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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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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4년 스위스 월드컵 ~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였다. (16강 조별리그) [2] 1982년 스페인 월드컵 ~ 1994년 미국 월드컵은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였다. (24강 조별리그) [3] 1998년 프랑스 월드컵 ~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은 32개국 본선 진출 대회였다. (32강 조별리그) [4] 2026년 북중미 월드컵 ~ 현재까지는 48개국 본선 진출 대회였다. (48강 조별리그) [5] 홍명보 감독이 2026년까지 사퇴 혹은 경질을 당하지 않는 이상 홍명보호가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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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 멕시코전 · 네덜란드전 · 벨기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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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범근호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의 기록을 정리한 문서.

2. 32강 본선 조 편성 및 전망

파일:1998draw.png
조 편성 결과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32강 본선 E조에 편성되었다.
파일:19980101.jpg
조 편성 후의 MBC 뉴스 화면[1]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말 그대로 각 월드컵에 한 개 정도씩 나올 만한 최악의 죽음의 조[2]이지만 당시에는 한국이 진출할 수도 있다는 예측이 주였다.[3] 이 당시에는 축구기자들조차 해외축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고 일반 한국 사람들도 네덜란드, 벨기에가 유럽에 있는 작은 나라라는 거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지난 대회에서 잘 알려진 유럽국가이자 축구 강국으로 유명한 독일, 스페인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을 펼쳤으니 당연히 네덜란드, 벨기에는 해볼 만하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 추첨 후 저녁 뉴스에서는 KBS와 MBC는 해볼 만하다고 평한 반면 SBS는 매우 힘든 조에 걸렸다고 평했다. 일반 한국 사람들과 한국 언론에서는 E조가 꿀조라는 말도 안 되는 인식이 많았으나 정작 차범근 전 감독은 E조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악의 죽음의 조로 평가했다.[4] E조에서 우리가 최약체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차범근 전 감독 "최악의 조편성, 포기않겠다"

조 편성 이전 언론의 희망적인 설레발이 있었다. 1998년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FIFA 랭킹은 20위~21위로 역사상 최고일 때였고, 멕시코는 4위였으며, 대한민국을 5:0으로 누른 네덜란드는 25위로 우리나라보다도 낮았다.[5] E조 피파 랭킹 순으로 보면 대한민국이 조에서 2위였기 때문에 언론은 아마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1994년 조 편성은 각 팀들을 FIFA 랭킹과 월드컵 전적 등을 종합해 1그룹부터 4그룹으로 나눈 후 각 그룹별로 한 팀씩 조 추첨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방법을 1998년 월드컵에서도 그대로 쓸 경우 월드컵 4회 연속 진출의 나름 경험있는 팀이니 만큼 우리도 3그룹 정도로 들어가 해볼만한 팀인 4그룹 팀과 맞붙어 이기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 다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포트는 최상위 시드 8팀을 제외하고는 대륙별 안배로 결정되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더라도 당시 월드컵에 첫 출전한 네 팀을 제외하고 나머지 28개 팀 중에서 대한민국보다 월드컵 성적이 안 좋은 팀은 이란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 어차피 실력대로 포트를 나눴다고 해도 4그룹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 당시 언론의 설레발이라는 게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언론이 설레발을 칠 수 있었던 것은 미디어에 해외 축구에 해박한 인물이 거의 없었고[6] 일반인들 중에는 더욱 해외 축구를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쨌던 조 편성의 결과는 이러했다.

사실 압도적인 성적의 아시아 예선 통과로 인한 분위기와는 별개로 당시 국가대표팀과 관련된 모든 상황은 월드컵 본선에서의 긍정적인 결과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당시 세계 축구계와 도박사들은 한국의 1차전 상대가 죽음의 조에 속하더라도 16강은 꾸준히 가는 멕시코인데다 2차전 상대는 당시 최강 공격팀 네덜란드인 터라[7] 두 경기에서 승점을 딸 가능성이 부족해 보였기에 한국의 16강 가능성을 10% 내외로 봤으며 3패나 1무 2패가 보통의 예상이었다. 다만 이것 또한 결과적으로 맞았지만 그 내용 자체는 한국을 정확히 파악해 그것을 기반으로 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우리가 해외 축구를 접하기 어려운 만큼 1990년대 후반에 유럽 또한 유럽대로 아시아 축구에 관심이 없었기에 볼 환경도 없었다. 거기에 당시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대한민국을 높게 쳐줄리가 없었다. 그때는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월드컵에서나 몇번 마주치며 상대 나라의 축구를 봐야하는 그런 시기였다.

