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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콘라트 아데나워 | 마르틴 루터 | 카를 마르크스 | 한스, 죠피 숄 남매 | 빌리 브란트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아돌프 콜핑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헬무트 콜 | 로베르트 보쉬 | 다니엘 퀴블뵈크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콘라트 추제 | 요제프 켄테니히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카를하인츠 뵘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헬무트 슈미트 | 레진 힐데브란트 | 알리체 슈바르처 | 토마스 고트샤크 |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미하엘 슈마허 |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 귄터 야우흐 | 디터 볼렌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얀 울리히 | 슈테피 그라프 | 사무엘 하네만 | 디트리히 본회퍼 | 보리스 베커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프란츠 베켄바워 | 오스카 쉰들러 | 네나 | 한스 디트리히 겐셔 | 하인츠 뤼만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하랄트 슈미트 | 프리드리히 대왕 | 임마누엘 칸트 | 패트릭 린드너 | 하르트무트 엥겔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힐데가르트 폰 빙엔 | 하이노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 마를레네 디트리히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로베르트 코흐 | 요슈카 피셔 | 카를 마이 | 로리오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루디 푈러 | 하인츠 에르하르트 | 로이 블랙 |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 볼프강 아펠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알렉산더 폰 훔볼트 | 피터 크라우스 | 베르너 폰 브라운 | 디르크 노비츠키 | 캄피노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 프리드리히 실러 | 리하르트 바그너 | 카타리나 비트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프리츠 발터 | 니콜 |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 오토 릴리엔탈 | 마리온 돈호프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토마스 만 | 헤르만 헤세 | 로미 슈나이더 | 스벤 하나발트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빌리 밀로위치 | 게르하르트 슈뢰더 | 요제프 보이스 | 프리드리히 니체 | 루디 두치크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카를 레만 | 베아테 우제 | 트뤼머프라우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헬무트 란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알브레히트 뒤러 | 막스 슈멜링 | 카를 벤츠 | 프리드리히 2세 | 라인하르트 메이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하인리히 하이네 | 게오르크 엘저 | 콘라드 두덴 | 제임스 라스트 | 우베 젤러 | |||||
출처 | |||||||||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
루디 푈러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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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8대, 12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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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55대 |
27대, 32대 |
루디 푈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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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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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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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83 · 1983-84 · 1984-85 · 1986-87 · 1994-9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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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 ||||
카를하인츠 푀르스터 ( VfB 슈투트가르트) |
→ |
루디 푈러 ( SV 베르더 브레멘) |
→ |
토니 슈마허 ( 1. FC 쾰른)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루디 푈러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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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Deutsche Fußballnationalmannschaf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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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3> 이름 |
루디 푈러[1] Rudi Völ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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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돌프 푈러 Rudolf Völ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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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0년 4월 13일 ([age(1960-04-13)]세) | |
서독 헤센주 하나우시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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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9cm | |
직업 |
축구 선수 (
중앙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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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333> 유스 |
TSV 1860 하나우 (1966~1975) 키커스 오펜바흐 (1975~1977) |
선수 |
키커스 오펜바흐 (1977~1980) TSV 1860 뮌헨 (1980~1982) SV 베르더 브레멘 (1982~1987) AS 로마 (1987~1992)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2~1994) 바이어 04 레버쿠젠 (1994~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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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바이어 04 레버쿠젠 (2000) 독일 대표팀 (2000~2004) AS 로마 (2004) 바이어 04 레버쿠젠 (2005) 독일 대표팀 (2023 / 감독 대행)[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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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바이어 04 레버쿠젠 (1996~2000 / 스포츠 디렉터) 바이어 04 레버쿠젠 (2005~2018 / 스포츠 디렉터) 바이어 04 레버쿠젠 (2018~2022 / 단장) 바이어 04 레버쿠젠 (2022~2023 / 앰버서더) 독일 대표팀 (2023~ / 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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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90경기 47골[3] ( 서독 / 1982~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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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다.
선수 시절 AS 로마에서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UEFA컵 준우승을 이끌고 마르세유에서는 프랑스 클럽 최초로 UCL 우승을 달성하는 업적을 남겼다.[4] 또한 국가대표팀에서는 1986 월드컵 준우승과 1990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은퇴 후에는 독일 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2002 월드컵 준우승을 일구기도 했으나 유로 2004 조별 리그 탈락의 여파로 사퇴하였다. 그 뒤로는 AS 로마와 레버쿠젠의 감독직을 맡은 것을 마지막으로 현장 지도자로 나서지 않고 구단 프런트로만 활동해 왔다.
