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의 선수 생활에 대한 내용은 차범근/선수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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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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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80 · 1985-86 |
차범근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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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가 레전드 네트워크 앰버서더 | ||||
Bundesliga Legends Network Ambassado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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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3010d,#191919><colcolor=#ffffff,#e5e5e5> 이름 |
차범근 車範根|Cha Bum-k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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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3년 5월 22일 ([age(1953-05-22)]세) | |||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송산리 (現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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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 |
서울특별시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예회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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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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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79cm[2], 78kg[3], B형[4] | |||
직업 |
축구 선수 (
공격수[5]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해설가 축구 행정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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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발 | 오른발 (양발) | |||
소속 | <colbgcolor=#d3010d,#191919><colcolor=#ffffff,#e5e5e5> 선수 |
한국신탁은행 축구단 (1976) 공군 축구단 (1976~1979 / 군 복무) SV 다름슈타트 (1978~1979)[6]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79~1983) 바이어 04 레버쿠젠 (1983~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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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현대 호랑이 (1991~1994) 대한민국 대표팀 (1997~1998) 선전 핑안 (1998~1999)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4~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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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MBC (2001~2003, 2006 / 해설 위원) SBS (2010~2014 / 해설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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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2016~2017 / 부위원장) 분데스리가 (2017~ / 앰버서더[7])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2018~ / 앰버서더[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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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130경기 56골[9] ( 대한민국 / 1972~1979, 198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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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3010d,#191919><colcolor=#ffffff,#e5e5e5> 본관 | 연안 차씨 (延安 車氏) | ||
학력 |
화산초등학교 (졸업) 경신중학교 (졸업) 경신고등학교 ( 졸업 / 65회)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 체육교육학 72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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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 대한민국 공군 제8전투비행단 병장 만기전역 (병 270기 / 공군 축구단) | |||
종교 | 개신교 ( 예장통합)[10] | |||
가족 |
배우자 오은미[11] 장녀 차하나[12] 사위 정병훈 장남 차두리 차남 차세찌 며느리 한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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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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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인.국내에서 고려대학교 축구부,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공군 축구단에서 활약한 뒤 26세의 나이에[13] 당시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10년을 뛰었다.
차범근은 불과 24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00경기 출장을 기록했고[14], 국가대표팀 통산 최다 출장 공동 1위(136경기), 최다 득점 1위(58골)를 비롯한 여러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5]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전성기를 보냈고 두 구단에서 UEFA컵[16] 2회 우승 및 DFB 포칼 1회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키커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고 분데스리가 역대 외국인 선수 최다 골 기록(98골)을 10년간 보유했다.[17]
두팀에서 모두 UEFA컵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키커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고[18] 분데스리가 통산 98골로 11년간 외국인 최다 득점 타이틀을 보유하였고[19] 컵 대회를 포함하면 121골을 넣었다. 또한 국가대표 통산 136경기 58골로 한국 남자 국가대표팀 역대 A매치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했다.[20]
2. 축구인 경력
국가대표 136경기 출장, 58골 기록[21], 한국인 선수 최초의 센추리 클럽 가입, 한국인 남자 축구 선수 중 역대 최다 A매치 득점 기록[22],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24년 139일), 독일 분데스리가 1부 리그에서 11년간[23] 총 308경기 출장(당시 외국인 선수 중 역대 2위)[24], 98골(당시 외국인 선수 중 역대 1위)[25] 기록. 참고로 분데스리가 98골 중 페널티 킥 득점은 0득점이다.[26] DFB-포칼, UEFA컵 기록까지 포함하면 372경기 121골. 차범근은 인터뷰에서 멀티골은 20번이나 해 봤지만, "해트트릭은 한 번도 못 해 봤다."고 말했다.[27]1976년, 아시아에서 큰 국제 대회이던 박스컵에서 말레이시아[28]를 상대로 7분 남기고 1:4로 뒤진 상황에 차범근이 혼자 세 골을 몰아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무승부를 만드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국도 그 경기의 테이프가 없다고 했고 차범근도 두 골은 기억이 나지만, 나머지 한 골은 어떻게 넣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박스컵도 그렇지만, 1950년대~80년대 중반 이전의 국대 축구는 방송사에서 비디오 테이프와 필름을 비싸다고 재활용했던 것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영상 자료로는 영영 볼수없는 경기가 대다수이고, 문헌 자료들은 영상 자료에 비하면 낫지만 자료 보존이 철저하지 못해서 차범근의 육체적 전성기인 20대 초반의 활약상은 직접 본 사람 외엔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현역 시절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자연스레 발생한 것이 포지션에 관한 논란이었다. 중앙 공격수였는지 아니면 윙어였는지 논란이 분분하였는데 차범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주로 오른쪽 윙어, 분데스리가에서는 최전방 투톱으로 뛰었다고 한다.
또한 현재 유럽에서도 지면 자료들의 인터넷 전산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기도 하였고 유튜브의 활성화로 차범근의 플레이 영상을 몇 개 나마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구단에서 포지션 자체는 투톱 체제의 중앙 공격수로 뛰었지만 라인업 상 그렇게 표현되었을 뿐 현대에서 말하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 활약한 것을 알 수 있다. 국가대표에서처럼 윙 포워드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미드필더로 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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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현역 시절의 모습[29] | 독일의 축구 잡지, 키커(Kicker)의 표지 모델 위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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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시절 | 인맥대장, 차붐(Tscha Bum)![30] |
2.1. 선수 경력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선수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2.2. 지도자 경력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지도자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2.3. 해설자 경력
1998년의 실패 이후 K리그 감독으로 복귀하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국가대표 감독 이후 국내의 심각한 비난 여론에 의해 도망치듯 중국 프로 축구 선전 핑안[31] 감독으로 부임했다.[32] 1년 6개월 만인 1999년 12월 재계약이 불발되었고 이후로 국내외를 오가며 눈에 띄지 않는 야인 생활을 거듭했다. 하지만 차범근 축구교실만큼은 직접 챙기면서 유소년 육성에 대한 의지만은 뜨거웠는데 2001년 초에 한 어린이가 "우리들이 다치는 걸 걱정해 직접 얼음을 깨고 있는 저 분이 바로 전설적인 축구 선수 차범근 감독님이다."라는 글과 차범근의 뒷모습을 Daum의 차범근 팬 카페에 올린 사연도 있다.[33]그러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장 정몽준이 1998년 차범근에게 내려진 자격 정지 5년에 대해 사면 조치를 취하면서 차범근의 국내 활동이 자유로워졌고 신문선, 송재익을 SBS에 빼앗긴 MBC가 2000년 12월부터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34] 2001년 2월 2일 2억 원에 MBC 해설 위원으로 계약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해 5월에 개막한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부터 본격적으로 해설을 맡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축구 해설은 여러 분석을 내놓는 신문선과 이를 재치 있는 입담으로 포장하는 송재익 콤비를 내세운 SBS가 대세였고 차범근 본인이 딱히 말을 잘하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허정무를 해설 위원으로 내세운 KBS에 오히려 시청률이 뒤지는 상황까지 있었다.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에 또박또박한 말투, 그리고 수십 년간 쌓은 선수 시절 내공 덕에 경기를 한 수 앞 먼저 읽는 해설로 차츰 호평이 많아졌고, 2002년 월드컵 본선 때는 오히려 SBS의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누르고 MBC가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정타가 된 것이 월드컵 개막 직전인 2002년 5월 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 이 때도 SBS와 동시 중계로 해설을 했는데 당시 김남일의 태클로 지네딘 지단이 부상을 당한 뒤 허공으로 손을 돌리자 신문선은 판정 불만에 대한 항의하는 거라고 했지만 차범근은 표정을 보고 지단이 부상으로 뛸 수 없다고 해설했으며 벤치에서 얼음 찜질을 받고 알약 먹는 장면이 잡히자 신문선-송재익은 영양제를 먹으며 컨디션을 관리한다고 언급했지만 차범근은 "지금 진통제를 먹고 있네요."라는 언급을 했다. 실제로 지단이 이 날 부상으로 인해 본선에서 제대로 뛰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차범근의 해설은 저 멀리서 선수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매의 눈을 가진 예언자급 해설. 이후 신문선의 삽질이 거듭되면서 시청자들도 MBC로 눈길을 돌리고 월드컵 기간 내내 MBC가 일방적인 1위를 달렸고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야심차게 영입한 SBS는 2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신문선은 2006년을 끝으로 다시는 주류로 돌아올 수 없었다.
2002년 월드컵 해설을 맡을 당시 해설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자신이 아는 해설자 선배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는데 다름 아닌 베켄바워이다. 당시 베켄바워는 월드컵이나 주요 대회의 해설자로도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차범근이 월드컵이라는 큰 대회의 해설을 맡게 되어 부담도 되고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을지 노하우를 묻자 "우리가 말하면 다 맞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베켄바워고 너는 차붐인데 우리가 말하는 게 맞지 뭐가 걱정이냐'는 위엄 넘치는 답변인데 재밌는 건 2002년 월드컵이 유독 이변이 많았던 대회라서 결과 예측을 했다가 많이 틀렸는지 당시 한국에 체류 중이었던 베켄바워가 차범근을 만났을 때 "왜 우리가 말하면 다 틀리는 거냐?"는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35]
한편 2002년 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 감독 루디 푈러와 소소하게 티격태격한 적도 있다. 차범근이 독일과 파라과이의 16강전을 중계하던 중 '오늘 독일은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고 준비도 덜 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중계 멘트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이런 경기는 한강 고수부지 가면 볼 수 있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루디 푈러는 '레버쿠젠에 있을 때 아스피린[36]을 너무 먹은 것 같다'고 맞디스를 했다. 말만 들으면 살벌한 독설 배틀 같지만, 차범근의 선수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사이다. 애당초 저 아스피린 드립은 푈러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루디 푈러 역시 레버쿠젠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냥 친한 친구끼리 틱틱거린 수준. 당시 독일의 국내 여론은 차범근보다 푈러에 대한 비판이 더 강했는데, 그만큼 당시 독일 팀의 경기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푈러와 차범근이 따로 만나서 화해는 했다고. 독일과의 경기를 앞두고 서로 만나 얼싸안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중계 방송 시작 때 그대로 나왔다,
2003년까지도 계속해서 MBC 해설을 맡았으나 계약 기간이 만료된 데다 마침 수원 삼성 감독직 제의가 들어오면서 해설 위원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2006 독일 월드컵 기간에 한해 MBC 해설을 또 맡기로 이면 합의가 되어 있었고 여기에 엔트리에서 탈락한 차두리까지 가세하면서 '부자(父子) 해설 위원'이라는 진풍경으로 또다시 MBC가 시청률 1위를 기록. 다만 당시 감독을 맡은 수원의 성적이 안 좋을 때라 중요한 시기에 해설하러 자리를 비우는 것이 팬들에게 좋게 보일리 만무했기에 비난을 받아야 했고 차범근은 모 스포츠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 '미안하다'고 답한 바 있다. 다만 후반기 앞두고 이관우와 백지훈을 영입해 반등에 성공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SBS 해설 위원으로 배성재 캐스터와 함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경기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경기를 해설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그의 인기는 여전했으나 브라질 월드컵에선 나이가 들어서 순발력이 좀 느려지고 말을 버벅대는 부분이 많아지고[37] 다른 방송사의 해설 위원들이 선전하면서 그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분위기다.
