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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페준타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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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페준타 제국
Αυτοκρατορία της Τραπεζούντας
Aftokratoría tis Trapezoúntas
파일:Banner_of_the_Empire_of_Trebizond.svg
국기
파일:Map_of_the_Empire_of_Trebizond.svg
트라페준타 제국의 영토
1204~ 1461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위치 서아시아[1]
크림 반도
수도 트라페준타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2]
주요 군주 알렉시오스 1세(1204~1222)
민족 로마인( 그리스인), 라즈인
언어 폰토스 그리스어, 라즈어[3]
종교 정교회
통화 히피르피론
주요사건 1204년 건국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212년 시노페 상실
1254년 시노페 탈환
1265년 시노페 재상실
1461년 멸망
언어별 명칭
그리스어 Αυτοκρατορία της Τραπεζούντας
튀르키예어 Trabzon İmparatorluğu
영어 Empire of Trebizond

1. 개요2. 역사
2.1. 건국과 영토 확장기2.2. 전쟁과 패배2.3. 급조된 제국2.4. 룸 술탄국과의 전쟁2.5. 희망의 시기와 드리우는 그림자2.6. 팔레올로고스 왕조와의 대립2.7. 알렉시오스 2세, 전성기2.8. 쇠퇴하는 제국2.9. 멸망2.10. 이후 황족들2.11. 현대
3. 황제 목록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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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페준타, 혹은 트레비존드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 국가로 13~15세기 동안 트라브존 지역[4]에서 번영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성을 대(大) 콤니노스라는 뜻의 메가스 콤니노스로 바꿨다.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같은 동로마의 후계 국가이지만, 두 국가와는 다르게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전에 세워졌다.

현재 튀르키예의 축구 명문클럽인 트라브존스포르의 어원도 연고지인 트라브존(Trabzon)이다. 트라브존을 중세 그리스어로는 트라페준타(Τραπεζούντα)[5]라고 하므로 '트라페준타 제국'이라고도 하며, 영어로도 'Trapezuntine Empire'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트레비존드 제국'으로도 알려져 있다. 트레비존드는 원어인 트라페준타를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2. 역사

2.1. 건국과 영토 확장기

동로마 콤니노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1185~1188)는 반복된 실정 끝에 인심을 잃고, 5촌 조카인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1188~1198)에게 제위를 빼앗긴다. 황제와 황태자 마누일은 살해당했고 황태자비 루수단은 두 아들,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를 데리고 이사키오스의 추격을 피해 제국 동부 흑해 남부 연안 지역으로 몸을 피한다.[6] 루수단은 친정 조지아 왕국의 도움을 받아 정착하였고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는 루수단의 언니이자 조지아의 위대한 여왕 타마르 1세의 지원을 받으며 트라페준타, 카스타모니를 포함한 파플라고니아 폰토스의 지배권을 손에 넣고 빼앗긴 제국을 되찾을 야망을 키워나갔다.

이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자 그 충격은 로마 제국 전체뿐만 아니라 서유럽 가톨릭 세계, 이슬람 세계까지도 그 여파가 전해졌다.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라틴 제국이 세워지고 제국이 멸망할 때 겨우 도망쳐나온 황족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 니케아 제국을 설립하여 이에 맞서며 혼란이 거듭되자 알렉시오스는 동생 다비드에게 군대를 주어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 헤라클레아를 점령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로마인들의 황제"를 칭하고 동생인 다비드 콤니노스는 "폰토스와 파플라고니아의 주인"이라 칭하며 자신들의 성을 '콤니노스'에서 '메가스 콤니노스', 즉 '대 콤니노스'라고 바꾸고 자신이 로마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임을 주장하며 트라페준타에서 제국의 재건을 선포,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1204~1222)로 즉위한다.

알렉시오스 1세는 파플라고니아 장악 후 동부로 눈을 돌려 어머니의 친정 조지아 왕국의 국경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로마 제국의 속령이었으나 멸망 이후 붕 떠버린 크리미아 지역을 자국령으로 편입하여[7] 흑해의 남북 양안에 영토를 갖게 되었다.

2.2. 전쟁과 패배

동부 확장을 마무리지은 알렉시오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진정한 주인을 가리기 위해 서부로 향했다. 동생 다비드에게 군대를 주어 니케아 제국 니코메디아를 공격하게 했으나 니케아 제국군에게 대패, 다비드는 이어서 라틴 제국과의 동맹을 통해 니케아 제국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를 다시금 공격하려 했으나 라틴 제국은 동유럽의 신흥 강자 불가리아 제국의 공격을 받고 있어 니케아 제국을 공격할 여력이 없었고 때맞춰 룸 술탄국이 트라페준타 제국에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와 이를 막아야 했던지라 결국 니케아에 대한 합동 공격은 무산되었다.

이미 1205년부터 로마 제국의 정통 황제임을 주장하던 니케아 제국 테오도로스 1세는 트라페준타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나톨리아 서부 일대의 지방 귀족들을 규합한 다음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집전을 받아 1208년 정식으로 로마 제국 황제 즉위식을 열어 자신이 정통 로마 황제임을 선포하였다. 이후 알렉시오스 1세 니케아 제국에 몇 차례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니케아가 라틴 제국과 룸 술탄국에 의해 멸망 직전까지 몰린 최악의 상황에서도 연달아 니케아에게 패배했다.

