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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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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제작된 사진 엽서. 일본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판매되었던 것이다. 사진 속에는 지게에 꽃을 가득 담은 조선인 소년들이 카메라를 보며 순박하게 웃고 있다. 하단에는 "조선 풍속"인 "화매(花賣)", 즉 꽃을 파는 상인을 담았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인하대 최현식 교수에 따르면 이는 일본인들이 "착한 미개인" 효과를 위해 일부러 연출한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화매라는 단어 역시 조선 풍속이라는 설명이 무색하게도 실제로는 당대 조선과 중국에서 쓰지 않았던 단어이다. #

1. 개요2. 형성 및 발전사
2.1. 일본 제국의 오리엔탈리즘 내재화2.2. 동양(東洋)과 식민주의2.3. 현대 일본에서
3. 기타

일본에게 오리엔트, 즉 동양은 일본이 속한 동일 곳이면서도 타자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이런 일본의 아시아를 향한 시각은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한 서구인의 오리엔트인식과는 다른 것이다.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서구와 오리엔트의 이질성을 강조한 것에 반하여 근대 일본에게 있어 일본과 조선, 나아가 아시아는 초기에는 극복하고 버려야할 이웃이었지만 점차적으로 일본은 아시아의 일원임을 강조하며 아시아에의 귀속을 강조한다. 하지만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동질성의 표현은 동일한 아시아의 일원으로 자신을 동일한 하는 것이 아닌 타자적 시각으로 동일시와 객관화를 동시에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아시아에 대하여 서양의 시선에 감염되어 서양이 구성한 동양과 동양이 구성한 동양이라는 중층적 구조를 갖고 있다 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정복, 지배하기 위해서 조선인과 조선, 조선역사를 열등한 이미지로 창조하는데, 일본과 조선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일본이 조선과 동일한 중화문화권을 갖고 있다는 특징과 이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정치적 배경과 무관계하지는 않을 것이다. (...) 일본은 서구의 물질문명의 수용과 더불어 그들의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적 시각도 수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아시아에 대하여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을 지니게 된다.
▲ 최유경. (2009). 조선을 향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 -일본근대 미술 속의 조선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

1. 개요

오리엔탈리즘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또다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근대의 일본이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변용하여 자국과 주변국들의 위치를 새로이 정립하였다. 아시아 국가였던 일본 역시 우월한 서양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양 속에서 일본을 문명으로, 그리고 여타 아시아를 야만으로 분리한 것이다.

이는 과거 일본의 급격한 근대화 제국주의적 팽창, 그리고 태평양 전쟁의 심리적인 동인으로 작동하였다. 동시에 일본의 역사학 정치학 등 여러 사회과학 학문 분야와 미학, 문학 등의 예술, 언론과 국민의식, 현실 정치 및 외교를 망라하는 수많은 지식 역시 이 거대한 담론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이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전후 8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에도 오리엔탈리즘은 일본인들의 민족관 및 국제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학자에 따라 "내적 오리엔탈리즘", "일본적 오리엔탈리즘" 등의 명칭으로 부른다. 도쿄대의 강상중 명예교수와[1] 캘리포니아 대학교 사학과의 스테판 다나카 교수[2], 국내에서는 고려대 일본연구센터의 전성곤 교수 등이 대표적인 연구자다.

2. 형성 및 발전사

2.1. 일본 제국의 오리엔탈리즘 내재화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은 정치·경제적인 영역에서 시작되지만 곧이어 문화적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낯선 지역으로의 침략과 식민지화를 위해서는 이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침략과 통치를 위해서는 식민지에 대한 인구, 기후, 지리적 특성, 토지를 비롯한 각종 자원에 대한 현황, 풍습과 습관, 사회적 상황 등을 파악해야만 했고, 이를 위한 조사과정에서 식민지에 대한 각종 정보들이 축적되었다. 서구 제국에서는 이미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등이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서 대학이나 연구 기관에서 제도화되어 있었으며, 이들 학문은 침략과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당시 서구 제국이 구축하였던 근대적 분과 학문들은 침략지에 이식되며 식민지 권력기구가 축적한 지식과 정보들을 바탕으로 식민지 사회를 연구하며 식민지 사회에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비서구 피식민 지역은 서구적 기준에 따라 열등한 지역으로서의 위치를 부여받았고, 서구의 지배는 당연시되었다. 즉 제국의 침략과 통치는 식민지를 발전시킨다는 것으로, 근대 ‘문명’의 관점에서 식민지를 ‘야만’으로 정의하며 식민통치를 ‘문명개화’, ‘계몽’이라고 정당화·미화했던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학은 식민지의 과거를 제국의 입장에서 정리하여 제국의 침략을 감추고 미화하는 데에 최상의 학문이었다. 제국은 자신들이 침략하여 식민지·반식민지로 전락시킨 아시아·아프리카를 상대로 식민지화의 원인은 제국의 침략이 아니라 식민지화된 사회의 내부에 있다고 강변하였다. 즉 식민지로 전락한 사회의 역사를 발전의 동력이 없는 정체된 상태 혹은 거듭된 퇴보의 과정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는 식민지화된 사회는 스스로 근대 문명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화는 제국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그 사회의 역사적 귀결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과 지배는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었던 사회에게 근대화의 계기이자 근대적인 법과 제도의 이식 과정으로서 설명되었다.