축구 중계 시 카메라에 잡힌 축구계 유명 인사들을 잘 소개하지 못하기도 한다. 장지현, 한준희 등이 축구계 인사는 물론 때로는 정재계 인사들마저 귀신 같이 소개하는 반면 차범근은 잘 소개하지 못한다. 요아힘 뢰프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버벅거리거나[42] 올리버 비어호프가 카메라에 몇 차례나 잡혔음에도 캐스터와 함께 침묵을 지킨 사례가 있다. 물론 축구 해설자의 본분은 잡학 자랑이나 선수 프로필 읊어주는 게 아니라 경기를 풀어주는 것인만큼 큰 단점은 아니나[43] 어쨌든 중계 카메라가 이들을 잡아주는 건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중계 특성상 멘트가 중간에 끊어지는 걸 시청자들은 매우 어색해하기 때문에 이 점이 축빠들에게 약점으로 지적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4강전 미네이랑의 비극에서 전반에만 독일이 5:0으로 브라질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앞서나가자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셀프 디스를 시전했다.[44]
독일 대표팀의 중계를 맡으면 중립을 지키다가도 은연 중에 독일 쪽으로 편파 해설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45] 하지만 프로야구의 편파중계 정도의 완전하게 치우친 모습은 당연히 아니고 잘 들어봐야 알아차릴 그런 정도다.[46] 오히려 차범근 본인의 독일에 대한 애정에 비하면 꽤 중립을 잘 지키는 편이라고 봐야 한다. 단, 독일이 2014 브라질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가장 고전한 16강전 알제리와의 경기에서는 외질이 두 번째 골을 넣자 기쁨을 감추진 못했다.[47]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마친 후 SBS와 계약이 만료됐고, 재계약하지 않았다. 다만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남자 축구 결승전 때 SBS의 객원 해설로 마이크를 잡은 적은 있다. 계약이 끝난 현재까지도 SBS 직원들과의 친분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사실상 브라질 월드컵 이후로 해설자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대회부터는 박지성과 배성재가 월드컵 해설을 담당하고 있다.
2.4. 행정가 경력
2016년 4월에 2017년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지금껏 축구인 생활을 하면서) 감투를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는 감독이나 해설자가 아닌 축구 행정가로서 한국 축구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밝혔다. 기사2.5. 축구 교실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 축구교실 문서 참고하십시오.2.6. 축구상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축구상 문서 참고하십시오.3. 플레이 스타일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플레이 스타일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1979~1983)
- 바이어 04 레버쿠젠(1983~1989)
- UEFA컵 : 1987-88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1972~1986)
5.1.2. 개인 수상
명확한 출처가 없거나 날조된 정보는 제외한다.[제외내용]- KFA 베스트 XI :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50]
- KFA 최우수 선수 : 1973 기사
- KFA 명예의 전당 : 2005 기사
-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최우수 선수 : 1976 춘계 기사
- 키커 올해의 팀 : 1979-80, 1985-86 기사 기사
- 분데스리가 40주년 키커 분데스리가 역대 센터 포워드 9위 : 2003[51]
- 빌트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 1979-80 기사
- 구에린 스포르티보 미래의 유럽팀 : 1980 (서브) 기사
- 슈테른 세계 4대 상승 인물 : 1979 기사
- 유니세프 세계 올스타 : 1980 기사 기사
- 분데스리가 페어플레이상 : 1980 기사 기사
- 메이어 80년대 가장 위대한 선수 : 1980 기사
- 일본 일레븐 세계 100인의 축구 스타: 1984 기사
- 아벤트포스트 올해의 선수 : 1986[52] 기사
- 옹즈 몽디알 88명의 월드스타 : 1987-88 기사
- 킥AIDS88 세계 올스타 : 1988 기사 기사
- 동독 드레스덴 재건 세계 올스타 : 1990[53] 기사 기사
- 스포츠라이브 분데스리가 역대 최고 용병 : 1997 기사
- 독일 축구 역사가 협회 20세기 최고 아시아 선수: 1998 기사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 XI : 2013 기사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역대 Top 10 Goals : 2014 기사
- 바이어 04 레버쿠젠 창단 100주년 세기의 팀 : 2004 기사 기사[54]
-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진출 40주년 올스타 40인: 2019 기사 기사
- 마스터카드 20세기 아시아/오세아니아 베스트 XI : 1998 기사
- 월드 사커 20세기 세계 축구를 움직인 100인 : 1999 기사 기사
- MBC 한국갤럽 한국 축구 역대 베스트 XI : 2002 기사
- 골닷컴 분데스리가 역대 외국인 선수 3위 : 2010 기사
- 베스트일레븐 한국 축구 역대 베스트 XI : 2010[55] 기사
- AFC 황금 공로상: 2010 기사
- ESPN 아시아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 2015 기사
-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 : 2017 기사
- IFFHS 레전드: 2016 기사
- IFFHS 아시아 세기의 선수 : 1999 기사
- IFFHS 세기의 선수 60위 : 2000 기사
- IFFHS 20세기 아시아팀: 2021 기사
- IFFHS 올타임 아시아 드림팀 : 2021 기사
- 골닷컴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드림팀 11 : 2022 기사
5.1.3. 개인 기록
5.1.3.1. 세계
- FIFA 센추리 클럽 세계 최연소 가입: 24세 139일
5.1.3.2. 아시아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랑리스테 WK(월드 클래스)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랑리스테 IK(인터내셔널클래스)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랑리스테 K(리그 내 경쟁력 있는)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300경기 출전(88/89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5시즌 연속 리그 두 자릿수 득점(85/86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7시즌 연속 시즌 두 자릿수 득점(85/86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리그 두 자릿수 도움(82/83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리그 10 득점 달성(79/80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데뷔 시즌 리그 10 득점 달성(79/80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리그 3경기 연속 득점(79/80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리그 4경기 연속 득점(83/84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키커 주간 MVP(Spieler des Tages)(79/80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79/80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분데스리가 페어플레이 상(80/81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리그 종합 평점 2점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5시즌 연속 리그 종합 평점 2점(83/84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리그 공격포인트 100포인트 돌파(83/84 시즌)[56]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통산 리그 최다 득점: 98골(88/89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통산 리그 최다 도움: 76개(88/89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리그 최다 득점: 17골(85/86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리그 최다 도움: 13개(86/87 시즌)[57]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통산 리그 최다 출전: 308경기(88/89 시즌)[58]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리그 최다 공격포인트: 174개[59]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키커 주간 베스트 11(Elf des Tages): 36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키커 주간 MVP(Spieler des Tages): 6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멀티골 : 20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리그 선발 출전 : 306경기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리그 풀타임(무교체) 출전: 274경기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전경기 출전: 2시즌(83/84, 85/86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키커 올해의 팀 : 2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랑리스테 : 18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랑리스테 WK : 1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랑리스테 IK : 4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랑리스테 K : 9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리그 종합 평점 2점 : 5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리그 최고령 득점 : 만 36세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 리그 연속 출전 : 34경기(83/84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 리그 선발 출전 : 34경기(83/84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 리그 풀타임(무교체) 출전 : 32경기(83/84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리그 최고 평점 : 2.45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랑리스테 최고 평점: 2.12
- DFB-포칼 아시아 선수 최초 결승골(80/81시즌 vs 카이저슬라우테른)
- DFB-포칼 아시아 선수 최다 멀티골 : 3회
- DFB-포칼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 득점 : 6골
- UEFA컵 아시아 선수 최초 우승(79/80 시즌)
- UEFA컵 아시아 선수 최초 결승 출전(79/80 시즌)
- UEFA컵 아시아 선수 최초 결승 득점(87/88 시즌)
- UEFA컵 아시아 선수 최초 2회 우승(79/80, 87/88 시즌)
- UEFA컵 아시아 선수 최다 우승: 2회(79/80, 87/88 시즌)
5.1.3.3. 국가대표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전: 136경기[60]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득점: 58골[61]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초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연소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5.1.3.4. 분데스리가
5.1.3.5. 프랑크푸르트
- 구단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비유럽 선수
- 구단 역사상 역대 열 번째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결승 출전 선수
- 구단 역사상 50골을 돌파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100경기를 돌파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100경기를 돌파한 세 번째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10득점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10득점 이상을 기록한 역대 아홉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구단 내 득점 1위를 기록한 역대 세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구단 내 득점 1위를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세 경기 연속 골을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세 경기 연속 골을 기록한 역대 다섯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세 경기 연속 골을 기록한 역대 열네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한 시즌 분데스리가 10득점 이상을 기록한 역대 열세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역대 득점 8위
5.1.3.6. 레버쿠젠
- 구단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비유럽 선수
- 구단 역사상 역대 세 번째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UEFA컵 결승전에서 득점한 세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60골을 돌파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100경기를 돌파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150경기를 돌파한 최초의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10득점 이상을 기록한 역대 세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10득점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4연속 골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4연속 골을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4연속 골을 기록한 역대 두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한 시즌 분데스리가 득점 10득점 이상을 기록한 역대 세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세 시즌 연속 분데스리가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역대 세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한 시즌 최다 골 : 17골(85/86 시즌)[63]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역대 득점 6위
5.1.4. 키커 랑리스테
시즌(전) | 클럽 | 포지션 | WK | IK | K | B | 시즌(후) | 클럽 | 포지션 | WK | IK | K | B |
1978-79 | 다름슈타트 | X | 1978-79 | 다름슈타트 | X | ||||||||
1979-80 | 프랑크푸르트 | 외국인 선수 | WK-1 | 1979-80 | 프랑크푸르트 | 외국인 선수 | IK-5 | ||||||
1980-81 | 프랑크푸르트 | 외국인 선수 | K-4 | 1980-81 | 프랑크푸르트 | 외국인 선수 | K-7 | ||||||
1981-82 | 프랑크푸르트 | 외국인 선수 | K-7 | 1981-82 | 프랑크푸르트 | 외국인 선수 | K-6 | ||||||
1982-83 | 프랑크푸르트 | 외국인 선수 | IK-2 | 1982-83 | 프랑크푸르트 | 외국인 선수 | K-2 | ||||||
1983-84 | 레버쿠젠 | 외국인 선수 | K-3 | 1983-84 | 레버쿠젠 | 외국인 선수 | K-5 | ||||||
1984-85 | 레버쿠젠 | 외국인 선수 | B | 1984-85 | 레버쿠젠 | 외국인 선수 | B | ||||||
1985-86 | 레버쿠젠 | 외국인 선수 | IK-2 | 1985-86 | 레버쿠젠 | 외국인 선수 | IK-5 | ||||||
1986-87 | 레버쿠젠 | X | 1986-87 | 레버쿠젠 | 외국인 선수 | B | |||||||
1987-88 | 레버쿠젠 | 외국인 선수 | B | 1987-88 | 레버쿠젠 | 외국인 선수 | K-12 | ||||||
1988-89 | 레버쿠젠 | X | 1987-88 | 레버쿠젠 | CDM[64] | K-8 |
5.1.5. 출전 기록
5.1.5.1. 클럽
시즌 | 클럽 | 소속 리그 | 리그 | DFB-포칼 | UEFA컵 |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
1978-79 | 다름슈타트 98 | 분데스리가 | 1 | 0 | 1 | - | - | - | - | - | - |
1979-80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 분데스리가 | 31 | 12 | 11 | 2 | 0 | 5 | 11 | 3 | 3 |
1980-81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 분데스리가 | 27 | 8 | 8 | 6 | 6 | 2 | 5 | 2 | 0 |
1981-82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 분데스리가 | 31 | 11 | 6 | 1 | 0 | 0 | 6 | 1 | 1 |
1982-83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 분데스리가 | 33 | 15 | 10 | 1 | 0 | 0 | - | - | - |
프랑크푸르트 합산 | 122 | 46 | 35 | 12 | 6 | 7 | 22 | 6 | 4 | ||
1983-84 | 바이어 04 레버쿠젠 | 분데스리가 | 34 | 12 | 8 | 1 | 0 | 0 | - | - | - |
1984-85 | 바이어 04 레버쿠젠 | 분데스리가 | 29 | 10 | 1 | 3 | 4 | 1 | - | - | - |
1985-86 | 바이어 04 레버쿠젠 | 분데스리가 | 34 | 17 | 6 | 4 | 2 | 1 | - | - | - |
1986-87 | 바이어 04 레버쿠젠 | 분데스리가 | 33 | 6 | 13 | 2 | 1 | 1 | 3 | 2 | 1 |
1987-88 | 바이어 04 레버쿠젠 | 분데스리가 | 25 | 4 | 9 | 0 | 0 | 0 | 10 | 2 | 3 |
1988-89 | 바이어 04 레버쿠젠 | 분데스리가 | 30 | 3 | 3 | 5 | 0 | 3 | 2 | 0 | 0 |
레버쿠젠 합산 | 185 | 52 | 40 | 15 | 7 | 6 | 15 | 4 | 4 | ||
합계 | 11시즌 | 308 | 98 | 76 | 27 | 13 | 13 | 37 | 10 | 8 | |
프로 통산 | 리그 308경기 98골 76도움 / 총합 372경기 121골 97도움[65] |
5.1.5.2. 국가대표
- 1972-1978/1986년[66]
연도 | 출전 | 골 |
1972 | 23 | 6 |
1973 | 17 | 8 |
1974 | 13 | 2 |
1975 | 18 | 9 |
1976 | 20 | 13 |
1977 | 26 | 15 |
1978 | 16 | 5 |
1986 | 3 | 0 |
종합 | 136 | 58 |
5.2. 감독
5.2.1. 대회 기록
- 수원 삼성 블루윙즈(2004~2010)
5.2.2. 개인 수상
- AFC 올해의 감독 : 1997
- AFC 이달의 감독 : 1997년 2월ㆍ5월ㆍ9월
- K리그 올해의 감독 : 2004, 2008
- FA컵 최우수 감독 : 2009
- AFC 황금공로상 지도자 부문 38인 : 2010
5.3. 서훈
6. 미디어 활동
6.1. 방송
- 1978년 KBS - 황금의 다리[69]
- 1978년 WDR 서독 방송국 - 특집 아시아에서 온 황색의 공격수[70]
- 1980년 서독 헤센 방송국 - 와일드차징에 멍드는 갈색의 진주[71]
- 1980년 서독 헤센 방송국 - 차범근 부상 특집 토크쇼[72]
- 1980년 네덜란드 국영TV - 분데스리가의 신성 차범근[73]
- 1980년 MBC - 특집 차범근의 생활
- 1983년 서독 공영방송 1TV - 특집 스포츠쇼 100만 마르크의 차범근[74]
- 2006년 MBC - 독일 월드컵 특집 독일의 코레아너, 차붐
- 2014년 SBS - 브라질 월드컵 특집 두리아빠, 축구바보 그리고 전설
- 2021년 JTBC - 축구로 하나되다 - 팀코리아
※ 신문이나 뉴스 매체 등에서 검색 혹은 확인 가능한 목록만 작성한 것으로 더 존재할 수 있으며, 선수 시절과 은퇴 후 차범근을 특집으로 다루거나 고정으로 출연한 방송 외에 예능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것은 제외하였다.