32강 조 편성을 감안할 때 16강은 어려움을 넘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당장 팀 각각의 면모만 보아도, 32강 E조 톱시드 팀 네덜란드는 이전부터 월드컵 준우승만 2회에 일단 월드컵에 나오면 조별리그 통과는 쉽게 했다. 1994 월드컵까지는 16, 24강 팀으로 진행되다 보니 월드컵에 개근한 브라질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우승 후보급이라도 꾸준히 월드컵에 출전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당시 스쿼드조차 과거, 미래를 통틀어도 나오기가 어려울 정도로 역대 최고 수준의 레전드급 선수들이 즐비한 최강팀 중 하나였다. 보통 유로 88 우승을 이루어낸 오렌지 삼총사 시절 다음 가는 최고 수준의 멤버 구성으로 꼽힌다. 이미 1994~96년에 유럽 정상에 우뚝 선 아약스 멤버들이 엔트리에 대다수 포진되었고 당시 20대 초중반이던 멤버들이 1998년 즈음엔 유럽의 빅클럽에서 맹활약하던 때이다. 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그 자리는 전성기를 맞이한 데니스 베르캄프가 리더 역할을 했고 수비의 구심점엔 야프 스탐이 있었다. 실제로 거스 히딩크가 4강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내고도 사임할 수밖에 없던 것이 '이런 스쿼드로 4강은 기대 이하 수준의 성적이다'라는 여론이 있었다고 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현재 기준으로 월드컵에서 이란이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와 같은 조가 되었거나 일본이 스페인, 독일, 코스타리카와 같은 역대급 어려운 조로 편성되었다고 평가받는 것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의 죽음의 조가 된 셈이다.

32강 E조 2시드 팀 벨기에 역시 당시에는 FIFA 랭킹이 40위권에 가까운 조에서도 최하위였으나 오랜 월드컵 참가 경력과 더불어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 4위를 달성한 것을 비롯하여 16강 15위권 안을 여러 번 이뤄낸 무시 못할 다크호스였으며, 이 두 팀에게 프랑스는 홈 그라운드나 마찬가지다. 특히 이 점이 당시 한국 축구계와 언론의 가장 큰 오판 중 하나인데,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라이벌 의식 & 바로 옆에 있어 몰려든 사실상 적진 원정이나 다름없는 무시무시한 원정의 공포가 국가대표의 경기력을 뚝 떨어뜨렸다. 실제 당시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 네덜란드전 때 관중석이 오렌지색으로 도배된 것을 보고 시작하기도 전에 완벽히 기가 죽었다고 한다. 이후 이 회고는 한일 월드컵의 폴란드전이 열린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의 붉은색 응원으로 다시 회자된다. 프랑스 월드컵 때의 오렌지 물결은 공포였지만, 붉은 물결과 응원 소리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주었다고 한다. 상대 폴란드가 완전히 얼어버린 건 덤.

32강 E조 4시드 팀 멕시코는 당시 FIFA 랭킹 10위권을 다투는 북중미의 강호로 월드컵만 오면 일단 16강 15위 이상 연속가는 국가였다. 당시 북중미 축구는 멕시코가 최강이고, 미국이 멕시코를 추격하는 추세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멕시코가 유독 저평가되어 1승의 제물이라고 보도되곤 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멕시코 선수들이 해외 진출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비유럽 리그에 관한 정보도 부족하니 멕시코 리그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렇게 유독 멕시코 국대가 국내에서 저평가당하는 현상은 멕시코 선수들의 해외 진출 증가와 인터넷의 발달로 멕시코 리그를 포함, 멕시코의 전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그동안 월드컵에서 상대한 팀들이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우루과이, 스페인, 독일 등 멕시코보다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절대 떨어지지 않는 강팀들이라는 점도 멕시코를 깔보는 원인의 한 축이 되었다.

문제는 멕시코가 각 조에서 시드 먹을 수준의 팀들과 비교하면야 그렇겠지만, 조별리그에 있어서는 1986년의 불가리아, 1990년의 우루과이나 벨기에, 혹은 1994년의 볼리비아 같이 우리가 1승 제물로 여긴 팀들보다 절대 약하다고 볼 수 없거나 더 강한 팀이라는 게 문제. 사실 저때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라 축구 좀 아는 사람들은 미국과 같은 조가 된 이란이나 자메이카가 같은 조가 된 일본을 많이 부러워했다. 게다가 당시 멕시코 국대는 캄포스, 블랑코, 에르난데스 등 전성기를 구가하던 스쿼드였다. 이런 살인적인 수준의 강호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그저 아시아에서 월드컵 흥행에 구색이나 맞추러 나오는 최약체 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따라서 대부분의 외신들 평에 한국은 16강 진출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조 추첨 당시 국내 언론들은 "멕시코는 중남미 팀 특유의 잘 흥분하는 국민성 때문에 경기를 순간 말아먹는 스타일의 팀으로 정신력이 강한 대한민국이 해 볼 만한 상대이며, 네덜란드는 다인종 팀 구성 때문에 팀 케미스트리가 약하다"는 평을 했는데 이는 대한민국이 독일이나 브라질이라는 전제 하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멕시코는 팀의 전력이나 특성상 강호와의 평가전에 자주 불려다니는 나름 인기팀인데, 확실히 기복이 심한 경기력이 단점이었고, 네덜란드도 당시 대표팀에 인종 갈등이 있기는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팀 내부 문제가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멕시코나 네덜란드가 브라질, 프랑스 등과 경기를 할 때에 해당되는 것이지 당시 몇 수 아래인 대한민국과 경기를 할 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더불어 당시 네덜란드 감독은 스타 플레이어들의 기강을 잡는 데 능숙한 거스 히딩크였다.