2023년에는 독일 대표팀의 단장으로 선임되었으며, 독일 대표팀 감독이었던 한지 플릭이 경질되자 감독 대행을 맡아 한 경기를 치른 후 율리안 나겔스만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여섯 살의 나이에 TSV 1860 하나우라는 축구 클럽[5]에 가입 후 유소년 생활을 했다. 15살인 1975년 키커스 오펜바흐 유소년 팀으로 옮겼고 1977년 정식으로 2부 리그에서 프로 데뷔를 한다. 데뷔 시즌엔 5경기에 출전 1골, 그 다음시즌인 1978/79 시즌에는 31경기 출전 11골을 넣으며 가능성을 보여준 루디푈러는 1979/80 시즌에는 38경기에 출전, 무려 40골을 넣는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다. 루디 푈러의 이러한 활약에도 오펜바흐는 당시 리그 8위를 기록하며 1부 리그 승격에는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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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파비앵 바르테즈, 프랑크 소제, 마르셀 드사이, 루디 푈러, 바질 볼리, 에릭 디 메코, 장자크 에들리, 알렌 복시치, 디디에 데샹, 아베디 펠레[6], 조슬랭 앙글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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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5 시즌에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하였고 1995/96 시즌까지 두시즌 동안 활동하며 36살의 나이로 1996년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2.2. 국가대표
브레멘 이적 후인 1982년 국가대표에 처음으로 발탁되었다.[10] 국가대표팀에서 주전 공격수로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유로 1984였다. 그리고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국가대표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준우승의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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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월드컵 당시 레이카르트와의 신경전 |
유로 1992에서도 출전했지만 조별 리그(8강) 첫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여 남은 경기에 모두 출전하지 못했다.
1994 미국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이 때는 노쇠한 상태라 주로 교체로 출전했다. 1994년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는 위르겐 클린스만과 카를하인츠 리들레였다. 16강전 벨기에전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을 8강에 진출시켰다.
서독/독일 국가대표로서 통산 90경기에 출전하여 47골을 기록했다. 독일 국대에서도 역대급이라 할 수 있는 기록이지만 기록에 비해 임팩트가 약하게 느껴지고 있다. 그가 국대에서 활약한 시기의 전반기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후반기에는 위르겐 클린스만이 있었기 때문에 국대에서 푈러는 원톱이라는 롤을 수행한 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루메니게나 클린스만과 투톱을 이루어 출전했다. 특히 월드컵에서의 득점이 루메니게나 클린스만에 밀리다 보니, 임팩트가 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3. 플레이 스타일
뛰어난 헤더 능력이 장기였던 공격수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두루 든든한 활약을 펼처주었던 1980-1990년대의 대표적인 스트라이커였다. 원래도 잘했던 선수지만 루드 굴리트나 카를로스 발데라마처럼 특유의 펌 + 수염 헤어스타일도 그 이름값에 한몫하고 있다.빼어난 득점력과 위치선정 등 정통 9번 공격수에게 필요했던 능력들을 풍부하게 갖추었던 선수로, 게르트 뮐러의 플레이 스타일과 가장 비슷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수비수에게 어그로를 끄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수비수 근처에서 있는듯 없는듯 돌아다니다가 공이 페널티 박스 안에 들어오면 어느샌가 번개같이 골을 넣거나 수비수와의 1대1에서 간결한 드리블로 벗겨내고 마무리하는, 전형적인 골잡이 유형. 이러한 스타일로 독일 분데스리가는 물론 당시 공격, 수비, 전술 모두에서 독보적인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이탈리아 리그에서도 빼어난 활약을 펼칠 수 있었다. 많은 장기들 중에서도 특히 푈러의 트레이드마크는 발군의 다이빙 헤더 능력으로 AS 로마에서는 'il tedesco volante' (하늘을 나는 독일인)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플레이 외적으로도 큰 승부욕을 가졌던 선수였다. 우선 경기장 안에서는 한 성깔 하는 공격수로 유명했다. 젠나로 가투소처럼 심판과 득달같이 싸우는 장면이 많았으며, 1990 월드컵에서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상대로 한 것처럼 도발 당하면 가만있지 않았다. 또한 심판 몰래 엘보우를 먹이는 등(...) 영리한 더티 플레이에도 능했다. 하지만 그 축구를 위한 승부욕은 스스로의 플레이에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로마 이적 후 1년 반동안 부상과 부진에 허덕이며 먹튀로 슬슬 의심을 받게 됨에도 불구하고 절치부심하여 귀신같이 재기했던, 근성있는 선수였다.
