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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미하일 메가스 콤니노스 (영어: Michael Megas Komnenos, 그리스어: Μιχαήλ Μέγας Κομνηνός) |
출생 | 1288년경 |
사망 | 1355년 |
직위 | 트라페준타 제국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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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페준타 제국 제16대 황제.2. 생애
트라페준타 제국 제7대 황제 요안니스 2세와 미하일 8세의 셋째 딸 에우도키아 팔레올로기나의 차남이다. 큰형으로 트라페준타 제9대 황제 알렉시오스 2세가 있었다. 1297년경 어머니 에우도키아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갔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핵심 관료였던 콘스탄티노스 아크로폴리티스의 딸 아크로폴리티사와 결혼해 아들 요안니스 3세를 두었다.1341년 니키타스 스콜라리스와 그레고리오스 메이초아티스가 이끄는 스콜라리 세력은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여제를 몰아내기로 결의하고 그를 초청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3척의 배를 타고 트라페준타로 향했고, 안나가 이리니를 축출한 뒤 도착했다. 안나는 여자라서 미하일이 황제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아카키오스가 이끄는 호족 연합은 강력한 군주의 통치를 원하지 않았기에, 그를 궁전으로 유인하여 감금하였고, 뒤이어 내시 요안니스가 림니아에 유폐시켰다. 이후 안나가 단독 군주가 되었지만, 권력에서 배제된 스콜라리 세력이 미하일의 아들 요안니스 3세를 옹립하여 안나를 목졸라 죽였다. 하지만 요안니스는 부친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1344년경, 니키타스 스콜라리스는 림니아로 행군하여 미하일을 풀어준 뒤 패륜아를 폐위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트라페준타로 진격했다. 그해 5월 3일 요안니스는 성 사바스 수도원으로 추방되었고, 부친 미하일이 황위에 올랐다. 그는 니키타스에게 메가스 둑스 칭호를 부여했고, 스콜라리 세력에 거의 모든 권력을 부여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모든 공식 활동에 있어서 그들에게 조언을 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로 인해 스콜라리 세력의 전횡이 심해지자, 트라페준타 곳곳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그는 이러한 민심에 편승하여 1345년 니키타스를 긴급 체포하여 감금하였고, 아들 요안니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시켜서 정적들이 아들을 옹립하는 걸 미연에 방지했다.
1346년, 투르크군이 트라페준타 제국의 혼란을 틈타 하기오스 안드레아스와 오이나이온을 공략했다. 하지만 1347년 9월 흑사병이 트라페준타를 강타하여 7개월간 맹위를 떨치는 바람에, 투르크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1348년 투르크군이 또다시 침략했지만, 미하일은 3일간 치열한 전투를 치른 끝에 격파했다. 1348년, 제노바인들은 수년 전 트라페준타 제국이 동포를 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제국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케라수스를 공략했다. 1349년 5월 카파로 진격한 제노바 함대는 미하일 트자니치티스 휘하의 트라페준타 소함대를 섬멸했다. 트라페준타 시민들은 이에 분노하여 수도에 거주하는 서방인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후 양측간에 평화 교섭이 이뤄졌고, 미하일은 케라수스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중요한 성채 레온토카스트론을 넘겨주어야 했고, 베네치아와의 관계를 끊어야만 했다.
제노바에게 연이어 패배하고 굴욕적인 평화를 맺은 일은 미하일의 위상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1349년 12월 13일, 추종자들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난 니키타스 스콜라리스가 궁궐로 쳐들어가 퇴위를 요구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요구에 따랐고, 니키타스는 전임 황제 바실리오스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3세를 옹립했다. 미하일은 성 사바스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고, 135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었다. 1355년 흑해에 면한 항구 도시로 가서 황위를 되찾으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얼마 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