국내 언론은 벨기에는 1980년대의 강팀일 뿐 약세라는 평을 내리며 셋 중에 한 경기 이기고 두 경기 정도 비기면 괜찮겠다는 망상을 쏟아냈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문제는 딱 저 정도 평으로 끝났다는 것. 벨기에 전력을 제대로 분석한 기사도 별로 없었다. 사실 분석을 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한국에는 거의 없었다. 멕시코는 1승 제물이라면서 엄청나게 관심을 쏟았고, 네덜란드는 시드 배정 팀이라는 이유로 나름의 관심이 있었으나 벨기에는 정말로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8년 전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만나 0:2로 진 팀인데 1990년보다 전력이 약화됐을지언정 여전히 버거운 상대임에는 변함이 없는데도 벨기에를 만만하게 본 것이다. 당시에는 국내 기자들과 전문가들이 직접 여러 경기를 보고 평하는 것보다는 외국 언론의 평을 보고 정리하는 수준이었고, 당연히 출처가 되는 언론이 속한 국가들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축구 강국이니 이들 언론의 분석만 보고 분석을 한다면 해볼 만 하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기도 했다. 사실 축구협회나 축구 관계자들에겐 더욱 부담인 게 1996년에 2002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가 이뤄지면서 개최국으로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하는데 바로 직전의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가능성이 높아지고 월드컵의 열기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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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 발표 당시 대한민국 김영삼 전 대통령 일본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 두 정상은 서로의 공동 개최를 축하하며 한일 양국 두 나라가 2002년 한일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라가 멋진 맞대결을 펼치자는 덕담이 오갔다.[8] 김영삼 전 대통령, 하시모토 전 일본 총리, 월드컵 공동 개최 입장 표명 김영삼 전 대통령 하시모토 월드컵 결승전서 만나 멋진 맞대결 펼치자

본선 경기 이전까지는 세계 축구와 대한민국과 아시아 축구의 냉정한 현실을 인식하던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그나마 해 볼만 하다, 차범근 전 감독이 있기 때문에 그를 믿는다라는 풍조가 강했다. 바로 이전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당시 같은 조의 스페인, 독일, 볼리비아라는 국가들의 면면은 일단 겉보기로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보다 오히려 더 어려워 보이는데, 대한민국은 이들을 상대로 2무 1패를 거둬 승점 2점으로 월드컵 20위를 기록했고 경기 내용까지 따지면 아깝게 16강 진출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1994년 미국 월드컵은 본선 진출팀이 24팀이라 조 3위를 해도 2/3의 확률로 16강에 진출하는데 반해, 1998년 프랑스 월드컵부터는 32개팀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16강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최소 조 2위는 해야 한다. 한마디로 월드컵에 진출하기는 쉬워졌지만 본선에서 16강에 진출하기는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진 것이다. 따라서 예전 월드컵처럼 1승으로는 부족하고, 두 팀을 제쳐야 16강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지만 당시 언론에서 그런 것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16강을 위해선 멕시코만으로는 부족하고 벨기에도 제쳐야 했는데, 벨기에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하기는 커녕 관심조차 없던 것이 언론들의 태도였고, 거의 멕시코를 이기면 16강 간다는 식의 기사들만 열심히 써댔다. 한국이 해 볼만 하다는 설레발이야 백번 양보해서 경기 전부터 괜히 기를 꺾을 필요 없으니 그런 거라고 쳐도, 단순 계산만 해 봐도 알 수 있는 일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당시 월드컵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가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들이다.

당시 스포츠 전문 채널이라고는 현 SBS Sports의 전신인 한국스포츠TV 하나 뿐이었고 케이블 TV 보급도 지금보다 훨씬 떨어지고 스포츠 채널에서도 해외 축구는 거의 보기 어려운 상황인데다 신문사마다 스포츠 기자라는 양반들도 많아봐야 대여섯 명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스포츠를 훑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야구도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통해 세계 야구계에 대한 분석이 가능한 사람은 대한민국 자체에 서너 명쯤은 있었다. 거기에 농구나 배구도 있으니 한 기자당 한 스포츠를 맡아도 모자랄 판에 한 기자가 여러 종목의 기사를 만드는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축구 전문가는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왔거나 정말 극도록 관심이 많은 극소수의 사람들 빼고는 없었다. 사실상 스포츠 전문 기자나 축구 해설위원이라고 하더라도 모두가 유럽 축구라고 해봤자 국가대표 몇 경기 구해서 본 수준의 무지한 그야말로 전국민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 벌어진 심각한 착각이었다. 그야말로 축구에 있어서 만큼은 개화기 이전의 조선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한국의 상태였다.[9]

해외 팀에 대한 정보도 크게 부족했는데, 이를테면 월드컵 예선 직후 벌어진 킹스컵에 나온 덴마크가 어느 수준의 팀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로 경기에 임했는데, 훗날에서야 이 팀이 A대표팀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정도.

월드컵 대비에 얼마나 역량을 쏟아부을 수 있는지도 문제였는데, IMF 사태 직후[10] 인 당시 분위기상 그것도 불가능했다. 평가전 상대나 전지훈련지 등도 역시 지금 생각해본다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질이 낮았다. 그리고 IMF 직후라 외화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외 전지훈련 중에 벌인 경기들은 국내 중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이것도 지금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2019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다만 이 모든 게 당시에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본선에서는 어떻게든 16강에 갈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시아 예선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기대치가 높아졌으나 상대팀에 대한 분석이 전혀 되지 않았고 오로지 실력으로 생각했다.