2.3. 급조된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은 건국 이후 아나톨리아의 흑해 연안을 따라 동쪽과 서쪽으로 영토를 착실하게 넓혔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제4차 십자군으로 동로마 제국 중앙 정부가 붕괴되면서 로마령 아나톨리아 일대에 권력의 공백이 생긴 덕분이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에서 할거하던 지방 귀족들이 테오도로스 1세 아래 니케아의 이름으로 결집하였고 니케아가 존망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기고 니케아의 지배가 굳건해지면서 더 이상의 확장은 무위로 돌아갔다. 더구나 트라페준타 제국은 체계적인 통치 체제나 군사 정책, 국경 방어 대책 등이 효과적으로 운영되지 못해 언제든지 위기가 찾아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1214년, 위기를 수습한 니케아는 트라페준타의 동맹인 라틴 제국이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정신없는 틈을 타 파플라고니아 수복을 노리고 트라페준타를 공격하였다. 그와 동시에 니케아와의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술탄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한 룸 술탄국 역시 니케아와 야합하여 트라페준타 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고 트라페준타 제국의 서부 연안 도시인 시노페가 함락되고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포로로 붙잡히고 만다. 룸 술탄국의 술탄 케이카우스 1세(1211~1220)는 알렉시오스 1세의 석방과 공물과 병력 차출의 의무를 지는 신종의 예를 표하는 것을 대가로 제국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가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했고 선택지가 없던 알렉시오스 1세는 이를 받아들여 풀려난다. 풀려난 황제는 수도 트라페준타에 틀어박혀 죽을 때까지 내정에만 전념하였다.

케이카우스 1세는 시노페를 점령하여 오랜 염원이던 흑해 방면 항구를 손에 넣었다. 술탄은 이를 자축하여 자신의 업적을 아랍어 그리스어 두 문자로 새겨 영원히 기억하게 했고 이 기념물은 시노페가 시노프가 된 현대시대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 동로마계 세력이 점유하고 있던 아탈레이아 역시 점령하여 지중해 방면 항구도 손에 넣었고 이로써 룸 술탄국은 명실상부한 아나톨리아의 패자가 된다.

한편 룸 술탄국의 침공은 트라페준타 제국에 치명상을 안겼다. 서부 영토를 상실한 트라페준타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유일한 길을 잃어 로마 제국의 정통 황제를 가리는 제위 경쟁에서 탈락했다. 상당한 국력을 잃은 제국은 1222년 알렉시오스 1세가 4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 트라페준타와 인근 지역, 그리고 크리미아 지역만을 제국의 영토로 보존할 수 있었다.

2.4. 룸 술탄국과의 전쟁

알렉시오스 1세는 자신이 죽을 때, 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사위 안드로니코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새롭게 제위에 오른 안드로니코스 1세 기도스(1222~1235)는 치세 초기부터 중대한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시노페에 주둔한 룸 술탄국 함대가 크리미아 지역의 중요한 항구인 솔다이아[8]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는데[9] 이는 이전 알렉시오스 1세가 동의한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즉각 함대를 소집하여 시노페로 돌아온 룸의 함대를 기습하여 크리미아 지역에서 약탈한 재물들을 모두 되찾아왔으나 룸 술탄국의 분노를 사 대대적인 침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계속된 폭풍으로 룸 술탄국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 술탄은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며 트라페준타 제국에게 협상을 제안한다.

이 과정에서 트라페준타 제국은 술탄을 패장이 아닌 한 국가의 제왕으로 제대로 대우해주었고 이에 감동한 술탄은 이전 조약에서 제국에게 부과된 모든 의무를 면제해주는 한편 붙잡은 포로들을 모두 석방시키고 술탄의 숙영지로 쓰였던 성 에우게니우스 수도원에 헌금을 약속하고 매 해마다 아랍의 명마를 선물해주겠다 하며 제국과 술탄국 사이의 분쟁은 평화롭게 종식되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아나톨리아의 정세는 트라페준타 제국의 평화를 오래 지속시켜주지 않았다. 칭기즈 칸에 패배해 쫓겨온 호라즘의 마지막 샤, 잘랄 웃 딘 밍부르누 조지아 왕국을 격파하며 이들을 신종시켰고 뒤이어 트라페준타 제국에 자신과 룸 술탄국 사이에서 편을 명확하게 밝히라고 요구받는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고심 끝에 잘랄의 뛰어난 수완을 믿고 그와 동맹을 맺었으나 1230년, 잘랄은 아클라트 전투에서 룸 술탄국 군대에 대패하고 이듬해 들어서 룸 술탄국에 고용된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도박은 최악의 결과를 낳았고 트라페준타의 배신 행각에 분개한 룸 술탄국은 이전 술탄이 면제해준 모든 의무를 부활시켰다.

뒤이은 몽골의 침공으로 조지아 왕국의 바그라투니 왕실은 멸망은 피했으나 약소국으로 전락해버렸고 트라페준타 제국과 조지아 왕국은 나란히 지역 소국으로 근근히 생존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1235년 사망하였고 알렉시오스 1세의 장남이었던 요안니스 1세 메가스 콤니노스 악수코스(1235~1238)가 즉위했으나 3년 만에 폴로 경기를 즐기던 중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차기 황위를 두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고 요안니스의 아들이었던 요안니키오스는 강제로 수도자가 되고, 요안니스의 동생인 마누일 1세 메가스 콤니노스(1238~1263)가 황위에 오르게 된다.

