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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21:05:44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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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통령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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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문화부 심볼.svg 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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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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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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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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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김원봉
고문
김대지 황상규
단원
강세우 강인수 고인덕 곽재기
권정필 권준 김광추 김기득
김방우 김병현 김상옥 김상윤
김성숙 김시현 김익상 김지섭
김철호 나석주 남정각 박문희
박자혜 박재혁 박차정 박희광
배동선 배중세 배치문 서상락
송천흠 신악 신영삼 신채호
신철휴 오성륜변절 유자명 윤세주
윤치형 이구연 이병철 이병희
이성우 이수택 이육사 이종암
이태준 정이소 최수봉 황옥불확실
최용덕 한봉근 한봉인 홍가륵
유시태 이원대 이원기 윤병구
유석현 정율성불확실 문시환 이춘암
공약 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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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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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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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신채호
申采浩 | Shin Chaeho
파일:단재신채호.jpg
출생 1880년 12월 8일
충청도 공주목 산내면 도리산리
(現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
사망 1936년 2월 21일[1] (향년 55세)
만주국 펑톈성 다롄 부 뤼순 구 뤼순감옥
(現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커우구 샹양지에 139호 뤼순감옥)
묘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길 249[2][3]
본관 고령 신씨[4]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직업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
학력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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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父 신광식, 母 밀양 박씨
형제자매 형 신재호[5]
배우자 풍양 조씨(이혼)
박자혜(재혼)
자녀 장남 신관일(조졸), 차남 신수범(1921~1991), 삼남 신두범(1927~1942)
친인척 증조부 신명휴
백조부 신약우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1. 개요2. 생애3. 평가 및 개인적 면모4. 저서5. 대중매체에서6. 같이보기7.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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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wiki style="text-align:left"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제1장, "역사의 정의(正義)와 조선역사의 범위" 중}}}
"역사를 쓰는 자는 반드시 그 나라의 주인되는 한 종족을 먼저 드러내어, 이것을 주제로 삼은 후에 그 정치는 어떻게 흥하고 쇠하였으며, 그 산업은 어떻게 번창하고 몰락하였으며, 그 무력(武功)은 어떻게 나아가고 물러났으며, 그 생활관습과 풍속은 어떻게 변하여 왔으며, 그 밖으로부터 들어온 각각의 종족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그 다른 지역의 나라들과 어떻게 교섭하였는가를 서술하여야 이것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wiki style="text-align:left"
독사신론(讀史新論)》 "서론(敍論)" 중}}}
한민족 출신 독립유공자, 민족주의 사학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본디 영웅주의적 민족주의 성향을 짙게 띠었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민중사관을 받아들여[6] 사회주의 아나키즘 성향(특히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으로 사상의 변화를 보였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단재(丹齋)·단생(丹生)·일편단생(一片丹生)이다. 대전 출신이다.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다. 특히 '한놈' 등은 스스로를 낮추기 위해서 쓴 필명이다. 독립운동 시절 윤인원(尹仁元)·왕국금(王國錦) 등의 이명을 쓰기도 했다.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하여 개항기 및 독립운동기 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체성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만주 땅이 한민족의 땅임을,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였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역사 연구는 역사 자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유물과 사료의 중요성을 강조한 실증주의자였다. 또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한데,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폭력혁명론을 주장하였으며,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쓴 조선혁명선언이 유명하다.

2. 생애

1880년 12월 8일 충청도 공주목 산내면 도리산리(現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번지)[7]에서 아버지 신광식(申光植, 1849 ~ 1886. 3. 8)과 어머니 밀양 박씨[8]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신재호(申在浩, 1872 ~ 1899)가 있었으나 요절했다.

현재의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유소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에 자치통감을 공부하고 이를 기념하여 신채호의 할아버지는 모과나무를 심었다 한다. 그 모과나무는 아직까지 집터인 신채호 묘소에 있다.

1897년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이전부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실패에 좌절했던 그였지만 그럼으로써 성리학을 다 배우기 전에 근대 사상을 접했고 이는 신채호가 성리학을 탈피한 독자적 이념을 세우는 밑거름이 된다.(배용일, 2002,.41 배용일, '박은식과 신채호 사상의 비교 연구', 경인 문화사, 2002년, p41)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기 시작한다.〈 황성신문〉 언론인 및 〈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주필로 활동했으며 〈이태리 건국 삼걸전〉, 〈을지문덕전〉 등을 지어 민중에게 자주 의식을 고취시켰고 일진회의 성토에도 앞장섰다. 1910년대까지 그의 사상의 특징은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영웅주의적 민족주의 사관이었다. 그는 역사의 주체와 동력은 영웅이라고 여겼으며 뛰어난 영웅이 국가 운명을 좌우한다는 ' 영웅사관(英雄史觀)'을 가지고 있었다. 신채호는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등 외적과 맞서 싸운 군사적 영웅들의 평전 저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해외 영웅전들을 번역하기도 했는데 량치차오의 저서를 번역한 "이태리 건국 삼걸전" 등이 있다.

