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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7 21:58:58

미하엘 초어크

미하엘 초어크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주장
프랑크 밀
(1984~1988)
미하엘 초어크
(1988~1998)
슈테판 로이터
(1998~2003)
}}} ||
미하엘 초어크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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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분데스리가 심볼.svg
분데스리가 역대 득점 순위 To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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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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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55,#aaaaaa
순위 선수 국적 득점
1 게르트 뮐러 파일:UEFA GER.png 365
2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파일:UEFA POL.png 312
3 클라우스 피셔 파일:UEFA GER.png 268
4 유프 하인케스 파일:UEFA GER.png 220
5 만프레트 부르크스뮐러 파일:UEFA GER.png 213
6 클라우디오 피사로 파일:UEFA PER.png 197
7 울프 키르스텐 파일:UEFA GER.png 181
8 슈테판 쿤츠 파일:UEFA GER.png 179
9 디터 뮐러 파일:UEFA GER.png 177
9 클라우스 알로프스 파일:UEFA GER.png 177
11 마리오 고메스 파일:UEFA GER.png 170
12 요하네스 뢰르 파일:UEFA GER.png 166
13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파일:UEFA GER.png 162
14 베른트 횔첸바인 파일:UEFA GER.png 160
15 프리츠 발터 파일:UEFA GER.png 157
16 마르코 로이스 파일:UEFA GER.png 156
17 토마스 알로프스 파일:UEFA GER.png 148
18 토마스 뮐러 파일:UEFA GER.png 144
18 슈테판 키슬링 파일:UEFA GER.png 144
20 베른트 니켈 파일:UEFA GER.png 141
21 우베 젤러 파일:UEFA GER.png 137
22 호르스트 흐루베슈 파일:UEFA GER.png 136
23 지오반니 에우베르 파일:UEFA BRA.png 133
24 루디 푈러 파일:UEFA GER.png 132
25 미하엘 초어크 파일:UEFA GER.png 131
26 카를 알괴베르 파일:UEFA GER.png 129
27 디터 회네스 파일:UEFA GER.png 127
27 베다드 이비셰비치 파일:UEFA BIH.png 127
29 마르틴 막스 파일:UEFA GER.png 126
30 게오르크 볼케르트 파일:UEFA GER.png 125 }}}}}}}}}}}}}}}
독일의 축구인
파일:989341897-borussia-dortmund-nuernberg-ZFPPv0wa7.jpg
<colbgcolor=#eeeeee> 이름 미하엘 초어크
Michael Zorc[1][2]
출생 1962년 8월 25일 ([age(1962-08-25)]세)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도르트문트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 체중 73kg[3]
주발 오른발
직업 축구 선수 (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행정가 ( 단장 /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 유소년 에빙 린덴호르스트 (1969~1978)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78~1981)
선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81~1998)
행정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8~2022 / 단장)
국가대표 7경기 ( 독일 / 1992~1993)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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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ffff><colcolor=#1b2e33> 등번호 <colbgcolor=#fff,#191919>8번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번, 8번 ( 독일 대표팀)
가족 아버지 디터 초어크
아내 욜라 초어크
슬하 자식 3명
손주 2명
}}}}}}}}} ||
1. 개요2. 선수 경력3. 행정가 경력
3.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단장
3.1.1. BVB에서 화려했던 선수 경력을 마치고 이제는 행정가로 재시작하다.3.1.2. 파산 위기를 겪고 암흑기에 돌입하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3.1.3. 몰락하는 명가를 끝내 부활시키다.3.1.4. 은퇴
4. 플레이 스타일5. 평가6. 기록
6.1. 대회 기록
7.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축구 선수 출신 행정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로컬 보이, 원클럽맨이자 구단 역사상 최다 출장자이며 은퇴 이후 20여 년간 BVB의 단장직을 수행한 전설이다. 선수 시절 초년에는 장발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던 탓에 "수지"(SusiSuzy)라는 별칭으로 불렸었다.

