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15 00:44:45

김웅(1912)

성명 김웅(金雄)
별명 왕신호(王信虎)
출생 1912년
경상북도 김천군
(現 경상북도 김천시)
사망 1960년 1월 (향년 47~48세)
사인 총살형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가, 북한의 군인, 정치인, 외교관.

2. 생애

1912년 경상북도 김천군에서 태어나 중국 뤄양 낙양군관학교, 난징의 육군중앙군관학교,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수학했다.

1935년 비밀결사 혁명동지회(10월회)에 가담했고, 김구가 지도한 한국국민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44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1대(산동지대)장, 1945년 조선의용군 화중지대장을 역임하면서 중일전쟁에 참전했고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1946년 북한의 보안간부학교 부교장에 취임하였고, 1948년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6.25 전쟁에서는 조선인민군 제1군단 사령관, 전선사령부 참모장, 민족보위성 부상, 전선사령관을 지냈다. 1950년 10월, 강건 사망 이후 공석으로 남아있던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중공군 참전 이후 조중연합사령부 부사령원으로 조동되면서 남일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민족보위성 부상 재임 중이던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극심한 비판을 받고 출당조치되었다. 1960년 1월, 최창익, 박창옥, 고봉기 등과 함께 비밀재판에 회부되어 총살되었다.

3. 여담

1960년대부터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부위원장 직함으로 남예멘 대사 등을 지낸 김웅이 등장하였는데, 김웅의 처형문서가 발굴되기 전에는 본 문서의 김웅과 이 김웅이 같은 사람으로 간주하였으나 북한에서 사형을 선고했다도 아니고 이미 집행했다고 소련에 통보한 것이 발굴된 상황에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갑산파 전문가인 조우찬의 연구에서는 사형을 집행했다고 통보만 하고 나중에 석방해줬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는 하였으나 과거에는 북한의 극도의 폐쇄성으로 인하여 동명이인을 전혀 구분할 수 없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가령 재일교포 출신 부총리 장철은 북한 정권 초기 고려인 장철과 동일인물로 오인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