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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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1995~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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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2003~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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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배 2003~2006 |
FC 충주 총감독 | ||||
Football Club Chungj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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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e8b36b> 이름 |
김병수 金炳秀 | Kim Byungs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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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0년 11월 24일 ([age(1970-11-24)]세) | |||
강원도 홍천군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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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 선수 (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경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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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000000><colcolor=#e8b36b> 선수 |
제일은행 축구단 (1992) 코스모 석유 욧카이치 FC (1993~1997) 오이타 트리니타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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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고려대학교 축구부 (1998 / 코치) 포항 스틸러스 U-18 (1998~2002 / 코치) 포항 스틸러스 U-18 (2000~2002) 포항 스틸러스 2군 (2003~2004 / 코치) 포항 스틸러스 (2005~2006 / 코치) 영남대학교 축구부 (2008~2016) 서울 이랜드 FC (2017) 강원 FC (2018~2021)[1]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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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포항 스틸러스 (2007 / 기술부장) 강원 FC (2018 / 전력 강화부장) FC 충주 (2024~ / 총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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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1경기 ( 대한민국 U-23 / 199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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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e8b36b> 학력 |
홍천초등학교 (전학) 서울미동초등학교 (졸업) 경신중학교 (졸업) 경신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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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 불명[3]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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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별명은 병수볼[4]. 2018년부터 2021년까지 강원 FC 감독을 맡았으나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됐다.1990년대 "대한민국 축구를 이끌어 나갈 천재"로 불렸으나 경신고 시절의 부상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다. 영남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서 인상적인 지도력을 보여준 후 2017년에 서울 이랜드 FC 감독을 맡으면서 프로 구단 감독으로 정식 데뷔했다.
2022년에는 잠시 활동하기도 했으나 사실상 휴식에 가까웠고 2023년 5월 즈음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을 맡아서 다시 프로에 복귀했다.[5] 그러나 약 5개월 만인 동년 9월 25일에 경질됐다.
2. 선수 경력
강원 홍천초등학교 재학 시절 축구화를 처음 신은 김병수는 축구를 잘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서울 미동초등학교로 스카우트됐다. 경신중학교를 거쳐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 알고 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지고 있던 경기도 그가 들어가면 어영부영하다가 스코어가 뒤집히기 일쑤였다.그래서 김병수는 '자신의 리듬에 게임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선수'라는 이야기처럼 게임을 조율하는 능력에 관해서 당대 최고였고, 그보다 좋은 선수가 없었다. 이 무렵 포항제철 감독이었던 한홍기가 그의 축구 실력을 눈여겨 보면서 포항제철 선수들과 함께 연습시키기도 하였다.
관련된 일화가 하나 더 있는데, 한홍기는 어린 천재를 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브라질 유학이 이미 그 시절에 추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교부(현 교육부)의 방침이 걸림돌이었다. 브라질의 축구학교에서 축구 공부를 한 기간은 국내 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학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이후 축구 명문인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1987년에는 제6회 KBS배 추계 중고축구대회에서 16강전 결승골, 준결승전 동점골 및 결승골, 결승에서는 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대회 첫 우승을 이끌었고, 본인은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포항 스틸러스 선수들과 훈련했으며, 그들을 상대로 개인기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최순호를 비롯하여 박창선, 조태천 등 역대급 선수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다.
다만, 그의 불운이 시작된다. 경신고 2학년 때 처음 부상을 당했다. 체계적인 선수 관리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 리 없었다. 찜질 몇 번에 주사 한 두대 맞고 중요(?)한 경기랍시고 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발 다쳤으면 왼발로만 차라.'는 소리가 그라운드로 떠밀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 뛰는 날보다는 서 있는 날이, 서 있는 날보다는 앉아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1987년에는 FIFA U-16 세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청소년 대표로 차출됐다. 이 당시 함께한 선수들이 신태용, 서정원, 노정윤 등이다.
1988년 고려대학교에 진학했으며 카타르에서 열린 제26회 U-19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고질적인 발목 부상에 시달리게 된다. 고등학생 때부터 겪었던 발목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채 아픔을 무릅쓰고 운동에 매진했던 결과, 양쪽 발목 인대가 1인치 가량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대학 재학 중 그가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단 4경기. 그 가운데 3번이 연세대와의 정기전이었다.[6] 어찌 보면 그는 방치되어 있었다. 김병수의 아버지라도 생존해 계셨다면 축구 선수의 두 다리가 그 지경이 되도록 지켜보지는 않았겠지만,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누나들에겐 그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수술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한 달 이상 운동해 본 적이 없었고, 그냥 쉬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러다,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사나흘 연습하고 그라운드를 뛰었다. 1991년에는 왼쪽 발목에다 어깨까지 다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다.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뒤뚱거리며 뛰었지만 어시스트도 하고 결승골도 넣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그의 플레이를 두고 '대단한 투혼'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김병수 본인은 후에 생각하니 그 무책임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고 한다.
