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 대전쟁 第一次世界大戰 | 大戰爭 World War I | The Great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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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종전 후 D[dday(1918-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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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
유럽, 지중해, 중동, 아프리카, 카리브해, 중국 대륙, 태평양 | |||||
원인 | |||||
사라예보 사건과 그 사건으로 폭발한, 오랜 시간 축적되던 열강들 간의 갈등과 민족주의의 충돌 등의 복합적 원인 | |||||
교전국 | |||||
협상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 0px solid; margin: -11px; margin-top: -8px; margin-bottom: -16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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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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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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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12,000,000명 영국 8,841,541명 프랑스 제3공화국 8,660,000명 이탈리아 왕국 5,615,140명 미국 4,743,826명 루마니아 왕국 1,234,000명 일본 제국 800,000명 세르비아 왕국 707,343명 벨기에 380,000명 그리스 왕국 250,000명 총합 42,959,850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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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191919>독일 제국 13,250,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7,800,000명 오스만 제국 2,998,321명 불가리아 왕국 1,200,000명 총합 25,248,321명 |
}}}}}} |
결과 | |||||
협상국의 승리 | |||||
영향 | |||||
동맹국 국가 해체 중동과 유럽 국가 독립,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독립선언 전제군주제 몰락 및 유럽 내 황제국 전멸 및 이로 인한 공화제의 대두[5] 국제연맹 창설[6]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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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규모 | |||||
사망(군 병력) 5,525,000명 부상(군 병력) 12,831,500명 실종 4,121,000명 총 사상자 22,477,500명 |
사망(군 병력) 4,386,000명 부상(군 병력) 8,388,000명 실종 3,629,000명 총 사상자 16,403,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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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여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된 전쟁이다. 2014년 1차 세계 대전 개전 100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11월 11일에 종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2.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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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 전개[8] |
An das deutsche Volk! Seit der Reichsgründung ist es durch 43 Jahre Mein und Meiner Vorfahren heißes Bemühen gewesen, der Welt den Frieden zu erhalten und im Frieden unsere kraftvolle Entwicklung zu fördern. Aber die Gegner neiden uns den Erfolg unserer Arbeit...
독일 제국의 신민들에게 고한다! 제국의 형성 이후 43년 동안 짐과 짐의 조상들은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우리의 평화롭고 강력한 발전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적들은 우리의 성공을 시기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9일 후인 1914년 8월 6일, 빌헬름 2세 카이저의 연설 중. #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은
100년 간의 평화 시대 속에서 지속적인 팽창을 이룬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과 그 과정에서 소외된
독일 제국으로 대표되는 신흥 제국들의 불만, 유럽 내
민족주의적 갈등 등 다수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다. 그런 과정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한
삼국 협상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을 중심으로한
삼국 동맹이 형성되었고 이들 두 동맹체 간의 대립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독일 제국의 신민들에게 고한다! 제국의 형성 이후 43년 동안 짐과 짐의 조상들은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우리의 평화롭고 강력한 발전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적들은 우리의 성공을 시기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9일 후인 1914년 8월 6일, 빌헬름 2세 카이저의 연설 중. #
이러한 정세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9]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19세의 세르비아 민족주의 혁명가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했다. 삼국 동맹 소속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에 분노해 최후통첩을 전달하였으며 이로 인해 전 유럽적 위기가 발생하였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 했다. 이때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세르비아의 보호를 천명한 삼국 협상 소속의 러시아 제국이 반발하며 총동원령을 선포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인 독일 제국이 러시아 제국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였고 이어서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영국은 느닷없는 발칸 반도의 분쟁이 전 유럽을 휩쓰는 대규모의 전쟁으로 커지려고 하자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 제국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영국이 독립을 보장하던 벨기에를 침공하자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참전을 선언한다. 일본 제국 또한 영일동맹에 근거하여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1914년 11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역이 캅카스와 중동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탈리아 왕국은 1915년 참전했고, 미국은 이어서 1917년에 참전했다. 단순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간의 분쟁으로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은 당대의 주요 열강들이 협상국과 동맹국이라는 2개의 동맹체 아래 모두 말려드는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고 만다.
시간이 지나 전쟁이 길어지며 모든 주요국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수많은 사상자와 장기화되는 전시 경제에 대한 피로감으로 인해 전쟁은 끝을 보이게 된다.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동부 전선이 해소되었으며 볼셰비키와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러시아가 전쟁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리자 동맹국이 러시아 영토를 확보했다. 1918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또한 러시아 제국과의 휴전에 합의했다.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은 마지막 발악으로 루덴도르프 공세를 실시했으나, 협상군은 독일의 공세를 방어하고 이후 진격하여 독일군 참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협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전쟁 이후 세계는 180도 바뀌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아래 난도질을 당했다. 러시아는 내전에 휩싸이고 말았으며 오스만 제국은 국가가 완전히 해체될 위기였으나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오늘날 튀르키예의 형태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으로써 패전국의 영토와 식민지를 흡수해 전세계에 새로운 국경선을 그렸다. 이와 같은 대전쟁을 막기 위해 국제연맹이 탄생했으나, 패전국에 대한 징벌의식은 유럽의 민족주의 부활과 독일에서의 파시즘 부흥을 낳았고, 전후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의 결말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3. 배경
자세한 내용은 제1차 세계 대전/배경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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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개전을 둘러싼 유럽 각국의 정치관계. ■ 삼국 동맹 / ■ 삼국 협상 / ■ 오스만 제국 / ■ 발칸 당사국 ■ 지원 관계 / ■ 동맹 관계 / ■ 조약 관계 |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지만 일반적으로 크게 봤을 때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과 그들의 식민지 문제를 둘러싸고 열강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된 것이 지목된다.
이 문단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당시 발칸 반도의 상황과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19세기 유럽 열강들의 세력 변화를 다룬다.
3.1. 제국주의와 열강들간의 긴장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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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프랑스 파리의 만국박람회장 | 1901년의 영국 런던 시가지 | }}} |
제1차 세계 대전의 기원은 팽창된 유럽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에서 전쟁이 거의 벌어지지 않는 안정된 정세가 조성된 덕분에 산업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생산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급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열강들이 자국의 산업을 팽창시키며 세워진 수많은 공장들을 운영하기 위해 원자재가, 그를 가공한 상품을 팔 시장이 필요했다. 강대국들의 산업이 점차 성장하며 시장은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진 레드오션이 되었고 유럽 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10] 일찌감치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있던 영국은 우위에 서있는 해군력 등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보유했고 프랑스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에 비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독일 통일을 통해 새로 떠오른 신흥 강국 독일 제국은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프랑스에 비해 산업과 공업 발달 과정이 늦어졌고 이 때문에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고 보니 이미 알짜배기 땅들은 영국, 프랑스 등이 다 차지한 상태였다. 결국 독일이 식민지를 획득할 방법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를 뺏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기존 식민제국인 영국, 프랑스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으로 가장 크게 지적되고 있다.[11] 범게르만주의로 탄생한 국가가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상황은 독일인들에게 강대국의 국력에 걸맞은 식민지를 바라게 만들었다.
특히 빌헬름 2세는 식민지를 위해 영국 해군에 맞서 해군 증강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해양 패권에 민감하던 영국의 신경을 크게 건드렸다. 윈스턴 처칠은 영독 관계에서 함대란, 독프 관계에서의 알자스-로렌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고, 런던 주재 독일대사였던 파울 볼프 메테르니히 백작(Paul Graf Wolff Metternich zur Gracht)도 해군을 증강하면 1915년 이전에 영국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영국의 경고를 무시했고, 계속해서 해군 증강을 반대한 메테르니히를 1912년에 해임해 버렸다. 건함 경쟁은 영국과 독일을 적대관계로 만들었으며 세계 대전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이미 제1차 대전 이전에도 독일 제국과 영국, 프랑스의 대립은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과 싸운 보어 전쟁 당시에도 보어인들의 배후에 독일 제국이 있었고, 프랑스와는 두 차례에 걸친 모로코 위기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부터 자본론의 저자인 칼 마르크스나 영국의 소설가 H.G 웰스 같은 세계 각국의 웬만한 식견이 있는 지식인들은 "앞으로 가까운 미래에 세계 열강들끼리 해외 식민지를 놓고 전 세계적인 거대한 규모의 치열한 전쟁을 벌일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3.2. 민족주의의 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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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민족 구성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식민지와는 인연이 없는 다민족 국가 또한 역시 내부적으로는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민족주의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주요민족인 오스트리아, 헝가리인들은 인구 구성의 반도 안 되었으나 다른 민족들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너무 많은 이권을 가졌다는 것에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외적으로도 안 좋았는데 독일 제국과 함께 범게르만주의의 영향을 받는 국가로서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에 맞서 발칸 반도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발칸 반도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였는데, 그 뒤로 발칸 반도의 각국은 발칸 전쟁 등 영토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지중해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 제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불만을 품은 나라는 세르비아 왕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합병하고 러시아 제국이 독일 제국의 압력으로 이에 굴복하자 ( 1878년, 1908년) 세르비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극렬한 적대감을 품게 된다. 세르비아 왕국의 적대감은 1914년 6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인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과 관련 세르비아 왕국 측에 검은 손의 해체 및 처벌과 반오스트리아 활동 해체, 사라예보 사건 가담자들에 대한 세르비아 내 재판 개입 등을 요구했고, 세르비아 왕국은 이를 거부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이에 대해 독일 제국의 지원이 확실시된 이후에는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 역시 예견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핑계가 필요했던 것뿐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12] 이 긴박한 1달의 일련의 사태를 아래에서도 설명하듯 7월 위기라고 한다.
3.3. 전통적인 유럽 내 외교 균형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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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19세기 유럽에 새롭게 등장한 강대국이었다. |
본래 19세기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시대의 독일은 독일 통일 이후 더 이상 중부 유럽에서 팽창을 시도하면 열강들과의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 판단하여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에 신경을 많이 썼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이 되는 것을 자처하면서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3제 동맹을 맺고 전통적인 서유럽의 강대국이던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즉위 후, 그는 비스마르크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외교체제를 개편하면서 러시아를 버리고 오헝제국을 유일한 동맹 파트너로 선택한다. 이에 러시아는 당연히 서로 고립된 프랑스와 1894년에 러불동맹을 체결하며, 독일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영국 역시 독일의 성장을 상당히 경계했고 오랜 경쟁 관계였던 프랑스, 러시아와 삼국 협상을 체결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최근에는 만약 비스마르크의 실각이나 빌헬름 2세의 팽창 정책이 없었다고 해도 독일이 유럽의 가장 강대한 국가가 되어가는 이상 어차피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 협상을 막을 수 없었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1850년까지만 해도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의 경제력 비율은 70:12:7:4로 독일의 경제력이 당시 압도적이였던 영국에 비할 바가 못되었지만, 1900년에는 독일이 영국을 거의 따라잡아서 37:11:34:10이 되었고, 1910년에는 30:12:39:10으로 독일의 경제력이 영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인구 측면에서도 6,70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독일이 영국의 4,600만 명이나 프랑스의 4000만 명을 가볍게 앞서고 있었고, 이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를 격파했던 독일의 강력한 육군까지 고려한다면 독일이 조만간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단독으로 상대할 수 없는 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불보듯이 뻔한 상황이었다. 이렇다보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독일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과 러시아까지 독일의 적국으로 돌아서는 것은 독일의 정책 방향과 상관없이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과거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싸우면서 국력을 소진하는 동안 이득을 챙기려는 외교 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나, 독일의 힘이 지나치게 막강해지자 이제 독일을 러시아의 안보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러시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으로 동유럽과 발칸 반도의 패권을 두고 갈등을 겪고 있었기에 두 국가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독일도 휘말려 들어가서 외교 관계가 엉망이 되곤 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의 말년부터 이미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고,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기 전인 1887년에 마지막으로 러시아와의 동맹을 갱신했을 시절에는 많은 독일 지식인들이 "만약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진다면 러시아가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을 공격하러 올 것이다"라고 믿고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져 가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조금이라도 연장해보려고 노력하기는 했으나, 만약 비스마르크가 총리를 더 오래 했다고 해도 언젠가는 결국 러시아와의 친선 관계가 깨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국도 제국주의 팽창 정책에 몰두하던 시절에는 식민지 쟁탈전의 경쟁 상대인 프랑스를 견제해주던 독일에 우호적이었지만,[13] 1890년대부터 독일과의 관계가 서서히 냉랭해지기 시작했고, 1904년 영불협상을 타결하여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분쟁을 종결시키면서 대결 상대를 독일로 옮길 환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관세와 사회 개혁 문제가 쟁점이 된 1906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보수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두면서 독일을 주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당시 자유당 세력은 지나친 식민지 팽창 정책을 혐오했으며 유럽에서의 세력 균형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전의 보수당보다 훨씬 더 독일에 적대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소진하고도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와 이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에게 패배했던 프랑스의 상황도 영국이 더 이상 타국에게 독일을 견제하는 임무를 떠넘길 수 없게 하는데 일조 했다.
3.4. 안일한 대처
존 키건의 저서 1차세계대전에 의하면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영국대사 조지 윌리엄 뷰캐넌(George William Buchanan,1854 ~ 1924)과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최초로 세계 대전의 불씨를 인식했다고 추측된다. 이들은 당사국들에게 회의를 제안하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당시 들어오는 정보와 각종 제안들만으로 이미 각국 외교부 실무진들은 그로기 상태였다. 전화같은 현대 통신의 이기가 없던 시절의 한계. 가장 큰 문제는 독일 제국 수뇌부들은 카이저부터가 일단 요트타고 놀고 있었던 걸 시작으로 거진 휴가 중이란 것이다.당시 세계 대전은 그저 ' 가능성'이었고, 경제적으로만 보면 또 별개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벨 에포크를 거치며 산업혁명과 철도는 인구, 기술, 생산, 운수에 혁명적인 진보를 만들어냈다. 당시의 국제적인 규제는 없다시피했고 국제 자본은 전세계를 오갔다. 1900~1910년 사이에는 평균적으로 연간 3억 5천만 파운드의 금액이 유럽에서 아메리카, 아시아로 오갔으며, 독일 철강 기업에 투자금의 상당수가 적국 프랑스의 자본이거나 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국제전기통신연합, 만국우편연합과 같은 온갖 국제협력을 위한 협의회들이 설치되어 가며 상호의존을 가속화시켰고, 이러한 거미줄과 같은 상호 교류는 세계 대전과 같은 악몽은 그저 악몽일 뿐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14][15] 하지만 2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단순한 기대만으로 피할 수 없었다.
4. 발발 과정 - 7월 위기
자세한 내용은 7월 위기 문서 참고하십시오.4.1. 전쟁 열병/자원병 열풍
1차 세계 대전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크고 끔찍한 전쟁에 자원입대를 하면서 군대로 들어간 젊은이들이 넘쳤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언론에서는 청년들에게 군대로 입대할 것을 권했고 "Your country needs you", "I want you" 등 유명한 문구의 모병 포스터들이 거리에 붙여졌다. 물론 전쟁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았다.[16] 하지만 전쟁을 피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겁쟁이나 매국노 등으로 몰리기 일쑤였고 심지어 프랑스의 장 조레스처럼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변 또래들은 자원해서 군대로 입대하는데 건강한 청년이 입대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기란 쉽지 않았다.
거기다 당시에는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벨 에포크 시대였다. 시나 소설에서도 나폴레옹과 같은 전쟁 영웅들의 멋진 서사시를 노래할 뿐 전쟁의 참혹함이나 그 속에서 죽은 병사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에게 전쟁은 참혹하고 잔인한 것이 아닌, 단순히 영웅놀음이나 성인식, 모험 등으로 각인되었다.
또한 전쟁에 대한 지나친 낙관도 있었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40년 동안이나 이어진 벨 에포크 시대의 길어진 평화로 인해 전쟁에 대해서 다소 낭만적인 생각이나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00여 년간 전 유럽대륙을 아우르는 대규모의 전면전도 없었던 데다 전쟁을 치르더라도 대부분 단기간 내에 좀 치고 받으면서 끝나는 수준이었다.[17]
그래서 시대는 산업혁명과 병기의 발달로 인해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전쟁관은 여전히 중세적, 전근대적이었다. 19세기만 하더라도 군대라고 하면 금 장식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포화와 총격에도 꿋꿋히 전진하는 라인배틀로 상징되는 명예와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중세 유럽의 전쟁의 양상과도 1차대전은 너무나도 달랐다. 과거 유럽 왕족은 친인척으로 얽힌 경우가 많았고, 전쟁을 스포츠처럼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중국의 중원 통일처럼 나라 대 나라가 존폐 여부를 걸고 싸우는 경향이 아닌 몇번의 큰 전투 이후 판도를 본뒤 조약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평민들에게도 전쟁은 기사들이 출진하고, 영주가 바뀌더라도 거기서 그칠 뿐, 체감하는 개인적인 일은 없어 크게 상관있지 않은 이야기들이였다.
그러나 20세기가 들어서면서 더이상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럽에서 애국심과 민족주의 열풍이 강하게 불던 시기로, 또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징집된 병력을 철도로 얼마나 빨리 집결시키는지가 승리의 큰 요소가 됨이 증명되었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모병과 애국심 고취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전쟁터에 나아갔다. 냉병기 시대와 달리 총이 개발되면서 더 이상 숙련된 병사가 필수적이지 않았다. 1명의 숙련된 기관총 사수보다 5명의 초보 기관총 사수가 더 압도적이었다.[18] 거기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이 가능했긴 때문에 물자 또한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영주 대 영주의 돈(전쟁수행유지용) 대결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국가 총동원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총력전은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참전국 전원을 존폐의 위기에 몰아넣는 다같이 망하는 수준의 피해를 불러왔다.
사실상 오랫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탓에 유럽인들에게 전쟁이란 기껏해야 머나먼 식민지에서 낙후된 토착민들을 우월한 기술력이 적용된 무기로 학살하는 경험에 지나지 않았다.[19]
이렇게 조국의 군대가 타 국가를 손쉽게 혼내줄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급속도로 발달하던 기계화된 무기들이 자신들을 향해 대량으로 사용되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 발생할 것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1910년대 초기에 벌어진 몇 차례의 국가들 간의 형식적인 대치만 하는 모습은 이러한 착각을 더욱 부추겼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가 식민지 대결을 하면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많은 청년들은 "그까짓 전쟁... 이번에도 적당히 대치만 하고 총 몇번 쏘다보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나는 영웅이 되겠지?" 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결국 전쟁 발발 초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의 모병소에 국가에 대한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고 살아서 돌아오면 전쟁영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한 지원병 청년들이 미어터졌다. 하지만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갈지 제대로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쟁이 아무리 길어봐야 3개월 정도면 끝나고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에 차 있었다.[20] 즉, 낭만주의와 애국심에 빠저든 젊은이들이 "강한 우리나라의 군대가 적군을 물리치고, 나는 그곳에서 영웅처럼 싸워서 승리하고 명예롭게 훈장과 포상을 받고 제대한다!!!" 라는 매우 비현실적인 상상에 빠져서 저승사자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전쟁터로 자원입대를 한 것이다.
물론, 자원입대를 하고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귀향한 이들은 전쟁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무려 4년도 넘게 버텨낸 뒤에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돌아온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으며, 가족들과 고향 친구들은 대부분 끔찍한 전쟁을 겪고 세상을 떠났다. 결국 이들은 전쟁의 끔찍한 후유증 속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억을 잊지 못했다.
실제로 서부전선의 경우는 병사들의 평균 생존시간은 겨우 5일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영국군의 경우는 같은 지역 출신자들은 되도록 같은 부대에 몰아넣었는데, 대량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투들에서 특정 지역의 청년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이 빈번했다.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주변에 죽은 전우들은 고향 친구들일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굶주림이나 추위는 물론이고 물이 고인 진흙탕 참호에서 참호족에 걸리기 일쑤였으며, 대량의 포화 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망가지는 셸 쇼크 증상을 보이는 병사들도 많이 발생했다.
또한,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생존자들 중 일부는 그대로 군대에 말뚝을 박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또 다시 세계 대전에 나가야 했다. 말뚝 외에도 국민돌격대, 임관, 정계, 재입대, 추축국의 침공에 대항한 저항운동 등으로 2차대전에도 참전한 1차대전 참전 출신자들도 많았다.
한편, 전쟁이 길어지고 불구가 된 전상자들과 비어있는 관이[21] 고향으로 돌아오며 후방에서도 전쟁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전쟁을 결정한 정부는 선거 등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22][23] 그럼에도 전쟁이 끝나는 그 날까지 학업, 질병 등의 이유로 정당하게 면제받을 수 있음에도 자원입대 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당시는 민족주의/애국심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사지멀쩡한 건장한 청년이 군복을 입지 않고 거리를 쉽게 돌아다닐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뒤에서 겁쟁이라고 험담을 당하고, 종종 어째서 군대로 가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기 일쑤였다. 굳이 뭐라 안하는 분위기라 해도 오히려 낭만주의가 지배적일 때는 전쟁분위기를 혐오했지만 정작 전쟁터에 가서 죽어가는 또래 연령대의 청년들을 보면서부터는, 오히려 "전우들은 죽어가는데 나만 후방에서 편하게 지낸다" 라는 죄책감에 어떻게 될 지 뻔히 알면서도 자진입대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많은 청년들이 자원해서 사지로 들어갔는데, 특히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어버린 청년들은 적국을 증오하는 심정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다.
특히 그 낭만주의에 가장 강하게 경도되어있던 청년 귀족층들은 나중에 전선의 상황이 알려진 후에도 가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명예욕과 의무심에 계속해서 장교로 입대했는데 초급 장교들은 보병전에서 항상 최선봉에 서야 했으므로 일반 보병들보다도 훨씬 죽을 확률이 높았으며 실제로 엄청난 숫자가 사망했다. 전후 유럽 귀족층에서 아들들이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어버려서 가계가 흔들린 곳이 많을 지경이었다.