이처럼 식민지에서 제국에 의한 역사학의 성립·확산은 아시아·아프리카 사회의 식민지·반식민지화를 그 사회의 ‘역사적 숙명’으로 고착화하는 것이자 식민지에 대한 제국의 차별을 식민지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것으로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제국에 의해 왜곡된 식민지에 대한 역사상(歷史像)을 보통 ‘식민사관’이라고 통칭하며,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 제국 일본 역시 조선을 비롯한 침략지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각종 기관을 만들어 전문적인 학자와 연구들을 양산하였다. 일제의 당시 연구들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다양한 이유를 들어 조선의 역사를 발전의 동력을 상실한 것으로 그려내어 조선이 식민지화된 원인을 자신들의 침략이 아닌 조선의 역사적 과정에서 도출하였다.

1853년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의 내항과 개국, 뒤이어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 개혁을 거치며 일본은 제국으로 거듭났다. 서구의 압력 속에서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서구를 배우면서 급속하게 진행된 일본의 근대화는 제국주의화와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학문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근대적인 분과학문들, 특히 근대 역사학의 성립은 조선과 같은 주변 침략지에 대한 식민사관과 식민사학의 성립과정이기도 하였다.

일본의 근대화 개혁이라고 이야기되는 메이지 유신은 역사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천황’(이하 ‘일왕’)에게 통치권을 부여함으로써, 그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는 과정이었다. 이에 따라 일왕에게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는 역사편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이를 위해 국가 공식 역사편찬기구로서 1869년 3월 ‘사료편집 국사교정국’(史料編輯 國史校正局)이 창설되었다. 이후 국사교정국은 인선을 비롯한 사업의 주도권과 진행 방식, 최종 역사편찬물의 형태, 일본 정부의 직제 개정 등과 맞물려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러한 가운데 1886년 제국대학(현재의 도쿄대학)의 개교는 일본 근대 역사학의 전개와 일본 정부 공식 역사편찬에 있어 획기적 사건이었다. 제국대학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역사편찬을 담당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대학의 교수를 비롯한 그 출신들이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되면서 ‘식민사학’의 전개와 확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1895년 제국대학 문과대학 내에 ‘사료편찬괘’(史料編纂掛)가 설치되며(1929년 ‘사료편찬소’[史料編纂所]로 개칭), 사료를 수집하여 편년에 따른 사료집 편찬이라는 사업 목표가 확정됨에 따라 『대일본사료(大日本史料)』와 『대일본고문서(大日本古文書)』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사업 방침은 이후 대만과 조선과 같은 일본의 식민지에서도 반복되었으며, 일본에서 역사편찬에 관여했던 이들은 대만과 조선총독부에서 주도한 역사편찬 사업을 총괄하게 된다.

이렇게 역사연구를 위한 사료 수집이 이루어지는 한편 일본의 대륙 침략이 전개되면서 제국대학의 교수와 학생으로 대변되는 아카데미즘의 인물들뿐만이 아니라 조선에 자주 왕래하는 언론인들이나 관료들에 의해 조선의 역사에 대한 많은 언급과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이러한 저술들은 조선에 대한 침략은 침략이 아니며 조선의 멸망은 침략 때문이 아닌 조선의 역사적 결과라고 강변하였다.
▲ 국사편찬위원회, < 식민사관: 조선의 역사는 정체되었고 타율적이다>
"그 대열(아시아)을 벗어나서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해야 한다. 중국과 조선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이웃 나라라 하여 특별히 배려할 필요 없이 서양인이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서 처분해야 할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1885년 시사신보 논설에서. 그의 탈아론이 드러난 대표적인 문장이다.