4. 지도자 경력
4.1.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은퇴 직후에는 지도자로 바로 전향하지 않고, 프런트로 활동했다. 프런트 경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장 지도자로는 커리어가 짧은 편이다.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기술고문으로 활동하던 루디 푈러는 UEFA 유로 2000에서 독일이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이며 1무 2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8강 진출에 실패하자, 에리히 리베크에 이어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에 오른다.
사실 루디 푈러보다 먼저 후보에 오른 사람이 있었는데, 크리스토퍼 다움이었다. 크리스토퍼 다움은 중위권에 머무르던 1. FC 쾰른을 2차례의 리그 준우승과 한번의 리그 3위를 기록하며 팀의 도약을 이끌며 VfB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리그 우승, 바이어 레버쿠젠에서는 무려 3번의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며 비록 바이에른 뮌헨 같은 리그의 최강팀을 맡진 못했지만 리그 중상위권 팀을 이끌며 최대의 성과를 낸 감독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다움이 독일 국가대표 감독 후보에 오르던 시기에 다름아닌 약을 빨았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크리스토퍼 다움의 독일 감독직은 취소되고, DFB는 루디 푈러에게 감독직을 제의한다.
처음엔 지도자 라이선스 없이 감독직을 수행하였지만, 급하게 라이선스를 취득한 후 감독으로 나섰다. 2002 한일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는 비록 뮌헨에서 마이클 오언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고 1:5로 대패 당하며 당시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루디 푈러의 부친이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화가 있지만 그래도 그 경기를 제외하곤 무패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 월드컵 본선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8:0으로 잡고, 아일랜드와는 무승부, 카메룬은 2:0으로 잡으면서 16강에 진출했다. 토너먼트에서는 16강 파라과이전, 8강 미국전, 4강 한국전 모두 올리버 칸의 미친 듯한 선방과 미하엘 발락의 하드캐리라는 원패턴으로 결승전에 진출하지만 브라질에게 0:2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문다. 그렇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이루며 스타텀에 오르나 천운이 따른 대진운과[13] 주야장천 3-5-2의 고집 및 어쩡정한 4-4-2 전술로 여전히 못 미더운 경기력을 보여주며 평가절하된 경우가 많았고 이후에도 루마니아에게 1-5로 깨지질 않나, 심지어 유로 2004 예선에서 탈락한 헝가리에게도 0-2로 지더니 결국 유로 2004에서 조별 리그 2무 1패 3위로 처참히 망가지면서 대표팀 감독 자리에 물러나게 된다.
결과적으론 2002 한일 월드컵 준우승이 있기 때문에 그리 실패라고는 볼 수 없지만, 에리히 리베크에 이어 독일 축구의 암흑기를 상징하게 되는 감독으로 남게 된다.
사실 오히려 리베크 시절보다도 이 시기가 바로 독일 축구의 암흑기라 볼 수 있다. 리베크 감독 당시 독일 국가대표의 멤버는 나쁘지는 않았다. 올리버 칸, 메멧 숄, 옌스 예레미스, 토마스 헤슬러, 토마스 링케, 세바스티안 다이슬러, 카르스텐 얀커, 옌스 노보트니 등 수준급 선수들도 있었고 분데스리가는 리베크 시절엔 어느 정도 유럽클럽 대항전에서 나름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14] 거기에 선수들은 분데스리가와 각국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멤버들이었다. 다만 독일은 전통적인 3백에서 당시 현대축구의 흐름인 4백으로의 전환이 늦어지게 되었고 루디 펠러 감독 시절엔 세대교체의 실패[15], 이전 세대보다 못한 스트라이커진의 부진, 독일 축구의 희망으로 떠오른 세바스티엔 켈과 세바스티안 다이슬러 등이 잔부상에 시달리는 것이 당시 독일 축구 암흑기에 크게 작용했다. 게다가 펠러가 감독직을 맡을 시절엔 분데스리가조차 유럽 무대에 빌빌거리던 시절이였으니 진정한 독일 축구의 암흑기였다.
