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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4:02:48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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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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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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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FIFA 월드컵 브론즈볼
파일:골든슈.png
1994 FIFA 월드컵 골든슈
[2]
파일:발롱도르 트로피.png
베스트팀
파일:1994_fifa_world_cup_logo.png
파일:UEFA 유로 1996 심볼.svg

1992 Ballond'or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3위
데니스 베르캄프
1992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3위
토마스 헤슬러
1994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호마리우
2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3위
로베르토 바조
1994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호마리우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로베르토 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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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3년 수상 당시 국명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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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불가리아의 국영방송 BNT 1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불가리아인 100명을 선정했다.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바실 레프스키 페터르 더노프 아스파루흐 시메온 대제 흐리스토 보테프
6위 7위 8위 9위 10위
보리스 1세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스테판 스탐볼로프 이반 바조프 파이시 힐렌다르스키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존 아타나소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바바 반가 토도르 지프코프 게오르기 아스파루호프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칼로얀 크룸 이반 아센 2세 블라디미르 디미트로프 이반 릴스키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아지스 이반 코스토프 알레코 콘스탄티노프 볼렌 시데로프 게오르기 벤코브스키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네노 유루코프 슬라비 트리포노프 니콜라 밥차로프 보이코 보리소프 릴리 이바노바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댄 콜로프 쿠브라트 톤카 오브레테노바 게오르기 라코브스키 페트코 보이보다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레이냐 크나기냐 발야 발칸스카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알베나 덴코바 게나 디미트로바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에블로기 아타나스 부로프 콜류 피체토 에밀 디미트로프 타르노보의 에우티미우스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사무일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게오르기 파트살레프 자하리 스토야노프 니콜라이 하이토프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오흐리드의 클레멘트 베셀린 토팔로프 요르단 요프코프 고체 델체프 페요 야보로프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라이나 카바이반스카 테르벨 아흐메드 도간 하지 디미타르 보리스 3세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네슈카 로베바 네베나 코카노바 보리스 크리스토프 요르단 라디치코브 야네 산단스키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디미타르 페셰프 엘린 페린 바질 아프릴로프 아포스톨 카라미테브 게오르기 퍼르파노프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딤초 데벨랴노프 자하리 조그라프 파나요트 볼로브 세르게이 스타니셰프 시메온 2세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루드밀라 지브코바 밀라디노프 형제 스테판 카라자 니콜라이 기아우로프 스토얀카 무타포바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디미타르 스피사네브스키 류벤 카라벨로프 스테프카 코스타디노바 흐리스토 스미르넨스키 게오르기 이바노프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페터르 베론 발레리 페트로프 게오르기 칼로얀체프 게오 밀레브 브라트사의 소프로니우스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에카테리나 다보프스카 디미타르 탈레프 토도르 알렉산드로프 펜초 슬라베이코프 필립 쿠테프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페르니크의 크라크라 이벳 라로바 파나욧 히토프 오무르타그 아센 즐라타로브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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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축구인
파일:스토이치코프 최신.jpg
이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Hristo Stoichkov | Христо Стоичков
출생 1966년 2월 8일 ([age(1966-02-08)]세)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플로브디프
국적
[[불가리아|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78cm
직업 축구 선수 (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헤브로스 하르만리 (1982~1984)
PFC CSKA 소피아 (1984~1990)
FC 바르셀로나 (1990~1995)
파르마 AC (1995~1996)
FC 바르셀로나 (1996~1998)
PFC CSKA 소피아 (1998)
알 나스르 FC (1998)
가시와 레이솔 (1998~1999)
시카고 파이어 SC (2000~2002)
DC 유나이티드 (2003)
감독 불가리아 대표팀 (2004~2007)
RC 셀타 데 비고 (2007)
마멜로디 선다운스 FC (2009~2010)
PFC 리텍스 로베치 (2012~2013)
PFC CSKA 소피아 (2013)
국가대표 83경기 37골[3] ( 불가리아 / 1986~1999)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성격6.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스토이치코프.jpg
불가리아의 전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

