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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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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파일:노정윤318.jpg
이름 노정윤
盧廷潤 | Noh Jung-Yun
<colbgcolor=#eeeeee,#191919> 출생 1971년 3월 28일 ([age(1971-03-28)]세)
인천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0cm, 74kg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주발 오른발
학력 부흥초등학교 (졸업)
부평동중학교 (졸업)
부평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 경영학 89 / 학사)
프로 입단 1993년 산프레체 히로시마
소속 구단 산프레체 히로시마 (1993~1998)
NAC 브레다 (1998~1999)
세레소 오사카 (1999~2001)
아비스파 후쿠오카 (2001~2002)
부산 아이파크 (2003~2005)
울산 현대 (2005~2006)
국가대표 45경기 5골 ( 대한민국 / 1990~2000)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시절2.3.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이후5.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인천 출신으로 부평동중학교, 부평고등학교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포지션은 미드필더. 별명은 마테우스에서 따온 노테우스.

빠른 드리블 돌파와 정교한 킥을 가진 재능이라고 평가 받았고, 축구명문 부평고에서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이를 바탕으로 청소년 대표팀에 차출되었다.

고려대에선 서정원과 호흡을 맞추었다.

2.2. 프로 시절

이런 유망주인 노정윤을 놓치고 싶은 프로팀은 없었다. 졸업이 다가옴에 따라 어디에서 지목할 지 귀추가 주목되었지만, 노정윤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 J리그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한 것. 산프레체 히로시마는 이전에 마쓰다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JFL(일본 실업축구 리그)에서 J리그로의 출범을 꾀하면서 외국 선수 수집에 열을 올렸는데, 이때 레이더망에 걸린게 노정윤[1]이었다.

드래프트를 거부한 노정윤은 드래프트 거부 문제와 함께 왜 하필 일본팀으로 갔냐는 비난에 직면했다. 이 문제는 완산 푸마의 문제로 넘어가는데, 같은 해 함께 드래프트를 거부한 정재권은 완산 푸마가 가진 1차 지명권 때문에 지명이 확실시 되어서 협상에 들어갔으나, 해결이 되지 않자, 드래프트를 거부했으며, 노정윤은 차순위 지명이 자신이므로, 같은 이유로 거부했다고 한다.[2]

이런 불안한 드래프트를 받기보단 외국무대에 대한 도전을 하기로한 노정윤은 일본으로 진출해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활약한다. 2번째 시즌에도 소포모어 징크스따위는 씹어먹고 10골을 기록하며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준우승에 기여했으며, 1995년, 1996년 2연속 천황배 준우승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이때의 활약으로 1994년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된다.

1997년에 12경기 출전에 그치면서 퇴단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는데, 1998년 1월 네덜란드 NAC 브레다 이적하게 되었다.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에, 연봉은 70만 마르크(약 6억 8천만원)이었다. 허정무에 이은 2번째 에레디비시에 한국인 선수였다. 데뷔전에서부터 골을 넣으며 활약을 기대하게 하는데, 여담으로 이 당시 같은 팀에 있던 선수가 라데 보그다노비치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뛰고 온 후 부상으로 인해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자, 계약을 해지하고 새로운 팀을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그 팀은 황선홍이 뛰고 있던 세레소 오사카였다. 이후엔 윤정환 김도근과도 한솥밥을 먹게 된다. 2000년 올스타, 2001년 후기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맹활약 했지만, 리그 성적이 좋지 않아 감독이 외국인 선수 교체를 요구하면서 김도근/노정윤과의 재계약은 하지 않게 되면서 새 팀을 알아보게 되었다.

당시 노정윤과 접촉한 팀은 울산 현대였다. 계약조건은 1년 임대에 이적료와 연봉 포함, 15만달러로 구체적인 사항까지 언급될 정도로 이적을 앞두고 있었으나, 9년전 드래프트 거부의 파동으로 인한 제약이 걸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울산 현대 울산 현대미포조선 입단하는 대체 방안을 내놓았지만, 노정윤 측에서 거절했고 결국 아비스파 후쿠오카 이적했다.

하지만 아비스파 후쿠오카에서의 생활이 순탄치는 않았다. 잔여 시즌을 뛰었지만, 약체였던 아비스파는 결국 J2리그로 강등되고 말았고, 노정윤은 2002년에도 계속 아비스파의 선수로 활약했지만 대표팀 유니폼 훼손 사건 등 서포터즈와의 충돌로 인해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났다.

마침 노정윤을 묶었던 규정도 폐지되면서 다시 K리그 진출을 타진하던 노정윤은 이안 포터필드가 지휘봉을 잡은 부산 아이파크[3]로 이적하게 된다. 여기서 안양 LG 치타스와의 경기에서 23초 킥오프 슛을 넣으며 리그 최단기록을 갱신하기도 하고, 2004년에는 30경기 4득점 6도움을 올려 부산의 첫 FA컵 우승에도 이바지한다.

그리고 2005년, 김정남 감독이 지휘하는 울산 현대로 이적하게 된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풀 타임 출전은 무리고, 후반 교체로만 35경기에 출전하면서 이천수 최성국 등 크랙형 선수들의 교체 선수로 게임을 조율해 나가며 5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그리고 울산은 리그 우승을 하게 되며, 노정윤은 여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이후 2006년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4월 16일 리그 경기에서 K리그 통산 100경기를 달성한 뒤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면서 은퇴를 준비했다.

