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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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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2.1. 1998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의 기세를 바탕으로 1998년 10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아시아 U-19 대회에 소집된다.[1] 김은중과 투톱을 결성한 이동국은 6경기 출전 5골을 뽑으며 득점왕을 차지한다. 중국과의 경기에서 1골, 이라크에게 2골, 일본에게 2경기에서 2골을 뽑았다. 일본과는 두 경기를 치렀는데, 예선 경기에서 김은중과 이동국이 골을 뽑으며 2:1 승리[2], 결승전에서도 김은중과 이동국이 골을 뽑으며 2:1 승리를 차지했다.[3] 특히 결승전에서 이동국의 터닝슛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며, 월드컵에서의 슈팅과 이 결승골을 바탕으로 이동국은 일약 국민적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이동국은 잠깐 소속팀으로 복귀, 아챔 알바를 뛰고 이번에는 호주에 있는 청대에 합류해 1달간의 전지훈련에 참가한다. 절친 김은중도 함께였는데 이동국이 좀 심하긴 했지만 비시즌 기간 이딴 거 없기는 마찬가지라 둘 다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지만 조영증 감독은 특별 훈련을 통해 정상 컨디션으로 회복시키겠다고 자신한다.

2.2. 1999년 FIFA U-20 월드컵

4월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다. 조의 구성은 포르투갈, 우루과이, 말리, 한국. 포르투갈 전에서 히카르도 소사가 1골, 시망 사브로사가 2골을 넣으며 김용대가 지키는 한국 골문을 유린, 한국은 3:1로 패배한다. 우루과이전에선 3분 경 들어간 1골을 넘지 못하고 패배한다.[4] 조영증 감독은 신나게 두들기고도 골이 안 들어간 경기에 격앙, 유명세로 축구하지 말라 운운하며 이동국을 닦달한 후 해이해진 정신력 문제 및 칼을 갈던 서브에게 기회라는 명목 아래 이동국을 선발에서 제외하고 나희근, 서기복 등을 투입한다.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한 말리와의 마지막 경기, 한국은 설기현의 2골과 나희근의 PK로 앞서가나 후반 55분이 지나 3분 만에 말리의 연속골이 터지며 아프리카 리듬이 살아나자 조감독은 서기복과 나희근을 바로 빼버리고 이동국과 우진석을 투입한다. 그리고 경기는 70분에 이동국의 1골로 마무리, 4:2.

한편 예선에서 준우승했던 일본은 잉글랜드와 같은 조에 소속, 잉글랜드가 살신성인 3전 전패를 헌납한 끝에 4팀 중에 3팀이나 토너먼트에 진출해 준우승까지 차지한다.[5] 이 대회 우승국은 훗날 유로와 월드컵까지 제패할 스페인.[6]

3.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3.1. 2000 시드니 올림픽

1998년 11월, 이동국은 올림픽 대표팀으로 소집, 허정무 감독의 첫 경기인 카리브해 올스타팀과의 경기에서 득점을 넣으며 확실하게 눈도장을 박는다.그리고 12년에 걸친 애증의 시간이 시작된다. 22일 한중 정기전 상하이 원정에서도 올대 자격으로 참가하나 중국의 순지하이 리웨이펑의 분투로 0:0 무승부.

1999년 1월에도 이동국은 올대에 소집된다. 사실 이 즈음 올대 국대를 겸임하던 허정무 감독이 각급 축구대표팀을 상시 소집해서 훈련시켜 팀의 경기력을 높이자는 건의를 했고 축구협회에서 수리를 하였다. 국대는 한 달마다 한 번씩, 올림픽 대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훈련하자는 계획이 수립되어서 쓸데없이 몸만 바쁜 나날이 이어질 것은 안 봐도 자명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 때 올림픽대표를 초청해 열릴 던힐컵이라는 대회 및 본게임인 시드니 올림픽에 대비, 호주 전지훈련에 나섰고 이동국은 평가전에서 4경기 3골을 집어넣으며 주전 낙점을 받았다 한다.

2월 베트남에서 열린 던힐컵 경기는 날씨가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등 한국과는 정반대의 날씨를 자랑했다. 이동국은 중국을 2골 1어시로 농락, 말레이시아는 김도균, 최철우와 함께 1골 씩 터트리며 3:0 승리, 어시스트는 박진섭. 불가리아는 5:1로 우주에 보내주며 이란과의 4차전에 돌입, 이동국과 설기현이 보란 듯 1골씩을 터트리며 2:0 승리를 이끌었다. 허나 이 시기 포항은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예선 기간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동국이 빠지는 통에 3위로 조별예선을 탈락하고 만다.

던힐컵 결승상대는 지난 대회 우승팀인 중국, 1차전에서 2골 1어시로 짓밟았던 이동국을 맞아 중국은 소림축구의 심후한 내공을 선보인다. 소림 무공의 손속이 지독히도 잔인함에 격분한 이동국은 후반 초반, 당시 소림 사커의 선봉장 리웨이펑성님과 쌍방 팔꿈치를 교환하고 심판의 앞에서 동반 레드카드로 합의, 퇴장을 당한다. 경기는 연장전 최철우의 골든골로 1:0 마무리.[7]

포항은 2월, 이동국이 올대에 차출된 기간 동안 치러진 아챔에서 탈락한 것에 분개, 이동국이 나이지리아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모로코행 비행기에 태워 아시아 챔스 우승팀과 아프리카 챔스 우승팀이 붙는 경기인 아프로 아시안 클럽 챔피언쉽에 참가시킨다. 저저번 대회에서 성남이 통합 5:0으로 가볍게 컵을 따냈지만 포항은 저번 대회 이집트의 자말렉 SC에게 원정골 득실로 패배했고, 올해도 이동국이 청대 때문에 불참했던 4월 11일의 홈경기에서 2:2로 비겼기에 독이 올라 있었다. 그래봤자 4월 25일 경기에서 패배하고 말지만...

언론은 이때까지도 대표팀 지상주의라, 이동국의 혹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긴 있었으나 오히려 그 초점이 어긋나 있어, 갖은 돌림빵을 당하며 주전 스트라이커를 써먹지도 못하는 포항에게 너희들이 양보하고 이동국에게 휴식을 준 다음에 올림픽 대표팀에 양보하라~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아챔 탈락하고 아프로-아시안컵도 날린 포항은 무슨 죄여...

이동국은 리그와 아프로-아시안컵 등 잠깐 소속팀 알바를 뛰고 나서 허정무 감독의 올대에 합류한다. 5월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1차 예선, 이동국은 25일 스리랑카, 27일 대만, 29일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 출전해서 6골 1어시를 작렬하며 뛰어난 양학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6월 2일 SK와의 경기를 시작으로 다시 소속팀으로 복귀한다.

10월 다시 올림픽 대표에 소집되었으나 이동국은 몸이 좋지 못해 평가전과 중국과의 1차전을 소화하지 못했으나 18일 바레인 원정에 교체되어 들어오자마자 1:0 경기의 결승골을 터트리고 29일 중국과의 2차전 원정경기에서도 선제골을 성공시키며 경기는 1:1 무승부를 거둔다.

이미 본선진출을 확정지은 한국은 11월 13일 바레인과의 경기에서도 S.E.S.와 군악대, 코요태를 초청하고 이미 시대사의 영역 고종수와 이동국을 노리는 여학생들을 무료입장을 시키는 등 축제분위기였다. 경기는 역전승, 3승 1무로 올림픽 본선 진출. 이동국은 조별예선에서 총 8골을 넣는다. 훌륭한 양학능력 과시.

12월, 이동국은 작년에도 그랬듯이 올해 역시 휴식기 비슷한 것도 부여받지 못한 채 올림픽대표팀의 국내 전지훈련에 참가한다. 휴가랍시고 며칠 정도 놀고, 올림픽 대표팀 멤버를 모아 금강산 관광이나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언론은 어린 선수의 혹사에 관심을 쏟기 보다는 올림픽 대표팀, 휴가도 반납하고 태릉에서 구슬땀 따위의 기사나 내보내며 혹사를 도리어 부추겼다.어째 서울 소재 모 야구구단 냄새가 나는데...

2000년이 밝자마자 이동국은 올림픽대표팀 자격으로 호주 4개국 친선대회에 참가하러 출국한다. 9일 이집트와의 경기는 설기현과 이관우의 골로 2:0, 12일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는 이동국, 설기현, 최철우의 골로 3:0, 15일 호주와의 경기는 이동국과 설기현의 골로 호주를 잡았다. 박지성이 막내이자 뉴페이스로 참가했으며 아직도 허정무 박지성을 발굴했다고 회자되는 계기. 올대는 전훈장소를 뉴질랜드로 옮겨 21일, 23일 뉴질랜드와도 연습경기를 가졌다.

8월에 이르자 9월 올림픽을 대비한 평가전이 한창이었고, 9월에는 본격적인 올림픽 무대가 열렸다. 당시 멤버 중 굵직한 멤버만 해도 김용대, 홍명보, 김상식, 이영표, 박지성[8], 송종국, 고종수, 이천수, 김도훈, 이동국 등이고 다른 멤버들도 당시 컨디션이 좋았으며 본프레레의 나이지리아를 평가전에서 5:1로 뽀개는 등 분위기도 좋았다.