5. 전쟁의 전개
5.1. 전쟁의 시작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왕국의 민족주의 조직 검은 손 소속의 단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암살당하면서 이에 분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함에 따라 제1차 대전이 열렸다( 세르비아 침공). 그러나 얼마 안가 점령될 거라 여겨졌던 세르비아는 오히려 침공을 격퇴하고 1915년 11월까지 버텼다.그 뒤 세르비아의 보호를 이유로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독일은 러시아에게 총동원령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고 무시되자 다음날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를 최대한 빨리 굴복시켜 동쪽의 러시아 제국 방면으로 집중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슐리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고, 1914년 8월에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3일에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한 뒤 중립국 벨기에가 독일군의 통과를 거부하자 4일부터 침공해 점령한다.[24] 영국은 중립을 표방했었으나 영국이 독립을 인정했던 벨기에의 중립이 무시당한 것을 이유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 한 뒤 프랑스로 영국 원정군을 투입하기 시작했으며 발칸 반도의 국가 등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전포고를 교환했다.
8월 7일부터는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 안에서 국경 전투를 열어 승리해 파리 50여km 앞까지 진격할 정도로 선전한다. 한편 러시아가 급하게 8월 중순부터 독일의 동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를 공격, 갈리치아의 중심 도시인 렘베르크를 비롯한 갈리치아의 상당 지역과 동프로이센의 국경 지대 일부를 점령했지만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반격당해 큰 피해를 입고 동부전선 우위를 내줬으며 오스트리아군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9월의 마른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영국 협상군에게 저지당하며 진격의 힘을 잃고 주저앉게 된다. 결국 독일은 계획대로 프랑스를 조기에 굴복시키기에 실패했고, 우려했던 대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면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당시 독일의 상황을 나타내주는 근대사 유물.[25] |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도 유럽의 식민지였던 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독일과 영국 식민지에서는 종전까지 현지 병력들의 전투가 계속 일어났다. 라이베리아가 개전 1주만에 대독 선전포고를 한 이래 8월 말에 일본 제국도 영국과 함께 독일령이었던 칭다오를 침공해 점령했고 9월에는 호주가 독일령 뉴기니를 점령했다. 태평양 지역에 있던 독일 함대는 본국으로 귀환을 시도했지만 영국 함대의 습격을 받다가 포클랜드 해전에서 괴멸되었다.
5.2. 참호전의 수렁
더 진격할 수 없게 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프랑스 방면의 점령지역 유지와 방어를 위해서 참호를 팠고 협상군도 독일의 진공을 저지하기 위해서 참호를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대편 참호의 측면으로 계속해서 기동을 되풀이한 결과 끝내 참호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늘어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끔찍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참호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나라에도 참호전이란 교리가 없었으며 의도된 전쟁 양상이 아니었다. 과거 남북전쟁 당시 서부 전역의 빅스버그 포위전, 피터스버그 포위전에서 초기 형태의 참호전이 선보여졌지만 유럽국가들은 산개, 엄폐, 참호를 활용한 남북전쟁에 대해 아 그 신대륙 촌놈들, 참 촌스럽게 전쟁하네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26] 또한 기관총, 야포, 철조망 등 방어에 유리한 무기는 발달했으나 참호 돌파를 위한 효과적인 무기가 없었기에 양측은 효과적인 전진을 하지 못하고 인명피해만 늘어가는 소모전을 치르며 대치하게 된다. 대전기간 그 어느 쪽도 참호전 양상을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의외로 러시아 제국군이 동맹국을 상대로 참호 돌파를 많이 했었다. 그러나 상대는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동부전선에선 참호전을 중요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서부전선에선 끝없이 이어지는 참호로 요새화 된 지역은 우회해서 돌아갈 길도 없었고, 참호에는 포격도 썩 효과적이지 않았다. 결국 대량의 포격을 적의 참호에 가한 후 정면으로 병력을 돌격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적의 기관총과 철조망, 그리고 포격 때문에 아군은 적의 참호에 가기도 전에 전멸하기 일쑤였다. 설사 적의 참호를 점령하더라도 그 앞에는 적들이 준비한 제2, 제3의 참호가 버티고 있었다.
서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을 제외한 동부전선이나 발칸, 캅카스, 중동 전선에서는 참호전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 자체가 없었다. 이쪽에서는 철도와 기병을 동원해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고 있었다.[27]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양상이 판이하게 달라진 이유는 병력밀도가 차이나는 것이 컸다. 서부전선은 전 전선에 걸쳐 병력이 빽빽하게 들어차 병력밀도가 낮은 취약점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참호전이라는 일종의 진지전 양상으로 변모했다. 이탈리아 전선도 마찬가지로 병력 밀도가 높을뿐만 아니라 고지대인 알프스산맥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므로 대개 참호를 파고 포격을 주고받는 진지전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동부전선은 흑해에서 발트 해까지의 거대한 전선이 형성되다 보니 참호에 의존한 고수방어를 하려다가는 쉽사리 측면돌파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보병과 기병에 의한 기동전 양상이 벌어졌던 것이다.[28]
5.3. 오스만의 참전
오스만 제국은 이 시점까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1914년 7월에 영국에서 만들어지던 오스만 전함 두 척을 동맹국 병기라는 이유로 영국이 부당하게 압류하자 오스만의 영국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으며 8월에 독일은 오스만에게 비밀리에 동맹을 추진하고 전함 두 척을 양도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해 줘 환심을 산다. 그리고 오스만 해군 소속이 되었음에도 독일 해군이 지휘하던 이 두 전함은 10월 말에 러시아의 세바스토폴 항구를 기습 공격해 버렸고 러시아는 11월에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여 캅카스 방면을 공격하기 시작해 오스만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곧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영국은 영국령 인도 제국에 자치권 강화를 약속하여[29] 인도 제국도 협상국 측에 합류했다.1914년 12월, 대부분 군인들이 집에서 보내리라 생각했던 크리스마스가 다가 오자 서부전선에서 대치하던 협상군과 독일군은 암묵적으로 휴전한 채 각자의 참호에서 조촐한 축하행사를 가졌으며 기적적으로 서로 총을 거두고 적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가 가자 적어도 대놓고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5.4. 정체되는 전황
1915년 1월에 오스만 제국과 독일은 영국과 영국령 인도의 연결을 끊어버리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한다.2월부터 독일은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고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행해 협상국의 상선 등을 무차별적으로 격침시킨다. 5월에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며 미국인 128명이 죽자 미국의 참전여론이 거세졌으나,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취하하기로 하여 미국도 이를 인정하고 화를 잠재운다. 하지만 이 작전은 꽤나 효율적으로 영국의 해상력을 경계하고 약화시켰기 때문에, 이후 말을 바꿔 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감행하여 미국의 여론이 다시 악화되었으며 하술할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한다.
영국은 꽉 막힌 서부전선의 교착을 풀어줄 돌파구를 찾을 겸, 독일에 고전하면서 오스만까지 상대하던 러시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프랑스와 연합한 함대를 보내 2월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고 했으나[30] 거센 저항 때문에 실패했고 4월부터 다시 지상군을 동원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륙작전이란 결과를 본 채 이듬해 1월에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일은 윈스턴 처칠의 가장 큰 흑역사가 되었다.
한편 4월의 협상국의 공세를 조용하게 지켜보던 이탈리아 왕국은 결국 삼국 동맹을 공식적으로 배신하여 협상국에 가담한 뒤 바로 5월에 전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31] 전쟁이 시작되면 빠르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영내로 진격할 수 있을 거라는 이탈리아의 예상과 달리 국경을 넘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방어선에 가로막혔고 이후 두 나라는 험준한 알프스산맥을 배경으로 힘겨운 대치를 이어간다.
동부전선에서는 5월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갈리치아 방면에서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를 펼쳐 그 해 6월 렘베르크를 탈환했으며 곧이어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개시, 러시아는 폴란드에서 전략적 후퇴를 결정하고 8월에 독일군이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중심 도시인 바르샤바를 점령한 데 이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코브노, 빌나, 핀스크 등 러시아 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할 정도로 독일이 우위를 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일이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에는 여전히 러시아의 병력은 많았으며, 거리도 너무 멀었고 애초에 동부는 독일의 양면 전쟁에서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10월에는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고전하던 세르비아 방면의 전투는 물론 발칸 반도 지역의 정세가 동맹국에게 유리하게 넘어온다.
영어권에서 일명 Going over the top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진.[32] 참호에서 올라와 기관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무인지대로 돌진을 시작하려는 영국군을 찍었는데, 솜 전투의 가장 유명한 사진일 것이다. 후반부 전쟁에 뛰어든 미군도 사진의 영국군과 마찬가지로 무인지대로 돌진을 시작하려는 미 육군 병사들을 촬영한 기록사진이 있다. [33] |
1916년이 되자 서부전선의 전투는 격화되지만 상황은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특히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만 200만 명이 살상되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전황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다만 베르됭 전투 이후 독일은 전력이 약해져 서부전선에서 방어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독일 해군은 5월에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기 위해 영국 해군과 유틀란트 해전을 벌여 상대적으로 유리한 전과를 올렸지만 애초에 체급이 달랐기 때문에 봉쇄를 돌파하진 못했다. 이후 독일은 드레드노트 함대전을 포기하고 잠수함만 바라보았다.
또한 이 시기에 포르투갈이 1차 대전에 협상국 측에 참전했다. 당초 포르투갈 정부는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916년 오랜 동맹이었던 영국이 포르투갈의 항구에서 독일 배들의 나포와 화물 압수 등을 요구하자 독일은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포르투갈은 중립을 포기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서부전선에서 포르투갈은 영국과의 협의 끝에 영국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보병 5만 5천 명과 포병 1천 명이 참전했는데 그중 전사 8145명, 부상 1만 3751명, 실종 및 포로 1만 2318명이 발생했다. 전쟁 영웅들도 있었는데 한 예로 아니발 아우구스토 밀하이스(Aníbal Milhais)라는 병사는 제4차 이프르 전투(일명 '리스 전투') 당시 아군이 후퇴하자 독일군을 혼자서 막아내며 아군의 퇴로를 엄호하였고 본인도 무사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밀하이스는 1차 대전 당시 포르투갈군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았으며 그의 고향인 발롱고(valongo)는 그의 이름을 따서 발롱고 데 밀하이스로 지명을 바꾸었다.
또한 포르투갈 국적 선박 80척이 독일 잠수함대에게 공격받아 침몰했다.[34]
오스트리아-헝가리는 2월에서야 불가리아와 합동으로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을 힘겹게 점령했으나 세르비아 정부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고 잔존 병력과 함께 그리스로 후퇴했다. 그리고 영불 연합군이 세르비아군을 도와 테살로니키에 상륙하면서 발칸 전선이 완전히 정리된 것도 아니게 되었다. 게다가 6월에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동맹군을 상대로 브루실로프 공세를 펼쳐 오스트리아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약체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냈다. 하지만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 러시아도 독일군에 비해 전력이 열세였으며 피해가 꾸준히 누적되고 있어 1916년 말까지 병사 500만이 사상당했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국내의 불만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러시아와의 캅카스 전선에서는 러시아한테 패하며 쭉쭉 밀려나고 있었고 중동의 아랍 부족들이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던 것을 영국이 지원하여 6월에 아랍 반란을 일으켜 예상 외로 잘 버티고 있던 중동 전선에서도 수세에 몰린다.[35]
8월 27일, 그동안 중립을 표방하며 어느 편에 설지 간만 보고 있던 루마니아가 브루실로프 공세의 성공을 보고 협상국으로 참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한다. 초반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에 대한 오스트리아군의 방비가 빈약했던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으나, 양적인 병력 증강에서 비롯된 질적 부족과 동맹국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루마니아군은 곧바로 자국 영토로 밀려나 수도 부쿠레슈티까지 함락되었으며 몰다비아만 남은 상태로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버티게 되었다.
전쟁 동안 서부전선의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숱한 신병기와 전술이 개발되었다. 현재까지 사용되는 거의 모든 보병전술의 기초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던 1914년에는 어느 국가의 병사도 철모를 쓰지 않았으나 점차 너나할 것 없이 채택하기 시작한다.[36] 독일은 1915년 4월부터 시작된 2차 이프르 전투에서 살상용 독가스를 사용해 효과를 봤고,[37] 6월에 화염방사기를 첫 배치했다. 영국은 전차를 발명해 마크 1이 솜전투가 펼쳐지던 1916년 9월에 실전 투입되었다. 영국의 전차를 보고 프랑스에서는 생샤몽 을 개발했고 전쟁 후기에는 세계 최초의 경전차인 르노 FT를 만들었다. 전쟁 최후기에는 A7V 슈투름판처바겐과 그로스캄프바겐이라는 물건이 독일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신병기들로도 참호전의 양상을 궁극적으로 타개하지는 못했다. 독가스는 사용조건에 제한이 있는데다 화학전 방호장비가 보급되면서 효력이 감소했고, 전차는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나 초기 전차는 성능이 부족한 데다 전차 운용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바람에 참호전을 궁극적으로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의 전차는 거의 움직이는 엄폐물 정도였다. 전쟁 말기인 1918년에는 MP18 등의 기관단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항공기의 군사적 활용의 발전도 두드러진다. 전쟁 초에는 단순히 정찰, 그리고 상대 국민에 대한 테러 목적으로 미미한 폭격이 있었으며, 비행선을 이용한 폭격이 시도되기도 하지만, 공랭식 기관총과 동조식 발사장치를 개발하여 기관총 한두 정을 장착한 빠르고 민첩한 전투기가 상대의 기구, 비행선, 정찰기를 격추시켰다. 그리하여 폭격용 비행선은 빠르게 사라지고 보다 빠르고 크기 대비 폭장효율이 좋은 대형 폭격기가 등장하여 상대국의 도시를 노렸다. 이에 따라 자국 방공망 구축보다 효율적인 항공기 운용을 위해 1918년부터 영국 공군이 세계 최초로 결성되었고 다른 참전국들도 이를 따랐다. 대전 말 전략폭격의 이론을 영국의 트렌차트, 미국의 미첼, 이탈리아의 두헤가 서서히 틀을 잡았다.[38]
5.5. 미국의 선전포고와 러시아 혁명
독일은 2월부터 다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한다. 결국 이것과 독일의 테러들[39], 치머만 전보 사건 등을 견디다 못한 미국은 4월에 독일 등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동맹국은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 하지만 급하게 징집한 병사들의 훈련 등을 이유로 미국은 전쟁 참여에 조심스러웠고, 6월부터 프랑스에 기초훈련이 끝난 소규모의 미군 부대가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1918년 5월까지도 큰 교전을 하지 않았다. 한편 비슷한 시점에 중국인 노동자들을 수송하던 배가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중국인들이 떼죽음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돤치루이 내각은 1917년 3월에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단교하고 수개월 후에 내전까지 불사하며 선전포고하고 참전하게 되나 전투 차원에선 유럽에 보내기 위해 조직하던 '참전군'이 대전이 끝나던 시점까지 편성이 안 돼서 도움을 못줬고 다만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을 유럽에 보내서 후방에서 원조하였다.
1917년에 들어서 러시아 2월 혁명이 터져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고 러시아의 체제가 전복되었다. 하지만 새 정부는 여전히 독일과 전쟁을 하려 들었고 내부의 불만 요소는 그대로였기에 사회에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1917년 3월에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의 도시였던 바그다드를 점령했고, 곧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1917년 4월에 독일은 망명 중이던 레닌을 기차에 태워 러시아로 귀국시켰다. 레닌의 혁명이 성공하면 독일과의 전쟁을 그만둘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이렇게 러시아의 내부 상황이 혼란으로 치닫자 프랑스와 영국은 초조해졌고, 서부전선에서 4월부터 연이어 협상군의 대공세가 펼쳐지며 7월의 치열한 파스샹달 전투까지 펼쳐졌지만 대량의 인명이 소모된 것에 비하면 작은 승리였으며, 전략적으로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한편 그리스 왕국은 전쟁 발발 이후 계속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와 협상국으로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갈등과 그로 인해 둘로 쪼개진 국민 여론, 그리고 세르비아 전선의 패전으로 동맹국의 추격을 피해 그리스 영내로 피난한 세르비아군과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테살로니키에 진주한 영불 협상군, 그에 대응하여 콘스탄디노스의 묵인을 받아 그리스령 마케도니아로 진주한 불가리아군 때문에 그리스도 전쟁에 휘말렸다. 급기야 총리 자리에서 해임된 베니젤로스는 지지자들을 이끌고 협상군이 점령한 테살로니키로 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수도 아테네에서는 양측의 지지자들이 대규모 시가전을 벌이고 베니젤로스를 지지하는 영불 협상군은 그리스 북부와 도서 지역을 점령하여 콘스탄티노스를 압박하는 등 난장판이 되었다. 협상국 중 유일하게 콘스탄티노스에게 우호적이던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마저 혁명으로 물러나자 버틸 곳이 없어진 국왕 콘스탄디노스가 퇴위하고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했으며 신정부를 이끄는 베니젤로스는 6월 30일 동맹국에 선전포고하면서 그리스도 협상국 측으로 참전했다.[40]
한편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의 소모전에 압박을 느끼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 전선에만 집중하기 위해 동부전선을 전부 독일한테 떠넘기려 한다. 독일의 반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후 독일은 서부전선으로 바쁜 와중에 동부전선의 90%를 담당하며 이탈리아 전선마저도 독일이 지원해야 하는 눈물겨운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10월에 펼쳐진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이탈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탈리아군은 우디네 일대를 포기하고 베네치아를 불과 30 km 앞둔 피아베 강까지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전선이 이탈리아 영내로 옮겨가고 이탈리아가 방어전으로 돌아서자 독일은 이탈리아 전선을 마무리하고 서부전선으로 집중한다.
1917년 10월 혁명의 여파로 러시아 체제가 전복되고, 11월에 레닌은 러시아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던 전쟁을 멈추기 위해 독일과 강화한다.[41] 독일은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나 영국은 큰 위기감을 느꼈지만 사실 독일도 이미 인적 경제적 손실이 누적되어 국가는 피폐해졌다. 러시아에도 평화가 찾아오기는커녕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1918년 1월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평화 14개조를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고 이는 핍박받는 민족과 나라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나[42]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에게는 종전 후 분열을 가져오는 치명타가 되었다.
5.6. 동맹국의 항복
1918년 3월, 독일의 경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된 동부전선에서 71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들을 차출해 서부전선에 집결시킨 후, 마지막으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쥐어짜 서부전선 최후의 공세인 루덴도르프 공세[43]를 펼쳤으나 심각한 피해를 입고 얼마 못 가 주저앉았다.
결국 1918년 8월부터 미군은 하루에 만 명씩 프랑스로 들어오고, 미국 원정군 90만 명을 포함한 협상군은 바로 독일을 상대로 백일 공세를 펼쳐 엄청난 속도로 전선을 밀어내며 10월,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 주요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을 붕괴시켰다. 비슷한 시기, 협상국의 대공세로 이탈리아 전선, 중동 전선, 마케도니아 전선 역시 마찬가지로 일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결국 희망이 사라진 동맹국들은 내부적으로 패배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한다. 9월 29일, 테살로니키 휴전 협정으로 불가리아 왕국이 가장 먼저 이탈했으며 10월 30일에는 무드로스 휴전 협정으로 오스만 제국이, 11월 3일에는 제국 내부 소수민족들의 이탈로 무너져내리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빌라주스티 휴전 협정으로 항복했다.[44] 마지막까지 버티던 독일도 킬 군항의 반란을 시작으로 반정부운동이 다발적으로 일어난 11월 혁명으로 정부가 무너져 11월 11일에 콩피에뉴 휴전협정을 체결하면서 협상국에 항복했다.[45]
항복 직전의 독일은 전선의 병사들도 굶주림에 못 이겨 협상군 참호를 습격해 음식을 약탈해 오고, 후방의 민간인들은 루타바가 말고는 먹을 게 없을 정도로 굶주리고 있다가 마침내 전선과 후방에서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 한 1년 정도는 더 버티더라도 패전을 면할 길은 전혀 없었다. 이는 힌덴부르크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시 계획경제에서 군수물자 생산에 너무 치중하다가 식량 생산 등의 기본적인 요소에서 일이 틀어진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경제 전체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일의 경우 오히려 관료들이 자원을 비교적 유능하게 잘 배분해서 가용한 모든 자원을 완전히 탕진할 때까지 끌고 오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식량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프랑스도 독일보다 먼저 그러한 상황에 직면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식량 원조로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이때 식량 원조분이 4일만 늦게 도착했으면 프랑스 전역에서 식량이 고갈될 상황이었다. 물론 이것은 춘궁기의 일시적인 상황으로, 이는 프랑스가 식량이라는 요소를 경시하다가 문제를 겪은 것을 보여줄 뿐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전반적인 농업생산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전체적인 인구수와 공업생산력에서 독일에 심각하게 밀렸던 프랑스가 유일하게 비교우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압도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프랑스조차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정도로 충분히 생산하지는 못해서, (전쟁 중이니까) 미국은 1914-24년 사이에 프랑스에 842만 톤의 식량을 보내기도 했다. 이를 보면 외부지원 없이 붕괴하지 않고 버틴 것에서 독일 관료들은 오히려 경제를 잘 운영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없는 자원을 창조할 능력이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협상국의 상태도 막장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을 포함한 신세계와의 교역이나 지원으로 물자를 보충할 수 있었다. 협상국은 전반적인 경제 운영에 훨씬 여유가 있었고 여기에 미국 병력까지 쏟아져 들어오는 상태라 독일은 항복하는 길 밖에 없었다.
