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데 보그다노비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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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 1996 |
라데 보그다노비치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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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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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라데 보그다노비치 Раде Богданови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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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등록명 | 라데 | |
출생 |
1970년
5월 21일 ([age(1970-05-21)]세) 유고슬라비아SFR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SR 사라예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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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세르비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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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스트라이커 | |
신체 | 183cm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FK 젤레즈니차르 사라예보 (1988~1992) 포항제철-포항 아톰즈 (1992~1996)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 (199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7) NAC 브레다 (1997~1998) SV 베르더 브레멘 (1998~2002)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 (2002~2003) 알 와흐다 FC (2003~2004) |
국가대표 | 3경기 2골 ( 유고슬라비아 /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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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구 유고슬라비아 SFR)의 전 축구선수. 1988년부터 2004년까지 프로축구 선수로 활동하면서 여러 팀을 거쳤고, 알 와흐다 FC 활동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하였다.1992년부터 1996년까지 포항 스틸러스에서 뛰면서 147경기 55골 35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주로 황선홍, 박창현과 함께 투톱을 이뤘다.
미슬라브 오르시치의 사례 이전 원조 K리그에서 성장한 외국인 선수의 표본이었다.
2. 선수 경력
포항 스틸러스의 No.10 라데 |
2.1. K리그 이전
사라예보 출신으로,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에 갓 승격했던 고향팀 FK 젤레즈니차르에서 1987년 처음 프로선수로 데뷔했다. 당시 17살의 나이로 첫 1군에 진입했을만큼 팀 내에서도 기대하던 유망주였고, 어린나이에도 꾸준히 기회를 부여받으며 보스니아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91-92 시즌까지 5시즌 동안 75경기에 출전해 4골을 잡아냈다. 주전급은 아니었고, 후에 K리그에서 재회하게 되는 시모 크루니치, 후에 벨기에로 귀화해 1998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 대표팀으로 출전까지 하게되는 고르단 비도비치 등과 함께 젤레즈니차르의 미래로 꼽히는 위상이었다.1992년 보스니아 전쟁이 터지고, 사라예보에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해지면서, 라데는 타 행선지를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일단 자신의 지인들이 있던 FK 파르티잔 구단에서 훈련시설을 제공받으면서 몸 만들기에 열중하던 때 라데에게 낯선 곳에서 제안이 들어온다.
2.2. 포항 아톰즈 시절
그 낯선곳은 바로 머나먼 동아시아의 포항 아톰즈 구단이었다. 라데는 1992년 7월 포항의 제의를 수락하고 하반기부터 K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데뷔시즌 리그 12경기 2골, 리그컵 5경기 1골로 무난한 적응기를 거친 라데는 93년 시즌부터 적응을 마치고 리그 25경기 8골, 리그컵 2경기 1골을 기록하며 포항의 주포로 거듭난다.제대로 감을 잡은 라데는 94년부터는 말 그대로 리그를 폭격한다. 이때의 활약이 정말 대단했는데 1994시즌 리그 27경기 18골을 기록하며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처음 선정되었고, 리그컵에서도 6경기 4골을 넣으며 리그컵 득점왕을 수상한다. 이 시기 안양 LG 치타스를 상대로 2번이나 4골을 넣는 괴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95시즌에는 리그 24경기 6골, 리그컵 7경기 2골로 자신의 득점수는 줄었지만 팀 동료 황선홍과의 위력적인 투톱을 완성하며 팀을 챔피언결정전까지 이끌었다. K리그 역사에 회자되고있는 명경기인 일화와의 2차전에서 포항은 황선홍의 2골에도 불구하고 후반에 내리 3골을 먹혀 이대로 우승컵을 놓칠 위기였다. 이 때 라데가 후반 45분 극장골로 승부를 3차전까지 끌고 갔다.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라데는 포항을 넘어선 리그 최고의 스타로써 존재감을 뽐냈다. 1996 시즌에는 도움에도 눈을 뜬 모습으로 리그 30-30 클럽에 가입한다. 이 기록은 6년 뒤 고종수가 깨기 전까지 리그 최소 경기 기록이었다.[2] 결국 리그 최초로 단일 시즌 10-10을 기록한다. 32경기 11골 14도움의 엄청난 성적으로 리그 도움왕을 차지했다.