초어크는 오직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만 활약했고 총 17 시즌 동안 572경기를 출전했다. 1985년부터 등번호로 8번을 사용하였고 13시즌 동안 8번의 주인은 오직 초어크뿐이었다. 때문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8번이라 하면 초어크의 상징 번호가 되었다. 도르트문트의 성골로써는 유일한 프랜차이즈 선수였으며 중하위권을 맴돌던 팀에서 묵묵히 뒤를 받쳐주다가 주장에 임명되고 나서부터는 팀도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주장으로 뛴 10년동안 초어크는 주장으로서 맞이한 첫 시즌이었던 1988-89 시즌에 24년 만의 DFB-포칼 우승을 기점으로 1991-92 시즌에는 UEFA컵 준우승, 1994-95 시즌에는 도르트문트 최초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1995-96 시즌 분데스리가 2연패, 1996-97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4]을 경험하였다. 1997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도 35세의 나이에 선발로 출전하여 우승을 거두었다.

1998년, 선수에서 은퇴를 한 그는 바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단장이 되었다. 이 후, 2000년대의 암흑기를 거쳐가면서 위르겐 클롭과 함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부활을 이끈다.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만 자랐으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입단 이후 소속팀을 떠나는 일 없이 한 구단에서 선수와 경영인으로서만 44년이라는 세월을 헌신한 초어크는 현대 축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유형의 인물이다. 때문에 경기장 안팎에서 성공을 거둔 초어크를 두고 미국의 한 축구 블로거가 그를 역대 BVB 선수 탑10중 한 명으로 선정할때나, 골닷컴에서 다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역대 베스트 일레븐의 멤버로 평가 받을때 코멘트들을 보면 항상 선수로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 행정가로서의 업적도 함께 호평받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선수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미하엘 초어크/선수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행정가 경력

3.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단장

3.1.1. BVB에서 화려했던 선수 경력을 마치고 이제는 행정가로 재시작하다.

BVB에서만 572경기를 뛴 초어크는 은퇴 후 소속팀이었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떠난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단장직을 곧바로 역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평생 축구만 해왔던 초어크에게 경영은 문외한이였다. 그도 그럴게, 선수 생활 동안 초어크는 도르트문트 대학에서 경제학을 4학기 배운게 전부였다. 때문에 처음 몇 년 동안은 초심자로서 맨땅에 헤딩하는식으로 단장직을 수행해야했다. 불과 두 달 전에 초어크와 함께 뛰었고, 타이틀을 축하하러 저녁에 나가서 같이 술마셨던 선수들을 이제는 보드진의 입장으로 상대해야하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어크는 미하엘 마이어 부회장 밑에서 천천히 경영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도르트문트에게 부진의 시기가 닥쳐왔다.
파일:우베 노이하우스와 마이클 스키베, 초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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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를 지켜보는 우베 노이하우스, 스키베,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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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스포츠 디렉터지 사실상 구단 경영은 게르트 니바움(Gerd Niebaum)과 미하엘 마이어(Michael Meier)에 의해 굴러갔고, 경력이 일천한 생신입과 다름없는 초어크는 실권이 없었다. 보드진은 네비오 스칼라를 경질시키고 1부 리그 경험이 전무한데다 나이가 33살에 불과한 2군 감독인 미하엘 스키베를 1군 감독으로 승격시켰고, 그를 보좌할 수석코치고 우베 노이하우스를 데려왔다. 세간의 우려가 있었지만 1999-2000 시즌 스키베 감독은 팀을 무사히 리그 4위에 안착시켰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시즌이였다.

