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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9년 6월 21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22세 남성 황호진이 김씨(25세, 로펌 직원)[1]와 동생(21세, 간호전문대학 재학)[2]을 강간후 살해하고, 약 8개월 후인 2000년 2월 16일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박씨(22세, 술집 종업원)와 정씨(21세, 술집 종업원)를 강간 후 살해하고 방화를 저지른 사건.2. 전개
황호진은 1999년 6월 초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4동 다세대 주택 옥탑방에 절도를 시도하였다. 그는 원래부터 도벽이 심해서 이미 1995년, 1996년 소년원에 복역한 전력이 있었으며, 홍제동 일대를 돌면서 절도를 저질렀다. 그러다 당시 잠금장치가 허술해서 손쉽게 침입한 한 집에서 현금과 여성용 가방, 다이어리를 훔쳤다. 그는 다이어리를 살펴보고 당시 21살이었던 여성이 간호전문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인적사항을 알게 되었다.
호프집 종업원으로 일했던 그는 퇴근 때는 항상 버스와 지하철이 끊길 시간이였고 택시로 귀가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월급이 택시비로 빠져나가는 일이 잦아지고, 데이트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돈이 점점 떨어지게 되자 택시에서 하차후 자신의 집으로 귀가하는 도중 절도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1999년 6월 21일, 범행 대상을 물색하던 황호진은 약 2주전에 절도를 했던 집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 집에 다시 들어가 절도를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처음에는 현관문에서 몰래 옥탑방으로 침입을 시도하였으나, 자매가 절도 피해를 당한 후에 집주인에게 이미 잠금장치를 수리해달라고 요청을 해서 이미 수리가 끝난 상태였다. 그러자 황호진은 다시 현관문 밖으로 나가서 침입경로를 살펴봤는데, 당시 여름이다 보니 자매의 옥탑방 창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가 옥탑방으로 침입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자매의 방 안에는 과일을 깎아먹은 흔적이 있었고 접시 위에 과도용 칼이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황호진은 과도용 칼을 집어들고 곧바로 자매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이어리에서 본 자매의 인적사항을 이야기 하며 협박하고, 21살 동생에게는 이불을 뒤집어 쓰게 한 뒤 25살 언니의 몸에 올라타서 강간하며 동시에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는 언니의 몸이 축 늘어진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이불을 뒤집어 쓰며 공포에 떨고 있는 동생을 상대로 강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동생은 언니와 달리 격렬하게 소리치며 저항 하였다. 그때 황호진은 밑에 층 집에서 인기척을 느꼈고, 동생의 목을 재차 조르고 기절시킨 뒤에 그대로 도주하였다. 얼마 후 깨어난 동생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였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동생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를 하였으나, 당시 소나기가 내렸기 때문에 증거가 비에 씻겨져 내려가는 바람에 단서를 찾기 힘들었으며, 새벽시간대라 목격자도 확보도 어려웠다.
경찰은 공개수배 사건 25시에 2번이나 방송을 내보내면서 범인을 잡으려 했지만, 결국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다. 당시 공개수배 사건 25시에서도 성명 불상이라는 제목으로 몽타주와 함께 공개수배를 하였다. 몽타주는 생존자였던 동생의 진술의 토대로 만들어졌으며, 범인의 인상착의는 170cm 전후의 키에 주황색 티셔츠와 검은색 줄무늬가 2개 있는 흰색 반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는 것, 일자 무늬 모양의 짙은 눈썹에 두툼한 입술인 2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는 것이였다.
황호진은 경찰에 검거 될 때 자신이 사는 주거지 인근에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당연히 공개수배 사건 25시에서 방영이된 성명 불상의 남성의 몽타주가 홍제동의 주택가의 벽면마다 부착이 되어있는 것을 본인도 봤었다고 진술하였다. 황호진은 이 기간에는 몸을 최대한 사리면서 낮에는 외출을 자제하고 밤에만 조용히 돌아다녔다고 한다. 자신의 범행이 매스컴까지 탔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이 완전범죄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매우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완전범죄가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 얼마 안가 오게 되는데 그렇게 시간이 흘러 8개월 후인 2000년 2월 16일 황호진은 호프집에서 퇴근을 한 뒤에 나이트 클럽에서 가서 약 오전 3시쯤 박씨(당시 22세)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취기 속에서 금새 친해지게 되었고 연락처를 주고 받으며 폐장시간 까지 춤을 추며 놀았다. 오전 6시에 나이트 클럽이 문을 닫게 되자 인근 포장마차에서 황호진과 박씨가 술을 마시게 되었고 오전 7시에 포장마차를 나와서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박씨 집에 가게 되었다. 황호진에 진술에 따르면 인근 박씨와 함께 모텔로 가자고 했지만 박씨가 자신의 집으로 같이 택시를 타고 가자고 했다고 한다. 다만 박씨가 당시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유흥업소에서 만난 남자들과 자신의 집에서 2차 성매매를 하여 돈을 벌었던 적이 실제로 있었기는 했다.