1988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당시 한국일보 전상돈 기자(현 스포츠투데이 부국장)는 '대한민국 축구에 김병수 시대가 오고 있다'며 '대한민국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미드필더의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그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통령배 대회를 앞둔 1989년 6월. 그런데, 당시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그의 경기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7] '하도 옆에서 김병수 김병수 해가지고 하는 수 없이 뽑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플레이를 본 이회택 감독은 그 해 8월 소련과 미국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너는 무조건 이탈리아에 데려갈테니 이 길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 측에서는 차일피일 미룰 뿐,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고연전에 출전했다. 차후 이 때를 회상하며 인터뷰하기를 "운동하면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딱 한번만이라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게임을 해보는 거였어요."라고.
당시 그의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1인치, 왼쪽 발목 인대는 0.9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1990년 1월에 가서야 경찰병원에서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 적 포철 축구단 숙소에서 만났던 최순호가 수술비 일체를 부담해 주었다. 6월엔 학교 측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스쿠바 대학에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일어났다.
그의 복귀 경기는 다시 고연전. 1년 만에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이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2로 고대가 승리한다. 다음날 스포츠 신문엔 '고대 황금발 김병수 - 비극은 끝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이 그리 쉽게 고쳐질 리 없었다. 부상이 다시 재발한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1991년 1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3번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19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 아시아 예선에 선발되었는데, 이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김삼락 감독이 당시 올림픽대표팀 총감독을 맡고 있던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의[8] 훈련 방식 등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사사건건 부딪혔는데, 당시 고려대학교 소속이던 김병수를 대표팀에 선발했다. 당연히 크라머는 노발대발했고, 이후 김병수의 훈련을 지켜보다가 빼어난 활약을 보고 '축구 인생 50년 만에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 한일전에서 경기 종료를 1분 남기고, 극적인 발리 슛 결승골을 성공시켜 대한민국의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이후 발목 부상이 재발하면서, 끝내 올림픽 본선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하였다.
1994 FIFA 월드컵 미국 예비 명단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고 한다. 대학 졸업 이후 부상으로 축구를 떠나 방황하던 무렵인데, 예비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난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김호 당시 대표팀 감독을 찾아가 자신의 발목 상태를 설명한 뒤 스스로 대표팀에서 나왔다고 한다.
당시 김호 감독은 사라진 김병수의 근황을 찾지 못했지만 과거에 확인한 그의 천재성을 믿고 아무 연락없이 대표팀 명단에 그를 올렸지만, 김병수의 발목 상태는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환경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성인이 되었을 때, 양 쪽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 상태였다.
본격적인 J리그 출범을 앞두고 일본의 JFL(일본 실업축구 리그) 소속 구단들은 대한민국의 유망 선수 영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쓰다도 그런 구단 가운데 하나였다. 물밑 작업이 한창이던 1991년 그들은 김병수를 점찍고 가계약을 맺었다. 올림픽 최종 예선이 끝나고 정식 계약을 체결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마쓰다는 김병수에게 1992년 2월 스카우트할 의사가 없음을 공식 통보한다. 재기 가능성이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쓰다는 1993년 산프레체 히로시마라는 이름으로 J리그에 참가했고, 고려대 1년 후배인 노정윤이 그를 대신해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제 그의 이름은 그렇게 조금씩 잊혀져 갔다. 비디오 대여점을 하는 큰 누나 집에서 가게를 봐주며 아무런 낙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서 연락이 왔다. JFL의 코스모 석유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왔다. 적지 않은 연봉에다, 부상 부위의 재수술과 재활 훈련까지 보장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1992년 초여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1992년 7월, 김병수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이번엔 발목이 아니라 무릎이었다. 수술 이후 약해진 발목 탓에, 양쪽 무릎까지 부담이 갔던 것이다. 그리고 1993년부터 코스모 석유에서 뛰기 시작했다.
