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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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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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U-23 대회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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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균 2000 시드니 올림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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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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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국 2004 아테네 올림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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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9d800> 초대 | 2대 | 3대 | 4대 | 5대 |
이경춘 (1995~1998) |
최진철 (1999~2000) |
김도훈 (2001) |
최진철 (2002~2005) |
김현수 (2005~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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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9d800> 6대 | 7대 | 8대 | 9대 | 10대 | |
정경호 (2008) |
김상식 (2009~2010) |
조성환 (2011~2012) |
이동국 (2013~2015) |
권순태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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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9d800> 11대 | 12대 | 13대 | 14대 | 15대 | |
신형민 (2017~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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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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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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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 2011 · 2014 · 20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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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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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 2011 · 2012 · 2014 · 20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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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타스틱 플레이어 | ||||
→ | 2009년 | → | 2010년 | |
상 제정 | → |
이동국 ( 전북 현대 모터스) |
→ |
구자철 ( 제주 유나이티드 FC) |
2010년 | → | 2011년 | → | 2012년 |
구자철 ( 제주 유나이티드 FC) |
→ |
이동국 ( 전북 현대 모터스) |
→ |
데얀 다미아노비치 ( FC 서울) |
2013년 | → | 2014~2015년 | → | 2016년 |
김신욱 ( 울산 현대 호랑이) |
→ |
이동국 ( 전북 현대 모터스) |
→ |
레오나르도 ( 전북 현대 모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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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 2010년 | 2011년 | 2012년 | 2013년 |
이동국 , 전북 현대 모터스 K-리그 MVP, 득점왕, 베스트 Ⅺ, |
김은중 , 제주 유나이티드 FC K-리그 MVP, 베스트 Ⅺ, |
이동국 , 전북 현대 모터스 K-리그 MVP, 도움왕, 베스트 Ⅺ, |
하대성 , FC 서울 K-리그 베스트 Ⅺ, |
김신욱 , 울산 현대 K리그 클래식 MVP, 베스트 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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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 2015년 | 2016년 | 2017년 | 2018년 | |
이동국 , 전북 현대 모터스 K리그 클래식 MVP, 베스트 Ⅺ, |
염기훈 , 수원 삼성 블루윙즈 K리그 클래식 도움왕, 베스트 Ⅺ, |
정조국 , 광주 FC K리그 클래식 MVP, 득점왕, 베스트 Ⅺ, |
이재성 , 전북 현대 모터스 K리그 클래식 MVP, 베스트 Ⅺ, |
이용 , 전북 현대 모터스 K리그1 베스트 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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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 2020년 | 2021년 | 2022년 | 2023년 | |
김보경 , 울산 현대 K리그1 MVP, 베스트 Ⅺ, |
손준호 , 전북 현대 모터스 K리그1 MVP, 베스트 Ⅺ, |
주민규 , 제주 유나이티드 FC K리그1 득점왕, 베스트 Ⅺ, |
신진호 , 포항 스틸러스 K리그1 베스트 Ⅺ, |
주민규 , 울산 현대 K리그1 득점왕, 베스트 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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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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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1 역대 최다 득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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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현대 모터스 역대 최다 득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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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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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colcolor=#000000> 이름 |
이동국 李同國[1] | Lee Dong-goo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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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9년 4월 29일 ([age(1979-04-29)]세) | ||||
경상북도 포항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본관 | 경주 이씨 (慶州 李氏)[2] | ||||
신체 | 키 187cm / 체중 90kg / A형 / 280mm | ||||
주발 | 오른발 (양발) | ||||
학력 |
포항제철동초등학교[3] (졸업) 포항제철중학교 (졸업)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졸업) 위덕대학교 (사회과학 / 학사) |
||||
직업 |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방송인, 축구 해설 위원, 기업인 |
||||
프로 입단 | 1998년 포항 스틸러스 | ||||
소속 | <colbgcolor=#f0f0f0><colcolor=#000000> 선수 |
포항 스틸러스 (1998~2007) → SV 베르더 브레멘 (2001 / 임대) → 광주 상무 불사조 (2003~2005 / 군 복무) 미들즈브러 FC (2007~2008) 성남 일화 천마 (2008) 전북 현대 모터스 (2009~2020) |
|||
행정 | 대한축구협회 (2023 / 부회장)[4] | ||||
해설 | CJ ENM- tvN SPORTS (2021~2022) | ||||
국가대표 | 105경기[5] 33골[6] ( 대한민국 / 1998~2017) | ||||
소속사 | 무소속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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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colcolor=#000000> 등번호 | 대한민국 대표팀 | 11[7], 12[8], 18[9], 20[10], 21[11] | ||
포항 스틸러스 | 33, 20, 10 | ||||
SV 베르더 브레멘 | 21 | ||||
광주 상무 불사조 | 10, 20, 46 | ||||
미들즈브러 FC | 18 | ||||
성남 일화 천마 | 22 | ||||
전북 현대 모터스 | 20[12][13] | ||||
병역 | 광주 상무 불사조 (2003~2005) | ||||
가족 |
아버지 이길남(1949년생) 어머니 김명자(1949년생) 누나, 형, 외조카 배재익 |
||||
배우자 | 이수진(2005년 12월 18일 결혼) | ||||
자녀 |
장녀
이재시, 차녀
이재아[이란성] 삼녀 이설아, 사녀 이수아[이란성] 장남 이시안[16] |
||||
종교 | 무종교[17]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해설자.전북 현대 모터스 최초의 영구 결번 선수이자 K리그 역사상 최초로 70-70 클럽에 가입한 선수다.
일명 '대박이 아빠'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축구 해설 위원이자 방송인, 주식회사 대박드림스의 대표로 활동 중이다.