다만 독일은 항복하는 순간에도 프랑스 영토 안에서 서부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국 영토에 적군을 한 발짝도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패전을 맞자, 많은 독일 국민들에게 분노하면서도 상황에 의심을 품어 일명 배후중상설이라는 도시전설이 폭넓게 퍼졌다. 이것이 후일 히틀러와 파시즘이 일어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5.7. 종전
1차 세계 대전 이전과 이후의 지도 변화(붉은색 국경선이 이후) |
1919년 6월에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반영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고, 생제르맹 조약, 트리아농 조약, 세브르 조약, 뇌이 조약이 체결되어 패전국들의 많은 영토가 민족별 나라로 나뉘어 독립한다.
-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협상국과 신생 독립국에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가지고 있던 식민지도 토해내야 했다. 독일 황실과 오스트리아 황실도 무너졌고 오랜 시간 동안 중동의 패권자였던 오스만 제국도 사실상 멸망했다.
- 러시아 제국: 정부가 혁명으로 붕괴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조기에 전쟁에서 이탈한 탓에 협상국으로 참전했음에도 승전국 반열에 들지 못하고 도리어 발트3국이나 핀란드, 폴란드 등을 독립시키고 루마니아에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46]
- 폴란드: 18세기 말 멸망했었던 폴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모두 무너지고 식민지를 토해낸 것을 계기로 폴란드 제2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이 과정에서 동프로이센 지역은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으로 다른 독일 지역과는 분리됐다.
- 프랑스, 영국: 식민지를 더 가지거나[47] 알자스-로렌 같은 영토를 일부 할양받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얻었다. 다른 한편으로 1882년부터 영국의 보호령, 사실상 식민지였던 이집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노동력과 자원이 징발당하고 여기에 현지 이집트인들이 분노한 것을 계기로 민족주의 운동이 힘을 얻었다고 한다.[48] 인도 역시 노동력과 자원의 징발, 그리고 중동에서 인도 병력이 거둔 승리, 결정적으로 남아공에서 돌아온 간디의 영향으로 전후 영국이 자치권 보장 약속을 어겼음에도 민족주의 운동이 큰 힘을 얻었다.
-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로부터 트리에스테(트리에스트)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와 쥐트티롤을 할양받고 지중해와 튀르키예 쪽에 세력을 폈으나 가장 원했던 달마티아를 얻지 못하는 등 생각외로 많은 이득을 얻지 못해 이에 불만을 품은 국민이 파시즘을 지지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 세르비아: 오스트리아에서 빼앗은 땅을 합쳐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건국했다.
- 그리스: 불가리아의 영토를 조금 얻었다.
- 벨기에: 독일의 말메디 지역을 얻었다.
- 루마니아: 전 국토가 동맹국에게 유린당하고 동맹국에 항복하는 치욕을 겪었으나 전쟁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나자 오스트리아로부터 부코비나, 헝가리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불가리아로부터 남도브루자를 수복하고 여기에 러시아 제국이 통치하던 베사라비아까지 추가로 획득하여 영토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 일본: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경제호황 및 독일의 아시아, 오세아니아 식민지 및 중국의 이권들을 조금 획득했지만 역시 대공황으로 불황을 겪자 군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군국주의가 대두했다.
우드로 윌슨은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베르사유 조약 1조에 국제연맹의 창설에 관한 조항을 넣었고, 1920년 1월 런던에서 첫 국제연맹 회의가 개최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6.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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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의 사망자 수 및 지출비용[49] |
제1차 세계 대전은 전사자 900만 명, 민간인 사망자 600만 명, 부상자 2700만 명, 불구자 600만 명, 미망인 400만 명, 고아 800만 명을 남겼다. 이런 인명 피해는 당연히 성비 불균형, 한 세대의 상실 등 사회 불안을 초래했다.
독일군은 최소 180만 8545명의 전사자, 424만 714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프랑스군은 약 500만의 사상자가 나왔고, 그 중 138만 5300명이 전사 및 실종자였다. 영국군은 사상자가 326만 581명이였고, 그 중 94만 7023명이 전사 및 실종자였다. 미군은 32만 5867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전사자는 11만 5660명이었다.
러시아군은 자료에 따라 다양한 추측이 존재하는데 한 집계에 따르면 340만 9433명이 포로로 잡히고 22만 8838명이 실종됐다고 한다. 전사자 100명당 러시아군은 251명이 포로로 되거나 실종자라는 것인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50명, 이탈리아군은 92명, 독일군은 65명, 프랑스군은 46명, 영국군은 영국 식민지 출신 병사를 포함해 21명이라고 한다. 러시아 군인들이 타 국가에 비해 포로가 되는 상황이 많았거나 쉽게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러시아군 전사자가 독일군 다음으로 많다는 것이다. 당연히 러시아 전선에서 독일군이 입은 피해가 러시아군보다 압도적으로 적을 리는 없다. 독일군이 정말 잘 싸운 셈이다.[50]
그 외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20만 명, 오스만 제국군은 77만 2천 명, 이탈리아군은 65만 1천 명, 루마니아군은 33만 5천 명, 세르비아군은 27만 5천 명, 벨기에군과 불가리아군은 8만 8천 명, 그리스군은 2만 6천 명, 포르투갈군은 7천 명, 몬테네그로군은 3천 명, 일본군은 1천 명이 전사했다.
경제적으로도 피해가 컸다. 1차 대전 이후 참전국들의 경제적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군비를 세금, 금 매매와 차용금으로 마련했기 때문에 참전국들의 국가채무는 굉장한 수준에 이르렀다. 유럽 각국에서 평균 35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가장 문제가 심각했던 독일 바이마르 정부의 마르크는 3년 만에 1억 배 오르는 등 휴지조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때까지 가장 큰 부채를 안았던 미국만이 모든 부채를 해소하고 제일의 대금국가가 되었다.
7. 영향
"20세기는 1914년에 시작되었다."
에릭 홉스봄
홉스봄의 표현처럼 사실상
20세기의 모든 것이 1차 대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특히 주 전장이었던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함께 세력구도의 대격변을 일으킨 사건으로, 급진적인 학자들은
유럽사에 한해 현대의 시작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로 정의하는 의견이 제안될 정도다. 유럽에서의 세력구도 재편은 아직
제국주의의 영향이 가시지 않았던 타 대륙권의
식민지나
열강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제1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에릭 홉스봄
여기에 또 다른 문명의 발달인 국가 관리 체계의 발달과 민족주의에 의거한 국가 총력전으로의 변화는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대량의 인원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앞서의 요인 등으로 도리어 인적 손실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7.1. 인문학적
인문학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는데 ( 식민지 지역 같은) 야만에서 벗어난 문명국을 자처하던 유럽이 그 어떤 야만인들보다 더 끔찍한 전쟁을 벌였던 것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는 문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낙관하던 분위기는 문명의 이기들을 이용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박살이 나고 만다.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전쟁에 자원하던 유럽의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생지옥이었으며 1차 대전 이후로 유럽 문화는 상당 부분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흐른다.[51]염전(厭戰)사상 확산에도 일조했다. 까놓고 전근대시대 유럽의 전쟁은 이전까지가 그랬듯 특정계급들간의 제한적인 동원으로 이루어진 전쟁이었고, 전쟁의 프로들인 정규군과 용병들로 구성된 전사들의 영웅주의적 색채로 미화되어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시대 프랑스를 시작으로 점점 전쟁을 전문으로 하던 전사계급이 아닌 시민이 총을 들고 나서는 총력전의 개념이 도입된 이후에 각국 역시 열강들끼리 온 국토를 쥐어짠 총력전을 한 것은 처음이라 각국 수반들도 전쟁을 지금보다는 훨씬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전쟁은 이전과 달랐다. 전사들만 싸우는 게 아닌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싸웠기에 군기확립이나 군인 통제가 어려웠고, 그동안 자신들이 칭하길 야만인이었던 식민지의 저항세력에게 쏟아붓던 제국주의 열강의 필살기였던 기관총과 야포의 총구멍이 자기를 향하게 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이렇게 자국 시민을 상대 기관총과 야포에 총알받이로 던지는 참담한 전쟁을 마주하기 시작했음에도 정치가들과 높으신 분들은 전쟁을 멈출 수 없었고, 피해는 엄청나서 그 이전과는 달리 전쟁을 벌였다가는 잃을 것이, 설사 이긴다고 가정해도 그 이후 따를 보상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52]
제1차 세계 대전의 가공할 피해는 대전 직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염전 사상을 확대시켰다. 전쟁에 대한 가공할 공포는 열강들에게 더 이상의 1차 대전과 같은 재앙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이 염전 풍조는 유럽 사상 유례없는 군비축소 조약과 부전조약을 체결하는 계기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영-불의 독일에 대한 소극적, 유화적 외교시책의 원인이 되었다. 그 1차 세계 대전때 처절한 참호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2차 세계 대전때 가장 강력한 유권자 세력이 되었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참호전을 시킬지 모를 상황이었으니까. 이 염전의 풍조가 지금 생각하면 2차대전이 그 지경으로 가는 데까지 방조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슬픈 아이러니. 당대의 이러한 염전 풍조 확산은 그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1차 대전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La Der des Ders)이었다고 평가하게 했다.
1914년까지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통치했던 유럽은 미국 등 다른 대륙의 국가들에 의존해 재건에 집중해야 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금까지 스스로를 세계 문명의 주축이라 여기고 미래를 낙관했던 유럽 국가들에 전체적인 비관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런 시체의 산을 손쉽게 쌓아올리는 지옥도 같은 전쟁 양상은 이전 과학 기술이 평화로운 풍경 하에 발전하던 시절에 품었던 벨 에포크적인 과학과 이성으로 가득 찬 희망차고 밝은 미래상의 붕괴를 불러오고 그 과학이 미치광이 같은 전쟁 상황에 동조하고 도리어 더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과학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각을 불러오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미흡한 군사 기술에 대한 연구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했으며 이후 이어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말의 낙관마저 꺾이게 된다.
7.2. 군사학적
군사학적으로는 승자와 패자에게 완전히 다른 영향을 미쳐 2차 대전 초기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승자인 영국과 프랑스는 1차 대전의 전훈을 압도적인 화력과 방어자의 우세로 결론짓고 방어 위주의 군사사상을 도입, 마지노 선 건설에 착수하지만[53][54], 독일은 그 우세를 극복하기 위한 기동전을 연구해 결국 1차 대전 당시 4년 동안 점령하지 못한 프랑스를 1940년엔 6주 만에 점령했다.이 전쟁은 이전 전쟁과는 달리 전쟁으로 인한 인적 자원의 손실을 국가들이 감당하기 힘든 경우였다. 무기 체계의 발달, 특히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간 전쟁 양상과 더불어 새롭게 개발된 야포와 기관총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속도로 병력이 소모되게 했으며[55], 이에 반해 나이 많은 지휘관들의 생각은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교리에 머물렀다. 이전에는 비교적 엉성한 화망과 포를 뚫고 닥치고 기병 or 보병이 진격해서 적군을 유린하면 되는 반면, 1차 대전 초기 전선에서는 기관총에 병력을 돌진시켜야 하는 상황임에도 양군의 지휘관들은 돌격하여 상대의 방어를 분쇄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같은 무모한 돌격명령은 지휘관들의 '공격 낭만주의'와 더불어 공격하여 적의 진영을 탈취하고 적병을 사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이자 커다란 전공으로 여기고, 방어선을 굳게 하여 나오지 않는 것은 불명예스러우며, 계집애 같은 행위로 여기던 경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일본군에서 이 공격만능주의적 사고방식을 여전히 유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오히려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나 1차 대전 당시 칭다오 전투에서 일본군의 전투 교리는 공격만능사상식 돌격이 아니었으며 포격이 주축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력만 강조하는 교리가 일본군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1920년대를 넘어서인데 이러한 교리가 성립되는 데는 러일전쟁 당시 독일식 화력전에 입각한 포격이 당시의 기술 부족에 의해 영 시원치 않았던 경험과 1차 대전의 타넨베르크 전투와 총력전 양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본의 산업능력으로는 1일당 수십만 발을 쏟아붓는 서구 선진국의 "사치스러운" 전투를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식의 전투를 지향해야 한다"라는 무대포스러운 결론으로 이른 것이다.[56] 특히 포병을 강화한 건 프랑스로, 개전 후부터 총력을 다해 대포를 찍어내면서 (징집한 만큼 죽어나간 보병과 달리) 꾸준히 강화된 포병의 힘으로 독일군을 살상했다(다만 포탄은 미국이 돈 받고 팔았다).[57]
초기 전선이 고착된 이후에 무모한 돌격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거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는 게 더 큰 문제. 현대의 학자들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지휘관들의 무능력에 대해선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지휘관들이 전선이 아닌 후방의 성에서 체류하면서 작전 지시를 했던 것도 전선의 크기나 결정해야 할 사항 등을 고려할 때 몸을 사렸다기보다는 불가피한 지휘 방식이었다는 것이며 이는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선 시찰 과정 등에서 일어난 고위급 지휘관들의 사상률 역시 상당해서 몸을 사렸다는 주장 역시 부정확하다고 한다. 1914년 전쟁 초기를 지나서 참호선이 구축되고 전선이 고착될 때까지만 해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전훈으로 구축된 보병 기반의 기동전 교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전황이 참호전으로 고착되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교리로는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포격을 비롯해서 적의 진형을 보병의 돌격 이전에 무너뜨려야 된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단지 참호와 철조망으로 구성된 적의 진지에 충분히 빠르고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포격이나 화학전, 공습, 전차의 개발 등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으며 그러한 시행착오의 결과 전쟁발발 당시인 1914년의 보병 기동전술과 전쟁 후기의 1917-18년에 독일군이 보여준 후티어 전술이나 협상국이 보여준 제병 합동 전술의 수준은 천지차이였다.
문제는 이러한 학습이 무수한 병사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과 향상된 전술이 효과를 보는 상황에서조차도 높은 손실률 자체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한계는 있었다. 진격조차 못했던 무의미한 희생이 그나마 진격은 가능한 유의미한 희생으로 바뀐 정도. 무엇보다도 매끄러운 작전 연계를 위한 통신 기술, 특히 무선통신 기술이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렀기 때문에 포격으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순간에 보병을 돌격시켜 적을 섬멸한다는 것은 책상 위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실제로는 아군에게 포격을 하는 불상사에 대한 염려로 쌍방의 매끄러운 연계가 거의 부재했다. 존 키건은 자신의 저술에서 과학기술이 인명을 살상하기에는 충분히 발전했으나 인명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에는 미흡했다고 했다. 즉, 세상을 밝게 해줄 것처럼 여겨졌던 과학기술이 인간을 죽이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지만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기관총이나 가스탄 같은 병기가 너무도 쉽게 인명을 살상하는 반면에 철도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계속된 징병을 통해 전선의 병력을 바로바로 보충했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전선이 유지되었다. 과거같으면 보충 속도가 따라가질 못해 어느 한 쪽이 밀려났을 정도로 사상자가 누적되었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동부 전선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독일이 서부 전선에 총력을 다 했을 때에도 발전된 전술에 힘입어 전선의 돌파는 가능했지만 그 돌파를 확대시킬 역량은 없었고, 이후 제병합동전술로 독일군을 밀어붙이는 협상국에 대항하여 더는 싸울 수 없을 만큼 자원이 소모된 이후에야 전쟁이 끝났다.
독일군은 1차 세계대전을 매우 잘 수행했다. 원래 독일은 기본적인 병력과 산업 규모부터가 열세였다.[58] 동맹국과 협상국의 GDP는 거의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고, 인구 역시 협상국이 더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 제국군은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서부전선을 유지하며, 러시아와 발칸국가들과의 동부 전선에서 주공을 맡았고, 심지어는 이탈리아 전선과 오스만 제국까지도 지원했어야 했다. 이런 난관 속에서도 독일의 장교단과 관료들은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불리한 전쟁을 5년 가까이 질질 끌었지만, 미국의 참전과 함께 힘을 소진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총력전의 개념과 함께 독일 제국의 패배는 전쟁에 있어 외교와 경제의 중요성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단순히 전투를 잘한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게 되었으며, 지속되는 소모를 얼마나 잘 경제적/인력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지, 나아가 예상되는 소모를 얼마나 잘 선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 것이다.
본격적인 위장 개념이 탄생한 전쟁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경험으로 위장의 중요성을 알게 된 군인들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군복을 검게 만드는 식이었으나, 1차 대전부터 국가적으로 위장에 신경쓰기 시작했다. 우선 전쟁이 일어날 무렵부터 이미 각 국가의 군복은 어두운 색이었으나 충분치 않았고, 여러 색이 쓰인 위장 무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것의 선구자는 프랑스로, 화가들을 대량으로 징집해 손으로 페인트를 칠해 전차나 군복 등에 위장무늬를 그리게 했으며 카모플레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59] 위장용 모형이나 위장망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프랑스에서 등장했던 입체파가 위장 개념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60] 한편 영국과 미국은 독일의 잠수함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고심했으며, 노먼 윌킨슨이라는 저명한 해양 화가의 제안에 따라 다즐 카모플라주(dazzle camouflage)라는 독특한 패턴을 배에 칠하기 시작해 큰 효과를 보았다. 이 위장은 배 자체를 감추는 것은 아니고, 배의 진행 방향이나 속도를 알기 어렵게 만들어 어뢰를 제대로 조준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 것에도 역시 입체파의 작품들이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위장의 도색은 주로 여성들로 이루어진 도색 전문 부대가 도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오던 기마병의 급격한 쇠퇴가 시작된 시점도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서였다. 사실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기병대는 1차대전 때까지만 해도 의외로 꽤 많이 활약을 했을 뿐만 아니라, 기병이 중요한 병과로 자리잡고 있었다. 개전시기 독일제국만 해도 수십만의 기병대를 운용했고 이들은 상당한 활약을 했지만, 포장도로가 많은 서부전선에서 영국군의 온로드형 장갑차에게 갈려나가며 쇠퇴의 시작을 알렸다(동부전선에선 현역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 전투기, 비행기, 군함, 전차, 장갑차 등이 발달을 하기 시작하면서 기병은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는 기병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으나 2차 대전 종전 이후로는 기병이 완전히 쇠퇴하여 전장에서 은퇴를 했다.
7.3. 사회적
남성들이 전선에서 싸우자,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여성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프랑스 여성들은 전선에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 공업 및 상업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1915년 10월에는 탄약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이 7만 5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61]영국은 1915년 중반까지 자선, 복지에 여성 노동자들이 투입됐다고 한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탄약성을 설립한 후 1916년 7월에는 여성 노동자 수가 52만 명으로 증가했다고 한다.[62] 1918년 7월 영국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여성은 731만 명 이상이였다고 한다. 탄약 생산 공장에서 일하는 94만 7천 명은 전체 탄약 생산 노동자의 90%에 달했다고 한다. 교통 11만 7천 명과 농업 22만 8천 명의 노동자도 여성이였다고 한다.
이들 중 다수는 1917년 창설된 여군(Women's land Army)의 일원이였다고 한다. 1917년 7월 창설된 여성보조부대[63]의 뒤를 이어 11월에 왕립해군여성부대 창설, 1918년에 왕립공군여성부대를 창설했다고 한다. 1918년 2월 국민투표법이 통과해 30세 이상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고 한다.[64] 프랑스와 영국 외에 미국 같은 다른 나라들도 1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초기 페미니즘 담론이 싹트고, 여성에게 제도적인 권리가 주어졌다.
군주정을 끝낸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미 제1차 대전이 터지기 전에 유럽 바깥의 나라들의 군주정은 식민지배[65]나 내부 소요[66]로 무너지고 있었고 그나마 건재하던 유럽의 군주정들도[67] 이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4개의 제국이 망해 버리고 잠시 세워졌던 핀란드 왕국이나 독일 제국 내부의 수많은 제후국들의 왕정이 폐지되고 10여 개의 신생 공화국이 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지면서 20세기 왕정의 몰락의 신호탄을 울린 전쟁이기도 하다. 이후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알바니아의 왕정도 폐지되어 버림으로 유럽의 왕정은 서, 북유럽 지역의 일부 국가[68]를 제외하곤 무너진다.[69]
말단 시민들만 병사로서 죽은 게 아니라, 양심적이고 지성을 갖추었던 젊은 세대의 20~30대 엘리트(특히 프랑스)와 귀족 세력 역시 굉장히 큰 희생을 치렀다. 잘난 만큼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기에 능력 여하를 불문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장서서 전장에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수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며,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상당수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멀쩡하게 돌아올 수가 없었다.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해럴드 맥밀런은 이 시기 입은 부상으로 평생 장애와 함께해야 했으며, 명문대인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나 옥스퍼드 대학교의 전사자 비율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한다. 대학교를 방문하면 칼리지마다 출신 사망자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 기리고 있다. 당시 귀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계층의 참전자수 대비 전사자수 비율은 8:1이었는데 귀족층은 5:1이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참고 대부분의 젊은 엘리트와 귀족들이 공격의 선두에 서야 할 초급 장교로 복무했기에 이는 사실 필연적인 결과다. 이 시대를 봐도 후대인 2차대전을 봐도 선두에 서야 하는 초급 장교의 전사율은 일반 말단병보다도 훨씬 높다! 특히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 강했던 만큼 영국의 경우는 참전을 하지 않은 건장한 남성등, 특히 엘리트 가문들에게는 겁쟁이의 표식인 하얀 깃털을 주면서 조롱했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아들 경우 시력의 문제로 신체검사에서 탈락을 했으나 아버지의 빽을 써서 장교로 참전했지만 결국 전사한다.