2.3. 국가대표 경력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A매치 통산 45경기 5골 기록.

1987년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축구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는데, 이 당시 감독이 박종환이었으며 팀에는 최순호, 황보관, 김주성, 변병주 등의 베테랑 선수들에 팀메이트 서정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별리그에서 파키스탄을 상대로 출전해 골을 성공시켰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도 국가대표로 차출되었다. 이 당시 이운재, 이임생, 김도근, 신태용, 조진호, 서정원, 곽경근, 강철 등이 올림픽 대표팀에 있었다. 모로코 파라과이, 스웨덴전에 각각 출전했으며, 대표팀은 3무를 기록하며 짐을 쌌다.

김호가 감독이었던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는 예선과 본선 모두에 중용되었다. 특히 대표팀이 전체적으로 부진했던 예선에서는 사실상 혼자서 팀을 하드캐리했으며, 본선에서도 2경기에 선발 출장했다.[4]

아나톨리 비쇼베츠가 감독이었던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축구 국가대표에도 발탁되었으나 이 때는 1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파일:98frecnhworldcup.jpg
이후 오랫동안 대표팀에 부름을 받지 못하다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차범근이 부임하면서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준비하는 슬로바키아와의 친선경기에 다시 발탁되었다. 이후 1999년 코리아컵 국제 축구대회, 2000년 LG컵 4개국 친선대회, 2000년 CONCACAF 골드컵에도 대표팀 선수로 활약하고 2000년 AFC 아시안컵에서 3·4위 결정전인 중국전을 끝으로 국가대표를 은퇴한다.

사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호에서도 충분히 발탁될 수 있었지만, 본인이 욕심을 버렸다고 한다. 창창한 후배들을 앞을 막고 싶지 않고, 박수 칠 때 떠나고 싶어서라고 얘기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로타어 마테우스의 별명을 따서 노테우스라고 불렀을 정도로 기술적인 축구를 했다. 발도 빠른 편에, 몸싸움이 약한 것도 아니라서 밀리지 않고 공을 소유하면서 적지 않은 활동량으로 게임을 운영해나갔다. 앞선 언급과는 달리 윤정환과는 플레이 스타일에서 차이가 있는 편. 다만 이런 플레이 스타일이 체력 소모가 심한데다가 애당초 기본체력도 약하다며 비효율적이라는 평을 내린 전문가들도 있었다.[5] 그래서 대표팀 경기에서도 전반 혹은 후반 중반까지 뛴 후 교체되는 경우가 꽤 많았다.

4. 은퇴 이후

은퇴 준비와 동시에 지도자 과정을 준비했다. 3급 수료과정을 밟았다. 은퇴 후에 울산 현대로부터 코치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2008년 대한축구협회 창립 75년 한일 OB 올스타전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지도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게임 사업가로 나타났다. 그가 참여한 마에스티아 온라인은 CBT나 게임성 평가에서 괜찮은 평을 받았지만, 오토가 많고 캐릭터간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조용히 서버를 닫았다.

5. 기타

부산 아이파크 시절에 황선홍과 비슷한 시기에 TV 해설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흔한 일이 됐지만, 당시 J리그로 개편되는 일본 프로 축구 리그에 처음 진출한 것이 노정윤이다. 현재는 J리그에서 선수계약 등급 적용으로 외국인도 신인은 고연봉을 받기 어렵지만 노정윤이 진입할 시기에는 규제가 없었다.

아내인 유영옥 씨가 골프 선수라고 한다. 그래서 미국 근황에서 취미로 골프를 친다고. SGTF(미국골프지도자협회)에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가지고 미국에서 프로 자격증을 땄다, 티칭 프로로 전향한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일본과 미국에 오래 체류했고, 노력파여서 일어와 영어에 모두 능통하다. 2002 한일 월드컵 때 후지 테레비의 객원 해설을 맡았으며, 조병국의 후반 추가 시간 자책골로 0-1로 석패한 2003년 4월 16일 한일전에서도 TBS 테레비 객원 해설을 맡았다.

윤종신과 외모가 닮았으며, 예전부터 이걸로 유명했다.

[1] 다만, 여기엔 약간의 비화가 있는데, 김병수가 원래는 91년부터 가계약이 되어있었으나 김병수의 재기가능성이 의심스럽자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새로 찾은 선수가 바로 노정윤이다. [2] 정작 이 해의 1순위 지명은 독일에서 귀국한 황선홍에게 돌아갔으며, 그것도 포항 스틸러스와의 트레이드가 사전 합의된 것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2차로 완산 푸마에 지명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3]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0303793 [4] 다만 최종예선 한일전 때는 당시 경고 누적으로 경기를 뛸 수 없었던 일본 킬러로 정평이 난 황선홍을 대신해서 공격수로 나섰지만, 전반전에 일본 골키퍼와 충돌해 부상을 입고 교체 아웃되었다. [5] 대표팀 경기때 해설자들이 노정윤의 약한 체력을 디스하면서 늘 대표팀 체력 괴물들인 고정운 & 신홍기와 비교를 하여 '노정윤 = 저질체력' 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