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에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한다. 이때 오리엔탈리즘 또한 내재화되어, 서양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 탈아’를 통해 인접한 아시아 국가들을 일본 자신과 구별하고, 차별과 멸시의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며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에는 '문명국인 서양과 대비되는 열등한 동양 국가인 일본'과 '열등한 여타 동양 국가와 대비되는 문명국가인 일본'이라는 상반된 인식이 병존하며, 이 때문에 세계 인식과 주체성 획득의 측면에 있어서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근대 일본의 국민적인 체험으로부터 생긴 대외관의 가장 큰 특징은 ‘낡은 모욕적, 양이적인 서양관’의 극복과 더불어 ‘구태의연한 근린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일본을 구별하려는 자의식’이 강화되어 두 가지 대외관이 양극으로 분해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경덕·임성모 역, 이산, 1997년, 91p
이 얼핏 자기모순적인 관념이 형성된 이유는 일본의 개항 과정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서양의 경우 고대로부터 형성된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집단을 구분하는 인식이 중간에 파괴되는 일 없이 점차 확장되어 끝내 근대 제국주의 식민권력과 융합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그들은 동양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하게 점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은 강제적인 개항이라는 폭력 행위의 피해자 상태에서 근대화를 시작하였기에, 한때 서양을 오랑캐로 여겼던 관념은 파괴된 대신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기저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 결과 일본의 심상에는 아시아 출신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두 가지의 인식이 형성된다. 하나는 '유럽 세력의 동진을 막기 위해'[3] 유럽 문명을 내재화하여 이 당시에 입은 정신적인 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이며, 다른 하나는 아시아 국가로서 서양 세력의 침탈에 맞서고 주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일본 식민제국의 건설은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심리적인 이유로 강박적이리만치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일본은 동양 안에서 여타 아시아 국가들을 열등 국가로 재정립하고 자신을 이에 대비시킴으로써 잃어버린 주체성을 찾는다. 그리고 동진하는 서양에 대항하기 위해 자국을 중심으로 ‘주권선(내지)’과 ‘이익선(외지)’이 구축된 방사형의 제국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4] 때문에 강상중 교수는 당시의 일본의 제국 건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 금융자본주의 국가로서의 제국주의 실행자라는 실질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이미 훌륭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5p

한편, 이 과정에서 동양은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구별을 통해 기존 동아시아 체계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이 대표하는 ' 지나(支那)'라는 열등한 대상, 그리고 문명이자 진보의 주체에 해당되는 ' 일본'의 두 가지로 나뉘었다.[5] 그리고 사이드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이러한 구별 의식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다양한 서양의 과학적 학문이 동원되어, 일본 문명에의 문화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문명에 대한 철저한 부정[6] 과 세계 보편사적인 유럽 문명과 일본 문명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향의 연구가 진행된다.

예를 들어 사학자 다케고시 요사부로(竹越與三郞)의[7] 경우, 저서 《이천오백년사》에서 유럽 문명이 해양을 통해 일본에 도달하였고, 그 증거로 일본이 가나로 대표되는 자체적인 표음문자를 사용함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정체적인 중국의 표의문자인 한자는 단순히 빌린 것일 뿐이다.[8] 그리고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의[9] 경우에도 《 부시도》를 통해 서양에서 종교를 통한 도덕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무사도를 통한 도덕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일본의 유럽적 특징을 강조하였다.[10]

이러한 이항 대립적 비교 연구는 일본이 1895년과 1910년에 각각 대만 조선 등 ' 지나'에 속하는 식민지들을 획득함에 따라 식민지 지배 권력과 융합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그로 인해 식민지의 지나적인 속성,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일본의 유럽적, 즉 보편적 속성이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진행된 통제된 교류를 통해, 일본은 자신들의 우월성과 지배의 당위성을 더욱 확고하게 믿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때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체계로서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본격적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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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경제학자 후쿠다 도쿠조.

대표적인 예시가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와[11] 니토베 이나조의 사례이다. 후쿠다 도쿠조의 경우, 그의 저서인 《일본경제사론》과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에서 막스 베버의 사회경제 발전 이론에 따라 문명 야만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높은 노비의 비율로 보아 봉건제 사회 진입하지도 못하였기에, 정상적인 발전 단계에서 이탈한 '이상 계통(異系)'으로 정의된다. 반면 일본은 서양의 봉건제에 대응하는 무사 계급의 지배를 받아 근대 국민국가의 자본주의 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자체적으로 마련한 '정상 계통(正系)'이라고 주장하였다.
"고도의 문화로 갑작스레 군림해서 그 역사적 발전을 무시하고 그 국민적 성격을 양해하지 못하는 외국 문화(서양)여서는 안 된다. 한국인을 노동자로 계발하고 유도해서 완전한 인격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토지를 개척하고 경작해서 서서히 자본화하고 그 가치를 높이는 기술을 이해하고 있는 자여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 수많은 경제적 설비를 베풀고, 수천년의 교류에서 얻은 양해와 동정을 통해 한국인을 부리는 데 익숙하며, 한국의 토지를 사실상 자기 사유로 삼아 서서히 농업경영을 시도하고, 그 생산품인 쌀, 콩의 최대 고객인 우리 일본인이야말로 이 사명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합한 자가 아닌가. (......)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는 그 부패와 쇠망의 극을 달리고 있는 ‘민족적 특성’을 밑바닥부터 소멸시킴으로써 우리에게 그들을 동화시켜야 할 자연적 운명과 의무를 지닌 ‘유력하고 우세한 문화’라는 무거운 사명을 다해야 할 자가 아닌가."
▲ 후쿠다 도쿠조,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韓国の経済組織と経済単位)”, 1904년