2. 클럽 경력
자세한 내용은 이동국/클럽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3. 국가대표 경력
자세한 내용은 이동국/국가대표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4. 기록
4.1. 대회 기록
- 포항 스틸러스 (1998~2007)
-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998
- 전북 현대 모터스 (2009~2020)
- K리그1: 2009, 2011, 2014, 2015, 2017, 2018, 2019, 2020
- FA컵: 2020
- AFC 챔피언스 리그: 2016
-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 아시안 게임 동메달: 2002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AFC 아시안컵 3위: 2000, 2007
-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2010
4.2. 개인 수상
- AFC 아시안컵 득점왕: 2000
- AFC 아시안컵 토너먼트의 팀: 2000
- AFC 아시안컵 올타임 XI: 2018
- AFC 아시안 올스타: 2000
- AFC 유스 챔피언십 MVP: 1998
- AFC 유스 챔피언십 득점왕: 1998
-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득점왕: 2010
- AFC 챔피언스 리그 MVP: 2011
- AFC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2011
- K리그1 MVP: 2009, 2011, 2014, 2015
- K리그1 영플레이어상: 1998
- K리그1 득점왕: 2009
- K리그1 도움왕: 2011
- K리그1 팬타스틱 플레이어: 2009, 2011, 2012, 2014, 2015
- K리그1 베스트 XI: 2009, 2011, 2012, 2014, 2015
- K리그 올스타전 MVP: 1998, 2001, 2003, 2012
- K리그 공로상: 2020
- K리그 베스트 포토상: 2020
- K리그 명예의 전당: 2023
- KFA 올해의 골: 2004(독일전)
- KBS배 춘계고교대회 MVP: 1998
- KBS배 춘계고교대회 득점왕: 1998
- 대통령 표창: 1999
- 키카특별상: 1998
- 프로축구 박스포상 공로상: 1998
- 시도 대항 중고축구대회 MVP: 1996
- 차범근 축구상 장려상: 1991
- 동아스포츠대상 프로축구 올해의 선수상: 2009, 2011, 2014
- 동아스포츠대상 특별상: 2020
- KBS 연예대상 최고 엔터테이너상: 2015
- KBS 연예대상 버라이어티 부분 남자 최우수상: 2016
4.3. 개인 기록
4.3.1. 클럽
* 2021년 10월 기준
* 548경기, K리그 통산 출전 3위[18]
* 228골, K리그 통산 득점 1위
* 77도움, K리그 통산 도움 2위[19]
* 305포인트, K리그 통산 공격 포인트 1위
* 37골, ACL 통산 득점 2위[20]
* 13골, FA컵 통산 득점 공동 3위[21]
* 548경기, K리그 통산 출전 3위[18]
* 228골, K리그 통산 득점 1위
* 77도움, K리그 통산 도움 2위[19]
* 305포인트, K리그 통산 공격 포인트 1위
* 37골, ACL 통산 득점 2위[20]
* 13골, FA컵 통산 득점 공동 3위[21]
4.3.2. 국가대표
* 2017년 7월 23일 기준
* 10골, 아시안컵 통산 득점 2위, 한국 선수로는 1위
* 33골, 대한민국 A매치 통산 득점 5위[22]
* 105경기, 대한민국에서 13번째로 센추리 클럽 가입
* 전 대륙 상대 A매치 득점자[23][24][25]
* 10골, 아시안컵 통산 득점 2위, 한국 선수로는 1위
* 33골, 대한민국 A매치 통산 득점 5위[22]
* 105경기, 대한민국에서 13번째로 센추리 클럽 가입
* 전 대륙 상대 A매치 득점자[23][24][25]
4.4. 통산 기록
4.4.1. 클럽
* 2017년 기준
<rowcolor=#ffffff> 시즌 | 구단 | 소속 리그 | 리그 | FA컵 | 리그컵 | 대륙 대항전 | 총합 | ||||||||||
<rowcolor=#ffffff>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
1998 | 포항 스틸러스 | K-리그 | 15 | 7 | 2 | 0 | 0 | 0 | 9 | 4 | 0 | - | 24 | 11 | 2 | ||
1999 | 15 | 7 | 3 | 0 | 0 | 0 | 3 | 1 | 1 | 18 | 8 | 4 | |||||
2000 | 7 | 4 | 1 | 0 | 0 | 0 | 1 | 0 | 0 | 8 | 4 | 1 | |||||
3시즌 | 합계 | 37 | 18 | 6 | 0 | 0 | 0 | 13 | 5 | 1 | - | 50 | 23 | 7 | |||
<rowcolor=#ffffff> 시즌 | 구단 | 소속 리그 | 리그 | FA컵 | 리그컵 | 대륙 대항전 | 총합 | ||||||||||
<rowcolor=#007642>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
2000-01 | SV 베르더 브레멘 | 분데스리가 | 7 | 0 | 0 | 0 | 0 | 0 | - | 0 | 0 | 0 | 7 | 0 | 0 | ||
1시즌 | 합계 | 7 | 0 | 0 | 0 | 0 | 0 | - | 0 | 0 | 0 | 7 | 0 | 0 | |||
<rowcolor=#ffffff> 시즌 | 구단 | 소속 리그 | 리그 | FA컵 | 리그컵 | 대륙 대항전 | 총합 | ||||||||||
<rowcolor=#ffffff>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
2001 | 포항 스틸러스 | K-리그 | 17 | 3 | 1 | 2 | 1 | 0 | - | - | 19 | 4 | 1 | ||||
2002 | 21 | 7 | 3 | 4 | 3 | 0 | 0 | 0 | 0 | 25 | 10 | 3 | |||||
2시즌 | 합계 | 38 | 10 | 4 | 6 | 4 | 0 | 0 | 0 | 0 | - | 44 | 14 | 4 | |||
<rowcolor=#ffffff> 시즌 | 구단 | 소속 리그 | 리그 | FA컵 | 리그컵 | 대륙 대항전 | 총합 | ||||||||||
<rowcolor=#ffffff>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
2003 | 광주 상무 불사조 | K-리그 | 27 | 11 | 6 | 0 | 0 | 0 | - | - | 27 | 11 | 6 | ||||
2004 | 19 | 1 | 5 | 2 | 0 | 0 | 4 | 3 | 0 | 25 | 4 | 5 | |||||
2005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
3시즌 | 합계 | 46 | 12 | 11 | 2 | 0 | 0 | 4 | 3 | 0 | - | 52 | 15 | 11 | |||
<rowcolor=#ffffff> 시즌 | 구단 | 소속 리그 | 리그 | FA컵 | 리그컵 | 대륙 대항전 | 총합 | ||||||||||
<rowcolor=#ffffff>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
2005 | 포항 스틸러스 | K-리그 | 17 | 3 | 3 | 3 | 0 | 0 | 7 | 4 | 1 | - | 27 | 7 | 4 | ||
2006 | 10 | 7 | 1 | 0 | 0 | 0 | - | 10 | 7 | 1 | |||||||
2시즌 | 합계 | 27 | 10 | 4 | 3 | 0 | 0 | 7 | 4 | 1 | - | 37 | 14 | 5 | |||
<rowcolor=#ffffff> 시즌 | 구단 | 소속 리그 | 리그 | FA컵 | 리그컵 | 대륙 대항전 | 총합 | ||||||||||
<rowcolor=#d5002e>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
2006-07 | 미들즈브러 FC | 프리미어 리그 | 9 | 0 | 0 | 2 | 0 | 0 | 0 | 0 | 0 | - | 11 | 0 | 0 | ||
2007-08 | 14 | 0 | 0 | 2 | 1 | 0 | 2 | 1 | 0 | 18 | 2 | 0 | |||||
2시즌 | 합계 | 23 | 0 | 0 | 4 | 1 | 0 | 2 | 1 | 0 | - | 29 | 2 | 0 | |||
<rowcolor=#ed145a> 시즌 | 구단 | 소속 리그 | 리그 | FA컵 | 리그컵 | 대륙 대항전 | 총합 | ||||||||||
<rowcolor=#ffe462>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
2008 | 성남 일화 천마 | K-리그 | 10 | 2 | 2 | 0 | 0 | 0 | 3 | 0 | 0 | - | 13 | 2 | 2 | ||
1시즌 | 합계 | 10 | 2 | 2 | 0 | 0 | 0 | 3 | 0 | 0 | - | 13 | 2 | 2 | |||
<rowcolor=#ffdd00> 시즌 | 구단 | 소속 리그 | 리그 | FA컵 | 리그컵 | 대륙 대항전 | 총합 | ||||||||||
<rowcolor=#034f36>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경기 | 골 | 도움 | |||
2009 | 전북 현대 모터스 | K리그1 | 29 | 21 | 0 | 4 | 4 | 0 | 3 | 1 | 0 | - | 36 | 26 | 0 | ||
2010 | 28 | 12 | 2 | 2 | 0 | 1 | 2 | 1 | 1 | 8 | 4 | 4 | 40 | 17 | 8 | ||
2011 | 29 | 16 | 15 | 1 | 0 | 0 | - | 8 | 9 | 0 | 38 | 25 | 15 | ||||
2012 | 40 | 26 | 6 | 2 | 2 | 1 | -[26] | 6 | 4 | 1 | 48 | 32 | 8 | ||||
2013 | 30 | 13 | 2 | 2 | 2 | 1 | 8 | 3 | 3 | 40 | 18 | 6 | |||||
2014 | 31 | 13 | 6 | 2 | 0 | 0 | 7 | 3 | 0 | 40 | 16 | 6 | |||||
2015 | 33 | 13 | 5 | 1 | 1 | 0 | 7 | 4 | 0 | 41 | 18 | 5 | |||||
2016 | 27 | 12 | 0 | - | 13 | 5 | 1 | 40 | 17 | 1 | |||||||
2017 | 30 | 10 | 5 | 1 | 0 | 0 | - | 31 | 10 | 5 | |||||||
2018 | 35 | 13 | 4 | 2 | 0 | 1 | 8 | 4 | 0 | 45 | 17 | 5 | |||||
2019 | 33 | 9 | 2 | 0 | 0 | 0 | 8 | 1 | 1 | 41 | 10 | 3 | |||||
2020 | 11 | 4 | 0 | 1 | 0 | 0 | 1 | 0 | 0 | 13 | 4 | 0 | |||||
12시즌 | 합계 | 356 | 162 | 47 | 18 | 9 | 4 | 5 | 2 | 1 | 74 | 37 | 10 | 453 | 210 | 62 | |
통산 | 544 | 214 | 74 | 33 | 14 | 4 | 34[27] | 15 | 3 | 74 | 37 | 10 | 685 | 280 | 91 |
4.4.2. 국가대표
* 2017년 9월 5일 기준
-
출전 기록
연령
|| 경기
|| 득점
||대한민국 | U - 17 | 0 | 0 |
U - 20 | 9 | 6 | |
U - 23 | 28 | 20 | |
A 대표 | 105 | 33 | |
통산 | 142 | 59 |
5. 플레이 스타일
|
|
발리마스터 이동국 | 발리슛 깎는 장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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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경기 228골⚽' 레전드 이동국의 TOP 10 Goals | [K리그 레전드SSUL] 올타임 넘버원! '라이온 킹' 이동국편 |
포항 시절과 외국 진출 시절에 잠깐 투톱으로 뛰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커리어를 원톱으로 뛰었다.