또한 이로 인해 진정한 귀족계층 역시 몰락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제가 몰락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혁명가들이 귀족들을 증오해서 혁명을 한 게 아니라 앙시앵 레짐의 폐지를 요구한 것이기 때문에 자코뱅당의 공포정치기를 제외하면 귀족들에게서 빼앗은 건 특권과 부당하게 모은 재산 뿐이었으므로 실제로는 그 이후에도 구체제의 잔재가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남은 귀족 역시 전쟁이 터지면 앞서 나가는 모범을 보여서 나름대로 존중받기도 했다. 하지만 1차대전 중에 많은 귀족 가문의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바람에 대가 끊겨 진짜로 구 체제가 끝나버렸다.
반면에 사회의 지도층 또한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경험하고 그 참혹함과 끔찍한 만행들을 뼈져리게 체감했기에, 지도층에게도 전쟁에 대한 거부감을 심을 수 있던 것은 다 타버린 집에서 그나마 건진 셈이다. 미국은 그렇게 인명피해가 타 협상군에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지만, 대신 전후 참전군인의 처우 문제로 인해 보너스 군대 같은 말썽이 있었다.[70]
이렇게 국민들을 총알받이로 희생시켰으니 국가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국가의 지배세력들이 자본주의의 논리로 움직이므로 국가를 전복하고 공산 국가를 만들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살자고 주장했고, 자유주의자들은 국민의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극이 있으면 또 다른 극이 있듯 이와는 반대로 국가에게 모든 권력을 실어주고 국민들을 국가가 시키는 대로 총 단결하고 자신의 국가와 민족만 잘 살자는 극단적인 전체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전쟁에서 지면 모든 걸 잃지만 이기면 모든 걸 보상받을 수 있으니 군대가 국정을 좌우하는 군국주의가 패전국은 물론이고 일부 승전국에서도 보여졌다. 20세기 사상의 대립과 충돌의 시작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던 자유주의 무역에 기반한 100년의 세력균형 평화시대는 전쟁이 아니었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종결될 기미를 보였으며, 1차 대전은 단지 그 부산물이었지 결코 원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칼 폴라니가 대표적.
한편으로는 세계 평화에 기여한 면도 있는데, 히틀러를 비롯한 추축국 수뇌부들의 의도된 복수심과 침략적 동기로 시작된 2차 대전과 달리, 1차 대전의 개전 과정은 당시 기준으로 수뇌부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결과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 때문에 국제정치학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로 떠올랐다. 그 성과로 인류는 과거에 비해 대규모 총력전을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특히 바바라 터크먼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정을 연구한 저서인 <8월의 포성>은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고 인류를 구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71][72]
이때의 참전 용사들은 이전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이전 시대의 대다수 상이 군인들은 구빈원에 들어가 무능력자 취급을 받으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거나 구걸 등을 하며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1차 세계대전 전후로 사회복지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잡혀 참전 용사는 장애인 연금을 수령하고 병원에서 치료와 재활, 정부의 직업교육 등 어느 정도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7.4. 나라별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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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독립 전쟁을 통해 재협상 ii : 협상국의 일원이었으나 단독 평화 협정을 맺음 같이 보기: 파리 강화 회의, 베르사유 조약, 빅4 |
이 전쟁으로 인해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몰락한다.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은 정부가 무너져 각각 소련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변했고, 독일은 단치히와 주변 지역을 폴란드에게 넘겨주게 되며 " 폴란드 회랑"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폴란드에게 해상로를 열어주었지만 훗날 나치 독일은 이를 빌미로 폴란드 침공을 일으킨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어 그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약간의 영토를 받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이탈리아의 범위에 속하는 영역을 다 받진 못했으며, 이에 대한 불만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이어진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음에도 전쟁 이후 식민지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제국 해체의 발단이 된다. 특히 프랑스는 인구 측면에서 국가 발전의 근간이 되는 성인 청년 인구들의 1/3(부상자 포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전쟁 후유증은 심대했다.[73] 근대 이전까지 프랑스의 인구는 영국과 독일을 압도했지만 19세기 무렵에 독일에게 크게 추월당했고, 이런 상황에서 양차 세계 대전 동안 인구 증가가 정체되면서 영국에게도 뒤쳐진다.[74][75] 1990년대까지는 영국보다 적은 인구를 유지했으며 이는 프랑스가 과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다시 찾지 못하게 된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독일의 세력과 자신감이 커져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는데 일조하면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전쟁의 전초전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을 약체화 시키기에는 너무 허약한 조약이라는 이유로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면서 이 조약은 기껏해야 20년 휴전 협정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영국 측 수석대표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페르디낭 포슈와 반대로 케인스는 독일에 대한 전쟁배상금이 과도해서 독일이 복수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해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결국 남은 것은 더 큰 전쟁"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둘 다 일리 있는 게, 독일이 완전히 무너질 만큼 가혹하지도 않았고, 독일이 복수심을 품지 않을 만큼 관대하지도 않았던, 이도 저도 아니었던 조약이란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가혹하게 했다고 쳐도 독일 통합국가와 인프라가 유지되고 있는 이상 결국 언젠가는 국가 재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76] 결국 20년 뒤 세계 3위의 경제력을 회복한 독일이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유럽의 쇠퇴와는 비교되게 미국, 일본 등의 성장은 더욱 가속화된다. 미국은 영국을 넘어서 제일의 무역국가가 되고, 일본은 15위에서 8위로 도약한다. 미국은 유럽에 당시 가치로 100조 달러를 원조하고 달러가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을 대체해 세계 통화가 된다. 유일하게 일본만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당시 주요 산업이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비중이 바뀌었고 매년 50~70%씩 성장하며, 광업, 해운업, 무역업에서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된다. 러일전쟁때 까먹은 돈은 이때 완전하게 회복이 됐고, 당시 조선업은 세계 3위 수준으로 올라갔으며, 태평양( 남양청)과 중국에 식민지를 획득했다.[77]
열강의 식민지들이 이 전쟁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종전 전에 국회에서 공표한 14개조 평화원칙, Fourteen Points에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어 민족의 운명은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한반도를 포함한 식민지 내의 독립 운동에 큰 불을 지폈다. 또한 소련의 레닌은 이 전쟁을 극단적 자본주의인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규정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게 되는데 이런 공산권의 지지 또한 혁명에 불씨를 당기는 데 일조하게 된다. 식민지를 전세계에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들도 1차 대전 후에는 대외 영토를 그나마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지만[7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이마저도 유지시킬 힘이 남아 있지 않아 대부분 독립시켰다.
8. 참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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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주요 참전국 정상들. 글 위에 있는 4명이 동맹국의 군주들[79], 밑에 있는 사람들이 협상국의 군주들이다.[80]
색 분류 | |
동맹국 | 협상국 |
국명 | 날짜 | 참전 과정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1914년 7월 28일 |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對세르비아 최후통첩이 거부되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
세르비아 왕국 | 1914년 7월 28일 |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여 침공을 당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전쟁으로 뛰어들었다. |
러시아 제국 | 1914년 8월 2일 | 같은 슬라브 국가이며 후견국이기도 했던 러시아에게 세르비아는 발칸 전쟁의 영향으로 더욱 중요성이 커졌고,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러시아는 즉시 총동원령을 선포했으며 이를 해제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자 독일의 선전포고를 받게 된다. |
독일 제국 | 1914년 8월 2일 | 러시아가 세르비아 지원을 위해서 총동원령을 선포하자, 삼국 동맹[81]에 의거하여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
프랑스 제3공화국 | 1914년 8월 3일 |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 독일이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며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물론, 프랑스도 삼국협상[82]에 의해 대독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벨기에 | 1914년 8월 3일 |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킨 독일군이 벨기에 영토를 통과하려는 것을 벨기에군이 거부, 끝내 영토통과 승인을 받지 못하게 되자 독일은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한다. |
영국 | 1914년 8월 4일 | 삼국협상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키려던 영국이었지만,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을 하자 이를 이유로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
몬테네그로 왕국 | 1914년 8월 5일 | 발칸반도 남부의 소왕국이었던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언어, 문화, 종교적 동질성 및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한 반감 등으로 인해 세르비아를 지지한다. |
일본 제국 | 1914년 8월 23일 |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영일동맹의 의무를 들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83][84] |
오스만 제국 | 1914년 11월 1일 | 영국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이 오스만이 주문한 신조 전함 2척을 먹튀를 하자 반영여론이 대폭발. 반대로 피할 곳이 없어서 오스만으로 도망친 독일해군 지중해전대 소속 순양전함을 공짜로 준다는 빌헬름 2세의 선언에 친독 여론이 강해진다. 그래도 정부는 중립 입장을 견지했으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과 오스만 깃발을 단 독일 해군의 흑해 러시아 항구 공격으로 인해 결국 세계 대전에 휩싸이게 된다. |
아시르 이드리드 토후국[85] | 1915년 5월 사이 | 영국의 전쟁수행에 합류 |
이탈리아 왕국 | 1915년 5월 23일 | 본래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대전 직후에는 그 의무를 내팽개치고 중립을 선언[86]했다. 이후 전황의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협상국의 승리가 유력하다고 판단[87][88], 영국과 비밀 협상을 맺어 말을 갈아타고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
불가리아 왕국 | 1915년 10월 14일 | 전통적으로 친 러시아, 반 오스만 국가였으나 국왕 페르디난트 1세는 독일 출신인지라 친독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불가리아 여론도 제2차 발칸 전쟁의 패배로 인해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빼앗아 간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복수하자는 보복주의가 팽배했다.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발칸 전쟁 당시 불가리아군의 활약과 불가리아의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하여 불가리아를 포섭하려 시도했으나 불가리아는 참전 조건으로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갖고 있는 마케도니아 중 일부 지역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눈치를 봐야 했던 협상국과 달리 두 나라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동맹국은 온갖 당근[89]으로 적극적으로 불가리아를 꼬드겼고 이에 넘어간 불가리아가 동맹국과 우호조약을 맺은 후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하면서 동맹국에 가담했다. |
네지드 하사 토후국[90] | 1915년 12월 16일 | 영국과의 다린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과 전쟁개시 |
포르투갈 제1공화국 | 1916년 3월 9일 |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 이후 수백여 년간 영국의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포르투갈은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16년 2월 말엽부터 자국령에 들어오거나 항행 중인 독일 선박들을 나포하고 화물을 압류했다. 당연히 이에 격분한 독일이 포르투갈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
헤자즈 왕국 | 1916년 6월 | 당시 메카 태수였던 후세인 빈 알리는 협상국 측에 '오스만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준다면 아랍인들의 단일국가와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라는 약속을 받았고, 후세인 빈 알리는 이에 승락, 자신의 아들 파이살, 후세인과 함께 네지드 토후국 및 시리아와 이라크 방면 아랍 반란군과 함께 아랍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 |
루마니아 왕국 | 1916년 8월 27일 | 3년여 동안 중립을 지켜온 루마니아는 남쪽 불가리아의 위협, 동부전선에서 계속 죽을 쑤는 오스트리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동맹국에 불리해지는 전황 등을 토대로 전리품 획득을 위해서 늦게나마 참전을 결정하고 브루실로프 공세를 틈타서 오스트리아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겨우 1년 만에 독일군에게 본토를 다 털리고 항복한다. 다만 전쟁 종료 후에는 승전국으로 영토가 2배로 늘어나는 대박을 쳤다. 단, 이게 그냥 조약으로만 얻은 것은 아니고, 종전 직후 벌어진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점령한 영토를 조약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
미합중국 | 1917년 4월 6일 | 의외로 친독, 반영 세력도 많았으며[91] 무엇보다 먼로 독트린 때문에 유럽의 전쟁에 참여할 수 없어 유럽 국가들이 싸우든지 말든지 우리와는 상관없고 그냥 돈이나 벌자는 태도였다. 그러나, 독일의 U-Boat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어 미국인들이 휘말려서 죽게 되자 대독감정이 악화되었으며, 테러가 벌어지고,[92] 심지어 독일이 멕시코를 꼬드겨서 미국에 대한 공격을 사주했다는 내용의 치머만 전보가 공개되자 미국 국내의 여론이 대폭발하게 되면서 마침내 협상국으로서 참전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런 여론악화의 이면에는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에게 돈을 빌려주고 외상으로 물건을 제공했던 미국의 자본가들이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하면서 망해버리면 빌려준 돈을 떼먹힐까봐 우려했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테러 사건과 치머만 전보 사건이 미국의 참전 여론을 부채질한 것도 사실이다. |
쿠바 | 1917년 4월 7일 | 미국의 전쟁수행에 합류 |
그리스 왕국 | 1917년 6월 30일 | 당시 친독 성향이었던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계속 유지하길 원했지만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의 이익을 위해선 궁극적으로는 협상국에 가담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렇게 그리스는 혼란스러운 국내 사정 때문에 세르비아의 지원 요청이나 협상국의 참전 요구를 모두 묵살했다. 이렇게 불안한 중립을 유지하던 와중에 갈리폴리 상륙작전이 실패하고 불가리아가 갑자기 동맹국에 가담해 세르비아를 공격하자 포위당할 위기에 빠진 세르비아군은 알바니아를 통해 그리스로 후퇴했고 불가리아군이 아직 전쟁 준비가 덜 된 그리스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베니젤로스는 영-불 연합군이 테살로니키에 상륙, 세르비아를 지원할 것을 요청했다. 베니젤로스의 독단에 격노한 국왕 콘스탄디노스는 베니젤로스를 해임, 신정부를 구성할 것을 지시했으나 이미 테살로니키에 상륙한 영-불 연합군은 전쟁 준비에 나섰으며 불가리아군은 이에 대응하여 그리스령 마케도니아를 침공한다. 이렇게 되니 정작 중립을 선언한 그리스 영토에서 협상군과 동맹군이 전투를 벌이는 촌극이 펼쳐지고 해임된 베니젤로스는 협상군이 점령한 테살로니키로 이동해 임시정부를 수립, 협상국 측에 가담하고 그리스 여론도 친베니젤로스파와 친국왕파로 분열되어 버린다. 결국 협상국의 지지를 받은 친베니젤로스파가 승리해 1917년 6월 콘스탄디노스는 퇴위, 둘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했으며[93] 정권을 잡은 베니젤로스는 정식으로 동맹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그리스는 협상국 측으로 참전한다. |
태국 | 1917년 7월 22일 |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서부 전선에 1284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
중화민국 북양정부 | 1917년 8월 14일 | 제3혁명과 위안스카이 사망으로 공화국이 된 중국은 독일로부터 빼앗긴 조차지의 이권과 중국 영토를 다시 되찾고, 새 국가 건설에서 세계열강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협상국으로 가담한다.[94] 그러나 독일의 조차지는 사라졌었고 중국의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95] |
브라질 | 1917년 10월 26일 | 공식적으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따른 피해, 그에 따른 반독여론 증가였지만…. 브라질은 당시 세계 커피생산량의 90% 이상을 독점하는 커피 플랜테이션 국가였는데, 1차 대전 직후 동맹국에 대한 해상봉쇄로 커피판로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면서 수출액이 감소했다. 이후, 미국과 영국이 "커피 재고 우리가 다 사줄 테니까 독일에다 선전포고해."라고 제안했고 브라질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외에도 라이베리아, 파나마, 쿠바, 과테말라,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아이티, 온두라스, 에콰도르, 볼리비아, 우루과이, 페루가 협상국에 속해 있었지만 그냥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니까 따라서 하거나 형식상으로만 선전포고를 한 경우로 기껏해야 미국의 전쟁수행에 합류한 수준이다.
협상국에 합류한 국가들이 더 있는데 대표적으로 안도라, 네팔 왕국, 산마리노, 모나코 등이 있는데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나마 네팔의 경우 수십명의 병력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또 영국의 식민지 또는 보호령이었던 캐나다, 인도, 뉴펀들랜드 자치령,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 로디지아, 몰타 등등도 전쟁에 합류했다. 또 국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의용군에 지원한 곳은 아르메니아, 폴란드, 헤자즈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있다.
기타 동맹국에는 다르푸르 술탄국, 데르비시국[96], 자발 샴마르 토후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이 있으나 선전포고 시기가 모호하며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도 잠시 독일에게 점령되었지만 곧 독일이 패망했으므로 제외한다.[97]
8.1. 중립국
도중에 침범 받고 중립 태도를 바꾼 나라들은 기재되지 않는다.전쟁의 주 무대가 중부 유럽인 만큼 북해와 발트해 너머의 북유럽 국가들이 주로 중립국을 표방했다.
9. 기타
9.1. 명칭
전 세계로 전장이 넓어짐과 동시에 총력전의 양상을 띤 최초의 전쟁이기 때문에 세계 대전이란 이름이 붙었다.[98] 세계 대전이란 명칭은 그 당시에도 붙은 이름이었으며, 지금도 'The Great War'(대전쟁)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다.[99]물론 18세기 유럽은 늘 전쟁이었으며, 특히 7년 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나폴레옹 전쟁도 대규모에 전장은 컸지만, 빈 회의 이후로 약 100년간 유럽 열강들 간의 전투는 크림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전부라서 더욱 충격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전쟁이 잦았던 유럽 국가들 간의 관계에서 착안한 것인지, "The war to end all wars(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100]라는 명칭도 붙었다. 전 계층이 전쟁에 참가했으므로 국민전쟁(People's War)이라고도 한다.
전쟁 기간 동안 발생한 전사자는 약 1000만 명이며 학자에 따라서는 이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국가라는 것을 지적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이라는 뜻으로 제국전쟁(Imperial War)[101]이라고도 부른다.
9.2. 최후의 참전 용사들
- 동맹국 최후의 참전 용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프란츠 퀸스틀러(Franz Künstler)로 1900년 7월 24일 태생이다. 1918년 2월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했으며 종전 이후에도 1921년까지 헝가리군에서 복무했다. 2차 대전 기간 중에는 1942년 연락병으로 7개월간 복무했으며 전후에는 박물관에서 근무하다 헝가리가 공산화 되면서 독일계였던 그는 추방당하게 된다. 이후 독일에서 살다 2008년 5월 27일 향년 107세로 사망했다. 오스만 제국군 출신 마지막 생존자인 야쿠프 사타르(Yakup Satar)가 2008년 4월 2일 향년 110세로 사망한 뒤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 1차 대전을 상징하는 참호전을 겪은 최후의 참전 용사는 헨리 존 패치(Henry John Patch)로 1898년 6월 17일 영국 서머싯에서 태어났다. 1916년 10월에 입대했고 1917년 6월 프랑스로 도해해 서부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1917년 9월 22일 전투 중 부상을 입었고[102] 1917년 12월 23일에 영국으로 돌아와 요양을 하던 중 종전을 맞았다. 종전 후에는 배관공으로 일했으며 2차 대전 중에는 소방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배관 관련 회사를 운영했으며 2009년 7월 25일 향년 111세로 사망하여 1차 대전 중 참호전을 경험한 최후의 참전용사로 기록되었다.
- 전투에 참여한 최후의 참전 용사이자 남성으로 참전한 최후의 생존 참전용사는 영국 출신의 클로드 촐스로 1901년 3월 3일 태생이다. 1915년 4월 14세의 나이로 해군에 입대 했으며 1차 대전 종전 이후에도 복무하다 1931년 제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군에 복귀하고 호주에서 복무하던 중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침략에 맞섰다. 그 후 2차 대전 종전 후에도 군에 남아 있다 1956년에 55세의 나이로 제대했다. 이후 2011년 5월 5일 향년 110세로 사망함으로서 1차대전 최후의 남성 참전용사이자 실제 전투에 참전한 마지막 생존 전투원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또한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모두 참전한 참전용사 중 마지막 생존자이기도 하다.
- 비전투원 최후의 참전 용사이자 1차 대전 최후의 참전 용사는 영국의 플로렌스 그린으로 1901년 2월 19일 런던에서 태어나 2012년 2월 4일 향년 110세로 사망했다. 플로렌스는 1차 대전 기간인 1918년 영국 공군으로 입대해 비행장에서 복무했지만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을 끝으로 1차 대전 참전 용사는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9.3. 전쟁 관련
- 공식적으로 밝혀진, 1차 대전 당시 최후의 사망자는 캐나다군인 조지 로렌스 프라이스(George Lawrence Price) 육군 포병 이병이다. 그는 1918년 11월 11일 종전을 단 2분 남기고 독일 육군 저격수에게 총을 맞아 전사했다. 다만 이날 그 한 명만 죽은 것은 아니고 종전까지 양측 도합 사상자 1만 1천여 명이 발생했다. 독일군이 예상보다 악착같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또 조지가 죽기 전에는 오전 10시 50분, 프랑스 참호의 오귀스트 트래비숑이라는 마흔 살 연락병이 11시에 따뜻한 음식이 나온다는 소식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몇 분 동안 뛰어다니던 오귀스트도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맞고 죽고 말았다.
- 이 시기에 국가들은 최신 무기뿐 아니라 구식 대포는 물론이고 군마, 군견, 전서구, 낙타 등 동원할 수 있는 건 다 동원해서 전쟁을 치렀다. 오죽하면 동물원의 코끼리를 징발해서 물자 수송에 쓸 정도였다. 그래서 1차 대전은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많은 동물을 동원한 전쟁으로 기록을 세웠다. 사진들 이후 벌어진 2차 대전에서는 기계화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1차 대전만큼 동물이 많이 동원되지는 않았다.
- 프랑스와 영국은 미 원정군 병력을 전쟁 경험이 있는 자신들의 지휘 아래 보충 병력으로 사용하고자, 또 참호전을 아는 만큼 미 원정군 병력을 참호전에 적응시키고자 했지만 퍼싱을 위시한 미국은 독자작전권을 내세우며 거부했다.[103] 하지만 당시 흑인으로만 이루어진 미 육군 제369보병연대만은 프랑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줬다. 이들은 프랑스 육군 장비를 지급받기도 했으며 프랑스 육군 16사단이나 161 사단에 배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들은 열심히 싸웠으며 백명 단위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의 여러 명예훈장들을 받았다.