황호진은 박씨와 택시를 타고가는 도중 박씨가 선불로 10만원 짜리 수표를 택시기사에게 지불하는 것을 보고 절도를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 정도로 황호진이 도벽에 습관화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박씨는 나이트클럽에서 황호진을 만나기 직전에 유흥업소에서 40대 손님에게 팁을 40만원을 받은 상태여서 기분을 낼 겸 나이트클럽에 왔던 것이었고 황호진은 박씨의 지갑에서 유흥업소에서 손님에게 받은 현금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박씨 집으로 가게 되었고 박씨는 택시에서 아는 룸메이트 정씨와 같이 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박씨의 집은 영등포구 대림동에 위치해 있었고 박씨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소지품을 내던지고 소파에서 잠에 들었다. 황호진은 소파에 누워있는 박씨를 보고 욕정이 발동하게 되었고 그대로 누워있는 박씨의 허리를 한 팔로 휘감기 시작했다. 놀란 박씨는 바로 깨서 황호진을 발로 쇼파 밖으로 밀치고 자신과 성관계를 하려면 돈을 지불하라고 했다. 사실 박씨가 그동안 많은 남자들과 돈을 받으면서 자신의 집에서 성관계를 했던 습관이 든 상태였기 때문에 늘 하던대로 황호진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이 특별한게 아니었다. 하지만 황호진은 돈을 요구 하는 박씨에게 격분하게 되었고 곧바로 박씨의 몸 위에 올라타서 목을 졸라 살해하였다.[3]
황호진은 8개월 만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느꼈고 그대로 도주하려고 했으나 박씨가 사전에 이야기 했던 룸메이트 정씨가 살고 있다는 말이 떠오르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의 살해 장면을 보고 자는 척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옆 방으로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자가 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까이 다가가서 이불을 확 들추자 정씨가 잠결에 누구냐고 물어보았고 정씨가 실제로 자는 척을 한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자 황호진은 곧바로 정씨를 덮치며 살해 위협을 하게 된다. 황호진은 위협을 하는 과정에서 정씨가 속옷 차림으로 자는 모습을 보고 욕정을 느끼게 되었고 박씨를 살해하면서 풀지 못한 욕정을 정씨에게 풀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고 곧바로 강간을 시도하였다. 앞서 8개월 전 자매를 살해했던 방법대로 강간을 하면서 동시에 목을 조르는 방식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그렇게 정씨 역시 사망하게 되었다.
황호진은 그대로 한 집에서 여성 2명을 살해하고 그 집을 나와 허겁지겁 도주를 하였다. 박씨의 집을 나왔을 때는 눈발이 날렸던 어두운 아침이 한참 지나 눈이 녹아내린 햇살이 비추는 아침 10시가 되어있었으며 우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술에 쩔어있던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곧바로 자신의 직장이었던 호프집으로 출근을 하였다. 전날에 술을 마시고 한 숨도 못자서 매우 피곤한 상태였지만 하루 아침에 사람 2명을 살인을 한 상태라 극도로 불안한 상태였다. 황호진은 자신이 흉기를 사용해서 살해한 것도 아니고 목을 졸랐으니 기절했다가 깰 것이라고 생각하여 박씨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긴나긴 통화음과 소리샘으로 연결한다는 음성메세지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TV를 주시하였고 자신의 사건이 언론에 나갔는지를 확인하였다.