루디 푈러도 나름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2002 월드컵이 끝난 후부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프레디 보비치[16], 마르코 보데[17]와 같은 노장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불러들이는 한편 다니엘 비에로프카[18], 티모 힐데브란트[19], 한노 발리티쉬[20], 마누엘 프리드리히[21], 마르쿠스 슈로스[22], 벤야민 라우트[23], 케빈 쿠라니[24], 파트릭 오모엘라[25] 같은 떠오르고 있는 유망주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위에 언급한 선수들이 활약한 분데스리가는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빌빌거리며 맛탱이가 간 시절이었기 때문이다.[26]
4.1.1. 2002년의 성과
게르만 순혈주의를 무너뜨리면서 다양한 선수 기용과 실험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2010년대의 황금 세대가 등장하게 된 원동력을 만들어준 감독이다. 폴란드계의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가나 혈통의 게랄드 아사모아, 나이지리아계 패트릭 오우오모엘라 등 과감한 선수 기용으로 보수적인 독일 축구의 벽을 타파한 감독이었다.특히 당시 무명이였던 클로제의 기용, 당시 독일 최고의 선수인 노보트니, 숄, 다이슬러의 공백을 라멜로프, 슈나이더로 메우는 등 나름 전술적 플랜에 대해선 폭이 넓은 감독이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독일의 3-5-2 전술의 고착화를 시킨 감독으로 인해 저평가를 받고 있으나 그 당시 대세 전술인 4-4-2를 쓰기엔 특정 능력에만 특화된 독일 선수들의 능력이 부족한 상황이었고[27] 이에 푈러 감독은 고육지책으로 3-5-2 전술을 썼는데 이 것이 어느정도 2002년 월드컵에선 효과를 보였다. 2002년 월드컵에 참가한 팀들은 대체로 투톱을 썼기에 쓰리백으로 상대하기에 용이했으며 이 덕에 월드컵 결승까지 진출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2002년도까진 독일 국가대표팀에 그리 인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한 옌스 노보트니, 크리스티안 뵈른스, 제바스티안 다이슬러, 메멧 숄은 당시 유럽에서 알아주는 수준급 선수들이였다.[28]
4.1.2. 2004년의 실패
그러나 2002년 이후 원톱이 유행하자 더 이상 3-5-2를 쓸 수 없게 되어 4-4-2로 어찌저찌 갈아탔지만 이번엔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대표적으로 미하엘 발락의 파트너를 엉뚱한 선수로만 배치시키면서 경기력이 엉망이 되자 3-5-2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여기에 대표적으로 희생된 선수가 바로 옌스 예레미스, 디트마어 하만 그리고 토르스텐 프링스. 2002 한일 월드컵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무리하게 4-4-2를 가동하기 위해 발락의 파트너로 예레미스를 기용했고 예레미스 본인은 어느 정도 제 몫은 해주었으나 그 주변의 선수들이 전부 공수 부분에서 엇박자를 내면서 영 좋지 않은 경기력을 선보였고 결국 푈러 감독은 다시 한번 3-5-2로 돌아섰다. 하만의 경우 2004년까지 발락과 중원의 파트너로 어느정도 활약을 해주었으나 이는 과거 마르코 보데라는 파이팅형 풀백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보데가 대표팀에서 은퇴를 하고 푈러 감독은 그 자리에 예레미스를 배치시키지만 경기력만 망가졌고 특히 유로 2004에서는 기형적인 5-4-1 포메이션을 선보이며 희대의 예능을 시전하였다.UEFA 유로 2004 체코전 당시 독일 포지션 | |||||
FW 쿠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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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F 슈바인슈타이거 |
RWF 슈나이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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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F 발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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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 하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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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B 람 |
CB 메첼더 |
CB 뵈른스 |
CB 프리드리히 |
RWB 프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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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칸 |
하만은 데드볼 스페셜리스트였다. 중장거리 킥이 정확하고 강력한 선수였으며 그렇기에 리버풀 시절에도 어느 정도 명성을 날릴 만큼 유럽에서 알아주는 미드필더이다. 문제는 포지션 상성을 받는 선수이기에 여기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는다면 그의 장기는 계륵이 되어버렸다. 발락처럼 포지션 상성을 전혀 받지 않는 선수라면 모를까 볼 배급과 조율을 장기로 하는 이런 선수에게 4-4-2 시절에는 박스 투 박스를 맡겼고 5-4-1 포지션엔 혼자서 중원을 떠받히라고 놓으니 좋은 플레이가 나올 리 없었다. 하만은 이후 클린스만 체제에서 전술적 문제로 인해 2006 독일 월드컵 엔트리에서 제외되고 만다.
그렇다고 푈러가 감독으로서 그렇게 무능한 건 아니었다. 미하엘 발락을 가장 잘 활용한 감독이였으며, 앞에 언급한 미로슬라프 클로제, 필립 람,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를 발굴했고 이후에도 많은 선수들을 등용했다. 그리고 그 악명 높은 유럽예선에서 두 번이나 통과하면서 당시 망가진 대표팀을 꾸역꾸역 이끌었고 특히 이 시기 독일의 마땅한 풀백 자원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파트릭 오모엘레라, 크리스티안 슐츠, 아르네 프리드리히 등 신예들도 꾸준히 기용하면서 어떻게든 트랜드에 맞게 포백을 갖출려고 노력했었다.
