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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5:38:42

리웨이펑

{{{#!wiki style="margin: -1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0 0%, #F00 20%, #F00 80%, #FF0)"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0000><tablebgcolor=#ff0000> 파일: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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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ddd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f00>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리웨이펑 112회 1998.11.22 2011.11.15
2 가오린 109회 2005.7.31 2019.1.24
3 정즈 108회 2002.12.7 2019.11.14
4 장린펑 107회 2009.12.30 2024.3.21
5 판즈이 106회 1992.8.22 2002.6.4
하오하이둥 1992.8.22 2004.11.17
}}}}}}}}}}}}}}} ||

<colcolor=#fff> 허난 FC
河南足球俱乐部
파일:수원과 리웨이펑.jpg
<colbgcolor=#d61920> 이름 리웨이펑
李玮峰 | Lǐ Wěifēng
출생 1978년 12월 1일 ([age(1978-12-01)]세)
지린성 창춘시
국적
[[중국|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84cm
직업 축구선수 ( 센터백 / 은퇴)
축구코치
축구 경영인
소속 <colbgcolor=#d61920> 선수 선전 핑안/선전 젠리바오 (1998~2005)
에버튼 FC (2002~2003 / 임대)
상하이 뤼디 선화 (2006~2008)
우한 광구 (2008~2009)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9~2010)
톈진 터다 (2011~2015)
감독 톈진 톈하이 (2015~2016 / 수석 코치)
광저우 시티 (2022~2023)
기타 톈진 톈하이 (2017~2020 / 부단장)
허난 FC (2024 / 부사장)
국가대표 파일: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12경기[1] 14골 ( 중국 / 1998~2011)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지도자 및 경영인 경력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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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륙의 사나이
빅버드 선수 소개 멘트
중국의 전 축구 선수, 현재 지도자 겸 축구 경영인이다.

2. 클럽 경력

중국의 국가대표 수비수이자 톈진 터다의 센터백 겸 오른쪽 풀백. 한자 그대로 읽어 '이위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8년에 선전 핑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당시 선전 핑안의 감독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대회 도중 경질되었고 당시 K리그의 경기 담합 의혹 등을 지적하는 바람에 국내에서 자리를 잃고 중국으로 쫓겨난 차범근 감독이었는데, 당시 어린 나이의 리웨이펑의 가능성을 높이 보고 많은 기회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차범근 감독이 1년만에 하차했음에도, 리웨이펑은 계속 선전에 남아 핵심 수비수로 뛰었다.
파일:리웨이펑.jpg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중국 브라질, 코스타리카, 터키에 3전 전패로 관광을 당했으나, 리웨이펑은 전 경기에 출장하며 무난한 활약을 보였다. 이에 중국 스폰서를 뒤에 업고 당시 중국 스폰서 물기에 열을 올리던 에버턴 FC로 임대 이적하면서 EPL로 진출한다.[2] 하지만 에버튼에서는 리그 1경기와 리그컵 1경기, 이렇게 총 2경기 출장에 그쳤고, 결국 2002-2003 시즌 후 친정팀 선전 핑안이 이름을 바꾼 선전 젠리바오로 이적하게 되면서 그의 EPL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국가대표팀의 주전 센터백이자 중국 슈퍼 리그의 에이스급 센터백으로 꾸준히 활약하며 선전의 2005년 AFC 챔피언스 리그 4강 진출에 힘을 보탰다. 2006년에는 상하이 선화로 이적했는데, 그 해 AFC 챔피언스 리그 8강 광탈의 주범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주전 수비수로 꾸준히 나섰다. 그러나 2008년, 상하이에서의 출장 시간이 불규칙적으로 변하게 되자 우한 광구로 이적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한 광구는 그 해 중국축협의 편파성 징계에 반발해 남은 리그일정을 포기하면서 2부리그 강등 처분을 받았고,[3] 자연히 고액주급자인 리웨이펑은 이적 명단에 오르게 된다.