그렇게 박씨와 정씨의 사망소식이 뉴스에는 보도가 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황호진은 알리바이를 만들고 증거를 없애기로 마음을 먹고 다음날 2월 17일 오후에 박씨에게 왜 연락이 안되냐는 음성메세지를 남기게 된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오히려 경찰 조사에서 1순위로 집중 조사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고만다.[4] 그리고 다음날인 2월 18일 아르바이트를 마친 황호진은 밤 늦게 택시를 타고 박씨 집에 다시 한번 찾아 가게 된다. 문을 따고 들어가자 집 안에는 썰렁한 냉기가 감돌고 있을 뿐이었고 박씨와 정씨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그대로 있었다. 결국 황호진은 완벽하게 증거를 인멸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고 인근 신림동 주유소에 가서 석유를 사와서 다시 박씨의 집으로 갔다.[5] 그리고 거실 소파에 죽은 박씨를 정씨의 시신이 있는 침대로 옮기고 주유소에서 사온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고 그대로 도주를 하게 된다. 박씨의 집에서 난 화재는 이웃 주민의 신고로 5분만에 진화가 되었으며 출동한 소방관들은 여성 2명의 사체가 검게 탄 것을 발견한 직후 바로 경찰서에 신고를 하게 된다.
3. 수사
다음날 2월 19일 아침에 수사는 노량진 경찰서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당시 경찰은 발화지점이 여성 사체가 2구가 있는 침대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인 방화로 판단하고 동시에 사망한 여성 2명이 범죄에 의해서 피살이 되었다고 판단을 하게 된다. 곧바로 강력계 형사들에게 인계를 하게 되었고 강력계 형사들은 박씨의 집을 수색하는 도중 박씨의 핸드폰을 발견하게 되었고 박씨에 핸드폰에 황호진이 남긴 음성메세지도 확인하게 된다.곧바로 경찰은 황호진을 상대로 조사하기 위해 수사 협조 차원에서 황호진을 설득한 뒤에 황호진의 집을 수색하였고 훔친 신용카드와 절취한 물건이 황호진의 방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절도범 용의자로 체포하게 된다.[6] 우선 황호진은 긴급체포도 아니고 절도죄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게되는 입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48시간 동안 묵비권으로 버티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경찰은 황호진 상대로 강도높은 추궁을 이어나갔고 황호진은 절도죄를 저지른 것은 시인했지만 살인은 저지르지 않았다고 끝까지 부인을 하였다. 오히려 박씨와는 포장마차에서 2차로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고 진술을 하게 된다.
경찰은 황호진의 심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책을 세우게 되는데, 여성 시신 2구에서 불상의 남성의 DNA가 나왔다고 이야기 해준 뒤에 DNA 감정 동의서에 서명을 하라고 하였다. 만약에 DNA가 나오지 않는다면 절도죄로만 입건하고 살인죄는 묻지 않겠다고 하였다. 황호진은 경찰의 말을 듣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경찰은 이 때부터 황호진이 범인이라고 확신을 하며 감을 잡은 상태였으며 이제 확실한 물증만 찾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2구의 여성 사체에는 어떠한 증거도 없는 상태였다. 일단 경찰은 황호진을 인근 병원에 동행하여 혈액을 체취하게 한 뒤에 다른 강력계 형사들은 확실한 물증을 잡기 위해서 조사를 진행하게 된다. 2000년도 당시에는 DNA 감정 결과가 최소 2주는 지나야 확인이 가능했기 때문에 황호진을 오랫동안 유치장에 가두면서 조사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경찰은 박씨와 황호진의 핸드폰 기지국 수사를 이어가는 도중 황호진과 박씨의 동선이 겹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황호진과 박씨가 다녀온 나이트클럽 인근의 포장마차를 전수조사하게 된다. 다행이 사건이 벌어진지 3일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황호진이 술을 마셨던 포장마차와 주인을 찾게 된다. 당시 포장마차 주인은 7시 쯤에 젊은 남녀가 택시를 타러 가자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진술을 확보하였고 곧바로 포장마차 근처에서 택시를 전수조사하게 된다. 결국 경찰의 노고끝에 황호진과 박씨를 태웠던 택시기사를 찾게되었고 수표를 선불로 받았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경찰이 황호진을 다시 불러서 황호진의 핸드폰 동선, 포장마차 주인과 택시기사의 진술을 근거로 추궁하기 시작하였고 DNA 감정서가 나오면 모든게 끝이라고 강도높은 압박을 가하자 계속 부인하던 황호진은 결국 사건이 벌어진 4일만인 2월 20일에 자백을 하고 만다. 그리고 황호진의 자백을 통해서 황호진이 박씨와 정씨를 살해하고 이틀 후에 다시 박씨 집으로 갈 때 황호진을 태웠던 택시기사와 황호진에게 석유를 판매했던 주유소 직원의 진술 또한 추가로 확보했다.