2.5. 희망의 시기와 드리우는 그림자

동쪽에서 몰려드는 몽골군에 맞서 룸 술탄국은 트라페준타, 조지아 등에 병력을 차출하여 연합군을 꾸린다. 마누일 1세는 계속된 차출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으나 1243년, 룸 술탄국이 몽골군에게 처참히 짓밟히며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며 트라페준타 제국의 희망의 빛이 드리우게 된다.

마누일은 우선 1253년,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청했다. 황제는 프랑스가 다시금 십자군을 일으켜 룸 술탄국은 물론 니케아 제국까지 쳐부수어주길 희망했으나 루이 9세는 단지 트라페준타와 라틴 제국 사이의 결혼 동맹을 제의해주는 것 이상으로 지원을 보내진 않았다.[10]

프랑스와의 동맹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마누일 1세는 군대를 소집했다. 1254년, 트라페준타 제국은 40년 전 빼앗긴 시노페에 공격을 감행하여 함락시키게 된다.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아나톨리아 지역의 패권이 무주공산 상태에 빠져있어 룸 술탄국과 아바스 칼리파조를 비롯한 모든 이슬람 세력은 이에 대응하지 못했고 되려 1258년, 몽골군에 의해 수도 바그다드가 파괴당하고 아바스 왕조는 멸망한다.

아바스의 멸망은 트라페준타 제국에 드리우는 희망의 빛이 되었다. 제국은 직면해있던 위협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 바그다드의 파괴 이후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로 이어지던 무역로가 끊어졌는데, 상인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 페르시아 만에서 호르무즈에 입항하여 몽골 제국령이 된 페르시아를 관통한 후 북상하여 트라페준타에 들어가 거기에서 흑해로 나가는 방법을 택하게 되며 트라페준타 제국에 무역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마누일 1세는 부유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제국을 다스렸고 부를 바탕으로 트라페준타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누일 1세 치세 말기에 제국의 정통성에 치명상을 입히는 대형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니케아 제국의 정통 황제 요안니스 4세 라스카리스와 공동 통치를 시작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1258년, 펠라고니아에서 라틴 제국군을 대파한데 이어 1261년에는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로마의 정당한 지배자임을 널리 알린 것이다.

라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빼앗긴 뒤 1년도 안되어 멸망하였고 이로써 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임을 주장하던 대(大)콤니노스의 트라페준타 황실은 명분을 잃고 한낱 트라페준타와 인근 지역의 주권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2.6. 팔레올로고스 왕조와의 대립

1263년, 제국을 다시 중흥기로 되돌린 마누일 1세가 사망하고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 메가스 콤니노스(1263~1266)가 제위에 올랐다.

일 칸국의 신하국이 된 룸 술탄국은 트라페준타 제국을 다시금 위협하기 시작했고 마누일 1세가 겨우 되찾은 시노페는 룸 술탄국의 공격에 함락당하며 제국의 중흥기에 제동이 걸린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3년 만에 사망하고 이복동생인 게오르기오스 메가스 콤니노스 플라노스(1266~1280)가 뒤를 이었다. 게오르기오스는 곧 루이 9세의 동생으로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된 카를루 1세가 주창한 반 동로마 제국 동맹에 가입했다.[11]

이 동맹의 결성과 여기에 대한 맘루크 왕조의 개입은 동로마 제국의 동맹이며, 룸 술탄국을 대신하여 게오르기오스의 상전이 된 일 칸국의 칸, 아바카 칸을 화나게 했다. 아바카는 당장 그를 소환하여 포로로 붙잡았다. 이리하여 포로 생활을 하던 중, 1280년 트라페준타에서 정변이 일어나 요안니스 2세 메가스 콤니노스(1280~1284, 1285~1297)가 제위에 올랐다.

요안니스 2세는 그를 잠재적인 적으로 보고 있는 팔레올로고스 황가로부터 '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 군주'라는 칭호를 포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요안니스 2세는 전임자들의 선례를 자신이 깰 수는 없을 것이라며 이것을 거절했다. 그는 카를루 1세와의 동맹을 그대로 유지하며 동로마 제국의 내분을 유도하였으나, 미하일 8세가 좋은 조건으로 자신의 딸과 결혼할 것을 제안하자 그는 마지못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맹자가 되겠다고 서약했다. 그 댓가로 그는 '로마인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 이베리아, 페라테이아와 모든 동방령의 황제'라고 자칭했다. 그러나 자신의 가문을 대 콤니노스라고 표기할 수 있는 권한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는 결혼을 위해 트라페준타를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여동생 테오도라는 조지아인들의 지원을 받아 1284년, 자신을 여제라 칭하고 제위를 찬탈했으나 그녀는 요안니스 2세가 귀국하자 곧바로 쫓겨나고 말았다. 요안니스 2세가 동로마 제국의 동맹이 되자, 똑같은 동맹자로서 상전으로서의 입지가 약해진 일 칸국은 그에 대한 압박을 서서히 완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트라페준타 제국의 경제적 번영은 계속되고 있었으나 이제는 투르크 족과 조지아 인이 제국을 동서에서 침공하기 시작했다. 또, 교황 니콜라오 4세는 그에게 서신을 보내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권유했는데 당연하게도 요안니스 2세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돈은 벌어야 했기에 서유럽 상인들과 좋은 관계는 그대로 유지했다. 요안니스 2세는 어려운 치세를 이겨내고 1297년 사망하여 트라페준타에 안장되었다.