그러나 수비핵심 홍명보가 부상으로 이탈함에 인해 수비 라인에는 큰 혼란이 일었다. 올림픽 16개국 본선 첫 게임 스페인전, 카를로스 마르체나 다비드 알벨다, 차비 에르난데스의 중원 라인 앞에 이천수와 고종수, 김도균 등 한국의 미드필더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당시 밀란에서 뛰던 호세 마리와 유명한 공격수들인 라울 타무도와 앙굴로 등에게 안드로메다행 열차를 타며 벨라마잔, 호세 마리, 차비에게 거의 10분 간격으로 전반에만 3골을 내줬고 경기 양상은 더 처먹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무릎에 붕대를 감았던 이동국은 이 경기 후반 20분께에 교체출전했고, 허정무는 그 경기력에 만족하여 필승의 의지를 다지며 모로코전에 선발출전시킨다. 경기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빨대 꼽고 빨다가 김도훈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이천수가 차고, 골키퍼에 막힌 것을 다시 이천수가 재차 차넣으며 1:0 승리한다. 이동국은 리드를 잡자 교체되었다.

다음 상대는 스페인을 3:1로 이긴 칠레. 이천수가 넘어진 상대의 얼굴을 발로 까면서 경기 초반부터 퇴장당하나역시 밀레니엄 특급! 이동국이 어떻게든 골을 우겨넣었다. 한국은 이후 결사방위 태세로 들어가며 1:0 승리를 따냈고 이동국은 풀타임을 뛸 몸상태가 아니었던 탓에 경기 중반에 교체.

한국은 2승 1패 대회 9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 모로코가 3전 전패 조공을 바치는 바람에 득실차로 아쉽게 8강 실패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스페인전 이후 한국축구 헛물만 들었다, 말만 잘한다며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고 칠레전에 이긴 후에도 왜 스페인전에 이런 투지를 발휘 못했냐고 비난했지만...당시 스페인이 사무엘 에투의 카메룬에 밀려 준우승을 차지했고 칠레마저 동메달을 땄던 걸 생각해 보면 홍명보의 공백이나 이천수의 퇴장이 아쉬웠던 대회.

3.2.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1 이운재 [[와일드카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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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조병국 · 3 현영민 · 4 박요셉 · 5 김영철 [[와일드카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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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박용호 · 7 변성환
8 김두현 · 9 이천수 · 10 박지성 · 11 최태욱 · 12 이영표 [[와일드카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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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
· 13 김동진 · 14 박규선
15 조성환 · 16 김용대 · 17 최성국 · 18 김은중 · 19 박동혁 · 20 이동국
C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최강희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최진한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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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끝나고 이동국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주장을 맡아 출전했고 8강까지 4경기 연속 득점에 성공하면서 득점 선두에 올랐다.

그러나 구덕에서 열린 4강전에서 이란 승부차기로 패해 3-4위전으로 밀려나 동메달에 그치며 그의 월드컵 탈락 한풀이는 실패했고, 간절했던 금메달은 이란이 갖고 갔다. 네쿠남 : 앗싸 금메달![9] 결국 빼도박도 못하고 군대가 확정된 이동국은 시즌 마감 후 광주 상무 불사조에 입대, 군 복무를 해야 했다. 이 때 승부차기를 실축했던 선수는 그 유명한 "이동국 군대가라 슛"의 이영표였다. 10년이 지나고 나서 이영표는 이동국 군대가라 슛에 대해 사과를 했다. #

네티즌들은 이영표 이동국을 군대 보내 버렸다고 했고, 패배 후 이동국이 우는 사진엔 '엉엉 군대가기 시러~'하는 댓글을 달았다.

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A매치 105경기 출전 33골 득점, 역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득점 순위 공동 4위

4.1. 차범근호

4.1.1.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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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삐뽀삐

우월한 피지컬과 기술을 앞세워서 어린 나이 때부터 청대에 선발된다. 이미 1997년부터 고등학생 신분으로 국대 상비군에 포함되고, 프로 1년차 19살의 나이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되긴 했지만, 김도훈 최용수에 밀려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월드컵 32강 본선에서는 5:0으로 패한 네덜란드전에 후반 교체출전하여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중거리 슛과 헤더 슛을 날렸다. 둘 다 득점으로 이어지진 않었지만 일방적인 슈팅과 실점을 당하는 상황에서, 교체 투입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신인선수가 그 네덜란드를 상대로 유효슈팅을 2개나 날려주니 그나마 체한 것이 내려간 기분이었다. 이 경기로 이동국을 전혀 몰랐던 일반 대중에게 몇 십분만에 대한민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그와중에 송재익 캐스터는 이동국을 김동국으로 발음했다[10]

4.2. 허정무호 1기

4.2.1.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같은 해 12월에 열린 방콕 아시안 게임 23강 본선은 마지막 A매치 대회로 김병지, 최용수, 유상철, 윤정환 등 호화멤버. 대회 기간 동안 최용수가 아시아를 짓밟는 위엄을 과시했으나 이동국은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최용수의 파트너 자리를 김은중에 넘겼다. 최용수와 투톱을 이뤄 선발출장한 첫 경기 투르크메니스탄전에서 최용수가 2골을 넣는 활약을 했음에도 2-3 패배를 당하자 허정무 감독은 2골 넣은 최용수까지 포함해 선수단 전체를 호되게 질타했는데 특히나 강하게 지적받은 선수가 이동국이었다. 그라운드에 있는 내내 붕떠있었다고 지적하며 다음 경기부터 김은중을 기용했다.

팀은 8강까진 최용수의 맹활약을 앞세워 순항했으나 8강전에서 두명이 퇴장당한 홈팀 태국에게 1:2 연장 골든골 패배를 당하며 8강 6위로 짐을 싸야했다.

4.2.2. 2000 CONCACAF 골드컵

2000년 전반기는 골드컵 출전을 제외하고는 독일에서 재활, 이탈리아에서 페루자의 오퍼를 받아 돌아다니며 통짜로 날렸고, 7월부터는 다시 프로 무대에서 모습을 보이며 올대와 국대에서도 친선 경기 등 잡다한 경기에 출전한다.

2000년 2월은 성인대표팀의 멤버가 되었다. 한국은 북중미 골드컵에 참가, 캐나다와 코스타리카와 한 조에 속했다. 첫 경기인 캐나다와의 경기에서 0-0으로 비기고, 코스타리카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이동국의 선제골[11]로 한국은 1:0으로 리드를 잡으나 완초페의 동점골이 터진다. 이후 이민성의 중거리[12]가 작렬하며 8강진출이 코앞이었으나 동점골이... D조의 3팀은 모두 승점 2점 2무이고 특히 캐나다와 한국은 득실차뿐 아니라 득점과 실점까지 모두 같은 상황, 한국은 동전던지기에 의해 고배를 마시고 대회 9위로 8강 실패하며,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그리고 동전던지기로 경합했던 캐나다는 우승했다.

그리고 이동국의 무릎은 이때부터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잇따른 강행군 앞에서는 인간의 무릎이 버틸 수가 없는 법이다. 1년 새에 국대, 청대, 올대, 주요 지역예선과 본선이 아닌 전지훈련, 시범경기, 시시한 국제컵대회, 클럽, 리그, 컵, 올스타전, 아챔, 아프로아시안컵, 아프리카, 유럽, 오세아니아, 중동, 동남아, 북미, 추웠다, 더웠다, 추웠다, 더웠다... 호날두도 이러지는 않는다.

결국 골드컵 대회 중에서는 무릎에 붕대를 감고 뛰었고 대회 기간이 끝나자 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끝내는 선진의료의 혜택을 받기 위해 독일로 날아가 재활을 하게 된다.

4.2.3.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이후 10월 이동국은 국가대표에 소집, 두바이에 날아가 LG컵 4개국 친선대회에 출전한다. 5일, 선발출전했으나 아랍에미리트와의 경기에서는 1:0으로 지던 경기를 이영표의 골로 간신히 따라잡았으나 승부차기 끝에 패배, 7일, 호주와의 경기에도 선발출전해 2:0으로 지다 4:2로 지던 경기에서 마지막 4번째 쐐기골 성공하며 준우승을 거두고 본격적인 아시안컵 무대를 위해 레바논으로 건너간다.

AFC 아시안컵을 앞두고, 올림픽 9등 탈락 때문에 국대마저 경질 위기에 놓였던 허정무는 사퇴를 선언하는 실갱이 끝에 유임, 올림픽 9등 탈락의 한을 반드시 아시안컵 우승으로 풀겠다고 언플을 풀어놓는다.

10월 13일에 열렸던 중국과의 12강 조별리그 첫 경기. 이영표와 노정윤의 골에도 불구하고 홍명보가 억울하게 퇴장하고 PK를 받는 등 사우디 주심의 오심과 중국의 만리장성 축구를 뚫지 못해 2:2로 무승부. 이어지는 쿠웨이트와의 16일 경기는 소나기 슈팅을 퍼부었으나 1:0 패. 이로서 한국은 벼랑 끝에 몰리나 19일 인도네시아와의 경기에서 이동국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조 3위로 8강에 올라간다. 결과적으로는 비기기만 했어도 올라갔지만 당시 상황상, 국민정서상 다득점이 필요했기에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 3위의 대가는 8강에서 저번 아시안컵에서 6:2로 개처럼 털렸던 이란과의 만남. 언론들은 저번 대회 한국전에서 홀로 4골을 처넣으며 FC 바이에른 뮌헨 진출까지 한 알리 다에이를 두려워했다. 팀이 1:0으로 후달리게 되자 무릎 때문에 벤치에 있던 이동국은 교체를 자청했고 허정무도 승인한다. 후반 45분, 코너킥 상황에서 이동국의 슈팅을 이란 골키퍼가 간신히 막아낸 걸 김상식이 주워먹으며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하고 연장 9분 노정윤의 땅볼 크로스를 받아먹으며 이동국은 이란을 털어버리는 결승골을 작렬한다.

26일 벌어질 4강은 전대회 준우승팀 그리고 이번대회도 준우승할 팀 사우디와의 일전. 팀은 2:1로 패배했다. 이동국은 선발로 출장,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와중에 어떻게 어떻게 한 골을 집어넣었다.

