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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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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만(卞榮晩)
1889년 7월 20일[1] ~ 1954년 12월 18일 (향년 65세)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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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률가, 법조인, 한학자, 영문학자, 시인, 문필가. 한국 철강협회 부회장과는 동명이인이다.

2. 생애

1889년 경기도 부평군에서 태어났다. 10대 초반에 신채호와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1905년 법관양성소(現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제4기로 입학하였다. 법관양성소를 다니면서 야간에는 보성전문학교 법과(現 고려대학교 로스쿨)에서 공부를 했고, 보전 법과를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1906년 7월에는 재판소 서기가 되었다가 12월 검사채용시험과 판사전고시험에 합격, 12월 17일 목포구재판소 판사로 임명되어, 1909년 12월까지 근무하였다. 그가 1900년대에 여러 학술지에 낸 법학 논문 중에서는 ‘사형폐지설’(1909) 즉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논문도 있다.

그 후 한국 정부의 사법권이 일본 통감부로 이양되자, ‘왜놈의 사냥개 노릇은 죽어도 못 한다’고 법복을 벗어던지고 상경하였다. 그때 일제에 타협하고 판사로 살았으면 평생을 호의호식할 수 있었을텐데, 그 편한 길을 마다하고 조선인 인권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그의 사무실은 서울 중부 황토현 23통 3호에 위치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리를 암살하자 그의 변호에 참여하려 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이 한성변호사회에 여비 50원을 보내고 변호사 한 사람을 추천하여 달라고 부탁하자, 거기에 선정되어 뤼순 법원으로 출발하려 하였던 것. 그러나 일본 당국이 한국 변호사는 변호 불허하므로 오지 못하게 해서 안중근 의사를 변호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변호 불허의 결정에 대하여 뤼순 고등법원에 청원까지 났음에도 허가는 안 되고, 일본인 2명의 관선변호사를 선정하여 재판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2]

'세계삼괴물'(1908)과 '이십세기의 대참극 제국주의'등 일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서적을 번안하거나 직접 써서 발간하기도 했다. 이들 책은 후일(1910) 일제가 치안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황성신문' 등과 함께 금서로 묶어 발간과 배포를 금지시켰다.

1908년 1월에 만들어진 기호흥학회에 관여했으나, 그 학회는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다가 1910년 해산되었다.

이후 1912년 중국으로 넘어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했고, 변호사로서 기자생활을 했다. 1914년 중국공사가 총독부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기밀문건을 보면 '중국인이 경영하는 신문사에 입사해 배일(排日) 기사를 게재하고 각지의 불령선인(항일 인사)에게 배포하고 있다'고 그의 항일 활동을 그리고 있다. 단재 신채호가 사망했을 때는 그를 추도하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1918년에 중국에서 돌아온 후, 1920년대에는 '동명',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 등에 글을 남겼다. 전공인 법학뿐만 아니라 국문학, 중문학, 영문학, 한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당대 정통 유림들의 후각으로 그의 문장에서는 ‘서양 냄새’가 났고 변영만 자신도 셰익스피어·괴테 글의 ‘신묘한 견지’에 반했다고 자인했으며, 동아일보에 1936년에 기고한 ‘청빈(淸貧)의 복음’에 대한 글에서는 마르크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청렴의 위인'의 사례로 삼기도 한다.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장을 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좌절을 맛보았다. 1946년에는 명륜전문학교(現 성균관대학교)장을 역임하였다. 원래 천성이 그래서였는지, 일제 치하에서나 해방 뒤에나 여전한 이른바 '법 기술자'들의 법률 왜곡과 그로 인한 법률의 수난에 진절머리가 나서였는지, 학생들에게 법학을 가르치지 않고 한학과 영문학을 가르쳤다. 이후 1952년에는 사법부 법전편찬위원을 지냈다.

1954년 12월 18일에 사망했다.

동생 변영태는 외무부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로 활약했고, 또 다른 동생 변영로는 민족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3. 기타

공화당 의장으로 대한변협회장을 지낸 정구영의 회고에 따르면 변호사로 일할 때 어느 재판정에서 일본인 대선배 판사 요코다 도시오(橫田俊夫)가 그를 ‘기미(君)’라고 부르자, 이에 "왜 나한테 자꾸 '기미'라고 부르냐?"라고 따지자 요코다는 "일본어로 가까운 사이에 부르는 애칭이다"[3]라고 변명했는데, 이에 변영만은 "그러면 나도 이제부터는 선배더러 ‘기미’라고 부르겠다"며 정말로 요코다를 '기미'라고 불러서 받아쳤다고 한다.

해방 직후 명륜동 거리에서 최남선과 마주쳤는데,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을 못마땅해 했지만[4] 그렇다고 못본 체하기 뭐해서 최남선에게 "요새 얼굴이 훤해 보이네?"하고 말을 건넸고, 최남선은 화답해서 "내가 덕(德)이 좀 있어서 그런가..."라고 하자 변영만은 얼른 "덕은 영국말 덕(Dog)하고 통하지!"하고 받아쳐서, 최남선은 결국 그 자리에서 달아나 버렸다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변영만을 불러서 "백성을 위해 정치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변영만이 “참여해야지요. 그러나 제가 무슨 권력이 있어야지요. 정치란 권력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라고 했고, 이승만이 “그 권력을 내가 드리리다. 대체 무슨 권력이 필요하시오?”라고 묻자 변영만은 “무슨 권력이라니요. 그야 물론 대통령이지요. 오늘이라도 당장 성명을 발표하시어, ‘나 이승만은 변영만에게 대통령직을 양도하노라’ 하십시오. 한 번 멋지게 잘 해 보리다.”라고 대답했다고.


[1] 음력 6월 23일. [2] 일본인 변호사를 선임하여 재판을 진행했다는 내용은 안중근의 자서전에도 나와 있다. [3] 일본어 2인칭으로 기미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 상대를 높이거나 존중하는 표현은 아니다. [4] 최남선에 대해서 "그건 머리만 컸지 그 속에는 시시껄렁한 잡동사니밖에 없다"고 혹평한 적도 있다. 심지어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자로 당대의 석학으로 불리던 위당 정인보에 대해서도 '일자무식 소리 들을 수준은 면했다(免無識)'고 평했는데, 이를 들은 위당은 "나니까 그 정도지, 다른 사람 같으면 그 소리도 못 들어."라고 했다고. 그밖에 김윤식을 "일개 시골 훈장밖에 안 되는 위인", 유길준은 "그냥 기인일 뿐", 이광수는 "싹은 텄지만 빼어나지 못한 자"라고 꽤 혹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