2.7. 알렉시오스 2세, 전성기

요안니스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2세 메가스 콤니노스(1297~1330)가 즉위했다. 그는 14세에 제위에 올라 외삼촌인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의 후견을 받아들였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동로마 제국의 대신의 딸을 그의 배우자로 낙점하고 있었으나, 알렉시오스는 후견인의 허락도 없이 이베리아(카프카스)의 공주와 혼인해버렸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총대주교가 이미 공주가 임신했다는 이유로 그 결혼을 인정하자, 그도 그것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후견이 끝나자, 그는 유능한 통치자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는 1302년과 1303년의 전투에서 튀르크 족의 침입을 격파하고 그 장군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알렉시오스 2세는 흑해의 상권을 장악한 제노바 인들과도 대립하였다. 당시 제노바 인들은 1261년의 님파이움 조약 이래 베네치아의 개입을 뿌리치고 흑해에 식민지를 구축하는 등 빼어난 활약을 벌이고 있었고 그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르기를 공공연히 거부하고 있었다. 1306년, 알렉시오스 2세가 그들의 상거래에 세금을 부과하려 하자 그들은 일제히 퇴거하겠다면서 그를 위협했다. 이에 그는 조지아인 용병대를 거느리고 제노바 상인들을 공격했고 두 나라는 곧 전쟁에 들어갔다. 제노바도, 트라페준타도 이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의외로 이 전쟁은 제노바가 잃을 것이 존재한 전쟁이었다. 그들은 어쨌든 트라페준타에서 물건을 들여와 유럽에 물건을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1314년, 알렉시오스와 제노바가 다시 협상하여 통상 조약을 갱신하면서 두 나라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알렉시오스는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깨달았고 이에 대한 방안으로 1319년, 그는 제노바 상인과 똑같은 대우를 하는 조건으로 베네치아와도 통상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제노바는 한동안은 트라페준타의 상권을 위협할 수 없게 되었다. 제노바와의 문제가 해결 되자, 이제는 시노페의 에미르가 문제거리로 떠올랐다. 시노페의 에미르는 해적단을 고용하여 기독교 상선대를 위협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트라페준타 령을 직접 습격하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로 제국의 골칫거리였다. 그는 이에 대비하여 항구에도 성곽을 건설하고 조직적인 경찰 시스템을 구축하여 트라페준타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치하에서 트라페준타는 최고로 발전하여, 영토는 작지만, 부는 웬만한 왕공들을 상회했다고 한다.

2.8. 쇠퇴하는 제국

알렉시오스 2세가 33년의 긴 통치를 마감하자, 이베리아 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안드로니코스 3세 메가스 콤니노스(1330~1332)가 제위에 올랐다. 알렉시오스 2세는 아들을 많이 낳았는데, 안드로니코스 3세는 많은 동생들이 차후 자신의 통치에 불안 요소가 될 것이라 판단했는지 제위에 오르자 마자 자신의 동생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그 동생들 대부분은 살해당했으나, 바실리오스는 삼촌 미하일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32년에 갑자기 죽었고, 뒤를 이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사생아인 마누일 2세 메가스 콤니노스(1332)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8살 된 유아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곧 퇴위당했고 트라페준타 귀족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망가 있던 바실리오스 메가스 콤니노스(1332~1340)를 제위에 앉혔다. 바실리오스는 처음에 마누일을 살려두려 했는데, 대신 요안니스가 마누일 2세의 복위를 획책한 반란을 꾸미자 이 반란을 간단히 진압하여 자신의 제위를 공고히 했고 자신의 지위에 골칫거리가 된다는 것이 증명된 마누일 2세를 살해하였다. 바실리오스는 자신을 옹립한 트라페준타 귀족들에 대해 보상을 하였는데, 이 보상으로 귀족들은 모두 영지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 영지에서 권력을 남용해버렸고 신민들은 이런 보상을 한 그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또한 친위대이자 수도 방위대인 스콜라리 역시 외국인 용병에게 의지하려 드는 그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바실리오스는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사생아,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해서 입지를 개선하려 했으나 그는 아내에게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리니라는 다른 정부를 만들어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이리니 팔레올로기나는 이런 남편의 행태에 불만을 품었고, 결국 1340년 그를 독살하고 제위를 찬탈함으로써 앙갚음을 하였다.
이리니 팔레올로기나는 바로 자신을 여제로 칭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대파 역시 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녀가 데려온 용병 등은 이리니 팔레올로기나를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스콜라리 세력이나 트라페준타의 호족 연합은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에 반대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단결력이 매우 형편 없었기 때문에 곧 이리니의 조직적인 진압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동시에 튀르크 족이 침공해 왔는데, 첫 번째 공격은 어찌어찌 격퇴할 수 있었지만, 2번째 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튀르크 측에 전염병이 퍼지고 나서야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2차에 걸친 튀르크의 침공으로 완전히 피폐해진 이리니의 세력에 전에 살아남았던 반란군 세력이 다시 결집하여 도전을 해왔다. 호족 연합은 이미 수녀가 되어 있던 안나를 옹립해 트라페준타로 진격했고, 스콜라리 세력은 지난날 바실리오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피해 있던 미하일을 옹립했다. 안나는 이리니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고, 뒤이어 미하일도 트라페준타에 도착했다. 안나는 여자라서 미하일이 제위를 점하는 듯했다. 그러나 호족 연합은 자신들이 정권을 쥐고 싶었기 때문에 억지로 안나를 단독 군주로 세우고 미하일은 자신들의 포로로 잡아 쫓아냈다. 미하일 메가스 콤니노스는 트라페준타의 중요한 성채 도시였던 오이나이온에서 자신에게 때가 오기를 기다리게 된다. 그 동안 수도에서 배제되어 있던 스콜라리 세력은 미하일 메가스 콤니노스의 아들, 요안니스 3세 메가스 콤니노스(1342~1344)를 옹립하여 트라페준타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제위에 오른 요안니스 3세는 곧 무능한 통치자임이 입증되었다. 호족 연합 세력은 거의 박멸되었고, 잔존 세력만이 남아 간간이 저항을 이끌고 있었는데 요안니스 3세는 대관식을 마치자 마자 곧 사치에만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호족 세력에 의해 포로로 붙잡힌 아버지의 안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스콜라리 세력은 자체적으로 군대를 조직해 요안니스 3세의 아버지인 미하일 메가스 콤니노스를 호족 연합의 손에서 구한 뒤 요안니스 3세를 폐하고 미하일을 즉위시켰다.

