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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colbgcolor=#ffffff,#191919>윤소룡(尹小龍)[1] |
호 | 석정(石正) |
본관 | 무송 윤씨[2] |
출생 | 1901년 6월 24일 |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 (現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
|
사망 | 1942년 6월 2일 (향년 40세) |
중화민국 산서성 타이항산 | |
직업 | 독립운동가, 군인 |
가족 |
부 윤희규, 모 김경이 부인 하소악, 아들 윤남선(尹南善)[3] |
친척 | 6촌 형 윤세용, 윤세복 |
학력 | 신흥무관학교 (졸업) |
소속 | 의열단 |
묘소 | 중국 산시성 타이항산 진자뤼이열사릉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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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의열단 소속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901년 6월 24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아버지 윤희규(尹熺奎)와 어머니 김경이(金卿伊) 부부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의열단 단장이 되는 약산 김원봉의 동향 사람으로 윤세주는 3살 위인 김원봉과 같은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김원봉의 집 바로 앞에 윤세주의 집이 있는 말 그대로 이웃사촌 관계였는데 지금도 밀양시 내이동의 두 사람의 생가 자리가 서로 10m 거리에 마주보고 있다.[4]겸손한 성격이었으나 가슴 속에는 뜨거운 애국심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경술국치 당시에는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함께해온 김원봉과 함께 국민학교 재학 당시 천황의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화장실에 쳐박아 버렸을 만큼 일제에 대해 큰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같이 의열단의 일원이 되고 그와 평생을 함께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가 되었다.
그는 밀양의 민족주의적 사립 학교인 동화중학교에서 항일 인사였던 전홍표 교장의 영향으로 항일 정신을 키웠는데 이 학교를 나온 인물로 김원봉, 최수봉, 김상윤 등이 있다. 윤세주는 전홍표의 사상에 감화되어 학교 내 비밀 결사인 연무단(練武團)을 조직하고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 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학교는 폐쇄되었으나 윤세주는 항일 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1919년 경성부에서 3.1 운동 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에 내려와 밀양 지역 만세 운동을 조직했다. 당시 19세로 나이가 어린 편이었지만 윤치형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했던 것으로 드러났고, 이에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당시 밀양 만세 운동 관련자들 가운데 가장 중형이었지만, 당시 윤세주는 이미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국경을 넘어 만주로 망명한 상태였다.
그는 이회영 형제가 세운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1919년 11월에 결성된 의열단의 단원이 되었다. 이후 단원 윤치형, 곽재기, 황상규, 이성우 등 수 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일보사 등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을 폭파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0년 3월 중국인으로부터 폭탄을 구입한 뒤 폭탄과 무기의 국내 반입 및 군자금 모금, 폭파 공작 방법 등을 동지들과 구체적으로 협의한 다음 각기 별도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러나 1920년 6월 거사를 위한 공작 도중 정보가 누설되어 윤세주와 그의 동료 50여 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이후 감형받아 5년 4개월간 수감된 뒤 1927년 출옥하였다.
출옥 후 <중외일보> 기자, 경남주식회사 사장 등으로 독립운동에 뜻이 없는 듯 조용히 지내다 1932년 여름 중국 난징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932년 10월 20일 중국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단 제6대(약칭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에 입교해 1933년 4월 21일 제1기로 졸업했다. 이후 독립운동 단체들은 연합 준비 위원회를 구성한 뒤 다른 여타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을 규합하여 1932년 11월 10일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을 결성하자 윤세주는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등과 함께 핵심 인사로 참가하였다. 1937년 김원봉 등과 통일 연맹을 모체로 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설하고 1938년 중국군과 제휴하여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조선의용대에서 손꼽히는 이론가였던 그는 민족혁명당 편찬위원회 등에서 일하였다.