그리고 샤토브리앙이 여행기에서 오리엔트에 대해 보였던 사례와 같이, 후쿠다의 조선 연구에는 조선 여행에서 받았던 경험에서 기인한 '전근대적이고 더럽고 나태한 조선인'이라는 개인적 편견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러나 그는 이 편견을 사회경제발전이론과 결합하여 조선인들이 발전에 대한 욕망이 낮다는 결론을 도출하였고, 때문에 그들이 여전히 고대 노예제 사회에 안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 담론 내의 통제된 교류를 통해 형성된 그의 관념은 최종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이끌어 이러한 열등한 속성을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12] 후쿠다 도쿠조의 주장은 한국의 역사 발전 과정이 '정체(停滯)'적이었다는 관념을 처음 학문적으로 고착화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은 강박적이고 급격하게 형성되었다. 이는 일본이 서양의 동진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과정에서 일본 역시 서양의 침탈 대상이 아닌, 그들과 같은 문명이자 보편자임을 한시바삐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여기에는 일본의 '동양적' 속성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순간 서양 문명국들에 의해 야만으로 간주되어 계도와 침략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공포가 그 기저에서 작동한다. 그렇기에 위에 언급한 부시도 및 일본경제사론 모두 서양의 역사적인 사례와 서양 기준으로는 엄연히 동양에 속하는 일본의 사례를 무리하게 등치시켰다. 반대로 일본과 오랜 기간 공통의 문명권을 형성했던 여타 아시아 국가들을 의도적으로 일본과 분리하였으며, 그들의 위상을 격하시켰다.

가령 니토베 이나조는 일본에 도덕 교육이 있냐는 서양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옛 일본 무사들의 부시도를 선택적으로 재조합하였다. 후쿠다 도쿠조의 경우, 그의 이론의 사상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막스 베버부터가 직접 '일본의 봉건제는 서양의 레엔제 봉건제와는 다르다'고 딱 선을 그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버의 이론을 일본의 무사 지배 체계를 설명하는 데 그대로 인용하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버는 서양의 레엔제 봉건제를 일본의 봉건제와 이슬람의 봉건제도와 '대비'했다. 그는 일본의 봉건제가 인적인 봉사 관계에 기반할 뿐이며 은급제(恩給制)에 기반한 장원영주적 구조가 결여되어 있었다고 보았다.[13] 때문에 동시대 독일 제국의 경제학자이자 베버 연구자였던 칼 라트겐(Karl Rathgen)은[14] 후쿠다가 일본 역사에 대해 베버 이론을 무리하게 적용하는 것을 두고 권위있는 학술지 《슈몰러 연보(Schmollers Jahrbuch)》에 '선을 넘었다'고 평가하는 기고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 더구나 근래에 조선 경제사의 영역에 실마리를 잡은 최초의 학자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선사(先師)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일 것이다. 하지만 후쿠다 박사는 조선에서 봉건제도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에 승복할 수 없는 것이다.
- 백남운,[15] <조선사 연구의 방법론> 서문 中
그 외 후쿠다의 조선 경험 또한 오랜 시간에 걸친 관찰과 탐구가 아니라, 단편적인 여행 경험일 뿐이었기에 학술적인 가치는 거의 없다. 후쿠다는 고작 며칠 동안 한국을 여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인상에 기반한 악의적 평가는 사회과학이 적용되고 일본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의 이론으로 고착되었다. 이에 맞서 단재 신채호와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백남운과 같은 경제학자들이 대항담론을 구축하였으나 한 세대 후의 일이었다. 그마저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학계와 식민지가 된 조선이라는 현실 속에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들의 연구가 빛을 본 것은 한국이 독립하여 한국인 스스로가 운영하는 국가와 학계가 수립된 후의 일이었다.

2.2. 동양(東洋)과 식민주의

미국을 위시한 서구세력에게 굴복한 일본에게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한 ‘동양론(東洋論)’은 단순한 이론 이상의 것이었다.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내용과 구조는 근대로 넘어오는 동아시아의 역사와 거의 유사하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고, 이어 만주와 중국으로 점차 침략을 확대해 가는 과정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일본은 ‘서양(西洋)’을 자기화하면서 ‘동양(東洋)’에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을 부과하였다. 스테판 다나카는 일본의 동양사학자들이 서양에 의해 규정된 ‘동양적(Oriental)’과 구분되는 ‘동양(とうよう)’을 창안하고 그 안에 중국을 ‘지나(支那)’로 재배치했다. 새롭게 창안된 이데올로기적 공간인 ‘동양’을 통해 일본은 동양의 타자인 서구와 차별화되고, ‘동양’ 내부의 여타 아시아 국가와 민족에 대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역사적 내러티브를 창출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타자로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동양의 중심대상은 ‘지나’(支那)였다. 서구 근대문명 기준에 의한 새로운 자기-타자 규정이 형성된 것이다. 즉 서구 보편주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동양’이라는 또 다른 가상의 동일성을 설정하고 이 속에서 자기 동일적 주체의 정체성을 구획해낸 것이 일본의 동양론(東洋論)이다. 그러니까 ‘동아(東亞)’는 1945년까지 제국 일본의 역사과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던 개념이다. ‘동아’만이 아니라 ‘아세아’도 ‘동양’도 마찬가지이다. ‘동아’란 다른 ‘동양’등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다.
▲ 윤명철.[16] (2010). 오리엔탈리즘의 정의 및 역사적 전개 -한국상황과 관련하여-. 민족학연구, 9(0), 225p.