선수 생활 당시에는 한국의 경우 보통 차범근의 경기 실황을 가끔씩 특집 형식으로 녹화 방송해주거나 독일 생활을 다룬 다큐를 방송했다. 놀라운 건 독일에서의 방송인데 당시 차범근의 부상을 특집으로 다룬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차범근이라는 선수를 단독으로 다룬 특집 방송이 상당히 많이 방송되었다. 작게는 지역 TV 방송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독일 메이저 TV 방송국에서도 방영을 하였고 심지어 다른 나라의 방송국에서도 방영을 하였다. 현재도 매우 드문 일이지만 동양인 선수가 거의 없던 시절의 1980년대를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은퇴 후에는 워낙 이룬 업적들이 대단하다보니 월드컵 같은 국제 대회를 맞아 제작되는 특집 다큐가 주를 이룬다.
6.2. 광고
- 1978년 해태음료 팝오렌지
- 1979년 남양유업 남양 요구르트
- 1980년 해태제과
- 1982년 동부대우전자 대우 VTR
- 1986년 한국 베링거인겔하임 멕살겔
- 1986년 한국 베링거인겔하임 복합 아루펜트
- 1991년 매일유업 바이오거트
- 1992년 CJ제일제당 백설햄 울리불리
- 1996년 매일유업 매일우유
- 1996년 매일유업 1등급 우유
- 1997년 한독 훼스탈
- 1997년 매일유업 비피더스 요구르트
- 1998년 삼성전자 명품 플러스 원 TV
- 1998년 삼성전자 센스 노트북
- 1998년 삼성전자 화이팅 우리가족
- 1998년 기아자동차
- 2002-09년 SK텔링크 국제전화 00700
- 2004-05년 코카콜라 우린 모두 코카콜라가 좋아요
- 2006년 SK텔레콤
- 2007년 폭스바겐
- 2010년 아디다스골프
- 2012년 대웅제약 우루사
- 2013년 SBS 브라질월드컵 외쳐라! 대한민국
- 2014-15년 미래에셋대우 ELS
- 2015년 코카콜라
- 2015년 넷마블 다함께 차차차 2
- 2016년 메르세데스-벤츠 차범근의 30년 추억 복원 프로젝트
- 2018년 리니지 M 시대를 넘어 시대의 정상에 서다
- 2020-21년 피파 온라인 4
- 2021년 롯데리아 롯데리아 레전드버거
※ 신문이나 뉴스 매체 등에서 검색 혹은 확인 가능한 목록만 작성한 것으로 더 존재할 수 있다.
차범근의 광고 출연은 선수 시절부터 이어져 온다. 1980년대 당시 세계 유수의 기업에서 한창 스타 플레이어들을 광고에 내세우던 시절인 만큼 서독에서도 많은 축구 선수들이 광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75] 차범근 역시 시즌이 끝난 후 한국에서 광고를 찍었는데 분데스리가 진출 전 1,000만 원이었던 광고료가[76] 1980년에 4,800만 원까지 치솟았다.[77] 당시 국내 최정상급 배우 최불암의 광고료가 800만 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특히 1986년의 한국 베링거인겔하임[78]의 차범근의 광고료는 6,000만 원에 이르는데 당시 국내에서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만기의 광고료가 3,500만 원이었다.[79] 이때의 광고가 연이 되었는지 한국 베링거인겔하임은 2015년부터 차범근 축구 교실에 3년간 3억 6,000만 원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선수 시절 이후에도 꾸준히 광고 출연을 이어갔는데, 진중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델로 출연하던 선수 시절과는 달리 의외로 코믹한 광고가 굉장히 많다. 은퇴 이후에는 아들인 차두리와 함께 출연하는 광고가 많았는데 2010년대 후반부터 단독으로 출연하는 빈도가 많고 한국 축구 레전드의 느낌을 살려 진중한 느낌의 광고가 주를 이룬다.
애초에 서독에 진출한 것도 개인의 축구에 대한 욕심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축구 발전을 위한 것이 컸던 것처럼 광고조차 애국자적인 출연 결정이 많았다. 물론 당시 사회적인 통념 자체가 요즘과는 달리 다소 국수주의 적이기도 했지만 국내 기업의 신제품이나 세계 시장을 노리는 도전적인 시도의 상품 광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고 특히 1998년 기아자동차 광고의 경우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법정 관리에 들어간 기아자동차의 정상화를 위해 무상으로 광고에 출연하였다. 여담으로 기아자동차는 회생 후 감사의 의미로 기아 엔터프라이즈를 기증했다.
이외에도 상업 광고가 아닌 공익 광고(지면)에 출연한 적도 있다. 가족계획으로 산아 제한 정책을 추진하던 1980년 당시 첫째인 차하나(당시는 3살 아기였다), 부인 오은미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고 그 하단에 "하나만 더 낳고 그만 두겠어요"란 문구가 적혀있는 캠페인 신문 광고다. 기사 하지만 정작 이 이후 차범근의 가족은 한 명이 아니라 둘이 더 태어나 총 세 자녀가 되었다. 여담으로 차범근은 공익 광고이기 때문에 무료로 출연했다고 한다. 당시 신문 기사
6.3. 도서
- 에세이 내가 너무 못생겼다구요(1990, 우석출판사)
- 에세이 슈팅메시지(1997, 우석출판사)
- 에세이 그라운드 산책(1997, 우석출판사)
- 학습만화 네 꿈을 펼쳐라(1998, 진선출판사)
7. 차범근에 대한 언사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관련 언사 문서 참고하십시오.8. 논란 및 사건 사고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9. 여담
- 본관은 연안(延安, 현재 황해도 연안군)이며,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서 아버지 차금동(車今同)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차금동은 농업협동조합에서 근무하다가 퇴직 후 농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차범근은 아내 오은미와 1977년에 결혼했다고 한다. 오은미와의 결혼 스토리는 1976년 당시 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오은미의 친구는 본인 대신 미팅에 나가 달라고 부탁했고 친구 대타로 미팅에 나와서 차범근과의 첫 만남을 가지며 그 계기로 인해서 차범근과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어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1977년에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당시 차범근의 나이는 25살, 오은미는 22살이었다고 했다. 결혼 후 가족은 배우자 오은미로부터 딸 한 명( 차하나)과 아들 두 명( 차두리, 차세찌)을 낳았다. 그중 장남 차두리는 대를 이어 대표팀에서 뛰었고 이후 차두리가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 회장 신철호의 장녀 신혜성과 2008년에 결혼하며 며느리가 됐으나 이혼 조정으로 가족의 연은 끊어졌다. 그리고 차남 차세찌가 2018년 배우 한채아와 결혼하여 배우 며느리를 맞이하게 됐다. 손주는 차두리와 전처 신혜성 사이에 1남(차아일) 1녀(차아인)와 차세찌와 한채아 사이에 1녀(차봄)로 총 3명이 있다고 한다.
- 1979년 독일 슈테른이 발표한 '세계 4대 상승세 인물'로 선정
- 2021년 포포투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레버쿠젠 이적 당시 AC 밀란과 SSC 나폴리에서도 오퍼가 왔다고 한다. 이탈리아로 갔다고 가정하고 행복 회로를 돌려보면 1984년 파올로 말디니의 밀란 1군 데뷔 또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나폴리 이적을 동료로서 환영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80]
- 차범근이 현역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가족과 함께 귀국한 1989년 11월 10일은 바로 베를린 장벽 이 무너진 날이었다.[81] 당시 MBC 뉴스데스크 꼭지들. 당시 베를린 장벽 붕괴 사건 말고도 삼양라면 우지 파동이라는 사회를 크게 흔든 사건이 규명되는 기사들이 잇달아 나왔던 때라 차범근의 귀국 소식이 마치 단신처럼 처리된 듯 싶지만, 인류 역사는 물론 대한민국 역사를 뒤흔든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그래도 메인뉴스의 주요 소식 중 하나로 다뤘으니 당시 차범근의 명성을 새삼 느끼게 한다.
- 현역 때도 유명했지만, 차범근의 전성기 시절 허벅지 둘레는 무려 31인치. 기사 이는 웬만한 남자 허리 둘레 수준으로, 차범근의 엄청난 주력과 힘은 여기서 나왔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또한 축구계에서 월드 클래스 체격을 자랑하는 아들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국가대표 선수가 될 때까지도 어떤 신체 능력으로도 차범근을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82] 심지어 2014년에도 매일 두 시간씩 러닝과 웨이트를 거르지 않고 소화 중이며, 한 번은 차두리가 같이 운동하다 먼저 손들고 올라온 일이 있다고 한다. 현역 당시 그의 허벅지 모음 블로그 글. 그야말로 펄떡거리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허벅지 근육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차범근이 위 인터뷰를 한 것은 2014년으로 만 61세,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 상당한 공처가다. 것도 늘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아내라고 이야기하고 다닐 정도로 말이다. 다만 이렇게 공처가가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데 독일 진출 당시 차범근은 도착 직후 제대로 된 환대를 받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는 감독과 선수단 간의 불화가 있었던 상황이었고 감독이 새로 영입한 차범근을 기존 선수들이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83] 이렇게 힘든 시기에 아내 오은미는 당시 시대상으로 상당히 곱게 자랐음에도 억척같이 뒷바라지하면서 차범근의 영양 관리를 도왔기 때문이다.[84] 오은미는 남편 차범근이 축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도록 축구 이외의 모든 것을 전담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결혼 직후 차범근이 내가 할 일은 축구밖에 없으니 다른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축구만 하게 해 달라고 말해 아내는 흔쾌히 받아들인 뒤 온갖 고생과 뒷바라지를 하면서 남편이 선수 은퇴할 때까지 인생을 남편에게 맞추어 살아왔다. 차범근이 버는 모든 수입의 관리뿐만 아니라 대외 활동의 매니지먼트, 심지어는 차범근이 쓰는 글 대부분의 대필까지도 해 주고 있다는 건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다.[85]
-
슬하에 2남 1녀를 뒀다. 장녀
차하나(1978년생).