민족주의 사학자 시절 신채호는 " 세계는 영웅의 활동 무대이며 영웅이야말로 세계를 창조하는 성신(聖神)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극단적인 영웅사관에 심취했다. 그는 미국 독립 조지 워싱턴이라는 뛰어난 영웅에 의해 성취된 것이라 보았고, 이탈리아 통일 역시 카보우르, 마치니, 가리발디라는 영웅 삼걸의 활약 덕분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영웅주의적 역사관을 통해 '왜놈들을 쳐부숴 줄 영웅'의 등장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강성한 민족주의자로서 신채호는 당시 유행했던 동양 평화론이나[9] 국제법에 의한 믿음도 부정하고[김도형,1994,83] 한국의 자강을 강조했다.

국권 피탈 즈음해서 1907년 신민회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의 일환으로 국외로 이주해 만주, 연해주 등지를 다니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 견문을 쌓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나철 대종교(당시는 단군교)와 연계가 있었는데 이후 나철이 사망하고 2대 교주 김교헌이 종교 체제를 강화하는 형태로 대종교를 운영하자 사이가 소원해지게 된다. 신채호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에 올린 논설에서 조선이 망한 이유로 다음 3가지를 들었는데 조선은 주변에 경쟁 국가가 없어 경쟁력이 생기지 않았고 무력을 경시했으며 보수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정치 제도를 개혁하지 못해 망했다고 주장했다.(신채호, '엇던 외국 사람들이 한국을 조롱하여',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11일) 1911년 권업회를 조직하고 주필로 일했다. 이후 1915년부터 1919년까지 북경에 체류하면서 < 사고전서>를 보기도 하고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을 쓰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주의에 경도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중의 힘을 자각하게 된다. 3.1 운동의 진정한 의미 중 하나가 민중의 재발견이다. 영웅과 초인의 등장을 바라던 지식인들이 이전에는 선도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던 민중에 시선을 돌리는 계기가 바로 3.1운동이었다. 이는 뒤이어 일어난 중국 5.4 운동에 따라 중국 지식인들이 시각을 교정한 것과도 일치한다. 이후 민중을 독립 운동의 동반자로 보느냐 아니면 여전히 교화의 대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지식인들의 행적은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3.1운동 이후 신채호는 그간의 자신의 민족주의, 영웅 중심주의 사관을 버리고 아나키즘으로 본격적으로 전향하게 된다.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나 국제연맹에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되자 이에 극렬히 반대하며 재선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19년 4월 11일 재선출에서도 이승만이 당선되자 신채호는 임시 의정원에서 퇴장해 버린다. 이 때 회의장 밖에 있던 이봉수(1892~?, 공산주의자로 차후 북한에서 활동하다 6.25 전쟁 이전에 숙청당함)와 한위건(1896~1937,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이후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하다 옌안에서 병사했다.)에게 강제로 회의장 안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외교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방안으로 자리잡자 신채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서 빠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집권 세력의 대항 세력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런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 독립신문〉에 정면으로 맞서 〈신대한〉을 발간했다. (이 때 <독립신문>은 박은식이 주도). 이후 신채호는 이승만 등을 지속적으로 가열차게 비판한다. 위임 통치 청원 사건으로 촉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분열 사태 후 신채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 이유 자체를 문제삼으며 창조론을 더욱 거세게 내세워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갈아 엎어버리려고 했지만 온건 세력인 안창호 세력과 김구 세력과의 대립으로 저지되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지도 기관을 세우자는 창조파의 대표 주자 역할을 하다가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탈퇴한다.