그러나 일본이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유럽 국가와 동등한 위치에 선 반면 서양 국가들 간의 관계는 전쟁의 여파로 경색되자 이러한 상태는 전환기를 맞이한다.[17] 이제까지는 서양을 답습하는 데 머물렀다면, 이제는 일본 고유의 문명을 재평가함으로써 일본 문명이 서양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또다른 '보편 문명'임을 드러내어 완전한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한 것이다. 강상중 교수는 당시 일본의 이러한 조류를 두고 ' 나르시시즘적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를[18] 필두로 한 '동양사학' 연구였다. 시라토리는 만주 조선 지역(만선)에서 서양의 학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서양이 동양(오리엔트)를 학문적 연구를 통해 유럽에서부터 분리하였던 것처럼, 이 지역의 언어학적 기원 연구를 통해 일본과 열등한 만선의 기원적 공통점이 없음을 입증한다. 그리하여 일본은 독립된 인종으로 규정되며, 서양과 동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이 둘의 장점을 주체적으로 흡수하는 또 다른 보편자로 정의되었다.[19]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천황제에 기초한 일본 민족이념을 창출하고자 했다. 이는 비교언어학에 기반했던 당대 유럽에서의 민족연구 방식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여러 형제 민족 중 '오리엔트'와 '아시아'의 열등한 문화에 물들지 않은 가장 순수한 이들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당시 유럽 민족주의의 주요 화두 중 하나였다. 셈족 유대인이 아리아인의 순수성을 망친다며 모조리 학살한 나치 독일이 가장 유명하지만, 정도만 다를 뿐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자국이 가장 순수하다며 제국주의와 민족의식 고취에 잘 써먹었다. 가령 영국인은 형제 민족인 인도인들이 열등해진 이유가 아랍을 비롯한 오리엔트에 물들어 기존의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순수성을 잘 보전한 앵글로색슨이 이끌어 교화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인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그 외 아시아 기원 민족들의 영향을 받은 발칸 반도 국가들과 러시아는 종종 진정한 유럽이 아니라고 매도당하였으며, 아예 기원이 아시아 국가인 튀르키예 헝가리 그리고 핀란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럽에서 인도유럽어족 이론에 기반한 순수 아리아인 담론이 그러했듯, 시라토리는 초기에는 우랄알타이어족 이론에 기반하여 몽골어 일본어가 동류에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그 중간 가교 역할을 하는 조선어와의 관계를 연구했다. 이 방식을 통해 그는 몽골, 조선과 일본을 중국과 기원적으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하늘을 뜻하는 단어의 언어학적 비교 연구를 통해 우랄알타이어족 민족들의 천손강림 신앙, 즉 북방민족의 텡그리 신앙과 고대 조선의 단군 신앙, 그리고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숭배 신앙이 공통의 기원을 가졌으며 중국 문명과 관계 없음을 밝혔다.[20] 그러나 이어진 연구를 통해 일본과 몽골 그리고 조선 간에 언어학적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자, 그의 논리는 오히려 한술 더 떠 일본은 '순수한', '독자적'인 민족이라는 아주 인종주의적인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후대 동양사학 연구자들은 그의 논리를 이어받고 더 발전시켜 나갔다. 가령 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의[21] 경우 일본인이 '혼합민족'임을 최초로 주장했다. 에미시, 하야토, 그리고 진무 천황의 동정으로 야마토가 정복한 한인들 역시 일본을 형성하는 뿌리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편 사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蔵)[22] 같은 이들은 각 민족의 샤머니즘 전통과 일본 고대 신토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북방민족의 샤머니즘, 조선의 무속신앙과 고인돌 문화, 그리고 일본의 태양신 신앙과 고분 문화가 샤먼 숭배 전통이라는 공통점의 측면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본 그는, 과거 조선의 우수한 도래인이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예를 들어 기타와 도리이는 일본민족의 혼합론을 주장하면서 국가 내부의 지역적 차이와 주변국가들과의 차이를 통합하는 '탈영토주의'를 그려냈다. 