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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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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항 스틸러스(1998~1999, 2001~2002, 2005~2007)2. 미들즈브러 FC3. 성남 일화 천마4. 전북 현대 모터스5.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K리그에서의 활약6. 해외에서의 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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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항 스틸러스(1998~1999, 2001~2002, 2005~2007)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26149696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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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고종수와 함께 K리그의 르네상스를 이끈 3인방 중 한 명으로 1998년에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다. 이 시기 2월에서 4월까지 프리시즌 기간 중 열렸던 아챔에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안 나온 새내기 주제에 2골이나 넣는 등 매서운 활약을 보여주며 리그에서 15경기 7골, 컵 대회 9경기 4골로 데뷔시즌 총 21경기 11골을 기록해 그 해 리그 신인왕을 차지하며 황선홍의 뒤를 이을 공격수로 주목을 받았다. 몸이 날렵하던 신인시절, 패스를 받은 후 논스톱 180도 터닝슛으로 골을 넣은 장면이나, 골인 후 유니폼을 들쳐올려 얼굴에 뒤집어 쓰고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던 세레모니는 국대경기만 보는 냄비팬들에게도 이동국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동시기 청소년 대표팀, 올림픽 대표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그를 볼 수 있었고, 어디에서건 활약이 빼어났다. 이 시기의 상세사항은 국가대표팀 약력에 기술. 왜냐면 이 시기는 사실 포항 선수가 아니라 대한민국 선수였기 때문.

2000년에 이르러 이동국의 활약이 절정에 달하자 해외에서도 반응이 있었다. 청대와 올대는 지배, 리그와 아챔과 국대에서는 준수한 활약을 하는 어린 철인 스트라이커, 관심이 갈 법도 하다. 베르더 브레멘, 샬케 04 등의 구단에서 러브콜이 있었고 특히 AC 페루자에서는 무조건 오라고 오퍼를 넣으며 이동국을 직접 페루자까지 불러오기도 했다. 그러나 구단 측에서 이동국의 무릎 상태를 보고 으응? 하면서 테스트를 요구하자 포항은 그 따위로 하면 못 보내겠다고 싸우며 거의 100% 확정일 것만 같던 이 이적은 결렬되었다. 이후 페루자는 잘 알듯 부산 아이콘스 안정환을 영입해간다.

포항스틸러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은 2006시즌이다. 독일 월드컵을 3달 앞두고 시즌이 개막했는데 이동국의 폼은 월드컵이라는 동기부여 때문인지 절정에 달해있었고 팀이 이기든 지든 매번 골을 넣으며 맹활약 했지만 4월 5일 8라운드 인천과의 경기에서 롱볼을 따라가던 도중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졌으며 불의의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고 만다. 당시 회고하기를 이때 곧 있을 월드컵 때문에 몸보다 마음의 상처를 더 크게입었다고 하였다.

이후 후반기에 복귀했지만 팀은 수원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했고 이것이 포항 소속으로 뛴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1.1. 베르더 브레멘 (임대)

파일:attachment/Lee_Werder_Bremen.jpg
결국 2000년 K리그 시즌이 끝나고 이동국은 무릎 재활을 위해 독일로 향하였고 재활 도중에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 샬케 04에게 임대요청이 들어온다. 이동국은 샬케 04이름에 공사가 붙어있어 공사판에서 일하는 팀인 줄 알아서 [1] 오퍼 거절하고 재활 이후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당시 주전들의 부상등으로 공격층이 빈약했던 베르더 브레멘에 6개월간 임대료 10만 달러의 조건으로 임대를 가게 된다. 베르더에서는 고작 7경기를 출전하고 다시 포항으로 복귀하면서 첫 해외 진출이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때 라데 보그다노비치와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둘다 벤치(...)