29일 벌어질 3, 4위전은 중국과의 일전. 이번에는 무승부 이런 것도 없는 외나무다리 승부였고 여기서 진다면 허정무의 지도자 생활은 불보듯 뻔했다. 허정무는 이동국을 선발 투입했고 이동국은 어김없이 보란듯이 골을 넣는다. 경기는 1:0으로 끝나고 3위로 마무리한 대회에서 이동국은 6골로 득점왕을 차지한다. 허정무는 온갖 비난을 뒤집어쓰며 국대 감독에서 내려간다.

훗날 허정무와 이동국이 이 사건에 대해서 술회하기를 허정무는 이동국이 뛸 수 있다고 해서 내보냈다, 이동국은 감독님께 뛸 수 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뭐 그러나저러나 이제 이동국의 무릎은 맛이 갔고 떨어진 스피드는 평생 돌아오지 않는다.

4.3. 히딩크호

이렇게 국가를 위해 몸바치고 그 능력도 아시아를 떨쳐 울렸으니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명단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허정무호의 졸전을 본 축협은 축구계 대표 인사를 긴급 소집하며 회의에 들어가고 거스 히딩크가 한국 감독으로 선임된다.

널리 알려졌듯 히딩크는 2년 동안 온갖 선수들을 다 실험해 보며 선수들의 조합을 고심하고, 이동국은 오랜 혹사에선 벗어나지만 냉혹한 주전 경쟁 앞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무렵 이동국은 계속되는 혹사로 폼이 떨어진 상태였다. 2002년 초에 이동국의 소속팀 감독인 최순호 감독은 이동국은 지금 대표팀 경쟁을 할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니라며 우려하기도 했다. 따라서 최순호 감독은 이동국이 월드컵에서 꼭 필요한 선수라면 지금은 2002 월드컵 본선 일정에 맞게 이동국의 몸상태를 회복시켜야할 시기라고 밝히기도 했다. 결국 최순호 감독의 우려대로 정상적인 몸상태가 아니었던 이동국은 주전경쟁에서 밀리게 되면서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들지못했다.

2002 월드컵 엔트리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해서 히딩크가 본인의 자서전인 '마이웨이'에서 밝히기도 했다. 히딩크는 탈락한 선수들에게 직접 연락을 해서 탈락 이유를 말했다고 한다. 이동국에게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수비가담이나 체력적으로 더 나아지지 못했고 부상도 자주 있었으며 스트라이커로서도 감각은 있지만 황선홍과 최용수에 비해 뒤쳐졌다고 한다. (아마 멀티플레이 전술에 이동국이 맞지 않은 것도 클 것이다.) 거기다 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안정환의 겉멋 든 모습을 지적하고 주장 홍명보를 내치던 히딩크였는데 이전까지 언제나 국가대표 부동의노예주전이였던 이동국은 벤치 생활에 적응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이동국은 실망했지만 직접 엔트리제외 이유를 말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고 한다.(히딩크는 이동국이 탈락 이유를 듣고 실망했다고 했지만 그는 역시 프로답게 탈락을 받아들였다면서 진짜 프로라고 인정했다.) 또한 히딩크도 이동국을 발탁하지 않았던게 끝내 마음에 걸렸는지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네덜란드로 돌아간뒤 한국 취재진이 찾아오자 이동국은 잘 지내냐고 묻기도 했다.

4.3.1. 2002 CONCACAF 골드컵

2002년 골드컵에서도 이동국은 교체 멤버로 뛰는 등 마지막까지 경쟁했으나 팀 엔트리 밸런스[13]와 전방에서부터 압박을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이행할 수 있는 선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된다. 그동안 각급 대표팀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어린 나이에 지독한 부상의 악령에 시달렸는데, 한국인이었으면 정에 끌려서 안 넣기가 어려웠고 이동국 자신으로서도 생애 첫 조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출전을 내심 기대했을 것이다.[14][15]

그 때 당시 인터뷰 (02년말에서 03년으로 추정)에서 당시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소주를 한 병을 부으면서 하루를 시작했으며 온 나라가 축제에 빠진 월드컵 기간 내내 축구도 보지 않고 폐인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죄수생활 같았다고 한다. 김남일이 월드컵 끝나고 한잔 하러 갔다가, 만취해서 주사로 길에서 구르며 동국이가 불쌍하다며 울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의 충격으로 아직도 이동국의 부모님은 TV에 히딩크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고 한다(...)

그리고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박항서 감독의 부름으로 엔트리에 합류 하여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였으나 알다시피 이란과의 승부차기 끝에 패하였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2002년은 환희의 한해였겠지만 이동국에게 있어 절망 같은 한해였을듯.

4.4. 코엘류호

2002년 3월 이후 히딩크호는 물론 이후 임시 감독이던 김호곤 체제에서도 선발되지 못하다가, 코엘류호 1기와 2기 모두 선발됐다.

그러나 1기에선 최용수 안정환에 밀려 출전하지 못했고, 2기 경기였던 한일전엔 선발 출전했으나 부진했고 이후 코엘류 체제에서 단 한 차례도 선발되지 못했다.

코엘류 감독은 최전방 자원에게 어마어마한 활동량을 요구해 당시 무명에 가까운 조재진을 대표팀에 데뷔시켰고, 이외에도 리그 내에서 이동국 보다 좋은 활약을 보이는 최용수, 김도훈, 우성용 등 당시 대표팀에 9번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가 포화함에 따라 이동국은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4.5. 본프레레호

4.5.1.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그러나 2004년 아시안컵을 앞두고 조 본프레레 감독 부임하자마자 리그에선 그저 그런 활약을 보이던 이동국을 2년 만에 전격발탁했다.

그러고 아시안컵 대비 평가전이자 본프레레호 첫 경기인 바레인전 전반 2분 만에 득점하며 본프레레호 첫 골이자 개인적으로 3년 만에 A매치 득점을 기록했다.

그렇게 본프레레 감독의 25번의 A매치 명단에 개근하였고, 이 중 23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넣어 본프레레의 황태자로 등극하게 된다.

예상대로 아시안컵 명단에 포함됐다.

코엘류호와 달리 안정환도 후보로 밀어내며 주전 원톱 공격수로 급부상했고 대한민국이 치른 4경기에 모두 선발 출전했으며 4경기 4골을 넣어 득점 3위에 올랐다.

대한민국은 8강에서 이란과 피를 토하는 혈투 끝에 4:3으로 분패했다.

4.5.2. 아시안컵 이후, 독일에게 패배를 안기다

아시안컵 이후 본프레레호의 황태자로 급부상하며 안정환과 주전 투톱으로 대표팀 핵심으로 거듭났다.

특히 2004년 12월 19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A매치에서 이동국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3:1로 완파하고 올리버 칸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발리슛[16]으로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참고로 이 경기에서 한국이 독일을 이긴 경기는 단순한 친선 경기가 아니었다. 독일 축구협회에서 추진한 독일 국가대표팀의 투어 행사의 일환이었으며 구체적으로는 일본, 한국, 태국 등 아시아 지역의 대표팀들과 경기를 가지면서, 곧 열릴 예정인 2006 독일 월드컵과 자국 국가대표팀의 홍보를 꾀했던 것.[17] 일본과의 경기는 시차 적응 문제도 있고 해서 후보 선수들을 대거 내보낸 2군으로 3-0의 대승을 거뒀고, 한국과의 경기에서 비로소 분데스리가 주전급 멤버들로 구성된 사실상 최정예 멤버들을 내보냈건만 김동진, 이동국, 조재진에게 골을 내줘 1:3으로 패배. 그나마 미하엘 발락이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기록해서 독일이 영패는 면했으며, 또한 발락의 페널티 킥을 막아내 2년 전 패배의 아픔을 복수한 이운재의 선방과 올리버 칸을 일순간 허수아비로 만든 이동국의 발리골이 경기의 묘미였고 축구협회 설문조사 사이트에선 그의 골이 2004년 당시 올해의 골 1위로 선정되었다 #[18]



독일전 이후 본격적으로 부동의 원톱으로 거듭났다.

4.6. 아드보카트호

2005년 10월 딕 아드보카트로 감독이 교체되어서도 이동국은 여전히 대표팀 공격의 중심축으로 맹활약했다. 아드보카트가 첫 평가전을 치르고 “아직 이동국만한 공격수를 찾지 못했다”라며 강력하게 신뢰를 보였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A매치 33경기에서 14골 4도움을 터뜨리며 대한민국을 월드컵 본선으로 이끄는 에이스 역할을 했고 본인 또한 2002년의 한을 곱씹으며 최절정의 폼으로 월드컵을 준비했다.

원정 16강과 본인의 2002년 월드컵의 한을 풀기 위한 강력한 동기부여 때문인지 본인도 이를 악물고 2006 시즌을 준비했었고, 시즌 초에 연속골 신기록을 세울정도로 폼이 절정에 올라있었지만, 2006년 K리그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어 또 다시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었다.

월드컵 기간에는 독일에서 십자인대 수술 후 재활 치료를 받으며 경기장에서 대표팀 경기를 관전했다. 당시 KTF가 이동국을 내레이션으로 섭외해 월드컵 광고를 내보냈는데 이로 인해 많은 동빠들은 눈물을 흘렸다 카더라. 당시 대표팀의 원톱으로 이동국 대신 발탁되면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인 조재진은 한국의 16강 진출이 아깝게 좌절된 뒤, "동국이 형만 있었어도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라면서 슬퍼하기도 했다.

사실상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 1등 공신이였지만 부상이 너무나도 아쉬운 때이기도 하다. 이제서야 대한민국 대표 공격수로 자리 잡아가면서 에이스로 되어가는 과정 중이였고, 한창 물이 오르는 시기였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국가대표 경력만 본다면 이 때가 국가대표 소속으로 최고이자 마지막 전성기였을 것이다. 비교적 월드컵 진출 과정에서 부진했던 태극전사들을 경기력에도 불구하고 본선으로 이끈 것이 최종예선 득점 1위에 올랐던 이동국이였기에 특히 더욱 아쉬웠다.