경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황호진의 계획적인 범행행각이나 절도행각[7]을 살펴 볼 때 노량진 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은 황호진이 여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1~2년 사이에 서울에서 벌어진 강간 살해 사건을 살펴보는 도중 홍제동 옥탑방에서 자매가 강간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다 황호진이 이 사건이 벌어진 옥탑방 인근에 거주하였으니 더욱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강간하면서 목졸라 살해하는 수법까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황호진을 상대로 추궁에 들어간다. 그리고 사망한 김씨의 동생이 생존하고 있다는 것을 추가로 확인한 후에 동생을 참고인으로 불러서 조사받고 있는 황호진의 얼굴을 보여주며 언니를 살해한 범인이 맞냐고 물어보자 사망한 김씨의 동생은 곧바로 울음을 터뜨리면서 범인이 맞다고 진술을 하게 된다.[8]
그렇게 경찰은 홍제동 사건을 황호진에게 옥탑방 자매살인 사건의 범행 사실을 추가로 자백받게 되었고 황호진을 2000년 2월 24일에 검찰에 송치하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황호진이 자신의 범행에 제발이 절여서 불을 지르는 바람에 범행이 빨리 탄로가 나서 쉽게 검거할 수 있었지만 만약 박씨의 집에서 박씨와 정씨의 시신이 한참 뒤에 발견이 되었다면 황호진과 박씨를 목격했던 목격자들도 기억이 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이들의 진술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을 것으로 보이며 이 사건도 홍제동 옥탑방 자매살인 사건 처럼 미제사건으로 빠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다행이 조기에 검거되어서 황호진의 연쇄 강간 살인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다. 만약 검거가 되지 않았다면 이춘재,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에 준하는 연쇄살인 범죄가 일어나서 하마터면 서울 일대에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올 수 있었다.
4. 황호진의 생애
황호진은 1977년생 출생으로 1남 2녀 중 장남으로 당시 58세였던 환경미화원 아버지와 51세였던 전도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그는 가족들과 함께 홍제동 다세대주택 20평짜리의 3층에서 거주하였고 95년 서울에 한 K고등학교를 졸업한다. 당시 고등학교에서 성적은 중위권 수준이었으며 대입은 준비했지만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고 졸업하자마자 범행을 저지르기 전 까지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고등학생 때는 연극반 활동을 하며 별다른 말썽을 부리지 않고 황호진과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급생들은 그가 평범한 생활을 했다는 증언을 하였다. 절도 전과 때문에 병역은 면제된 상태이다. 황호진의 가족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황호진도 고3때까지 교회에 나갔다고 말했다.
다만 어릴 적부터 도벽이 심해서 친척들이나 이웃의 물건이나 지갑에 손이 댄적이 많아서 황호진의 어머니가 야단을 친 적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황호진은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었는데 극심한 도벽으로 인해서 고등학교 때인 95년도에 소년원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으며 성인이 된 96년도에는 성인 교도소로 이감이 되어 같은 재소자에게 왕따와 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이 때의 경험이 자기보다 강한 남성에게 두려움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출소한 뒤에 우울증 치료를 했다고 한다.
교도소에서 그런 일을 당했지만 오히려 굉장히 사교적인 성격이여서 컴퓨터 통신 동호회에 가입하여 번개를 즐겼고 군대간 친구들과 연락도 주고받는 등 사교성이 좋은 편이라는 게 가족들의 증언이다. 그래서 가족들은 아들이 끔찍한 연쇄 강간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전혀 믿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등학교때는 교회에서 중고등부 회장을 맡을 정도로 성실한 편이었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에게 무관심한 편이었던지, 아들이 어떤 업소에서 일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직장생활에서도 굉장히 일도 잘하고 성실했다는 직원들이 증언이 끊이질 않았다. 컴퓨터를 잘해서 자료를 정리를 잘하고 일본어에도 능통해서 외국인 손님들을 응대를 잘해서 사장에게 큰 호감을 얻었으며 손님 생일 사진찍어 주는 등 이벤트 행사에도 수완을 발휘해 사장이 신임했다. 이런 점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 동안 동료 직원이나 사장과 마찰이 없이 일을 잘 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잘생기고 싹싹하고 사교적인 성격 덕분에 여성 손님들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을 정도로 여성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출근시간도 엄수하며 지각 한번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성실했다고 한다.