만악의 근원은 이 시기가 독일 축구의 암흑기였다는 것. 인재가 없으니 4-4-2의 열쇠를 쥐고 있는 프링스를 울며 겨자먹기로 풀백으로 세우며 과거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고 결국 위와 같은 극단적인 포메이션은 과거 1990년대 말 전성기 시절 뮌헨이 선보인 전례가 있기는 했으나, 문제는 발락과 하만이 상성상 전혀 맞지 않았다는 점이었으며 이후 클린스만이 프링스를 발락의 새로운 파트너로 내정함과 동시에 프리드리히-메르테자커-메첼더-람의 포백이 안정화되면서 독일 축구의 암흑기가 끝나게 된다. 한마디로 선수 시절엔 시대를 너무 잘 타고났으며, 감독 시절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4.2. AS 로마 감독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서 사임한 후 AS 로마의 사령탑이 되었다.하지만 당초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후임으로 예정된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이 부인의 건강 문제로 갑자기 사임하는 바람에 대타로 선임된 상황이었기에 선수들과 전술 및 훈련 등 호흡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고 여전히 영 좋지 않은 전술, 디나모 키예프와의 챔피언스리그 홈경기에서 홈 관중이 심판에게 이물질을 던져 부상을 입히는 바람에 해당 경기 몰수패에 챔피언스리그 나머지 홈경기 무관중 징계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29] 곧바로 39년 만에 승격한 메시나를 상대로 원정에서 4-3으로 대역전패를 당했고, 안토니오 카사노같은 주요 선수와의 불화로 어수선한 팀 분위기 속에서 결정적으로 2명이 퇴장 당한 볼로냐에게까지 1-3로 지자 결국 사퇴한다.
2005년 이후 지도자 생활에 거리를 두며 뚜렷한 활동을 하지 않던 루디 푈러는 2011년 레버쿠젠의 단장으로 선임되면서 2022년에 지몬 롤페스에게 단장을 넘길 때까지 레버쿠젠에서 구단 프런트로 재직했고, 잠시 야인으로 있다가 올리버 비어호프의 후임으로 2023년에 국가대표팀 단장으로 선임되며 행정가로도 나서기 시작했다.
2005년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조 본프레레 감독이 사퇴하면서, 후임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4.3.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단장, 감독 대행
2023년 1월 19일, 올리버 비어호프의 뒤를 이어 독일 국가대표팀의 단장으로 부임했다. #2023년 9월 10일에는 한지 플릭이 볼프스부르크에서 일본에게 4대1로 대패하는 등의 끔찍한 성적으로 독일 대표팀 감독 최초 경질을 당해 공백이 생기자, 프랑스전을 치르기 위해 감독 대행을 맡아 18년 만에 현장에 복귀했다. #
2023년 9월 13일(한국 시각), 도르트문트에서 치러진 프랑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2:1 승리를 이끌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8강전 이후 무려 9년만에 프랑스 상대로 거둔 승리이고, 최근 5경기 무실점을 이어오던 프랑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라 최근의 부진을 일부 씻을 수 있을 만한 승리였다.