2000-01 시즌이 시작되고 클럽의 계속된 성공에 고무된 클럽 운영진들은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는데, 바로 독일 축구 클럽들 가운데 최초로 주식 시장[5]에 상장을 시도한 것이다. 보다 투명한 클럽 운영을 위한 도전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도전은 또 한 번 구단 경영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무리한 주식 상장으로 구단 재정에 또 한 번 흑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성적이라도 잘 나왔으면 모를까 스키베의 도르트문트는 성적이 꼬라박다 못해 강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스키베를 경질하고 그 감독 대행도 부진을 막지못해서 경질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클럽 이사진들은 우도 라텍을 급히 데려오고 마티아스 자머는 은퇴를 선언한 후 바로 라텍을 보조해주는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나마 강등은 면한 11위로 시즌을 마쳤고, 마티아스 자머가 감독이 된 2000-01 시즌부터 초어크는 토마시 로시츠키, 크리스토프 메첼더를 영입하여 자머를 지원하였고 이에 성적이 반등하여 리그 4위로 챔스 진출에 성공하였다.
파일:2001-02 시즌 도르트문트의 리그 우승을 다시 이끈 초어크.jpg 파일:초어크와 마티아스 자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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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어크 자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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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1-02 시즌에 전 동료였던 초어크와 이번에 경영인과 감독의 입장으로서 손잡은 마티아스 자머는 도르트문트를 이끌고 다시 분데스리가 정상의 자리를 되찾았고, UEFA컵에서 결승에 진출했지만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 3:2로 패하여 우승에 실패했다. 그 다음 시즌에도 최종전을 치르기 전까지 챔피언스리그 직행 티켓을 얻을 수 있는 2위를 지킨 상태라서 최종전 상대인 꼴찌 FC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홈경기에 이변만 없다면 도르트문트가 그대로 2위를 차지하는 것이 유력했으나 예상외로 경기 종반에 동점골을 헌납하며 1:1로 비기고 말았고 2위 자리를 마가트의 유치원 VfB 슈투트가르트에 내주며 챔피언스리그 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문제는 2003-04 시즌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벨기에 클뤼프 브뤼허 KV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면서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챔피언스 리그 수입이 끊겼고, 설상가상으로 독일 최대의 미디어 그룹이던 키르히 그룹이 파산하여 TV 중계권료도 끊기고 만다. 주식 상장으로 번 돈은 챔피언스 리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선수 영입하는 데 쓴 상태에서 기껏 영입한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끊었으니, 미래는 불보듯 뻔했다. 주식 상장을 위한 무리한 투자는 커다란 적자라는 차가운 현실로 이어졌고, 이는 1990년대 팀의 돌풍을 이끌었던 주축 선수들이 다시 이탈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시즌 초반 주축 선수들이 대거 부상으로 신음 하며 제대로 베스트 라인업을 짜기 어려워 리저브팀과 유소년팀에서 선수를 끌어올려야 했다.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가운데에서도 분전 하여 리그 6위로 끝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팬들사이에서도 자머는 대리석과 같다며 경직된 전술 구사에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챔피언스리그 진출에도 실패하였기 때문에 여론은 자머에게 좋은 상황 만은 아니었다. 결국 2003-04 시즌을 끝으로 자머는 도르트문트 감독직에서 경질된다. 자머의 후임으로 2년 전 UEFA컵에서 준우승의 쓴맛을 안겼던 베르트 판마르베이크가 부임하였다.

초어크는 2003년 이후의 재정 위기 속에서 한 시즌 반 안에 구단의 예산을 반으로 줄이는 과제를 했다. 경기장은 여전히 꽉 차 있었고, 외부 사람들에게는 도르트문트가 아직은 강한 경쟁력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도르트문트에게는 더 이상 최고 수준에서 충분히 경쟁할 좋은 선수들이 없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영난을 겪은 바 있는 도르트문트는 꽤 현명한 대처를 할 것으로 믿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번에는 문제의 심각성이 더했기 때문이다. 하향 나선은 점점 더 빠르게 회전했고 2004년 10월까지 클럽은 6,770만 유로의 손실을 발표했고 1억 1,880만 유로의 부채를 보고했다. 게르트 니움바움은 회장직에서 쫓겨났다. 이런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2005년에는 다시 한 번 구단 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을 감수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6]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이란 멋드러진 홈 경기장의 이름이 지역 보험 회사의 이름을 딴 지그날 이두나 파크로 바뀐 것도 막막한 구단의 경영난을 타파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3.1.2. 파산 위기를 겪고 암흑기에 돌입하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클럽은 2005년 파산위기를 맞이하고 11유로에 달했던 클럽의 주식 가치는 80% 가까이 폭락했고, 선수 연봉도 전원 20% 삭감해야 했다. 이것에 더해 재정난으로 2006년 팀내 최고 유망주 다비드 오동코어 레알 베티스로, 핵심 선수인 토마시 로시츠키 아스날 FC로 이적시켜야 했고 주포인 얀 콜레르 AS 모나코 FC로 이적시켰으며, 2007년에는 핵심수비수 크리스토프 메첼더를 이적료 없이 레알 마드리드로 넘겨주었다. 대신 초어크는 어려운 재정속에서도 넬손 발데스라던가, 알렉산더 프라이같은 나름 유명한 선수들도 영입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시츠키를 아스널로 보낸것을 비롯하여 팀의 주 득점원인 믈라덴 페트리치 함부르크 SV로 이적시키고 모하메드 지단을 영입하는 스왑딜 때문에 초어크는 팬들로부터 퇴진 요구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스요아힘 바츠케의 비호 아래 초어크는 영입 방침을 지킬 수 있었다.