J리그도 아니고 일본 실업리그 소속 팀, 그것도 만년 하위권으로 처지는 팀이었지만 그는 특급 대우를 받았다. 당시 그의 연봉은 국내 선수 연봉 최고액에 못지않은 금액이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기록도 찾기 힘들지만, 김병수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4년 간 그가 출장한 경기는 대략 100여 게임.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70골 이상 넣은 것 같다고 했다. 당시에도 부상 때문에 팀 훈련은 거의 못하고, 하루 2시간 정도의 훈련 후 집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시합에 출장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 J리그에 데뷔한 후배 노정윤이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대표팀을 오가며 주목받았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일본 생활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그나마 있다면 일본 축구 주간지 '사커 다이제스트'가 2회에 걸쳐 연재한 '김병수 특집'이 국내 모잡지사에 게재된 정도. 그 기사의 표제는 '새벽을 기다리며 인내한다'였다.
코스모 석유 당시 김병수의 포지션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 프리롤인 듯?[9]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천황배 경기에 출전한 적이 있는데, 김병수는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렸다. 한 골 넣고 전원 수비를 했다고 한다. 코스모에서 뛰면서 구단주를 가장 기쁘게한 날이었다.
여담으로 이 1993년 여름 그가 국내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뉴스를 탄 적이 있다. 물론 불발로 그쳤지만. 이미 발목에 이어서 양쪽 무릎에 칼을 댄 상태였다. 다행히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김병수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는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기 싫었을 것이다.
1997년 초 코스모가 해체되고 김병수가 귀국한다는 소식이 돌았으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지인의 주선으로 오이타 트리니타에 입단했고, 이후 선수 생활을 은퇴하기에 이른다. '비운의 축구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을 만큼 안타까운 은퇴였다.
당시 오이타 트리니타에 대한민국 선수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언급한다.
2.1. 선수 시절 경력에 대한 여러 의문
- 1981년 포철 감독이었던 한홍기가 김병수를 눈여겨보고 포철 선수들과 함께 훈련시켰다.
- 1981년 당시 유소년 시스템 같은게 갖춰졌을 리 없고,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상황에 놓여 운동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았다. 이에 업계 유명인들이 유망주를 눈여겨보고 집이나 숙소로 데려와 먹이고 살리며 지원해주는 경우는 비단 축구뿐만 아니라 스포츠계 전반적으로 흔하게 있었다.
- 문교부의 방침에 가로막혀 브라질 축구 유학이 무산됐다.
- 재한인 협회나 기업 등의 후원으로 서독으로 축구 유학을 갔다오는 케이스는 심심찮게 있었지만 정작 이에 대해 문교부의 태클이 있었다는 얘기는 없다. 그냥 교류가 없는 브라질로 축구 유학을 보내는 것이 너무 부담이 큰지라 포기했을 공산이 크다.
- 김병수를 천재로 회자되게 만든 결정적 계기인, 데트마어 크라머의 '축구 인생 50년 만에 만난 천재' 발언.
- JFL의 코스모 석유 시절 1993년 천황배에서 드라간 스토이코비치가 뛰던 나고야 그램퍼스에게 결승골을 넣어 1:0으로 승리했다.
요약하자면 김병수의 선수 시절에 대한 기록을 명백하게 찾기 힘들다는 점을 이용해[10], 김병수의 선수 커리어를 과장시킨 글이 떠돌아다니고 결국 본인도 원하지 않게 천재라는 타이틀로 박제돼버린 것. 김병수 본인이 천재라는 별명을 꺼릴만 하다.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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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김병수(축구인)/지도자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 |
4. 경영인 경력
4.1. FC 충주 총감독
2024 시즌을 앞두고 K4리그 소속 FC 충주를 인수했다. 직책은 '총감독'이고, 경영과 선수단 관리까지 사실상 구단 운영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팀을 운영하기 위해 상당한 재원 마련이 필요한 상황에서 스폰서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것은 물론 대출을 받아 사비까지 투입했다고 한다.[11] 이렇게까지 하며 충주 구단을 인수한 것에 대해 예전부터 팀을 하나 인수해서 운영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이제는 조금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나이가 됐다고 싶어서였다고 밝히면서 한 번의 실패를 맛본 '축구 미생'들에게 재도전의 장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팀을 이끌 감독으로는 서울 중랑 축구단에서 김범수를 프로로 진출시킨 최정민 감독을 새로 선임했다.
5. 논란 및 사건·사고
5.1. 박효진 코치 폭행
2021년 7월 5일 훈련을 마친 후 강릉의 모 음식점에서 코칭스태프 전원이 저녁 식사 겸 술자리를 가졌다. 이 식사자리에서 박효진 코치와 경기 준비 및 전술 관련 이야기를 하던 중 의견 충돌이 발생했고, 고성이 벌어진 끝에 김병수 감독이 박효진 코치에게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했다고 한다.이후 옆 테이블에서 이 모습을 촬영한 이들과도 언성이 높아져 결국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병수 감독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박효진 수석코치가 받아들이며 일단락됐다.