협회 차원에서 등 떠밀어 보낸 전시행정 성격이 있는 건 맞으나 이 무릎으로 어떻게 경기를 뛰었냐는 팀닥터의 말은 이따금 나오는 립서비스인 만큼, 부상이 상당히 심각하지만 우월한 우리팀 의료진들은 고칠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당시 부상으로 바로 경기를 뛸 수 없는 상태였기에, 베르더 감독이 지방지와 한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장기적 관점으로 데려온 선수가 맞다. 6개월 임대라는 형식이긴 했으나 계약서에 완전이적 조건도 포함되어 있다. 이동국은 7경기를 출전했는데, 당시 부상에서 회복되고 최대 10경기 정도를 전망했으므로, 부상 이후의 컨디션 조절과 팀 적응까지 생각하면 뛸 만큼 뛰었다고 볼 수 있다.[2] 7경기 출장을 낮잡아 볼 수 있는데, 당시 베르더 팀내 스트라이커 경쟁이 얼마나 개막장이었냐 하면 당시 주전 투톱이 클라우디오 피사로 아일톤인데 2013년 기준으로 이 두 선수들이 분데스리가 용병 역대 득점기록에서 나란히 1위와 3위를 차지하고 있다.[3] 무득점이긴 하나 7경기 전부 다 교체출전이고 이 당시 분데스리가 득점왕은 20골 언저리에서 성립하고 있었고 중상 정도가 30경기 넘게 출전해서 10골 언저리를 기록했으므로, 통계적으로 봤을 때 투톱 전술에서 교체로만 7경기 무득점은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부상에서 회복한 이후 그 피사로와 그 아일톤의 교체 선수로 7경기를 꾸준히 출전했고, 제법 이른 시간의 교체나 뒤지던 경기에서의 교체도 두 경기 가량 있고, k리그 포항에서 뛰던 라데도 이 때 베르더 3년차 교체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더에 선수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제법 기대를 받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귀국하게 되는 계기는 일단 베르더 구단의 입장바꾸기가 컸다. 감독이 이동국은 장기적 관점에서의 영입이며 단기 임대용이 아니라는 인터뷰가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볼 때 최소한 현장에서는 받아들여진 것이 맞고, 구단 차원에서는 만족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병역 문제이다. 당시 전시성 행정이건 뭐건 병역을 끝내지 않은 축구선수의 해외진출이 가능했던 것은 2002년 월드컵을 맞아 2002년 6월까지 병역을 유예해 줬던 까닭에 이동국이 진출할 수 있었고[4] 베르더에서는 사정을 다 알고 나서 연봉도 낮추려고 했고 완전이적 대신 1년 임대연장을 하고 싶어했기에 이동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1년 임대 연장 선수로서는 과연 처우나 기용을 제대로 해 줄 것인지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고 다음 1년이 월드컵 선발에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이동국으로서는 돌아오는 것이 당연했다.[5][6]
7경기 0골 0도움

1.2. 광주 상무 불사조 (군 복무)

2002년 월드컵 엔트리에 탈락하고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여 병역면제 특례를 받지 못하게되자 병역 비리 사건 연루로 인해 곧바로 상무행을 선택. 부산 원정 해트트릭을 시작으로 서서히 폼을 끌어올리더니 11골 6도움의 만능 활약을 한 이동국 덕분인지 상무는 2004 시즌 8위를 차지한다. 이는 상무가 기록한 K리그 최고 순위.[7] 참고로 입대하기 전까진 미소년 이미지가 있었는데 상무에서 뛰면서 원숙한 외모가 되었다. 상무에 복무하면서 비인기종목임에도 4년에 한번 열리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을 위해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다른 종목 선수들을 보면서 마음가짐을 겸허히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때 기록한 리그 11골은 이동국의 프로 데뷔 첫 단일 시즌 리그 두 자리수 득점이다.

여담으로, 군복무 당시 선임이자 선배였던 김상식과 같이 생활하면서 정말 많이 배우고 바뀌었다고 한다.

2. 미들즈브러 FC

파일:external/m.kfa.or.kr/200721131842.jpg [8]

2007년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미들즈브러에 진출하지만,[9] 리그전에서는 무득점, 칼링컵과 FA컵에서 3, 4부 리그 팀을 상대로 2골만을 넣는 극심한 부진 끝에 1년 뒤 방출되었다.

06-07시즌 2월 25일 EPL 28라운드 레딩FC와의 홈경기에서, 80분 경에 야쿠부와 교체 투입 되어 EPL 데뷔전을 가졌다. 경기는 2:0으로 미들즈브러 쪽으로 기운 상황이었고, 미들즈브러 홈팬들은 아시아에서 온 스트라이커를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경기가 끝나기 1~2분 전, 스튜어트 다우닝이 좌측에서 멋진 크로스를 올려주었고, 이동국은 논스톱 왼발 슛을 때렸으나, 안타깝게도 공은 오른쪽 크로스바를 맞아 버리며 나갔다. 비록 득점은 하지 못했으나, 팬들은 안타까워 하면서도 큰 박수를 보내주었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카메라는 연신 이동국을 쫓아가며 TV 화면으로 그를 내보내었다. 이 경기 임팩트가 꽤나 있었는지, 스카이스포츠로 부터 평점 7점을 받았고[10] 미들즈브러 팬들은 "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친구 한명 공짜로 잘 데려 왔구나!" 하며 그의 활약을 기대하였으나 그 다음 그의 두 번째 경기 출전은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과의 FA컵 5라운드였는데, 후반 41분 교체 투입 되어 연장 30분과 함께 승부차기 까지 소화했다. 하지만 그가 때린 네 개의 슈팅은 모두 빗나갔고 승부차기에서 마저도 골대를 맞춰 두 경기 모두 골대 불운을 겪었다.