1923년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조선혁명선언( 의열단 선언문)을 짓는다. 여기에서는 '우리 조선인 한 사람이 일본인 한 사람씩을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일본인이 전멸할 것이며 내가 2명을 죽이면 조선인 1명을 살리는 일이며 내가 10명을 죽이면 조선인 9명을 살리는 길이다'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이외에도 자치론, 외교론, 실력 양성론, 무장 투쟁론[11] 등을 차례로 매섭게 비판하며 민중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 혁명과 건설을 위한 파괴를 답으로 제시했다. 특히 자치론에 대해서는 "일본이 생불이 되어 모든 것을 돌려주고 명목상의 종주국만을 요구하더라도 생각있는 사람이면 그것이 치욕일 것임을 알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제1은 외교론이니 이조 500년 문약 정치가 '외교'로써 나라를 지키는 으뜸 계책으로 삼아 그 말세에 더욱 심하여... 탄원서나 열강의 공관에 던지며... 민족 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렸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을사조약 당시 여러 나라 공관에 빗받돋듯하던 종이 쪽지로 넘어가던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쉽게 요약하자면 우리 주권이 없는 상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떤 폭력적 수단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외교론의 경우 자국의 운명을 외국에 맡기는 행위로 무장 투쟁을 행할 여력을 깎아먹는 행위로 보았고, 준비론은 현재 조선이 식민지 상태로 모든 부문에서 일본과 열세인데 어떻게 준비를 해서 언제 그 준비를 끝내냐면서 이 두 방법을 미몽으로 규정하고 민중에 의한 폭력혁명만이 답이라는 내용이다

이 때 외교론을 비판하는 문구 중에 "국내 인민의 독립 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미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기회라며 천편일률적으로..."라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 역사를 아는 우리로서는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다만 실제로 태평양 전쟁과 만주 작전이 일어난 시점은 신채호가 옥사한 뒤였으며, 외교론 독립운동가들이 구상한 시나리오는 사실상 '희망사항'에 가까웠다는 사실은 감안해야 한다.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 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짝의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과 원한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 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 양성소 -학교- 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된다 하면 ' 단군을 속여 스사노 노미코토의 형제'라 하여 '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이 다스리는 땅'이라 한 일본놈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 정치를 찬미하는 반(半)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하는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 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당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팔다리를 달아 매는, 콧구멍에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刑律), 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감옥 문에서 나온대야 평생 불구의 폐인이 될 뿐이라. (중략)
설혹 강도 일본이 갑자기 부처· 보살이 되어 하루 아침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돌려주며, 내정 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 경찰을 일시에 철수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이름뿐인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모두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받든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중략)
일반민중이 굶주림·추위·피곤·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私債)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되는 강도 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며 뭇 민중이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굶어죽음'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라 하 길이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의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한 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사·교활·잔혹·포악한 강도 일본이 마침내 구축되는(쫓겨나는) 날이라. (중략)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 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 조선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 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 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1927년 신간회 발족에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나 크게 마음에 둔 것은 아니었는데 홍명희 안재홍의 권유로 해외에서 참가한 것. 이 무렵 아나키즘 사상을 담고 있는 '대흑호의 일석담',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등의 글을 남겼다.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자금 조달차 일본령 대만으로 갔다가 대만 지룽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련으로 압송되었고, 1년 반 가까이 소요된 재판 끝에 1930년 5월 9일 최종적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20년 전 안중근 의사가 순국했던 곳인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때 혐의는 치안유지법 위반과 통화위조죄였으나 실제로는 아나키즘과 연결이 강했다.[12] 러시아 혁명 이후 1920년대 초기부터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후기에는 민족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사회 평등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 즈음 아나키즘에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처음 아나키즘과 연결된 것은 의열단 선언을 쓰는 등 의열단과 연계를 가지던 시기에 아나키스트였던 의열단원들 중 일부와 접촉하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나키즘과 민족주의자 신채호의 연결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신채호는 민족의 독립이라는 목표하에서 유교 - 영웅사관 - 대종교를 포함한 민족주의 - 아나키즘을 거침없이 넘나들었던 전례가 있다. 독립이라는 목표만 제외하면 도구는 신경 안썼다고 보면 단순하지만 그렇다고 아나키즘이 단순히 민족 독립을 위한 도구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말년으로 갈수록 신채호의 사상은 아나키즘의 영향을 짙게 받게 되었으며 민족 독립이라는 목표 역시 현재 상황에서 시급한 목표였지, 그것을 지상 목표로 삼는 전형적 민족주의자의 태도를 보이지는 않게 되었다. 민족주의자로서의 신채호에 비해 사회주의자나 아나키스트로서의 신채호에 대한 연구는 근래에 들어서야 이루어진 편으로 김구처럼 제도권 입장에서 민족주의자로서 교과서의 단골이던 신채호가 공산주의와도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대중에게 알려질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이회영도 마찬가지여서 독립운동사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서 이회영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신채호는 여러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게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근본적으로 인간 해방이라는 이념하에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자본주의, 국가주의 등 여러 억압과 착취의 현실을 고민해 온 역사학자 겸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채호가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3.1 운동 당시 봤던 민중들의 힘이었고 그 이전까지 계몽주의자였던 신채호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로 독립을 외친 것이 매우 신선했기 때문이었다. 북경에 거주하면서 이회영, 유자명 등의 거물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즘을 수용했을 것이고 나중에는 민족보다는 민중을 더 중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당시 일제에게 억압받던 대만, 중국 등 다른 지역의 아나키스트들과 연계하기도 했다.