이후 한동안 도르트문트에는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이는 시즌의 연속이었다. 재정위기 속에서 2004-05시즌과 2005-06시즌 연속 7위를 기록하더니, 2006-07시즌에는 심지어 2부 리그로 추락할 위기[7]에 빠지기도 했으며, 미하엘 루메니게를 선임하려는 시도때문에 초어크는 도르트문트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기도 하였다. 2007-08시즌에도 13위까지 순위가 떨어졌지만, 누리 샤힌이라는 대형 유망주를 지켜낸 초어크는 올라설 발판을 마련 할 수 있었다.

지금을 보면, 재정 문제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과거만큼 심각하지 않았던 많은 다른 클럽들의 운명을 고려할 때, 그 이후로 단장의 역할을 맡고 있는 초어크가 해낸 도르트문트에서의 성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2004년부터 2008년은 초어크의 도르트문트 단장 생활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3.1.3. 몰락하는 명가를 끝내 부활시키다.

하지만 도르트문트의 재정 붕괴는 지속되지 않았고 다행히 위기를 피할수 있었다. 여전하게도 도르트문트 팬들은 열렬한 성원을 꾸준히 보내주었고 구단 역시 뼈를 깎는 재정 개선 노력을 진행했다.[8] 그런 노력이 계속되고 있던 와중, 재도약의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도르트문트는 2007-08시즌 DFB-포칼 결승전에서 FC 바이에른 뮌헨과 격돌했는데, 아쉽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바이에른 뮌헨이 이미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한 상태라 운 좋게 UEFA컵 출전권을 따냈던 것이다. 오랜만에 UEFA컵 출전권을 손에 쥔 도르트문트는 회생의 실마리를 잡았고, 2008-09 시즌을 앞둔 초어크는 토마스 돌 감독의 후임으로 유망하지만 아직 40세에 불과했던 위르겐 클롭 감독을 선임하여 명가의 재건을 노렸다.
파일:초어크와 클롭.jpg
파일:마이스터샬레와 포칼 우승 트로피를 든 초어크와 클롭과 바츠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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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어크와 클롭, 바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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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클롭 부임 후 초어크는 네벤 수보티치, 마츠 후멜스, 우카시 피슈체크, 카가와 신지, 루카스 바리오스,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영입에 성공하였고, 초어크의 지원을 받은 클롭의 도르트문트는 2010-11 시즌, 2011-12 시즌 두 시즌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거두는 등 구단의 또 다른 전성기에 일조했다.
파일:안경쓴 초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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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챔스 결승전에서 패한 다음날의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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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해도 초어크의 단장 인생중 가장 의미있던 일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2012-13 시즌 챔스 결승전에 진출한 것이다. 1997년 우승 이후로 다시 나락을 가던 팀이 마침내 명가 부활의 신호탄을 올린것으로, 분데스리가의 거함 FC 바이에른 뮌헨 빅 이어를 놓고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승부를 가리게 됨으로써 마침내 도르트문트의 자존심도 높아졌다. 레알 마드리드 CF를 상대로 4번을 겨뤄 2승 1무 1패라는 훌륭한 성적을 냈고 여기서 바이에른 뮌헨까지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다면 통산 2번째 우승이 될 수 있었으나 더이상은 역부족이었는지 결국 뮌헨에게 1-2로 아쉽게 지며 우승의 꿈을 놓치게 되었다. 뮌헨이 트레블을 하게 되었고 도르트문트는 무관에 그치고 말았지만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했다는것은 초어크의 영입들이 성공했다는 뜻과 마찬가지였기에 아쉽지만은 않은 시즌이었다.
파일:단장 초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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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7 시즌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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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8년 여름 토마스 딜레이니, 악셀 비첼, 압두 디알로, 아슈라프 하키미, 파코 알카세르를 영입하고 2019-20 시즌엔 니코 슐츠, 토르강 아자르, 율리안 브란트 등 퀄리티 높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19/20 시즌을 앞둔 여름 이적시장에서 단 3일만에 슐츠와 아자르, 브란트 영입 오피셜을 띄우면서 공격적인 영입으로 주목을 받았다.