그 뒤로는, 선발 교체를 오가며 점차 기회를 늘려갔다. 2007년 3월 17일 맨시티전에서 프리미어리그 첫 선발로 나섰으며[11] 2007년 4월 21일의 맨유전에서 좋은 움직임을 보였고 페널티박스 안에서 기회를 잡았으나 존 오셔의 파울에 막혔다. 그러나 이것을 주심이 보지 못하며 페널티 킥을 유도해내는데는 실패했다. 2007-08 시즌에는 포지션 경쟁자였던 마크 비두카가 뉴캐슬로 이적하며 기회가 더 많이 생길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2007년 8월의 EFL 컵 경기에서 3부리그 팀인 노샘프턴 타운을 상대로 중거리골을 집어넣으며 사우스게이트 감독의 신임을 차지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선발로 출전한 에버튼 원정에서 골포스트를 맞추고 평점 4점을 받는 최악의 경기력을 선보인 끝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2008년 1월 FA 컵 경기에서 4부리그 구단인 맨스필드 타운을 상대로 골을 넣으며 부활하나 했지만 이어진 선발전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하며 3월부터는 다시 1군에서 어떤 기회도 잡지 못한 채 결국 2008년 5월 13일, 팀에서 방출되었다.[12]

이런 부진한 활약을 본 영국 언론에선 한국의 이동국은 오지 않고 그의 탈을 쓴 유학생이 축구 선수 행세를 한다고 대차게 깠다. 그리고 그의 별명 라이온 킹은 거짓말이고 사실은 품바가 심바의 가죽을 뒤집어 쓴거라고 조롱하며 품바라는 별명이 탄생. 게다가 최악의 외국인 선수 1위에 랭크되면서 확인 사살까지 당했다.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은 떨어지는 피지컬.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쓰지 못하게 하면 그만인 현대 축구에서 피지컬과 경합 능력은 상대의 압박을 견뎌내며 살아남기 위한 필수요소이지만, 이동국은 거친 유럽 수비수와 몸싸움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딪히기만 하면 나가떨어지곤 했다. 당시 미들즈브러는 스튜어트 다우닝을 제외하면 미드필더진이 완전히 전멸한 상태여서 전방 공격수들의 개인 기량과 피지컬에 크게 의존하는 팀이었기에 이동국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십자인대 부상이라는 큰 부상을 겪고 제대로 실전 경험을 치르지도 않은채 이적한 것도 컸다. 부상 여파로 제대로 된 폼일리가 없는 이동국에게 미들스브러는 실전 경험을 꾸준한 출전으로 끌어올려줄 만한 입장이 아니었고, 몇 안되는 기회에 실전에서 폼이 올라오지 않던 이동국은 도리어 폼이 떨어지고 다시 출전을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 된 것이다.

당시 야쿠부 아이예그베니 마크 비두카가 각기 10골 넘게 넣었으며 결국은 실력으로 보여줘야 했다는 의견이 많다. 당시 보로의 주전공격수였던 야쿠부나 비두카나 연계 그런 건 잘 모르는 대신 박스 안에서만 돌아다니는 걸 대강 공 주면 떡대를 이용한 피지컬로 받아내서 어찌어찌 골 넣는 타입이다. 이동국을 제외하더라도 툰카이 산리, 미도, 아폰소 알베스, 제레미 알리아디에르 같은 보로의 보조 공격수들의 기록은 좀 많이 좋지 않은데[13], 이들의 공통점은 주전 공격수들보다 기술이 좋으면서도 최소한 180이 넘는 떡대로 주전 공격수들을 기술로 몸싸움으로 보조해 줄 수 있는 역할을 기대했던 거 같은데...망했다. 덕분에 툰카이 산리는 날개로 많이 뛰었으며 그냥 좀 유망했을 뿐인 알리아디에르야 그렇다 쳐도 토트넘에서 괜찮은 모습도 보이던 미도마저 시망 상태가 됐다. 실제 비두카도 가고, 야쿠부도 가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지만 이동국도 사라져 아폰소 알베스가 뛰던 시즌 보로는 강등되었다. 막강한 피지컬과 괜찮은 슈팅력을 자랑하던 비두카와 야쿠부가 없자 제법 정확하던 다우닝의 크로스 성공률은 급락, 차라리 올리지 않는 게 공격의 맥을 끊지 않아 도움이 되는 그런 수준으로까지 떨어지게 되었다.[14] 아폰소의 피지컬이 프리미어에서도 수위급이던 야쿠부 비두카급은 아니었고, 떡대 공격수의 우산효과 없이 기술 좋은 브라질인 아폰소가 혼자 보로의 최전방에서 뭘 해보기엔 무리였다. 보조 공격수 노릇하던 반 시즌의 모습은 좋았다.

그래서 당시 몸값이 싸거나 자유계약으로 풀린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신경 쓰지 말고 거금을 들여서 비두카와 야쿠부처럼 피지컬이 좋은 주전 공격수들을 포함한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어야 했다면서 미들즈브러 구단의 운영 방식이 문제 있었다고 비판하는 주장이 있는데, 일단 결과적으로는 그렇지만 이 당시 미들즈브러 구단의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다.

