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국세청장에 대한 내용은 김대지(공무원)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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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1년 10월 7일 |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내면 노하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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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2년 10월 26일 (향년 51세) |
만주국
빈강성 파언현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바옌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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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김치환(金致煥), 김인식(金仁埴, 金仁植) 김일봉(金日奉), 김정창(金丁昌) |
호 | 일봉(一峰)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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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의열단의 고문.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대지는 1891년 10월 7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내면 노하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의 양반가에서 가난한 유생이던 아버지 김경수(金景守)와 어머니 정라(丁羅)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에 관련해서 일설에 따르면, 그의 부모가 천한 이름을 지으면 장수한다는 말을 듣고 '돼지'라는 음에다 큰 못이라는 뜻으로 '대지(大池)'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 뒤 밀양군 부호 박 노인의 2남 3녀 중 장녀인 박선이(朴仙伊)와 결혼하여 슬하에 김철수(金哲秀), 김정숙(金貞淑), 김철준(金哲俊), 김철중(金哲中), 김화숙(金和淑), 김철우(金哲祐) 등 4남 2녀를 두었다.그는 동화학원(東和學院)을 졸업하고 청년회관을 만들어 비밀결사 단체를 준비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해 겉으로는 친목 단체로 위장하면서 비밀리에 황상규· 고인덕· 김원봉 등 밀양군에 거주하는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 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모교인 동화학원에서 2세 교육을 실시했다.
1917년부터는 중화민국 길림성과 봉천성을 오가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그 즈음 국내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회가 유명무실하게 되자 새로운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어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918년 5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같은 달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19년 밀양군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동삼성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다가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이회영 등 천여명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같은 해 4월 10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그해 11월에는 밀양군 조사원에 임명되어 고향 밀양군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망인 교통국과 연통제를 활용하여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밀양군 지역의 부호들을 비밀리에 조사하다가 1920년 봄 상하이로 돌아갔다. 이것이 그의 일생 중 마지막 고향 방문이었다.
상하이로 돌아온 뒤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차장, 내무위원 등을 역임했는데, 그 즈음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분열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베이징에서는 신채호· 박용만 등이 이승만·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의 외교독립 및 실력양성 노선에 반대하고 무력투쟁 노선을 통한 독립을 주장하며 이에 찬성하는 무장투쟁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을 모으고 있었다.
이에 김대지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1920년 9월 신채호·박용만·신숙· 장건상·남공선·깁갑 등과 함께 북경군사통일회(北京軍事統一會)를 발족하였다. 이때 그는 신채호와 함께 만주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당시 백두산 일대에서 은거하던 지청천을 만나 상하이의 독립운동 정세와 북경군사통일회의 취지를 상세히 전하고는 그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1921년 11월에는 베이징에서 임시정부와 별개로 조직된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에 참여하여 이상룡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내무총장에 임명되어 소위 삼남파(三南派)에 의한 정부를 경영하기로 하였다.
한편, 그는 1919년 말부터 김원봉의 의열단 조직에 공공연하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곽재기· 최수봉 등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및 일제 요인 사살 계획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1925년까지 의열단 고문으로서 단장 김원봉의 자문에 응하여 무장항일 투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곽재기, 김동삼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을 다시 논의하고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김원봉과 만나 의열단 창립을 논의하여 그가 의열단의 단장이 되는 데 도움을 주었고, 황상규와 함께 의열단의 고문으로 재직하며 각종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다가 1928년 길림성 영안현(寧安縣) 동대가(東大街)[3]으로 이주하여 한의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이어갔는데, 1929년 김동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이듬해 김좌진이 암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지병인 폐병과 기관지염 또한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독립운동가 동지들과 밀양군 처가에서의 재정 지원마저 막혀 병든 자식을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없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빈궁해졌다. 그 뒤로 그는 유상툰, 길림성 빈현(賓縣)[4], 흑룡강성 하얼빈시 난민소(難民所) 등지를 전전하다가 빈강성(濱江省) 아성현(阿城縣)[5]에 정착하여 한의업으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한편으로는 지하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그 사이 아내와 두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극심한 실의에 빠지고 말았고, 1942년 10월 26일 만주국 빈강성(濱江省) 파언현(巴彦縣)[6]에서 지병으로 영면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83~28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