사실 월드컵 조 편성이야 어떻게 되든 어렵지만…당시 차범근은 이런 조 편성을 두고 언론들이 16강 할 수 있다!고 다들 설레발치는 것에 대단히 서운한 감정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16강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목표라는 것 또한 차범근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당시 분위기상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훗날 이 당시를 회고했다. 그래서 실제로 차범근은 본선 대회를 위해 선수단을 이끌고 출국하기 전 '국민 여러분께 반드시 16강의 성과를 안겨드리겠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랄 것이 부족한 당시 대중들은 저런 희망에 가득한 거짓 부렁들에 어울려 춤추며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대를 대표팀에 거는 촌극이 벌어졌다. 실제로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 중 대다수가 네덜란드의 전력이 우승 후보감이라는 부분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각종 언론 설레발에 속아 투혼만 발휘하면 이길 수 있는 '대한민국보다 조금 강한 상대' 정도로 생각했다. 실로 해외 축구에 대한 무지의 극치로, 네덜란드전 대패 이후 국민들 인터뷰를 지금 다시 돌려보면 눈도 못 뜨게 창피한 수준. 물론 이 부분은 언론에서 해외 축구에 대한 정보 자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던 것이나 축구협회에서 제대로 된 대책도 세우지 않고 압도적인 예선 성적을 자축하기만 했던 탓이 크다. 근데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장 2006년 스위스전이나 2014년 브라질 월드컵 8강 드립만 봐도.[11]

그나마 유일하게 "월드컵 16강? 꿈 같은 소리 집어쳐!"라고 쓴소리를 한 언론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주간지 시사저널이다. 시사저널은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 기사를 통해 상대들을 몰라도 너무 몰라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허접으로 본다면서 당시 여론 및 언론 보도를 비난했다. 시사저널에서 예상한 한국 팀의 경기 결과는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선견지명이었다.
네덜란드에겐 한 0:4로 지며, 벨기에에겐 1~2점 차로 지고, 멕시코와 죽어라 경기를 해서 겨우 비긴다. 16강? 1승? 천만에, 1무 2패가 한국 축구의 수준이다.

당시 시사저널 홀로 이렇게 '이게 한국 축구 수준'이라고 매섭게 따지며 현실을 알라고 일침을 가하는 기사를 올려 당시 많은 비난을 들었으나, 결과를 보니 벨기에·멕시코의 자리가 바뀐 것 빼고는 칼같이 들어맞아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시사저널 독자란에 "어쩜 그렇게 예언 수준으로 잘 예측했느냐"는 글이 올랐는데 시사저널 측은 그게 한국 국대 축구 실력이거든요라고 응답했다.

이렇게 시사저널 독자란에 예언 수준으로 잘 예측했다며 놀라워했는데, 정작 월드컵을 앞둔 역술인들 예언은 형편없이 빗나갔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멕시코전 1:3 패배를 맞추자 크게 화제가 되어 후속 기사가 실렸는데, 네덜란드를 무려 한국이 2:1, 3:1로 승리하고 벨기에에게 패한다는 예언으로 다 틀렸다. 우승국은 '우승 후보 1순위' 브라질을 꼽아 틀렸는데, 역술인들의 예언은 당시 한국 언론의 대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눈에 띄기에 가장 확률이 높은 팀에 베팅하고 그럴 듯한 해석을 껴맞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정도다. 가만 보면 펠레의 저주가 억울할 법도 한데, 사실 한국 언론이나 역술인이나 펠레 못지 않게 빗나간다는 것이다. 다만 펠레의 발언은 워낙 영향력이 강하고 또 각국 기자들이 자국 팀에 대해 물어보다 보니 '립 서비스' 수준의 덕담을 해주고 그게 대서특필되어 틀리면 다 뒤집어쓰게 되는 면도 있다. 한국 언론도 말이 씨가 된다고 욕 먹을까봐, 일부러 국민들에게 듣고 싶은 말 들려줘야 장사가 잘되니까 립서비스 차원에서 띄워주는데, 정작 자신들이 하늘 높이 붕 띄워놓은 차범근을 지하 뚫을 정도까지 내팽개쳐버리며 성난 군중에게 희생양으로 던지고 자신들의 책임은 쏙 빠져나간다. 희망고문을 부추긴 건 한국 언론이고, 그나마 시사저널만이 양심적으로 분석했다. 다만, 시사저널은 2002 한일 월드컵도 어렵다는 비관적인 기사를 냈다가 알다시피 4강까지 올라간 탓에 정말로 욕을 먹었고 이후론 시사저널은 월드컵 성적 분석에 대하여 입을 다물게 된다.