미들즈브러 구단은 2005-2006 시즌 FA컵에서 4강에서 좌절하고 UEFA컵 결승에서 세비야에게 지면서 유럽 대회 연속 진출에 실패하자 잉글랜드 북부의 인구가 적은 공업도시라는 스몰마켓 연고지 특성상 하셀바잉크에 이어서 이듬해에는 비두카도 잔류 시키지 못하고 야쿠부도 이적 시키고 또 그 이듬해에는 심지어 팀의 주전 골키퍼이자 레전드인 마크 슈워처까지도 자유계약으로 이적시킬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액주급자를 정리하는 긴축재정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이 잉글랜드 감독이 선임 되어 떠나자 팀의 주장인 사우스게이트를 과감하게 선임한 것도 프리미어리그에서 능력이 입증된 감독을 외부에서 선임하기에는 여러모로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15]

그 대신 다른 팀에서 방출 되거나 자유계약으로 풀린 선수들, 유스에서 나온 선수들을 기용하는 형태로 팀이 운영 되었고, 이동국의 영입도 이렇게 경제적으로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나마 그 상황에서 과감하게 투자한 게 툰차이 산리와 아폰소 아우베스였고 툰차이 산리는 처음 반시즌에는 부진했으나 이후 적응하면서 주도적으로 팀의 공격을 이끌었고, 아폰소도 적어도 반시즌에는 좋은 모습을 보였고 미도도 최소한 뉴캐슬과 선더랜드 등의 더비 라이벌과 전 소속팀 토트넘전, 리버풀 원정에서도 골을 넣으며 특정 경기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 상황에서 아폰소, 미도 등 툰차이를 제외한 공격진이 부진하고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에이스인 다우닝까지 슬럼프에 빠져 미드필더진도 부진하고[16] 나이 어린 선수들 위주로 된 수비진은 경험부족으로 실수를 범하는 등의 문제로 이길 경기를 못이기고 지면 안되는 경기를 지는 등 강등권에 돌입하자 겨울 이적 시장에서 뭔가 변화를 줄 수 있는 영입을 시도했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이 때 세계금융위기 시기여서 공업을 기반으로 한 사업을 하는 구단주가 여력이 거의 없었고, 슬로바키아 출신의 유망주 페테르 갈안드레즐리, 위건에서 부진해서 헐 시티로 임대 가서 반시즌 5골을 넣으며 약간 좋은 모습을 보인 말론 킹을 임대로 영입하는 것 외에는 제대로 된 보강이 이뤄지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맨체스터 시티가 구단주 만수르 빈 자이드 알나얀의 지원으로 겨울 이적시장에서 크레이그 벨라미, 웨인 브릿지, 셰이 기븐, 나이젤 더 용 같이 프리미어리그와 유럽과 국제 무대에서 기량이 검증된 선수들을 영입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어쨌든, 팀의 미들진은 시망상태라 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고[17], 시간이 지나며 이동국 자신도 이점을 깨닫고 한국시절과는 달리 밑으로 내려와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링크 플레이를 해주는 등 나름대로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풀타임 레귤러가 아닌 리저브의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매번 출장시간은 짧은 편이었고 결정적인 찬스에서는 종종 골 포스트를 맞추기도 하는등 운도 좀 따르지 않았다. 결국 골을 넣지 못하고 언론의 비난에 시달리게 되며 출장시간도 점점 줄어들게되자 선수본인도 골에 대한 조급증이 생겨났는지 후기에는 이런 변화된 플레이가 점차 사라지고 무리하게 골을 노리는 무모한 플레이를 일삼다가 자멸하게 된다. 본인이 인터뷰에서 말하길 어느 경기에서 넣어야 되는 걸 많이 못 넣었는데 그 때 이후로 동료들의 신뢰도 잃어 패스도 잘 안 왔다고 한다.[18]

또한, 06-07 시즌이 끝나고 아시안컵이 열렸는데 이동국은 부상과 팀적응을 위해 대표팀 소집을 거절하는 입장이었으나, 당시 프리미어리그 삼총사(설기현, 이영표, 박지성) 세 명이 모두 소집에 응하지 않아 공격진에 구멍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베어벡 감독과 홍명보 코치가 이동국을 설득하여 억지로 합류 시켰다. 그러나 몸상태가 올라오지 않아 올림픽 대표팀과 20세 이하 대표팀에까지 합류하여 훈련을 받는등 최악의 컨디션이었고 몸상태가 좋지 못해 결국 아시안컵 본선에선 많은 기회를 받지도 못했다. 결국 제대로 대회에 뛰어보지도 못하고 팀에서 시즌 준비도 하지못하는 아주 어정쩡한 휴식기로 남게되었다.