가장 특징적으로 발리 깎던 노인이라는 별명에 맞게 발리슛으로 대표되는 뛰어난 슈팅 능력[28]과 타고난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 노장이 된 시점에서도 발목 힘과 슈팅력은 다른 어린 선수 이상의 것을 보여준 바 있다. 사실 발리슛이란 게 그저 떠있는 공을 갖다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발로 중심을 잃지 않고 자세를 잡은 상태에서 다른 한 발만으로 정확한 임팩트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하체 피지컬이 요구되는데, 젊었을 때부터 허벅지 하나가 웬만한 여자 허리 둘레 급이었던 이동국이기에 가능한 부분이다.[29]
특유의 슈팅 감각은 왼발, 오른발, 헤더 가리지 않으며 거기다 본인이 어떤 자세에 있고 어떤 공이 오더라도 원투 터치 이내에 위협적인 슛으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은 독보적이었다. 더불어 오프사이드를 뚫는 능력이나 등지고 있는 수비가 눈치채지 못한 타이밍에 쇄도하는 능력도 국내 선수로는 최상급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묻지마 강슈터의 기질이 간혹 보였으나 나이를 먹으면서 개선되어 중거리 슛 등의 정확도도 상당히 높아졌다. 이동국 하면 발리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중거리의 정확도와 슈팅센스도 뛰어났다. 패싱력도 있는 편이여서 2011년에는 K리그 도움왕도 차지했다. 시야가 넓어 경기중 미드필더 존으로 내려와 공간을 찾아들어가는 동료에게 좋은 공을 연결하기도 하며 짬이 안 되던 2002년 이전에는 그의 패싱 능력을 눈여겨 본 국내 지도자들이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내려서 사용하곤 하였다. 포항 스틸러스에 파리아스 감독이 있던 시절에도 종종 투톱 밑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용하곤 했고 그 역할을 잘 수행해냈다.
다만 드리블 센스는 빈말로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나이가 들고 경험과 노련함이 더해지면서 좋아지기는 했으나 이번엔 신체 능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면서 결과적으로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된 것이다.[30] 젊은 나이일 때엔 우당탕탕식의 치고 달리기도 종종 보여줬으나 나이가 들고 나서는 노련미를 활용해서 간단한 바디페인트로 슈팅각을 열거나 동료에게 연결하는 식의 플레이를 선호하였다. 활동량이 부족하다는 것도 지적받는데, 이 자료를 보면 활동량이 적다고는 할 수 없다. 최근 국가대표 경기나 리그에서의 모습을 보면 활동량 부족에 대한 지적은 이미 지나간 얘기라 할 수 있다.[31]
엄밀히 말하면 움직임 자체는 그래도 비교적 멀쩡하게 가져가는 편인데, 슈팅이나 패스의 정확도 같은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32] K리그 챔피언 결정전 때도 신나게 골대를 맞추다가 리드를 잡으니 그제야 득점을 터트리는 경우가 많았다. 토너먼트 승부차기에서도 실축이 많다.
어렸을 때는 오히려 국대 해결사였는데 비난을 이길 정도까진 아니었다. 이런 면은 클럽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이 돼서 유망주 시절 갔다 온 브레멘은 그렇다 쳐도 미들즈브러에서 실패한 원인 중 하나가 계속 실수가 나오면서 자신감이 더 떨어지고 그러다 보니 비판을 받고 동료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해 더 자신감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크게 작용했고[33][34] 성남에서도 이동국의 영입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김학범 감독 밑에서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중동이나 중국 등 아시아의 큰손들의 영입 제안을 뿌리친 것도 스스로 이런 면을 깨달아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젊었을 때는 피지컬을 활용하며 우당탕탕 부딪히는 플레이를 했지만 선수 말년 기준으로서는 스피드나 템포를 상당히 늦추는 스타일로 변화했다. 세컨드 스트라이커 비슷하게 변한 본인의 기질과 더불어 나이와 부상 탓이 크다. 그리고 세계 무대에서의 얘기뿐만이 아니라, 이동국은 어린 시절부터 몸을 쓰면서 상대와 부딪히고 아군에게 공간을 가져다주는 플레이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조금 내려간 자리에서 공간을 보거나 패스를 넣어주는 플레이를 더 좋아했다. 어린 시절에는 한국에서도 몸으로 부딪히고 열어주는 플레이는 별로 시도하지 않았다. 이런 것은 오히려 동갑내기이자 청소년대표 파트너였던 김은중이 더 잘했다.[35] 박주영과 비교할 때 이런 점이 가장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패스와 동료 활용 능력이 좋다고 해도, 박스 안팎에서 상대선수와 경합하고, 상대 수비수를 끌고다녀서 빈틈을 만들어주는 선수가 그렇지 않은 선수보다 동료 공격수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전통적으로 공격형 미드필더와 윙어가 강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이동국에 대한 저평가에는 톱 외에는 거의 쓰기가 힘들다는 좁은 활용 폭도 있다. 몸싸움은 좋지만 스피드가 많이 떨어지고[36] 전북 시절엔 간혹 세컨톱으로 뛰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잠깐 임시변통으로 뛰는 정도였다. 톱으로 뛴다면 원톱, 투톱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활약을 보이지만 원톱에서는 양 측면에 크랙형 선수가 있어야 장점이 극대화되는 타입이기도 하다.[37] 전북이 대대로 양 날개 쪽에 최고급 외국인을 데려와 놓는 것은 이동국 혹은 김신욱을 살리기 위한 전술이다.