한국이 아닌 다른 팀으로 현재 국대 전력을 기준으로 본 상태에서 조 편성을 하면 마치 독일(당시의 네덜란드)-스페인(당시의 벨기에)-콜롬비아(당시의 멕시코)-온두라스(당시의 한국) 같은 조 편성에 1998년 월드컵 당시 한국은 지금의 파나마 수준의 포지션이다. 이런 조 편성에서 온두라스가 16강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당시가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였다면 축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개소리라며 일축했을 가능성도 높지만, 이 때는 인터넷은 있었으나 그 힘이 미약했고[12] 1가구 1컴퓨터가 정착된 시절도 아니었다. 케이블 채널도 가입된 사람들 소수만 즐기는 문화였다. KBS, MBC만 나오고 SBS는 서울 및 경기 지역에만 나오고 나머지는 지역민방인 아주 열악한 시절이라 누가 뭘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다만 위에서 말한 대로 설레발의 이유가 중 '해외 축구에 대한 무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 당시 언론에서도 네덜란드를 소개하면서 월드컵 2회 준우승팀이라는 이야기를 빼먹지 않았고, 승산도 높게 보지 않았다. 다만 멕시코전을 3-1로 지고도 네덜란드를 잘하면 비긴다는 개소리를 했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13] 애초에 멕시코, 벨기에가 타깃이었지 네덜란드를 타깃으로 삼지는 않았다. 다만 2000년대 후반, 2010년, 2020년대의 눈으로 보면 그 당시 네덜란드에 한국이 대패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0:2, 0:3 패배를 예상한 언론들이 많았으니 해외 축구에 대한 무지가 과장은 있을지언정 없는 일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어느 정도 반론도 가능한게 일단 상단의 MBC 뉴스 캡쳐에 나온 어느때보다 16강 가능성 높다는건 당시 기준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피파 덕에 타 대륙과 경쟁없이 운좋게 첫 진출한 1954년 16개국 본선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1986년 24강 본선엔 우승팀 아르헨티나,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 유럽의 다크호스 불가리아와 한 조, 1994년 24강 본선에는 피파랭킹 1위 & 디펜딩챔피언 독일과 피파랭킹 5위 스페인, 남미예선 3위 볼리비아[14]랑 한 조인 현 시대 기준으로도 최악의 죽음의 조에 편성되었기에 단순 '가능성'만 봤을 땐 이전에 비해 난이도가 쉬운 조임에는 맞긴 했다.

심지어, 멕시코전에서 하석주가 퇴장당하기 전까진 분명 우위에 있었던건 사실이고[15][16] 네덜란드는 해당 대회 4위를 기록했으나 벨기에와는 비겼다. 스포츠에 만약은 없지만 하석주 퇴장의 나비효과만 아니었어도 언론의 설레발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없진 않았던 것.[17]

사실 월드컵 당시의 역대급 설레발의 이유로 무지 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우리나라 대표팀은 정신력이 뛰어나서 실전에 강하니 그걸로 경기력의 열세는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2010년대 현 시점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 가겠지만 당시 스포츠계는 정말 이런 시대착오적 생각들이 판을 쳤고 해외 스포츠에 대해 몰라도 정말 몰랐다. 애초에 수치화할 수 없는 정신력을 전력 분석에 변수로 넣으며 "태극 전사들이 앞서는 부분"이라고 계산에 넣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대부분의 세계적인 선수들은 초인적인 정신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물론 2002년 월드컵처럼 정말 죽어라 뛰는 한국 선수들이 객관적 기량에서 앞서는 월드 스타들을 압살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기본기와 피지컬이 받쳐줘서 어느 정도 기량이 올라왔을 때 얘기다. 1998년처럼 피지컬이고 기술이고 뭐고 아무 것도 세계적인 수준이 안 되는데 무조건 정신력 운운하는 건 웃기는 얘기.

1994년 미국 월드컵 예선에서 고전하고도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에서 스페인이나 독일 등의 강호와 대등하게 싸운 기억들에 더해 1994년 미국 월드컵 예선보다 더 압도적인 경기력과 결과로 예선을 통과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의 모습이 겹치면서 축구를 좀 알던 사람들도, 그리고 평가전 등을 보면서 크게 기대하기 어려운 경기력을 봐 온 사람들조차도 '우리나라 축구 특유의 정신력이라면 본선에서는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멕시코는 흥분을 잘 하는 팀이다 보니, 정신력이 강한 우리가 평정심만 유지한다면 이기는 게 가능하다고 분석하는 기사들이 많았고, 네덜란드전 전반 0-2의 열세에도 '선수들이 후반에 죽어라 뛰면 동점은 만들 것이다'라고 기대하면서 경기를 계속 시청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 사람들에게서 바로 직전 대회인 1994 월드컵의 스페인전, 독일전의 기억이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1994년 월드컵에서의 선전도 단순히 정신력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한국의 경기가 열린 곳 중에 1, 3차전이 열린 댈러스가 살인적인 더위를 보이는 지역이던 터라, 그것을 간파한 김호 감독이 체력 훈련에 매진한 덕이 오히려 더 컸다. 3차전에서 상대한 독일만 하더라도 노장들이 주축이라 후반전엔 거의 걸어다니다시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4년 후에는 상황이 달라서, 수적 열세로 멕시코에게 역전패당하고, 네덜란드전 후반전에 대패를 앞두며 노골적으로 뛰기 싫어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여 조기 탈락을 확정지었다. 여러 상황이 겹쳐서 벨기에와 죽어라 경기를 해 무승부로 끝나고 여론을 어느 정도 반전시키긴 했지만, 토너먼트 진출한 팀들의 넘사벽의 경기 모습을 보면서 '정신력으로 버티기에는 우리가 정말 실력이 부족했구나'라는걸 절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실제로 실력을 정신력으로 커버하자는 드립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직후로는 크게 줄어들었고, 정신력 드립에 대한 자성론도 많이 나왔으며, 운동 선수들의 진정한 정신력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전에는 그저 처절하게 죽어라 뛰는 게 정신력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이후 실력이 바탕이 된 정신력이라던가, 진정한 정신력은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무시하거나 기 죽지 않고 자기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썰이라던가 등등…히딩크의 '한국 선수들은 기술보다 정신력이 문제다'라는 발언도 저 연장선상이다. 결국 참패의 경험이 약이 된 측면도 있다. 참고로, 정신력 드립은 훗날 한일 월드컵 4강의 주역 안정환이 홍명보호의 참패 이후 실력이 먼저 된 다음 정신력이다. 실력이 안 되는데 무슨 정신력 타령이나하며 종결.