축구팬들 입장에서도 이때 이동국의 부상과 이로 인해 독일 월드컵에서 17위로 아쉽게 16강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이동국을 너무나도 아쉬워했다.

4.7. 베어벡호

4.7.1. 2007 AFC 아시안컵 아세안

1 이운재
C
· 2 송종국 · 3 김진규 · 4 김동진 · 6 이호 · 7 최성국 · 8 김두현 · 9 조재진
10 이천수 · 11 이근호 · 12 이동국 · 13 김치곤 · 14 김상식 · 15 김치우 · 16 오범석 · 17 김정우
18 우성용 · 19 염기훈 · 20 손대호 · 21 김용대 · 22 강민수 · 23 정성룡 · 27 오장은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코치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브라질 국기.svg 코사


미들즈브러 이적 이후 부진을 보이던 2007년 당시는 이렇다할 선수가 없던[19] 아시안컵 대표팀에 발탁되었지만, 대표팀이 6경기에서 고작 3골을 넣는 총체적인 득점력 난조 속에서 이동국은 무득점을 기록.[20] 또한 대회 기간 도중 이운재, 우성용, 김상식과 함께 무단으로 숙소를 이탈하여 룸살롱에서 을 마신 것이 들통나 국가대표 자격정지 1년, 대한축구협회 주관 경기 출장정지 2년을 처벌 받았다.

술을 마시러 간 것 자체도 잘못인데, 거기가 또 여자 부르는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를 불러 2차(=성매매)를 나가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룸살롱이었다(...). 당시 주동자들은 고참들끼리 술을 마시면서 의견을 나눠 팀을 이끌어나갈 방향을 찾으려는 의도였다고 변명했다. 이동국이 또 이 고참들 중에서는 가장 막내고 나이 차이도 꽤 된다. 즉, 먼저 가자고 했을 리는 없고, 가자고 했을 때 안 가겠다고 거절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긴 했다. 물론, 대회 도중 룸살롱을 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항이다. 당시 부인은 임신중이었는데...[21]

이 대회까지 AFC 아시안컵에 3회 출전하였으며 통산 15경기 출전 10득점을 기록하였다. 이후 아시안컵에 발탁되지 못했다. 최악의 부진을 겪던 시기라 커리어를 많이 손해본 케이스인데 지난 대회인 2004 AFC 아시안컵 중국에 출전했을 때까진 통산 10경기 출전 10득점이었다(...)

4.8. 허정무호 2기

이후 징계가 끝난 2009년 전북에서의 부활과 K리그에서 연일 득점 행진을 기록하며 대표팀 재발탁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마침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맹활약한 이근호가 급격한 부진에 빠지자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을 2년 만에 대표팀에 전격 복귀시키면서 주전인 박주영을 제외한 대표팀 공격진 경쟁체제가 들어갔는데, A매치 4경기에서 3골을 기록한 끝에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2010년 3월 4일 코트디부아르전에서는 수비수의 머리에 맞고 방향이 바뀐 크로스를 특기인 발리슛을 성공시켜 기선을 제압. 2010년 5월 16일 있었던 에콰도르와의 경기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지만, 그 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당해 2~3주간 아웃되어 지난 독일 월드컵 직전의 부상 악몽이 되살아나나 싶었으나 간신히 회복하여 결국 이근호를 제치고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어 12년 만에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되었다.

4.8.1.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1 이운재 · 2 오범석 · 3 김형일 · 4 조용형 · 5 김남일 · 6 김보경 · 7 박지성
C
· 8 김정우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이승렬 · 12 이영표 · 13 김재성 · 14 이정수 · 15 김동진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정성룡 · 19 염기훈 · 20 이동국 · 21 김영광 · 22 차두리 · 23 강민수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허정무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스태프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태하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남아공 월드컵 B조 조별예선 2경기 아르헨티나전에서 이미 경기 자체는 패색이 지친 후반 상황에 교체로 출전했다. 그리고 본인도 짧은 시간동안 별다른 활약 없이 이래저래 아쉬운 월드컵 복귀전이 되었다.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이 나이지리아를 위해 준비된 카드라며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시키겠다고 밝혔다. 예전 같았으면 동빠와 동까 사이에서 키배가 벌어질 주제였겠지만, 염기훈이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심각하게 부진을 한지라 부디 오염라인만 좀 빼주세요...라는 의견이 지배적.

하지만, 패배라는 결과에만 집착하는 네티즌과 달리 대표팀 전술상 이동국을 기용하는 것은 아주 큰 모험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대표팀은 그간 박주영-염기훈 투톱 체제를 고수했지만 실제로는 박주영이 원톱으로 포스트 플레이를 해주고 염기훈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미드필더를 지원하는 형태였다. 아시아팀과의 경기와는 달리 한국이 공격적으로 나갈 수 있는 팀은 단 하나도 없는 월드컵 본선을 맞아 나온 전술로 여기에 주전으로 출전해야 효율이 나오는 이동국을 쓰기는 힘들다. 염기훈이나 김남일의 기용에 대한 비판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주장으로 그 자체로 큰 실수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김남일 교체의 경우 공세를 취하는 상황에서 교체로 경기의 맥을 끊고 나이지리아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줬다는 측면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16강 우루과이전에는 박주영 원톱에 김재성이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온 4-2-3-1 전술로 나왔다. 이동국은 후반 15분경 김재성과 교체 투입되어 빈자리를 찾아들어가며 나름대로 괜찮은 움직임을 보여줬으며 1-2로 뒤진 후반 42분경 박지성의 절묘한 스루 패스로 결정적인 일대일 찬스를 잡아냈고, 이동국의 슛은 우루과이 골키퍼 페르난도 무슬레라의 가랑이 사이로 절묘하게 파고들어갔는데....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어요[22]

그러나 무슬레라의 몸에 맞아 힘을 잃은데다 축축하게 젖은 그라운드와의 마찰로 인해 공은 속력을 내지 못하고, 그야말로 달팽이 같이 느린 속도로 골라인을 향해 기어가다가 이내 물회오리(...)를 만들며 멈춰버렸다. 그리고 골라인을 단 수십 센티미터 남겨놓고 멈춰버린 공을 이내 우루과이 수비수 디에고 루가노가 걷어내버리고 말았고, 천금같은 동점골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것이 그토록 회자되는 이동국의 물회오리 슛이다.



그리고 한국은 그 찬스 이후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지 못했고, 경기는 2-1 종료됨과 동시에 동국대 갤러리는 폭발했다(...). 당연하지만, 부인 이수진의 미니홈피는 이동국의 헛발질로 찬스를 날리는 순간 빛보다 빠른 속도로 폐쇄되었다. 새벽 2시 33분 현재 4만명이 넘는 분노를 품은 네티즌들이 헛발질을 하고 돌아갔다.

당시 경기장 잔디상태는 월드컵 경기장치고는 좋지 못한 상태였다.[23] 하지만 공격수가 페널티킥보다 더 가까운 지점에서 동점골을 뽑아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24]

수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아가며 힘들게 출전한 월드컵이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쓸쓸히 끝마친 것. 이동국도 이후 인터뷰에서 "이건 내가 생각했던 월드컵이 아니었다" 는 정말 한 맺힌 말이 맴돌았다. 한 국가에서 손꼽히는 스트라이커가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한 경기는커녕 합쳐서도 51분 정도밖에 출장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전생에 무슨 업을 쌓았는지 궁금할 정도다.

참고로 이동국은 이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어 '가장 오랜 기간동안 월드컵에 불참했다가 다시 나온 선수'라는 이색적인 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1998년~2010년이었으니 이동국의 공백기간은 장장 12년. 월드컵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아직은 월드컵 출전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2011년 이후로는 국가대표 재발탁에 관해서 '후배들에게 더 기회가 갈 것'이라는 미온적인 태도만 보여주었다.

4.9. 조광래호

월드컵 이후 오랫동안 이동국을 외면해왔던 조광래 감독은 2011년 10월 논란 끝에 이동국을 발탁시켰는데 당연히 K리그 팬들은 불만스러워하는 목소리는 별로 없었다. 이동국 본인의 도전 의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기도 하였고, 다만 전북의 최강희 감독은 "더 이상 동국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으면 한다." 라며 대표팀에 뽑지 말아줄 것을 개인적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폴란드와의 평가전에서 전반 45분을 소화, UAE와의 아시아 지역 3차 예선에서는 후반 종반 교체 투입되어 10분 남짓을 소화했다. 결과적으로만 놓고 봤을 때 이동국은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폴란드 전에서는 박주영-이동국-지동원의 3톱이 가동되었는데, 이동국이 고립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25] UAE전에선 뭘 보여줄 시간조차 부족. 허나 예전과는 달리 이동국보다는 조광래 감독이 더 까이고 있다. 이동국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준비하지도 않은 채, 그냥 뽑아만 놓은 것. 물론 이동국은 역시 안 된다는 식의 시선도 아예 없지는 않다. 이 때 이후 조광래호에서 다시 제외되었고, 본인은 말을 아꼈다. "입을 열면 말실수를 하게 될까봐."라는 것이 이유다.

4.10. 최강희호

이후 조광래 감독이 삿포로 참사 평화왕 사태로 인해 경질되고 월드컵 최종예선까지 사령탑을 최강희 감독이 맡게 되자, 누구보다 이동국을 잘 아는 감독이니만큼 이동국의 활용 여부도 역시 주목되었는데 12년 2월 25일 우즈베키스탄과의 평가전에서 2골, 2월 29일 쿠웨이트와 월드컵 3차 예선에서 후반전 선제골을 기록하면서 한국을 최종예선으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포탈 댓글에는 역시 동까 지분이 더 높았다.