말하자면 부상 회복 이후 잠깐 출전→ 이후 k리그 휴식 → epl 윈터 브레이크 → 교체로 가끔 출전 → 도무지 폼이 올라오지 않음 → 잘하면 될듯도 해서 다음 시즌을 기약 → 여전히 폼이 안 올라옴 → 적은 기회에 조급해져 무리한 플레이 → 시망테크.

잔인하게 말하자면 이적 실패의 정석이라 할만큼 이동국은 여러 오류를 한꺼번에 안고 떠났는데, 결과적으로 이 처참한 실패는 한국 축구계의 거름으로나마 교훈으로 남아와주게 된다. 이후 해외 진출을 하는 선수들은 가능한 위험요소를 줄이려 애쓰고 현실적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동국을 데려오면서 부진함에도 기회를 꽤 줬고, 결국 본인도 몰락했던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훗날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돼서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오랜만에 4강에 진출시키며 부활한다. 이동국처럼 훗날 재기에 성공한 셈이다.
29경기(선발 11경기) 2골

3. 성남 일화 천마

보로에서는 이동국을 급처분하려고 중동, 일본, 유럽 등을 알아봤지만 입질이 없었고, 결국 이동국은 자유계약선수로 풀리게 된다. 유럽 잔류, 일본 진출 등 여러 경로를 물색하던 중 결국 국내복귀를 결정하고 원래 소속팀이었던 포항과 우선 협상을 했지만 구단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고 조건도 박해서 결국 결렬되었다.

파일:external/dimg.donga.com/34146836.1.jpg
결국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해 재기를 노렸지만[19] 두두 등의 외국인 삼인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경쟁에서 밀리고 감독의 전술적 지시에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이동국을 기대하던 성남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동국은 반 시즌 동안 13경기 2골 2어시스트에 그쳤고 성남 역시 6강 플레이오프에서 전북에 져 탈락하며 일찍 시즌을 마무리했다. 시즌 중 김학범 감독과의 불화설이 제기됐는데 이동국 영입과 관련해서 구단과 원치 않는 영입이었느냐를 두고 불화설이 터진 것. 하지만 김학범 감독은 이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으며 # 이동국 역시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

결국 김학범 감독이 물러나고 신태용이 감독 대행으로 부임한 후, 구단 수뇌부에 의해 전력 외 판정을 받은 이동국은 김상식과 함께 전북 현대 모터스 트레이드됐다.[20]

4. 전북 현대 모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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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K리그에서의 활약

이동국이 대표팀이 아닌 소속 클럽에서 이룩한 수많은 업적들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2009년 전북에서 득점상을 차지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어 MVP에 올랐고 2011년 도움상, K리그 통산 최다 득점 및 최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다.

신인상과 득점상, 도움상을 모두 기록한 것도 K리그에는 이동국 선수가 유일하다. 그밖에도 AFC 챔피언스 리그/2011년 준우승과 최다득점,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K리그에서의 활약과 동료 선수들과 전문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저평가를 받고 있다. K리그 득점상을 차지했더니 '주워먹기만 하고 패스도 할 줄 모른다.' 고 비난하고, 도움상을 차지했더니 '어차피 국내용이다.' 고 비난하고,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맹활약했더니 이젠 '그래봤자 아시아용'이라고 비난하는 식이다.

K리그에서의 어마어마한 활약상이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중 가장 큰 것은 역시 유럽에서의 부진이다. K리그, 그리고 최근 몇 년 간의 활약상을 봤을때 '아이러브사커'나 포털사이트 댓글에서 불거지는 이동국 vs 박주영의 논란은 이동국과 박주영을 비교하는것 자체가 실례라는 것이 정론이다. 박주영은 프랑스 리그앙에서의 활약과 대표팀에서 업적이 있지만 이동국은 미들즈브러 FC에서 실패를 했고 대표팀에서도 활약은 있었지만 박주영에 비해 중요 대회에서 특별한 성과가 없었다. 특히 미들즈브러에서는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의 신임을 얻어 출장기회를 꽤 많이 잡았음에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유럽 리그에서의 부진을 이유로 이동국이 K리그에서 세운 업적까지 폄하할 이유는 없다. 물론, 아시아권 안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K리그 안에서 만큼은 이동국에 비견할만한 현역 스트라이커가 몇 명 없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최순호, 황선홍, 최용수, 김도훈, 이근호, 정조국도 다 비슷하게 대부분 아시아권에서 뛰었는데도 유독 이동국이 심하게 비판을 받았다. 그것은 유럽 무대 리그 0골과 2010년 우루과이전의 그 슈팅이 크다고 봐야한다. 사실 월드컵에서는 운이 지지리도 없는 선수인데 02년도에 엔트리 탈락과 2006년 부상으로 인한 낙마로 인고의 세월을 겪었다. 이동국이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뛴 경기도 없다. 그럼에도 그 슈팅 한 번으로 국내용 새가슴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비록 이동국이 국내용이라고 폄하당할 지언정 국내에서 업적만큼은 대단한 선수다. K리그1 200골을 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대단한 것이고, A매치 100경기 이상 출장에 33골이니 대한민국 역대 A매치 골 4위다. 이것만 봐도 이동국은 전설이다. 그렇다고 이동국을 고평가 하기에는 국가대표 중요 경기에서 제대로 활약을 못 한 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는다. 국가대표 안정환도 세리에 A에서 5골을 넣고 계약 분쟁 때문에 2002년 이후 사실상 유럽 무대와 멀어졌는데 안정환은 월드컵 3골로 인하여 평가가 높다. 중요한 순간에 한방 해 준 것이 크다. 이동국이 그 슈팅을 넣었더라면 최소한 2002년 월드컵의 황선홍처럼 한을 풀 수 있었을 것이다. 황선홍도 1994년 월드컵의 부진으로 평가절하를 심하게 당했다.