즉,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월드컵과 세계 축구에 대한 인식을 상당 부분 바꿔놓은 대회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3. 최종 엔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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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1996~1998
전체 ( 1997 | 1998)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 멕시코전 · 네덜란드전 · 벨기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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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안은 당시 소속팀이다.
지역예선에서 바게리를 누르고 아시아 지역예선 득점왕을 한 독수리 최용수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골잡이가 생겼다는 기대감을 모았다. 그리고 황선홍은 1994년 월드컵 볼리비아전에서의 부진을 씻을 기회로 절치부심했고, 골키퍼 김병지가 있었으며, 1994년 월드컵에서 수비수이면서도 2골을 넣은 홍명보가 있는 등 선수진의 면모도 화려해 보였다. 이대로 16강에 진출하기라도 하면 차범근은 스타 선수 출신 감독으로서 가히 한국의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가 될 기세였다.[18]

그러나 이렇게 월드컵 첫 2라운드 16강 진출을 기대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큰 암운이 드리워졌으니 그것은 황선홍의 부상이었다. 본선을 앞두고 벌어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황선홍이 문전으로 쇄도하다 중국 골키퍼 장진과 충돌, 공중에서 옆으로 한 바퀴 회전 후 떨어져 큰 부상을 당해 출전이 불가하게 되어버린다. 2006 독일 월드컵 직전 전성기를 달리던 이동국이 부상당해 엔트리에서 탈락한 것과 같은 맥락.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차범근이 상당히 박한 대우를 받은 것이, 이 평가전은 출국 하루 전에 있었는데, 중국과 평가전을 치른다는 것 자체를 차범근은 반대했으나 축협이 강행한 것이다. 그렇게 치른 평가전에서 황선홍이 부상당하고, 이미 엔트리 제출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대체 선수를 새로 발탁해 넣을 수도 없던 상황.[19][20][21]

당시 차범근은 황선홍이 부상당하기 전까지 그에게 깊은 신뢰감을 표시하였고, "황선홍은 대표팀 전력의 절반 이상", "유럽 수비수들에게 통할 선수는 황선홍 정도"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할 정도였기에 심대한 타격이었다. 단, 황선홍이란 표현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 대표팀에서 황선홍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사실 황선홍은 아시아 예선전에는 엔트리에도 없었고 예선이 끝난 이후에 팀을 재편하며 합류했지만 그 시기도 늦었다. 때문에 당시로선 팀 전체의 전력을 논할 정도로 유력한 선수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월드컵 직전에도 공격수는 단연 예선에서 폭풍 활약한 최용수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그러나 통산 커리어에서는 물론 최용수의 전성기 시절 기량을 비교하더라도 황선홍과 비교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어쨋거나 황선홍의 부상이 대표팀에 악재가 된 것은 사실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황선홍의 삽질이 일반 국민에게 워낙 크게 각인된 터라 1998년 당시에도 황선홍에 대한 인식과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았다. 황선홍이 중국 전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도 언론이든 국민 여론은 아쉽지만 별 상관 없다 수준. 되려 황선홍을 1994년 이후로 좋게 보지 않은 일부에선 차라리 잘되었다 소리까지 나오던 판국이다. 황선홍이 없다 하더라도 지역예선 때 최용수를 받쳐준 김도훈이 좋은 플레이를 한지라 큰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 K리그의 팬이 아닌 국대 축구만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리그에서 황선홍이 보인 활약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황선홍의 부상을 언론이 걸고 넘어진 건 월드컵 본선에서 참패한 이후로 패배의 원인을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다 그 와중에 황선홍의 부재가 팀에 타격이 컸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확대 해석을 했다는 의견도 있다.

여하튼 확실한 공격 자원이던 황선홍이 낙마하고, 에이스 최용수와 서정원[22]은 제 컨디션이 아니었으며 본선 첫 경기에서 한국의 월드컵 본선 사상 처음으로 선취골을 넣은 하석주가 바로 가린샤 클럽에 가입하는 불운이 있었다. 대표팀의 새로운 바람이라고 불리던 '팽이' 이상윤은 프랑스에 도착한 대표팀의 연습 중에 김태영의 강력한 슈팅에 헤드샷을 당해 그 상태로 멕시코전을 치렀고,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 상대 측면을 갈아엎던 모습을 멕시코 전에서 기대한 축구 팬들이 경악할 정도로 말그대로 정줄을 놓았는데 후에 이상윤 본인이 매체에서 회상하길 과장 살짝 보태서 본인은 머리를 가격당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멕시코전이 끝났다고... 진짜로 정줄을 놓은 상태로 경기를 뛴 거다. 서정원은 아들이 수두를 걸려 안아줬다 수두가 옮았다.