이어 최종예선 3차전 우즈베키스탄전에서 역전골을, 호주와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넣었지만, 두 경기 모두 팀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다.

카타르전에서는 특기인 발리슈팅으로 손흥민줏어먹기 극장골을 넣는데 도움을 줬고, 그전에도 인상적인 헤더 경합, 움직임등을 보여 주었다, 막판 손흥민이 극장골을 넣은 후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손흥민이 만들어준 기회를 하나 날렸다고 그동안 답답했던 대표팀의 경기를 뒤바꾼 활약(한 외신에서도 '이동국이 들어온 후 경기 분위기를 가져왔다.' 라는 인상적인 평을 남겼다. 실제로 이동국에게 높은 평점을 줬다.)은 사실상 없는 취급이 되었다.

레바논 전에서는 근래 들어 최악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반 추가시간에 극적인 김치우의 득점골 이전에 레바논의 수문장인 하산 골키퍼가 그야말로 야신으로 빙의해버렸고 수차례 찾아온 결정적인 득점 기회들을 모두 무산시켜 버렸다. 그 기회들 중 적어도 하나만 성공시켰어도 경기가 그렇게까지 어렵게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움직임이 좋아도 골을 못 넣는 공격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다만 이동국 외에 레바논전에 투입된 공격자원인 김보경, 김신욱, 이근호, 이청용, 손흥민 전원이 최소한 한 번 이상 키퍼와 단독으로 마주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는데도 단 한명도 이를 살리지 못하고 모조리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오죽했으면 당시 중계를 맡았던 허정무 해설위원이 '뭐에 씌인 것 같다'며 할말을 못찾았을 정도.

이란전에서는 상대선수와 몸싸움 경합하면서 코피까지 흘리며 4명의 공격수를 가동한 전술에서 연결고리를 맡고 헤더를 따주는 등 여러모로 열심히 뛰었으나 슈팅 기회조차 한 번 찾아오지 않으며 0-1로 패배해 아쉽게 경기가 마무리되고 말았다.

이 최종예선 3연전으로 이동국에 대한 비난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동국은 현재 대표팀 최고령 공격수이고 결정력으로 이름이 높은 만큼 결정을 지을 때 지어줘야 했으나 짓지 못했다. 또한 베테랑으로써 구심점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등 아주 부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국에게 가해지는 비난이 과한 건 사실이다. 골을 놓친 것에 대한 비난은 그 장면으로 끝나야지 결코 그 장면 하나만으로 그 선수의 모든 것을 평가할 수는 없다. 물론 4년에 한 번씩 혹은 몇 달에 한 번씩 축구 보면 다음이 좀 멀긴 하겠지만 물론 3연전에서 넣었어야 할 기회를 마무리하지 못했으며, 베테랑으로 선수들의 구심점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부진한건 사실이다. 거기에 비판을 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선수 본인도 받아드려야 마땅하나, 사실을 곡해하고 도를 넘어 인격적인 모욕을 퍼붓는 것은 삼가야 한다. 이동국에게 향하는 비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전 세대부터 이어왔고, 지금까지도 끊지 못한 이 악습을 이후로도 끊지 못한다면 손흥민과 같이 더 많은 미래가 남아있는 젊은 선수들에게도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1994년 황선홍과 마찬가지로 그저 대한민국 대표팀 공격수란 까임의 최전방, 오직 씹히기 위해 존재하는 자리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중.

다만 이동국 본인은 국가대표팀에서 느끼는 부담감이 상당한 듯 하다. 내색은 않지만 , 2013년 6월 30일에 경남과의 경기에서 두경기 연속 멀티골을 작렬한 이후 인터뷰에서 국대와 전북에서의 활약이 다른 이유로 심리적인 부분을 꼽았을 만큼 국대에서는 부담을 상당히 느끼는듯 하다. 전북에서는 자기 말고도 해결해줄 사람이 많아 편안한데 비해 국가대표팀에서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뛴다는 점이 다르다고 한다.

4.11. 홍명보호

홍명보호 출범 이후에는 김신욱, 김동섭, 조동건, 서동현 등 K리그의 젊은 공격수들이 우선 선발되며 국대와 멀어진 모양새다. 다만 김신욱 말고는 전부 다 욕만 먹었고 활약이 변변찮아서 국대에서 다시 보기 힘들거라는 의견이 많다. 결국 김신욱을 제외하고는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부 제외되었고, 박주영이 여러가지의 논란 끝에 다시 대표팀으로 돌아온 이후로 홍명보 감독은 박주영을 주전 원톱으로 놓고 김신욱과 이근호를 서브로 활용하면서 이동국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한편, 2013년 7월 8일 인터뷰에서는 월드컵 예선 이후의 까임에 대해서 나는 원래 비난을 많이 받는 선수니까, 내가 방패막이가 되어서 동료들이 비난을 덜 받으면 더 좋은 것 아닌가?라고 답했다. 생불

결국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대해 이동국 본인은 홍명보호 출범 이후 대표팀에 들어간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 월드컵 탈락은 충분히 예상했었던 일로 받아들였고,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선전해줄 것을 기원하였다.

이로서 이동국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가장 비운의 선수로 남게 되었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는 막내로 엔트리에 들어가서 네덜란드전에서만 활약했으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는 거듭된 혹사로 인한 폼저하로 결국 거스 히딩크의 선택을 받지 못해 엔트리에 포함되는 데에 실패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때는 예선에서 맹활약하며 기대를 모았지만 대회를 앞두고 큰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또다시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때야 겨우 월드컵 비행기를 타는데 성공하긴 했으나 이미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도 당한 상태였고 달랑 2경기 교체투입이 전부였다. 결국 이동국의 월드컵 출전시간 총합은 고작 51분에 불과했으며 이는 한경기 풀타임조차 되지 않는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가 개최될 때 이동국의 한국 나이로는 40세. # 사실상 월드컵 출전의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이 큰 브라질 월드컵 출전의 꿈은 그렇게 끝나게 되었다.

4.12. 슈틸리케호

그러나, 이동국의 바람과는 달리 대표팀은 브라질에서 21세기 이후 최악의 성적으로 월드컵을 마쳤고, 홍명보 감독은 불명예 퇴진한다. 결국 울리 슈틸리케가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2014년 8월 26일, 9월 A매치 명단에 발탁되며 1년만에 대표팀으로 복귀했다.

9월 5일 베네수엘라전, 후반 7분 김민우의 코너킥을 수비를 슬그머니 떼어놓은 뒤에 그대로 머리로 연결하여 역전골을 만들고 후반 18분엔 이명주의 크로스가 상대 수비에 맞고 떨어지자 침착하게 오른발 슈팅으로 추가골까지 기록하면서 자신의 A매치 100경기 출전을 자축하게 되었다. 특히 두번째 골을 자세히 보면 크로스가 떠오를 때 수비 둘과 붙었다가 무슨 냄새를 맡은 건지 상대 골대로 몰리는 수비를 먼저 보내고, 수비 머리에 맞아 떨어진 공을 여느 공격수와는 다르게 낮은 바운드로 지체 없이 슈팅을 시도하여 골을 연결하는 모습으로 클래스를 보여줬다. 더불어 이 경기에서 골을 넣음으로 역대 3번째로 전대륙 상대 A매치 득점한 한국 선수가 되었다.

9월 8일 우루과이전에서는 당시 월드베스트 수비로 꼽히는 디에고 고딘에게 완전히 틀어막혔다. 전반전에 수비적으로 팀을 운영하자 스피드가 느린 이동국은 연계에 집중해야할 상황이 되었다. 본인 나름대로는 연계를 했지만, 제대로 연결된 볼은 별로 없었다. 결국 후반 이근호와 교체되며 어느정도 이상 레벨에서는 침묵한다는 의구심을 강화시켰다. 다만 슈틸리케 감독이 내려오기보다는 전방에서 싸워주는 플레이를 지시했다고 한다.

10월 파라과이와 코스타리카전에서도 선발되었고, 코스타리카전에서는 0-1로 뒤진 전반 막판 손흥민의 돌파 후 땅볼 크로스를 절묘하게 잘라먹으며 동점골을 넣었다. 이로써 통산 A매치 103경기 33골을 기록했다.