9월 22일 율리안 나겔스만이 제12대 국가대표 감독으로 정식 부임하면서 다시 단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율리안 나겔스만도 다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망치면서 사실상 그냥 푈러가 감독직을 쭉 맡는 게 나을 뻔했다. 만에 하나 나겔스만이 유로 직전 평가전에서도 부진을 탈출하지 못한다면 푈러가 유로 2024 본선 무대를 초비상 소방수 감독으로 이끌 가능성도 굉장히 희박할지언정 아예 없지는 않다.[30] 2024년 4월 8일, 독일 축구 연맹과 2026년까지 재계약을 하였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2~1994)
- UEFA 챔피언스 리그: 1992-93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90; 준우승: 1986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준우승: 1992
5.1.2. 개인 수상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83
- 독일 올해의 축구인: 2000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84
- UEFA컵 득점왕: 1990-91
- UEFA U-21 챔피언십 MVP: 1982
- 분데스리가 득점왕: 1982-83
- 키커 올해의 공격수: 1984-85, 1985-86
- 키커 올해의 팀: 1982-83, 1983-84, 1984-85, 1986-87, 1994-95
- 2. 분데스리가 득점왕: 1981-82
-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1990-91
- 브레멘 올해의 스포츠맨: 1982, 1986
- 밤비: 2002
- AS 로마 명예의 전당: 2014
-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 2020
- DFL 명예상: 2022
5.2. 감독
5.2.1. 대회 기록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2000~2004)
- FIFA 월드컵 준우승: 2002
5.3. 수훈
- 은월계수잎 훈장: 2000
- 독일 공로십자장: 2002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공로장: 2008
6. 기타
|
오락실 게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이부 컵 축구에서 루디 푈러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등장한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세이부 컵 축구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기준으로 출시된 게임이므로 90년 이전에 은퇴한 루메니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출처
|
2014년 레버쿠젠의 한국 투어 당시 차범근과 함께. |
문제는 그렇잖아도 파라과이 상대로 맥없는 졸전을 펼친 것에 격앙되어 있던 독일 축구 팬과 언론이 차범근이 맞는 말 했는데 뭘 잘했다고 말대꾸냐며 푈러 감독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고[33] 이게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자 8강전 미국과의 경기가 열리는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차범근과 직접 만나 오해를 풀었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34] 다만 서로간의 오해를 푼 것이 아니라 그냥 두 사람이 언론에 해명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앞서 말했다시피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언론에서 보도한 것과는 달리 싸웠다고 볼 일도 아니었기 때문. 게다가 애초에 차범근이 혹평한 것도 독일 대표팀의 경기 내용이었지 푈러가 잘못 가르쳤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푈러 입장에서 감정적으로 되받아칠 이유도 없었다.
즉 평소에 친한 차범근이 16강전에 대해 "이게 그 독일 국대의 경기가 맞냐? 내가 보기엔 동네 축구단 수준이구만."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의 혹평을 하자 푈러는 "거 옛날에 아스피린 너무 많이 먹어서 이상한 말을 하는구만?" 이런 식으로 농담 섞인 맞디스를 했을뿐인데, 독일 현지에서 팬들의 비난까지 빗발치고 이게 한국에까지 알려지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꼬였던 것이다. 이에 울산에서 차범근과 만난 푈러는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실수했다."라는 말로 사과했고 차범근 또한 이를 이해해 주면서 훈훈하게 끝났다. 무엇보다 2002년 당시 기준으로도 푈러가 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선수, 감독, 프런트를 다 해봤기 때문에 아스피린 드립을 치는건 결국 셀프디스일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그냥 친해서 장난친 게 언론을 잘못 탄 경우다. 물론 선수들의 경기력이 좋지 않으면 가장 먼저 감독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월드컵 커리어를 보자면 1990년 월드컵 우승 멤버이긴 한데, 선수와 감독 모두에서 준우승이 있다. 1986년 월드컵에서는 결승전에서 그렇게나 압도적인 맹활약하고도 결국 디에고 마라도나의 벽은 지나치게 높았던 탓에 준우승을 했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지네딘 지단의 프랑스와 이적료 총합 1위인 아르헨티나에다가 심지어 피구의 포르투갈까지 죄다 조별리그에서 광탈한 뒤 토티의 이탈리아와 라울의 스페인마저 16강과 8강에서 광탈하면서 토너먼트가 가히 꿀대진으로 점철되었으나[35]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전력이 약화되었던 독일로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승후보인 브라질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을 했다.
tvN 손세이셔널 - 그를 만든 시간에서 방영된 내용인데, 손흥민을 레버쿠젠으로 영입한 사람이 루디 푈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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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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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과거에는
완성형 시스템 하에서 '푈'의 출력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지라 '펠'을 대신 쓰거나 혹은 '푀일러'라고 돌려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2002 한일 월드컵 때는
유니코드가 사용되기 시작한 무렵이라 대부분 제대로 표기했으나 아직 완성형으로 출력하던 언론에서는 'D러'라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2]
한지 플릭의 경질로 감독 대행
[3]
대표팀 역대 득점
공동 4위
[4]
디비지옹 1 우승 기록은
승부조작 사건으로 박탈.
[5]
우리나라로 치면 차범근의 축구교실을 생각하면 된다.
[6]
덧붙이자면
안드레 아이유와
조던 아이유의 아버지가 아베디 펠레이다.
[7]
이 당시가 바로 마르세유가
지롱댕 보르도로 떠났던
디디에 데샹이 돌아왔고,
마르셀 드사이를 영입했으며
장피에르 파팽이 팀을 지탱하던 때였다.
[8]
현재까지도 마르세유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유일한 프랑스 클럽이다.