이동국의 선수 은퇴 직후 이동국이 K리그 최고의 선수라는 기사가 났다. #

이동국의 유럽 리그에서의 부진과 실력 논쟁에 관해서는 아래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6. 해외에서의 부진

이동국의 해외진출 경력은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했던 분데스리가 시절과 미들즈브러로 이적한 프리미어리그 시절이 있다. 짧은 기간 동안 흐지부지 끝난 브레멘 시절은 그렇다 쳐도, 미들즈브러 시절은 그야말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악의 실패였다.

브레멘으로 이적하던 시기 이동국은 독일에 진출한 것은 맞으나, 무릎 부상을 안고 있었다. 이적 이후에는 당연히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점차 명단에 포함되어 경기에 나오게 되었다. 이 시기 출전한 경기는 7경기로 모두 교체선수로 출장했다. 각각 81분, 79분, 87분, 62분, 57분, 61분, 82분에 출장해서 7경기 121분 출장, 공격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했다. 부상 이후 반 년 임대였고, 현장의 인터뷰 등을 볼 때 장기적 관점에서 영입한 유망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브레멘은 공격수 유망주들을 데려오길 좋아했고 연이은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으므로 아마도 사실은 추측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 미필 선수들의 해외진출은 2002년 자국에서의 월드컵을 대비해 한시적으로 허가가 났고, 2002년에서 성과를 거둔다면 대충 병역도 해결해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브레멘은 정확한 사정을 모르고 영입했으나 이후 연봉협상이나 계약형태, 계약 기간 등에서 이견을 보이며 틀어졌고 이동국 역시 2002년 월드컵 명단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반대로 미들즈브러 시기는 완벽한 실패였다. 초기에는 골대를 맞추는 등 나름대로 기대를 받았지만, 이후 심각한 부진에 빠졌고 결국 주전에서 밀렸다. 국내 팬들조차 이동국을 밀어주는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을 보살 혹은 생불이라 불렀을 정도였다.[21] 비록 받아먹은 돈은 많지 않아서[22] 먹튀라는 소리는 안 들었지만 잉글랜드 언론에서 방출된 이동국을 보고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비아냥거렸을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이었다.[23]

다만 이동국은 2006년 여름 월드컵 직전에 장기 부상을 입었다가 겨울에 미들즈브러에 합류했다. 이 경우,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전의 전지훈련은 대단히 중요하다. 시즌 전체를 보낼 수 있는 체력, 감독의 전술, 팀 조직력, 팀원들과의 친목, 실력에 대한 신뢰를 이 시기에 쌓아놔야 한다. 이동국의 경우 2007년 여름에 열린 아시안컵에 참가했다. 팀에 적응해야 하는 사정 때문에 여러 차례 고사했으나 당시 수석 코치이던 홍명보가 여러 차례 찾아오는[24] 바람에 시작부터 영 불안하게 출발하는 등 실력 외적인 문제도 크게 작용했다. [25]