변함없는 리그에서의 맹활약으로 2015 호주 아시안컵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박주영은 새 팀에서도 여전히 부진한 데다, 김신욱마저도 아시안 게임에서 부상으로 시즌 아웃당해 선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뽑을 만한 공격수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시즌 말에 당한 부상 때문에 이동국도 아시안컵 합류 가능성이 급격히 떨어졌고, 제주 전지 훈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더니 결국 호주 아시안컵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게다가 슈틸리케 감독이 깜짝 발탁한 이정협이 예상외의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이동국의 공백을 메웠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호주 아시안컵이 이동국이 참가할 수 있는 마지막 메이저 대회라고 생각되었기에 발탁을 기대하는 시선이 있었지만, 그 마저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슈틸리케 감독이 2018년 월드컵을 대비해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할 곽태휘 등 일부 고참만 남겨두고 젊은 선수들 위주로 팀을 구성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기에 다음 월드컵때 40세가 되는 이동국의 국가대표 선발은 어려워 보인다.[26]

4.13. 신태용호

그러나 슈틸리케 감독이 월드컵 최종예선 이후 성적부진으로 전격 경질되고 신태용 감독이 부임한 뒤 월드컵과 그와의 인연에 기적처럼 작은 불씨가 되살아났다. 2018 월드컵 최종예선 9차전과 10차전 대표팀 명단을 발표했는데 거기에 이동국이 선발된 것이다. 기사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겠지만, 만일 이동국이 최종예선에서 활약하여 러시아행을 이끈다면 1년밖에 남지 않은 월드컵 본선무대를 다시 한 번 노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8월 31일 월드컵 진출 여부가 달린 이란전에서는 벤치에서 출발했다. 전반내내 대표팀이 이란의 피지컬 비비기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반 시작 혹은 70분 즈음에 출전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분위기였으나, 신태용 감독의 늦은 교체 타이밍 때문에 불과 6분 뛰는 것으로 복귀전을 마무리 했다. 그렇게 늦은 교체 출전으로 인하여 애매한 크로스를 받자마자 냅다 슛을 때린 모습에서 이동국 선수의 조급함 혹은 답답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경기 내내 다른 국가대표 공격수들이 제대로 된 슈팅장면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동국이 출전한 6분이 다른 국가대표들의 90분보다 훨씬 존재감이 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더군다 볼이 오기전 먼저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직접 볼배급을 받으려고 한 모습.....과거 이동국의 20대 시절에는 '묻지마 슈팅' 이라는 명목의 비판이 흔했다는 면에서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27] 그리고 이때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간절한 모습을 보인 이동국을 보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현실과 위기가 동시에 느껴지기도 한다. 사라진 투지와 정신력 그리고 대한민국만의 스타일...
후반 25분경에 투입 되었다면 이란전 결과는 조금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9월 6일 대 우즈베키스탄전에는 경기 종료 12분 여를 남기고 이근호와 교체 출전해서 약 15분 가량을 소화했다. 전체 경기에서 기록된 한국팀의 유효슈팅 4개 중 2개를 만들어내어 조커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헤더의 과도한 바운드, 골키퍼 선방과 동료의 세컨볼 소화의 문제 등이 작용하여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다. 특히 패스를 받고 결정적 슈팅을 한 장면의 각도가 월드컵 교체 출전 때의 일명 물회오리슛 장면과 비슷한데다가, 결국 골인되지 않았기에 카페베네 패러디를 떠올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거기에, 이동국이 투입된 후의 활발한 공격전개를 그 이전에 투입된 염기훈 효과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이 이동국의 투입 효과를 과소평가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무력한 공격 모습을 보이던 대표팀의 경기력이 염기훈이 투입된 후에서야 패스와 크로스에 숨통이 트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동국이 투입된 후에서야 유효슈팅에 대한 아쉬운 이야기가 사라지고 결정적 장면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출전 시간이 6분에서 12분으로 바뀌었을 뿐, 바로 앞의 이란전과 동일한 양상인 셈이다.

11월 평가전을 앞두고 발표된 신태용호 3기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신태용은 "이동국은 K리그의 영웅이다. K리그 영웅을 아름답게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만약 이동국이 좋은 찬스에서 골을 만들지 못한다면 또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이제는 아름답게 보내줘야 한다. 지금 골을 잘 넣고 있지만 내년 월드컵에서 전방 압박할 수 있을지 고민을 했다. 이제는 놔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라고 발언했다. 아직 국내파로만 치러질 동아시아컵과 3월 평가전이 남아있다지만 감독이 사실상 월드컵에 데려가지 않겠다며 은퇴를 권유하는 듯한 발언을 한 이상 사실상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끝났다고 봐야 할듯... 한편으로는 신태용호의 부진 및 부정적인 이미지와 맞물려서 이동국을 토사구팽한 것 아니냐, 예선 탈락이라도 했으면 총알받이로 쓰려던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다.

다만 부상과 노쇠화로 갈수록 출전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고, 노장으로 꾸준히 뽑혔던 곽태휘가 2017년에 완전히 폼이 죽으며 슈틸리케 경질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동국이 발탁되지 못하는 점 자체는 납득할 만 하다는 의견도 많다. 문제는 신태용 본인은 예우해주는 발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이미 반쯤 죽은 사람 취급하는 수준의 발언인지라 인터뷰 스킬이 형편없다는 데는 거의 모든 팬들이 동감하는 분위기. 슈틸리케 시절에도 그냥 별 말 없이 뽑지 않았어도 딱히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터라 굳이 저런 식의 발언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여담으로 이번 신태용호에서 국대 유니폼을 다시 입게 됨으로서 1998년 부터 2016년 까지의 모든 유니폼을 입어본 경험이 있는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링크. 그 긴 시간동안 국대수준의 기량을 계속 꾸준히 유지했다는 뜻이라 나름 대단한 기록이라 볼 수 있다. 다만 2018년 3월 24일부터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본선 때 입게 될 새 유니폼을 선보였고, 신태용 감독의 발언대로 2017년 말부터 이동국이 선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2018년 월드컵 예선 유니폼을 마지막으로 기록이 중단될 확률이 높다.

신태용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FIFA 월드컵을 앞둔 2018 시즌 이동국 AFC 챔피언스리그 K리그1에서 연이어 좋은 활약을 보이자, 여러 차례 언론에서 이동국의 월드컵 엔트리 발탁에 대한 여론이 나오기도 하고,( 서형욱 칼럼, 스포츠월드) 중계 상황에서도 중계진에 의해 국가대표 발탁 가능성이 여러 차례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신태용은 5월 2일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이동국의 국가대표 승선에 대해 어렵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

이후 2020 시즌이 끝나고 이동국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그의 A매치 마지막 경기는 우즈베키스탄전이 되었다. 2021년 국내 A매치 일정이 잡히는 대로 국가대표 은퇴식을 열어줄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월드컵 이미지가 아쉬워서 그렇지 이동국 정도면 어마어마하게 국내축구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아시아 최종예선까지는 항상 꾸준하게 골을 넣어줬다. 지금 당장만봐도 이동국 후에 나온 공격수 중 제 이름값을 하는 공격수가 손흥민,황의조 정도다 이마저도 최근 몇년사이에 나아진건지 그동안은 늘 공격수 기근이었다. 이정협,지동원,조영철,석현준 등등 아쉬운 모습이 많았다. 2022년 벤투호의 새로운 공격수로 거듭난 조규성이 이 바통을 이어가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2023년 치른 AFC 아시안컵에서의 부진 이후 재대로 된 맹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신 이강인이 그 자리를 메워 주었다.

5. 혹사에 대한 세평과 언론

짤방으로 보는 이동국의 혹사.
이동국 인생정리. 다 필요없고 이거 하나로 이동국의 잔혹사를 볼 수 있다.

1998년에서 2000년까지 이동국의 국가대표 경기를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적은 이유가 있다.

첫째, 이 시기 청대와 올대의 경기를 대략적으로나마 남기기 위해서.
둘째, 후진적이던 한국 축구의 행태를 얘기하기 위해서.
셋째, 혹사당하는 와중에서도 언론과 여론이 어린 선수에게 어떠한 대접을 했는지 잊혀지지 않도록 소개하기 위해서.
넷째, 이동국이 국가대표에서 해준 것이 없다는 비난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이렇게 한국 축구의 후진적인 선수 관리와 국가대표팀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반대로 K리그는 등한시하는 운영 행태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당장 시드니 올림픽 때 홍명보 대신 와일드카드로 선출된 강철만 해도 청소년 대표-올림픽 대표-국가대표 식의 무리한 기용의 산증인이며, 이후로도 이천수가 2002년 이후 K리그의 '사기유닛'으로 통하다가 2006년 한해에만 AG, 월드컵, 울산에서 수많은 경기를 뛰면서 과부하로 인해 잔부상에 시달리며 신체 능력이 하락했고, 최근엔 대표팀 주장인 기성용 또한 지난 몇 년간 잦은 국가대표 차출로 인한 장시간 비행으로 무릎에 문제가 생기면서 몸상태가 많이 떨어져버리는 등, 이러한 관리법은 현재진행형으로 선수들의 기량을 갉아먹고 있는 것.

또한, 언론과 여론에 대한 취급을 논하자면, 이미 데뷔 초부터 이동국은 어린 나이에 전국구 스타로 대접받았지만, 스타에 안티 없기도 어렵고 이동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9년 초인 U-20 대회 시절부터 따라붙은 상투적인 비난문구는 실제 이동국의 경기 스타일과[28] 무관한 낙인을 찍어버린다. 게으른 천재라고.[29]

골잡이란 스피드와 피지컬로 상대를 제압하여 득점을 노리는 고정관념은, 사실상 1990년대 초반 축구지능으로 대표팀 No.1 공격수 자리를 차지한 황선홍의 등장으로 바뀌어가는[30] 상태였다. 하지만 언론은 서서히 변해가는 축구계의 흐름을 대변하기보다, 당장 대중의 입맛에 맞는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무책임할 정도로 쉬운 길을 택했다. 그리고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이런 구태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하고, 오늘도 찌라시는 매의 눈을 번뜩이며 마녀사냥을 나선다

지난 2년 간의 혹사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무릎 치료를 위해 독일에 체류할 때 비난이 그 절정을 맞이한다. 페루자 진출의 실패가 계기였다. 성사나 다름없던 상황이라는 보도와 이동국의 설레발성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무릎 상태와 포항과의 트러블로 이적이 실패하고 언론이 친국내리그적, 스타 유출 방지 언플을 시도하자 이동국은 슬슬 온갖 욕을 얻어먹기 시작한다.

