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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2 15:46:52

김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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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김원봉
고문
김대지 황상규
단원
강세우 강인수 고인덕 곽재기
권정필 권준 김광추 김기득
김방우 김병현 김상옥 김상윤
김성숙 김시현 김익상 김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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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덕 한봉근 한봉인 홍가륵
유시태 이원대 이원기 윤병구
유석현 정율성불확실 문시환 이춘암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파일:김기득.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9년 11월 9일
한성부 수표동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사망 1933년 4월 6일
경성부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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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의열단 단체 사진.png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남아있는 의열단 창립 초기 단원들의 사진.[1]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기득은 1899년 11월 9일 한성부 수표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기득(金箕得), 김태희(金泰熙), 김영환(金永煥), 백남두(白南斗), 백영호(白永鎬)이다. 그는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지린성 동녕현 소수분에서 독립운동을 꾀했다. 이때 김원봉, 곽재기 등과 의기투합한 그는 상하이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원으로 가입했다.

1919년 9월 상순, 곽재기와 함께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구입하려 했지만 여의치 못하자 다시 지린성으로 돌아와 군자금을 모금한 뒤 1920년 2월 폭탄을 구입했다. 이후 곽재기, 황상규, 윤세주, 이성우(李成宇) 등의 동지들과 함께 이낙준(李洛俊)의 집에 모여 구입한 폭탄을 국내로 반입할 방법과 군자금을 모금할 방법, 그리고 정보를 수집할 방안 등을 의논한 끝에 폭탄을 경상남도 밀양청년단장 김병환(金煥)에게 보냈다.

그 직후 동지들과 함께 서울로 잠입한 그는 비밀리에 총독부 동양척식회사·경성일보사 등의 정황을 수집하는 등 거사계획을 준비하던 중 경기도 경찰부에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소위 밀양 폭탄사건으로 7년형의 징역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경성부에서 감시를 받으며 어렵게 지내다 1933년 4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김기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오른쪽 선 사람부터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앉아 있는사람은 정이소다. 우측 하단에 따로 붙은 사진은 김익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