1970년대 극후반 공익 광고. 그때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시절이었다.[86]
어린이 : 아저씨는 아들을 낳으면 축구를 시키실 겁니까?
차범근 : 공교롭게도 제가 지금 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아들이 원하면 축구를 시키고...
그리고 아들 둘을 더 낳았다. 장남
차두리(1980년생), 차남
차세찌(1986년생). 장녀는 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막내 아들은
해병대를 전역 후(2009년 입대. 병1103기로, 1사단 7연대 3대대에 입대했으며 7연대 1대대 현관에도 차범근의 싸인볼이 있었다.) 형과 아버지와 함께
간때문이야 광고에 출연하였다. 딸은 결혼해 아들을 두었는데, 이 아이[87]가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차범근으로선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차두리가 결혼할 때 기자 회견에서 손자가 태어나면 자신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축구 선수로 키워보고 싶다고 밝혔다. 자신이 바빠서 아들 두리를 제대로 봐주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쉬웠다고. 2010년 11월 29일 차범근의 소셜 네트워크에 내년 5월에 태어날 차두리의 둘째가 아들이라는 소식이 올라왔다.
링크 네티즌들이 예상하는 아이 이름은 차바인, 차쯔바(독일어로 2는 zwei(쯔바이)) 등등이었는데, 정작 한 달 늦은 6월 말에 태어난 둘째 아이의 실제 이름은 '차아일(Ail)'. 독일어가 아닌
웨일스어로 '2'라는 뜻의 이름으로, 많은 네티즌의 허를 찔렀다.[88] 어쨌거나 많은 이들은 벌써부터 "2030년 월드컵 국대 원톱"으로 단정 짓는 중. 자녀 이름을 하나, 둘(두리), 셋(세찌)으로 짓는 비범함을 보였다.
-
여타 운동선수와는 달리 일찌감치 광고 출연이 많았다. 이미
독일 진출 전이던 1970년대 후반,
남양유업의
요구르트 광고에 나온 것을 비롯해 1980년대에는 레버쿠젠의 모기업 바이엘 제약의 광고에도 자주 나왔다.
대우전자에서 제작한
베타맥스
VCR 광고에도 출연했는데
영상(51~55초 부분)을 보면 차범근이 화질이 정말 좋다는 것을 알리는 대사("화질이 정말 깨끗하군요")를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2000년대 들어 SK텔링크 00700 CF에 고정 출연하며 김선아와 함께 개그감도 뽐냈다. 원래 파트너 싸이는 병역비리에 걸려서 하차. 이때 대사는 "국제 전화 비싼 줄 알았지? 아니야!!"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신문선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MBC 해설로 합류하여 그때부터 해설계에서 오랜 기간 활동했다.[89] MBC는 당시 간판 콤비 신문선과 송재익을 SBS에 뺏겼으나 차범근이 그 자리를 잘 메워 줬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 때는 대표팀에 탈락한 차두리도 해설에 합류해 부자가 같이 해설했다. 이때 대한민국과 스위스의 조별 예선 최종전에서 스위스의 두 번째 골이 들어간 상황에 대해 차두리가 심판 판정을 문제삼으며 "이건 사기입니다."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중계석을 비춘 화면에서 차범근이 차두리를 노려보면서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한게 밝혀지며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2001년에 거스 히딩크가 오대영이라고 비난받을 무렵, 그를 지지한 몇 안 되는 축구인이다.[90] 그러나 수원의 성적이 부진할 땐 감독 때려치우고 해설이나 하라고 욕을 먹었다.
- 기자들과 악연이 많다. 1980년대 초반에는 기자들이 독일까지 가서 " 양주를 내놓으라, 대접 잘해라" 이딴 무개념 쓰레기 짓거리를 해서 정나미가 떨어진 차범근은 문전박대를 해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한국에서 신문으로 "차범근 독일에서 무개념으로 군다" 이렇게 왜곡을 하는 기사를 써재꼈다. 이런 일로 아버지가 속상해하던 걸 보던 아들 차두리도 커서 기자들을 꺼리며 갈등이 많았다.[91] 김병현이 모 기자와 갈등을 겪었을 때(일명 '김중지 사건') 차범근은 김병현을 옹호하다 그런 기자에게 욕설을 듣기도 했다.
- 동년배의 다른 스타들과 비교했을 때 겸손한 사람이다. 인터뷰를 해도 옛날 얘기를 한두 문장 이상으로 이어서 하는 일이 없고, 해설할 때도 그 흔한 현역 시절 일화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이런 자기 자랑을 자제하는 것에는 아쉬운 측면도 있는데 당장 선수 경력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분데스리가 경력에 대한 문서화 작업이 굉장히 부족한 상황에서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구술사도 전무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축구 팬들이 그의 과거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대단히 힘들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축구 팬도 차붐, 차붐하고 그가 분데스리가에서 유명했다더라 하는 정도만 알지, 어떤 플레이를 보여 줬으며 어떤 선수인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니 젊은 축구 팬들에게도 해외에 나가 있는 수많은 현역 축구 선수의 선조뻘로만 다가오지, 예컨대 박찬호나 박지성처럼 차범근을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보통 이쯤 되면 야구의 선동열 같은 사례처럼 전성기 시절의 경력을 폄하하는 사람도 나올 법도 하지만, 이미 여러 일화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아들의 스코틀랜드 리그 활동에 관련한 행정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친구한테 추천서를 부탁했는데 그 친구란 사람이 무려 프란츠 베켄바워였으며 남아공 월드컵 때 해설 위원으로 활동하던 아르센 벵거가 옆에 마련된 중계석에 있던 차범근을 쳐다보며 해설과 함께 차범근이 옆에 있다고 전설적인 선수라고 소개하고는 차범근을 향해 엄지를 치켜든다거나. 수원 삼성과 첼시의 경기 때 주제 무리뉴가 와서 악수하고 다가와서 인사를 한다. [92] 프랑크푸르트 100년 역사의 레전드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프랑크푸르트 역 기둥에 12명의 프랑크푸르트 레전드의 사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차범근이다. 루디 푈러와 서로 약 먹었냐며 시시덕거리는데, 아무도 이를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다.[93] 특히 1970년대 독일의 선수 출신 축구인들이 전 세계의 주요 축구 지도자로 나선 이후, 월드컵을 비롯한 국제 대회에 해설자로 한번 나갔다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과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사실 관계뿐이다. 대단한 과거가 있다고 짐작만 할 뿐, 디테일을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 프란츠 베켄바워와는 한국 축구 팬들이 알고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친한 것으로 보인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첫 해설을 맡은 차범근이 해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조언을 구한 사람이 베켄바워였고[94] 2013년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정몽준에게 독일 대십자공로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베켄바워가 내한했을 당시 행사에 초청된 차범근을 보고 대뜸 귓속말로 "너 이혼했어? 와이프 어디가고 혼자 왔어"라고 묻자 "나만 초대해서 혼자 왔지"라며 잡담을 하거나 차범근이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그 유명한 SBS '따봉' 영상을 찍기 위해 베켄바워를 찾아갔을 때 차범근이 "곧 내 생일이니 축하 인사나 한마디 해 달라"는 말에 온갖 미사여구를 쓰며 축하 인사를 하더니 당시 현장에 같이 있던 차범근의 부인 오은미에게 "잘 된 것 같아?"라고 묻는 등 단순히 개인적인 친분을 넘어 가족끼리도 친한 걸로 보인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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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축구 연맹(DFB) 회장을 '집사람 옆에 있는 친구'라 부르기도 한다. 그 인물은 볼프강 니어스바흐(Wolfgang Niersbach)로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독일 축구 연맹 회장직을 맡았다. 차범근이 뛰던 당시 스포츠 기자로 활동한 덕에 차범근과 매우 잘 알아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상식적으로 단순히 분데스리가에서 뛰었다고 이렇게 신임 DFB 회장을 만찬장에서 만나진 못한 다는 걸 생각한다면 차범근의 위엄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구자철을 비롯해 독일 전문 스포츠 기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구단의 초청이나 분데스리가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암암리에 각종 독일 축구계의 임원들을 만난다고 하며 그저 대한민국에 잘 알려지지 않을 뿐이라고 한다.
- 79/80 시즌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UEFA컵을 우승하고 축하 행사를 가진 프랑크푸르트 뢰머 광장은 과거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대관식을 끝낸 후 화려한 축하연을 열던 곳으로 그 유서가 매우 깊은 곳이다. 특히 차범근을 비롯한 선수들이 올라 트로피 셀레브레이션을 한 오스트차일레 발코니는 카이저르차르, 일명 '황제의 방'이라고 불리며 평상시 엄격히 출입이 통제되어 아무나 올라 가지 못하는 곳으로 특별한 행사에만 허용되는 장소였다. 차범근은 이곳에 오른 최초의 아시아인인데 2014년에 방영된 다큐에서 얘기하기론 당시 올라갈 때는 마냥 신나기만 했지 이 장소에 대한 특별함을 알지 못했으며 나중에 그냥 올라가려니까 턱도 없었다고 소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시즌에 UEFA컵 우승을 거두고 두 번째 시즌엔 DFB-포칼 우승을 하며 2년 연속 올라갔기 때문에 실감이 안 났을 수 있다.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주전 수비수로 출전한 아들 차두리에 대해 해설 중에는 말을 아꼈지만 경기 종료 뒤에는 우리 두리 잘하잖아~~하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고 한다. 기사.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자, K리그 구단들에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선수들을 잘 키워줘서 고맙다는 감사 코멘트를 했다고 한다.
- 독실한 장로회 신자이고[95], 여러 번 자신의 신앙에 대해 간증을 했는데, 종교 문제 때문에 구설이 오른 적이 있다. 1997년 월드컵 예선 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골을 넣으면 기도를 드려 자주 카메라에 잡혔다. 김용옥이 신문 기고로 이를 비판했고, 이후에 차범근도 반박 기고를 하여 키배가 벌어진 적이 있다. 또한 선수 기용에서도 종교가 개입한다는 의혹도 유포되곤 했다. 예를 들어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본선 첫 경기 멕시코전에서 최용수 대신 김도훈을 출전시킨 것이 최용수가 불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소문이 돌았고, 부적을 사용하는 고정운을 잘 기용하지 않는 것도 종교 문제라고 회자되었던 것이었다.[96] 이 외에도 당시 대표팀에는 서정원, 최영일, 등 불교계 선수가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원수라 할 수 있는 통일교 계열의 K리그 구단 천안 일화 천마가 성남으로 연고를 옮기려 할때 성남 기독교계가 반발하자 차범근은 신문 기고로 " 축구와 종교는 상관없다."고 한 적이 있다.[97]
- 2010년에 나온 차두리 로봇설과 관련하여, 차두리 로봇 설계도를 알려달라는 팬들의 장난스런 요청에 로보트...그거 일급 비밀이야. 많이 알면 다친다고!!!로보트 아빠는 상관없지만 로보트 엄마는 비밀로 부치고 싶어해. 이해해 줘. 로보트 가족 중에는 엄마 힘이 젤 세다고!!!라고 답하며 축구 실력뿐 아니라 유머 감각도 레전드급임을 과시했다. 그보다 며칠 전, 차두리가 로봇설에 대해 한 말을 보면 부자가 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걸로 보인다.