계몽 운동을 독립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신채호에게 민중 해방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아나키즘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사상적으로 옳기만 하다면 유연하게 수용했던 신채호의 생각과 항상 대쪽같은 모습은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쓴 글 중 하나가 "외국의 주의가 조선에 전해지면 조선의 주의가 아니라 주의의 조선이 된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낭객의 신년만필>인데 청소년 추천 서적으로 지정되어서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이 글도 아나키즘의 대표적 인물이자 러시아 혁명기에 활동한 ' 표트르 크로포트킨 세례를 받자' 등 아나키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글이기 때문이다.

특히 신채호는 당시 한국의 유사아나키스트[13][14]들과 달리 정말로 자본주의 국가를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을 착취하는 인육분쇄소라고 표현할정도로 대차게 비난할정도로 혁명에 열의에 차있었다.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뤼순에 수감된지 8년만인 1936년 2월 18일 옥중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었고 3일간 방치되었다가 21일 오후 4시 20분경 사망한다. 당시 감옥 내의 의료 시설이 열악했고 뇌일혈은 딱히 치료법이 없었다. 결정타는 뇌일혈이었지만 고문당한 후유증과 열악한 감옥 생활로 인한 영양 실조와 동상에 걸려 건강이 이미 몹시 악화된 상태였다. 일본 측에서는 신채호가 옥사하면 반일 감정이 심해져 힘들겠다는 판단에 면회 가족들에게 보호자만 있으면 내보내 주겠다고 제안했고, 가족들은 부호였던 일가 친척을 내세워 석방 신청을 했지만 신채호는 그가 이미 친일반민족행위자 변절했다는 것을 알고 거절했다. < 조선일보>의 취재와 추가 연재 요청도 능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으며 일본 연호 쇼와를 사용하는 것에 일침을 가했다.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왜놈들 발에 시체가 채지 않게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는 말을 남겼으나 주변인들 대다수가 신채호의 시신을 국내로 가져가자고 주장했고 이에 국내에 안장했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에 있다. 이 곳은 본디 조부 대까지 살던 고향이기도 하다. 안장 과정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사회주의, 아나키즘 사상 때문에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음에도 군사정권 시절까지 가족이 고생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건 신채호가 평소에 이승만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3. 평가 및 개인적 면모

옛날(舊時)의 도덕이나 금일의 주의(主義)란 것이 그 표준이 어디서 났느냐? 이해(利害)에서 났느냐? 시비에서 났느냐? 만일 시비의 표준에서 났다 하면 청구이담집(靑丘俚談集)에 보인 것과 같이 나무의 그늘에서 삼하(三夏)의 더위를 피하고는 겨울에 그 나무를 베어 불을 때는 인류며, 소를 부리어 농사를 짓고는 그 소를 잡아먹는 인류며, 박 연암 호질(虎叱)문에 말한 것같이 벌과 황충이의 양식을 빼앗는 인류니, 인류보다 더 죄악 많은 동물이 없은즉, 먼저 총으로 폭탄으로 대포로 세계를 습격하여 인류의 종자를 멸절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인류는 이해 문제일 뿐이다. 이해 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16]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시대와 경우가 같지 않으므로 그들의 감정의 충동도 같지 않아 그 이해 표준의 대소 광협(廣狹)은 있을망정 이해는 이해이다. 그의 제자들도 본사(本師)의 정의(精義)를 잘 이해하여 자기의 이(利)를 구하므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 다름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이익과 손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哭)하려 한다.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 낭객의 신년만필
"그러면 진서나 위서나 남제서에는 어찌하여 이를 빼버렸는가? 지나 사관(史官)이 매양 국치(國恥)를 꺼려 숨기는 괴상한 버릇이 있어……오직 양서나 송서의 '백제가 요서를 공략해서 차지하였다.'고 한 구절은 그 기록이 너무 간단하고 사실이 너무 소략하므로, 당 태종이 우연히 주의하지 못하여 그 문자가 그대로 유전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백제 본기에는 이런 일을 빼었는가? 이는 신라가 백제를 미워하여 이를 뺏을 것이고, 또는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하여 무릇 조선이 지나를 친 사실은 겨우 이미 지나사에 보인 것만을 뽑아다 기록하고 그 나머지는 다 빼버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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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4. 저서

