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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6:19:37

판즈이

판즈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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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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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00>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리웨이펑 112회 1998.11.22 2011.11.15
2 가오린 109회 2005.7.31 2019.1.24
3 정즈 108회 2002.12.7 2019.11.14
4 장린펑 107회 2009.12.30 2024.3.21
5 판즈이 106회 1992.8.22 2002.6.4
하오하이둥 1992.8.22 200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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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선화 B
上海申花足球俱乐部 B
파일:판즈이.jpg
이름 판즈이
范志毅|Fàn Zhìyì
출생 1969년 11월 6일 ([age(1969-11-06)]세)
상하이
국적
[[중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직업 축구 선수 ( 수비수 / 은퇴 )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165db9> 선수 상하이 선화 (1994~1998)
크리스탈 팰리스 FC (1998~2001)
던디 유나이티드 FC (2001~2002)
상하이 인터내셔널 (2002)
카디프 시티 FC (2002~2003)
불러 레인저스 (2003~2004)
상하이 린청 조본 (2004~2005)
불러 레인저스 (2005~2006)
코치 불러 레인저스 (2003~2004 / 선수 겸 수석 코치)
상하이 린청 조본 (2004~2005 / 선수 겸 수석 코치)
불러 레인저스 (2005~2006 / 선수 겸 수석 코치)
쑤저우 트립스 FC (2006~2007 / 수석 코치)
상하이 이스트아시아 (2008~2009 / 수석 코치)
감독 상하이 이스트아시아 (2010)
상하이 선화 B (2016~ )
국가대표 파일: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06경기 17골 ( 중국 / 1992~2002)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은퇴 이후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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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현재 상하이 선화의 B팀 감독을 맡고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리웨이펑과 더불어 중국 수비의 기둥이었던 선수였다.

2. 클럽 경력

1994년 상하이 선화에 입단하며 클럽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중국 최초의 프로축구리그인 갑급 리그가 출범하던 원년이었고, 그는 타고난 신체조건과 재능으로 빠르게 중국 프로축구의 대표 수비수로 자리잡으며 1995시즌 상하이 선화의 첫 리그 우승에 큰 역할을 했다. 1998 시즌까지 총 5시즌동안 99경기에 출전해 무려 31골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수비수지만 엄청난 골 결정력을 갖춰 1995시즌에는 무려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변방의 중국 리그였지만 이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덕택에 잉글랜드 2부리그인 퍼스트 디비전 크리스탈 팰리스 FC가 그를 전격적으로 영입했다. 순지하이와 동시에 영입된 그는 중국 역사상 첫 잉글랜드 진출 선수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물론 중국에서의 마케팅도 염두에 둔 영입이었으나, 판즈이는 실력적으로도 크리스탈 팰리스 내에서 살아남았다. 3시즌 동안 팰리스의 핵심 수비수로 활약하며 리그 통산 88경기 4골을 기록했다. 주전치고는 적은 경기수인데 이건 판즈이의 잦은 국대차출이 원인이다. 시장성과 실력이 모두 갖춰졌다고 판단해 영입을 시도했던 리버풀, 뉴캐슬 두 구단이 판즈이 영입은 최종적으로 접은 이유가 바로 이 차출문제였다. 팰리스에서 승격에는 번번히 실패하며 중국인 최초의 EPL 진출 선수 타이틀은 놓쳤지만 그는 거친 잉글랜드에서도 살아남은 피지컬을 통해 중국 대표팀의 핵심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2001년 10월 35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스코틀랜드 던디 유나이티드에 이적했고, 시즌 14경기 2골을 기록했다. 이후 2002 월드컵 본선이 끝나고 중국으로 복귀해 상하이 인터내셔널에 입단했다가 다시 잉글랜드 진출을 추진, 2002-03 시즌을 카디프 시티에서 보내며 6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이 시즌 이후 중국이 아닌 홍콩으로 건너간 그는 불러 레인저스에서 한 시즌을 보내고 다시 중국 상하이 조본에서 2시즌, 이후 다시 홍콩으로 건너가 불러 레인저스에서 1시즌을 치른 뒤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선수생활을 총정리하자면 아시아서도 손에꼽히는 실력에 무지막지한 신체능력도 갖추고[1] 그에 걸맞은 선수경력도 보냈지만 다소 시운이 맞지않은 아쉬운 선수였다. 그가 전성기를 보낼 시기, 중국은 될듯 될듯 아시아 탑급으로는 나아가지 못하던 시기였고, 그의 유럽진출도 30대가 되어서야 성사되었으며 월드컵 본선 경력 또한 선수생활 막판에야 달성했다.