4. 32강 조별리그 멕시코전 - 1 : 3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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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2강 조별리그 네덜란드전 - 0 : 5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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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32강 조별리그 벨기에전 - 1 : 1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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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32강 E조 다른 경기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이외 나라들간 3경기들은 전부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 만큼 사전 예상대로 세 팀이 모두 팽팽했던 죽음의 조 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과의 경기 결과 순 대로 순위가 세워졌는데 대한민국을 5:0으로 이긴 네덜란드가 조 1위를 차지하고 3:1로 이긴 멕시코가 조 2위, 대한민국과 비긴 벨기에는 유일하게 대한민국을 이기지 못하여 3무로 조별리그에서 무패 탈락(19등)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조 꼴찌로 탈락(30등)했으나 나머지 팀들의 16강 진출 여부를 결정한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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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당시에는 진출 확률이 높다는 소리를 했으나 현재는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죽음의 조로 평가받는다. 그러니까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때의 대한민국에 속한 조와 거의 비견될 정도다. 그런데 2018년의 그 조에서 대한민국 마지막 경기에서 엄청난 이변을 일으킨다. 그 외에 대한민국 월드컵 본선 첫 진출이였던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때도 압도적 우승 후보로 지목받은 헝가리와 그 헝가리와 결승에서 맞붙어 이기고 우승한 서독, 지역 예선에서 스페인을 탈락시키고 올라온 튀르키예까지, 대한민국이 본선 최약체였던것도 있지만 비벼볼만 한 상대 자체가 없던 조 편성이였다. 즉 이 세 번의 본선은 대한민국이 애초에 약체였는데 거기다 상대팀들은 죄다 16강 컨텐더 이상의 팀이라 대한민국은 죽음이 확정된 수준이였다고 보면 된다. [2] 16강 진출 컨텐더 팀이 보통 두 팀 정도인 게 정상이나 E조는 한국 말고 무려 세 팀이 컨텐더 팀이었다. 그리고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 32개 팀으로 늘어남에 따라 조 3위를 하면 무조건 탈락인건 덤. 당연히 월드컵에서는 운이 따라야 16강에 가는 한국 축구 국대가 버틸 수 없는 조인 것. 그리고 한국 제외 세 팀은 전 대회 월드컵 토너먼트 진출국이었다.(네덜란드 8강(7위), 벨기에 16강(11위), 멕시코 16강(13위)) [3]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톱시드에서 밀려난 축구종가 잉글랜드, 직전 대회 4강 불가리아, 그리고 직전대회 돌풍을 일으키고 올림픽 금메달까지 차지한 나이지리아 정도의 팀과 한 조가 되는게 최악의 조편성으로 여겼기에 이 팀들을 모두 피했다는 안도감에 약간은 근거없는 희망적인 전망을 냈던 것이다. [4] 사실 저 당시까지만 해도 전세계 최상위권 강팀이 같은 조에 들어가있는지의 여부가 죽음의 조를 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으나 축구 조별리그에 대한 분석이 많아진 현재에는 16강 컨텐더 팀이 몇 개냐가 죽음의 조 수준을 논하는 데 가장 큰 조건이 되었다.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16강 컨텐더 팀이 3개, 게다가 대한민국도 당시 벨기에를 무승부 탈락시키는 등 과거에 비해 다소 강해진 상황이었으므로 1998년 월드컵 최악의 죽음의 조로 평가할 수 있다. [5] 이 당시 FIFA 랭킹은 상대에 상관없이 경기를 많이 하고 많이 이기면 점수가 올라가는 방식으로 책정을 해서 신뢰성이 많이 낮았다. 일본의 경우 9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6] 일단 유럽과 대한민국의 시차 및 발달하지 않은 방송 환경 등으로 해외 축구를 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한준희가 해외 축구의 도사가 된 것 또한 국내에서 배운 게 아니라 유학을 하면서 전세계 모든 방송을 틀어주는 일본이나 미국에서 배운 것이다. [7] 당시에는 대륙별 안배로 시드를 배정했기 때문에 1시드 네덜란드, 2시드 벨기에, 3시드 대한민국, 4시드 멕시코 순이었다. 1시드팀은 2-3-4 시드 순으로 붙고, 4시드팀은 3-2-1 시드 순으로 붙고 2시드 팀은 1-4-3, 3시드 팀은 4-1-2 순으로 붙는데 결국 3시드의 대한민국에게 중요한 1차전은 멕시코,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2차전은 네덜란드가 된 것이다. 