이 때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는 아시아 쿼터제를 시행하게 되는데 이 쿼터제를 노리고 한국 및 중국, 일본 등 3개국의 팀들이 리웨이펑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그는 선전 시절에 자신의 가치를 알아 준 차범근 감독 밑에서 뛰기를 희망하여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면서 K리그 최초의 중국인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수원 팬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기본적으로 중국인 선수들의 실력에 대한 불신도 있었겠지만 리웨이펑의 경우 특유의 거친 플레이로 한국 팬들 사이에서 악명높았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 마토의 빈 자리에다가 중국에서 사고만 치던 싸움꾼 수비수 데리고 왔네'라는 볼멘소리가 나왔고,[4] 게다가 수원에서의 데뷔전인 프리 시즌 경기에서 퇴장까지 먹자 반응은 더욱 싸늘해졌다.

그러나 2009 시즌 동안 차범근 감독으로부터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으며 마토의 빈 자리를 파이팅 넘치는 모습으로 메우려 노력하였고 준수한 수비 실력까지 더해져 한 시즌 만에 수원의 팬들로부터 인정과 박수를 받았다.

특히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자기 성질을 못이겨서 상대에게 거친 태클 및 폭력을 남발해서 카드를 수집하는 모습이 K리그에서 활약하는 동안 많이 줄어들었으며, 마토만큼은 아니지만 타점 높은 헤딩으로 필요한 타이밍에 골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어느새 수원에 없어서는 안 될 수비수로 거듭났다.

이같은 활약으로 서포터즈인 그랑블루 사이에서는 인기를 독차지하는 존재가 되었는데, 이 당시 수원 서포터석에는 항상 오성홍기를 볼 수 있었으며, 리웨이펑이 좋은 플레이를 보일 때마다 '리웨이펑 짜요!'라는 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중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아서, 리웨이펑 이적 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 경기장에 중국인 관중이 늘어나기도 했다.

특히 리웨이펑이 수원 팬들에게 높게 인정받는 이유는 팀에 대한 충성심인데, 2009 시즌이 끝난 후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고액의 주급을 부르며 영입을 시도하였는데 수원과 차범근 감독에 대한 의리 때문에 이적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잔류를 선택하여 그랑블루들의 눈에 땀이 고이게 만들기도 했다.

2010년에는 황재원, 강민수 등의 수비 자원들이 새로 들어와서 자리를 잃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였으나 윤성효 감독 밑에서 오른쪽 풀백이라는 새로운 자리를 맡아서 그동안 중앙수비수로 서면서 숨겨왔던 공격본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수원 삼성 FC 서울 전에서 보여주었던 한중일대통합슛[5]은 백미.

아쉽게도 2010 시즌 종료 후 팀이 거액을 투자하여 전면 재개편을 단행, 마토를 복귀시키면서 수원을 떠나게 되었다.

중국에 가 있는 동안 구단에서 일방적으로 방출을 통보했고(계약기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리웨이펑 본인은 이를 전혀 몰랐다고 밝혔으며 수원을 떠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덕분에 수원팬들뿐만 아니라 모든 K리그 팬들에게 동정을 받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수원은 엄청난 욕을 먹고 있다.

수원으로 오는 데 인연을 제공한 차범근 전 감독이 없지만 수원에 대한 충성심은 아직도 막강한 듯. 하지만 수원을 떠나게 되더라도 아시아 쿼터가 적용이 되는 선수라 수비가 취약한 팀에서 언제든지 콜을 받을 수 있는 선수다.

중국 리그에서 데려가려 하지 않는 이상 2011년에도 K리그에서 볼 확률은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결국 중국 텐진 터다에 입단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한국에서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수원 팬들은 마토의 느린 발과 약해진 수비에 절망하면서 리웨이펑을 그리워하고 있는 중.

수원 삼성에 입단해서 첫 시즌을 보내던 2009년에 중국 언론과 '한국 축구를 인정하고 따라 배워야 한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수원 용병 리웨이펑의 축구, 그리고 한국 이야기 (1) (2)
중국에서 있으면서 송종국의 C리그 텐진 터다 입단을 추천하기도 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대 알 사드 난투극 이후로 한번 더 재평가를 받고 있다.