이리하여 즉위한 미하일 메가스 콤니노스는 권모술수에 뛰어난 남자였다. 우선, 미하일은 그를 즉위시키긴 했으나 황권 강화에 걸림돌이 될 스콜라리에게 덫을 놓았다. 바로 스콜라리에게 공에 비해 지나친 보상을 해주는 미운 아이 떡 하나 더주기 전략으로 실제로 스콜라리가 너무 과하게 보상을 받았다며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미하일은 이 불만 세력과 스콜라리의 대립에 편승하여 스콜라리 세력을 타도하고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에 폐위된 자신의 아들 요안니스 3세를 인질로 보내 호족 연합이 재기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일을 미리 막았다. 동로마 제국은 요안니스 3세를 처음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데리고 있다가 나중에는 그가 트라페준타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아드리아노폴리스에 가둬버렸다. 1346년엔 튀르크가 트라페준타를 공격해왔으나 마침 흑사병이 돌아 튀르크 군의 세력이 약해지고 1348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도시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바로 그 해, 제노바인들이 1340년대 초반 내전 당시 제노바인들이 대량학살된 데 대한 앙갚음으로 트라페준타 령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케라수스를 점거했다. 내전으로 피폐해져 있던 트라페준타 함대는 당시 세력의 절정을 달리던 제노바 함대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미하일은 케라수스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중요한 성채 레온토카스트론을 넘겨주어야 했고, 베네치아와의 관계를 끊어야만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미하일은 지난날 자신이 탄압했던 스콜라리의 대장, 니키타스 스콜라리스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니키타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바실레이오스의 아들, 알렉시오스 3세를 데리고 와 제위에 앉혔다.
알렉시오스 3세 메가스 콤니노스(1349~1390)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바실리오스를 암살한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져 그곳 궁정에서 자라난 터였다. 11세가 되었을 때, 그는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에 의해 트라페준타로 보내져 황제로 옹립되었다. 전 황제 미하일 메가스 콤니노스는 수도자가 됨으로써 그의 제위가 공고해졌다. 처음부터 알렉시오스를 지지하며 계속 후원했던 로마 황제 요안니스 6세는 1351년에 자신의 친척을 알렉시오스와 결혼시킴으로써 그런 관계를 강화했다. 국내적으로는 호족들간의 대립으로 입지가 별로 좋진 않았지만, 아크 코윤루와의 동맹으로 대외 입지는 탄탄해졌다. 내전기에 크리미아 내륙부는 거의 반독립적 상태가 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테오도로 공국을 자칭하고 아르메니아 출신 귀족을 공작으로 옹립하여 트라페준타와의 우호를 다짐했다. 테오도로 공국의 자발적 종속과 함께 알렉시오스 3세의 국내의 입지가 점점 강해지자, 니키타스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을 깨달은 니키타스는 케라수스에서 1354년에 군대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니키타스가 포로로 붙잡혀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1340년부터 15년동안 지속된 긴 내전은 끝났다. 이렇게 내부 정리를 마친 알렉시오스 3세는 국경 강화에 착수했으나 1360년에는 호족들이 또 반란을 꾀했다. 이 반란 음모를 분쇄하는 와중에 그는 대토지 소유 호족들을 탄압하여 황권을 강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지난날 내전에 개입하여 이득을 챙기고, 흑해에서 점점 베네치아를 배제해가고 있는 제노바를 견제하기 위해 베네치아와 다시 통상 조약을 맺고 지난날과 같은 특권을 주는 한편 두 도시국가의 영향력을 분쇄하려는 공작을 펴고 있었다. 당연히 베네치아는 불만을 품고 내부의 반란 분자를 선동하여 반란을 획책하기도 했다. 베네치아와의 관계는 곧 수습됐지만, 알렉시오스 3세는 베네치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음을 알게 되어 그들의 상품 수입량을 지속적으로 줄였다. 이후로도 내전으로 파괴된 건물을 재건하고 수도원을 지원하는 등 내부의 여력을 회복하는데 집중하다 1390년 평화롭게 사망했다.
뒤이어 제위에 오른 인물이 마누일 3세 메가스 콤니노스(1390~1417)이다. 1391년부터 1396년까지 그는 베네치아와의 관계 개선에 힘을 쏟았는데 이는 제노바가 앙심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기간 중에 트라페준타의 직할령으로 크리미아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었던 케르손 항이 킵차크 칸국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당하며 트라페준타의 외교적, 상업적 역량이 타격을 입게 되었다. 1402년, 티무르 아나톨리아를 침공해왔는데 이때 티무르는 트라페준타 제국에게 자신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하고, 마누일은 이것을 수락했다. 이어서 벌어진 앙카라 전투는 티무르의 대승으로 끝이 나면서 그동안 유럽과 아나톨리아에 걸쳐 세력을 구축하고 로마 제국과 트라페준타를 위협해오던 오스만 술탄국은 거의 공중분해 됐고 마누일의 선택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외부 위협이 없다 본 것인지 그 동안 제위에 눈독을 들여오던 아들 알렉시오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 마누일은 그에게 전제군주의 호칭을 주면서 달래고자 하였으나, 알렉시오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제위를 노리며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주변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아버지와 화해를 하게 된 알렉시오스의 끈질긴 시도는 1417년 마누일이 평화롭게 사망한 후에야 성공할 수 있었다. 알렉시오스 4세 메가스 콤니노스(1417~1429)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여 제노바와 대립했다. 결국 제노바는 더 참지 못하고 트라페준타의 함대를 괴멸시키고 말았다. 1418년, 제노바는 황제에게 정전 협정과 보상금 지불을 골자로 하는 조약문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고 그 결과 1422년까진 다시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1425년부터 다시 제노바와 분쟁이 벌어졌다. 이 두 국가는 1428년에야 화해했으며 이후로는 우호 증진에 힘쓰기 시작했다. 티무르가 떠난 후,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국가들은 대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그들 중 가장 강력한 두 왕조가 카라 코윤루와 아크 코윤루였다. 알렉시오스는 이 두 왕조의 존재가 두려워 했고 카라 코윤루 아크 코윤루에 모두 딸을 시집보내 두 왕조와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다. 또, 딸을 동로마 황실에도 시집을 보내 그들과의 관계도 강화했는데 그가 보낸 딸이 당대의 유럽 최고 미인으로 유명했던 트라페준타의 마리아로, 그녀는 당대 유럽 최고 미남으로 손꼽히던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내가 되어 로마의 마지막 황후로 역사에 남게 된다.[12] 알렉시오스는 대외적으로는 다른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대내적으로는 아들과의 불화, 의심 많은 성격 등으로 고난이 많았다. 알렉시오스의 아들 요안니스는, 그를 죽이려 하다가 시도가 실패하자 조지아로 도망가 있던 터였다. 그는 조지아에서 다시 카파로 도망가 그곳에서 병력을 모았다. 제노바인들은 그를 지지했으며, 그렇게 모은 군대로 트라페준타를 공격해왔다. 알렉시오스 4세는 저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요안니스가 이기기를 바라는 어떤 귀족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2.9. 멸망

