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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김세진(金世震), 유금산(劉錦山) |
출생 | 1900년 5월 14일[1] |
충청북도
충주군 북변면 교동 (現 충청북도 충주시 교현동[2] 330번지)[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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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7년 8월 28일 (향년 87세)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강남성모병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29호 |
본관 | 강릉 유씨[4] |
주요 경력 |
의열단 단원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합동통신 상무 광복회 고문 광복회 회장 민주정의당 발기위원장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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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모습. | 노년 시절의 모습. |
대한민국의 의열단 출신 독립유공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했다.
2. 생애
1900년 5월 14일 충청북도 충주군 북변면 교동(現 충주시 교현동 330번지)에서 아버지 유선풍(劉先豐, 1864. 1. 18 ~ ?)[5]과 어머니 합천 이씨(1868. 6. 24 ~ ?)[6]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고향 충주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충주공립보통학교 부설 간이농업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스승이었던 류자명과 함께 충주군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해 11월 일본 제국 경찰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 7월에 중국 톈진에서 의열단에 입단했고, 베이징대학 동양철학과에 입학해 2년간 다니다가 중퇴했다.
1922년에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조선으로 잠입했고, 경기도 경성부 효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21번지에 주소지를 두었다. 1922년 말에는 의열단원 김지섭이 조선총독부 판사 백윤화(白允和)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받으려다가 백윤화의 밀고로 실패한 사건이 발생했다. 유석현도 김지섭과 함께 이 사건에 가담하였다.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김지섭, 김시현 등과 함께 베이징에서 무기를 마련한 뒤 (폭탄 36개, 권총 5정, 독립선언문 3천매, 탄약) 이를 소지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 공모자 중에는 현직 경찰인 황옥이 포함되어 있었다. 황옥의 밀고로 의열단의 계획은 좌절되었으며, 유석현은 1923년 3월에 체포되었다. 1923년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강도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고,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강도미수 혐의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1923년 8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를 취하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8.15 광복 후에는 합동통신사를 창립해 취체역에 취임하고 서울신문사 감사역을 지내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1949년부터 1956년까지 신동아화재 사장도 맡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중도에 후보를 사퇴했다. 이때 대한부인회 박순천 후보가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민주국민당 윤보선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광복회 고문을 지냈다. 1966년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민족자주연맹 상임위원, 1972년부터 1980년까지 민족통일촉진회 최고위원 및 대표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훈되었다.
말년에는 신군부에 협력하여 1980년 민주정의당 발기위원장, 고문을 지냈다. 당시 기사 이종찬의 회고 1984년 9월 3일부터 1987년 8월 28일까지 제9대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1987년 8월 28일 오후 4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광복회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던 중 뇌졸중으로 졸도했고, 곧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유해는 1987년 9월 1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종로구 갑[7]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후보 사퇴 |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3,179표 (10.84%) | 낙선 (5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