소피아에서 파르바 리가를 제패하고 바르셀로나로 이적해서는 팀의 에이스로서 라리가 4연패와 구단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국가대표팀에서도 1994 월드컵에서 득점왕에 오르고 불가리아를 4강으로 이끌면서 골든슈와 브론즈볼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발롱도르도 수상하였다. 애칭으로는 ' 소피아의 별', '단검(Камата), 개(Кучето)', '현대적 좌익수(Модерния ляв)', '총잡이(El Pistolero)'[4]가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헤브로스 하르만리에서 데뷔 후 불가리아의 클럽인 PFC CSKA 소피아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 지랄맞은 성질머리 때문에 1984-85 시즌 불가리안 컵 결승전에서 패싸움에 휘말리게 되며 무려 영구 출전 금지라는 징계를 당하게 되었으나 이후 징계는 한달 출장 금지로 줄어들었다.

1989-90 시즌에는 30경기 38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하고 UEFA 컵위너스컵에서도 득점왕을 수상하였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2690889b6434c5e02d1dec1de110e3c.jpg
당시 CSKA와 바르셀로나의 맞대결에서 스토이치코프를 눈여겨보고 있던 요한 크루이프 감독에 의해 FC 바르셀로나 스카우트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첫 시즌부터 주심의 발을 즈려밟았단 이유로 2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먹는 등 그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리그 14골과 컵대회 6골을 넣으며 UEFA 컵 위너스컵 준우승을 이끈다.

스토이치코프는 1991-92 시즌 라리가에서 17골을 넣으며 우승을 이끌었고, 유러피언컵에서 4골을 득점하며 바르셀로나에게 첫 빅 이어를 안겨주면서 그 해 발롱도르 2위와 FIFA 올해의 선수 2위를 기록한다. 1992-93 시즌에도 리그 20골을 넣으며 우승을 차지한다.
파일:external/www.syrbazaar.com/Romario.jpg
바르셀로나에서 황금 듀오였던 호마리우와 함께
이후 바르셀로나에 합류한 호마리우와 환상적인 공격진을 구성하여, 라리가 4연패를 이끌었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스토이치코프는 4강전에서 FC 포르투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며, 3:0 승리를 이끌어 결승 진출을 이끌었으나, 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4:0으로 대패했다.

이후 1995년 파르마 AC에서 한 시즌을 보내고 다시 바르셀로나에 돌아왔지만 루이 판할과의 갈등으로 1998년에 PFC CSKA 소피아로 돌아갔다가 여러 팀을 거쳐서 2003년 미국 DC 유나이티드에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클럽에서의 활약상도 대단했지만 국가대표 활약상은 말 그대로 더 레전드. 불가리아는 1994 미국 월드컵 이전까지 FIFA 월드컵 본선 무대에 총 다섯 번 출전했으나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단 한번 16강 진출에 그쳤으며, 심지어 직전 대회인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아예 본선 진출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그닥 별 볼 일 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불가리아는 말 그대로 전설을 써내려갔다. 조별리그 첫 경기인 나이지리아전부터 3-0으로 완패했으나[5], 두번째 경기 상대인 그리스를 상대로 스토이치코프는 페널티킥으로 두 골을 넣으며 4대0으로 완승을 거뒀다. 그러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상대는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있던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였는데, 스토이치코프는 멋진 선제골을 넣고 시라코프의 추가 골까지 어시스트하며 1골 1어시로 아르헨티나를 2대0으로 격파하고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토너먼트 16강에서는 멕시코를 상대로 또 한번 강력한 왼발슛으로 선제골을 넣으며 1-1에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만났는데, 로타어 마테우스의 선제골로 독일이 앞서가는 듯 했으나 스토이치코프가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넣더니 결승골까지 어시스트하는 원맨쇼로 2대1로 독일을 관광보내고 불가리아를 4강에 올려놓았다. 4강에서는 이탈리아을 만났는데, 로베르토 바조에게 2골을 허용해 뒤지는 상황에서 페널티킥으로 만회골을 넣었으나 승부를 뒤집지는 못하고 4강에서 탈락했으며, 3·4위 전에서도 스웨덴에게 4:0으로 완패해 스토이치코프의 도전은 아쉽게 4위로 마무리되었다. 대회 6골로 공동 득점왕으로 선정되었으며, 월드컵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발롱도르까지 수상하며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다.[6] 불가리아의 4강 진출은 현재까지도 불가리아 역사상 최고의 월드컵 성적으로 남아있으며, 이후로는 98년을 제외하면 2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단 한 번도 본선무대에 진출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마저도 98년에는 1무 2패로 광탈했기에, 불가리아는 94년에 기록한 본선 3승을 제외하면 월드컵에서 승리를 얻어본 적이 없다. 즉, 스토이치코프는 지금까지 불가리아가 월드컵에서 승리한 경기에서 모두 골을 넣은 유일한 선수이다.