-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1차 대전은 유색인종도 수백만 명이 참여했던 전쟁이다.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200만 명 이상이 참전했으며 독일과의 인구 차이[104]와 인적 피해로 고심하던 프랑스는 세네갈 등지에서 시민권과 훈장을 미끼로 아프리카인 자원병들을 모아 유럽의 서부전선에 참전시켜 수만 명이 사망했다. 프랑스는 이들을 거칠고 야만적인 총알받이 전사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위험한 임무에 우선 투입했고, 부대의 사망률이 프랑스 백인들보다 월등히 높아 항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영국은 영연방에서 수십만을 모집했고 일원이란 자부심과 자치권, 돈 등 다양한 동기를 위해 참여했다. 그나마 이들의 사망률은 영국 백인들보단 절반 수준으로 낮았다. 중국도 중국노동여단(영어: Chinese Labour Corps, 중국어: 中国劳工旅)이란 이름으로 노무자 수십만 명을 보내 전쟁터에서 노동력을 제공했다. <세계 대전: 제국의 잊혀진 병사들(The World's War: Forgotten Soldiers of Empire)> 등의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러한 유색인종 병사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참고로 독일은 백인이 아닌 인종을 전쟁에 투입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강해 적극적으로 식민지의 병사들을 유럽으로 데려오지 않았다.[105]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군의 세네갈인 부대는 라인란트 등에 주둔했고 라인란트인들은 아돌프 히틀러나 오이겐 피셔같은 우생학을 신봉하는 나치에게는 아리아인의 피를 더럽히려는 음모의 결과로 받아들여져 불임 수술 등을 당했다.
- 특히 인도인들은 민족 자결권과 정치적 지위 향상, 경제적 동기를 목표로 1차대전에 대규모로 참전했다.[106] 영연방전쟁묘지위원회(CWGC) 자료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인도인들이 모두 110만 5천 명 동원되었다. 프랑스 일대 서부전선에 13만 8천 명,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동전선에 65만 7천 명,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14만 4천 명이 동원됐다. 일부는 갈리폴리 전투와 동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특히 중동 지역에 투입된 영국군의 상당수는 인도인이었다. 1916년 4월 메소포타미아 쿠트 지방에서 오스만 제국에 붙잡힌 영국군 포로 1만 1600명 중 대다수는 인도인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인도는 전쟁 물자 수송을 담당하고 간호사들을 전선에 투입시키는 등 비군사적 영역에서도 큰 공헌을 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7만 4천여 명이 사망하고, 6만 9천여 명이 부상당했다. 인도 뉴델리에는 1차대전 전몰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인디아 게이트’라는 추모비가 있다. #
- 서양권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을 직접 겪어 본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집안에 통조림을 많이 쟁여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전쟁을 겪었던 젊은 시절에 먹을 것이 없으니까 가족들이 매일 굶어야 했고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다고... 이렇다보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위기 상황마다 통조림의 인기가 올라간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경우도 경제 수준 대비 통조림 유통량이 많다고 하는데 이것도 한국 전쟁의 영향이다.
- 장성 중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필리프 페탱,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각국에서 구국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페탱과 힌덴부르크는 전쟁 후에 심각한 정치적 실책을 저지르게 되어 현대의 평가는 좋지 못하다.[107]
- 독일군은 파리 대포(Paris-Geschütz)라는 이름의 초대형 대포들로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영토 안에서 파리를 포격했다. 이 대포의 사거리는 무려 130 km. 파리 대포는 프랑스에게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안겨주었으며, 이때부터 제2차 세계 대전에 등장한 구스타프 열차포의 싹수가 보였다.
- 전쟁 초기 리에주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독일군은 신무기인 크룹사의 420 mm 곡사포를 동원했다. 이는 곧 빅 베르타(Big Bertha)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사람들은 종종 다른 독일군의 대형 포도 그냥 빅 베르타라고 불렀다. SF RTS게임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에 등장하는 초장거리 방어탑인 빅 베르타는 여기에서 명칭을 따왔으며,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 Big Bertha라는 치트키를 입력하면 말도 안되게 긴 사정거리와 데미지를 지닌 특수 투석기 하나가 소환된다.
- 1차 세계 대전 당시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은 붉은 남작(Der Rote Baron)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Manfred von Richthofen)이다.
- 안도라와 코스타리카도 협상국으로 참전했지만 종전 때 깜빡해서 조약 서명국이 아니었다. 이러면 국제법상 계속 전쟁하는 걸로 취급된다. 2차대전에도 역시 참전한 안도라와 코스타리카 중 코스타리카는 다행히 2차대전 종전 때 승전국으로 서명했지만 안도라는 이번에도 깜빡한다. 다만 안도라의 외교권을 프랑스가 행사하고 프랑스가 독일의 항복을 받아줬기 때문에 실제로는 잠정적으로 종전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쨌건 이 코미디 같은 상황은 1958년에 안도라가 일방적으로 종전을 선언하고 독일에서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끝나게 된다. 국제법으로만 따지면 1차 대전은 1958년까지 이어진 셈이다.
9.4. 문화 관련
-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Otto Dix)는 전쟁에 참여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에 강도높은 표현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반면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는 위장무늬를 그리다가 베르됭 전투에서 사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에곤 실레는 1년간 징집을 피해다녔음에도 운 좋게 프라하에서 복무할 수 있었지만 종전 직전 독감으로 사망. 영국의 에릭 케닝턴(Eric Kennington)은 의병 제대를 하고도 재입대 하며 종군 화가로 일했다.
-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활동한 혐의로 1916년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고 강사직에서 쫓겨났으며, 1918년에는 미국의 참전에 대해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한편 그의 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탈장으로 면제를 받았으나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때문에 오스트리아 군에 자원해서 입대했다. 게다가 거기서 더 나아가 최전선의 관측병으로 자원하는 등 만용에 가까운 행위를 했으나 운 좋게 살아남았고,[108] 장교로까지 승급했으며 전쟁터에서 중요한 철학 논문인 <논리철학논고>까지 집필하는 업적을 이룬다. 그러나 러셀의 지인이었던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아들 에릭 화이트헤드는 전쟁에 자원해서 입대했다가 사망했다.
- 미국의 모더니즘 시를 대표하는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1차 대전에서 서구 문명에 환멸을 느끼고 관련된 시를 여럿 발표했다.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나 영국을 거쳐 이탈리아에 정착한다. 그는 1차 세계 대전을 유대인 자본가들로 인한 전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고대 그리스, 로마를 질서와 존엄이 존재했던 문명으로 동경한 탓에 두 취향이 겹치는 파시즘과 나치즘을 찬양하며 미국을 비판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 두 세력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원흉이었고, 전후 에즈라는 미국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10년간 정신병원에 갇혔다가 동료 문학인들의 도움으로 나올 수 있었다. 1차 대전의 환멸로 인해 완전히 잘못된 길로 들어가버린 아이러니한 사례. 다만 미국에서 에즈라의 시는 여전히 부정할 수 없는 걸작들로 취급된다.
- 전쟁소설의 명작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작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실제 1차대전 참전자다. 1929년 첫 출간 후 1년만에 실사영화로 제작되었다.
- 참호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야 했던 병사들은 심심풀이로 탄피, 방탄모 등에 조각을 했다. 이는 후에 ‘참호 예술(trench art)'이라고 불리며 수집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트렌치 아트는 1차 대전 병사가 만든 것 만이 아니라 전쟁 중의 민간인이 제작한 것, 전후에 만들어진 기념품, 나폴레옹 시절의 작품 등을 광범위하게 지칭하기도 한다. 만화가이자 디즈니 그룹의 창시자 월트 디즈니는 빈곤했던 젊은 시절, 철모를 모아 직접 조각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 팔아 돈을 벌기도 했다.
- 긴 참호 생활에서 낙 중 하나는 라디오를 듣는 것이었는데, 전선마다 라디오 전파가 잘 잡히는 정도가 매우 달랐다. 가령 서부 전선의 경우에는 북쪽은 파리 방송국의 전파가 잘 닿는가 하면, 남쪽 산악 지역은 오히려 라인강 변 독일도시들에서 쏘는 라디오 전파가 더 잘 닿는 식. 때문에 자국의 라디오보다 잘 잡히는 적국의 라디오를 듣는 경우도 많아서 대치하는 양측의 군대가 서로의 가요를 들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유명해진 대표적인 노래가 티퍼레리까지는 길이 멀구나.
- 트렌치 코트(trench coat)는 협상군이 겨울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참호의 병사들에게 지급한 옷이 시초다. 버버리 사 창립자인 토머스 버버리가 영국 육군성의 요청을 받고 레인코트로 이 코트를 개발했다 하여 버버리(Burberry) 코트라고도 한다. 전후 인기를 끌어서 토머스 버버리는 부자가 되었다.
- 판화가 케테 콜비츠는 아들이 1차대전에서 전사한 이후 반전주의와 평화주의의 메세지를 담은 판화와 조각들을 제작했다.
9.5. 여담
- 2차 대전에 비해 인지도나 관심이 떨어진다. 한국도 마찬가지. 전쟁 초기 1년 동안만 마른 전투, 타넨베르크 전투 등 점령과 방어 등이 일어났지 나머지 3년간은 참호에서 밀고 당기고만 하는 소모전의 연속이었으며, 주 전장도 유럽으로 국한되었다는 평가가 대세다. 이는 1차 대전에 대해 주로 전쟁사적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을 뿐, 외교사와 정치사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그 배경과 전후 결과물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이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흥미의 차이일 뿐 딱히 비판받을 만한 요소는 아니다.
- 한국에선 2차 대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지기에, 독일이 일으킨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흔히, 독일이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 이런 식. 이 문서 제일 위에 있는 개요를 봐도 알 수 있지만, 1차 대전은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상대로 선전포고 한 게 시작이다. 다만 오스트리아는 전쟁 내내 별다른 힘을 못 쓴데다, 동맹국의 핵심은 독일이었으며 독일로 인해 세계대전의 규모가 커졌고,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데다, 나중에 터진 2차 대전은 독일이 일으켰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일이 (선제적이라곤 하나) 프랑스에게 먼저 선전포고하고, 그 과정에서 중립국 벨기에를 건드려 영국까지 끌여들여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커진 건 사실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한 1차 세계대전의 이미지인 서부전선의 총성을 울린 것은 독일이 맞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 한 이후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 함으로써 오스트리아 vs 세르비아로 끝난 걸 세계대전으로 제대로 판 키운 건 러시아다.
- 2차 대전보다 수십 년 이른 시기에 일어난 전쟁이라서 연상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전쟁도 2차 대전처럼 당시 인물들의 육성이 남아 있다. '전쟁의 전개' 문단의 영상에도 나온다.
-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2차 대전과는 달리, 네덜란드는 전쟁 끝까지 중립국으로 남았다. 이는 1830년 벨기에 분리 이후에 네덜란드는 국제 분쟁에서 중립을 철칙으로 삼았기 때문. 이웃 나라 벨기에는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독일군의 침공을 받아 협상국의 대열에 섰지만, 독일군은 네덜란드는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 네덜란드 내부에서는 친독파, 친불파들이 각각 상당한 세력을 보유했지만, 전통적인 국가 정책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중립정책은 1940년까지 지켜졌지만, 네덜란드도 2차대전 때는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고 연합국의 대열에 섰다.
- 2011년 현지 시각으로 5월 5일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자 중 전투를 경험한 최후의 생존자였던 영국인 클로드 스탠리 슐스(14살 때 해군으로 참전)가 호주에서 사망했다. 기사 친지들의 증언에 의하면 슐스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했기에 평생 동안 전쟁을 혐오했다고 한다. 전투를 경험하지 않은 최후의 생존자 플로렌스 베아트리스 그린(영국 공군 여성 항공대)도 2012년 2월 4일자로 사망했다. 이것으로 '누군가가 경험한 1차 세계 대전'은 21세기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1918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까지 모두 사망한다면 1차 세계 대전기 사람은 모두 사라진다.
- 2차 세계 대전과 시간 차이가 얼마 안나는 만큼 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이를 기반으로 후일 2차 세계 대전에서 각국의 중요인물이 되어 다시 충돌하게 되었다. 우선 영국에선 윈스턴 처칠이 그러했다. 명성을 떨친 2차 대전 때와 다르게 1차 대전 때는 실책을 연발했다.[109] 전쟁 전에 해군 장관이었던 그는 오스만이 영국과의 동맹을 제안했을 때 반대한 관료였고, 영국에서 건조되던 오스만의 전함을 압류해 오스만을 적으로 돌렸던 장본인이다. 처칠은 전쟁 중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입안했지만 이 작전의 거대한 실패로 정치적 인생이 끝나 의전직에나 있다가 퇴임해 전방의 육군 중령이 되어 활로를 모색해야 했었다. 그나마 금수저라 곧 군수장관으로 임명되어 당시 막 개발되던 전차의 개발을 지지해 주는 등의 공적으로 그나마 만회했다.
- 훗날 튀르키예의 국부가 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위의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오스만의 대령으로 큰 전공을 세워 장군으로 승진하며 큰 명성을 얻고 대전 직후에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다. 어떻게 보면 처칠이 튀르키예와 아타튀르크를 살린 셈.
-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110] 연락병이라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며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에게 이 훈장이 수여되어야 한다고 추천한 사람은 유대인 장교였다. 이 사람은 2차대전 때까지도 살아 있었는데, 은혜를 기억한 히틀러가 미국으로 이주하도록 도와주었고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에서 편안히 여생을 마쳤다.[111]
- 더글라스 맥아더는 이 전쟁에서 42사단의 참모로 활약해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 의외로 영상 자료도 꽤 남은 편이지만 당대 기술의 한계로 무성필름이다.
- 독일의 물리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전쟁이 발발하자 40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일 육군 포병 장교로 임관하여 전선으로 나가서도 물리학 연구를 멈추지 않고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일부 해석해를 내놓는 업적을 세웠지만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던 1915년에 천포창[112]이라는 피부병에 걸려서 1916년에 포츠담에서 사망했다.[113]
- 개기일식을 이용한 중력렌즈 효과 관측을 통해 일반 상대성 이론을 검증하려던 시도가 이 전쟁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다. 1914년 8월 21일에 러시아 제국 서부를 통과하는 개기일식이 예정되어 있었고[114] 이 기회를 활용하여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세 개의 관측팀이 관측을 시도할 예정이었는데... 하필 한 팀이 독일 팀이었고 관측 준비 중에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해당 관측팀이 그대로 러시아에 억류되었고 나머지 두 팀은 기상 문제로 관측에 실패했다.[115] 결국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전쟁이 끝난 1919년에야 일식을 통한 검증에 성공할 수 있었다.
-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 진영도 대체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대체적으로 협상국에 지지를 보내는 편이었다.
- 2018년 11월 11일 프랑스에서 종년 100주년의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 기사
10. 연표
1914년 | |
날짜 | 사건 |
6월 28일 | 사라예보 사건 :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 |
7월 5일 |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의거해 개전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지 천 명 |
7월 28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 세르비아 침공 |
7월 29일 | 러시아 제국, 세르비아 왕국을 위해 총동원령 발동 |
8월 1일 |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 |
8월 3일 | 독일 제국, 프랑스에 선전포고, 벨기에 침공. 슐리펜 계획 발동 |
8월 4일 |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
8월 6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 |
8월 23일 | 독일군, 프랑스 침공 시작 |
8월 23일 | 일본 제국, 영일동맹에 근거해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 |
8월 25일 | 일본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 |
8월 26일 | 러시아군,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참패 |
8월 28일 |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 |
9월 6일 | 마른 전투 개시 |
9월 11일 | 호주군 독일령 뉴기니 침공. |
9월 14일 | 마른 전투의 실패로 독일군 총참모장 소 몰트케가 해임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으로 교체. |
10월 18일 | 1차 이프르 전투. 협상군이 방어에 성공하다. |
10월 28일 | 독일 경순양함 SMS 엠덴, 영국령 페낭 항구 습격 |
10월 29일 | 오스만 제국이 독일 제국과의 동맹에 의거해 참전. 서부 전선에서는 참호전 양상 |
11월 2일 |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 캅카스 방면 공세 시작 |
11월 6일 | 영국군이 오스만령 이라크에 상륙. |
11월 7일 | 일본군, 중국 칭다오에 있는 독일군 기지 함락 |
11월 9일 | 독일 경순양함 SMS 엠덴, 영국군에 격침 |
12월 25일 | 크리스마스 휴전 |
1915년 | |
1월 19일 | 제1차 체펠린 호의 런던 공습 |
1월 24일 | 도거 뱅크 해전. 패배 후 독일해군은 신중론으로 전환. |
2월 19일 | 영국군, 다르다넬스에 있는 튀르키예군 요새 폭격 |
4월 25일 | 갈리폴리 전투 시작 |
5월 7일 | 독일군, U보트로 영국의 루시타니아 호 격침 |
5월 23일 | 이탈리아 왕국, 3국 동맹을 깨고 협상국에 참전. 전 동맹국인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 전면공세 시작 |
6월 23일 |
이탈리아군, 오스트리아-헝가리령 슬로베니아 공격. |
8월 5일 | 독일군,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바르샤바 점령 |
9월 25일 | 루스 전투 개시 |
12월 19일 | 협상국, 갈리폴리에서 후퇴 |
1916년 | |
1월 27일 | 영국, 징병제 개시 (이전까지 지원병제) |
2월 16일 | 러시아군, 오스만 제국의 에르주룸 점령 |
2월 21일 | 베르됭 전투 시작 |
4월 15일 | 러시아군, 오토만 제국의 트레비존드 점령 |
4월 29일 | 메소포타미아의 영국군, 쿠트에서 오스만군에게 항복 |
5월 31일 | 유틀란트 해전 |
6월 4일 | 러시아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대해 브루실로프 공세 개시 |
6월 10일 | 아랍 반란 시작 |
7월 1일 | 솜 전투 시작 |
8월 10일 | 브루실로프 공세 성공적으로 종결 |
8월 29일 | 독일군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해임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취임. |
9월 15일 | 영국군, 솜에서 세계 최초로 전차를 대량으로 운용 |
11월 21일 | 독일군, 기뢰로 영국의 브리타닉 호[117] 격침 |
12월 7일 |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이 됨 |
1917년 | |
2월 1일 | 독일 제국, 무제한 U보트 작전 개시 |
3월 8일 | 러시아 제국에서 2월 혁명 발발, 니콜라이 2세 퇴위. 러시아 제정 붕괴, 임시 정부 수립 |
3월 9일 | 러시아군의 캅카스 전선 붕괴.[118] |
3월 11일 | 영국군이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바그다드 점령. 오스만 제국은 페르시아 작전을 중단.[119] |
4월 6일 | 영국의 항구로 향하던 미국 수송선들이 U보트에 격침되자 미국,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 |
4월 9일 | 2차 아라스 전투 시작 |
4월 16일 | 프랑스군, 니벨 공세를 시작하나 실패 |
7월 1일 | 러시아 임시 정부, 케렌스키 공세를 실시하나 참패 |
7월 6일 | 이프르 부근에서 영국군이 공세를 감행한 메시네 전투 시작 |
7월 31일 | 제3차 이프르 전투 시작 |
10월 24일 | 카포레토 전투. 이탈리아군, 오스트리아군에 참패 |
11월 6일 | 영국군, 서부 전선 공세 개시 |
11월 7일 | 러시아 공화국에서 10월 혁명, 임시 정부 붕괴, 볼셰비키 집권 |
11월 10일 |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에서 30 km떨어진 피아베 강까지 퇴각 |
11월 20일 | 캉브레에서 영국군이 전차 380대를 투입하여 승리 |
12월 5일 | 러시아-독일 제국, 휴전하고 정전 협상에 들어감 |
12월 9일 | 영국군,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 점령 |
1918년 | |
2월 18일 | 독일군, 러시아 공격 재개 |
3월 1일 | 독일군, 키예프 점령 |
3월 3일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러시아-독일 정전. 러시아, 협상국에서 공식 탈퇴 |
3월 21일 | 서부전선 독일군 최후의 공세인 루덴도르프 공세가 시작되다 |
3월 29일 | 프랑스, 포슈 원수를 협상국 서부 전선 최고 사령관에 임명 |
4월 9일 | 독일군,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에서 공세 시작 |
5월 7일 | 동맹국과 루마니아 왕국의 부쿠레슈티 조약 체결. 루마니아의 반식민지화. |
7월 15일 | 독일군 2차 마른 전투 개시하나 패배, 독일군 후퇴 |
8월 8일 | 협상군 최후의 공세 백일 전투 개시. 독일군의 전선 붕괴 시작 |
9월 2일 | 독일군, 힌덴부르크 선으로 퇴각 |
9월 14일 | 오스만군, 바쿠점령 |
9월 19일 | 영국군, 메기도 전투에서 승리 |
9월 26일 | 프랑스군과 미군의 아르곤 공세 시작 |
9월 29일 | 불가리아 왕국, 협상국에 항복 |
10월 4일 | 독일 제국, 협상국에 휴전 요청 |
10월 17일 | 독일군의 힌덴부르크 선 붕괴 |
10월 24일 |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개시. 이탈리아, 카포레토 전투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 |
10월 29일 | 킬 군항의 반란 |
10월 30일 | 오스만 제국, 협상국에 항복 |
11월 1일 | 영국군, 모술 점령 |
11월 3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협상국에 항복 |
11월 9일 | 독일 제국. 빌헬름 2세 퇴위 |
11월 11일 | 독일 제국, 협상국과 제1차 콩피에뉴 휴전협정(Compiegne armistice) 체결.[120] 적대 행위 공식적 종결 |
1919년 | |
1월 4일 | 파리 강화 회의 열림 |
6월 28일 | 베르사유 조약 체결 (독일) |
9월 10일 | 생제르맹 조약 체결 (오스트리아) |
7월 21일 |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 |
11월 27일 | 뇌이 조약 체결 (불가리아) |
1920년 | |
1월 | 첫 국제 연맹 회의가 런던에서 개최(제1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 종결) |
6월 4일 | 트리아농 조약 체결 (헝가리) |
8월 10일 | 세브르 조약 체결 (오스만 제국) |
- 아프리카 전선은 워낙 따로 놀았던 고로, 별도 문서에서 기술한다. 제1차 세계 대전/아프리카 전선 참조.