- 감독직 사임 후, MBC에서 SBS로 옮기며 배성재[98]와 함께 국가대표 축구 해설로 활동했는데 평가는 굉장히 좋다. 선수 출신답게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경기 내적인 내용들을 잘 짚어주며, 감정적인 애국 해설을 자제하고, 경기의 흐름과 풀어나갈 방향을 거론하는 방식. 보다 보면 후배며, 제자들인 선수 한 명 한 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게 보인다.[99] 2011년 2월 1일, 박지성이 은퇴한 것에 대해, 축구 유망주들이 유년기에 훈련을 너무 많이 하는 관행을 고치려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것이 부끄럽다며 인터넷 상에 글을 올린 게 화제가 되었다. 기사.
- 선수로서는 이견이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 선수 중 가장 명예로운 경력을 보냈지만, 지도자로서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 대회 도중 경질된 사건과 그 이후 승부조작 드립을 쳤다가 5년간 자격 정지(이후 3년으로 하향)를 먹은 뒤 중국 리그를 전전했던 아픔이 있는 사람이다. 참고로 차범근이 경질 당하게 된 네덜란드 전에서 상대팀의 수장은 다름 아닌 거스 히딩크다. 그러나 차범근은 히딩크에게 매우 우호적인데, 자신이 불명예스럽게 해임되고 자격정 지까지 먹으면서 사실상 한국 축구계에서 매장 당한 와중 아들 차두리마저 세간의 눈총을 사지 않을까 우려했으나, 히딩크가 차두리를 대표팀에 전격적으로 발탁하고 월드컵 본선에까지 기용하면서 신경 써 줬기 때문이라고 하며 실제로 히딩크호가 2001년에 프랑스와 체코에 5:0 으로 내리 깨지면서 히딩크마저 오대영으로 통하며 숱한 비난을 받던 와중에도 당시 대표팀 기술위원장 이용수와 더불어 히딩크를 옹호해 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차범근이었으며,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직전의 SBS 특집 방송에서는 차범근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방문한 김에 히딩크를 직접 만났는데,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마냥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는가 싶더니만[100] 히딩크가 1998년 월드컵 때 이야기를 꺼내자 "그때 저를 정말 힘들게 하셨어요."라고 한 방을 날렸다. 물론 이 말을 들은 히딩크는 어쩔 줄 몰라하며[101] "그때 일은 잊어버리셔야 해요. 그때 네덜란드 멤버가 워낙 좋았거든요"라는 말과 함께 미안하다는 말로 사과했고, 나중에는 서로 그때를 얘기하면서 쩔쩔매기도 했다.
- 반면 월드컵 경력은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하나뿐이었고, 월드컵 직전 부상을 입었었던데다 이때의 조 편성마저 전전 대회 우승국 아르헨티나와 직전 대회 우승국 이탈리아가 포함되는 등 대진운이 지지리도 안 좋았던지라 큰 활약을 펼치기도 어려웠다. 실제로 본선에서도 세 경기에 나와 무득점에 그쳤다. 그러나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차범근에게 기본적으로 수비 두 명이 달라붙는 형태로, 저 강호들의 수비도 차범근을 1차적으로 막는데 초점을 두고 수비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일종의 어그로가 되며 최순호, 변병주, 김주성 등에게 조금 더 활발한 공간 침투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대한민국 대표팀이 사실상의 첫 출전[102] 대회에서 안 좋은 대진운 속에서도 4골이나 뽑아낸 이유였다.
- 소중한 날의 꿈에 캐스팅되었다.
- 피파 온라인 3에도 등장했다. 유럽 리그 레전드(팀명은 'EL') 멤버 중 한 명이다. 울리 슈틸리케, 히바우두 같은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초기 오픈빨을 빼고 거품이라고 가격이 폭락한 선수들이 많음에도 차범근은 만인이 인정하는 성능으로 초기 고가격대를 그대로 유지[103]했다. 일명 개떡 같이 줘도 찰떡 같이 골을 넣는다고 할 정도로 성능이 아주 출중하다.
- 2013년 10월 17일부터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라는 칼럼을 연재했다. 독자들의 평도 상당히 좋은 칼럼으로 유명하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 끝난 후로는 비정기적으로 기고한다. 링크.
- 1998년 국가대표 감독일 때는 서정원의 벤피카 진출에 대해서도 불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경향신문에는 "입단을 구걸하러 가서 무엇하겠습니까?"고 서정원이 속고 있다고 인터뷰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그래서 축구협회에 이적 동의서를 발급하지 않아서 벤피카로 가서 연습 경기까지 뛰던 서정원은 해외 진출이 무산되었다. 최강희와는 최강희가 선수 시절 얽힌 일 때문에 지금도 사이가 별로 안 좋다.[105] 하지만 서정원의 경우에는 차범근과 같이 월드컵 본선에 갔으며 수원 삼성 시절에도 2004년에 함께 리그 우승을 일궈냈으며 서정원이 감독되고 처음으로 우승컵을 얻은 2016년 FA컵 우승 시상식에서도 서정원을 안아주었다.
- 이임생은 김호 감독 시절 대표팀에 소집되어 훈련 중 고연전이 열려 무단으로 이탈한 탓에 그 후 국가대표에 소집되지 않았는데 차범근이 국가대표 감독일 때 다시 발탁했다. 이때 같은 고려대 선, 후배라서 다시 기용한 게 아니냐는 루머가 있었는데 이임생은 부천 르네상스의 핵심 수비수였으며 벨기에전 붕대 투혼과 수원 삼성에서의 수석 코치로 우승까지 함께 한 실적이 있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 쓸 만해서 썼다. 그리고 차범근은 국가대표 감독일 때 장대일도 발탁해 홍명보 대타라는 중임까지 맡겼는데 장대일은 고려대 출신이 아니다.
- 부자가 함께 대표팀에 발탁되어서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사례인 것은 맞지만 최초는 아니다. 최초의 부자 국가대표는 김찬기 - 김석원 부자로 김찬기는 1960 AFC 아시안컵 한국 우승을 이끈 멤버 중 한 명이고 김석원은 1979년과 1981년에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했고 이후에 국가대표에도 발탁된 인물. 다만 워낙 옛날 일이고 차범근 - 차두리 부자의 무게감이 엄청난지라 현재의 젊은 세대는 차범근 부자가 최초의 사례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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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를 같이 보낸 선수들 중에서 차붐이 존경을 표했던 선수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파울 브라이트너. 2013년 스포탈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선수 생활을 결산하면서 남는 아쉬움이 있다면?
-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땄다. 당시 결승 상대가 북한이었는데, 120분의 혈투 끝에 승부를 가리지 못해 공동 금메달을 받았다.[108] 다만 이 당시는 금메달을 획득하더라도 바로 전역시켜 주지 않아 차범근은 군 복무를 끝까지 채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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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와 재미난 언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디에고 마라도나와
지네딘 지단 둘 중 누가 더 축구를 잘하냐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서로 주고받는 말이 압권이다.
아빠 지단이랑 뛰어 봤어요? 넌 마라도나랑 뛰어 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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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막지 못한 단 한 명의 공격수에게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를 소유했다. 현재는 단종된 숏바디 모델이다. GE230 모델로 무려 구형 초록 번호판[109]이다! 벤츠사에서 리스토어를 해주었다. 영상 차범근은 이 차량을 받지 않고 기증했다. 다만 후에 밝혀졌지만 복원된 차량은 본인이 보유 중인 차가 아니라 동일한 모델로 연출된 것이다. 이는 위의 복원 영상 1:01에서 자막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실제 차범근의 차량은 중고로 매각되어 다른 사람이 보유 중이다.
- 2013년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UEFA컵 우승 25주년을 맞아 진행된 기념 행사에 차범근을 포함한 당시 우승 멤버들이 초청되었다. 해당 글[110]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이 한 해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대한축구협회장이 바뀌고 내부 임원이 대대적으로 갈리면서 그동안 대한축구협회와 갈등을 빚었던 차범근이 한 자리 맡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어떤 구체적인 자리에 선임된 것은 없었지만, 브라질 월드컵 예선 바레인전에 신임 협회장 정몽규와 나란히 경기를 관전하는 것이 TV에 잡혔다. 축구협회 임원진을 태운 전용기에 같이 동석하여 관람을 하고 왔다고 한다. 이로서 소문은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에서 그에게 어떤 직책을 내릴지 주목된다. 하지만 2014년 10월이 지나도록 차범근에게 어떤 직책이 주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그냥 축구협회가 그간 껄끄러웠던 차범근과 화해만 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 중. 그러나 이후 2017년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는 차범근 역사상 축구 관련 행정가로 처음 맡은 자리였다.
- 2014년 중 런닝맨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박지성 자선 경기에 교체 출전하여 25년 만의 경기 출전을 했다. 그의 라이브 경기를 본 올드 팬들도, 라이브 경기를 보지 못한 현 세대의 팬들, 그리고 수많은 축빠가 한 마음이 되어 차붐의 활약을 기대하며 동점골을 넣기를 바랐으나 인도네시아 올스타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뛰어 그다지 많은 기회를 받지는 못했다. 애당초 뛴 시간이 10여 분 남짓이었고 기대한 슈팅은 나오지 못했지만, 좌우 사이드를 가리지 않고 뛰고 중앙에서 킬 패스도 뿌리는 등 현역 시절 말기의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깝게 뛰며 클래스는 영원한 것을 보여주었다. 중간에 백 힐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해서 웃음을 주기도 하였다.
- 차두리의 은퇴식에서 전반 42분 차두리가 교체되어 나올 때 라커룸에서 차두리를 맞이하며 "이제 차범근 아들로 태어난 거 후회 안 하지?"라는 말을 했다. '차붐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에 평생을 짓눌려 살아온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느껴지는 말이다.
- 유럽에서 뛰면서 한국과 유럽의 축구 수준 차이를 여실히 느낀 차범근은 독일을 비롯한 축구 선진국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유소년 시스템을 확인하고 어릴 때부터 축구를 경험해야 이러한 유럽과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 은퇴 후 차범근 축구교실을 설립했다.
- 차붐은 별명을 넘어 칭호처럼 불리웠는데, 일단은 그의 이름 때문이다. 차범근의 로마자 표기는 'BUM KUN CHA'인데, 독일 사람들이 CHA가 성씨인 것은 알았지만 BUM KUN을 이어서 이름이라 생각하지는 못하고 KUN을 middle name으로 생각해서 생략해 버렸다. 한국처럼 성씨를 앞에 두니 CHA BUM이기에 독일식으로 읽으면 '차붐'이 된다. 영어로는 bum이 엉덩이를 뜻하는 속어라 좋은 의미가 아니지만 독일어의 bum은 대포 소리 등이 "쾅!"하는 의성어라서, 골을 뻥뻥 터트리면서 활약을 하자 널리 쓰이게 되었다.
- 화성시에서 서부로 일부 구간을 차범근로로 명명하려 했으나 논란이 일자 차범근 본인이 사양해 마무리되었다. 상세 내용은 화성시 차범근로 명명 및 취소 논란 참고.
- 2014년 분데스리가에서 공식 유튜브를 통해 역대 한국인 베스트 골 10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역대 골 TOP 10을 선정해 업로드하였는데,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한국인 베스트 골 중 3위와 8위를 했다. 영상, 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골 10위에 랭크되었다. 영상
- 2017년 8월 7일, 분데스리가 앰버서더로 임명되었다.