2020년 여름, 제이든 산초에게 오퍼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협상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부회장 에드 우드워드에 비해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초어크는 산초의 이적료로 120m 유로를 설정하고 맨유에게 8월 10일까지 이 조건에 합의해야만 산초를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맨유는 산초의 계약 기간이 1년 남은 것으로 예상하고 도르트문트에서 제시한 데드라인이 임박할 때까지 도르트문트가 요구하는 조건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초어크는 기존에 언급한 데드라인인 8월 10일까지 맨유가 비드를 넣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인터뷰를 통해 사실 지난 여름에 산초의 연봉을 인상하며 계약 기간을 2023년까지 늘려서 재계약했다고 언급했다. 산초를 지켜냄으로서 초어크는 도르트문트 팬 모두한테 더더욱 찬양을 받고있다.

그런데, 산초의 폼이 이적 불발로 인한 멘탈 관리 실패와 뫼니에의 눈이 썩는 실력으로 나락을 가며, 맨유한테 사기칠 기회 놓치고 몸값이나 떨구게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중... 계약 기간이 2년 남는 다음 여름에도 €120M을 고수(...)할 것이라고 한다.[9]

3.1.4. 은퇴

한편 키커, 루어 나흐리히텐 등 독일의 언론에서 초어크가 2022년에 단장직을 사임한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키커지 기사 본인이 일선에서 물러나 휴식을 원한다고 했으며, 후임 단장으로는 현재 1군 선수단 고문직을 역임 중인 제바스티안 켈이 유력하다.

원래대로라면 20/21 시즌이 끝난 후 2021년 여름에 사임하기로 했으나 구단 내부 사정으로 인해 사임이 1년 미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21년 6월 28일, 제바스티안 켈이 2022년 7월부터 2025년 6월 30일까지 구단의 단장직을 승계한다는 계약에 서명했다는 오피셜이 떴다. 따라서 초어크는 2022년 6월까지 단장직을 유지했고, 7월 1일부로 켈이 단장직을 승계하였다. 이로서 초어크의 마지막 영입 선수는 니코 슐로터베크 니클라스 쥘레가 되었다.[10]
미하엘 초어크는 한 시대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아무도 초어크보다 더 BVB를 잘 알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그저 단장인 것이 아닌, 매우 성공적인 선수였다. 더이상 클럽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굉장히 차분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그의 경험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분명히 그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코 로제

4. 플레이 스타일

초어크는 183cm라는 적당히 큰 키에서 제법 호리호리한 체형을 바탕으로 빠른 주력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통산 경기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상을 잘 안당하는 강철몸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90분 내내 경기장을 미친 듯이 뛸 수 있었던 놀라운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초어크는 게임을 읽는것에 뛰어났고 그것을 통해 상대 플레이를 무너뜨린 후 파괴적인 역습으로 전환 시키는 것에 능하였다. 그리고 포백을 보호하는 동시에 정확한 패스나 강력한 원거리 슛을 통해 공격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다. 즉, 신체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이미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완성되었던, 뭐 하나 빠지지 않는 꽉 찬 육각형 미드필더였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특기할만한 점이 하나 있었다. 비록 초어크가 득점을 기록하기 힘든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에서 뛰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리어를 진행하는 동안 상당히 많은 득점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초어크는 페널티 킥 성공률이 높았는데, 리그에서 통산 57번의 페널티 킥을 차서 49번을 성공시켰다. 이 수치는 분데스리가 역사에서 탑3에 꼽히며, 그보다 높은 선수는 만프레트 칼츠 게르트 뮐러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초어크의 득점이 PK에만 특화되었냐고 하면 또 그것은 아닌게, 필드골 비중은 훨씬 컸다. 왜냐하면 초어크가 단순히 상대의 공을 탈취해서 공격을 차단하여 역습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그치기 보다는, 자기가 직접 공격을 주도하며 공을 재빨리 전개해서 페널티 박스 바깥 슈팅으로 득점을 하거나 루즈볼 상황에서 공을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순간적인 슈팅을 해서 득점을 하는것에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온갖 포지션에서 땜빵을 뛰었던 경험으로 센터백이나 풀백 또는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어느 정도 경기를 소화 할 수 있는 유틸리티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초어크는 수비형 미드필더지만 한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공격 진영, 미드필드 진영, 수비 진영을 전부 아우르는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필요할 때면 초어크가 득점력을 발휘하여 팀이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5. 평가