10.1. 연도별 주요 전투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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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생성된 전투만 기재 | ||
전투 이름 | 교전국 | ||
<rowcolor=#FFF> 공격측 | 방어측 | ||
<colbgcolor=#b31c31> 세르비아 침공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독일 제국 | 세르비아 왕국 | |
벨기에 침공 | 독일 제국 | 벨기에 왕국 | |
국경전투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벨기에 왕국 | 독일 제국 | |
타넨베르크 전투 | 러시아 제국 | 독일 제국 | |
1차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 | 영국 | 독일 제국 | |
1차 마른 전투 | 독일 제국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 |
뉴기니 전투 | 호주 | 독일 제국 | |
프셰미실 공방전 | 러시아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 |
1차 아라스 전투 | 독일 제국 | 프랑스 제3공화국 | |
1차 이프르 전투 | 독일 제국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벨기에 왕국 | |
칭다오 전투 | 일본 제국 | 독일 제국 | |
코로넬 해전 | 독일 제국 | 영국 | |
탕가 전투 | 영국 | 독일 제국 | |
포클랜드 해전 | 영국 | 독일 제국 | |
1차 아르투아 전투 | 프랑스 제3공화국 | 독일 제국 | |
사르카므쉬 전투 | 오스만 제국 | 러시아 제국 | |
도거 뱅크 해전 | 독일 제국 | 영국 | |
무제한 잠수함 작전 | 독일 제국 | 대서양의 선박 | |
다르다넬스 해전 |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 | 오스만 제국 독일 제국 | |
2차 이프르 전투 | 독일 제국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벨기에 왕국 | |
갈리폴리 전투 |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호주 뉴질랜드 | 오스만 제국 | |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 러시아 제국 | |
2차 아르투아 전투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 독일 제국 | |
이손초 전투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
말라즈기르트 전투 | 러시아 제국 | 오스만 제국 | |
오소비에츠 전투 | 독일 제국 | 러시아 제국 | |
코스투리노 전투 | 불가리아 왕국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 |
베르됭 전투 | 독일 제국 | 프랑스 제3공화국 | |
나로치 호수 공세 | 러시아 제국 | 독일 제국 | |
유틀란트 해전 | 독일 제국 | 영국 | |
트렌티노 공세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이탈리아 왕국 | |
브루실로프 공세 | 러시아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
솜 전투 |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 독일 제국 | |
2차 아라스 전투 | 영국 | 독일 제국 | |
비미 리지 전투 | 영국 캐나다 자치령 | 독일 제국 | |
니벨 공세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 독일 제국 | |
오트란토 해협 해전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영국 이탈리아 왕국 프랑스 제3공화국 | |
60고지 전투 | 영국 | 독일 제국 | |
케렌스키 공세 | 러시아 공화국 루마니아 왕국 |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
파스샹달 전투 |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 독일 제국 | |
머러셰슈티 전투 |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러시아 공화국 루마니아 왕국 | |
말메종 전투 | 프랑스 제3공화국 | 독일 제국 | |
카포레토 전투 |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이탈리아 왕국 | |
베르셰바 전투 | 영국 | 오스만 제국 | |
2차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 | 영국 | 독일 제국 | |
루덴도르프 공세 | 독일 제국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미국 이탈리아 왕국 벨기에 왕국 포르투갈 제1공화국 | |
피아베강 전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이탈리아 왕국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 |
2차 마른 전투 | 독일 제국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미국 이탈리아 왕국 | |
백일 공세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미국 이탈리아 왕국 벨기에 왕국 캐나다 자치령 호주 포르투갈 제1공화국 뉴질랜드 | 독일 제국 | |
아미앵 전투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미국 | 독일 제국 | |
생 미이엘 공세 | 미국 프랑스 제3공화국 | 독일 제국 | |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 이탈리아 왕국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미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
※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 }}}}}}}}} |
연도 | 전투 이름 |
1914년 | 사라예보 사건 |
벨기에 침공 | |
국경 전투 | |
리에주 전투 | |
타넨베르크 전투 | |
세르비아 침공 | |
1차 마른 전투 | |
제1차 아라스 전투(1914년) | |
제1차 이프르 전투 | |
탕가 전투 | |
사리카미스 전투 | |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 | |
뉴기니 전투 | |
칭다오 전투 | |
코로넬 해전 | |
포클랜드 해전 | |
크리스마스 휴전 | |
1915년 | 제1차 비미 고원 전투 |
메소포타미아 전투 | |
갈리폴리 전투 | |
이손초 전투[121] | |
도거 뱅크 해전 | |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 |
제2차 이프르 전투 | |
1916년 | 베르됭 전투 |
솜 전투 | |
유틀란트 해전 | |
브루실로프 공세 | |
아랍 반란 | |
1917년 | 제2차 아라스 전투 |
니벨 공세 | |
오트란토 해협 해전 | |
제2차 비미 고원 전투 | |
제2차 아라스 전투(1917년) | |
파스샹달 전투[122] | |
머러셰슈티 전투 | |
러시아 혁명 | |
바그다드 함락 | |
팔레스타인 전투 | |
카포레토 전투 | |
1918년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러시아의 협상군 탈퇴 및 동부전선 전쟁 종결) |
루덴도르프 공세[123] | |
2차 마른 전투 | |
2차 솜 전투 | |
아미앵 전투 | |
벨로 숲 전투 | |
생 미이엘 공세[124] | |
백일 전투 | |
뫼즈-아르곤 전투 | |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 |
무드로스 정전 협정( 오스만 제국) | |
킬 군항의 반란 ( 독일 11월 혁명과 독일의 항복 선언) |
11. 사용 장비
제1차 세계 대전기의 연합군 보병장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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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64d44>
제1차 세계 대전 연합군의 보병장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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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화기 | <colbgcolor=#564d44> 소총 | <colbgcolor=#564d44> 볼트액션 | 리-메트포드, 리-네이비, 리-엔필드, 리-스피드, P14, M1917 엔필드, 크로파첵 M1884, 르벨 M1886, 베르티에, K11, 베테를리 M1870/87, M1870/87/15, 모신나강, 베르단, 그라, 샤스포 M1866/74, 무라타, 카르카노, 크라그-에르겐센, 마우저 M1889, 마우저 M1893, 로스 소총, 30년식 소총, 38식 소총, 스프링필드 M1903 | |||
레버액션 / 폴링ㆍ롤링ㆍ리프팅블록 / 트랩도어 | 스나이더 Mk.III, 콤블랭 M1870, 레밍턴 롤링블럭, 알비니-브랭들랭, 크른카 M1867, 파콰슨 M1872, 밀로나스 M1872, 스프링필드 M1873, 마티니-헨리, 윈체스터 M1886, 윈체스터 M1892, 윈체스터 M1894, 윈체스터 M1895, 새비지 M99D | |||||
반자동 | 레밍턴 모델 8, M1907 SL, 뫼니에 M1916, RSC M1917, RSC 1918, M1903 Mk 1, 브리티쉬 1918 파콰르-힐, 류장군 소총E | |||||
자동 | 리베롤 1918E, 윈체스터 버튼 1917E, M1907/17, 체이-리고티E, 표도로프, M1918 브라우닝 | |||||
기관단총 | MAB 18, OVP 1918, 쇼샤-리베롤 기관단총E | |||||
산탄총 | M1897, M1912, 레밍턴 모델 11, 레밍턴 M10, 셰그렌 산탄총, 스티븐스 M520 | |||||
권총 | 리볼버 | 콜트 M1873, 엔필드 Mk.II, 웨블리, MAS 1873, 보데오 M1889, S&W M10, 웨블리-포스베리E, 콜트 M1901, Mle 1892, 26년식 권총, 나강 M1895, S&W M3, S&W 트리플 락, 콜트 M1909, M1917 | ||||
자동권총 | C96, 마스E, FN M1900, FN M1903, 콜트 M1903, 새비지 M1907, FN M1910, 웨블리 권총, 리센티 M1910, M1911, 루비, 스타 M1914, 베레타 M1915/17 | |||||
지원화기 | 기관총 | 경기관총 | 마드센 M1902, 루이스, 호치키스 M1909, CSRG M1915, 휴오트E | |||
중기관총 | 가드너, 맥심, M1895/14 콜트-브라우닝, 빅커스, 호치키스, 생테티엔 M1907, PM M1910, 38식 기관총, 3년식 기관총, 페리노 M1908, 피아트-레벨리 M1914, 빌라르-페로사 M15, M1917 브라우닝 | |||||
박격포 | 3인치 스토크스 박격포 | |||||
유탄발사기 | 마티니 유탄발사기 | |||||
유탄 | No.1 수류탄, No.2 총류탄, 밀즈 수류탄, RG-14, F-1, Mk.1, Mk.2, Mk.3, 비방-베시에 | |||||
경야포 | 빅커스 Q.F. Gun, Mk II, 37mm Mle 1916 보병포 | |||||
냉병기 | 도검 | 구군도, M1902 세이버, U.S M1917 트렌치 나이프, U.S M1918 Mark I 트렌치 나이프 | ||||
※ 윗첨자E: 테스트만 치른 후 제식 채용되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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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기의 동맹국 보병장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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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a176,#897147>
제1차 세계 대전 동맹군의 보병장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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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화기 | <colbgcolor=#b8a176,#897147> 볼트액션 소총 | Gew71, 베르단, 그라 M1874, 크로파첵 M1881, M1893, Gew88, 마우저 M1890, 마우저 M1893, Gew98, 마우저 M1903, M1886, M1888, M1890, M1893, M1895, 만리허-쇠나워, 슈타이어 M.14, 모신나강 M1891 | ||||
후미회전식 / 레버액션 / 리프팅블록 / 폴링블록 / 트랩도어 | 벤츨 M1854/67 & M1862/67, 베른들-홀룹 M1867, 스나이더 Mk.III, 마티니-헨리, 윈체스터 M1866, 크른카 M1867 | |||||
반자동소총 | 젤프스트라더 M1906E, 몬드라곤 M1908, 젤프스트라더 M1916 | |||||
기관단총 / 기관권총 | 헬리겔 1915E, M1912/P16, MP18, 슈바르츠로제 기관단총E | |||||
권총 | <colbgcolor=#b8a176,#897147> 리볼버 | 가서 M1870, 라이히 M79, M83, 마우저 C78, 라스트&가서 M1898, 나강 M1895, S&W M3 | ||||
자동권총 | 보르하르트 C93, 마우저 C96, FN M1900, FN M1903, 드라이제 M1907, 로트-슈타이어 M1907, 루거 P08, 마우저 M1910, 베르크만 M1910, 슈타이어 M1912, 프로머 슈토프, 베홀라 M1915, 마우저 M1914 | |||||
조명탄 권총 | M1894 | |||||
지원화기 | 기관총 | 경기관총 | 마드센 M1902, 호치키스 M1909, MG15nA, MG08/15, MG14/17, MG08/18, M.17, M.18 | |||
중기관총 | 몽티니, 호치키스 M1900, 스코다 M1909, 슈바르츠로제 M.07/12, MG08, MG14, 가스트 기관총 | |||||
수류탄 | M15, M16, M17, 파이프 수류탄 | |||||
대전차화기 | 탕크게베어 M1918, 집속수류탄 | |||||
화염방사기 | 벡셀아파라트 M1917 | |||||
박격포 | 그라나트베르퍼 16, 미넨베르퍼 | |||||
※ 윗첨자E: 테스트만 치른 후 제식 채용되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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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기의 협상군 기갑장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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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64d44>
제1차 세계 대전 협상군의 기갑장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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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 <colbgcolor=#564d44> 중전차/지상함 | 리틀 윌리, Mk. I, Mk. II, Mk. III, Mk. IV, Mk. V | |||
중형전차 | 생 샤몽, 슈나이더 CA1, Mk. A 휘펫, Mk. B, Mk. C 호넷 | ||||
경전차 | 르노 FT, M1917 경전차, 포드 3t 전차 | ||||
프로토타입 중전차/지상함 | Mk. VI, 피아트 2000, 플라잉 엘레펀트, 차르 전차, 베즈데코드, 홀트 가스-일렉트릭, FCM 1A, 홀트 150t 필드 모니터, 200t 트렌치 디스트로이어, 맥피 지상함 1916-17 | ||||
자주포 | 건 캐리어 Mk. I, 240mm 캐터필러 자주포, M1919 16인치 자주포, GPF 194mm 야포 | ||||
탱켓 | 모리스-마르텔 탱켓 | ||||
장갑차 | 푸틸로프 - 가포드 장갑차, 푸조 장갑차, 푸조 146, 르노 ED, 오스트로-다임러 장갑차, Mk. IX, 오스틴 장갑차, 롤스로이스 장갑차, 데이빗슨 캐딜락, 킹 장갑차, 란체스터 장갑차, 피어리스 장갑차, 화이트 장갑차, 테르니 장갑차, 란치아 1ZM | ||||
차량 | 홀트 트랙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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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기의 동맹국 기갑장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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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2e2e,#fefefe>
제1차 세계 대전 동맹군의 기갑장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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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
<colbgcolor=#2e2e2e,#897147> 중전차 | A7V | |||
프로토타입 | LK I, LK II, A7V, A7VU, A7V 대공전차, 슈투름바겐, 트레파스바겐, 그로스캄프바겐, PzZug II 장갑열차, 오리온바겐, 오버슐레지엔 | ||||
노획전차 | Mk. IV, Mk. A 휘펫, FT-17 | ||||
장갑차 | E-V/4 에르하르트, P.A.1, 오스트로-다임러 장갑차, 란치아 안살도 장갑차, 뷔싱 A5P, 롬펠 장갑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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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항공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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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564d44><colbgcolor=#564d44> 전투기 | <colcolor=#0080ff><colbgcolor=#564d44> 영국 | 빅커스 F.B.5 건버스,RAF 빅커스 뱀파이어, 빅커스 F.B.12, 빅커스 E.S.1, 브리스톨 스카웃, 브리스톨 M.1, 브리스톨 F.2, 에어코 DH.2, RAF F.E.8, 솝위드 펍, RAF S.E.5, 솝위드 삼엽기, 솝위드 카멜, 솝위드 돌핀, 솝위드 스나이프, 솝위드 1 1/2 스트러터 |
프랑스 | 모랑-소르니에 L, 모랑-소르니에 N, 뉴포르 시리즈, 스패드 | ||
폭격기 | 경 폭격기 | 암스트롱 휘트워스 F.K.8(영), 브레게 14(프) RAF R.E.8(영), 브와쟁 III, 쿠드롱 G.3(프), 마틴 NBS-1(미) | |
중 폭격기 | 핸들리 페이지 폭격기 시리즈(영), 빅커스 비미(영), 일리야 무로메츠(러), 쿠드롱 G.4(프), 카프로니 시리즈(이), 에어코 DH.10(영), 마틴 MB-1(미) | ||
기타 항공기, 요격기, 훈련기 | 빅커스 F.B.19 정찰기(영), PB.29E/31E 슈퍼마린 나이트호크(영), 샘슨 2(프), 커티스 JN 제니(미), 커티스 모델 D 함재 정찰기(미) |
제1차 세계대전의 동맹국 항공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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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2e2e> 전투기 | <colbgcolor=#ffffff,#191919> 포커 아인데커, 알바트로스 D시리즈, 할버슈타트 시리즈, 포커 Dr.1, 지멘스-슈케르트 DDr.I, 포커 D.VII |
폭격기 | 타우베, 고타 G.IV, AEG G.IV, 한자-브란덴부르크 G.I(오-헝) | |
정찰기 | 로너 B.II | |
공격기 | AGO S.I | |
기타 항공병기 | 체펠린 비행선, 알바트로스 J.1, |
12. 관련 문서
- 군함/배수량별 목록/1914년~1949년
- 역사 관련 정보
- 조약 협약 협정 관련 정보
-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 런던 해군 군축조약
- 드레드노트급
- 핀란드 내전
- 크리스마스 휴전
- 전투배치 부대 목록
- 전쟁 중 배치된 역대 부대들 목록
12.1. 관련 용어
- 국제 연맹
- 파리 강화 회의
- 내부로부터의 중상
- 뇌이 조약
- 민족자결주의
- 러시아 혁명
- 로잔 조약
- 베르사유 조약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생제르맹 조약
- 세브르 조약
- 슐리펜 계획
- 치머만 전보
- 트리아농 조약
- 부쿠레슈티 조약
- 무제한 잠수함 작전
12.2. 관련 인물
기껏해야 20년 정도의 전간기 이후 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기 때문에 상당수 인물들이 2차 전 시기 인물들과 겹친다. 제2차 세계 대전기의 주요 지도자는 ▲표시, 주요 군인(장군 혹은 제독)들은 ★표시함. 이 시기에는 이들이 어떤 위치였는지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다.12.2.1. 협상국
- 대영제국
- 조지 5세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 더글러스 헤이그
- 데이비드 비티
- 윈스턴 처칠▲ : 갈리폴리 상륙작전의 주역이다.
- 버나드 로 몽고메리★
- 존 젤리코
-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 J. R. R. 톨킨 - 우리가 잘 아는 판타지 소설계의 마스터피스인 반지의 제왕을 집필한 소설가 맞다. 솜 전투에 참전했다가 자신은 병에 걸려 죽을 뻔 하고 나머지 같이 참전한 친구들은 모두 전사했다.
- C.S. 루이스 -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작가이자 문학인. 톨킨처럼 전쟁경험이 본인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 키스 파크★ - 안작군 소속으로 갈리폴리 상륙작전에 참전하고 이후 영국 육군으로 솜 전투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이후 항공부대로 전입한다. 이후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영국 본토 항공전과 몰타 항공전등을 지휘했다.
12.2.2. 동맹국
- 독일 제국
- 빌헬름 2세 - 독일 제국 카이저
- 빌헬름 황태자 - 전쟁 초기 독일 제5군 사령관, 이후 독일 황태자집단군 사령관.
-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 바이에른 왕국의 왕세자, 전쟁 초기 독일 제6군 사령관, 이후 독일 북부집단군 사령관.
- 뷔르템베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추정상속인, 전쟁 초기 독일 제4군 사령관, 이후 독일 알브레히트 집단군 사령관.
-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 발트해 함대 총사령관
- 마타 하리[128]
- 막스 호프만
-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129]
- 소 몰트케
- 발터 모델★
- 라인하르트 셰어
-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 아돌프 히틀러▲ - 사병[130][131]
- 에르빈 롬멜★ - 당시 초임장교
- 오토 프랑크 - 당시 포병 중위[132]
- 에른스트 우데트
- 에리히 루덴도르프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 프란츠 폰 히퍼
- 한스 폰 젝트
- 헤르만 괴링★[133]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소설가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썼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프란츠 요제프 1세 - 오스트리아 제국 카이저
- 카를 1세 - 오스트리아 제국 카이저
-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당시 오헝제국군 원수[134]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 황위 계승자로 이 사람의 암살로 1차대전의 서막이 열린다.
- 카를 폰 슈튀르크
- 티서 이슈트반
- 호르티 미클로시▲★[135]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36]
12.3. 창작물
자세한 내용은 제1차 세계 대전/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2.3.1. 대체역사물
이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에 밀려서 존재감이 미미한 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었더라면 파시즘이 전세계를 장악한 극도로 억압적이고 폭압적인 상황이 나왔겠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선 파시즘 같은 막나가는 사상은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그 정도로 극적인 결과가 도출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37]-
카이저라이히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은 빌헬름 2세의 군부 견제로 인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재개되지 못 했고 이로 인한 미국의 전쟁 불참으로 촉발된 스노우볼이 굴러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의 미국은 협상국과 동맹국 양측 모두에게 공평히 물량을 뿌려주었다고. 이로 인해 독일과 오헝, 그리고 오스만은 대전쟁[138]의 승리자로써 세계에 올라섰고 러시아 내전은 볼셰비키를 두려워한 독일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멘셰비키와 백군 연합의 승리로써 끝났으나 대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은 독일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모든 땅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패배국 프랑스는 독일군의 맹공에 완전히 무너져내려 짧은 내전 이후 공산화, 정확히는 노동자국가화[139]되고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아프리카 식민지로 도망친다. 독일 해군을 한계까지 밀어붙였으나 결국 식민지들의 연속적인 봉기와 영국 내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한계에 다다라 패전한 영국도 프랑스를 따라서 국민들의 왕가에 대한 반감으로 공산화, 이로 인해 윈저 왕조는 캐나다로 망명하고, 패배한 두 식민제국의 영향력을 모두 독일이 흡수하며 동시에 전제군주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140] 등의 여러 가지 상상력과 그럴듯한 사건들을 동원해 매력적인 세계관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의 정립된 설정은 1936년 이전의 이야기와 제2차 미국 내전, 스페인 내전, 제2차 대전쟁같은 것들 뿐이다.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원하는 국가를 붙잡고 원하는 방향으로 이어나갈 수 있도록 했고, 이는 큰 인기를 끌어 하츠 오브 아이언 4가 카이저라이히 구동기라는 별명을 갖게 만들었다.
