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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4세 | 다비드 | }}}}}}}}} |
이름 |
요안니스 메가스 콤니노스 (영어: John Megas Komnenos, 그리스어: Ἰωάννης Μέγας Κομνηνός) |
출생 | 미상 |
사망 | 1297년 8월 16일 |
직위 | 트라페준타 제국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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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페준타 제국 제7대 황제.2. 생애
트라페준타 제국 4대 황제 마누일 1세와 세번째 부인인 이리니 시리카이나의 차남이다. 형 게오르기오스가 1280년 일 칸국의 칸 아바카에게 억류된 뒤, 신하들에 의해 새 황제로 추대되었다. 1284년 형이 황위를 되찾으려고 트라페준타를 침공하는 걸 막아내면서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의 간섭을 받았다. 미하일 8세는 트라페준타는 제국의 일부일 뿐이니 황제 칭호를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전임자들이 만든 선례를 따를 뿐이며, 귀족들은 전통적인 칭호를 포기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답했다.하지만 언제까지나 동로마 제국의 간섭을 버틸 수는 없었고, 1282년 미하일 8세의 초대를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간 뒤 미하일 황제의 셋째 딸인 에우도키아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트라페준타로 돌아와서 '로마의 황제'라는 칭호를 버리고 동양, 이베리아, 트라페준타의 황제이자 데스포티스'를 칭했다. 즉, 동로마 제국 전체의 황제를 자칭하는 건 그만뒀지만 트라페준타 제국에서는 여전히 황제로 군림하기로 한 것이다.
조지아 왕국의 국왕 다비트 6세는 요안니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 있는 틈을 타 트라페준타로 쳐들어가 도시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다비트는 포기하지 않고 1284년 마누일 1세의 딸이자 요안니스의 이복 여동생인 테오도라를 후원하여 제위를 찬탈하게 하였다. 하지만 요안니스는 1285년 트라페준타로 돌아온 뒤 테오도라를 조지아로 축출했다.
1291년 교황 니콜라오 4세는 그에게 서신을 보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새로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며 몽골에 대한 기독교 사절이 될 것을 요청했다. 요안니스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지만 서방 상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290년대에 몽골로 파견된 서방 사절들은 그의 영토를 통과했다. 1297년 8월 16일 림니나에서 사망했고, 시신은 트라페준타로 운구되어 파나기아 크리소케팔레 교회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들인 알렉시오스 2세가 황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