K리그에서 5시즌 동안 통산 120경기 45골을 넣었고 리그컵 포함 147경기 55골을 기록했으며 황선홍과의 투톱으로 16골을 합작했다. 1994년, 1996년 2차례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고, 1996년 리그 도움왕도 수상했다.
2.3. J리그 시절
1996시즌이 끝나자마자 해외 팀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된 라데는 96년 10월 제프 유나이티드와 계약하며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런데 2달 뒤 네덜란드 리그의 AFC 아약스가 그에게 영입 제안을 보내게 되고 라데는 유럽행을 더 원했기 때문에 이에 서명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먼저 계약을 맺은 제프 유나이티드와의 계약 위반이었고, UEFA의 유권 해석에 의해 아약스와의 입단 계약은 무산되었다. 대신 아약스는 97년 1월에 입단테스트를 제의했지만, 결국 제프 측의 계약 이행 항의로 인해서 무산되었고, 일본에서 반 시즌간 리그 16경기 8골, 리그컵 6경기 8골로 J리그를 폭격하며 클라스 인증과 함께 분풀이를 했다.2.4. 유럽 빅리그 진출
일본에서도 날라다니는 모습은 더더욱 유럽 구단들의 라데에 대한 관심을 높일수밖에 없었고, 97년 여름 같은 유고슬라비아 국적의 라도미르 안티치 감독이 이끄는 라리가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는데 성공하며 K리그를 거쳐서 빅리그로 이적한 최초의 케이스가 되었다. 비록 J리그까지 거친 것이라 해도 대단한 기록이라 할수 있다.유럽으로 이적한 후에도 인터뷰에서 "한국은 날 키워주었다"라고 인터뷰하는 등 호감 이미지를 보여줬다. 게다가 라리가 데뷔전에서 레알 바야돌리드를 상대로 2골을 넣는 대활약으로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다. 하지만 아틀레티코에는 당시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나던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알레띠의 레전드 키코가 버티고 있었고, 자연히 제한적인 기회만을 부여받아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면 곧잘 골을 넣는 등 나쁘지 않은 활약으로 반 시즌간 14경기 6골을 기록했다. 자연히 주전출장에 대한 불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라데는 98년이 되자마자 네덜란드 NAC 브레다로 임대이적한다.
NAC 브레다 임대 기간동안 노정윤과 호흡을 맞추게 된 라데는 바뀐 환경에서도 13경기 6골을 기록하며 가치를 증명한다. 마침 공격진 과포화 상태이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선수를 잡아두기 보단, 이적료를 챙기기로 결정하고, 라데를 이적시장에 내놓았고, 그는 시즌 종료 후 130만 유로의 이적료에 분데스리가 명문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한다.
하지만 베르더 브레멘 또한 아틀레티코와 상황이 비슷했다. 라데는 이적 첫 시즌 8골을 넣으며 괜찮은 출발을 했지만, 이후 분데스리가 역사에 남게되는 투톱인 클라우디오 피사로 - 아일톤 곤칼베스 다 실바에게 밀리며 역시 백업, 교체요원에 머물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도 2년간 리그 7골을 잡아내며 조커 역할을 충실히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2000-01 시즌 중반 한자 로스토크 골키퍼 마르틴 피에켄하겐과의 거친 충돌로 6개월 출장정지를 받는 중징계를 받으며 브레멘에서의 입지는 완전히 잃게된다.
이후 2002년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로 이적해 1시즌을 뛴 라데는 2003년 아랍에미리트 알 와흐다에서 한 시즌을 더 보내고 2004년 은퇴한다.
