수까지 따져야 하는, 사실상 탈락인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16강 진출에 성공한 건 2022 대회가 유일하다.
[64]
실제로 대한민국과 같은 조였던 서독이 승자전에서 헝가리에게 패한 뒤 대한민국과의 패자전에서 7:0으로 대승한 튀르키예를 상대로 재경기 끝에 승리해 8강에 갔다.
[65]
그나마 당시 골키퍼
홍덕영을 비롯한 여러 선수들이 최선을 다한 덕에 경기 종료 후, 선물까지 받을 정도로 칭찬을 받았다. 당시
헝가리한테 0:9 대패를 당했는데도 말이다.
[66]
다만 대한민국 국가 대표팀이 월드컵에 11회 출전하여 치른 경기 중 승패 상관 없이 2골 이상 득점한 경기는 지금까지 단 한 경기도 없다.
[67]
실제로 대한민국은
마지막 독일과의 경기에서 후반 추가 시간에 2골을 넣는 저력을 보이며 2:0으로 이겼지만, 같은 마지막 경기에서 스웨덴이 멕시코를 3:0으로 이기는 바람에 아쉽게 조 3위 대회 19위로 16강 진출은 하지 못했다.
[68]
대한민국이 두 번째로 월드컵 본선 진출(지역예선 통과)에 성공한 해였다.
[69]
2014년 브라질 월드컵도 포함.
[70]
같은 3전 전패를 기록한 중국조차도 9실점에 무득점을 기록하였기에 그 중국에게도 순위에서 뒤지게 됐다.
[71]
이후
카타르도
그로부터 20년 뒤에 열린 자국의 월드컵에서 그 사우디아라비아와 거의 비슷한 길을 걸었다. 단, 차이점이라면 사우디아라비아가 단 1득점도 못했고 한 경기에서는 아예 8점에 달할 정도의 대량 실점도 당했던 것에 비해 카타르는 1득점이라도 했고 실점도 모든 경기에서 각각 2점~3점 정도만 당했다는 것이다.
[72]
대한민국이 2022년 브라질과의 16강전에서 무려 1:4로 참혹하게 발렸던 것을 생각해 보자. 동아시아 4개국 중 월드컵에서 브라질에게 3골 이하로 내주고 1골 차로 석패한 유일한 팀이 북한이다. 게다가 전반전을 0:0으로 마치기까지 했다.
[73]
그러나 2014년에 대한민국이 알제리에게 2:4로 깨진 것을 생각하면
디디에 드록바가 버틴 코트디부아르에게 3골만 허용한 북한이 정말 잘 싸운 것이다.
[74]
특히 0:1로 뒤지고 있는 와중에 수비를 아예 포기하는 그야말로 정신나간 전술을 썼던 것이 가관이었다.
[75]
전반 중반에는
알렉스 송이
마리오 만주키치의 등을 오른쪽 팔꿈치로 찍어 쓰러뜨렸다가 그 자리에서 주심에게 발각되어 퇴장당했고, 후반 막판에는
베누아 아수에코토와
뱅자맹 무칸조가 서로 싸움 일보 직전까지 가는 추태를 보였다.
[76]
이후 스페인은
칠레에게마저 지며 결국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조별리그 3경기 중 2경기만에 조기 탈락한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불명예를 얻고 말았다.
[77]
그리고 이 경기에 해설을 했던 차범근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셀프디스하기도 했으며, 게다가 차범근 본인이 독일 대표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이러한 대량실점과 그로 인한 브라질 관중들의 슬픈 분위기에 측은함을 느낀 나머지 결국 독일이 골을 제발 그만 넣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78]
이후 아르헨티나는
다음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를 준결승에서 다시 만나
똑같은 점수로 복수해버린다. 그리고
디에고 마라도나 시절 이후
36년 만에 우승하여
리오넬 메시는
메호대전에서 승리하며
GOAT에 등극했다.(반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끄는
포르투갈은
8강에서
모로코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결국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