그러나 강원 구단은 이 사건을 쉬이 넘기지 않았다. 프로구단의 일원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막지 못한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차례 비상 운영위원회를 통해 김병수 감독에게 제재금 4,000만 원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기사
인터넷 소문에 따르면 둘 간의 충돌이 소문으로 퍼지며 축구계에서 문의가 많았고 기자들이 떡밥을 흘리기도 하면서 강원 구단의 결정이 나왔다고 한다. 즉,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라 알게 모르게 이미지 실추를 당하느니, 차라리 구단의 입장이나 징계절차 등을 숨김없이 공개하기로 했다는 것.
1주 뒤인 7월 13일에 스포츠니어스의 라이브 방송인 '조축개축'에서 좀 더 자세한 상황이 알려졌다. 강원의 4000만 원 징계는 사실상 외부에서 구단 명예를 실추시킨 데에 대한 과징금에 가까울 정도로 흔히 생각하는 폭행의 강도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12]
5.2. 수원 감독 재임 도중 석연치 않은 경질
자세한 내용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 김병수 감독 경질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6. 기타
- 포철공고 선수들에게 경기가 끝나면 트랙 한켠에 모여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게 했다. 하지만 러닝은 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선수들이 시합 후 또 뛰는 것을 싫어해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면 효과가 없기 때문에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는데 고려대 코치를 할 당시 결승전에 올랐다고 대학 관계자들이 대거 경기장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우승을 했으니 높은 사람들 앞에 도열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김병수가 누구냐고 난리가 났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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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주가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면서 이에 관한 인터뷰가 많다. 그중에 2013년 인터뷰가 어마어마하다.
김신욱과 MVP 경쟁을 하던 리그 씹어먹던 폼이었는데도“아직까지 중원에서의 위치 선정 부분에서 조금 취약점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활동량이 좋고' 기술이 좋은 선수이기에 상대 선수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플레이를 선보인다. 템포 또한 빠른 선수다.”라며 여전히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어릴적 포항 한홍기 감독이 1군에 합류시켜 훈련시킨 인연과 이후 포항에서 코치를 하고 영남대에서 포항 선수를 많이 길러낸 것으로 포항팬들 중 김병수를 반레전드 취급하는 사람이 꽤 있다. 거기에는 포항에서 지원해 주려고 했던 브라질 유학을 다녀올수 있었다면 몸이 성하게 축구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도 포함된 듯하다.
- 선수로서 유럽 진출을 해보는 게 꿈이긴 했으나 그 꿈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45세가 되기 전에 세계적인 지도자로 인정받아 세계로 나가보는 게 꿈이라고 한다.
- P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14]했다. 이 자격증 강습회에서 세계적인 명장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던 영국 출신의 리처드 베이트 FIFA강사가 김병수 감독의 전술적 아이디어에 대해 엄청나게 극찬을 했다고 한다.
- 당신은 지금 불행하냐는 질문에 선수로서의 김병수는 불행했으나 인생에서는 불행하지 않다고 답했다. 축구가 여전히 꿈이기 때문이라고. 마음에 흔들릴 때면 '나는 한국 축구를 위해 큰 일을 해야 한다.'라는 사명감을 자신에게 부여해서 자신을 다잡는다고 한다.
- 정작 본인은 '천재'라는 본인의 별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 팬 서비스가 좋은 감독이다. 팬들이 싸인이나 사진 요청을 하면 환한 미소로 친절히 응해준다.
- 강원 FC 감독 시기에 유독 전북 현대 모터스를 상대로 강한 면모를 보였다. 상대 전적이 7전 3승 1무 3패로 3번의 패배도 모두 1골차 패배였다. 당시 양 구단의 전력 차를 생각하면 굉장히 선전한 것이었다.
- 흡연자로 보인다. #
6.1. 개인기로 교통체증을 만들다
상술했던 일본 프로축구팀과의 계약이 불발되고 김병수가 큰누나 집에서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끼는 못 속이는 것인지 조그만한 고무공을 들고 가게 앞으로 나가 리프팅을 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애들 가지고 노는 공으로 '묘기'를 부리자 하나 둘 구경꾼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네 꼬마들이 주된 관객(?)이었다. 공을 빼앗아 보겠다고 달려드는 꼬마들 틈에서 신들린 사람처럼 요리조리 피하며 리프팅을 이어갔다. 그러자 이제는 지나가던 어른들까지 관중석(?)에 합세했다. 심지어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멈춰서서 이 희한한 남자의 재주를 지켜봤다고 한다. 때 아닌 교통 체증이 일어났다.6.2. 현대 축구의 미래에 대한 회고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후) 김병수의 노트 중에서 현대 축구의 미래에 대한 김병수 감독 본인의 회고가 적혀 있다.현대 축구는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최전방과 최후방의 거리를 30m 이내로 축소하여 시간적, 공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팀이 상대편의 볼을 가장 빠르게 빼앗아서 가장 빠르게 공격하겠다는 공격 지향적인 축구를 선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확성에 대한 개념에 속도라는 개념이 추가되어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술적인 면보다는 개인 기술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패스의 질, 킥의 질, 원터치 볼 컨트롤의 질, 움직임의 질 등이 그것이다.