5. 대중매체에서

6. 같이보기

7. 가족



[1] 음력 1월 29일. [2] 구 주소 : 귀래리 305. 이곳에 신채호 사당 및 묘소가 있다. [3] 귀래리는 인근의 관정리·추정리·호정리와 함께 고령 신씨 집성촌이다. [4] 고천군파 26세 호(浩) 항렬. 신숙주의 18대손. [5] 1899년 27세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6] 영웅사관이 없어진건 아니다. 신채호 연구자들은 신채호가 후기에도 영웅주의를 유지했다고 보고 있다 [7]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6호 [8] 박승원(朴承源)의 딸이다. [9] 신채호, '동양주의에 대한 비평',「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8,10일 [김도형,1994,83] 김도형, '대한 제국기의 정치 사상 연구', 지식 산업사, 1994년, p83 [11] 신채호는 기본적으로 무장 투쟁은 긍정적으로 봤지만 당시의 상황 하에서는 독립군 활동으로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2] 단, 통화위조는 일제가 멋대로 만들어내 씌운 것은 아니고 사실이었다.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6만 4천원어치 수표를 위조했는데 현금으로 바꾸려다가 은행에서 틀통난 것. [13] 유정부주의를 외치던 유림이나 사회민주주의로 노선을 아예 틀어버리고선 아나키스트라고 하던 하기락등 [14] 출처. 20세기의 아나르코 생디칼리즘 [15] 출처는 신채호 본인이 저술한 낭객의 신년만필. [16] 인터넷에 도는 짤 중에서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뒤에 조선의 예수가 아닌 예수의 조선 운운하는 구절이 붙은 짤들이 나도는데, 낭객의 신년만필 원문에서 신채호가 예수를 언급한 내용은 실존했던 사상가를 열거하는 이 구절밖에 없기 때문에 석가/공자/주의 뒤에 예수가 붙는 내용이 있다면 기독교 안티가 추가로 덧붙인 걸 교차검증없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예수에 대한 신채호의 실제 비판을 보려면 용과 용의 대격전을 참조. [17] 다만 이는 일종의 과장이란 이야기가 있다. 마당에서 세수를 하려는데 마침 일본인이 지나가기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것(주변에 일본인이 지나가서 그런 게 아니다.) [18]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인 랑케도 근현대에 이르러 많은 비판을 받았다. 사회과학적 역사학, 예를 들어 아날학파의 등장 배경도 랑케 사학의 정치사에 편중된 역사학을 비판한 것이고 개별 사건만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 구조를 바라보고자 한 것이다. 랑케 사학은 객관적 역사 서술을 주장했는데 현대 역사학은 역사 서술은 주관적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즉, 정사로 평가받는 사료들조차도 글쓴이의 주관적인 해석이 담겨 있을 수 있는 것. 그러나 그는 역사학이 역사학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사람이며 역사학이 독립적인 학문으로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결국 현대의 역사관은 랑케의 역사관을 보완하는데 있으며 랑케 이후 역사관의 등장 배경이 랑케 사학을 비판하면서부터란 것은 이를 방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신채호 역시 한국의 근대 역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으며 결국 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대에도 그의 역사관이 영향을 끼치고 있단 것을 의미한다. [19] 만약 삼청동이 三淸洞으로 표기한다면 세 가지 맑은 것들이 있는 동이라고 하는 것인데 세 가지 맑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혹은 저 삼청동의 한자가 진짜 본래 뜻이 맞기는 하냐 같은 문제가 생긴다. [20] 에드워드 기번의 《 로마제국 쇠망사》가 현재는 낡고 부정확한 책이라고 하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에드워드 기번의 권위를 빌려 기독교 로마에 해악을 끼쳤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이를 이유로 에드워드 기번을 비판하는 사람은 없듯이 말이다. [21] 양계초가 쓴 의대리건국삼걸전(1906)을 한국어로 번역. [22] '일목대왕의 철추'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23] 현실 북한의 김씨 집안 찬양 일색인 주체사상과는 전혀 다르게 순수한 국수주의에 가까운 사상이다. 이 세계관에서 김일성은 그냥 장군1 수준 이상의 영향력이 없다. [24] 고령신씨 대동보에는 부인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지난 2009년 국적회복 당시 유가족이 낸 가족관계 정리 인지소송에서 법률적인 혼인관계 증명이 어려워 신채호의 가족관계 등록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두 아들인 상범과 수범의 어머니인것은 인정이 된 상태 [25] 안동 권씨와 사별 후 재혼이다. 아래에 쓰인 자손은 모두 이덕남 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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