2015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2016년 4월 30일, FC 서울과의 슈퍼매치에서 정장을 입고 경기장에 등장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6]

3.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팀에서 100경기 넘게 출전한 센추리 클럽 멤버. A매치 데뷔전은 1998년 11월 22일에 열린 대한민국과의 친선 경기였다. 2008년 이후로는 국가대표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나 2011년에 중국 국가대표로 재발탁되었다.

한국 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계기는 1999년 던힐컵 결승전인데, 리웨이펑의 거친 플레이를 참다 못한 이동국이 리웨이펑의 얼굴에 팔꿈치를 휘둘렀고 리웨이펑도 맞받아치면서 결국 두 선수는 동반 퇴장당했다. 그리고 4년 후 2003년 동아시안컵에서 한국과 2차전에서 맞붙었는데, 경기 도중 이을용 리이의 뒷통수를 때려 눕히자 리웨이펑이 분노하면서 이을용을 밀치기도 했고 그 외에도 경기 내내 안정환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그로부터 약 1년 6개월 후 2005년 동아시안컵 대회에서도 활약했는데, 전반 6분 중국이 얻어낸 프리킥 상황에서 유경렬이 깐죽대자 얼굴을 밀쳐 넘어뜨렸고 이에 유경렬은 얼굴을 감싼채 누워서 침대축구를 시전했다. 그런데 하필 주심이 이 상황을 못 본 탓에 코너킥 지점에 있던 2부심에게 가서 상황을 물었고, 그 결과 리웨이펑이 아닌 가오린이 지목되어 퇴장당했다. 심지어 이 경기 주심은 일본의 니시무라 유이치, 가오린을 지목한 2부심은 북한의 최해일이었다.

심지어 가오린은 이 경기가 A매치 데뷔전이었는데 단지 리웨이펑 옆에 서 있었다는 죄로 레드카드를 받아버렸고, 진작 퇴장당했어야 할 리웨이펑은 계속 뛰다가 후반 38분 김동진이 차오양의 발에 걸려 넘어져 페널티킥이 선언되자 주심에게 격하게 항의하다가 경고 누적으로 그제서야 퇴장당했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 퇴장당한게 가오린, 리웨이펑, 그리고 페널티 파울을 범한 차오양 총 3명이었는데 정작 한국의 골 결정력이 시망 수준이었던 탓에 1대1로 비겨서 주광후 당시 중국 감독이 딱히 판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4. 플레이 스타일

데뷔 시절부터 '수비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이 있다', '마치 중국의 홍명보 같다'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위치선정을 통해 상대 공격수를 묶는 플레이를 잘 하며 좋은 피지컬을 이용해서 상대 선수와의 헤딩경합에서 잘 밀리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발이 빠른 편은 아니라서 빠른 공격수들에게는 잘 털리는 편이고 잔실수가 좀 있는 편이다.

터프하다못해 지나치게 거친 플레이가 지적받기도 했는데, K리그에 온 이후에는 플레이의 거친 정도를 조절하기 시작하면서 필요할 때는 거친 플레이로 상대 공격수를 위축시키고, 상황에 따라서는 필요한 정도의 몸싸움만 수행하기도 했다.

5. 지도자 및 경영인 경력

2015년 은퇴후 퉁지 대학 축구부에서 잠시 축구를 지도하다가 톈진 취안젠 수석코치로 부임하여 여러 감독을 보좌했고, 파비오 칸나바로 광저우 헝다로 떠나고 파울루 소자가 후임 감독으로 오자 수석 코치에서 부단장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2018년 10월 박충균 임시감독이 톈진 취안젠에 부임하자 박 감독을 보좌하여 수석 코치역을 수행하였으며, 2019년 취안젠 그룹 공중 분해 사태로 팀이 소유권이 넘어갔지만, 전 경영진 중 유일하게 팀에 잔류할 수 있었다.