파일:오스만 1461.png
1461년 오스만 제국의 트라브존 정복. 좌측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인상적이다.

요안니스 4세 메가스 콤니노스(1429~1459)는 아버지에 대한 암살 시도가 실패하자 조지아로 도망가, 그곳 공주와 결혼하여 조지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그가 제위에 오른 후 한 첫 일은 아버지를 살해한 귀족을 처단하고, 아버지의 시신을 고이 재매장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꽤나 민심을 얻은 것 같다. 이렇게 나라를 통합하자, 트라페준타의 안정이 별로 달갑지 않았던 튀르크의 군소 성주들이 연합해서 트라페준타를 공격해왔다. 이 시도는 실패했지만,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무라트 2세의 이목을 끄는데에는 성공했고 1442년 무라트 2세는 함대를 보내 트라페준타와 페라테이아(트라페준타령 크리미아)를 약탈하고 다녔다. 그러나 튀르크 함대는 급조된데다 허약했기 때문에 트라페준타에 큰 타격을 주는데는 실패한다. 무라트 2세는 이후 트라페준타보다는 동로마 제국과 세르비아, 불가리아 문제로 관심을 돌려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마지막 십자군을 대파하여 동로마 제국 재건의 마지막 시도를 물거품으로 만들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145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특사 스프란체스가 왔다. 그는 형처럼 빼어나게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위엄있고 기품이 넘치는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11세와 트라페준타의 왕녀 혹은 조지아의 왕녀와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는 트라페준타에서는 성사되지 못하고 조지아의 왕녀로 낙점되었지만,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영웅적인 항전 끝에 전사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이 멸망해 실현되지 못하고 만다. 서유럽 세계의 충격도 컸지만, 무엇보다 이것은 트라페준타, 그리고 가까운 정교권 슬라브 왕국들에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 종교적, 사상적, 경제적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그 동안 오스만의 관심을 끌어주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됨에 따라 이제 이들이 오스만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라페준타는 한층 사정이 더 나빴던 것이, 메흐메트 2세가 해협세를 부과함에 따라 이제 흑해를 드나드는 유럽 상인의 수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이는 트라페준타와, 주로 흑해 무역으로 번영하던 제노바의 경제적 쇠퇴를 의미했고 국력의 쇠퇴 또한 불러왔다. 1456년, 메흐메트 2세는 아마시아의 에미르를 보내 트라페준타를 수륙 양면에서 공격해왔다. 도시가 거의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1458년 그는 동생 다비드를 보내 항복과 공물을 바치겠다는 뜻을 전해야만 했다. 메흐메트 2세는 매우 높은 연공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휴전을 받아들였고 1459년, 요안니스 4세는 트라페준타에서 사망했다.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인물이 다비드 메가스 콤니노스(1459~1461)이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절망적이었고, 전통적 동맹인 조지아마저도 트라페준타를 외면할 정도였다. 즉, 이 시점에서는 누구도 이미 멸망이 임박한 트라페준타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13] 마침내 1460년 오스만 제국에서 개전 명령이 떨어졌다. 트라페준타 제국은 산발적인 저항을 시도했지만, 애초에 오스만 제국군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다비드는 마지막 방책으로나마 일단 제국의 목숨을 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조건부 항복을 내걸었으나, 메흐메트 2세는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결국, 1461년 8월 15일, 트라페준타의 황제가 오스만 술탄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로마인들의 마지막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14]