그리고 이른바 중국 축구가 가장 강했던 시기의 세대인 리웨이펑, 순지하이, 양천, 리티에, 샤오자이, 정즈, 두웨이[2], 등 유럽파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온 2002 월드컵 본선 진출의 주역들과는 얼마 합을 맞추지 못했다. 즉 시기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레전드.

3. 국가대표 경력

1992년 22살의 나이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데뷔전을 치른 해에 1992 AFC 아시안컵 일본 대회 최종 엔트리에도 들어 아시안컵 무대를 밟았다. 이후 96년, 2000년 두 번의 아시안컵에서는 중국 대표팀의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고, 대표팀 생활 말기, 대한민국과 일본이 개최국으로 빠진 2002 한일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맹활약하며 중국의 첫 월드컵 본선진출을 이끌었다.

본선 무대를 경험한 뒤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A매치 통산 106경기 17골로 센추리 클럽에도 가입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센터백치고는 단신의 조건에 가깝지만, 몸이 워낙 근육질이라 몸싸움에 능했고, 속도도 빨랐다. 한중 정기전에서 당시 한창 전성기를 지나던 날쌘돌이 서정원의 역습을 바로 따라잡아 막는 장면은 한국 팬들에게도 유명하다. 또한 서전트점프가 100cm에 가까울정도로 괴물같은 신체능력을 자랑했다. 이 신체조건 덕분에 1부리그 이상으로 빡센걸로 유명한 잉글랜드 2부리그에서도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고, 지금도 중국 축구팬과 축구인들은 판즈이의 신체능력에 맞먹는 선수가 안나오는걸 한탄하고 있다.

또한 상술한 대로 수비수면서도 골 결정력이 좋아 중국 갑A리그 득점왕 경력을 가지고 있다.

5. 은퇴 이후

자신이 은퇴한 구단인 홍콩의 레인저스 구단에서 코치직을 맡으며 지도자 첫 걸음을 뗐다. 이후 상하이 조본, 쑤저우 트립스 구단을 거쳐 2008년 상하이 상강의 코치로 들어갔고, 2010년 상하이 상강 감독직을 맡으며 팀의 중국 슈퍼 리그 승격이라는 미션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 도전에 실패하며 시즌 종료 후 경질되었다.

중국 방송에서 축구해설자로 일하던 적도 있는데 그 시절인 2013년 6월 15일 평가전에서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5-1 대참패를 당할 당시 분노하면서 "이제 다음은 베트남에게 질 차례이고, 그 다음에는 미얀마에게 질 차례이다." 라고 말했는데, 뜻밖에도 말이 씨가 됐는지 2022년 2월 1일, 2022 월드컵 최종예선 8차전에서 중국은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3-1로 패하면서 베트남전 첫 패배와 함께 판즈이의 예언은 놀랍게도 현실화가 되었다.

이 패배 이후, 판즈이는 웨이보를 통해 “ 축구에는 국경이 없다. 하지만 팀 고유의 결합과 전통이 있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중국 축구는 틀을 다시 다져야 한다. 어린 선수들이 축구를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바꾸고, 압박을 받을 때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지도해야 한다. 승리와 패배에도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승리를 갈망하되 패배에 승복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즐거워야 한다. 축구가 주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끝으로 “지금이라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면 중국 축구는 도태될 것이다.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 중국 축구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중국 축구는 절대로 한두 명에 의해서 바뀌지 않는다. 이게 가장 중요한 맹점”이라고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20년 동안 지겹게 나오던 지적이다.

6. 여담



[1] 적어도 당대 동아시아에서 그와 견줄만한 센터백은 홍명보 이하라 마사미밖에 없었다. [2] 놀랍게도 중국 월드컵 본선 최종엔트리에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