5.1. 대표팀 공격진과의 호흡
이동국이 한참 대표팀 붙박이이던 초창기 시절 대세는 투톱이었고 이동국도 소속팀에서나 국대에서나 주로 투톱으로 뛰었으며 이후 원톱으로 더 긴 세월을 뛰었다.전술한 바와 같이 이동국의 플레이 특성상 적성 포지션은 처진 공격수지만 국제 대회에 데려갈만한 공격수 가운데 몸빵이 되고 짬이 쌓인 지금은 사실 원톱 전문이고 투톱도 가능함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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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황선홍 은퇴 이후 대표팀의 스트라이커를 꼽아보자면 제일 먼저 안정환이 있다.[38] 이 둘의 조합은 과거부터 축구팬들 사이에서 이론상 최강의 투톱으로 거론되었었는데, 실제로는 안정환 역시 최전방 바로 밑에 위치시켜야 진가가 나오는 공격수다[39][40]보니 계속 동선이 겹처서 안정환-이동국 투톱은 조 본프레레 시절 잠깐 시험해보고 금방 폐기해버렸다. 사실 이 때는 대표팀 상황 자체가 공격수에게 잘 보급해주지 못하는 개판이라서 이때 팀 전체의 문제로 두 사람이 어색한 사이였기도 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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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중
연령별 대표팀에서 많이 뛰었는데 서로가 몸싸움이 되며 센스도 좋았기에 서로를 잘 이용했고 이 투톱의 활약 덕에 대한민국은 1998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다. 다만 이때를 제외하면 공식적인 경기에서 서로 투톱을 서 본 적이 거의 없기에 진정한 꿈의 투톱이다. 현재도 김은중과는 매우 친한 사이로 지내고 있으며 이마발이란 1979년생/1998년 청소년 대표 모임에선 이 둘이 항상 투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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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박주영이 어린 시절에는 몇 경기 같이 뛰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맞는 듯했다. 당시 박주영은 몸빵이 전혀 되지 않는 전형적인 날카로운 움직임과 연계를 장기로 삼는 처진 공격수였고 상무 시절과 본프레레호를 거치면서 전방에서 몸빵으로 비벼주는 플레이를 터득한 이동국이 박주영과 적당히 잘 맞았기 때문에 둘이 함께 출전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경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동국이 부상 이후 국가대표로 복귀한 최강희호에서는 박주영과 이동국 투톱이 줄곧 선보이고 있으나 실적은 좋지 않았다. 유럽 진출 이후 박주영의 스타일이 확연히 달라져서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뛰기도 애매해졌다. 거꾸로 이동국이 사이드로 빠지며 주변 선수와의 연계를 중시하는 선수로 바뀌어 이동국이 오히려 세컨드 스트라이커에 적합해졌다.[42] 이렇게 애매해진 상황 때문에 둘이 같이 경기를 뛸 때마다 한쪽이 침묵하거나 동반으로 침묵하는 모습만 보이고 있다. 특히 2013년 2월 6일 벌어진 크로아티아와 평가전에서는 그간 나쁜 여론을 인식한 듯 지나치게 상대를 배려하는 플레이로 일관하며 각자 장점마저 내다버린 최악의 결과를 빚었다. 박주영은 지나치게 아래로 처져서 플레이를 하면서 공격에 가담할 기회 자체가 대폭 줄어버렸고 이동국은 2선 공격수에게 패스 하느라 바빠 변변한 슛도 못날렸다. 이날 경기가 끝난 뒤 최강희 감독도 두명을 조합하는 것에 대해 실패했다고 인정했으며 박주영-이동국 투톱은 국대에서 더 이상 시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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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소위 1박 2일 투톱. 단두대 매치였던 쿠웨이트전처럼 좋은 실적을 낸 적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동국의 오프사이드 라인 깨기, 패스 배급은 이근호의 활동량과 승부욕, 저돌적 돌파를 살리기에 부족한 점이 있었으며 이근호도 울산에서 김신욱과 콤비를 맞출 때보다 활동 반경이 좁아지고 파괴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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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욱
김신욱과는 선발 출장보다는 경기 중후반에 함께하는 편인데 김신욱이 완급 조절과 좌우 연계에 능하고 헤딩 싸움도 가세해 줄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다른 공격진[43]이 속도와 활동량으로 측면을 파괴해주지 않으면 답답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동시에 선발 출전했던 이란전의 경우에도 둘 다 할 만큼은 했는데 좋지는 않았다. 김신욱은 헤딩 경합을 했고 이동국은 내려가거나 내주거나. 전술 자체가 1선이 이렇게 내주면 2선에서 해결해 주는 식이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대표팀에서와 달리 전북 현대에서는 후반 막판 이동국이 교체투입되어 김신욱과 클래식 투톱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동국이 나이들어 선발을 꾸준히 소화하기 힘들어질수록 이동국-김신욱 투톱 기용이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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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용
이청용과는 같이 뛸 기회가 많지는 않았으나 그저그런 모습을 보여줬다. 박지성은 은퇴하고 박주영이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공격 파트너들이 이청용의 움직임에 맞춰서 볼을 보급해주는 공격수가 필요해졌는데 여기서 이동국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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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손흥민과의 기회는 무척 적었으나 한준희는 이제까지 써 본 적이 없는 조합인데 의외로 이동국이 받고 뿌리면 손흥민이 달리는 그림으로 괜찮은 조합이 될 가능성이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홍명보가 사퇴한 이후 처음으로 소집된 베네수엘라전에서 괜찮은 움직임을 보여줬다. 실제로 슈틸리케호에서 해당 조합은 손흥민한테 폐를 끼친다는 얼치기 팬들의 비난과는 달리 중앙에서 받으며 수비를 끌어당기고 측면으로 뿌려주는 이동국과 그 공을 측면에서 받으며 속도를 붙이는 손흥민으로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이후 이동국이 없는 손흥민은 고립되며 무득점 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신태용이 손흥민에게 딱 맞는 조합을 찾아냈다. 손흥민 자체의 공격력을 가장 잘 살린 조합은 신태용이 사용한 손흥민- 이근호 투톱 조합이었고 이근호가 부상으로 하차한 뒤에는 애매하게 스트라이커와 투톱을 세우느니 구자철과 투톱을 세웠다. 이근호와 구자철의 공통점은 활동량과 오프더볼이 좋아서 손흥민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줄 수 있었다는 점, 윙어와 공미 멀티가 가능해서 권창훈, 이재성 등과 스위칭을 하며 상대 수비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동국의 나이를 고려할 때 이런 활동량이나 멀티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거기에 대표팀은 장거리 비행을 해야하는 경우도 많아서 체력적 부담이 더 크다. 자기보다 13살이나 어린 손흥민의 시대까지 국가대표팀에 차출된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최근에는 황의조와 조규성이 기량적으로 만개하며 대표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저 둘 역시 스트라이커 치고 활동 범위가 매우 넓으며 움직임이 좋은 선수고 황의조는 보르도에서 윙포워드로 뛴 바 있다. 조규성 역시 이동국 본인이 해설에서 조규성의 활약을 보고 "활동량을 줄이고 득점에 집중해야 한다 조언했는데 잘못 말한 거 같다."고 언급한 걸 보면 스타일이 전혀 다르단 걸 알 수 있다. 이런 걸 고려하면 아무리 몸 관리를 잘했어도 2010년대 이동국에게 손흥민 극대화와 득점력을 기대하기는 애초에 어려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평가
K리그 통산 최다 우승[44], K리그 통산 득점 1위[45], 통산 도움 2위, 통산 공격 포인트 1위, AFC 챔피언스 리그 통산 득점 2위[46] 등의 기록을 남긴 레전드로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맹활약했던 그의 등번호 20번은 전북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비운의 축구 선수로 항상 뽑히기도 했고 한국 축구 팬들에게 가장 애증이 많은 선수 중 하나였다.[47]
K리그에서 MVP, 신인왕, 득점왕, 도움왕을 모두 석권하고[48] K리그 통산 최다 득점[49] 및 ACL 통산 최다 득점 2위 기록을 보유한 레전드. 또한 대한민국 축구 선수로는 유일하게 90년대, 00년대, 10년대, 20년대에 모두 리그에서 득점을 올린 기록도 가지고 있다.[50][51]
또한 국가대표팀에서도 A매치 100경기를 넘게 출전한 FIFA 센추리 클럽 가입멤버이자 33골로 대한민국 역대 A매치 득점 공동 5위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개인 커리어에도 2000 아시안컵 득점왕을 달성하는 등 괜찮은 활약상을 남겼다. 이러한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국가대표 레전드라고 할 수 있다.[52]
하지만 월드컵 본선에서는 부진한 행보를 보이며 월드컵과 인연이 없는 선수로 더 유명한데 자국에서 열린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낙마, 절치부심 후 좋은 컨디션을 보였던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십자인대 부상으로 경기에 참여조차 못했고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23명 최종엔트리에 발탁 받았지만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박지성이 찔러준 택배 기사급 킬패스를 일명 '물회오리슛'으로 마무리함으로서 우루과이에게 패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월드컵 통산 0골'이러한 이유로 월드컵과 다소 인연이 먼 선수여서 비운의 선수란 이미지가 있다.[53]
그러나 국가대표로 활약상을 보면 비운의 선수로 단정짓기 어려울 정도로 분명 많은 족적을 남긴 선수다. 먼저 대한민국에서 오직 넷뿐인 A매치 전 대륙 상대 득점자다. 월드컵 본선으로 한정해도 최종 엔트리에 들더라도 본선 경기를 뛰지 못하고 귀국하는 선수에 비하면 이동국은 월드컵 본선 통산 3경기를 뛰었다. 아시안컵 본선으로 한정하면 대한민국에서 이동국보다 AFC 아시안컵에서 더 많은 득점(10득점)을 올린 선수는 없다. 한편, 연령별 대표로 FIFA U-20 월드컵과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아봤으며 득점까지 기록했다. 즉,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 있는 국제대회에 거의 다 뛰어본 셈이다. 또한 상기된 우루과이전의 아쉬운 모습때문에 가려져있지만 대한민국 최초 원정 월드컵 16강 멤버 중 1인이다.