2.10. 이후 황족들

그 후, 콤니노스 가문은 메흐메트 2세가 로마 황실과 관련된 인사는 멸족시키려는 정책 때문에 1463년 거의 괴멸되고 만다. 1463년 다비드가 알 수 없는 트집을 잡혀 처형당할 때 황태자였던 알렉시오스 역시 불경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같이 처형당했으며 요안니스 4세의 아들들과 알렉시오스외 나머지 다비드의 아들들도 모두 이 때 처형당한 것 같다. 단 1명, 다비드의 아들 요르고스는 진작부터 무슬림인 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으며 결국 조지아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요르고스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다. 다비드의 딸 안나 메갈리 콤니니는 술탄의 하렘으로 들어갔다가 튀르크족 장군의 아내가 되었고, 또 다른 딸은 조지아의 영주와 결혼했던 것 같다.

2.11. 현대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오스만 제국이 패전국이 되면서 승전국인 유럽 열강들은 제국의 여러 영토를 서로들 가져가려고 했고 특히 동로마 제국의 후계국을 자처한 그리스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처사에 반발한 아타튀르크가 주도한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그리스와 연합국이 거하게 패하면서 죄다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트라페준타 제국의 후계자들이라 할 수 있던 폰토스 그리스인들 역시 휘말리게 되는데 사실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본토의 그리스 왕국에 합병되는 것은 별로 관심없어 했고, 파리 강화 회의에서 " 폰토스 공화국"을 세우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연합국은 물론 그리스조차 반대했다. 베니젤로스 총리가 보기에 신생 폰토스 공화국은 그리스 본토에서 너무 멀고, 튀르키예의 공격에서 스스로를 지키기엔 너무 약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의 아나톨리아 공격에 따라 벌어진 튀르키예 독립 전쟁의 와중에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독립국을 세우고자 민병대를 일으켰고 인근의 튀르키예인과 아르메니아 촌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20~50만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들과 튀르키예인들이 마구 학살당했다.

결국 튀르키예 공화국 성립 이후 더 강경해진 반그리스 정책으로 인해 수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살해당하고 폰토스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전역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약 150만 명[15]이 강제 이민당하여 오늘날 이 지역에서는 그리스인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16]

사실 이걸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볼 수 없는 게 폰토스 민병대가 트라브존 지역에서 벌인 학살과 약탈은 유럽 승전국들 언론까지도 엄청 욕할 정도로 악랄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경쟁 및 원한 관계가 있었던 아르메니아인들까지 덩달아 약탈과 학살도 당했고, 심지어 그리스계 혼혈이라든지 비 이슬람 소수계까지 학살 및 약탈당했다.

덕분에 이들은 철저히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튀르키예군을 지지해 이 와중에 그리스인들이 보복으로 학살당해 왔는데, 워낙에 그리스가 저지른 일도 악랄했고 증거들이 남아서 현재 그리스는 아르메니아처럼 학살이라고 튀르키예를 비난하지 못한다. 물론 그리스 극우들이야 튀르키예 측 학살이라고 주장하지만, 국제적으로 씨알도 안 먹힌다. 케말 아타튀르크 이스메트 이뇌뉘 그리스군이 벌인 학살 현장을 사진 및 여러 증거로 국제적으로 알렸고,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 신문에서도 불바다가 된 트라브존에서 폰토스 그리스 민병대에게 학살된 시체들을 보도했다. 지금도 트라브존 지역 역사 박물관에선 당시 그리스군이 불바다로 만들어버린 트라브존 사진과 당시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퇴거했지만, 그리스인들이 남겨 놓은 트라페준타 제국 시절 문화유산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

3. 황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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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스 이리니 안나 요안니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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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알렉시오스 3세 마누일 3세 알렉시오스 4세
<rowcolor=#670000> 제20대 제21대
요안니스 4세 다비드 }}}}}}}}}

안드로니코스 1세 기도스 이리니 팔레올로기나를 제외한 모든 황제는 콤니노스 일족이며 성은 메가스 콤니노스/메갈리 콤니니이다.