- 원투펀치 282회 3부 마지막에 Q : 차범근과 비교 대상이 될 현역 선수는 누구냐?는 질문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 받고 왠지 엄청나게 부담스러워했다. 계속 포지션이 달라서 누구를 특정할 수 없다며 말을 피하다가, 현역 시절 같은 포지션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케빈 키건을 비교하면서 당시 분데스리가에서는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공격수라는 점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루메니게만큼은 아니라고 언급하였다. 장지현의 의견으로 종합하면 "득점력이 아주 높지는 않지만 화려한 플레이를 하면서도 팬들을 즐겁게 해준 최고 레벨의 선수"라고 평가했고 한준희는 "다재다능한 공격수로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루메니게, 케빈 키건에 비견되는 선수다"라고 평가했다.
- 배성재와는 아버지와 아들과 비슷한 관계고[111] 박찬호와도 골프 치고 같이 집에서 장어구이 구워 먹는 사이인 듯. 칼럼[112] 배성재가 차범근이 자는 모습을 찍은 적이 있는데 '실신한 차범근'짤로 유명해졌다. 기사
- 독일에 'Bum Khun Cha Youth'라는 인디밴드가 존재한다. 밴드 명칭을 보면 알 수 있듯 멤버 모두 차범근 광팬으로, 차범근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밴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글1 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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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 맥주 광고에 나와서 질 거라는 생각을 뒤집어야 이길 수 있다는 멘트를 쳤는데,
진짜로 뒤집어버리며 졸지에 재평가가 되었다.
캐스터 : 자. 2018년 피파 월드컵 어떻게 보십니까?
차범근 : 저는 우리 선수들이 잘 할 거라 생각합니다.
캐스터 : 아 그런데 상대편이 너무 강해서.
차범근 : 바로 그 생각을 뒤집어야 합니다. 2002년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해보기 전까지 결과는 아무도 모르죠. 포기하면 이미 승패는 결정납니다.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뒤집어야 승리를 얻을 수 있죠. 이길 수 없는 상대란 없습니다.
안정환 : 뒤집어버려.
- 자신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있을 때, 월드컵 중도 경질에 가족 전체의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맹비난을 받은 경력 때문인지 해설할 때 선수들에 대한 비판을 가급적 삼간다. 평상시에도 감독 및 일부 선수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평소에 화를 잘 안 내는 성격임에도 언론사에서 분노라고 표현할 정도. 차범근의 메시지 "선수들의 용기, 밖에서 꺾지 말아라" 장현수·조현우 악플에 분노한 차범근…“선수들 독일보다 언어폭력에 겁 먹어”[113] 손석희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도 굉장히 조심스러워하고, 착잡해하면서 신태용의 감독 유임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114]
- 프랑크푸르트 최다 출전 기록 보유자인 쾨벨이 루카 요비치의 활약상을 보고 차범근의 재능과 게르트 뮐러의 체격을 합친 것 같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는 요비치의 뛰어남을 알 수 있는 발언인 동시에 차범근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
- 2018년 9월에 열린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에 문화 대표단 일원으로 방북했다.
- 2018년 11월 3일 전 소속 구단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해외 앰버서더로 임명되었다. 함께 임명된 다섯 레전드 중에는 제이 제이 오코차도 있는데, 이들이 함께 셀카를 찍은 사진 또한 공개되었다. 중국의 양첸은 먼저 잡힌 일정 때문에 불참했다. 기사
- 2019년 11월 독일 정부로부터 공로십자장을 받았다. 차범근은 외국인이라서 주한독일대사관에서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 2020년 유럽 축구 통계 사이트 트랜스퍼마르크트에 따르면 차범근과 차두리 부자가 세계 축구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A매치 출전 합산 기록 1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기사 2021년 현재까지도 1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2위인 슈마이켈 부자가 아직 현역인 카스페르 슈마이켈 덕에 1위로 올라서며 차범근 부자는 2위로 내려왔다.
- 2021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후드티와 티셔츠 등 이른바 차붐 컬렉션을 제작해 공식 온라인 스토어에서 판매한다. 기사1 기사2
- 박항서와 경신 고등학교 5년 선후배 사이다. 차범근이 1972년 졸업생(65회)이고 박항서가 1977년 졸업생(70회)이다. 이 때문에 2008년 K리그 리그컵 결승전에서 격돌할 때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기사
- 손차박 논쟁의 당사자 중 유일하게 성인 대표팀으로 아시아 대회 우승 경험이 있다. 박지성의 경우에는 아시안컵에서 두 차례 3위를 기록하고 손흥민은 아시안컵 준우승 및 아시안 게임(U-23) 우승 기록이 있는 반면 차범근은 국가대표로 나선 1978년 아시안 게임(당시 성인 대회)에서 북한과 함께 공동 우승했다.
- 현역 시절에 달았던 배번 11번은 차범근 이래로 에이스의 상징으로 여겨지는데 로마자로 따져 보면 K다.[115]
10. 둘러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스태프 팀 | 국적 | |
감독 | 디노 토프묄러 (Dino Toppmöller) | ||
수석 코치 | 슈테판 부크 (Stephan Buck) | ||
크사버 젬브로드 (Xaver Zembrod) | |||
얀 피서 (Jan Fießer) | |||
수석 코치 (분석) | 넬송 모르가두 (Nélson Morgado) | ||
골키퍼 코치 | 얀 치머만 (Jan Zimmermann) | ||
헤드 코치 | 샤리아르 비그델리 (Schahriar Bigdeli) | ||
코치 | 마르쿠스 무러 (Markus Murrer) | ||
마르틴 슈포러 (Martin Spohrer) | |||
토마스 피츠케 (Thomas Pitzke) | |||
안드레아스 베크 (Andreas Beck) | |||
잠재 개발 코치 | 마르틴 닥슬 (Martin Daxl) | ||
아카데미 전환 코치 | 랄프 구네슈 (Ralph Gunesch) | ||
기능 팀 | |||
팀 매니저 | 크리스토프 프로이스 (Christoph Preuß) | ||
경기 분석 책임자 | 마르코 슈스터 (Marco Schuster) | ||
경기 분석가 | 세바스티안 살림베니 (Sebastian Saglimbeni) | ||
니클라스 란버 (Niklas Lanwehr) | |||
마르코 루스 (Marco Russ) | |||
경기 분석가 (골키퍼) | 요나스 가비 (Jonas Gabi) | ||
장비 관리책임자 | 프랑코 리온티 (Franco Lionti) | ||
장비 관리자 | 카이 슐마이어 (Kay Schulmeyer) | ||
이고르 시모노프 (Igor Simonov) | |||
릴랴나 스브르코타 (Ljiljana Svrkota) | |||
통역사 | 슈테파네 괴데 (Stéphane Gödde) | ||
이사회 | |||
이사장 | 페터 피셔 (Peter Fischer) | ||
의장 | 필리프 홀처 (Philip Holzer) | ||
부의장 | 악셀 헬만 (Axel Hellmann) | ||
단장 | 마르쿠스 크뢰셰 (Markus Krösche) | ||
행정 지원 | 올레 지겔 (Ole Siegel) | ||
라이너 팔켄하인 (Rainer Falkenhain) | |||
CFO | 올리버 프랑켄바흐 (Oliver Frankenbach) | ||
경기장 상무이사 | 율린 참베르크 (Julien Zamberk) | ||
메디컬 팀 | |||
메디컬 디렉터 | 크리스티안 하저 (Christian Haser) | ||
팀 닥터 | 플로리안 파프 (Dr. Florian Pfab) | ||
파비안 플라헬 (Fabian Plachel) | |||
물리치료사 | 파트리크 쿡스 (Patrick Kux) | ||
니클라스 마체크체크 (Niklas Mazeczek) | |||
루카스 트리텔 (Lucas Trittel) | |||
다니엘 크라프트 (Daniel Kraft) | |||
의료진 | 쿠로카와 코이치 (Koichi Kurokawa) | ||
간호사 | 아나 판데르펠던 (Anna van der Felden) | ||
재활 코치 | 벤야민 조머 (Benjamin Sommer) | ||
과학 부서장 | 빈프리트 반처 (Winfried Banzer) | ||
영양사 | 안나 레나 판데르펠던 (Anna Lena van der Felden) | ||
스카우트 팀 | |||
스포츠 디렉터 | 티모 하르둥 (Timmo Hardung) | ||
헤드 스카우트 | 니콜라이 아담 (Nicolai Adam) | ||
스카우트 | 칼리트 다오우 (Khalid Ddaou) | ||
리차르드 (Richard) | |||
뵈른 안데르존 (Björn Andersohn) | |||
루돌프 고레스 (Rudolf Gores) | |||
데니스 호프만 (Dennis Hofmann) | |||
스카웃 코디네이터 | 제바스티안 프랑크 (Sebasitan Frank) | ||
마케팅 팀 | |||
언론 담당자 | 바르토시 니에즈비에츠키 (Bartosz Niedzwiedzki) | ||
서포터 연락 담당자 | 마르크 프란치스 (Marc Francis) | ||
마케팅 스태프 | 알렉산더 슈어 (Alexander Schur) | ||
미디어 제작자 | 카르슈텐 크노오프 (Carsten Knoop) | ||
마르크 힌델랑 (Marc Hindela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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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 (Cha Bum-kun) | ||
아카데미 스태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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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19 감독 | 공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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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17 수석 코치 | 알렉산더 마이어 (Alexander Mei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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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성군의 시 승격은 2001년, 태안읍의 동 전환은 2006년에 이뤄졌다.
[2]
공식 기록은 179cm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작다고 한다.
인터뷰 기사
[3]
대한축구협회 기록.
링크
[4]
https://m.cafe.daum.net/ppyd/IKDb/7317
[5]
클럽팀에서는 대부분 투톱의
중앙 공격수로 현대의
세컨드 스트라이커(공격형 미드필더와 유사)처럼 뛰었으며
4-3-3을 쓸 때는 원톱으로 뛰기도 했고 30대에 들어서는 윙어로도 뛰었다. 말년, 은퇴 직전에는
미드필더,
풀백으로도 뛰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주로 오른쪽
윙어로 뛰었고 1977년부터는
김재한과 투톱, 김재한과 뛰지 않을 때는 원톱으로도 뛰었다.
[6]
리그 한 경기만 치르고 병역 문제로 계약 파기.
[7]
레전드 네트워크 앰버서더
[8]
인터내셔널 브랜드 앰버서더
[9]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
홍명보와 공동 1위 (
FIFA 공인 기록 기준 3위), 역대 최다 득점 1위. 한동안 공식 기록은 121경기 55골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4년 11월 4일 축구협회가
데이터베이스 조사를 통해 누락된 기록을 포함하면서 '136경기 58골'로 수정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FIFA에서 A매치로 인정하지 않는 올림픽 축구 지역 예선 경기 6경기(2골)를 포함한 것이어서 FIFA는 일부만 인정하여 결론적으로
130경기 56골이 FIFA 공식 기록이다. 대한축구협회 자체적으로는 '136경기 58골'로 기록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선수별 A매치 기록 참고. 차범근은 1972년에 데뷔해 1979년 서독 진출 전까지 국가대표를 뛰었고, 이후 1986년 대한민국이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면서 국가대표에 복귀하기 전까지는 차출이 어려워 A매치에 뛸 수 없었다.
[10]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소재의 충신교회에서 안수집사를 맡고 있다.
[11]
차범근보다 3살 연하라고 알려져 있으므로 1956년생이다.
[12]
차두리가 본인보다 두 살 많다고 했으므로 1978년생이다.
[13]
분데스리가 데뷔 나이는 만 25세이나 당시 소속 구단이었던
다름슈타트에서 그 데뷔 경기밖에 못 뛰고 바로 한국으로 복귀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선수 경력 문서에 서술.
[14]
24세 139일,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
[15]
서독으로 진출한 이후 국가대표팀에서는 한동안 뛰지 못했고
1986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자 복귀해 본선 3경기를 뛰었고 대표팀을 은퇴했다.