[9]
당시 도핑 테스트에서 마르세유 선수들에게 음성반응이 나왔고, 마르세유의 수비수였던 마르셀 드사이도 약물 의혹에 부정하는 말을 하였기에 의혹은 있어도 사실이라고는 볼 수 없다.
[10]
그 때 현역으로 같이 뛴 선수가 前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울리 슈틸리케다.
[11]
기자가 "16강에서 네덜란드를 만난 것이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까?"란 질문에, "우린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고, 조별 리그에서 형편없는 경기력으로 간신히 16강에 진출한 네덜란드가 부담이 될 것입니다"라고 디스했다.
[12]
하지만 자세히 보면 시뮬레이션 액션이고 VAR이 저 당시에 존재했다면 푈러는 최소 옐로 카드감이다.
[13]
16강, 8강, 4강에서 축구 강호를 모두 피한 것은 천운이라고밖엔 설명이 안된다.
[14]
바이에른 뮌헨과 레버쿠젠이 유럽 챔피언스리그에 좋은 모습을 보였고 샬케 04와 도르트문트 역시 UEFA컵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인다.
[15]
대표적으로 브레메와 타르니트 등 풀백 자원이 고갈되면서 미드필더에 특화된 프링스를 불가피하게 윙백으로 배치하게 된다.
[16]
1990년대 중반 슈투트가르트의 주전 스트라이커였으나 1998년을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보였고 도르트문트에서도 자리를 못잡아 볼튼 원더러스로 임대가갔으나 볼튼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해 자유계약으로 하노버 96으로 팀을 옮겼다. 루디 푈러가 재직할 당시 31살의 나이에 2002/03 시즌 27경기 14득점을 하며 제2의 전성기를 보냈다.
[17]
선수시절 오로지 브레멘에서만 활약한 백전노장 풀백으로 브레멘의 90년대 중 후반 전성기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18]
당시 23살이었으며 2002년 레버쿠젠 소속의 좌측 윙이었으며 당시 분데스리가 최고의 좌측윙어인 제호베르투의 공백을 메꾸고자 레버쿠젠에서 영입한 선수였다.
[19]
2002년 당시 23살로 후에 분데스리가 무실점 기록을 갱신할 정도로 제2의 올리버 칸으로 주목받고 있었으나 2007년 발렌시아 이적 후
로날드 쿠만을 만났다.
[20]
2002년 당시 21살로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2의 마테우스'라는 소리를 들으며 촉망받던 레버쿠젠의 중앙 미드필더, 미하엘 발락의 공백을 메꾸고자 영입되었던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21]
2002/03 시즌 23살의 나이에 베르더 브레멘에 데뷔한 센터백이었다.
[22]
유망주라고 하기에 2002/03 시즌 27살의 나이였으나 17득점을 기록하며 벤야민 라우트와 함께 1860 뮌헨의 공격을 이끌며 주목받았다.
[23]
2002/03 시즌 1860 뮌헨에서 본격적으로 리그 데뷔를 하며 32경기 13득점을 하며 당시 마땅한 독일 공격수가 없을 당시 촉망받던 유망주였다.
[24]
2002/03 시즌 20살의 나이에 슈투트가르트 소속으로 32경기 15득점으로 독일인 최다 득점을 기록. 그러나
요아힘 뢰프와의 불화로 커리어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25]
2004년 24세의 나이에 브레멘 더블크라운의 주역이 된 나이지리아 혈통의 독일 선수. 당시 독일국대의 라이트백을 책임질 선수로 기대를 모았으나. 국대에선 영 좋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푈러 감독은 4-4-2의 키를 쥐고 있는
프링스를 주야장천 라이트백으로 써먹게 된다.
[26]
요즘처럼 다시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어느정도 성적을 내고 있다면 모를까 03/04 시즌 유럽 리그 랭킹 포인트를 달랑 2점밖에 얻지 못한 리그에 팬들이 관심을 가질리 만무했다.
[27]
대표적인 예로
디트마어 하만을 들 수 있다. 테크닉이 조금 부족했을 뿐이지 전성기 시절엔 레지스타로 불릴 정도로 나름 수비형 미드필더의 교과서 였으나 4-4-2전술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박스 투 박스 형 능력이 없는 선수였으며 그렇기에
미하엘 발락과의 호흡에 크나큰 문제를 보였다.
[28]
다이슬러나 숄의 클래스는 이미 입증되었고 노보트니나 뵈른스 역시 2001/02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최고의 폼을 보여주며 각각 레버쿠젠과 도르트문트를 UCL, UEFA컵 결승에 진출시켰다.