트라페준타 제국은 후대의 역사 용어이며, 콤니노스 가문원들은 원래 '로마인들의 황제이자 주권자'(βασιλεὺς καὶ αὐτοκράτωρ Ῥωμαίων, 바실레프스 아우토크라토르 로메), 즉 로마 황제를 자칭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미하일 8세에게 데스포티스 칭호를 받은 이후에는 로마 황제 자칭은 멈추고 '모든 동방과 이베리아(Ἰβηρία),[17] 페라테이아(Περάτεια)의 바실레프스(황제)이자 아우토크라토르'로 칭호를 바꾸었다. 여기서 이베리아는 이베리아 반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조지아 지역을 말하는 것이며 페라테이아(바다 건너)는 크림 반도 남부를 가리킨다. 그러다가 1334년 이베리아는 떼버렸고 그 상태로 멸망시까지 유지되었다.
이름 재위기간 즉위 비고
알렉시오스 1세 1204.**.**~1222.02.01 안드로니코스 1세 콤니노스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1세 기도스 1222.02.01~1235.**.** 알렉시오스 1세의 사위
요안니스 1세 1235.**.**~1238.**.** 알렉시오스 1세의 맏아들
마누일 1세 1238.**.**~1263.03.** 알렉시오스 1세의 둘째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 1263.03.**~1266.**.** 마누일 1세의 맏아들
게오르기오스 1266.**.**~1280.**.** 마누일 1세의 둘째 아들
요안니스 2세 1280.**.**~1284.**.** 마누일 1세의 셋째 아들
테오도라 1284.**.**~1285.**.** 마누일 1세의 딸
요안니스 2세 1285.**.**~1297.08.16 마누일 1세의 셋째 아들
알렉시오스 2세 1297.08.16~1330.**.** 요안니스 2세의 맏아들
안드로니코스 3세 1330.**.**~1332.01.08 알렉시오스 2세의 맏아들
마누일 2세 1332.08.01~1332.09.** 안드로니코스 3세의 맏아들
바실리오스 1332.09.**~1340.04.06 알렉시오스 2세의 둘째 아들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1340.04.06~1341.07.17 바실리오스의 황후
안나 1341.07.17~1342.09.04 알렉시오스 2세의 딸
요안니스 3세 1342.09.04~1344.05.03 미하일의 아들
미하일 1344.05.03~1349.12.13 요안니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3세 1349.12.13~1390.03.20 바실리오스의 아들
마누일 3세 1390.03.20~1417.03.05 알렉시오스 3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4세 1417.03.05~1429.**.** 마누일 3세의 아들
요안니스 4세 1429.**.**~1460.**.** 알렉시오스 4세의 맏아들
다비드 1460.**.**~1461.**.** 알렉시오스 4세의 둘째 아들

4. 둘러보기


[1] 폰토스 파플라고니아 지역 [2] 이들 중에서 요안니스 2세, 알렉시오스 2세 두명만 바실레우스(황제)와 데스포티스 칭호를 겸했다. [3] 지역 원주민의 언어. 근접국 조지아와 가까운 카르트벨리어족이다. [4] 고대어로는 트라페주스기 때문에 트라페주스 제국이라고도 한다. [5] 트라페준타는 중세 발음이고, 현대 발음은 트라페준다. [6] 혹은 친정 조지아 왕국으로 몸을 피했다는 설도 있다. [7] 현재의 크림 반도. 트라페준타인들은 이 크리미아 영토를 "페라테이아", 즉 '바다 저편의 땅'이라고 불렀다. 다만 크림 반도의 카파 지역은 베네치아령이라 편입하지 못했다. [8] 크림 반도의 수다크(Судак). [9] 솔다이아는 1224년 룸 술탄국의 요새가 건설되어 몇 년간 룸 술탄국의 영토로 영유되다가 1230년 즈음하여 베네치아의 공격을 받고 점령되었다. 이후 1365년에는 제노바가 점령하여 제노바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1475년 크림반도를 공격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1783년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10] 루이 9세는 1248년 7차 십자군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똑같이 붙잡힌 다른 십자군의 몸값을 마련하는 동안 무려 4년 넘게 중동에 머물러야 했었으니 그 고생을 하고 불과 1년만에 다시 십자군을 일으킬 여력이 있을리가 없다. [11] 이 동맹에는 동로마 제국의 교회 통합 반대파도 끼어 있었다. [12] 물론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이지만 그는 제위에 오르기 전 두 번 결혼 했으나 두 아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제위에 있을 동안 독신으로 남았기에 황후가 없었다. [13] 먼저 망했던 동로마는 그나마 베네치아와 교황령이 할 수 있는 지원은 최대한 해줬다. [14] 로마 제국 최후의 잔재는 트라페준타 제국의 형식상 번국이였던 테오도로 공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아직 남아 있었기에, 이들이 각각 1475년, 1479년 오스만에게 멸망할 때까지 남아있게 된다. [15] 그러나 구분 기준이 종교여서, 정교회 신자면 "너는 그리스인이니까 추방"식이라 모국어는 튀르키예어인데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사람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콘야 남부에 위치한 카라만 지방의 주민들인데, 이들은 모국어인 터키어를 그리스 문자로 표기하는 등 그리스 문화 튀르키예 문화 사이에 걸쳐 있었다. [16] 하지만 사용 언어가 아닌 종교로 추방했기 때문에, 현재에도 폰토스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어르신들이 있다고 한다. [17] 중세 및 현대 그리스어로는 이비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