물론 기타의 혼합민족론은 일본내부에 존재하는 이민족들의 차이성을 소거하는 동화이론에 바탕을 두고 피식민지 민족들의 차이를 메우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도리이 또한 일본의 주변 지역을 현지조사하면서 일본민족의 혼종성을 증명해냈지만 그 혼종의 중심을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식민주의 이론을 구축했다.
▲ 전성곤, <내적 오리엔탈리즘 그 비판적 검토: 근대 일본의 '식민' 담론들>, 소명출판, 6p
이러한 일선동조론에 입각한 학자들은 이후 1910년을 즈음해서는 강점을 ‘복고’ 내지 ‘태고로의 복귀’라고 강변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1919년 3·1 운동과 같은 제국의 위기 상황이 전개될 당시에도 제국의 팽창을 주장·옹호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을 부정하였다. 대표적인 일선동조론자라고 할 수 있는 키다 사다키치(喜田貞吉)는 3·1 운동 직후인 1921년, 조선과 일본만이 조선민족의 기원을 만주에서 찾으며 민족적으로 만주까지를 하나의 영역으로 설정하며 제국의 팽창을 설파하기도 하였으며, 강점을 전후하여 수차례 조선을 직접 답사하며 인종과 무속을 조사했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3·1 운동이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것이었다면서 조선과 일본은 원래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한일병합이 민족자결임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일선동조론은 학문적 영역을 벗어나 일본 제국의 침략을 옹호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을 부정하는 논의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식민사관: 조선의 역사는 정체되었고 타율적이다》 #
반도는 일본에 합병되었고, 그 땅의 경영과 백성에 대한 보호와 유도가 일본 국민의 임무가 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한반도의 과거 및 현재 사정에 관한 확실하고 정밀한 지식이 더욱 간절해졌다. 동시에 정치적 위치의 변천에 따라 종래의 비각에 다발로 보관되어 있던 저들 나라의 도서도 점차 세상에 나오기에 이르렀으니, 한반도에 관한 학술적 연구도 지금부터 점차 활발해질 것이다. 특히 사적의 기록에 의지하는 일이 많은 역사 연구는 이제 비로소 실마리를 푸는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사업이 지향하는 바는,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학계에 미력을 다함으로써 착실한 학술적 연구의 기운을 촉진하는 데 일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한반도의 실질적 경영에 대하여 학술상으로 다소의 참고 자료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철 소속 만선역사지리조사실의 < 조선 역사 지리(1913)> 서문 중에서. 이들의 연구는 근대적 한국사 연구의 시초가 되었으며, 식민사학이라는 악영향을 뿌리내렸다. 저자 쓰다 소키치가 서문에 밝힌 바와 같이 이들의 연구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라는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는 식민제국 체계 속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불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었으므로 이는 객관적으로 진행된 연구가 아니었으며, 매우 정치적이었다. 전성곤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동양학자들은 일본인의 혼종성과 타 민족들의 영향을 인정했으나 그러한 긍정은 결국 그들을 동화시키는 주체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이라는 것을 바탕에 전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조선은 일본과 달리 위만조선이나 한나라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소위 '식민지배'를 받았기에 순수성을 잃었다는 것이 동양사학자들의 시각이었다.