- 레비아탄, 베헤모스, 골리앗 - 스콧 웨스터펠드 지음. 기계 병기로 싸우는 동맹국과 생체 병기로 싸우는 협상국 사이에서 오스트리아의 숨겨진 어린 황태자가 주인공인 대체역사소설. 아쉽게도 국내엔 미번역된 작품이다. 2025년에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
- The Great Martian War - 히스토리 채널에서 만든 제1차 세계 대전과 H.G.웰즈의 우주전쟁을 크로스오버 한 페이크 다큐맨터리. 1913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화성인 군대가 독일을 공격해 독일 본토는 쑥대밭이 되고 영국 및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로 피신한 독일군과 이후 참전하게 되는 미군이 화성인을 상대로 서유럽에서 격전을 벌인다는 내용. 여기선 슐리펜 계획이 프랑스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화성인 군대를 피해 모든 독일군 및 독일 민간인들을 프랑스로 대피시키는 작전으로 나온다. 1차 세계 대전의 전개와 원작 소설의 전개를 훌륭하게 섞은 작품이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훨씬 일찍 개전하는 등 여러모로 전혀 다른 모습이다. ( 해당 문서)
- 왕따 이등병의 1차 대전 생존기 - 한스의 활약으로 나름 잘 싸우고 있다. 특히 루덴도르프 공세가 성공하는데 큰 힘을 실어줬고, 이 덕분에 프랑스와 영국에게 빅엿(...)을 선사한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대신에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가 암살당해서 전쟁이 7주 늦춰졌으며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 탄생하고 러시아가 휴전을 맺지않고 소련인 상태로 계속 싸우는 등 세세한 부분에서 변화가 생기고 세계역사가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미국이 프랑스와 영국의 분탕으로 남북으로 분단된 후 북부 미국은 동맹국을 남부 미국은 협상국을 지지하고 결국 북부미국의 산업력덕에 동맹국이 승리한다.
- 주간 신에서는 타임라인-191 시리즈처럼 남북 전쟁이 영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10년 더 길어진다. 근데 이것 때문에 영국과 미국 관계가 박살나서 하나된 미국이 독일을 지원하고 근대화 된 대한제국이 영국을 지원하는 바람에 1차세계대전은 무승부로 끝났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원래 역사와 달리 러시아 내전인 적백내전으로 시작되었고 보어 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유럽 각국들이 스스로의 무기체계의 발달을 깨닫고 적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불과 6개월만에 서부전선에서 무려 2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엄청난 피해에다 적백내전의 종전 그리고 고종이 뿌린 선의빔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유해진 동맹국과 협상국 양측 모두 서로를 압도하지 못하고 참호선에서 대치만 하다가 반전주의가 폭발, 동맹국과 협상국 모두 전선에서 대규모 항명이 일어나자 전쟁 지속을 포기하고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원역사보다는 빠르게 마무리된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원역사 보다 잔인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쫒겨난 니콜라이 2세가 독일의 도움으로 왕위에 복귀하려다가 전쟁이 터지고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독일군이 서부전선에 더욱 집중하면서 협상국이 파리를 상실, 발악으로 협상국이 독가스를 먼저 사용하나 그결과 미국이 협상국에 대한 지지를 거두면서 동맹국이 승리한다. 참고로 이탈리아와 오스만 제국은 대전쟁에 참여하지않고 서로 싸우다가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에 따라 동맹국에 참여한다.
- 레드 플러드에서는 니벨 공세가 원래역사 보다 참혹해서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독일과 러시아에서도 서로 공산주의 내전이 터지게 되면서 영국과 이탈리아를 제외한[141] 모든 열강들이 패배자가 된다.
- 화약고 제국의 천재 대공에서는 주인공 버프를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체질개선 후 대활약하면서 동맹국이 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다. 심지어 미국이 협상국 편인데도 이겼다.
- 러브, 데스 + 로봇/시즌 1에서는 히틀러가 마차에 치어죽은 미래에서 해당계기로 마차 규제 법안이 통과되면서 오스트리아가 자동차 강국이 되어 동맹국이 참호를 강철 자동차로 돌파하고 세계대전에 승리하고 빌리 브란트가 독일 우주비행사로 인류 최초 달 착륙에 성공하는 것으로 나온다.
-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서는 2부의 메인 스토리 라인에 해당된다. 다만 흔히 서부전선을 묘사하는 다른 매체들과 달리 여기서는 동부전선과 브루실로프 공세를 메인으로 묘사한다.
13. 관련 어록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 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77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77년
제군은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카이저 빌헬름 2세, 1914년 8월
카이저 빌헬름 2세, 1914년 8월
온 유럽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다. 우리 생전에 다시 켜지는 일은 없겠지.
에드워드 그레이 경(Sir Edward Grey)[143]
에드워드 그레이 경(Sir Edward Grey)[143]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현대의 가장 어리석고 무의미하며 불필요한 전쟁이다. 그것은 독일이 원하지 않는 전쟁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강요된 전쟁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가 전쟁을 원한다는 것을 세계에 확신시키는 주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 1914년 10월 외국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 1914년 10월 외국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이봐, 전우여, 난 자넬 죽이고 싶지 않았어. 자네가 참호에 또 다시 뛰어들더라도 얌전히만 있으면 죽이지 않을 거야. 난 자네가 뛰어들 때 자네의 수류탄을, 자네의 총검을, 자네의 무기만을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난 자네의 얼굴을 보고 자네의 아내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공통점을 발견했어, 전우여! 부디 나를 용서해다오! 우리는 이러한 공통점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말지. 자네들 어머니들도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근심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죽음과 고통을 똑같이 두려워하며 똑같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말이야. 전우여! 어째서 그대가 나의 적이 되었던가. 우리가 무기와 군복을 벗어 던지면 자네도 나의 벗이 될 수 있을 텐데...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中[144]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中[144]
참호에 있는 군인들에게 왜 전쟁을 하는지 물었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굴복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독일이 왜 우리와 전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 될 것.
이것이 한 시대의 끝이자 시작이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이나 종교개혁보다 훨씬 더 큰 것이고 우리는 그 안에 살고 있다.
허버트 조지 웰즈, 각각 1914년 8월과 1916년[145] 더욱 끔찍한 속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속편에서 종막을 살짝 맛본 사람들은 그 거대한 공포에 짓눌려 비로소 대전쟁을 억제하게 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종막이 열릴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146]"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다"정도? 이후 전쟁이 교착화되자 '종전하기 위해 하는 전쟁'이라는 블랙 유머가 되어 더욱 유행어로 떠올랐다.]
이것이 한 시대의 끝이자 시작이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이나 종교개혁보다 훨씬 더 큰 것이고 우리는 그 안에 살고 있다.
허버트 조지 웰즈, 각각 1914년 8월과 1916년[145] 더욱 끔찍한 속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속편에서 종막을 살짝 맛본 사람들은 그 거대한 공포에 짓눌려 비로소 대전쟁을 억제하게 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종막이 열릴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146]"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다"정도? 이후 전쟁이 교착화되자 '종전하기 위해 하는 전쟁'이라는 블랙 유머가 되어 더욱 유행어로 떠올랐다.]
인간은 미쳤다! 현 사태를 지속한다는 것은 미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지독한 살육전이라니! 이 끔찍한 공포와 즐비한 시체를 보라! 내가 받은 인상을 전달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지옥도 이렇게 끔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미쳤다!
알프레드 주베르[147]
알프레드 주베르[147]
오늘 아침 11시에 인류에게 재앙을 준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이 끝났다. 나는 우리가 이 운명적인 마침이 모든 전쟁을 끝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1918년 11월 11일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1918년 11월 11일
[1]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협상국 이탈
[2]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동맹국과 평화협정을 맺지만 전후
생제르맹 조약으로 승전국 지위와 영토를 인정받음.
[3]
1917~
[4]
독일
U보트의 무차별 공격과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인해 1917년 4월에 독일 측에 선전포고하여 참전함.
[5]
유럽에서 황제국이었던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해체되어 각각
바이마르 공화국,
오스트리아 공화국,
헝가리 인민 공화국,
튀르키예 공화국,
소련이 성립되었으며 유럽에서 황제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또한 이들은 하나같이 공화제 국가였고, 새롭게 독립한 국가들도 거의 다 공화제를 택하며 공화제가 이때부터 군주제를 확실히 밀어냈다.
[6]
현
유엔의 전신. 그러나
미국의 부재와 훗날
추축국이 되는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탈퇴로 존재가 무의미해지고 본래 목적인 전쟁 억제도 실패했다.
[7]
1차 세계 대전에서의 참상으로 인한 전쟁에 대한 공포와 동맹국에 대한 징벌의식의 부조화는 2차 세계 대전 발발의 단초를 강하게 제공했다.
[8]
파랑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위시한
협상국, 빨강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을 위시한
동맹국이다.
[9]
정확히는 추정상속인이지만, 널리 알려져 있는 명칭인 황태자로 기술함.
[10]
이것이 산업 시대의 식민지가
대항해시대의 식민지와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점인데, 대항해시대의 식민지는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 혹은
향신료 등을 현지에서 확보-착취하기 위한 성격이었던 반면 산업 시대의 제국주의 식민지는 본국의 공장에서 막대하게 생산되는 상품을 팔아치우는 시장 및 원자재 확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1]
독일 식민제국 또한
중국의
칭다오,
아프리카
나미비아,
탄자니아,
카메룬,
토고, 남태평양의 비스마르크 제도 등 식민지들을 꽤 확보했지만, 영국과 프랑스에 비하면 밀리는 수준이었다.
[12]
당시의 오스트리아 외교관의 회고록을 보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통첩을 일부러 받아들이기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13]
심지어 독일이 동아프리카에 얻은 식민지는 독일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프랑스를 견제하고 싶어했던 영국이 주선해준 것이었다.
[14]
자세한 글
#
[15]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은 이게 21세기 현재 미,중 관계와도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중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박하는 대표적인 근거로 쓰이고 있다.
[16]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도 전쟁을 결정했으나 정작 본인은 전혀 전쟁에 호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선전포고 승인을 요청하는 의회 연설 후 의원들의 열화와 같은 갈채를 뒤로 하면서 "방금 연설은 젊은이들에 대한 죽음의 신호였는데, 그렇게 박수갈채를 보내니 참 이상한 일이야..."라고 보좌관에게 푸념할 정도였다고. 실제로 그의 결정으로 1918년 한 해 동안 미군 10만 이상이 전장에서 죽었고, 만일 독일이 백일공세를 실패한 뒤 미군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피해는 몇 배나 커졌을 것이다.
[17]
크림 전쟁 시기부터 사상자가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로 나오기 시작하지만, 유럽의 변방에서 벌어진 전쟁이었고
전염병이 돌아 죽은 사람도 많았다. 유럽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대규모 전면전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독일과 프랑스만의 전쟁이었으며 독일군의 피해는 동원된 병력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수준이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이런 참혹한 총력전의 징조가 보였지만 유럽의 참전무관들은 이를 미국의 전쟁 수행능력이 떨어져서 벌어진 상황으로 인식하여 남북전쟁의 피의 교훈을 스스로의 피를 흘리며 얻어야 했다.
[18]
솜 전투 당시 영국군이 첫날 어떻게 쓸려나갔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1차대전 영국군 전체 전사, 실종자의 45분의 1인 2만 명이 전투 첫날 나왔다.
[19]
특히
기관총이 발명되면서 유럽과 비유럽의 군사력은 엄청난 격차가 생겨났다. 1898년 아프리카 수단에서 벌어진
옴두르만 전투에서 영국군이 기관총 등으로 수단의 독립군을 상대해 수단군 25,000명을 살상했지만 영국군 피해는 500명 사상에 불과했다. 당시 참전했던 젊은 처칠은 "야만인을 상대로 한 현대문명의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표현했다.
[20]
이 때문에 1914년에만 유일하게
크리스마스 휴전이 일어나고,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적대심이 높아지면서 1915년부터는 연휴고 크리스마스고 상관없이 적군 참호에 포탄을 쏴제끼는 곳도 있었으나 1918년까지도 기나긴 참호전 와중에 비교적 격전이 적었던 곳에서는 1914년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기념일 같은 때에는 암묵적으로 무기를 내린 곳이 있었다고 한다. 높으신 분들 중 상당수도 다른 날 많은데 하필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까지 굳이 싸워야 하냐고 거부감을 느낀 경우가 없지 않았기에, 별도의 공세 같은 것이 예정되지 않은, 일반적인 참호 생활이 이어진 곳에선 그날만큼은 1914년처럼 대놓고 만나진 않아도 암묵적으로 상부의 묵인 혹은 거짓 보고 하에 교전 행위를 접기도 했다.
[21]
전사자가 얼마 안 되고 바로 귀환이 가능한 현대
미군 정도를 제외하면 전장에서 죽은 자들은 대부분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승리한 쪽이 일괄수습해서 현지에 같이 묻는 것이 불문율이다.
갈리폴리 전투 후 전사한 영연방군의 시신도 오스만군이 일괄적으로 수습해서 매장했는데 전후 전사자 가족들이 튀르키예로 찾아온 사례를 다룬 영화도 있다.
[22]
참호전의 실태를 몰랐다는 말은 독일인들의 내부중상설급 도시전설이다. 전쟁 초기가 아닌 1915년 이후로 넘어가면 그 실태를 후방에서도 모를 수가 없었다. 부상당하고 돌아온 군인들이 가족들에게 다 말했고, 희생자가 급증하면서 결국 사회 전체에 퍼졌고 군법으로 처벌한다고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쟁을 계속한 것은 이렇게까지 서로 죽였는데 전쟁 결과가 패배로 나오면 적국에게 받을 대가가 더 참혹할 것이라는 국민들의 두려움과 더불어 민족주의가 엄청나게 강했던 당시 상황 때문에 정부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 참전국 국민들이 전쟁 실태를 몰라서 전쟁을 이어간 게 아니라, 알면서도 이어간 것이다.
[23]
실제로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뒤,
베르사유 조약에서 부과받은 배상금과 제재는 항복해서 국가 해체까지는 안할테니 그냥 평생 거덜난 채로 살라는 수준이었으며, 독일과의 전쟁에서 가족을 수도 없이 잃어야 했던 협상국 국민들의 분노를 크게 반영한 것이었다. 다만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처럼 독일을 사지를 찢어버리려고 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기에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을 영원히 굴복시키기에는 자비롭고 독일인들이 분노하지 않기에는 가혹한' 어중간한 결과물이 되었고, 이는 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24]
점령 기간동안 독일은
벨기에의 강간 등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을 저질러 큰 악명을 얻는다.
[25]
이
회중시계는 1차 대전 중에
빌헬름 2세가 오토 폰 보겐호프 (Otto von Bogenhoff) 장군에게 수여한
IWC사의 회중시계다. 시계 케이스에 적혀 있는 독일어는' FELDZUG GEG FRANKREICH RUSSLAND ENGLAND usw'로 FELDZUG는
전역이란 뜻이고, GEG는 ~에 대하여란 뜻이며, FRANKREICH RUSSLAND ENGLAND는 프랑스 러시아 영국, usw는 영어의 etc 기타 등등의 의미이다.
[26]
당시 유럽 무관들은 남군과 북군 기병대의 교전을 관전했는데 유럽의 기존 기병 교전방식인 두 기병대가 세이버를 빼들고 교전을 치르는 것이 아닌 말을 멈추고 권총 사격을 주고 받자 매우 어처구니 없어했다고 전해진다.
[27]
그래서인지 제1차 대전에서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배치되는 걸 선호했다고 한다.
[28]
조금 다른 얘기지만, 러시아는 프랑스 자본으로 철도를 깔기는 했는데 소총과 포탄조차 부족해
보병에게 도끼라도 줘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에너미 엣 더 게이트의 소련군 같이
여려명에게 총 한자루 주고 앞사람이 죽으면 뒷사람이 수거해서 쓰라고 하지 않나, 서부전선에서 포신이 녹아내릴 때까지 쏴재끼는 동안 10발 쏘고 포병이 침묵하는 막장사태가 곳곳에서 벌여졌다.
[29]
물론 전쟁이 끝나고도 인적 피해를 수습하기 바빴던 영국은 약속을 씹었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약속을 지켰다. 타의 반인 이유는
영국동양함대궤멸과 (...) 결정적으로 미국과 중국이 인도의 독립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30]
해협을 통과할 경우 함대를 통해 이스탄불을 직접 포격할 수 있으며, 독일에 고전하던 러시아로 물자를 보낼 해로를 확보할 수 있고,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1914년 말까지 오스만 견제를 위해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빼겠다고 영국에게 수차례 압력을 넣는 상황이었다.
[31]
1882년에 이탈리아 왕국은 삼국 동맹에 참여한 상태였으나 이미 1902년에 프랑스와 밀약을 맺어 삼국 협상에 발을 걸친 상태였다. 이후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삼국 동맹은 상호방위조약"이라는 이유로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에서 이기면 프랑스령
튀니지를 이탈리아에게 줄 테니 이탈리아는 중립만 표방해도 좋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협상국이 이탈리아가 탐내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를 미끼로 꼬시자 이탈리아가 넘어온 것.
[32]
사실 이 사진뿐만 아니라 'Going over the top'은 영어권에선 아예 1차 대전에서 참호 밖으로 나와 공세를 하는 상황을 지칭하는 관용구 수준이 되었다. 유튜브 등지에서도 위 단어를 입력하면 전쟁 영화의 장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3]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
[34]
그래서 포르투갈은 전사자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본국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8만에 달했다. 포르투갈은 전쟁이 끝난 후 보상으로
독일령 동아프리카 일부를 얻었다.
[35]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36]
그 전까지의 헬멧은 그냥 천으로 만든 모자였거나 가죽제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금속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고위 장교나 기병대 등에서나 사용했었던 것. 독일의 유명한
피켈하우베도 1916년에
슈탈헬름으로 바뀌었다.
[37]
사실 독일은 동부전선의 볼리모프(Bolimov)전투에서 먼저 썼었으나 강추위로 인해 실패했다.
[38]
특히 미첼의 이론에 동조한 헨리 아놀드를 대표로한 육군 항공대 장교들을 시작으로 헤이우드 한셀, 석기시대 매니아 커티스 르메이 등 훗날 제2차 세계대전때 전략폭격으로 맹활약한 폭격기 마피아를 이루게 된다.
[39]
1916년 7월에 뉴저지의 영국 수출용 탄약 창고가 폭발하고(Black Tom explosion), 1917년 1월에는 영/프에 군용자동차를 수출하는 포드사의 공장이 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이 모두 독일에서 보낸 공작원의 소행으로 판명나 여론이 악화된 것도 있다.
[40]
그리스는 전쟁이 끝난 후 보상으로 불가리아령 서트라키아와 오스만이 갖졌던 (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동
트라키아와
스미르나를 얻었으나 고토 수복과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명목으로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쳐들어가는
뇌절을 했다가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신생 튀르키예군에게 패하고 동트라키아와 스미르나를 다시 빼앗겼다.
[41]
정식으로 조약을 맺고 정전을 한 것은 1918년 2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은 것이며, 이 조약은 러시아의 영토를 상당부분 독일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42]
3.1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43]
다른 말로 춘계공세라고도 한다.
[44]
10월 31일 혁명으로 이중제국의 해체를 선언한
헝가리 왕국은 빌라주스티 휴전 협정과는 별개로 11월 13일 베오그라드 휴전 협정으로 항복했다.
[45]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독일은
공화국을 선포한 뒤 항복했다.
[46]
독일이 패망하자 조약 무효를 선언하긴 했지만 협상국 측에서조차 신생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을 경계했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소련 자력으로 영토 회복에 나섰으나 폴란드에게 패배하면서 우크라이나만 되찾는데 그쳤다.
[47]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였던
나미비아,
토고,
탄자니아 등
[48]
피터 심킨스 et al,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플래닛미디어, 2008, pp.660~661
[49]
민간인 비포함 수치
[50]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건 독일이 식민지가 없어서 역설적으로 자국 개발과 인재육성에 경제력을 올인하여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인력의 비중이 러시아나 프랑스는 물론 영국보다도 높았기 때문이다.
[51]
다만 유럽도 모든 면에서 화려하거나 낭만적인 문화가 지속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상흔이 가시면서 다시금 지속된다. 게다가 민간 피해가 없다시피했던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경제적 호황과 더불어 한층 더 낭만적인 문화가 지속되었다. 미국에선 프랑스에서 들어온
아르데코 양식이 발달하고
플래퍼가 출현하는 등 과시적인 사교 문화가 발달했으며 일본에서는 유럽에 대한 수출량이 늘고 대중국무역 등을 독점하여 나리킨이라 불리는 신흥 부자들이 출현하여 유럽에서 미술품을 긁어모으기도 했다. 또한 사회적 분위기도 자유로워져
다이쇼 데모크라시 같은 민권운동이 발달했다. 이러한 것들 대부분이
세계 대공황이 터지면서 수그러들긴 했지만 말이다.
[52]
실제로 1차대전은 거의 모두가 예견하고 있었음에도 적극적으로 막으려 들지 않았다. 1차대전의 악몽과 피해를 겪고는 2차 대전 직전에 연합국의 일원들이 필사적으로 전쟁을 피하려고 했던 것과 사뭇 대조된다.
[53]
다만, 이는 좀 오류가 있는 게 192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군은 1차대전의 전훈을 통한 기동전을 주 교리로 채택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방어 위주의 군사사상을 도입하게 된 배경은 대공황이 가장 큰 이유다. 또한 베네룩스 방면이 마지노선처럼 완전 요새화된 것도 아니었고, 라인 강 줄기 때문에 완전히 연결된 요새를 건설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또한 프랑스는 승전했어도 엄청난 인명피해를 본 게 이런 소극적 태도로 전환한 것이었다.