[16]
현재
UEFA 유로파 리그의 전신. 단 유로파 리그보다는 위상이 높은 대회였다.
[17]
1987년부터 윌리 립펜스의 92골을 넘어서며 98골로 최다 득점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이는 차범근 은퇴 당시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이었고 이 기록은
스테판 샤퓌자가 1998년에 99호 득점을 넣을 때까지 11년간 깨지지 않았다.
[18]
독일의 대표적인 축구 매체
kicker 선정. 키커 선정 베스트 11이 분데스리가 마니아 사이에서는 그 선정 방식에 논란이 되기는 하나 전통적으로 분데스리가의 베스트 11을 선정한 매체는 키커와
Bild였다. 키커는 또한 랑리스테에서 1979/80 시즌 전반기에 차범근을 월드 클래스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19]
1987년부터 윌리 립펜스의 92골을 넘어서며 98골로 최다 득점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이는 차범근 은퇴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이었고 이 기록은
스테판 샤퓌자가 1998년에 99호 득점을 넣을 때까지 11년간 깨지지 않았다.
[20]
대한축구협회의 공식 기록이며
FIFA의 공식 기록은 130경기 56골이다. 대한민국 남녀 통합 축구 국가대표 A매치 최다 득점자였으나 2021년 9월 17일 2022 아시아 축구 연맹(AFC) 여자 아시안컵 예선 몽골과 E조 1차전에서
지소연이 경신했다. 무엇보다
공군 축구단에서 군 복무(27개월+5개월)를 하고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후 만 26세의 나이로 분데스리가에서 뛰기 시작했기에 더욱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군 복무가 아니었다면 더 일찍 유럽 축구 무대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렇게 됐다면 유럽에서 더 뛰어난 활약과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실제로 27개월 단축 군 복무 후 분데스리가의
SV 다름슈타트 98에서 데뷔 전까지 성공적으로 치렀으나, 군 복무 단축에 대한 논란이 생겨 남은 5개월 군 복무 기간을 끝내야 했기 때문에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21]
대한 축구 협회 기록 기준. FIFA 공인 기록은 130경기 56골이다.
[22]
남녀 축구 선수 통합 최다 득점 기록이었으나 2021년 여자 축구 선수 지소연이 경신했다.
[23]
1978년 다름슈타트 시절은 12월 30일에 첫 경기를 가진 후 군 문제로 계약 취소 및 국내로 돌아갔기 때문에 사실상 본격적인 분데스리가 경력이 시작되는 건 프랑크푸르트 시절인 1979년부터로 햇수로 11년이라 보는 경우가 많다.
[24]
2021년 7월 기준 외국인 선수 역대 18위
[25]
2021년 8월 기준 외국인 선수 역대 8위. 당시 기준 분데스리가 역대 통산 득점 28위였다. 2021년 8월 기준으로 55위
[26]
페널티 킥을 모두 실축했다는 것이 아니라 페널티 킥을 아예 차지 않았다는 의미다. 고교 시절 페널티 킥을 실축한 이후 트라우마가 생겨 프로 선수가 된 이후론 한 번도 페널티 킥 키커로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국가대표 선수 시절에는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고 경기가 끝나고 중계 아나운서와 현장 인터뷰를 한 기록이 있다. 1977년 4월 3일에 벌어진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조 예선 최종전인 일본과의 2차전이다. 경기 종료 6분을 남기고 차범근이 페널티 킥을 성공시켜 1:0으로 이겼다.
기사
[27]
한동안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는 정보가 돌아다녔는데 실제로 레버쿠젠 시절 85/86 시즌 분데스리가 13라운드 브레멘전에서 5:1 승리 당시 해트트릭을 했다는 국내 기사가 존재한다. 다만 아쉽게도 실제 해트트릭을 기록하진 않았는데 당시 전반전에 멀티골을 기록하고 후반전에 추가로 넣은 한 골이 자책골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중계하던 독일 캐스터조차 차범근이 골을 넣었다고 멘트를 할 정도로 굉장히 애매한 판결이었다. 참고로 자책골로 기록된 선수는 역대 분데스리가 통산 출전 순위 5위(546경기)에 빛나는 독일 레전드 미로슬라프 보타바(Miroslav Votava)이다.
[28]
과거 농구의 필리핀이 그러했듯이 이때의
말레이시아는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다. 모든 과거의 강호가 그러하듯
높으신 분들이 망쳐놔서 지금은 아시아에서도 하위권이다.
[29]
사진은
바이어 04 레버쿠젠 시절이다. 눈여겨봐야 할 곳은 대퇴 사두(오른쪽 전방)가 아니라 대퇴 이두(왼쪽 뒷부분) 부분이다. 보통은 운동선수라도 저렇게 튀어나올 정도로 단련하기 힘든 부분이다.
[30]
맨 위 사진은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생각하면서 보면
분위기가 좀 묘하다. 현역 시절 뢰브는 차범근의 백업 선수였다. 하지만 차범근은 그에게 잘 대해줬고 때문에 뢰브는 지금까지 차범근을 좋게 생각하고 있다.
[31]
훗날 핑안은 보험 회사에서 외연을 확장해 중국 최상위급 금융 회사가 되며,
김판곤이
아랫동네 대표팀을 감독으로 이끌게 되었다.
[32]
본인 스스로 중국으로 귀양갔다고 표현을 한 바 있다. 대표팀 실패의 책임을 전부 뒤집어 쓴 상처가 깊었던 듯하다.
칼럼
[33]
허정무가 이끌던 대표팀이
2000 시드니 올림픽과
2000년 AFC 아시안컵에서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서 차범근에 대한 동정 여론이 많아지던 시기였다.
[34]
여담으로 이때 고려대 동기(72학번)인
허구연(2살 연상)이 차범근을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해설가는 선수 출신이 잘하는 거라고. 훗날 경남 지역에 있던 강연에서, 허구연은 대학 시절 차범근이 고려대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회고하며 역사상 최고의 프로 선수를 차범근이라고 언급하였다.
당시 강연 내용
[35]
2014년 풋볼리스트에 차범근이 연재한 칼럼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에서 발췌
해당 글
[36]
레버쿠젠의 모기업 바이엘이 바로 아스피린의 제조사다.
[37]
거기에 추가로 중간중간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잦은 편이었다.
[38]
옳던 그르건 자기 맘에 안 들면 히딩크부터 시작해 죄다 깠던
조광래와는 성격이 정반대다. 아스날에서의 부진과 군문제로 인해 여론의 질타를 받던 박주영조차 최대한 감싸고 기운을 북돋아주려 했고, 월드컵 전부터 졸전을 거듭하던 대표팀에 대해서도 해설이나 칼럼에서 비판하는 것은 자제했다.
[39]
본인이 지도자로 오래 재임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게리 네빌이 해설자하며 벵거를 비롯한 감독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니 무리뉴가 현장의 축구는 화면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는 요지로 한 소리 했는데 같은 이치다.
[40]
비선수 출신들은 잡다한 상식이 많고 말을 잘하나 경기 보는 눈이 떨어져서 해설이 안 되는 경우가 많고 선수 출신들은 아는 건 많은데 말로 표현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41]
또한 더 나아가서 매니아들은 직설적인 걸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 매니아들 가운데에서도 진짜 끝까지 가서 객관적으로 잘하고 못하고가 보여서 레전드 선수의 해설에 확실하게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매니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냥 자기들 비위에 맞는 소리나 직설적으로 해 달라는 얘기에 가깝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해설하면 그 매니아들로부터도 비난이 쇄도해 해고된다. 까고 말해서 코어 팬들의 경기 읽는 수준이 야구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42]
이 경우는 얼굴은 아나 순간적으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다.
[43]
이런류의 최악의 해설이
이상윤. 선수 프로필 읽고 잡스러운 얘기는 많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경기 해설을 못한다.
[44]
그러나 차범근보다는 브라질이 훨씬 더 참혹한 상황이었다. 차범근이 겪은 대패는 그래도 전반 40분 가까이 무실점이었다가 2골을 허용한 것이었다. 또한 브라질과 독일보다 대한민국과 네덜란드의 실력차가 훨씬 더 컸다. 차범근이 잘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여론이 현실을 인정할 줄 몰랐다.
[45]
2006년 독일 월드컵 8강전 독일vs아르헨티나 경기 해설 중 연장전에 접어들자, 우스갯소리로 본인 스스로가 해설자로서 그러면 안 되는데 마음이 자꾸 독일 쪽으로 기운다고 인증한 적도 있다. 당시 옆에 있던 캐스터는 김성주.
[46]
독일이 골을 넣으면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다르다거나 상대방이 완벽한 찬스를 맞이했을 때 '위험해요!'라고 외친다던가.
[47]
공교롭게도 독일은 차범근이 해설을 그만둔 이후 치러진 두 번의 월드컵에서 두 번 모두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는 망신을 당했으며, 심지어 2018년은
차범근의 고국팀에 0:2로 져서 조 꼴찌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했다.
[48]
이때는 A매치로 인정되는 성인 대회였다.
[제외내용]
당시의 기사 출처가 없으나 소문만으로 퍼진 수상 내역으로는 프랑스 풋볼 세계 4대 축구인(연도 불명),
Kicker 80년대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1위(1989),
UEFA컵 결승 2차전 맨 오브 더 매치(1980)가 있다. 프랑스 풋볼 4대 축구인은 아래 수상 목록에 나와 있는 슈테른지 4대 상승 인물과 프랑스 메이어지에서 선정한 80년대 외국인 선수 1위가 와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UEFA컵 결승 2차전 맨 오브 더 매치는
위키피디아에 처음으로 서술되었고,
IFFHS가 위키피디아 내용을 인용하면서 소문이 퍼졌으나, 위키피디아가 이 내용의 출처를 첨부하지 않았으며, 당대에 UEFA가 UEFA컵 결승전의 최우수 선수를 선정했는지도 불분명하다.
[50]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51]
팬 투표로 진행되었으며 출처는 링크된 문서 구단과 팬들의 평가 참조
[52]
차범근이 독일 올해의 선수(분데스리가 MVP)로 선정되었다는 정보는 날조다. 분데스리가 공식 MVP가 아니라 지금은 폐간된 서독 지역 언론사 선정 MVP였으며 실제 1986년 독일 올해의 선수는
토니 슈마허이다.
[53]
서독과 동독으로 나눠져 있던 독일이 통일한 뒤 처음으로 동서독 출신의 선수들이 한 팀으로 뛴 경기로 세계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동독 지역의 드레스덴시의 재건을 위해 개최된 자선 경기다. 차범근은 이 경기에서
바비 무어와
자이르지뉴,
마리오 켐페스,
요니 렙 등이 포진된 세계 올스타팀에 뽑혀 동서독 연합 대표팀과 경기를 펼쳤고 2골을 넣는 활약과 함께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54]
베스트 11에는 들지 못했으며 서브에 포함되었다.
[55]
K리그 감독 15명, 축구 해설 위원 5명, 기자 5명이 선정에 참여했다.
[56]
공식적으로 확인 가능한 어시스트 5개 포함
[57]
이 기록은 2002-03 시즌 이란의
메흐디 마다비키아가 경신하게 된다.
[58]
2020년
하세베 마코토에 의해 경신
[59]
공식적으로 확인 가능한 어시스트 5개 포함
[60]
FIFA 공인 기록은 130경기
[61]
FIFA 공인 기록은 56골. 남자 축구 선수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녀 통합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나 2021년 지소연이 경신했다.
[62]
11년 후
스테판 샤퓌자에 의해 경신. 2021년 8월 기준 8위
[63]
92/93 시즌
울프 키르스텐에 의해 경신. 현재 역대 6위
[64]
88/89 시즌부터 외국인 선수 부문이 폐지되었다.
[65]
한국인이 유럽 클럽에서 300경기 넘게 출전해 100골 이상을 넣었다는 유일무이한 기록은 30년이 흐르고 나서야
후배에 의해 깨지게 된다.