비단 월드컵 뿐만이 아니라, UEFA 유로 1996에서도 스토이치코프는 조별리그에서 3경기 연속골을 넣으며 맹활약했지만 팀의 조별리그 탈락은 막지 못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다시금 조별리그 광탈을 경험하며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을 쓸쓸하게 마무리했다.

3. 플레이 스타일

공격수로서 필요한 능력을 모두 갖췄던 1990년대 바르셀로나의 에이스이자 1994년 발롱도르 수상에서도 보이듯이 호마리우, 로베르토 바조 등과 함께 그 시대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설이었다.

스토이치코프의 최고의 장기는 폭발적인 속력, 저돌적인 드리블 그리고 다양한 구질의 슈팅능력이었다. 왼발 프리킥이 단연 압권이었으며, 간결하고도 순간적인 침투로 수비 한두명을 무력화시키는 움직임과 한두명 정도는 제칠수 있는 개인기와 수려한 골 결정력, 이타적인 어시스트 능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필요할 때에는 준수한 피지컬과 악바리 근성을 앞세워 터프하게 치고 받으면서 돌파하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왼발잡이였음에도 오른발도 괜찮게 사용하는 등 공격수로서 완전체에 가까웠던 만능 선수. 전반적으로 스토이치코프의 축구적 천재성은 그 특유의 악바리 근성과 맞물려서 최고의 시너지를 냈다.

주로 중앙 및 좌측면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불가리아 리그에서는 거듭된 징계에도 불구하고 38경기 30골을 때려박는 넘사벽의 활약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좌측 공격수를 찾던 요한 크루이프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며 호마리우와 전설적인 영혼의 듀오를 결성, 바르셀로나 드림팀의 성공을 이끌게 된다. 다만 당시 중앙 공격수는 미카엘 라우드루프였기도 하고, 스토이치코프 본인이 다재다능한 공격수였기 때문에 보다 창의적인 롤도 자주 맡았으며 주로 좌측 윙포워드로 나왔지만 높은 전술 이해도로 우측 윙포워드와 자주 스위칭을 하는 움직임을 가졌다. 굳이 오늘날의 공격수와 비교하자면 슛과 드리블 능력을 겸비한 강한 에고의 공격수라는 전반적인 이미지에서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제일 비슷하고, 저돌적으로 치고들어와서 왼발 한방으로 어디서든 때려박는 모습은 아르연 로번과 제일 흡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특유의 다혈질적인 성격때문에 '분노조절장애'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언제나 클럽 입장에서는 골칫거리, 팬들에게는 가십을 제공하는 스타라는 두 얼굴을 갖고 있었다. 커리어 초 CSKA 소피아 시절에는 유럽대항전 6인 난투극을 벌이는가 하면 1996년엔 마르셀 드사이에게 인종차별을 시전했고, 말년에 미국에서는 대학생 축구선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거친 태클을 하는 바람에 고소를 당하는 등 팀 입장에서는 폭탄이었으며 남들이 안정적으로 커리어 이어나갈 때 뜬금없이 다른 리그로 이적해버리는 등 이해할 수 없는 괴짜짓을 많이 했다. 이 반골기질 때문에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저니맨이 되었으며, 후대의 평가에 있어 다소 낮게 평가될 여지를 스스로 제공한 것은 분명한 마이너스이다.