자금압박에 시달리는 새 경영진이 최강희 감독의 고용승계에 난색을 표해 어쩔수없이 계약 해지했지만, 본인은 한국 쪽의 자기 인맥을 동원해 후임 한국인 감독을 찾았으며, 이후 2019시즌 중반 박충균 감독을 정식 감독으로 재선임하였다.

2019년 10월 박충균 감독이 경질되면서 톈진 톈하이 감독으로 부임하는 듯 했지만 리웨이펑이 P급 지도자 라이선스를 이수하지 않은 관계로 코치 팀장을 맡은 리우쉬에위를 명목상 감독으로 앉히고 리웨이펑이 실질적인 감독 역할을 맡으며 팀을 지휘하도록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후 중국 언론에 따르면 톈진 구단은 내분이 심했는데 문제는 그 내분의 중심이 리웨이펑이었으며, 이 때문에 박충균 감독이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프로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리웨이펑은 구단 전권을 쥐고 흔들었으며, 최강희 감독을 경질할 때도 리웨이펑은 프런트 중심에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다고 하는 등 톈진 구단 몰락의 원흉으로 강하게 비난받았다. #

하지만 다른 보도에 의하면 박충균 감독은 자진사임했으며 리웨이펑과도 사이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 이런 리웨이펑 갈등설을 먼저 보도한 중국언론은 없으며, 대부분의 중국 언론은 위의 한국 기사를 인용하여 한국에선 그렇게 카더라고 전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위의 기사는 사실관계도 틀리고 있어서[7] 신빙성이 매우 낮으며, 상식적으로 봐도 리웨이펑이 아무리 감독자리가 탐난다고 해도, 강등이 유력한 팀을 겨우 5라운드 남기고 현직 감독을 밀어내고 맡아서 강등 독박을 쓴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박충균 감독은 오히려 리웨이펑보다 톈진시 체육국이 문제였다는 발언을 흘리기도 했다.

파일:리웨이펑광저우.png

결국 톈진 구단은 해체되었고,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2022년 8월 말 강등 위기에 빠진 광저우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며, 소방수로 팀에 투입되어 가까스로 광저우의 1부 리그 잔류를 이끌었다.

하지만 2023년 3월부로 팀이 해체되면서 팀의 마지막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2023년 12월 20일, 허난 FC의 부사장으로 부임했으며, 감독으로 남기일 감독을 선임했다. 하지만 리그 6라운드 무승의 부진에 빠지자, 남기일 감독 선임의 총 책임자였던 리웨이펑은 이사회에서 공개 비판을 당하고 한 달 치 성과급을 감봉당하는 굴욕적인 상황도 경험했다.

6. 여담

7. 관련 문서



[1]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전. [2] 당시 에버튼의 스폰서는 중국의 전자회사인 커젠(Kejian, 科健) 그룹(2014년 도산)이었는데 에버튼이 원하던 선수는 미드필더인 리톄였으나 하필 커젠 그룹의 라이벌 회사가 리톄의 소속팀인 랴오닝 FC를 후원사였기 때문에 리톄를 임대 못하게 막았고, 결국 대신 선택한 게 리웨이펑이었다는 후문이 있다. 물론 리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에버튼으로 이적하긴 했지만. 참고로 리톄는 중국에서 감독으로 재직중이며, 허베이 화샤 싱푸를 맡아 승격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중국 축협을 비난하다가 윗분의 진노를 사서 잘렸고 가오훙보 밑에서 중국 국대 수석코치를 하다가 2017년부터 중국 갑급 리그 우한 줘얼의 감독으로 부임. [3] 이후 등록 취소와 함께 축구 리그 참가 자격을 박탈당하면서 해체된다. [4] 동아시아축구대회에서 일본의 스즈키 게이타의 멱살을 잡았다. [5] 다카하라 힐패스 - 리웨이펑 크로스 - 이상호 골 [6] 파일:133822752_%25B8%25AE%25BF%25FE%25C0%25CC%25C6%25E31.jpg [7] 갈등설을 보도한 위의 기사에서는 파울루 소자 감독이 5월에 잘린 것으로 나오지만 소자는 2018년에 9월에 이미 경질되었고, 2019년 5월에 잘린 것은 선샹푸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