기사
[66]
1979년 분데스리가 진출 후 국가대표 잠정 은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로 국가대표 복귀. 대한축구협회 기준 경기/골 기록
[67]
대한민국 매체들은 훈장의 등급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으나
훈장의 형태를 볼 때 5등급인
공로십자장(Verdienstkreuz am Bande)으로 추정된다.
[68]
축구인 최초.
[69]
차범근의 이야기를 엮은 장편
라디오 드라마
[70]
다름슈타트에서 첫 경기 후 지역 방송에 편성된 차범근의 이적 및 경기 활약상을 다룬 15분짜리 특집 방송이다.
[71]
차범근이 부당하게 차징 당하는 장면을 모아 차범근의 보호의 필요성과 와일드차징의 부당함을 다룬 특집 방송이다.
[72]
갤스도르프에 의해 큰 부상을 당한 차범근을 다루고, 분데스리가 파울 완화 캠페인을 목적으로 제작된 토크쇼이다. 차범근이 직접 출연했다.
[73]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활약상을 소개한 30분짜리 특집 방송이다.
[74]
차범근의 레버쿠젠 이적 과정과 활약상을 담은 특집 방송
[75]
대표적으로 1978년, 1979년 발롱도르 수상자
케빈 키건이 있는데
말보로 광고 계약을 비롯해 1981년 한 해 동안 광고로만 3억 원이 넘는 수익을 내어 당시 영국 운동선수 중 최고 수익을 내었다.
[76]
남양유업 광고료다.
[77]
해태제과 광고료
[78]
당시 차범근은
바이어 04 레버쿠젠 소속으로 뛰고 있었고, 모기업인
바이어가 저 당시에 이미 한국바이엘약품으로 진출했기에 한국바이엘약품 쪽의 광고를 찍을 법했겠지만 이 기업의 광고가 없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79]
다만 광고 수입이 최상위에 해당하지는 않았다. 광고 한 편의 단가는 가장 높았지만 스케줄 상 한국에서 많은 광고를 찍을 수는 없었어서 광고를 업으로 삼는 연예인이나 찍을 기회가 많은 국내 스포츠 스타들에 비해 총 광고 수익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80]
다만
마라도나의 경우에는 차범근의 협상이 결렬되자 대체자로 데려온 것이기 때문에 말디니의 데뷔만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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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의 시발점이자 동독
SED의 당 서기인
귄터 샤보프스키가 기자 회견을 가진 게 1989년 11월 9일 오후 6시였으니, 이때는 한국 시각으로 이미 11월 10일로 넘어갔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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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운동선수의 신체 능력은 20대 초중반이 전성기인데, 당시 현역 운동선수인 20대의 차두리가 40대인 아버지에게 뒤졌다는 충격적인 말이다. 게다가 차두리가 한국 국가대표 선수를 통틀어
독보적인 체격과 체력을 자랑하는 선수라는 것까지 고려하면 정말 엄청난 신체 스펙이다.
[83]
팀의 주장이자 원클럽맨
위르겐 그라보브스키를 비롯한 노장 선수들을 방출하고 새롭게 재편하겠다는 라우쉬 감독에 따른 갈등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선수 경력 참조
[84]
연세대학교 종교 음악과 출신으로, 차범근과는 미팅으로 처음 만나 결혼했다. 1970년대에 여성이 대학을 다녔다는 건 상당히 좋은 집안이 아니었다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차범근 또한 곱게 자란 아내가 이 시기에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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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서 유명한 이야기로는 차범근은 자동차를 상당히 좋아해 만약 오은미가 돈 관리 안 했으면 자긴 진작에 집안에다가 각종 차를 종류별로 모아 놨을 거라고 한 이야기. 차범근이 오은미와 차를 사러갔다가 축구장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에 포기했다고 하며 그렇게 만든 게 경기도 연천의 축구장이다.
[86]
참고로 아래 사진은 저출산 광고를 찍기 위해 따로 찍은 사진이 아니라 당시 서독의 스포츠 전문 잡지 중 하나인 푸스발 보헤에서 차범근을 1979년 스타 플레이어로 선정하며 성탄절 특집 기사에 차범근의 자필 편지와 함께 기재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다. 한마디로 차범근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족 사진을 정부 마음대로 저출산 공익 광고에 가져다 쓴 것이다. 당연히 셋째는 낳지 않겠다는 말도 차범근 본인이 한 말이 아니다.
[87]
태어났을 때, 뉴스 제목이 '차붐 할아버지 되다'인데 당시 차범근의 자녀로서는 차두리의 인지도가 워낙 압도적이었던 탓에 딸이 있는 줄 알 리 없었던 네티즌의 상당수는 제목만 보고 '차두리(당시 미혼)가 사고친 줄 알았다.'고 댓글을 남겼다.
[88]
여아인 첫째의 이름은 '아인'이다. 독일어(Ein)로 1.
[89]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직전에 수원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지네딘 지단이 교체되는 것을 보고 그가 부상 당했다고 해설했으며, 그 말이 정확했다. 또한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미하엘 발락이 결승골을 넣기 불과 몇 분 전에 "지금 상황은 절대로 조심해야 합니다. 단 한 방으로 경기가 끝날 수도 있거든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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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차범근 개인의 인성이 좋은 일화로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차범근의 아들 차두리를 히딩크가 대표팀에 발탁한 것도 있다. 즉 히딩크와의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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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차두리는 축구 전문 언론인을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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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뉴를 아는 사람은 알테지만, 축구계에서 자존심과 고집만큼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강단 있는 감독이다. 그런 그가 먼저 다가와 차범근에게 악수를 청했으며, 허리를 숙여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93]
당시 차범근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력을 비판했는데, 당시 독일 국가대표 감독이던 루디 푈러는 차범근의 선수 시절 소속 구단 레버쿠젠의 모기업이 제약사인 점을 이용해 "아스피린을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님?"이라는 농담을 했다가 자국인들에게 대차게 욕을 얻어먹고 찾아가서 사과했다고 한다. "감히 차붐을!"이라는 느낌보다 농담이라도 너무 심한 말 아니냐는 비난과 경기력에 대한 비난을 함께 받았다. 이후 차범근도 훈련장을 가서 사과하고 시시덕거렸다고 한다.
[94]
월드컵을 비롯해 해설가로서 활동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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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촌동 충신교회
안수집사이다. 차범근의 신앙 생활은 국내 개신교계 내에서는 워낙 유명한 사실이다. 현역 시절 다른 동료 선수들이 성인 잡지를 볼 때 차범근은
성경을 읽었다는 전 동료의 증언도 있다. 출처는 2013년, '안정환의 사커 앤더 시티 2화 차붐의 도시에서 손흥민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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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반대로 김도훈이
불교, 최용수가 개신교이며, 만약 진짜로 종교 때문에 최용수를 기피했다면 최종 예선에서 줄곧 최용수를 기용했을 턱이 없다. 실제 최용수의 컨디션이 떨어져 있던 것은 이후 경기에서 출전한 최용수의 폼으로 쉽게 알 수 있다. 고정운 또한 잘 내보내다가 일본전에서 선제골을 허용한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낙마한 것이지 그 전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기용했다. 참고로 고정운도 김도훈처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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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동대문구에서
성남시에 이르기까지 일화 축구단에는 통일교 신자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오히려 태반이 개신교 신자다.
드래프트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입단하는 것도 있지만, 구단 측에서도 선수들을 종교 가지고 흔들지 않았다.
[98]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배성재는 사내 선발을 거쳐 중계를 처음 맡은 상황이었다.
[99]
그리고 SBS는 축구뿐만 아니라 야구에서도
이순철-
정우영 콤비로 스포츠 중계의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100]
참고로 통역 없이
독일어로 대화했다. 히딩크는
네덜란드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다국어 구사가 가능한데 그 중 하나가 독일어고(독일어와 네덜란드어는 친연 관계에 있는 언어라 네덜란드인과 독일인은 어느 정도의 학습만 하면 서로의 언어를 쉽게 구사할 수 있다.), 차범근이야
분데스리가 시절에 독일어를 섭렵해 놓았다.
[101]
이때 히딩크는 방송 스탭에게 이 부분을 편집해 달라고 요청했다.
[102]
첫 출전이 1954년이었으니 선수단엔 월드컵을 경험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103]
60억
야프 스탐의 뒤를 잇는 50억대의 가격대로 2위를 유지 중이다. 월드 레전드 선수를 포함하더라도 엄청난 상위권. 참고로 다른 유럽 리그 전설 선수들은 스탐을 제외하고 20~30억대, 심하면 10억 이하로 폭락했다.
[104]
차범근이 1997~1998년 중 날짜 미상의 '전경'지에 기고한 글 중에서
[105]
이 건에 대해선 선수 시절 자기 관리 개판으로 유명한 최강희 잘못이라는 게 축구계 중론.
[106]
루메니게와 브라이트너라는 이름만 듣고 감이 안 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둘 모두 뮌헨 명예의 전당에 오른 레전드다. 루메니게는 발롱도르 2회에 빛나는 80년대 최고의 공격수였고 브라이트너는 수비수의 위치로 발롱도르 2위까지 오른 당대 최고의 사이드백. 현 시대의 선수로 따지면 각각 레반도프스키와 람 정도가 비견될 만하다. 참고로 이 중 루메니게는 현 뮌헨 CEO를 맡고 있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한국인이 '좀만 더 노력했으면 레반도프스키급도 될 수 있었는데 아쉽게 그 바로 아래 급에서 멈춰버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서운 건 이 말을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차범근은 군 문제로 3년을 낭비하고 독일 진출이 한 차례 무산되기도 하면서 독일에 진출하는 게 많이 늦어졌다. 26살에 진출했는데 만약 차범근이 20대 초반에 빠르게 독일에 진출해 선진 축구를 경험했다면 더 엄청난 경력을 쌓았을 수도 있다.
[107]
대표적으로
마인츠에서 뛸 당시의
박주호. 2014 브라질 월드컵 특집 다큐에서 차범근이 마인츠에서 뛰는
구자철과 박주호를 찾아갔는데 박주호가 발가락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자 들고 간 것이 하리보였으며 병실에서 나가기 전 "꼭 먹어"하며 챙겨주는 부분에서 하리보 사랑을 엿볼 수 있다.
[108]
당시
승부차기 제도가 국제 축구 대회에 적용된 게 2년밖에 안 된 상태고, 당시에
UEFA 유로,
FIFA 월드컵을 제외하고는 국제 축구에서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36년 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결승 당시 남북전이 다시 성사되었는데, 이번에는 대한민국이 120분간의 혈전 끝에
임창우의 극적인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해서 28년 만에 금메달을 얻었다.
[109]
1973년 제정되어
1995년까지 쓰인 번호판으로, 이런 번호판이 달린 차는 못해도 20년이 넘은 차이다.
[110]
5년 뒤 진행된 30주년 행사에는 개인 사정으로 불참을 했다.
[111]
2014년 브라질 월드컵 특집 다큐에서는 배성재가 대놓고 "어엿한 이 집의 주워 온 아들"이라는 언급을 했고, 2016년에는
배성재의 TEN 방송 시작 때
전화 출연을 하기도 했다.
[112]
사진을 보면
장지현,
차두리도 보인다. 또한 SBS 스포츠국, 타 부서 구성원들과도 사이도 돈독해 PD와 잘 지내고 다른 사진에는
장예원,
박현석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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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격하게 반응했냐면, 칼럼이나 발언을 통해 축구 팬들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는데, 차범근이 누군가를 그것도 축구 팬에 대해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국 한국 대표팀이
독일을 꺾는 기적을 이뤄내자, 경기 후 라커룸으로 달려가 선수들과 펑펑 울었다고 한다. 경기 후 슛포러브 팀의
영상에 출연했는데,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차범근 본인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평소 점잖은 이미지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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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차범근과 신태용 둘은 사적으로도 교류하는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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