그래도 어찌되었건 공격수로서의 기본기가 워낙에 탄탄하니 무려 8개의 클럽을 돌아다닌 저니맨이었음에도 어떤 팀에 갖다놔도 잘하는 든든한 국밥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말년에 폭발적인 스프린트 능력을 잃어버린 미국 무대에서도 대포알같은 슛과 번뜩이는 컨트롤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으니, 스토이치코프의 재능과 역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성격

스토이치코프는 스타가 즐비했던 90년대에서도 단연 최고 중 하나였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선수지만, 그와 반대로 인격적인 면에서는 큰 결함이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역 시절이나 지금이나 다혈질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파트너로 호흡을 맞추던 호마리우나 감독이었던 요한 크루이프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게으름뱅이였다고 한다. 거기다 피치 위에서의 다혈질 성격으로 몹시 유명했다. 주심과 상대팀에게 큰소리를 질러대기 일쑤였으며 걸핏하면 싸우고 항의를 하다가 징계를 먹곤 했다. PFC CSKA 소피아 시절에는 영구 출장 정지 징계까지 거론되었고 FC 바르셀로나 이적 후엔 주심의 발을 밟았다가 2개월 출장정지를 먹었다. 인터뷰에서도 독설과 도발을 쏟아내는등 여러모로 화끈하고 거칠 것이 없었던 선수이다. 크루이프에게 감정이 쌓였을 때 샌드백에 그의 사진을 붙여놓고 분이 풀릴 때까지 두들겼다는 일화가 있다. 은퇴하는 그날까지도 성질은 조금도 죽지 않아서 2003년 DC 유나이티드와 미국 대학축구팀의 대결당시 한 선수에게 거친 태클을 가했다가 그 선수의 다리가 부러진 일 때문에 고소까지 당했다. 당시 그 대학축구팀의 코치로 있던 레이 허드슨이 이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은퇴한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성질은 변하지 않아 독설가 기질은 여전하여 온갖 어록을 쏟아내고 있다. FC 바르셀로나의 레전드답게 레알 마드리드 CF에 대한 독설이 주를 이루며, 당연하겠지만 리오넬 메시, 펩 과르디올라 등 현세대 바르사의 황금기를 만든 팀 후배들은 몹시 아낀다. 그러나 주제프 마리아 바르토메우를 위시한 전 바르셀로나 보드진들에 대해선 상당히 비판적이다. 보드진들이 리오넬 메시와 갈등을 빚고 있다는 보도가 나가자 ' 축구는 내비두고 농구나 신경써라 이 축구 좆도 모르는 사무원들아' 라는 식으로 말할 정도.[8] 리오넬 메시와 엔리케 감독의 불화설 당시 팀이 메시를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메시를 감싸면서 '바르셀로나가 외국인 선수들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았고 외국인들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팀을 떠나기 일쑤였다' 고 증언하며 메시도 자기처럼 팀을 떠나게 될거라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스토이치코프 스스로가 감독과의 불화 때문에 바르셀로나에서의 커리어를 끝낸 기억이 있어서 감정이입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바르셀로나 선수들 중에서도 리오넬 메시, 루이스 수아레스, 네이마르 주니오르 같은 외국인 선수들에 대해선 유난히 각별하다. 그리고 스토이치코프의 예상대로 메시와 수아레스는 좋지 못한 방식으로 바르셀로나를 떠나게 되었다.[9] 그것도 스토이치코프보다 더 비참한 형태였다.