과거에는 이승엽과 같은 라이온 킹이 별명이었으나 미들즈브러에서 크게 삽을 푼 다음부터는 영국에서 품바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지어주었다. 요새 국내에서는 품바라고는 하지 않지만 라이온 킹도 잘 쓰지 않는 편이다. 리동궈라고 부르는 사람은 간간이 있다.[54] 다른 별명은 이름을 거꾸로 한 ‘국동이’.[55]
이동국 논쟁은 박주영, 정성룡의 국대 합류 건과 더불어 한국 축구의 가장 큰 떡밥거리로 동빠와 동까가 만날 때마다 대규모의 키워가 벌어지며 국가대표 발탁 그 자체도 찬반 여론이 들끓는 부분이다. 이 논쟁은 단순히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커뮤니티뿐만이 아니라 비교적 온순한 아이러브사커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국대 발탁 찬성론자의 경우에는 그만한 골 결정력을 가진 공격수가 아직도 나오지 않았고 클럽에서의 활약도 상당히 준수하기 때문에 뽑아야 하는 입장이고 반대론자의 경우에는 뽑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라는 입장. 다만 반대론자의 경우 단순히 이동국의 안티만이 아니라 전북의 팬들도 어느 정도는 그의 차출을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최강희 감독처럼 국대에서 욕 먹고 오느니, 그냥 클럽에 집중하자는 의견이나 나이가 많으니 몸을 생각해 클럽에 집중하자는 의견을 내세워 국대 차출을 반대하기도 했다.
7. 미디어 활동
자세한 내용은 이동국/활동 내역 문서 참고하십시오.8. 논란 및 사건·사고
자세한 내용은 이동국/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9. 관련 언사
자세한 내용은 이동국/관련 언사 문서 참고하십시오.10.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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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한자 이름은 李東國[56]이었는데
2007년에 동녘 동(東)을 한나라 동(同)으로 바꿨다. 음을 그냥 내버려 두고 한자만 개명하는 경우는
사주팔자에 의해서 개명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동국의 한자 이름은 작명사주상 흉획으로 보는편인 26획[57]이며 결정적으로 이동국의 형 역시 東자를 쓰고 있어 집안에 東자를 쓰는 사람이 두 명 있으면 안 좋다는 점도 한 몫했다. 그 때문에 계속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했다고 판단해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58] 同은 東보다 2획이 적어서 총 24획이 되는데 극강의 획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획수로 본다. 국대 방 선배인
안정환에게는 ‘국동이’로 불리는 이유.
- 동국대학교와는 이름이 같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종종 엮이곤 하는데, 공교롭게도 개명 전 이름이 동국대학교의 한자 이름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東國이었고 동국대학교가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 대학인데, 이동국 본인 역시 불교 신자 집안 출신이라는 점에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이동국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위덕대학교 출신인데, 동국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위덕대학교 역시 불교 종단 대학이다. 단, 이쪽은 동국대학교를 운영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 대학이 아닌 대한불교진각종 종단 대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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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까지 포항에서 나온 진또배기 포항 출신이지만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동국은 포항제철이 위치한 포항시 남구 출신[반론]으로 이곳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포스코 노동자들과 더불어 해병대 1사단 본부와 포항공대가 있는 곳이라 포항사람보다 외부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다. 그래서 타지방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지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실제로 이동국 말고도 포항시 남구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경상도 사투리가 정말 약하다. 1998년 갓 스타가 된 후 MBC 예능에 출연했을 때에는 "갸들 어디서 뭐 먹고 있는 거 아니가?" 정도의 옅은 방언을 구사했지만 어른이 된 이후에는 정말 거의 쓰지 않는 듯하다. 다만 이동국 본인은 본인 말투에 사투리 억양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아내도 이동국이 사투리를 써서 첫 인상은 촌스러워 보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포항을 떠나고 나서부터, 타지역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억양이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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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1997 미스코리아 하와이 미 이수진과 결혼했다. 2007년에는 쌍둥이 자매를 득녀. 참고로 2010년 결혼한
은지원의 前 부인이 이동국 부인의 언니인지라 은지원은 동서지간이 되었다. 1박 2일에 출연했을 때 자막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은지원이 2012년에 이혼을 하면서 지금은 남남사이. 2013년 또 쌍둥이 자매를 득녀하며 4자매의 아버지가 됐다. 그리고 힐링캠프 녹화분에서 최근 아내가 또 임신해서 자녀를 다섯 둔 아버지가 될 예정이라고 밝혔고 2014년 11월에 득남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내가 자식 욕심이 많은 편이다(...). 다행히(?) 5남매 양육에만 힘쓰기로 한듯 10여 년이 지난 뒤에도 추가 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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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 골을 성공시킨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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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FIFA 월드컵 프랑스가 끝난지 1~2년 정도 후 당대의 인기
가수였던
김현정과 열애설이 퍼지기도 했다. 다만 이동국이나 김현정이나 그 당시의 살인적인 일정을 감안한다면 실제로 만나서 얼굴은 본 적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직후 지상파 주말 한 예능 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해 당시 자신의 홈 구장이던
포항스틸야드에서 한 PK 대결에서 골을 허용해 준 적이 있는데 처음 얼굴을 봤을 때가 이때였을 가능성이 높다.
- 2016년 7월 19일에 김병지가 은퇴한 이후 현역으로 남은 마지막 1998 월드컵 멤버였다.[61] 그리고 2020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으며 이동국을 마지막으로 1998 월드컵 멤버는 모두 은퇴했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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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최연소로 월드컵 경기에 출전했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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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균의 사진으로 인해 가장 많이 웃음거리가 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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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5 배틀에서는 최약의 이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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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에
마약 퇴치
홍보 대사로 활동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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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즈브러에서 리턴한 뒤로 골을 못 넣는 스트라이커에게 ~동궈라고 붙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를 들어 엘동궈(엘만데르)라든지
벨동궈라든지 2009-10 시즌의
즐동궈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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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팬들에게는 애증(愛憎)의 존재. 까임은 받아도 자기 새끼라고 열심히 실드를 쳐줬지만 미들즈브러에서 실패하고 K리그 복귀할 때 자신들이 제시한 연봉보다 더 낮은 금액에 성남으로 가버려서 까로 돌아선 팬들이 많다.