황호진은 이 호프집에서 피터[9]라는 닉네임으로 불렸으며 주량은 소주 2병으로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술을 자주 마셨다고 한다.
이를 볼 때 황호진은 대한민국 연쇄살인범 중 강호순, 김윤철과 아주 유사한 유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쌓으며 자신의 이미지를 좋게 구축을 하지만 자신의 주변 사람들 외에는 그야말로 살인귀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만연화가 되어있다는 것. 거기다가 말수 없고 조용한게 아니라 보통사람보다 활발하고 활동적이라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그러나 위에 설명한 좋은 주변인들에 의한 좋은 평판들은 모두 본연의 악마의 모습을 가리기 위한 가면의 모습일 뿐이고 그의 실체는 그저 강간과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일 뿐이다.
거기에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곧장 미아리 텍사스촌에 가서 성매매를 하는 등 인간으로써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패턴을 보였다. 이를 볼 때 이미 황호진은 어릴 적부터 습관화가 된 도벽은 물론이고 심각한 성도착증 증세까지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5. 재판
2000년 5월 25일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김대휘)는 8개월 동안 3명의 여성을 강간하고 살해한 혐의로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강간등살인)위반죄 및 사체손괴죄 등을 적용하여 1심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자 황호진는 곧바로 항소하였다.2000년 11월 17일 황호진은 2심 항소심에서 우울증을 병력을 근거와 범행당시 술을 마신 점으로 심신미약을 주장하였지만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이흥복)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강간등 살인)위반죄 및 사체손괴죄 등을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판결문에서는 "피고인에 대한 정신감정 결과 습관적인 음주로 인한 인격장애만 있을 뿐 심신장애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현재 사형제도에 대한 폐지논의가 일고 있긴 하지만 범행 동기나 경위 등에 비춰볼 때 피고인에게는 사형 외에는다른 형을 선고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 판결은 기사가 나오지 않았는데 황호진이 상고를 포기했거나[10] 대법원에서 황호진이 사형이 확정이 된 것이 기사화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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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양대 수석 졸업하였다.
[2]
동생은 강간도중 목이 졸려 잠시 기절은 했지만 다행히 사망하지 않고 살아났다.
[3]
물론 정황상 박씨가 돈을 요구했을 수 있으나 황호진의 절도행각이 박씨한테 들켜서 실랑이 끝에 살해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4]
박씨처럼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수 많은 남자와 연락하고 지내기 때문에 경찰 입장에서 이들을 수사를 하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밤을 새가면서 조사를 해도 모자를 판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오히려 황호진이 박씨와 가장 마지막에 연락을 했기 때문에 경찰 입장에서는 아주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기가 수월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5]
박씨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구매를 하면 범행이 탄로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일부러 다른 동네에서 석유를 사오는 나름 치밀함을 보였다.
[6]
긴급체포는 48시간이 지나면 풀어줘야 하고 그리고 사실 원래 황호진의 집을 수색하는 것도 영장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당시 경찰은 황호진에게 그냥 집 안만 살짝 확인만 하고 가겠다는 식으로 안심시켰고 범행을 저지른 황호진 입장에서도 자신이 명백하게 범인으로 몰리는 상황인지라 경찰들의 기에 눌릴 수 밖에 없었고 경찰의 자택수색을 허용해줄 수 밖에 없었다.
[7]
실제로 경찰은 강간살인 사건 이외에 황호진이 거주하던 홍제동을 중점으로 절도죄를 저지른 사실을 자백을 받고 추가건으로 입건하였다. 황호진은 여자들과 사귀면서 선물, 데이트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수십건의 절도죄를 저질렀다.
[8]
조사실의 유리창은 조사실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고 밖에서는 안의 모습이 보이는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
[9]
공개수배 사건25시에서 홍제동 옥탑방 자매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검거가 되고 방송이 추가로 나갔는데 당시 방송의 타이틀이 피터의 연쇄살인이었다.
[10]
사형확정이 2000년도로 나와있는 것이 기사화가 된 것을 보면 실제로 황호진이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을 하고 스스로 상고를 포기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통상적으로 상고를 하면 최소 3개월 이상은 걸리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이 되었다면 2001년도에 되어야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