같은 이유로 루이 판할 감독을 몹시 싫어한다. 내뱉은 독설의 반 이상이 판할이 쓰레기라는 내용이다. 거의 즐라탄 펩 과르디올라 디스하는 수준으로 판할을 막 까대는데, 바르셀로나에서 행복했지만 판할과의 갈등 때문에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스토이치코프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부상당했던 당시 판할이 스토이치코프의 아내에게 '어쩌다 저렇게 나쁜 남편과 결혼했냐'고 드립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10] 아직까지도 틈만 나면 판할을 대놓고 쓰레기라고 부르면서 까는걸 보면 앙금이 정말 남다른걸로 보인다. 프리미어 리그로 이적의사를 밝힌 같은 팀 후배 페드로 로드리게스에겐 맨유만은 가지 말라며 예전에는 바르사를 무너뜨리더니 이젠 맨유까지 말아먹고 있다고 독설을 날렸다.

바르셀로나와 재계약 문제로 파문을 일으킨 우스만 뎀벨레에게 ‘구단 더럽히는 짓 하지 말고 떠나고 싶으면 유니폼 벗고 ‘나가겠다’ 라고 말하라’ 라고 화를 내며 강하게 질책하였다.

6. 여담



[1] 우고 산체스와 공동 수상. [2] 올레그 살렌코와 공동 수상. [3] 대표팀 역대 득점 3위. [4] 루이스 수아레스의 바르사 시절 별명이기도 하다. [5] 심지어 나이지리아는 1994 월드컵이 첫 출전이었다. [6] 1994년 FIFA 올해의 선수는 마찬가지로 월드컵 우승과 골든볼 수상으로 맹활약한 팀 동료 호마리우가 수상한다. 스토이치코프는 이 해 FIFA 올해의 선수에서는 2위를 기록한다. [7] 돈 발롱 어워드 [8] 바르토메우는 바르셀로나 농구선수 출신이었다. [9] 특히 메시는 바르셀로나의 레전드라는 말로도 부족한 바르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보드진들의 방만한 운영으로 인해 결국 헌신한 클럽에서 쫒겨나다시피 이적하게되었다. [10] 스토이치코프는 경기장에서 막나가는 성격과는 달리 사생활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잡음을 낸 적이 한 번도 없고, 저 아내랑 지금까지도 같이 잘 살고 있으며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원래 경기장 안에서 미친개 밖에서는 팬 서비스도 좋고 문제 안일으키는 유형들이 가끔 있다. 반대로 경기장에선 매너있게 잘하는데 경기장 밖에서 사고치고 돌아다니는 유형도 있다. [11] 멘탈로는 어디서 절대로 지지 않았고 별명이 심지어 'animal'이었던 호마리우와 서로 팀의 넘버원이라고 투닥거렸는데, 당시 감독이었던 요한 크루이프가 이를 지켜보다가 "놀고들 있네. 내가 감독이니까 내가 최고다. 그러니까 제발 말 좀 들어."라 했지만 이들이 말을 들을 리가 없으니, 서로 공을 10번 차서 크로스바 맞추는 내기를 하기로 했다. 다른 선수들도 간만에 흥을 돋울 거리가 생기니 승부에 관계없이 모두 참가했다. 결과는 스토이치코프 2번, 호마리우가 3번. 이에 호마리우가 자기가 최고라고 나대자 크루이프는 단숨에 6번을 성공시켰다. 호마리우가 주제도 모르고 겁도 없이 감히 크루이프에게 인정할 수 없다고 개기자 가만히 듣던 크루이프는 갑자기 왼발로 공을 냅다 갈겼는데 그게 그대로 크로스바에 적중했고 호마리우는 바로 아닥했다고 한다. 훗날 크루이프가 이에 대한 뒷이야기를 했는데, 왼발로 공을 차서 맞춘 건 뽀록이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