축구의 미래는 개인 기술, 개인 전술, 그룹 전술이 기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성되면 11명의 특성을 살려 시스템을 완성시키고, 시합 도중 시스템에 급한 변화를 주어도 무리없이 소화해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활약한 세계의 톱 클래스 선수들이 화려하고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라기보다는 기본이 완벽한 선수들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격은 공격만, 수비는 수비만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현대 축구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메인이 되었다.
현대 축구의 공격 시발점은 어느 팀이든 최후방의 수비 라인이 되고 있다. 이는 예전처럼 중반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갈수록 급박한 긴장감에 의해 현대 축구는 변모할 것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빨라질 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마라톤 기록이 깨어지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축구가 전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개인기술의 향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6.3. 2군 리그에 대한 생각
2014년 스포탈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2군 리그가 중요함을 언급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를 가면 경기를 뛰며 동기부여를 하고 실력이 향상 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프로로 가는 경우에는 마땅히 뛸 기회를 잡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힘들지만 2군 리그가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제대로 된 선수 육성을 하려면 2군 리그가 필수적이다. 2군 리그가 정착되면 구단에서 선수들을 스스로 수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팀에 이적시키며 자금을 만들수도 있다라며 2군 리그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이후 R리그가 2016년 부활하면서 2군 리그의 재실현은 이뤄졌고 그로부터 5년 후인 2021년에는 프로 구단의 B팀이 4부 리그이자 세미프로 레벨인 K4리그에 참가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더 고도화됐다. 김병수 감독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2군 선수 육성에 대한 열망이 반영됐는지, 강원 FC는 강원 FC B를 창설하며 K리그 구단 중 가장 먼저 B팀을 K4리그에 참가시켰다.
7. 관련 문서
[1]
2021 시즌 도중 경질
[2]
2023 시즌 도중 부임, 2023 시즌 도중 경질. 약 5개월 동안 지휘했다.
[3]
발목
인대가 거의 나간 상태라
전시근로역일 가능성이 높다.
[4]
말 그대로 김병수의 이름인 병수 뒤에 공을 뜻하는 ball을 붙힌 것으로 김병수의 축구 전술을 의미하는 말인데 정작 김병수 본인은 이 별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5]
현재 평택에서 아카데미를 하고 있는데
수원과 평택이 멀지 않음을 감안하면 이 점도 영향이 있어 보인다.
[6]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를 '정기전용 선수였다'고 말했다.
[7]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놀다가 고연전에나 나오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비디오는 굉장히 비쌌다.
[8]
일본 현대 축구의 아버지라 불리며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독일 국적의 감독.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일본 축구 올림픽대표팀을 맡아 축구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 공로로 3등급 국가 훈장을 받았다. 이후 서독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감독,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을 역임한 이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서정원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꼽은 사람이다.
[9]
인터뷰에서 이렇게 언급한다.,"포지션이 없었죠. 그냥 공격이었어요."
[10]
적어도 K리그에서 뛴 적이 있다면 좀 부실하긴 해도 홈페이지의 선수 기록을 검색해 볼 수는 있다.
[11]
특히
대한축구협회가 K4리그 구단들의 연회비를 3천만 원으로 올려 구단 운영은 더 빠듯한 실정이다.
[12]
이 사건의 디테일이 어떠했는지는 워낙 말이 많아서 주먹으로 쳤다, 멱살을 잡았다, 밀었다, 얼굴을 툭툭 쳤다 등 이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정확한 진실이 무엇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13]
이것을 갑질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얘기다. 어느 축구 대회를 우승해도 도열하고 사진 찍고 인사를 한다. 이건 김병수가 이상한 것이다. 높은 사람들은 그 대회를 개최하는 데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지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애초에 우승할 대회도 없다.
[14]
축구 지도자 자격증 중 가장 높은 등급이고 프로, 국가대표 감독을 맡기 위해선 필수요건이다.
[15]
나머지는
이강인,
고종수,
이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