이 웹툰을 참고하면 당시 반응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포항에서 먼저 계약을 제시했기 때문에 이동국이 사인을 했으면 포항에 왔을 것이나 선수 본인이 거부하고 더 낮은 몸값으로 다른 구단과 계약을 맺었다. 윗 문서부터 계속 강조했지만 성남이 포항보다 더 적은 연봉을 제시했다. 차라리 성남이 더 많은 연봉을 줘서 떠난 것이면 대다수의 포항 팬들이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이동국 포항 시절부터의 포항 팬들은 이동국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구단에서 호의로 이적료 없이 영국에 보내줬고 더 많은 연봉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팀과 계약을 했으므로 사실상 구단에서는 섭섭하게 해 준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적료 없이 다른 팀으로 이적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더 적은 연봉으로...그리고 국대 혹사 때문이기는 한데 사실상 포항에서는 기여한 게 없다. 우승이나 개인수상 관련해서는 포항에서 신인왕을 수상한게 전부이다. 심지어 포항 소속으로는 득점 랭킹 상위권에도 들어간 적이 없다. 괜히 국대 나가서 다치고 오고 이랬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리그 구단에서는 연봉을 받으면서 국대 소속으로 뛰는 격이었고 이에 포항은 이동국 대신에 실력도 경기 감각도 애매한 비주전을 지속적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에 짜증나는 존재였다. 이 시기 국대 선수를 보유한 클럽이 다 그랬지만 이동국의 국대혹사는 독보적이기 때문에 더욱.[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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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성남 팬들에게는 증(憎)밖에 없는 존재다. 2008년 여름에 우승권 경쟁을 하던 성남이 야심차게 꺼낸 카드지만 그 카드 때문에 성남은 완벽히 붕괴했고(이후 성남은 2014년 FA컵 우승 빼고는 우승 다툼은커녕 강등 2회를 당하고도 바닥을 찍기도) 김학범 감독마저도 사퇴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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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는 성남과의 경기에서 성남 쪽 부상자가 발생해 공을 걷어낸 후 이동국이 성남 쪽으로 공을 돌려주려 했는데[65] 너무 킥이 정확하게 들어가서(...)[66] 골키퍼가 잡지 못해 졸지에 골이 들어가 버렸다. 이 때문에 잠시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성남 선수단이 감정적으로 대응, 특히
김태환은 고의로 슈팅을 했다면서 전북 선수를 밀치고(오죽하면 같은 성남 선수가 김태환을 강하게 밀면서 말릴 정도) 퇴장 당했다. 경기가 재개되자 이동국이
최은성에게 백패스를 했고 최은성이 자책골을 넣어 주면서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당시 뉴스 이 골 소동으로 전북은 성남에 2:3 패.
- 전북 팬들에게는 이장님 다음으로 가장 사랑 받는 존재다. 조재진이 전북에도 스타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선수라면 이동국은 전북에서 부활하고 현재까지 리그에서 손꼽히는 강호로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최진철 전 전북 선수 이후로 선수로선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선수인지라 국대 가서 멘탈 깨어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국대로 보내지 말자, 나 국대 안 볼래 같은 입장을 보이는 팬들도 있다. 물론 반대로 최강희 감독이랑 이동국 때문에 국대를 본다는 팬들도 있었다. 어쨌든 현재 국대와 그 국대(만 보는)빠들을 향한 전북 팬들의 증오에 최강희 감독과 함께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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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월드컵 이후 한동안 한국 축구의 희망이자 아이콘으로 인식되어 미디어에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일이 많았다.
스피드왕 번개에서는
박찬호와 투톱을 이루고(...)
그래서 5-0으로 진 것 같다.2002년에 개봉한 대체역사물 영화인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선 2002년 일본 월드컵에서 일장기를 달고 일본 대표로 뛰는 모습이 나온다.[67] 물론 현실에서 이동국은 2002년 한일 월드컵때 엔트리에서 제외되어 출전하지 못했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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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말 이동국의 이야기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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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온라인 3에서도 능력치가 좋은 편이다. 아무래도 K리그의 대표 스트라이커인 것을 배려한 듯하다. 한국선수 중에는 전설급 선수들을 제외하면 골 결정력이 최고 수준이며 몸싸움, 발리 슛 등의 능력치도 수준급. 장신 버프를 받아 헤더 능력도 좋고 위치 선정까지 나쁘지 않다. 때문에 타겟형 스트라이커로서는 상당히 좋다. 오버롤은 70 전후라서 아주 높은 수준은 아닌데 주요 능력치가 좋다 보니 한국 국적 케미를 쓰는 유저들에게 상당히 애용 받는다. 하지만 발이 느리고 개인기가 좋은 편은 아니기에 전천후형이나 크랙형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FIFA 21에서는 69라는 오버롤을 받았는데, 선수 본인은 자신의 속도 수치를 보고 "야! 내가
보경이보다 느리다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 나가수 초창기에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임재범의 '너를 위해'란 곡과 관련된 자신의 자폭성 이야기를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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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당시 오랜만에 대표팀에 발탁되면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40살이 되어서도 몸 상태가 좋으면 계속 뛰면서 골을 넣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센츄리 클럽 가입 기념으로 두골을 폭격했다. 그리고 한국나이 40이 되는 2018시즌에도 재계약을 하고는 아챔부터 리그 개막전까지 연속골[69]을 넣으며 그 포부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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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영국 무대에서 실패를 겪고 돌아왔지만 몸값 때문에 K리그보다 못한 리그에 가지는 않았다. K리그와 A매치에서의 활약 덕분에 왕서방네와 기름쟁이들의 열렬한 러브콜을 받았지만 생까고 K리그를 묵묵히 수호하고 있다. 위에 언급된 힐링캠프에서도 관련 부분을 언급했는데 그쪽에서 제시한 급료가 말 그대로 빌딩이 왔다갔다하는 수준이라서 매우 고민이 많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동이나 중국으로 이적하는 선수들이 이동국에 비해 상도덕이 없다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프로 스포츠에서 선수들의 직업으로서의 수명은 다른 직업들보다 짧고 지도자로서의 자리 또한 한정되어 있어 선수 생활 이후를 생각하기 쉽지 않다. 짧은 선수 생활에서 벌 수 있을 만큼 벌어두는 것이 선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프로 스포츠에서 종사자들에게 돈을 뛰어넘는 가치를 강요하는 것은 일견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그 이후에 벌어질 일도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어디까지나 이동국이 은퇴 후 진로가 어둡지 않고 돈이 크게 아쉽지 않은 리그 탑 플레이어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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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4일 베네수엘라와의 평가전을 앞둔 전날 부천종합운동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오는중 사진을 찍어달라는 어린팬 엄마의 요청에 아이들에게 드루와를 시전했다.
- 등번호는 항상 20번을 고수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히길, 자신이 포항에서 뛰던 시절 같은 20번을 달던 홍명보를 존경해서라고 한다. 실제로 홍명보가 국가대표를 은퇴하자 공석이 된 20번을 이동국이 바로 이어받았으며 이동국이 나이가 너무 많아져 국대 차출이 불안해지자 '제 2의 홍명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던 홍정호가 잠시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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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KBS 연예대상에서 최고 엔터테이너상을 수상했다.
기사
안정환에 이은 두 번째 축구 선수 출신 예능상 수상 사례다.
-
2016
KBS 연예대상에서 버라이어티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
동년배 다른 선수들에 비해
SNS를 꾸준히 하는 편이다. 이유는 SNS 또한
팬 서비스의 한 종류로 생각한다고.
- 과거에 국내 스포츠 선수 중 세 번째로 많은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를 보유했다.[70] 지금은 손흥민, 조규성, 이강인, 김민재 등에 밀린다.
* 본인의 마이너 갤러리가 있다. 이동국 마이너 갤러리 #
*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의 활약으로 2018년 KBS 연예대상에서 연예대상 후보에 올랐다. 현역 스포츠 선수가 연예대상 후보에 오르는 것은 최초다.
* 선수로서의 롤 모델은 데니스 베르캄프라고 한다.
* MBTI는 ENTJ에서 ESFJ로 변했다고 한다.
* 은퇴 이후 전주월드컵경기장을 종종 찾고 있다. 2021 시즌 최종전이자 홈 폐막전, 2022년 10월 30일 전북 현대 모터스의 FA컵 2차전 등을 보기 위해 전주성을 찾았다. https://www.fmkorea.com/5161260117, 2023년 AFC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킷치 SC와의 전주성 홈경기에도 방문했다.