1941년 4월 김원봉과 헤어진[5] 윤세주는 박효삼과 함께 황하를 건너 화북을 향해 북상해 갔으며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으로 개칭하고 국민혁명군 8로군과 함께 공동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6] 1942년 2월 일본군은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태항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5월에는 20개 사단 40만 명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했는데 이 때 조선의용군의 병력은 불과 3,000~4,000명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태항산을 완전 포위한 후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한 공세를 퍼부어 5월 29일 항일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군에게 전군의 탈출로를 확보해 탈출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공격해 전 부대원이 탈출할 때까지 사수하기로 했다. 작전 개시 5시간 만에 마침내 탈출로를 확보하였으나 윤세주는 이 전투에서 총탄을 맞고 쓰러졌으며 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윤세주를 발견했으나 이미 중태였다. 6월 3일 윤세주는 석굴에서 사망했고 윤세주의 시신을 수습하려던 중국공산당의 쭤취안(左权, 1905~1942) 장군도 함께 전사했다.[7] 사후 시신은 역시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한 진광화(陳光華, 1911~1942)[8]와 중국 공산당 군벌들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그의 전사 1주기였던 1943년 6월 충칭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군 등이 합동 추도회를 가졌다.[9]
중국 타이항산에 있는 진광화 열사와 윤세주 열사(오른쪽)의 묘.[10]
3. 기타
- 그의 이름 표기에 대해서 기록에 약간의 혼선이 있는데 거론되는 이름이 3가지가 있다. 세주(世胄), 소룡(小龍), 소용(小用)으로서 이 중 하나만 본명이며 나머지 이름들은 가명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본명이 윤세주로 기술하고 소룡, 소용, 석정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네이버지식백과 참고. 두산백과에서는 본명이 윤소용으로 기술되어 있고 세주, 소룡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고 되어있다. 동아백과 참고. 위키백과에는 본명이 윤소룡, 호는 석정(石正)으로 기술되어 있다. 위키백과 참고.
윤세주는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국군이 되는 박기성, 이진영과 친분이 있었으며 같이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또 반면 북한으로 건너가는 한빈, 김두봉과도 친분이 있었다
이들중에 비극적인건 북한으로 건너간 김두봉은 6.25 발발 직전 인민군 6사단을 방문, 조국통일전쟁이란 명목하에 전쟁을 독려했으며 대한민국 국군이 된 이진영은 인민군과 싸우다 전사한다.
4. 대중매체
- 2011년 MBC 드라마 절정에서는 이승효가 연기했다. 주인공 이육사의 지인으로 등장하는데 관동대학살 때 자경단에게 끌려가던 이육사를 구해줬다는 설정이 덧붙여졌으며 이후 중국에서 재회한 뒤 무장 투쟁과 문학 활동에서 방황하는 이육사를 비판하면서도 그의 시에 공감하고 동조하고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복합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1]
호적명으로 추정된다.
1919년 판결문과
1919년 수형인명부·
1921년 판결문에서 모두 그의 이름을 윤소룡(尹小龍)으로 기재하고 있다. 1921년 판결문에서는 윤세주(尹世胄)를 이명으로 기재하고 있었다.
[2]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밀양 문중 25세 세(世) 항렬.
[3]
1929년 1월 14일생이다.
[4]
다만 윤세주 생가 건물은 현재 따로 사는 사람이 있어 생가라는 안내판만 있고 공개는 되고 있지 않다. 바로 옆에 이들 의열단원을 모두 다루는 의열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5]
이 무렵 김원봉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있었던 것인지,
국공 내전으로 중국의
권력이 양분되면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관할 지구에 전략적으로 분산 배치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6]
이 때 일본군 측 지휘관이
한국인 출신
홍사익이었다.
[7]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8]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했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김창화(金昌華)이다.
[9]
윤세주의 전사는
6.25 전쟁과도 연관이 깊은데 윤세주의 전사 후 조선의용대는 김원봉과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되고 기존의
아나키즘적
좌파에서
공산주의 좌파로 성향이 바뀌기 시작하며 민족
독립의 선봉장이었던 조선의용대는 민족 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의 선봉장이 되어 버렸다.
[10]
이 묘에는 열사들의 유해가 안장되었지만 이후에 공산당 당원들이 있는 진지루위(晋冀鲁豫) 열사릉으로 이장되었다. 진지루위 열사릉에는 이 곳에서 함께 전사한 쭤취안(左權) 장군도 안장되어 있다. 태항산에 있는 묘 아래에 이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 크기에 비해 잘 만든 편으로
한국어 설명이 제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