이는 일본 제국의 정복과 식민 정책에 다시 적용되었다. 즉 동양사학 연구는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앙만이 북방 계통 민족들이 공통적으로 보유했던 천손 사상의 유일한 정통이자 순수한 형태이며, 따라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제국만이 옛 형제들을 이끌고 교화할 자격이 있다는 지극히 제국주의적인 결론의 역사적 근거로 작용한다. 일본인이 혼종 민족이라는 연구 결과 역시, 반대로 일본이 여타 민족들을 정복하고 동화해도 된다는 역사학적 근거로 작용했다.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의 최종적 의미, 즉 식민지배 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의 학문적 기반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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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청사 중앙 홀의 두 벽화. 둘 다 일본의 서양화가 와다 산조(和田三造)가 총독부의 의뢰로 만들었다. 왼편은 북벽에 걸려 있던 < 선녀와 나무꾼> 이며, 오른편은 남벽에 걸려 있던 < 하고로모>다. 둘 모두 각각 한국과 일본의 선녀 승천 설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유사한 내용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는 벽화를 서로 마주보게 배치한 것에는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한 총독부의 조선 통치 의중이 반영되어 있다. 총독부 청사 철거 당시 별도로 떼어내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출처

일선동조론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며, ' 만주'라는 지역을 최초로 규정지은 것도 이들 동양사학자들이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주도하여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산하에 수립한 만선역사지리조사실(滿鮮歷史地理調査室)의[23] 연구자들은 독립된 지역으로써의 의미가 부족하던 동북 지역을 '만주'로 새로이 규정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만주는 중국 및 유럽과 분리된 우랄알타이어족의 고유 영역이었으며, 알타이어족의 맹주이자 중국과 유럽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선도문명인 일본이 이끌어 계몽하고 개발해야 하는 지역으로 선포됐다. 내선일체, 오족협화, 만주국 등이 이러한 논리의 산물이었다. 물론 이러한 허울 좋은 간판을 걸어놓은 만주 지배의 실상은 여느 식민제국들이 그렇듯 한국인 및 퉁구스계 민족들의 독립된 권리를 전부 부정하고 일본 제국의 독점적인 발전에 강제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일본 제국령 만주와 조선에서 '형제' 민족들의 권리는 없었고, 큰형님 일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그것은 항상 옳았다.
시라토리는 일본의 순수한 '기원이라는 키메라'에게 매혹되어, 역사가 '기원의 엄숙함'을 웃어넘기는 법을 어떻게 가르쳐주는지를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말하자면 그 악마에게 사로잡힌 영혼의 그림자를 쫓아내기 위해서 역사라는 의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모든 차이, 분산, 불연속을 일본의 '기원'이라는 하나의 동일성을 향해 통합하면서 신화의 세계로 귀환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누차 지적한 대로 <타자>가 없는 공허한 동일성의 원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라토리는 그러한 동양사의 구상만이 서양 중심의 위계적인 세계질서로부터 일본을 자유롭게 하여, 유럽에 대한 아시아의 열등한 지위로부터 스스로를 벗어나게 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터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일본을 유럽 열강과 동일한 지위로 끌어올리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일본의 동양'은 바로 서양의 '전체성'을 대신한 일본 중심의 '전체성'이었다. 그 귀착점이 '대동아공영권'이 되어 마침내 자폭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보지 못한 시라토리는, 쓰다 소키치의 말처럼 '행복한 시대의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한' 시대가 '동양'에게는 아주 불행의 시대였다.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139p
동양사학의 과제는 발견, 창조한 ‘동양’을 통해 서구와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강조하고, ‘만선(滿鮮)’, ‘지나(支那)’에 대한 동양적 오리엔탈리즘을 강화하면서 특수한 일본을 구축하는 것, 그 특수한 일본을 세계사의 또 다른 보편으로 설정해 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유럽과 서양을 세계사라는 보편사에서 강등시키고 복수의 세계사(多元史觀)를 설정한 후 서구와는 보편사를 향한 헤게모니 투쟁을 진행하고 제국의 판도에 든 아시아 제민족에게는 일본을 보편자로 강요하는 것, 이것이 동양사학이 창출해낸 복수의 보편사의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윤명철. (2010). 오리엔탈리즘의 정의 및 역사적 전개 -한국상황과 관련하여-. 민족학연구, 9(0), 227p.
이렇게 일본은 열등감을 벗고 주체성을 확보했으며, 자신의 오리엔트인 만선 지역과 중국을 정당히 침공할 수 있는 사상적인 근거를 완벽히 마련하여 1931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서남태평양 일대에도 이러한 시각이 확장되어 남양은 서구가 아니라 새로운 선도문명 일본이 주도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영역으로 선포됐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경제적 발전 단계가 아니라 주체성의 획득과 주권선의 보호를 위한 심리적인 강박관념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의 확장은 대공황과 겹쳐 제국의 경제적인 부담을 가속화시키고 적을 양산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본의 과도한 팽창은 단순히 중국을 적으로 돌리는 것을 넘어서 국제 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일본은 추축국을 결성하면서 유럽 열강들과 미국마저도 적으로 돌려버렸고, 이는 끝내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졌다. 보편 문명인 서구 열강과의 충돌이 가시화되면서 일본은 국제관을 재정립해야만 했다. 그 결과 침략을 이어가기 위해 형성된 것이 ' 동아'라는 협동체 개념이다. 일본은 열등 인종이라고 정의했던 만선 지역 주민들, 심지어 지나라고 멸시해 마지않던 중국인마저도 일본인의 개념에 억지로 포괄해서라도 전쟁을 무리해서 수행하였던 것이다.[24]

탈아입구에서 대동아공영권으로의 이러한 국제관 변화는 일견 급작스러워 보이지만 동양사학과 일본 오리엔탈리즘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변화이기도 하다. 소위 " 대동아전쟁"이라는 일본의 선전 구호에서 알 수 있듯, 일본 제국에 있어 태평양 전쟁이란 "서양"의 침략에 놓인 "동아"의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이항대립 구조를 내포한다. 그러나 실상 그 "동아"라는 협동체 역시 동등한 연합이 아니라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 일본에 열등한 동아시아를 종속시키는 방사형의 제국주의 지배 체계였다는 점에서 지극히 오리엔탈리즘적이었다.

결국 일본 제국이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의 보편제국이 아니다. 실상 이는 아시아를 지배하는 가장 폭력적인 형태의 식민제국 체제이자 서구로부터 '일본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설정한 주권선 및 이익선이다. 일본에게 있어 동양이란 결국 '일본의' 동양을 의미했으며 다른 아시아 민족들의 의사와 이익은 고려하지 않았다. 내선일체를 내세운 식민지 조선에 조선인들의 권리가 없었고 오족협화를 내세운 만주국에 "협화(協和)"[25]가 없었듯이, 대동아공영권에는 "공영(共榮)"[26]이 없었다.