통산 572경기 159 득점(53 PK) 31 도움
분데스리가 463경기 131 득점(49 PK) 24 도움
분데스리가 강등 플레이오프 3경기 3 득점(1 PK) 1 도움
DFB-포칼 36경기 11 득점(1 PK) 2 도움
DFL-슈퍼컵 2경기
리가-포칼 1경기
UEFA 챔피언스 리그 25경기 4 득점(1 PK) 2 도움
UEFA컵 35경기 9 득점(1 PK) 2 도움
UEFA 컵위너스컵 4경기
UEFA 슈퍼컵 2경기
인터컨티넨탈컵 1경기 1 득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역대 최다 출장자

선수로서 평가를 하자면, 초어크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전설중의 전설로 꼽힌다. 실제로 성골 조건도 전부 충족하고, 구단의 암흑기때 프로에 데뷔하여 구단의 전성기까지 이끌어내고 챔스 우승을 이룩하고나서야 은퇴를 한, 꿈만 같은 커리어를 지녔기 때문에 가히 구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자부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선수로서의 평가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리그 내에서는 충분히 좋은 선수였지만, 국대에 자주 선발되기에는 영 아쉬운 실력이었기에 A매치에 소집된 경험도 별로 없고, 동 포지션의 다른 선수들보다 인지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뿐만 아니라 초어크의 키커 랑리스테를 조회해보면, WK는 커녕 IK로 선정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11] 분데스리가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기본적으로 한번 이상은 IK 등급에 매겨진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초어크는 리그에서 좋은 미드필더지만 세계구급 선수는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초어크를 변호하자면 당시 1980년대는 한창 분데스리가가 전성기를 유지하던 때였다. 이 시기에 분데스리가에는 워낙 뛰어난 선수들도 많았고, 거기에 더해 그 선수들끼리 대표팀 승선을 위해서 엄청나게 경쟁을 했었다. 그러니 평범한 선수들은 B등급에도 선정못되는 일도 허다했다지만,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그 선수는 충분히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로타어 마테우스같은 선수들의 기량이 미친 수준인 것.

그렇다고는 하나, 초어크 역시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고 마냥 부정 할 수는 없다. 초어크는 IK만 못받았다 뿐이지, 17년의 선수 생활에서 K등급에는 13번 선정되었고 B등급에는 10번 선정되었다. 리베로,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를 오가던 초기 유망주 시절에는 B등급을 받는 일이 빈번했지만, 초어크가 강등권에서 팀을 구해낸 1987년 이후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K등급을 받았었다. 이러한 점을 두고 본다면, 고점이 그리 높지는 않아도 초어크가 최소한 안정적이고 기복이 없는 기량을 지녔었다고 판단 할 수 있다.