* 타로를 믿지 않는다고 한다. https://www.mk.co.kr/star/broadcasting-service/view/2023/01/39170/
- 외식 기업 SFG 신화푸드그룹의 돼지고기 브랜드 '돈블랑'의 송도 트리플스트리트점 단골이라고 본인 유튜브를 통해 소개했다. # 실제로 해당 음식점은 이동국 축구교실과 같은 쇼핑몰 내에 위치해 있다.
-
현재
경남 FC 감독인
박동혁과는 동갑내기 절친이다.[71]
- 2024년 3월 30일, 그가 선수로서 몸담았었던 전북 현대의 홈구장인 전주성에서 펼쳐진 K리그1의 현대가 더비(vs 울산 HD FC) 경기에서 시축하였다. #
- 2024년 5월 《결과를 아는 선택은 없다》라는 수기집을 출간했다.
11. 관련 문서
[1]
2007년에 李東國에서 개명했다.
여담 문단의 첫 번째 단락 참조.
[2]
파와 항렬은 불명.
[3]
現 포항제철초등학교
[4]
2023년 대한축구협회 승부조작 축구인 사면 및 번복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영표,
조원희와 함께 사퇴했다.
[5]
FIFA 공인 기록 (104경기)
[6]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A매치 득점 공동 5위
[7]
2000 시드니 올림픽,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8]
2007 AFC 아시안컵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9]
1999
FIFA U-20 월드컵
[10]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2005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2010 남아공 월드컵
[11]
1998 프랑스 월드컵
[12]
영구 결번
[13]
현역 시절 본인이 선호하던 등번호다. 그래선지
뭉쳐야 쏜다 출연 당시에도 20번을 사용했다.
[이란성]
[이란성]
[16]
태명은 '대박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서도 대박이로 불려 왔는데 이쯤 되면 태명이 아니라
아명 수준. '대박이'라는 이름은
왕가네 식구들의
등장인물에서 따온 태명인 것으로 보인다. 누나가 넷이나 되는 막내 아들이라는 점이 같다. 이로써 이시안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고모가 무려 네 명이나 생기게 되는 것이다.
[17]
본인의 공식 프로필상에는 무종교로 되어 있어서 딱히 신앙심이 있거나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집안 자체는 상당히 독실한
불교 집안이다. 특히 부친이 꾸준히 절에 다닌다고 한다. 아들이 월드컵에서 골만 넣어 준다면 머리 깎고 스님이 되는 게 대수겠냐는 말로 아들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18]
1위
김병지(706경기), 2위
김영광(605경기/은퇴)
[19]
1위
염기훈(110도움)
[20]
2021년 6월 26일까지는 1위 였지만, 27일부로
데얀 다먀노비치에게 추월 당했다.
[21]
1위
노병준(18골), 2위
김영기(15골), 3위
김은중과 동률
[22]
김재한과 동률
[23]
2014년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면서 황선홍, 박주영에 이어 3번째로 전대륙 상대로 득점한 선수가 되었다. 박주영의 경우 호주가 OFC에서 AFC로 소속을 바꾼뒤 득점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24]
이동국의 경우 호주가 OFC 시절에 득점했다. 어찌보면 황선홍에 이어 두 번째 전대륙 상대 득점자다. 2017년 손흥민이 콜롬비아를 상대로 득점하면서 역대 4번째 전대륙 상대 득점자가 됐고 현재까지
황선홍,
박주영, 이동국,
손흥민 등 네 명의 선수만이 이 기록을 갖고 있다.
[25]
전 대륙 상대 득점 기록이 힘든 이유 중 하나가 오세아니아 국가를 상대로 득점하기가 어려워서다. 대륙도 다른데다 전체적인 실력도 떨어져 국제 대회에도 만나기 힘들기 때문에 A매치에서 맞붙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호주가 OFC에서 AFC로 소속을 바꾸면서 호주를 상대로한 득점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논란 없이 전대륙 상대 득점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수는 이재성이다. 국가대표 데뷔한지 얼마 안돼 뉴질랜드를 상대로 골을 기록했기 때문이고 현재까지 5대륙(오세아니아 - 뉴질랜드, 아시아 - 미얀마, 유럽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중미·카리브 - 코스타리카, 남미 - 콜롬비아)을 상대로 득점했다. 이게 얼마나 기록하기 힘든 것이냐고 하면 지금 세계 6대륙 득점에 성공한 선수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치차리토,
호나우두,
호마리우,
오카자키 신지,
팀 케이힐 등 몇 안 되는 편이다. 즉 유명한 선수들도 보유하지 못하는 이러한 기록을 지녔다는 자체가 꽤 의미있다 볼 수 있다.
[26]
2011년을 끝으로
K리그 리그컵을 폐지했다.
[27]
국내 32 + 해외 2
[28]
국대에서는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 와중에도 발리슛만큼은 칭찬을 받았다. 전북이 리그 강호라는 것을 감안해보아도 리그 내에서 슈팅당 골 비율이 가장 높은 순위권에 랭크되어 있었다는 건 대단한 것이다. 이동국이 개발이라면 리그 내 모든 용병들도 개발, 아시아에서 개발이 강을 메울 것이다. 다른 능력이 지적받아도 순수 결정력만큼은 절대 나쁘지 않다.
[29]
발리슛은 슛 중에서도 그 난이도가 매우 높아서 유럽 상위 리그 선수들도 경기중 발리 슛 찬스에서 헛발질을 하거나 제대로 임팩트하지 못해서 공이 민망하게 빗나가는 경우를 굉장히 많이 볼 수 있다.
[30]
화려한 드리블을 보여준 적은 없지만 그래도 기본기는 잘 다져진 편이라 볼을 쉽게 뺏기는 타입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데뷔 초기에 종종 공미로 뛰기도 했고 또 프로리그에서 종종 관찮은 드리블과 패스 감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비교대상이 어디까지나
이천수나
안정환과 같이 국내 탑급의 테크니션이어서 그렇지 이동국도 발기술이 약점인 편도 딱히 아니었다.
[31]
이제 와서는 활동량이 적다고 까는 사람은 그냥 국대조차 제대로 안 보는 사람으로 취급해도 될 정도다. 전체적으로 어린 시절 묻지마 강슈터 기질과 그 둔해 보이는 움직임이 이런 편견에 기여한 바가 크다. 사실 이동국은 원래부터 활동량이 약점인 선수는 절대 아니었는데, 흔히 '받아먹기'식으로 연명하는 선수들도 골을 넣는 그 장면에만 보이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이지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위치를 선정하기 위해 상대 수비수들 사이의 빈 공간을 헤집고 다니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오프사이드 라인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도 라인 근처에서 수시로 움직여야 한다. 활동량이 적은 스타일이라면 위치 선정으로 연명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동국이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는 타입의 공격수는 원래 아니었지만 이런 점 때문에 활동량이 적다는 편견이 생긴 것이지, 사실 활동량이 단점이라고 보긴 어렵다.
[32]
유명한 우루과이전 카페베네 슛처럼 판단 자체는 괜찮았다. 오히려 패스를 받기 위해 침투하는 움직임은 모범적인 수준이다. 차기도 적당히 찼는데 들어가기에는 아주 조금 모자란 그런 슛이 나오고는 한다. 우루과이전 실축도 위치선정, 침투, 턴 등 슈팅 직전까지의 움직임은 정말 훌륭했지만 그러나 골이 되지 않았다.
[33]
이동국은 독일 월드컵 직전에 전방 십자인대를 다치는 치명적일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 미들즈브러에서의 활약이 안타까운 것은 무엇보다도 이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기력이 크게 떨어진 시점에 이적한 탓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돈의 규모가 다른 epl팀이라지만 예나 지금이나 미들즈브로는 양질의 메디컬케어를 해줄 수 있는 팀이 아니다. 더군다나 십자인대 부상은 축구 선수에게 치명적인데다가 이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들이 더 많다.