[29]
결국 푈러 사임 후
레알 마드리드와
레버쿠젠에 밀리며 탈락했다.
[30]
원래 토너먼트를 앞두고 감독을 교체하는 것은 사실상 팀으로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수 중 하나이다. 새로운 감독이 선수들에게 자신의 전술을 새로이 입히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걸리고, 그마저도 성공할지 말지는 미지수이다. 그런데 준비 기간이 전혀 없는 토너먼트 직전에, 그것도 가끔가다 한 번 만나는 국가대표팀이 참가하는 토너먼트 직전에 새로운 감독을 선임하여 뭘 해보라는 건 말 그대로 자살행위다. 다만 독일 대표팀이 나겔스만의 성적이 너무 안 나올 시에 푈러 카드를 쓸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게나마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푈러는 이미 독일 대표팀 단장직을 수행 중으로, 선수를 새로 파악하거나 할 시간이 따로 필요 없을 뿐더러, 이미 플릭이 경질당한 직후 불과 사흘 만에 자신의 전술을 성공적으로 입혀 프랑스라는 거함을 잡아낸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유로 2024가 근 10년 동안 독일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토너먼트이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 대표팀은 2017년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 이후 7년 동안 월드컵 2연속 조별리그 탈락, 유로 16강 탈락, 네이션스 리그 3연속 파이널 진출 실패라는, 그야말로 독일 축구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겪고 있다. 이 상황에서 맞이하는 유로 2024는 단순히 명예 회복을 위한 무대가 아니라, 개최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지키고 그동안 돌아선 팬들의 민심을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만약에 독일이 개최국임에도 또다시 조별리그 탈락과 같은 부진한 성적을 거둔다면 독일 대표팀은 아예 팬들의 믿음을 완전히 잃을 것이고, 선수들 역시도 침체되어 향후 다가올 메이저 대회에서는 본선 진출조차 걱정해야 하는, 정말 심각한 상황에 놓일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1000여 경기 동안 구축해 온 강팀 이미지와 쌓아올린 실적과 영광을 영영 상실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중대한 토너먼트를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는 감독에게 맡기기에는 리스크가 당연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만큼, 독일 축구를 살리기 위한 초긴급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31]
링크를 눌러보면 알겠지만 아스피린은
레버쿠젠의 모기업인
바이어사의 대표적인 상품이다.
[32]
즉 차범근이 아스피린을 많이 먹은 탓에 말을 잘못했다는 식의 농담이다.
[33]
이것도 '어떻게 너 따위가 감히 차붐님께 그딴 말을 하느냐'며 비난한 게 아니라 '우리가 봐도 차붐 말대로 졸전 그 자체였는데, 뭘 잘했다고 차붐을 까냐'는 식의 비난이었다. 즉 독일 내에서도 푈러가 인격적인 모독을 했다는 게 아니라 경기력에 대해서 디스 섞인 변명을 한 걸 문제로 삼은 것.
[34]
당시 차범근은 MBC 축구 해설위원이었기 때문에, 지상파에서는 MBC가 보도했다.
[35]
16강 파라과이전은 예상대로였지만, 8강 미국전과 4강 대한민국전은 독일 입장에서 예상 밖의 꿀대진이었다. 만약 포르투갈이 D조 최종전에서 한국과 무승부를 거뒀다면 조 2위로 올라와 16강전에서 멕시코를 꺾은 뒤 8강전에서 독일과 만났을 수 있고, 스페인이 8강전에서 한국을 꺾고 4강에 올라왔더라면 독일과 만났을 수 있기 때문. 당시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전력은 독일이 우습게 볼 수 없었다.
분류
- 1960년 출생
- 하나우 출신 인물
- 독일의 남자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1996년 은퇴
- 키커스 오펜바흐/은퇴, 이적
- TSV 1860 뮌헨/은퇴, 이적
- SV 베르더 브레멘/은퇴, 이적
- AS 로마/은퇴, 이적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은퇴, 이적
- 바이어 04 레버쿠젠/은퇴, 이적
- 독일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참가 선수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 1994 FIFA 월드컵 미국 참가 선수
- FIFA 월드컵 우승 선수
- FIFA 월드컵 결승전 득점자
- 독일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4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8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2 참가 선수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수상자
- 독일의 남자 축구 감독
- 바이어 04 레버쿠젠/역대 감독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AS 로마/역대 감독
- 감독 대행/축구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감독
- FIFA 월드컵 준우승 감독
- UEFA 유로 2004 참가 감독
- 축구 행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