2.5. 한국과의 인연
K리그 시절부터 한국형 용병이란 표현을 들을 만큼 K리그에 매우 잘 적응하는 외국인 선수 중 한명이었다. 상술된 한국은 날 키워주었다. 발언 등으로 포항 팬들은 물론 K리그 팬 전체적으로 라데에 대한 안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신기하게도 한국을 떠난 뒤, 라데는 가는 곳마다 한국 선수들과의 인연을 가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1998년 네덜란드 NAC 브레다에서 비슷한 시기 같이 입단한 노정윤을 시작으로, 2000년 초 베르더 브레멘에서 뛸 때에는 같은 포항 팀 출신의 이동국이 임대로 팀에 합류하며 동료이자 포지션 경쟁자로 같이 뛰기도 했다. 주전경쟁과는 별개로 둘 다 포항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동국과 라데 |
이후에도 2002년 이적한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에선 레버쿠젠에서 임대를 온 차두리의 분데스리가 데뷔전의 교체 파트너로 아웃되는 경험도 하는 등 유럽 가는 곳마다 같은 팀에 한국선수들이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3. 국가대표 경력
A매치 경력은 3경기 2골로 일천한 편이다. 선수층이 매우 두터운 유고슬라비아 국적이라 국가대표와는 별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7년 라리가 입성 직후 대한민국에서 열린 1997 코리아컵 대회에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로 처음 뽑혀 3경기에 나와 가나전에 2골을 넣는다. 그러나 이후에는 국가대표팀에 불리지 못했다.4. 은퇴 이후
남아공 월드컵 직전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 관전와서 한국 대표팀을 응원했다. #은퇴 후엔 고향인 보스니아로 돌아가 코치를 하다가 2013년에는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포항을 잊지못했는지 건설업체 이름을 포스코 치치로 지었을 정도이다.
이후에는 "포스코 아레나"라는 호텔을 건설해 사업주로 나섰으며 K리그 시절에 받았던 상들을 소중히 여겨 개인적으로 전시중이라고 한다. 지역사회에서도 유명인사로 평안한 은퇴생활을 보내고 있다.
5. 플레이 스타일
타고난 운동능력과 개인 기량으로 1선과 2선을 가리지 않고 휘저으며 기회가 왔을 때 수비를 비집고 들어가 마무리 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공격수다. 골 냄새를 맡는 능력이 탁월하며 슈팅, 패스, 드리블, 연계 등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득점과 도움을 가리지 않고 쌓았던 컴플리트 포워드. 황선홍과의 투톱은 K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톱으로 평가받는다.보통 투톱은 스타일이 다른 두 선수를 세우는데 반해 황선홍과 라데는 체격, 스타일, 기량이 거의 비슷했다.[3] 하지만 둘 다 뚜렷한 약점이 없는 만능 공격수였고 황선홍의 세련된 움직임에 라데의 저돌적인 스타일이 합쳐져 K리그 최고의 투톱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만 다혈질이라 상대의 도발에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었다.
6. 평가
2009년 축구잡지 BEST ELEVEN에서 황금발[4] 회원들이 뽑은 역대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으로 뽑혔다. 참고로 2위는 샤샤, 3위는 신의손, 4위는 피아퐁, 5위는 모따. 왠지 모따의 평가가 박한 것 같지만, 모따는 당시 커리어 진행중이었고 특히 위에 언급한 이들은 단순한 스탯상 우위가 아닌 당대의 K리그 헤게모니가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즉 무리뉴나 펩이 아무리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려도 토탈 풋볼의 아버지 리누스 미헬스나 압박축구의 창시자 아리고 사키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과 같다.한준희, 장지현의 원투펀치 41화 1부 2012 K리그 결산에서는 두 해설위원 모두 "공격 포인트로만 따지면 2012시즌까지 6시즌동안 데얀 다미아노비치[5]이 앞설지 모르지만 수비수[6], 미드필더, 공격까지 모든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당시 K리그에 주었던 임팩트를 생각하면 K리그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 1위는 라데다"라고 평했다. 두 해설위원이 꼽은 최고의 외국인 선수 1위는 라데였고, 2위는 데얀, 3위는 성남에서 공격수로 뛰었던 사샤 드라쿨리치.
즉 선수출신이나 해설가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공격수. 소속 팀에 우승컵을 밥먹듯이 안겨 우승청부사란 별명을 얻은 K리그의 공격수 샤샤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다.