[34]
이런 큰 부상을 끝내 극복해낸 이동국이 정말 대단한 것이고 부상과는 별개로 당시 보로를 이끌던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이동국의 실력에 대해 큰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35]
사실 패스나 움직임에 자신있어하는 선수일수록 몸싸움을 좋아하지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다만 패스.
[36]
워낙 선수 생활을 오래하고 부상이 많아서 느리다고 하는 것이다. 육상부 출신인 것도 있고 부상이나 나이를 빼고 본다면 원래는 꽤 빠른 편이었다.
[37]
드리블과 몸싸움 등을 통한 개인 돌파가 되는 측면 공격수를 기용하는 것은 원래 최전방 원톱을 살리기 위해 전세계 모든 팀들이 시도하는 전술이다.
[38]
사실 황선홍 이후 한국의 전통적인 대형 공격수는
최용수였다. 실제로 황선홍 은퇴 이후 최용수가 원톱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미국전 실수로 인해서 이미지가 안 좋았고 나이도 많았던 지라 설기현과 조재진에 밀려났다.
[39]
2002 월드컵의 인상 때문에 안정환의 주 포지션이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 안정환의 주 포지션은
세컨드 스트라이커이며 실제로 본인은 아예 공격형 미드필더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40]
실제로 안정환은 이동국보다도 몸싸움에 약했지만 대신 이동국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더 뛰어난 선수였다. 안정환이 최고의 경기력을 선보였을 때는 10번 혹은 9.5번 자리에 섰을 때였다.[72]
[41]
하지만 둘의 부조화와 별개로 사적으로는 절친한 사이다. 안정환의 "국동아!"와 이동국의 "아유 진짜!"도 둘이 거리낌 없이 지내다보니 나온 말이고 안정환도 이것에 대해 유머거리로 언급할 정도다. 2020년에
뭉쳐야 찬다에 같이 출연해서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참고로 안정환은 1976년 1월생이고(심지어 빠른 생일) 이동국은 1979년생이라 안정환이 4년 선배인데도 저렇게 투정을 부릴 수 있다는 것부터 격없이 지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표팀이 히딩크의 영향으로 선후배 관계나 나이 차이에 개의치 않고 지내게 된 것도 있겠지만. 안정환이 이탈리아, 이동국이 독일에 있을 때 휴일에 중간 지점인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주 만났다고 한다.
[42]
그래서 이동국-박주영 투톱의 롤을 바꾸자는 의견도 좀 있었다.
[43]
주로
이근호가 이 역할을 맡았다.
[44]
총 8회 우승(2009, 2011, 2014, 2015, 2017, 2018, 2019, 2020)
[45]
2위는
데얀
[46]
2020. 11. 1. 은퇴 시점 기준에선 1위였으며 이후 또 다른 레전드인 데얀이 갱신했다.
[47]
비슷한 사례로
박주영이 있다. 두 명 모두 한국 축구 정통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을 재능으로 평가 받았지만 이동국은 혹사와 부상, 박주영은 아스날에서의 몰락으로 기대만큼 대성하지 못했다.
[48]
근접했던 선수로 득점왕이 없는
이흥실,
고정운,
이천수, 도움왕이 없는
신태용,
정조국이 있다.
[49]
548출장 228골 77도움
[50]
전세계적으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엠레 벨로조글루,
로케 산타 크루즈만 가지고 있는 희귀한 기록이다.
[51]
90년대 포항에서 데뷔해 첫 성인무대 골을 넣은 후 2000년대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포로 활약했고 유럽 무대를 경험했으며 2010년대 전북에 입단해 전북 왕조의 개막을 알리며 K리그 최고의 공격수가 되었고 2020년 자신의 마지막 현역 시즌에서 시즌 개막골을 넣는 등 은퇴할 때까지 교체와 선발을 오가면서 활약했다.
[52]
A매치가 1년에 10경기라고 가정한다면 10년을 넘게 대표팀에서 꾸준히 출장해야 이룰 수 있는 기록이다. 즉 선수로서 활동하는 기간 내내 꾸준히 대표팀에 소집되고 출전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직관적인 지표라 할 수 있다. 이동국과 동시대인 2000년대에서 활약한 선수 중에서는
박지성과
이영표 밖에 없으며 한 세대 후인 2010년대라고 치면
기성용과
손흥민,
김영권 만이 달성한 기록이다. 또한 FIFA 공인 기준상으로 23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센추리 클럽 가입 멤버는 15명 밖에 없다.
[53]
사실 대표팀 주력 공격수였는데도 월드컵에서 1골도 득점하지 못한 선수가 이동국뿐만은 아니며 이동국 이후로도 부상으로 출전의 꿈이 좌절된 선수도 한둘은 아니다. 하지만 유독 이동국에게 그런 이미지가 있는건 그만큼
아이콘으로서의 스타성이 있었다는 반증으로도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선수 초기 극심한 국대 혹사와 언론의 피해자로서 해피엔딩을 볼 수 없게 된 아쉬움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54]
중국 축구팬들이 중국을 상대로 할 때 활약한 그를 중국식 발음으로 부르던 것이 한국에서 놀림거리로 된 경우다. 근데 시간이 흐르면서 빠도 까도 다들 동궈라고 부른다. 이승엽의 오푼, 홍진호의 콩과 같은 케이스. 심지어 축구계 후배들도 동궈형으로 부른다.
[55]
본인이 코치로 활동한
뭉쳐야 찬다 2에서 자주 등장.
[56]
이름 때문에 많이 엮이는
그 대학교의
한자 이름도 바로 저것이다. 東國이라는 이름은 예전부터 동쪽의 나라라는 뜻으로 이 한반도를 지칭할 때 흔히 쓰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혹은 해동海東). 예컨대
동국이상국집.
[57]
李 7획+東 8획+國 11획, 합 26획
[58]
음은 그대로 두고 한자만 바꾸는 개명은 어지간해선 잘 받아준다.
[반론]
정작 고향집은 "북구 죽도동"(죽도시장 주변지역)이다. 다만 초중고를 방언을 거의 쓰지 않는서울사람들이 경상도말 따라하는 듯한 지곡동에 있는 학교에 다녀서 사투리를 거의 구사하지 않을 뿐이다. 이동국의 고향 집이 북구 죽도동이라는 사실은 과거 기사들을 통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60]
종종 친분 있는 선수들과 대화할때는 사투리를 섞어쓰긴 하는 듯.
[61]
2017년에
현영민이 은퇴하면서 2002 월드컵 멤버는 모두 은퇴했음에도 이동국은 현역을 유지했다.
[62]
이동국 은퇴 이후에 1998 월드컵에 출전했던 현역 선수는
잔루이지 부폰,
오노 신지,
이토 테루요시였으며 부폰이 2023년에 은퇴하면서 2023년 기준 단 두 명만 남았다.
[63]
만 19세 1개월 22일.
[64]
그래서 S급이 아니라 애매하게 국대에 뽑힐 듯 말 듯한 A급 중 최상위 선수와 리그 씹는 용병을 보유한 성남이 잘 나가던 시기였다.
[65]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건 축구에서의
불문율이다. 안 그러면 대차게 까인다.
[66]
원래는 골키퍼가 처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가야 한다.
[67]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지 못했다는 전제하에 진행되는
나비 효과로 인해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로 남은 세계를 그리고 있다. 오프닝 신 마지막에 나오는 2002 일본 월드컵에서 기뻐하는 이동국의 왼쪽 가슴에 박힌 일장기가 클라이막스. 이 장면은 이동국과 그의 가족들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68]
영화가 제작되었을 때가
2001년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은 유명한 축구 선수인 이동국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당연히 출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69]
3경기 4골
[70]
2020년 9월 8일 기준 53.4만 명.
[71]
이러한 인연 때문에 2024년 4월 21일
경남의
서울 이랜드 FC와의 홈경기가 펼쳐지는
창원축구센터를 찾아가 경기 전에 시축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