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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11 11:31:17

알렉시오스 3세(트라페준타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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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3세
Alexios III of Trebizond | Αλέξιος Μέγας Κομνηνός
파일:알렉시오스 3세(트라페준타 제국).jpg
본명 알렉시오스 메가스 콤니노스
Alexios Megas Komnenos
Αλέξιος Μέγας Κομνηνός
출생 1338년 10월 5일
사망 1390년 3월 20일 (향년 51세)
재위 트라페준타 제국 제17대 황제
1349년 12월 22일 ~ 1390년 3월 20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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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페준타 제국 제17대 황제. 10여 년간 이어진 내란을 수습하고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한 명군이다.

2. 생애

1338년 10월 5일 트라페준타 제국 제12대 황제 바실리오스와 트라페준타의 이리니 사이의 사생아로 출생했다. 바실리오스는 이리니 팔레올로기나를 황후로 들였지만, 동명이인인 트라페준타의 이리니를 정부로 들여서 자식을 여럿 두었다. 1340년 4월 6일 바실리오스가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황후에게 독살당했다. 이리니 팔레올로기나는 여제로 즉위한 뒤 남편이 정부 이리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알렉시오스 등 아이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그 후 궁전에서 자라던 그는 11살이던 1349년 12월 미하일을 폐위시킨 니키타스 스콜라리스의 초대를 받았다. 동로마 제국 요안니스 6세 황제의 승인을 받고 트라페준타로 향했고, 별다른 반대 없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이후 폐위된 황제 미하일은 성 시바스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다가 135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었다.

1351년 9월 20일 요안니스 6세의 친척인 테오도라 칸타쿠지니와 결혼하여 입지를 다졌지만, 귀족들이 세력다툼을 벌이는 것을 보고 안전을 우려해 트리폴리스의 해안 요새로 숨었다. 그는 어머니와 몇몇 충성스러운 장군들의 지지를 받았고, 백양 왕조의 술탄 파레딘 쿠틀루베그와 누이 마리아를 결혼시켜서 그들의 지원을 받아냈다. 이를 토대로 불복종하는 귀족들을 하나둘씩 제압하여 입지를 강화하자, 니키타스 스콜라리스는 위협을 느꼈다. 1354년 6월 케라수스로 도망한 뒤 1355년 3월 반란을 일으켜 트라페준타를 공격했다. 그러나 도시 수비가 강건해서 함락에 실패했고, 그 사이 알렉시오스가 작은 함대를 이끌고 케라수스로 항해해 니키타스가 없는 틈을 타 점령했다. 그 후 니키타스가 숨은 멘치리나 요새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니키타스는 트라페준타로 끌려간 뒤 옥고를 치르다 1360년 사망했다.

이로써 1340년 바실리오스 황제의 사망 이래 10여 년간 이어진 내란을 종식시킨 알렉시오스는 투르크군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경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355년 투르크군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칼리비아의 에미르 하지 우마르가 쳐들어오자, 1358년 자신의 여동생 테오도라와 결혼시키는 것으로 달랬다. 1363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밀고를 받고 음모를 꾸민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으며, 대토지를 불법으로 소유한 귀족들을 탄압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1360년 베네치아와 상업적 관계를 회복하여 흑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노바를 견제하고자 사절을 파견하였고, 1364년 베네치아가 가지고 있는 오래된 특권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창고를 할당했으며, 1367년 베네치아의 상품에 부과되는 관세를 인하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워 했다. 알렉시오스가 그들이 판매하는 상품에 간섭하는 것 자체를 혐오했기 때문이다. 1376년 또는 1377년 불가리아 데스포티스인 도브루자의 도브로티사와 공모하여 요안니스 5세 황제의 아들이자 도브로티사의 사위인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트라페준타 황제로 옹립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알렉시오스는 한동안 베네치아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양국의 관계는 곧 회복되었지만, 그는 베네치아를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고 여기고 상품 수입량을 지속적으로 줄였다.

그는 통치 기간동안 내전으로 파괴된 건물을 복구하고 소멜라 수도원 등 몇몇 수도원에 많은 기부금을 냈으며, 아토스 산에 디오니시오 수도원을 설립했다. 1390년 3월 20일 숨을 거두었고, 아들 마누일 3세가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