[54]
사실 의외로 마지노 선 자체는 충분히 밥값을 했다.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벨기에 방면에 마지노 선을 깔지 못해 빈틈이 생겼고 이 때문에 독일군이 아르덴 고원을 통해 진격하는 바람에 망한 것이다. 이 아르덴 공세를 은폐하기 위해 독일군이 마지노 선 앞에서 생쇼를 하긴 했지만 마지노 선을 넘는 것은 실패했다.
[55]
특히 1차 대전에서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포병의 포격으로, 전체 사상자 중 포탄으로 죽은 경우가 가장 많았다. 장비와 탄약이 크고 무거운 탓에 운반이 어려워 식민지 지역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할 기회가 적었던 것과 달리 유럽에서는 대량의 대포를 긁어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1차 대전에 가장 가까웠던 전면전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스트라스부르 공성전 등에서 보여준 포격의 위력은 나름대로 위협적이었지만 그 후의 야포들은 차원이 다르게 변했다. 야금학과 제조기술이 발달하여 대포의 구경은 점점 커지고
후장식 대포가 일반화되어 명중률과 사격속도가 올라갔다.
주퇴복좌기가 생겨 더 큰 반동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관측방법이 발달하여 사거리가 늘어나자 간접사격이 가능해져 보이지도 않는 전선 뒤에서 지속적으로 포탄을 퍼부을 수 있게 되었다.
[56]
참고로 러일전쟁을 분석한 타국은 '일본놈들도 대포를 펑펑 갈겨주니 러시아 보병을 갈아버리네? 포병 좀 쩌는 듯' 이라는 결론을 내놨지만, 정작 장본인인 일본은 '우리 보병들의 용맹함 덕에 이긴 듯? 정신력 스고이' 라는 엇나간 결론을 내놨다...
[57]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 이후 수십년간 복수의 칼날을 갈았고 그 일환으로 포병에 막대한 금액을 투자했다. 그 결과물이
세계 최초 유압식 주퇴복좌기 대포와 세계 최초 155mm 구경의 곡사포다.
[58]
영국은 캐나다와 호주 자치령으로부터 사실상 영국인과 같은 수준의 병력들을 수혈했고, 프랑스 역시 식민지 병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면 해외 식민지가 적었던 독일은 이런 이점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59]
다만 전쟁 초기엔 퇴역절차에 있던 구형 군복의 짙은 파란색과 붉은 바지 때문에 시인성이 높았고, 이 때문에 이후 채도가 낮은 호라이즌 블루 군복을 입게 된다.
[60]
다만 대량생산되는 제식 위장 군복은 2차 대전 후반에서야 나왔다.
[61]
강민수 옮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플래닛미디어, 2008, 172~173페이지, Peter Simkins et al., The First World War: The War to End All Wars, Osprey Publishing,2003
[62]
강민수 옮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플래닛미디어, 2008, 178페이지, Peter Simkins et al., The First World War: The War to End All Wars, Osprey Publishing, 2003
[63]
Women's Army Auxiliary Corps이며, 이후 Queen Mary's Army Auxiliary Corps로 개칭
[64]
강민수 옮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플래닛미디어, 2008, 321페이지, Peter Simkins et al., The First World War: The War to End All Wars, Osprey Publishing, 2003
[65]
인도,
베트남, 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중앙아시아의 군주정이 식민 지배로 무너졌다.
[66]
신해혁명으로 제정이 폐지된
청나라나 내부의 불만으로 제정이 폐지된
브라질 제국.
[67]
하지만 유럽 군주정도 1870년
프랑스 제정 폐지와 1910년
포르투갈 왕정 폐지로 불안한 조짐이 있었다.
[68]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
모나코,
안도라,
스페인.
[69]
스페인은 1930년대 왕정이 무너졌다가
스페인 내전 이후로 집권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왕정을 부활시켰다.
헝가리도 왕정이 무너졌다가
호르티 미클로시에 의해 복고되었으나 호르티도 초기의 프랑코처럼 왕 없는 왕국을 유지하다가 공산화로 폐지됐다.
그리스 왕정도 1920년대에 무너졌다가
요안니스 메탁사스가 부활시켰지만 1973년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가 도로 폐지했다.
[70]
여담으로
에뮤 전쟁 역시 1차대전 참전 후 미개척 토지를 개간한 참전용사들의 농토에서
에뮤 떼가 말썽을 부린 것에서 시작된
해수구제 작전이므로, 따지고 보면 위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71]
단, <8월의 포성>은
냉전 시대에 집필된 책의 특성상 미국인인 저자의 반소련 성향이 반영되어 러시아에 대해 지독하게 비하하고 있으니
다른 책과 같이 읽어야 한다.
[72]
또한, 윈스턴 처칠에 대해 지나치게 찬양하는 어조로 쓰고 있다.
[73]
프랑스는 전몰 장병 추모일, 즉 현충일이 11월 11일이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일인데,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제2차 세계 대전보다도 더 많은 전사자를 냈다.
[74]
프랑스 혁명과 정치적 숙청,
나폴레옹 전쟁 등의 사상자로 인해 프랑스 인구의 증가율이 둔화되기 시작한 반면 독일은 18세기 말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극단적인 인구증가 정책을 쓰기도 하고 주변 지역을 흡수 통일하여 인구 증가율이 상당히 커졌다. 1차 대전이 벌어질 즈음에는 이미 프랑스 인구는 독일의 2/3 수준으로, 세계 대전이 두 번 일어나는 동안 독일은 프랑스 이상의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인구 차이는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서서히 차이가 좁혀지는 중이다.
[75]
다만 역설적으로 1930년대
세계 대공황 당시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실업문제에서 자유로웠다. (미국의 실업률이 25%에 달할 동안 프랑스는 실업률은 5%대로 타 국가에 비하면 매우 안정적이었다.) 이는 잉여노동력이 부족했었기 때문이었다.
[76]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빼앗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애초에 제국주의 시절에도 각국의 실질적인 역량은 식민지가 아니라 본국 국민들의 수준과 본국의 경제력으로 결정났었다. 당장 독일을 결딴낸 것도 식민지가 풍부한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가 있으나마나였던
미국이라는 걸 생각하면 간단하다.
[77]
근데 웃긴 건 중국도 같은 승전국이었다는 것. 어차피 일본이 날름한 중국 지역 식민지는 독일이
확보한 영토를 신경 못 쓰는 사이 거저 먹은 거지만... 결국 후에
前 카이저 독일령 중국 영토는 중국 5.4 운동의 여파와 다른 국가들의 외교적 간섭으로 도로 토해내게 되었다.
[78]
그럼에도 식민지인들에게 많은 자치권을 부여해야만 했다.
[79]
왼쪽부터
메흐메트 5세,
빌헬름 2세,
프란츠 요제프 1세,
페르디난트 1세.
[80]
첫번째 줄 오른쪽에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군주가 아닌 당시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다. 사실 지금은 개나소나 공화국으로 전환되었지만 프랑스는 당대의 유럽 열강 중 공화국을 대표하는 나라였다.
[8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82]
프랑스, 러시아, 영국
[83]
영일동맹은 양국간의 공수동맹이지만 상대국의 자동 참전 의무같은 조항은 없었기 때문에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한 후에 14년 8월 1일 주일 영국대사관을 통해 일본에게는 이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독일의 동양함대가 홍콩과 웨이하이를 위협할 수 있었고 8월 4일에 영국 외무부는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84]
워낙 갑작스러운 참전으로 독일은 일본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다. 발발 당시 칭다오의 순양함급 이상은 2척에 불과했다. 8월15일 최후통첩 이후 1주일 만에 병력을 증강시키기에는 칭다오는 너무 멀었으며 이후 전개는
칭다오 전투 참조. 일본의 칭다오 점령과 강압적인 21개조 요구는
5.4 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85]
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작은 국가로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에 흡수됨.
[86]
다만 이탈리아는 의무를 그냥 방기한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상호방위조약으로 해석하고 있었으므로, 독일이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공격전쟁에는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실제로 독일과 같은 편에서 참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야, 이탈리아? 너네 왜 참전 안 해?"라고 나오기는커녕 "제발 그대로 중립 좀 지켜줘. OK?"라는 태도를 보였다.
[87]
사실
삼국동맹을 믿기엔 불안한 감이 있어서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몇 년 전 프랑스와 비밀 동맹을 맺어둔 상태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튀니지를 두고 사이가 안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식민지 하나 늘리냐 마느냐의 문제여서 심각한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일부를 점유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을 가로막는 역사적인 숙적이고 프랑스는 사르데냐의 이탈리아 통일을 도와준 우방이었다.
[88]
또한 오스트리아가 점유한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일대는 이탈리아계가 다수인 지역이었고 이탈리아는 통일 완수라는 이유로 이 일대의 회복을 외치는 상황이었다. 삼국 동맹 소속인데다가 오스트리아에겐 독일이란 빽이 있어서 대놓고 드러내질 못했을 뿐. 영국과 프랑스는 협상국 측에 참전하면 전쟁 후 이 일대의 점유를 인정해주겠다고 꼬드겼다. 즉, 2대전의
추축동맹이나 방공협정 마냥 견고한 동맹은 아니었던 셈.
[89]
북마케도니아 전체와 세르비아의 동쪽 절반, 그리스나 루마니아가 참전할 경우 제2차 발칸 전쟁으로 두 나라에게 넘어갔던 지역의 합병 인정, 막대한 차관 제공 등.
[90]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에 해당하며 리야드 토후국이라고도 불림.
[91]
대체로 독일계 이민자 800만은 독일과의 싸움을 싫어했고, 아일랜드계 이민자 450만은 영국을 싫어했다.
[92]
1916년 7월에 뉴저지의 영국 수출용 탄약 창고가 폭발하고 (Black Tom explosion), 1917년 1월에는 영/프에 군용자동차를 수출하는 공장이 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이 모두 독일에서 보낸 공작원의 소행으로 판명나면서 여론이 악화된 것도 있었다.
[93]
장남
요르요스 2세는 독일에 군사 훈련을 가 있었기 때문에 베니젤로스가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양위가 불가능했다.
[94]
이때 비전투 노무자(노동자) 20만 명을 서부전선으로 보낸다.
[95]
하지만 근 100년 가까이 중국 사회를 좀 먹은 열강의 아편 판매를 종식시키는 성과를 얻었고, 5.4운동으로 칭다오 등 구 독일의 점령지 이권은 다시 돌려 받았다.
[96]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에 위치.
[97]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결과였다.
[98]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세계 대전이라고 불렸고, 미국에서는 유럽 전쟁으로 불렸다.
[99]
간혹 위대한 전쟁으로
오역되는 경우도 있다.
시간 전쟁 문서 참고.
[100]
물론 현대에 와서는 정말 광기의 끝판왕을 달렸던 2차대전에 비해서는 한참 순한맛 취급받는다. 현재로서는 2차대전에 비해 규모로서나, 그 악랄함으로서나, 희생자 수로서나 명성(?)이 좀 바랜 감이 있다.
[101]
사실 그리고 파시즘과 반공/공산주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식민지 쪽의 민족주의가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 연합하기도 하는 등 사상 및 신념적으로 복잡하고 극렬하다 못해 광기의 양상을 띄었던 2차 대전과 달리 1차 대전은 그 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유럽 내 민족주의, 특히나 제국주의 국가들의 패권다툼의 연장선이자 끝판왕에 가깝다. 모든 것을 끝낼 전쟁이라는 수식어도, 결국 전부터 존재했던 경쟁과 갈등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 보여지기도 한다. 이의 약간 더 축소판으로는 7년 전쟁이 있었다.
[102]
히스토리 채널에서 1차대전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때 본인이 직접 등장해서 증언했다. 부상으로 후송되었는데 마취제가 없어서
군의관이 그냥 파편을 생으로 제거했을 때 군의관을 때려죽이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103]
이후 퍼싱은
미국-필리핀 전쟁,
남북 전쟁 마냥 그릇된 병력 꼬라박기만 하다 독일군의 기관총 앞에 참호전의 위력을 체감하고 겨우겨우 참호전 전술을 받아들였다.
[104]
프랑스 본토 인구 4000만 명과 독일 인구 6700만 명의 차이
[105]
설령 그럴 계획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제해권을 장악한 협상군 해군의 눈을 피해 유럽으로 데려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독일은 이미 외국에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조차 영국 해군의 방해로 불가능에 바빠져서 마지막 주중 독일제국 공사를 지낸 파울 폰 힌츠는 첩보작전을 동원해서 중국에 밀입국해서 겨우 부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중국의 대독 단교 및 선전포고로 3년 만에 임기가 끝나는 신세가 된다.
[106]
마하트마 간디 조차 전쟁 초기에 인도 국민들의 적극적 참전을 독려하기도 했다.
[107]
힌덴부르크는 슐레지엔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가 있을 정도의 명망 있는 인물이었으나, 대통령이 된 후 히틀러를 총리(수상)에 임명하고 그 옆에
프란츠 폰 파펜을 붙이는 등 사실상 나치 독일의 시작을 열었으며, 필리프 페탱 원수는 훗날 패전한 3공화국의 수장이 되어 나치에게 항복하고 비시 정권을 세웠다. 다만 페탱의 경우에는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참작의 여지가 있으나 힌덴부르크의 경우 명백한 그의 실책이다.
[108]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임사체험만큼 훌륭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 없다고 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자 이전에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이 말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109]
사실 처칠의 군사적인 식견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굵직한 실패의 순간, 혹은 실패할 뻔한 순간의 배후에는 항상 처칠이 있었다. 다만 2차 대전 때에는 최소한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말리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준 경우가 많았음이 다행. 나름대로 1차 대전에서 얻은 교훈이 있긴 한 모양이다... 는 개뿔, 사실 2차대전 때도 실패를 많이 한 편이었다. 그래도 1차대전의 갈리폴리 전투만큼 큰 삽질은 없었고 주위에 말린 사람도 많았고 또, 정치 및 외교에서는 거대한 족적을 남겨서 그의 삽질이 가려진 것일 뿐이다.
[110]
정확히는 바이에른 왕국군. 바이에른 왕국이 독일 제국 소속이긴 하나, 여타 다른 국가들의 자치국과는 달리 독자적인 군대도 보유할 수 있었다.
[111]
히틀러는 개인적으로는 작은 인연이나 은혜를 잊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2]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이다.
[113]
후일 장남이자 천체물리학자인 마르틴 슈바르츠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전선에서 미군으로 참전했다.
[114]
오늘날의
올란드 제도와
핀란드 남서부,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과했고,
리가와
빌뉴스,
민스크,
키이우에서 개기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노르웨이와
스웨덴,
오스만 제국 동부(오늘날의
튀르키예 동부와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에 해당),
이란 일대와
파키스탄 해안에 이르는 지역을 통과했다.
[115]
키예프에서 관측한 미국 탐사대 중에는 대논쟁으로 유명한
히버 커티스도 있었다.
[116]
RMS 브리타닉은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의 영향으로 구명정도 많았고 느리게 침몰했던지라 30명을 제외한 모두가 살아남았지만, RMS 루시타니아는 너무 빠르게 침몰해서 무려 1198명의 사망자를 냈다.
[117]
선술했듯이 이 배는 1차 세계대전에서 침몰한 가장 큰 상선이며, 동시에
타이타닉의 자매선 이기도 하다.
[118]
이후 오스만 제국은 같은해 6월 28일 5일에 자캅카스 소비에트 위원회와 에르진잔 조약을 체결한다. 그 결과 기존에 러시아 제국이 점령하던 카르스, 아르다한, 바투미와 전쟁중 러시아가 점령하던 오스만 제국령을 전부 포기하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전쟁을 끝낸다. 하지만 캅카스 지방에서는 백군러시아와 영국군이 현지 아르메니아인과 다른 군벌들과 더불어 반볼셰비키 전쟁을 하고 있었고 캅카스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은 대상이 백군러시아와 영국군으로 바뀌어 전쟁이 계속되었다.
[119]
초반에는 중동에서 오스만이 수가 적은 영국군을 상대로 나름 활약했지만, 전황이 나빠지자 영국이 인도인 징집을 통해 대규모 병력 투입을 하고 아랍인에게 독립을 미끼로
봉기를 유도하면서 중동전선에서 오스만이 크게 불리해진다.
[120]
1940년 나치 독일과 프랑스 제3공화국간의
휴전협정도 콩피에뉴 숲에서 체결했기 때문에 제1차 콩피에뉴 휴전협정이라 한다.
[121]
1917년까지 12회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12번째 전투는 아래의
카포레토 전투
[122]
서부전선에서 미군 없이 대규모 공세를 펼친 협상군의 마지막 전투.
[123]
독일군 최후의 서부 공세. 동부전선에서 승리한 독일이 병력을 끌어모아 총 5차례 공세를 펼쳤으나 결국 실패로 끝난다. 이후 협상군의 반격(백일 전투)으로 인해 독일군은 붕괴한다.
[124]
백일 전투 1차 공세 기간에 벌어진
미군의 첫 공세이다.
[125]
대전 초기 러시아군 총사령관.
[126]
이 당시에는 그냥 장교였다.
[127]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128]
인도네시아인인척 했던 네덜란드 출신이지만, 독일에 포섭된다.
[129]
붉은 남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독일 육군 항공대
에이스
[130]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원수의 대대에서 근무했다.
[131]
20년후에 그는
제3제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
[132]
안네 프랑크의 부친.
솜 전투와 캉브레 전투에 참전했다, 종전 후
15년 뒤 그는 자신이 목숨바쳐 지키려 했던
조국에게
배신당했다.
[133]
이때는 일선 파일럿.
[134]
전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자 군에서 퇴역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연금을 수령받으며 살았다. 그러다가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고는 독일 시민이 되었으며, 1940년에는 원수 계급을 수여받았다. 단 이 당시 뵘에르몰리는 고령이라 실제로 부대를 지휘하지는 않았고 제28보병연대의 명예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여생을 보내다가 이듬해에 사망했다.
[135]
이때는 해군 제독.
[136]
이탈리아 전선에서 포병 장교로 복무했다.
[137]
독일이 이겼다면 프랑스와 영국의 몰락으로 인해 세계가 혼란에 빠지고 민주주의가 크게 몰락했을 거라는 추측이 있긴 하지만, 지나치게 한쪽만 바라본 시각이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도 의회가 있었고, 민주주의도 서서히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유주의 풍토가 매우 강했고, 새로운 황제
카를 1세도 자유주의적인 개혁에 호의적이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민주주의가 몰락했을 가능성은 낮다. 독일 제국은 매우 군국주의적이긴 했지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원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만약 그게 아니었으면 사민당이 제국 여당이었을 리도 없고, 스스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설립되었을 리도 없다. 무엇보다도 대체역사는 아무도 정확히 추측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에 동맹국이 승리했다고 세상이 암울할 거라는 주장은 충분한 가능성을 지닌 이야기이긴 하지만 동시에 지나친 비약이기도 하다. 다만 동맹국의 패배로 제국이 해체되어 전제군주제가 몰락했었던 만큼 동맹국의 승리시 군주제가 오늘날처럼 약소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138]
Weltkrieg(벨트크리그), 독일이 승리했고 그래서 1차 대전도 영어인 The Great War가 아니라 독일어인 Weltkrieg로 표기한다.
[139]
이 세계관에선
러시아 내전에서 트로츠키와 레닌 등의 주요 적계 인사들이 모두 현실보다 더 일찍 사망하고,
콜차크,
코르닐로프 등의 백계 주요 인사들의 명줄이 길어지면서
볼셰비키와 공산주의는 과격 좌익 사상계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그 대신 고도의 공업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빈민 노동 계층이 마르크시즘을 흡수하여, 노조들이 정치 체계를 이루는
생디칼리슴이 주류가 된다.
[140]
청나라같은 경우에는 프랑스 코뮌의 지원을 받은
장제스의 북벌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중화민국 북양정부를 독일이 직예군벌의 실권자
우페이푸를 지원해서 온전하게 살려냈고, 이후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불러와서 청 조정을 만들고, 다른 군벌도 조정에 법적으로는 충성하며 중국을 안정화시킨다. 또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당시 얻은 중앙 ~ 동유럽 지역들에는 러시아가 내전으로 혼란한 사이를 틈타 재빠르게 독일이 독일계 귀족과 왕족들을 주요 정치적/외교적 인사들로 배치함으로써 '라이히스팍트' 세력권을 만들어냈다.
[141]
사실 영국과 이탈리아도 정상은 아니다.
[142]
카프카 같은 당대의 지성인에게도 이 전쟁이 발발 당시에는 딱히 수백만 명을 저승에 보내며 유럽 문명을 뒤집어 엎을 중대한 사태로는 인식되지 않았다는 증거.
[143]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그가 1914년 8월 3일 영국의 참전 결정 후, 그의 친구에게.
[144]
작가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자였다.
[145]
사실 첫 번째 어록 자체는 전쟁 전에는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붓지만 결과적으로는 소규모 국지전이 되는 충돌을 통한 전쟁의 해소를 의미했다. 이후에는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조직이 생길 거라고 본 것. 실제로 그 예상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성능이 충분하지 못했을 뿐. 그리고 전쟁 뒤에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못할 만큼 끔찍한 전쟁"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146]
첫 번째 어록은 전쟁 극초기인 1914년 8월에 나온 말로 문서 상단에서 언급했듯이 굉장히 냉소적인 발언이다. 전쟁의 규모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전쟁의 명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며 한 말에 가깝다. 본래 의미는
[147]
프랑스 보병 중위였던 그가 사망하기 전에 적은 일기(1916년 5월 23일) 내용이다. 출처는 <참호에서 보낸 146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