레퍼토리는 10여년이 지난 지금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당시 청대 감독인 조영증이 일갈했듯 건방지다, 스타 의식에 차 있다, 국내용이다, 최전방에 처박혀서 움직이지 않고 게으르다, 열심히 뛰지 않는다, 몸싸움을 싫어한다, 후반으로 가면 급격히 체력이 저하된다, 반사신경이 느리다, 골 결정력이 부족하다 등으로 온갖 욕을 먹는다. 대표팀에 복귀하려고 감독의 요구에 충실히 노력하며 실력이 더욱 일신하여 전북의 리그 우승과 득점왕을 거머쥔 2009년 즈음에 이르러서는 건방지다는 욕은 사라졌으나, 득점에만 집착하고 이타적이지 않다는 레퍼토리로 욕을 먹었다. 결국 2011년 리그 도움왕을 기록하자 이번엔 과거 미들즈브러에서 실패한 점을 들고 나와 국내용, 아시아용이라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혹사의 최전방에 서 있을 때 비난과 칭찬은 마치 밤과 낮이 오가듯 찾아왔다 물러났다를 반복했다. 예컨대, 불같은 비난을 받던 시드니 올림픽 기간, 마지막 경기 때 수적 열세에도 딛고도 이동국의 선제 결승골을 바탕으로 팀 전체가 결사항전 태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안컵 조별 리그 때 부진하자 볼 것도 없었다. 스타플레이어의 숙명이라면 숙명일 수도 있겠지만.

이동국이 일시적으로나마 게으른 천재라는 세평을 불식하는 데 성공한 것은 길고도 혹독한 혹사의 일정을 끝을 아시안컵 득점왕으로 끝마치고 나서였다. 국내용이라는 낙인 또한 벗어던졌다대신 아시아용이라는 낙인 대회 기간 내내 붕대를 감고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 언론은 투혼에 집중하기보단 일본이 우승했네... 쟤네들 청대도 준우승하고 올대도 우리보다 더 성적 좋던데 우리 이렇게 성적이 나쁘면 2002년에 개망신당하는 거 아냐? 이런 수준이었고 말도 안 되는 일정 속에 무릎을 망가트린 어린 스트라이커의 투혼이나 부상, 혹사에 대한 동정 혹은 염려는 찾기 어려웠다. 쑥쑥 커라 정도가 좋은 반응이었고 이제야 그나마 열심히 뛰는구나, 하지만 여전히 둔하네 등의 반응도 넘쳐났다.

물론 혹평들 역시 그 당시에는 아주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성격이 약간 소심하고 내성적인 편이었는데다 젊은 나이라 멋대로 일정을 바꾼다거나, 스타 의식 소리가 나올 만한 일도 있긴 있었다.[31] 게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정말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중앙에 쿡 처박혀서 공 오기만을 기다리는 경기도 꽤 있었다. 이러한 점이 이동국이 히딩크호에 못 들어간 결정적 이유다. 또 경기장 내에서도 경기가 안 풀리면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32] 요약하자면 이동국은 축구 선수로서의 테크닉은 우수한 편인데, 실력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마인드 컨트롤은 매우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국가대표에서의 말년이 잘 풀리지 않았다.[33] 모든 선수가 그렇듯이 이동국도 선수로서 플레이스타일 상의 장단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선수로서 뛰어난 점을 보인 만큼이나 부족한 모습을 보인 것도 어느정도 사실이나 그가 들어야만 했던 혹평은 객관적인 것을 넘어 부당할 정도로 가혹하고 모욕적인 것들 이었다.

이동국이 뛰며 달성한 대표팀의 업적은 개인으로서는 아시안컵 득점왕, 센추리 클럽 가입, 역대 최다골 4위 정도이며 대회 업적으로는 아시안컵 3위 2회 아시안 게임 동메달 정도가 있다. 하지만 득점왕까지 한 AFC 아시안컵은 A대회임에도 불구하고 병역면제가 없는 탓에 A대회가 아닌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 주목도가 밀리며,[34] 아시안 게임은 동메달이 있지만 병역 특례가 없다보니 크게 의미있는 기록도 아니고, 월드컵은 유독 월드컵때마다 부상으로 제대로 뛸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다보니, 결국 세계 대회인 월드컵을 가장 중요시할 뿐만 아니라 그 시기만 축구를 많이 보는 국민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평가가 박하다.

이동국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이유 중 하나는 세대 차이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동국이 국민들에게 축구적으로 많이 노출된 국가대표 전성기는 98~05까지의 시기다. 이 시기 이후 이동국은 일반적인 선수로 생각하면 30대 노장으로, 이천수나 김정우가 예상치 못하게 사라졌듯이 국가대표에 소집되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또, 사실 98~05까지 국가대표를 뛰었다 하면 어지간히 이름값이 있는 선수만큼은 뛴 셈이다. 그러나 이동국은 2017년까지도 종종 나타났다. 하지만 전성기가 지난 이후의 활약은 썩 신통치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98~05까지 전성기의 활약을 지켜보지 못했던 세대들에게 특히 저평가를 받는다. 98~05까지의 활약을 지켜보지 못한 세대들이 가장 많이 본 공격수는 박주영이기 때문에 특히 가장 많이 비교가 된다. 이것은 축구 사이트에서도 비슷한데 사커라인 같은 아저씨들로 넘치는 곳에서는 이동국에 대해 고평가를 하는 유저가 많다. 반면 그 시대를 직접 보지 못한 유저들은 노장일 때의 그저 그런 모습만을 봤기 때문에 저평가를 한다.