또한 이동국이 해외에서 크게 약점을 보였던 것이 멘탈 문제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현지 문화 적응 실패, 소극적인 친목 형성[26][27], 공에 대한 적극성 부족, 주전 경쟁에 대한 부담과 부진에 따른 비난으로 자신감이 움츠러드는 성향도 지적받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피지컬이다. 물론 이동국이 몸이 약한 선수는 아니지만 본인의 부상 후유증과 비시즌 훈련 참가가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해서 피지컬 문제를 오히려 약점으로 악화시켰다. 하지만 이동국의 피지컬이 겉으로 보기에는 체격적으로 결격사항이 없어 보이긴 하나, 유럽에 진출한 많은 한국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더라도 추가적인 개인훈련과 단련이 필요하다. 이동국이 둔해서 안 됐다는 것은 입축에 가까운 소리고, 오히려 피지컬적인 단련이 부족했기 때문에 중앙에서 버티는 힘이 부족해서 공을 많이 못 잡고 튕겨나간 것이다. 유럽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문제이나 추가 단련이 없었거나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28]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스트라이커로서 분데스리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2시즌 동안 리그 30경기 무득점에 그친 점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루과이전의 실수와 더불어 앞으로 선수 이동국의 평가를 지속적으로 깎아먹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동국의 주된 비교대상들은 안정환과 박주영인데 월드컵에서 맹활약하고 세리에 A에서도 일단 출전하면 쏠쏠했던 안정환[29],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실패했지만 프랑스 리그앙에서 맹활약한 박주영은 K리그보다 월등히 높은 무대에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이동국은 전혀 그런게 없다. 하지만 이동국은 해외진출과 월드컵 무대와 관련해서는 본인의 실력이나 노력과 무관한 외부요인이 이상하리만큼 큰 악재로 작용했고 이는 그가 정상적인 컨디션을 되찾는 것에 상당한 방해요소로 작용했다.[30] 물론 이러한 악재가 그의 초라한 유럽무대 활약을 완벽히 가려주진 못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국가대표 선발이나 해외무대 진출을 시도하는 근거는 결국 국내 리그에서의 활약이므로 이동국이 K리그에서 세운 업적과 활약상은 절대로 폄하받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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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커룸이라는 예능프로에서 본인이 이렇게 밝혔으나 예능적으로 꾸며낸 얘기인듯 하다. [2] 비록 골은 없었지만 교체선수로서 도움도 기록했다는데 공식 기록에는 없다. 도움 기록은 세계적으로 잘 정리되거나 확립되지 않았으므로, 도움성 패스 정도는 한 것이 전해지는 것일 수도 있으나 미지수이다. [3] 힐링 캠프 당시 이동국 증언에 따르면 베르더로 이적 당시 에이전트에게 주전 투톱이 있긴 한데 별 건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갔다고 한다. 이적하고 나서 어느 정도 몸상태가 올라오니까 이적 1년차였던 피사로와 2년차였던 아일톤이 갑자기 골을 넣기 시작했고, 쟤네 못한다던데 왜 저러냐고 되물으니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4]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 한 번 돌아가서 병역을 마치고 다시 분데스리가에서 뛰었다. [5] 의문을 가질 사람들이 있겠는데, 안정환이나 설기현도 2002년 6월 이후 다른 처리가 없으면 박주영처럼 아예 말뚝 박을 준비를 하지 않는 이상 돌아가야 되는 상황이었다. 이 분데스 진출을 실패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향된 시각일 뿐이다. [6] 이러한 군 복무 문제는 30년 가까이 전인 차범근 의 이적때 에도 있었던 문제다. 그냥 관련사항 만 따져보면 그때와 같은 경우 이다. [7] 다만 정규리그가 아니라 K리그 컵대회까지 포함한다면 삼성 하우젠컵 2007에서 기록한 7위가 최고 순위. 허나 2020년 김태완 감독이 4위를 기록하며 깨졌다. [8] 오른쪽 사람이 바로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인 가레스 사우스게이트다. 당시 미들즈브러 감독이었다. [9] 보로 측에서 5억원이라는 헐값 이적료를 제시 해서 포항이 호구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포항이 이동국의 해외이적시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조항도 있었고 당시 이동국과 포항의 계약은 2개월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이적료를 요구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포항구단은 얼마 안되는 돈을 받느니 모양새라도 좋게 보내 대외적인 이미지라도 챙기자는 생각으로 K리그 복귀시 포항으로 복귀, 타 팀 이적 시 이적료 50%라는 조항을 달고 이동국을 보내게 되었다. [10] 보통 경기 종료 10분정도 전에 교체출전 한 선수는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않는 이상 5~6점을 주는 경우가 보통이며, 별활약이 없을 경우에는 아예 평점을 매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11] 당시 맨시티에 중국 출신의 쑨지하이가 주전으로 있어서 이동국이 국가대표에서 중국을 상대로 골을 넣은 적이 있던 것을 사우스게이트 감독이 의식해서 내린 결정으로 보인다. 