또한 4시드로 배정된 멕시코는 대한민국, 벨기에를 먼저 만나고 같은 조 최강 네덜란드는 가장 마지막에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8] 실제로는 두팀 모두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일본은 16강에서 한국은 아쉽게 준결승에서 탈락하며 두팀 모두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9] 다만 쓰지만 약이 된 월드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월드컵 이후 해외 축구를 보면서 선진축구를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고, 그런 이유로 마르세유의 비극으로 느끼게 된 유럽이라는 벽, 그리고 그 유럽에서 열리는 미니 월드컵이라는 평가를 받던 유로 2000은 정말 놀랍게도 예선부터 주요 경기 대부분을 지상파에서 생중계했다. 또한 유럽대항전 뿐만 아니라 안정환 등 국내 선수들이 유럽에 하나둘 진출하면서 월드컵 스타들이 뛰는 해외 축구 리그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지기 시작한건 덤이고, 유럽 주요 리그 경기와 챔스 등이 지상파와 케이블 스포츠 채널에서 생중계되기 시작했다. [10]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정식으로 요청한 때는 1997년 12월 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6월 중순~7월 중순에 개최되었으니 약 7개월~8개월 여 밖에 안된 상황이었다. [11] 이는 2002년 4강의 성과로 인해 눈이 터무니 없이 더 높아진 영향이 크다. 축구협회는 2006년 원정 첫 승 프랑스전 무승부 승점 1점 획득의 대회 17위,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최초 원정 2라운드 16강 15위 결과에 2014 월드컵 8강이라는 김치국을 마셔가며 브라질에서 8강전 대비 호텔까지 예약했으나 알다시피… [12] 당시에는 RSSSF만이 유일하게 축구 관련 정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사이트였는데, 상술했듯이 인터넷이 미약한 시절에 지구 반대편을 서버로 두는 사이트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13] 물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이미 1패를 안은 상황에서 네덜란드에게 최소 비기지도 못한다면 탈락이 확정되는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네덜란드를 상대로 어쩔 수 없이 반드시 무승부 이상을 목표로 임할 수 밖에 없었다. [14] 홈빨 버프를 지독하게 받았더라도 무려 브라질을 이기고 올라온 팀이다. [15] 축구에서 한명이 퇴장당하면, 그것도 전반전에 한명이 퇴장당하는건 매우 크다. 일단 숫적으로 불리하면 전술적으로도 타격이 큰데 전반전에 퇴장당하면 그만큼 남은 선수들이 빈자리를 메꿔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갈 수밖에 없다. 당장 2002년에 포르투갈전과 이탈리아전도 대한민국 선수들이 잘하긴 했지만 상대 선수가 퇴장당해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이길 수 있었다. [16] 결과론적이지만 멕시코도 16강 13등으로 탈락했고 그 멕시코를 이긴 독일도 8강 7등으로 탈락했다. 당시의 멕시코도 딱 16강 수준의 팀이라 생각만큼의 강팀은 아니었던 것. [17] 네덜란드전 0:5 대패가 문제가 될 순 있지만 대한민국이 최초로 원정 2라운드 16강(15위)에 성공한 2010년 대회 때도 아르헨티나에게 1:4 대패를 당했다. 점수차가 적게 나긴 하지만 당시 아르헨티나는 8강에서 독일에게 0:4로 크게 지고 1998년의 네덜란드한테 8강 6등으로 탈락한 팀이다. 물론 당시 아르헨티나 감독 디에고 마라도나의 삽질도 한몫하긴 했지만… [18] 이 두 사람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모든 종목을 통틀어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의 대표적인 반대 사례들로 평가받을 정도로 감독으로서도 각각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FC 바르셀로나에게 큰 영광을 가져다 준 명장으로 기억된다. 두 사람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베켄바워는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조국 서독에게 통산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을 안겨주었고, 크루이프는 1991-92 유러피언컵에서 바르셀로나에게 구단 사상 첫 빅 이어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19] 지금은 본선 조별리그 첫 경기 하루 전까지는 부상자에 한해 예비 엔트리 내에서 얼마든지 교체가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한 번 제출한 엔트리 변경은 불가능했다. 앞서 미국 월드컵 때도 강철이 엔트리를 제출한 뒤 출국하기 직전에 발목 인대 부상을 당해 뛰지 못한 바 있다. [20] 그리고 대한축구협회가 얼마나 정신나간 집단이고 황선홍이 얼마나 얼빠진 인간인지는 25년이 지난 2023년 6월, 한중전 PTSD가 강하게 남아있는 황선홍이 U-23 대표팀을 이끌고 그들의 평가전 상대로 중국 대표팀을, 그것도 2연전으로 잡음으로서 온천하세계만방에 드러났다.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하나도 변하지 않은 대한축구협회의 병크와, 황선홍의 내가 당한 만큼 너희들도 당해야 한다 꼰대 마인드로 인해 황선홍호 엄원상 고영준 조영욱 쿵후 축구로 잃었다. 이쯤되면 황선홍이야말로 김성근 전명규를 뛰어넘는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다. 중국 축구의 악명을 대한민국 축구인 중에서 가장 잘 알고 있을 법한 황선홍이 그런 중국과의 평가전을 2연전으로 잡아 대한민국 축구의 미래를 3명이나 갈아버렸으니...... [21] 그리고 8년 후, 프랑스판 황선홍이 월드컵을 앞두고 쿵후 축구에 제대로 당했다. [22] 2002년 월드컵에 엔트리에 못 들어 많이들 의아해했지만 히딩크호 때도 포지션의 중복 등 전술에 맞지 않는다 하여 2001년 컨페더레이션컵 이전부터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