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1. 개요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중앙검사위원, 수매양정국장 부상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다.2. 생애
1903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박효삼은 1926년 1월 중국 광둥의 황푸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학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졸업하였다. 중국군으로 임관된 그는 1936년에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고 중국군 대좌였던 그는 1938년 10월 우한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의 제1지대 지대장으로 부임하였다.[출처]우한이 일본군에 의해서 함락된 이후 1지대를 이끌고 중국 제9전구에서 2년 동안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40년 11월 충칭에서 열린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의 결의에 따라 1941년 4월 의용대의 주력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가 치열하였던 화북전선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7월 부대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하였고 지대장으로 부임하여 1941년 12월에는 후자좡전투, 1942년 5월에는 반소탕전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1942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자 화북지대 지대장으로 부임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조직된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중앙위원을 역임하게 되었다.[출처]
일제가 패망하자 김무정, 박일우 등과 함께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만주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강화시켰으며, 1945년 12월에 개인자격으로 입국하여 조선신민당을 결성하였다. 1946년 7월과 1948년 3월의 북조선로동당대회에서 각각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출처]
1950년 6.25 남침 시 7월 인민군 서울시 위수사령관으로 활동.[출처]
북한이 수립된 후 그는 중앙훈련소 소장, 인민군 제1군단사령관을 지냈다. 1955년 11월에는 상업성 수매양정국장, 1956년 4월 로동당 중앙검사위원(제3차당대회) 등을 맡았다. 1957년 수매양정국장 부상으로 임명되었다가 1958년 숙청과정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1969년 11월 로동당 함흥시위원회 비서를 역임하였다.[출처]
1969년에 로동당 함흥시위원회 비서를 역임한 것으로 보아 허정숙 등과 함께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연안파 인사 중 한명이다. 아마 8월 종파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는 않아서 숙청되었다가 비교적 낮은 직위로나마 복권된 듯 하다. 하지만 사망한 나이는 불명이다. 비슷하게 숙청되었다가 나중에 복권된 연안파 인물로는 김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