그리고 보로는 2007년 1~2월에 얻은 상승세로 벌어놓은 승점으로 인해 강등권으로부터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고 불과 이틀 뒤인 19일 월요일 경기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FA컵 8강 재경기가 있어서 주전 공격수 마크 비두카를 선발에서 뺐다. 그러나 이동국은 전반만 뛰고 교체 되어 평점 5점을 받았고, 쑨지하이는 풀타임으로 뛰면서 평점 6점을 받으며 맨시티의 2-0 승리에 일조했다. [12] 같은 날 팀 동료인 가이즈카 멘디에타가 은퇴하였다. 이동국과 멘디에타는 팀 동료였으나 멘디에타의 장기부상, 이동국의 부진으로 인해 함께 경기를 뛰지는 못했다. [13] 그러나 이들은 모두 미들즈브러에서 프리미어리그에서 넣은 골이 있는 선수들이다. [14] 에이 받아라 크로스 외엔 보로가 마땅한 수단이 없기도 했지만. [15] 사우스게이트가 감독을 데뷔한 시기에 그의 선수 시절 전 소속팀인 아스톤 빌라가 이미 능력이 검증 된 마틴 오닐을 감동으로 임명 시킨 것이 좋은 예인데 마틴 오닐이 아스톤 빌라의 재정과 빅마켓이 아닌 연고지 규모를 신경 쓰지 않고 과도한 이적료와 주급이 드는 영입을 하면서도 궁극적인 목표인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아닌 단편적으로 발전한 성적만 내다가 결국 재정 문제를 초래하고 그의 임기 후에는 그 재정 문제의 영향으로 아스톤 빌라가 강등이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6] 편견과 달리 미들즈브러는 뻥축구라고 불리는 킥 앤 러쉬 스타일의 롱패스 축구만 하는 구단은 아니다. 오히려 주니뉴 파울리스타, 가이스카 멘디에타, 파비우 호쳄바크처럼 테크니션을 적극적으로 영입 하는 구단이기도 하고, 사우스게이트 시절에도 롱패스 축구로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강등 시즌에는 초반 출발은 좋았는데, 팬들이 결과 뿐만 아니라 내용도 좋았다고 호평 했을 정도. 그러나 애초에 선수진도 부족한 상황에서 상대팀들이 전술에 대해 대응 전술을 내놓자, 젊은 감독과 어린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팀이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강등 되었던 것에 가깝다. 물론 맥클라렌 시절에도 그렇고 롱패스 축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사실 중소규모 클럽 입장에서는 당장 강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단 빨리 골부터 넣으려고 시도하는 롱패스 축구를 할 수밖에 없다. [17] 이 시절에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미들스 버로우 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18] 실제로 마크 비두카가 미들즈브러에서 넣은 골 모음을 보면 이동국이 대놓고 노마크 상태인데 패스해주지 않고 그냥 슛해서 넣는 장면이 있다. # [19] 계약금도 있고 8억 원이라는 연봉이 거액이라면 거액이고 리그 최상위 정도이긴 한데, 어지간한 용병들은 다 8억 이상씩은 받고 있기도 했다. [20] 당시 부진의 주범으로 지적되었던 고참급들과 함께 이적하는데 신태용은 이들의 이적에 반대하면서 전부 팔든가 전부 남기든가 둘 중 하나라고 했는데 쿨하게 전부 팔았다고 한다. [21] 비슷한 시기 죽을 쑤던 이승엽을 믿어주던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과 함께 스포츠계의 양대 보살로 통했다. [22] 자유계약 이적이었지만, 부상 이후 진출이고 팀도 강등권이라 큰 돈을 받을 상황은 아니었다. [23]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807601009 [24] 참고로 이동국은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홍명보의 등번호를 물려받은 선수이고 홍명보는 친정팀 포항 스틸러스의 레전드이기 때문에 이런 관계로 얽힌 선배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25] 아시안컵에서 성과라도 냈으면 모르겠는데, 아시안컵 대표팀 계속된 졸전으로 망했다. [26] 안정환 페루자 시절 이탈리아 선수들과 어울리기 위해 나이트 클럽도 열심히 가고 좋은 차를 사고 옷도 좋은 것을 입었다고 했지만, 이동국은 독일 시절에는 주로 집에서 음악을 들었다고 하며, 결혼 이후인 영국 시절에는 자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박지성 에인트호번 시절과 맨유 시절에 팀원들과 골고루 친분을 쌓았으며 에브라와의 우정은 축구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현재 토트넘에서 활약하는 손흥민은 이동국과 정반대로 본인이 팀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분위기메이커다. [27] 그래도 미들즈브러 입단 당시 주장이었던 조지 보아텡은 립서비스성 발언일 수도 있지만 이동국을 띄워주는 인터뷰도 하고 헐 시티 이적 이후 한국 기자를 만나자 이동국의 안부를 물어보면서 좋은 친구라고 얘기하기도 한 걸 보면 적극적으로 친목 형성을 한 건 아니지만 아예 선수들과 친분을 쌓지 않았거나 한 건 아닌 듯 하다. # # [28] 손흥민의 경우도 EPL 이적 후 초반에 피지컬적인 문제로 고생했다가 현재는 토트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의 고강도 훈련과 개인의 노력으로 많이 개선된 상태다. [29] 다만 안정환 역시 페루자 이후 프랑스 리그앙과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이렇다할 활약은 하지 못했다. [30] 축구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선수들에겐 직장이나 마찬가지다. 현실 축구는 팬들의 상상 이상으로 외적인 요인이 선수의 경기력에 큰 영향을 미치며 이러한 부의 외부 요소를 완전히 통제하거나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에서의 축구팀 운영은 컴퓨터/콘솔 게임처럼 단순 숫자 놀음도 아니고 아이템으로 선수의 컨디션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