7. 여담
- 웃도리를 뒤집어쓰고 달려가는 골 셀러브레이션 흔히 말하는 마스크맨 세레모니로 유명하다.[7] 2013년 포항 스틸러스 창단 4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으며 포항 스틸러스의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친선경기인 포항 스틸러스 40주년 레전드 매치에서도 골을 기록하면서 추억의 마스크맨 세레머니를 다시 한번 시전했고, 역시나 규정대로 경고를 먹었다.
- 한국에서 전성기를 보내던 시절 조금 말라보이는 얼굴에 대단한 미남으로 인기가 높았었다. 다른 외국인 선수들과 달리 대단히 예의 바르고 멋진 외모까지 가져서 그 둘의 상승효과로 인한 팬들의 버프가 대단했었다.
- 김치를 잘먹었다고 한다. 다른 음식도 많은데 왜 굳이 먹냐는 질문에 "돈을 벌기위해 왔지만 그 나라에 대해 이해를 해야 제대로 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쉬운 식문화 적응부터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남다른 프로 의식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열악한 K리그의 환경[8]에서 오히려 인내심과 인생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라데의 외조카인 블라디미르 요반치치가 2012년 성남의 용병으로 왔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고 먹튀 취급을 받았다. 이걸 두고 친정팀의 옛 라이벌에게 빅엿을 선물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근데 딱히 라데가 추천한 것도 아니고, 요반치치는 아들도 손자도 아니고 조카다. 결국 선수를 잘못 보고 뽑은 성남 스태프의 자업자득.
- 전남 드래곤즈와 울산 현대를 거쳤고 현재 디나모 자그레브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미슬라프 오르시치의 활약에 의해 다시금 라데의 이름이 소환되고 있다. 라데가 걸어온 커리어와 오르시치의 커리어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인데, 오르시치 또한 유망주 시절 경력의 발판을 위해 K리그를 찾았고, 여기서 자신의 커리어를 반전시키며 크로아티아 절대강팀에 입단해 크로아티아 대표팀과 유럽 대항전까지 출전하는 거물급 선수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르시치의 EPL 이적설이 대두되면서 20년전 K리그 선배 라데처럼 빅리그까지 진출할 가능성이 생기자 오르시치에게 제 2의 라데라는 별명까지 붙여주기 시작했다.[9]
- 장지현의 증언에 의하면, 라데가 라리가로 이적하고나서 KBS가 라리가 중계를 해주게 되었는데, 라데의 소속팀인 AT 마드리드는 당시에 강팀이 아니어서 중계를 잘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어렵게 AT 마드리드 중계가 잡혀서 해당 경기에 교체로 들어왔는데 중계진들이 라데의 저지에 이름이 보그다노비치로 적혀있자 라데인 줄 모르고 "보그다노비치 선수가 들어옵니다. 백업선수네요."라고 담담하게 표현하다가 카메라에 얼굴이 계속 잡히니 중계진들이 그제서야 "라데 선수네요??"라고 알아차렸다고 한다.
- FK 젤레즈니차르 사라예보에서 데뷔하기 전에 라데보다 먼저 포항에 입단했던 드라간 즈크르바 뒤에서 볼보이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1]
이 당시 이적해온 한국 선수가
노정윤이다.
[2]
현재는 몰리나, 세징야, 에닝요, 고종수, 이천수에 이은 6위.
[3]
그래서 황선홍이 유럽에서 부상으로 리턴하지 않았다면 라데 정도의 활약을 했을거라고 평가받는다.
[4]
한국프로축구 각 시즌 득점왕들의 모임.
[5]
前
FC 서울
[6]
리베로
[7]
현행
FIFA 규정상 경고감이라서 다시 보기는 힘든 골 셀러브레이션이 되었다.
[8]
유스 시스템, 클럽하우스를 최초로 도입한 포항 스틸러스지만 이것도 1996년 이후의 이야기. 본인의 말로는 당시 선수들 유니폼을 본인이 집에 가져가 직접 빨아야 했다고 한다. 흠좀무
[9]
물론 라데와 오르시치는 포지션이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두 선수의 커리어의 유사함으로 이런 별명을 붙여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