참 말이 많은 이동국과 박주영에 대한 비교 역시 세대에 따라 상당히 갈리는 편이다. 주로 나이 많은 축구팬들이 이동국을 고평가하는 경우가 많고, 나이 어린 축구팬들이 박주영을 고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거나 국가대표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고점은 2010년의 박주영이 높게 찍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기량 자체도 슈팅 감각과 슈팅 능력은 이동국이 뛰어나지만 박주영이 포스트플레이나 데드볼, 뛰어난 볼컨트롤 능력 등 아무래도 이동국보다 골고루 균형이 잘 잡힌 선수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주영은 2014년을 비롯해서 국가대표에서의 저점 역시 화려하게 찍은 선수이며, 이동국 역시 큰 대회 시기만 되면 뭔가 불운이 끼고, 박주영으로 따지면 2010년 대회로 비유를 들 수 있는 2006년 전성기 때 독일 월드컵을 예기치 못한 큰 부상으로 빠지는 등 뭔가 시운적인 요소에서 잘 안풀렸기 때문에 이것은 항상 말이 많다.[35]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가 참여한 모든 팀(청대, 올대, 국대)을 예선 통과는 물론 본선까지 올렸으며, 세계 대회에서는 우루과이나 스페인 같은 강호를 상대로 득실차니 동전던지기니까지 하는 곳까진 올라갔다고 할 수 있다. 탈락은 탈락이지만. 황선홍은 역대 대표팀 스트라이커 계보에서 자신의 뒤를 이었던 선수는 이동국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1998년 이후 유독 월드컵때마다 부상으로 제대로 활약할 기회가 없었지만 그밖에 이룬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약 15년동안 대표팀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던 황선홍과 약 20년동안 대표팀 스트라이커로 활약한 이동국은 비슷한 면이 많다. 거의 독보적으로 오랜 기간 대표팀 스트라이커로 활약했으며 그럼에도 월드컵 무대에서의 부진으로 과도한 비난을 받은 면이 있다. 물론 황선홍이나 다른 선수들이 월드컵에서 충분한 출전시간을 가졌음에도 기회를 못살려 비난을 받았다면 이동국은 월드컵 때마다 부상으로 활약할 기회 자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황선홍은 결국 말년인 2002년 월드컵에서 명예회복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동국은 끝내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즉 역대 대표팀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을만한 재능이었으며 평균 이상은 했던 국가대표 선수였다는 의미다.[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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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멤버로 이동국, 김은중, 정용훈, 김용대, 박동혁, 송종국, 설기현 등이 있으며 그 당시 대학교 1학년 선수들이 많았으나 이동국, 김은중, 정용훈은 대학 진학 대신 프로에 입단하여 화제를 모았다. [2] 득점자는 김은중(전반4분), 이동국(전반22분), 오노 신지(전반45분)이었으며 후반전 일본의 맹공에 고전했으나 김용대의 선방쇼로 겨우 승리를 지킬수 있었다. [3] 전반에 김은중의 선제골로 앞서 갔으나 후반 6분 실점, 후반 30분에 이동국이 결승골을 넣었다. [4] 골을 넣은 선수는 레체의 돌풍을 이끌며 모나코에서도 잘 나가다 세비야에서 훅 갔던 체반톤. 한 때 위닝 마스터리그에서 키웰, 체반톤, 이천수 유망주 트리오로 우승하던 시절이 있었다... [5] 일본 대표팀 감독은 필립 트루시에, 멤버들이 화려한데 이나모토 준이치, 오노 신지, 다카하라 나오유키, 모토야마 마사시, 엔도 야스히토 등이 있으며 훗날 J리그에서 맹활약했다. 16강에서 승부차기 끝에 포르투갈에 승리, 8강전에서 멕시코에 2-0 승리, 준결승에서 우루과이에 2-1로 승리하여 우승 기대감을 높였으나 결승전에서 스페인에 0-4로 완패하였다. [6] 카시야스와 차비가 이때 우승한 세대의 중심멤버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대회에서는 스페인의 주축은 바르케로와 파블로였다. 당시 스페인의 득점의 상당수를 이 두 선수가 했다.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카메라도 이 둘을 계속 클로즈업하고 있다. [7] 훗날 리웨이펑이 k리그에 입성하고 이동국은 그 때뿐 아니라 번번이 중국을 괴롭혔다, 너무 미웠다, 그러나 지금은 좋은 친구일 뿐이다...라고 인터뷰했고 이동국 역시 리웨이펑은 내 오랜 친구라고 답변했다. 세월이란.... [8] 이 때가 박지성의 첫번째 국가대표 데뷔. 이름날린 유망주도 아니고 인맥으로 뽑혔니 마니 말이 많았지만 이 후 박지성은... [9] 이란도 한국처럼 징병제에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올림픽 메달에 병역혜택이 걸려있다, 그래서인지 이란은 한국에 이어 아시안게임 축구 금메달 2위 국가다...면제로이드의 위엄 [10] 이 당시 대중에게 얼마나 크게 각인되었는지, 월드컵 종료 1달하고 조금 뒤인 광복절에 열린 K리그 올스타전은 흥행에 성공했고 그 다음날 스포츠신문 헤드라인이 신문 1/4만한 커다란 활자로 "이동국 왕별"이라 써넣은 것이었다. [11] A매치 첫 골이다. [12] 이민성이 A매치에서 기록한 골은 그 유명한 도쿄대첩과 이때의 골이 전부이다. [13] 월드컵 엔트리가 23명이고, 그 중 골키퍼가 3명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한 포지션에 두 명 꼴로 선발되었고, 중앙 공격수는 3명이 선발되었다. 황선홍, 안정환, 최용수. 황선홍과 최용수는 타겟으로 활용가능한 정통파 중앙 공격수, 안정환은 미드필더룰까지 소화가능한 보다 테크니컬한 판타지 스타 타입이었다. 16강 이상을 노린다면 당연히 중앙 공격수가 둘 이상은 되어야하고(최용수가 부상으로 부진하면서 황선홍의 역할이 커졌지만) 여기에 한국팀내에서 유니크한 장점을 가진 안정환을 집어넣으니 이동국 자리는 자동으로 없어졌다. [14] 한편 당시 이동국을 탈락시켰던 히딩크 감독의 이유를 놓고 그동안 따라다녔던 "게으른 천재" 이미지까지 함께 붙어버리면서 국내용, 아시아용 이미지는 거의 굳어져버렸고, 1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안티들이 이동국을 비판하는 잣대로 사용되며 수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15] 오히려 지금에 스탯으로 비교해보면 현 라이언 시티 감독인 김도훈이 더 논란이 될 만한데 기본적으로 이동국과 비슷한 스트라이커 스타일에 포스트플레이가 좋은 만능 포워드였으며 월드컵 다음 해에는 2013년 데얀이 경신할 때까지 K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 골을 기록했을 정도로 한창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선수인데다 국대 경력도 더 오래됐다. 당연히 히딩크 감독 역시 중용을 하긴 했으나 자책골 기록 등 불필요한 행동을 노출하며 결국 히딩크 감독 눈 밖에나 국대 승선을 하지 못했다. 다만 당시에는 국대와 올대를 오가며 개고생한 이동국에게 포커싱이 쏠려 주목받지 못했다. [16] 여담으로 2005년 2월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 쿠웨이트와의 홈경기에서, 독일전에서 골을 넣었던 반대 위치에서 왼발 발리슛으로 득점했다. [17] 이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로 유명한 해운대 굴욕(?) 사건이 있다. 일본과의 경기 후 한국에 도착한 독일 선수들은 부산 해운대에서 산책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 선수들이 길을 걷고 있는데도 시민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꽃게탕집 수족관 사진도 이때 생산된 것이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이 시기가 당시 독일 축구의 암흑기였고, 슈바인슈타이거와 필립 람 등이 본격적으로 스타텀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2006년 이후였다. [18] 그 전설적인 수문장인 칸이 본인 입으로 "그 슛은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어떤 GK라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슛이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19] 당시 아시안컵 대표팀 스쿼드는 거의 붕괴되다시피한 상황이었다. 프리미어리거 3인방(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동시에 부상당했고, 안정환, 박주영은 소속팀이서의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탈락, 주장 김남일도 탈장 수술로 이탈하는 바람에 전력 구성에 난항을 겪어야했다. 중원을 지탱해줄 선수도, 찬스를 만들어줄 선수도, 측면 수비를 책임져줄 선수도, 결정을 지을만한 선수도 모두 제외되어버린 상태였는데 2002년 월드컵 대표팀을 거의 고스란히 쓸 수 있었던 2004년 대회보다 상황이 악화되어 있었다. 거기다 이동국은 미들즈브러에서 경기 출전도 제대로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베어벡 감독의 전술 자체가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 명 놓는 수비적인 운영으로 이천수를 프리롤로 놓는 늪축구를 지향했다. [20] 이라크와의 준결승전 승부차기에서는 2번 키커로 나서 골인에 성공하기는 했다. [21] 이것과 병역문제로 인해 영구까임권을 얻어버렸다. 지금도 안티들에게 '부인이 임신했는데 룸싸롱? 그것도 대회 중에?' 소리를 듣는다. 게다가 슈돌에서 '대박이 아빠'로 등장하면서 이 비판은 현재 진행형으로 언급되는 편. 이동국의 영원한 흑역사일듯. [22] 이 패러디 때문에 이 슛은 카페베네슛이라는 오명도 썼다. [23] 경기장이 해안가 근처라 습한 상태에 잔디에 물을 뿌렸고 후반전에는 폭우가 쏟아져 흙이 단단하게 자리를 못잡고 뭉쳤다고 한다. [24] 그러한 경기장에서 월드컵 베스트 골에 들어갈만한 골을 성공시킨 수아레스도 있다. 최선의 환경이 아니었다는 거지 골을 넣는게 불가능한 상황이란 말은 절대 아니다. [25] 측면이 살아나지 못했다기에는 이상했다. 오른쪽 측면에서 서정진이 활발하게 움직여주었고, 박주영도 좋은 움직임에 2골을 넣을 정도였다. [26] 2015시즌 리그를 씹어먹은 염기훈도 만 32세의 나이 때문에 대표팀 선발에 상당한 고심을 했다고 밝힌 슈틸리케 감독인데 이동국은 염기훈보다 5살 위다. [27] 이동국이 갓 데뷔했던 시절의 선수들은 뽀록슛, 공갈포 소리를 들을지언정 자신의 확신이 있다면 슈팅을 아끼지 않았다. 유상철은 맨날 중거리포만 날린다고 홈런왕 소리 들었고, 홍명보가 시도 때도 없이 언더래핑하며 중거리 슛을 날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조광래 취임 이후 애무축구라고 불리는 티키타카의 부작용이 심해지면서 너도나도 슈팅 아끼고 시종 볼만 돌리니 같은 슈팅을 쏴도 그때랑은 다른 반응이 나온다. 특히나 이날 이란전은 유효슈팅이 단 하나도 없는 굉장히 답답한 경기였기 때문에 붕뜨는 슈팅이라도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28] 이동국은 타고난 신체 조건과는 달리 몸싸움과 공중볼 경합을 즐겨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대신 공이 왔을 때 등지고 받아 내주면서 슛을 때릴지 패스를 돌려 공격 작업을 계속 이어갈지 빠르게 결정하기 때문에,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활동할 때가 더 위협적이다. 청소년 대표 시절 공간 침투가 뛰어난 김은중과 투톱을 이뤘을 때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보인 점도 그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축구 감각을 보고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키우는 게 낫지 않겠느냐란 말도 있었지만 185cm의 피지컬을 가진 터라 최전방에 박았다. [29] 이런 인식이 생겨난 건 한국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손꼽히는 조영증 감독이 비난의 화살을 회피하기 위해 이동국을 걸고 언플한 게 사실인 양 퍼진 것이다. [30] 이 시기 리그에서는 이미 김도훈, 김현석, 노상래 등 피지컬과 스피드 외에 센스와 지능을 무기로 삼는 공격수들이 활약하며 독일식 축구의 헤게모니가 약해지고 있었다. [31] 간단한 사실을 적은 기사로부터 추측한 거긴 하지만, 본인이 원해서 성립된 행사가 아니었을 거 같긴 하다. 노래행사라든가 뭐 그런 거... [32] 사실 지금도 국대에서 죽쓰거나 욕을 먹고 오면 리그에서도 폼이 떨어지고, 다시 리그에서 겨우 폼을 끌어올리고 국대로 가면 다시 욕을 먹고 돌아와 축 쳐져있는 모습이나,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팀 경기가 잘 안풀리면 딱 봐도 심리적으로 압박을 엄청 받고 있다하고 써붙힌 듯한 모습을 보면 썩 활발하거나 낙천적인 성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끔 전북팬들에게도 멘탈이 유리장같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33] 초년엔 좋았다. 그런데 그 좋은 모습이 선수의 혹사를 부르는 원인이기도 하다. [34] 현재는 아시안 게임이 23세 이하 연령별 대회로 바뀌면서 그 위상이 매우 떨어졌고 아시안컵 기록에 묻히지만 1998년 대회까지만 해도 아시안 게임은 성인 대회로 아시안컵과 동등한 위상이었다. 특히 한국에선 병역 특례까지 걸려 있으니 당시 위상이 아시안컵보다 더 높았다. [35] 이게 바로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박주영의 경우 2010년 월드컵 예선부터 2014년 월드컵 3차 예선까지 대표팀의 스코어러 역할을 해줬다. 특히 2010년 월드컵 활약은 물론 2012년 런던 올림픽 한일전 1골 1어시스트 등 한국 해축 팬덤이 커질 무렵에 임팩트있는 장면을 많이 만들면서 2014년 월드컵에서의 부진도 어느정도 상쇄가 가능하다. 반면에 이동국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여론을 뒤집을 수 있는 '한 방'을 날리지 못했으며 그럴 기회도 거의 갖지 못했다. [36] 사실상 대표팀 정통 스트라이커의 계보는 황선홍에서 끊겼다고 보는게 맞다. [37] 덤으로 국대에서의 이미지로 K리그 전북 시합을 봤다가 리그에서는 화려한 골과 결정력, 슈팅력에 다시 보는 사람도 많다. 리그와 국대의 그가 정말 동일인물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이동국이 국대에서 보여준 전성기 활약을 보지 못했던 세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2010년대의 이동국이 국대보다 리그에서 훨씬 뛰어났던 것은 맞지만, 전성기 시절의 활약을 봤다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