그리고 플레이 스타일 특성상 높은 점수를 받는 것에도 불리한 면이 있는것이, 1994-95 시즌의 초어크를 일례로 들 수 있다. 당시 초어크는 15골을 터뜨리는 대활약을 했지만 전후반기 모두 B를 받았다.[12] 랑리스테 평점을 보면 포지션 별로 세분화 되어 있는것을 알 수 있는데, 초어크의 주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되어 있고 키커로서는 초어크의 해당 포지션 플레이만을 평가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키커 랑리스테 시스템상 어쩔 수 없이 한정된 부분만을 봐야했고, 그 결과 초어크의 순위가 B등급으로 매겨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때문에 어느 정도는 초어크가 페널티를 받았다고 보면 된다.[13]

사실 이러한 것들을 제하고 볼때 초어크의 진가는 바로 팀이 지고 있는 상황이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발휘했던 리더십이었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아도 초어크는 무척 침착하고 투지 있게 대응하여 선수들을 다독이고 이끌었다. 차분하면서도 유쾌한 그의 성격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고, 감독들에게도 항상 성실하고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초어크를 지도했던 감독들은 전부 그를 중용했다. 그 결과, 초어크의 적절한 기량과 뛰어난 리더십은 조화를 이루어 그를 구심점으로 선수단이 잘 단합되었다. 이는 강등의 위협을 겪어던 중하위권 클럽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후에 빅 이어를 들어올릴 수 있게 된 발판이 되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7. 여담

파일:2004년에 찍은 아내 욜라와의 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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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초어크와 욜라 초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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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ˈmɪçaːʔeːl ˈt͡sɔʁk/). [2] 외래어 표기법 제3장 제2절 독일어의 표기 제1항의 2에 의거하여, Zorc는 /ˈt͡sɔʁk/(초크)로 발음되지만 공식적인 표기로 쓰자면 '초르크'가 맞다. 그러나 초어크가 보편적으로 쓰이는 관계로 초어크로 표기한다. [3] 월드풋볼넷 프로필 [4] 아쉽게도 결승전에서는 선발 출전을 하지 못했고 후반 막판에야 교체 투입으로 결승전을 뛰었다. 그래서 결승전 주장 완장을 마티아스 자머에게 넘겨야 했다. [5] DAX(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 [6] 이때 FC 바이에른 뮌헨으로부터 200만 유로를 빌리기도 했다. [7] 베르트 판마르베이크 감독이 당초 시즌 후 떠날 예정이었고 메첼더와 켈 등 선수들이 부상으로 아웃된 상황에서도 5승7무5패 9위라는 중위권의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질되었다. 후임 감독은 위르겐 뢰버였는데 감독 부임 후 첫 경기에서 바이에른을 3:2로 잡으며 쾌조의 스타트를 기록하는 듯 했으나 이후 7경기에서 6패를 당하며 17위까지 떨어지자 경질되었고, 얼마 전까지 함부르크의 감독이었던 토마스 돌이 강등위기의 팀을 수습하며 9위로 마감했다. 33라운드 홈에서 열린 샬케와의 더비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라이벌의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가로막았다. [8] 재정 개선 + 꾸준한 성적으로 인해 2013년 현재 도르트문트의 수입은 세계 축구 구단중 10위이며(딜로이트 풋볼 머니 리그 기준) 주급제한을 풀고 유스에 대대적인 투자가 가능할 정도의 수준에 올라왔다. 이렇게 부활한 건 바츠케 회장이 돈을 잘 안 쓰고 쓸 곳에만 쓰며 아낀 것이 크다. 여담으로 2014-15시즌이 시작되기 전 챔스 진출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챔스 보험을 들어놨다고 한다. 여기서도 그의 운영력과 예지력을 엿볼 수 있다. [9]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결국 2021년 7월에 맨유로 €85+10m 에 이적했다. [10] 참고로 초어크의 첫 영입 선수는 데데였다. [11] 지금은 WK-Weltklasse(월드클래스), IK-Internationale Klasse(인터내셔널 클래스), NK-Nationale Klasse(내셔널 클래스)로 분류되지만, 2020-21 시즌전에는 NK가 없었고 WK-IK-K-B로 등급이 매겨졌었다. 이중에서 K-Im weiteren Kreis는 리그 내 경쟁력 있는 수준으로 평가받고, B-Blickfeld는 주목할 만한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12] 2012-13 당시 분데스리가로 임대와 좋은 모습을 보였던 지동원이 B를 받았던 것을 보면 B등급도 어느정도는 좋다고 가늠이 된다. 하지만 1994-95 시즌 초어크의 활약은 고작 B에 매겨질 수준이 아니라고 보면 된다. [13] 물론 15골을 터뜨리면서도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B등급을 받은 것도 잘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