종합하자면, 위와 같은 발전 단계를 통해 서구 식민제국들의 오리엔탈리즘은 일본 내부에도 내재화되어, 일본이 서구에 맞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같은 동양 국가들을 폭력적으로 침탈하는 제국주의 체계로써 작용하였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을 변용하자면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일본의 방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역시 근본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했던 만큼 서양의 오리엔탈리즘과는 달리 이중적인 모순점이 존재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이 자신의 체급과도 맞지 않는 거대 제국을 형성하다가 전쟁을 일으키고 파멸하는 동인으로 작동하였다.

2.3. 현대 일본에서

몇 년 후, 일본 제국의 침략적 팽창은 태평양 전쟁의 종전과 함께 끝났다. 압도적인 미군의 폭격과 원자폭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는 과정 속에서, 과거 쿠로후네 사건 당시에 그러했듯 서구에 대한 열등 의식이 다시 살아났다.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동작하는 하드웨어적 기반인 일본 제국 체제는 GHQ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일본이 당연히 이끌어야 하는 영역이었던 식민지들은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독립 국가가 되었으며, 제국의 중심이자 한때 신이었던 천황은 이제 어떤 정치적 권한도 없는 단순한 상징이자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냉전이라는 이유로 태평양 전쟁의 전후 처리가 확실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은 미국이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국제 질서에 복귀했고, 일본의 오리엔탈리즘과 우월 의식도 전체주의적인 식민제국의 모습을 탈피하여 경제적인 형태로 복귀하였다. [27] 1970년대부터 일본은 자유 세계의 핵심 국가 중 하나로 등극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세계 2위까지 급격히 치고 올라가면서 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일본의 문화 역시 바다를 건너 유럽과 구미권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비록 제국은 무너졌을지언정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헤게모니는 근래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성과는 제2세계에 속하면서 공산당 일당 독재와 빈곤에 고통받는 중국 북한, 낙후된 데다 군사독재에 시달리는 옛 식민지 남한, 그리고 역시 또다른 옛 식민지이자 한때 주적이었으나 국부천대 이래로 국가 인정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대만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완벽히 대비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과거 제국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일본인들이 여타 아시아 국가들과 스스로를 대조하며 국가적인 자신감을 되찾고자 시도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러한 차이 속에서 기존의 오리엔탈리즘적 대외관이 되살아났다. 대표적인 예시는 바로 <료마가 간다> 등을 저술한 일본의 국민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다. 그는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1년에 한국을 여행한 후 아사히신문에 기행문을 연재했다. 과거 동양학자들의 인식을 계승했던 그의 여행 목적은 '일본의 근원 국가'에 대한 탐방이었다. 따라서 시바 역시 과거 동양학자들이 그러했듯 한국의 생활상을 낙후된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근세 한국의 역사는 타율적이었으며,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중국에서 들여온 유교였다. 그 역시 메이지 시대 인물들이 조선을 바라보던 정체성론에 입각한 시각을 현대적으로 재생산한 것이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자립의 길을 선택하였을 때, 조선의 운명은 그 지리적 위치와 주체적 무능력에 의해 일본에 종속하고 그 지배하에 놓인 것은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 시바 료타로의 조선론의 골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러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려고 했을 때 활발하게 배포된 조선정체론, 조선낙오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 정당화로 나아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28],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 그의 조선관과 메이지 영광론을 묻다>, 박현옥 역, 모시는사람들, 2014, 41p
시바 료타로가 정치적으로 극우이거나, 한국과 한국인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에 대한 고대 한국의 영향을 적극 긍정한 축에 속하며 제국 말기 쇼와 시대의 폭주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관은 메이지 일본의 근대화와 영광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므로 한국을 철저히 주변부화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지극히 오리엔탈리즘적인 성격을 띄었다. 나카츠카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시바의 시각에서는 일본의 생존을 위해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정당했고 '뒤떨어진 조선'에 대한 식민지 근대화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국민 작가였던 그의 명성으로 인해 이러한 차별적인 시각은 일본 사회에 다시 널리 퍼져나갔다. 시바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으나 오늘날 이 '시바 사관'은 일본 극우의 동아시아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29]

이처럼 근대 이래로 정립된 일본인으로써의 정체성과 국제관 자체가 내적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다. 따라서 일본과 여타 동아시아를 이항 대립 구도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일본 내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에도 많은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유럽 미국에 대해 열등 의식을 내보이면서도 그들과 자신들의 공통점을 찾고자 한다. 때문에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은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이 가진 민족의식과 외부 인식의 근간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 이래로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 안에 자리잡은 양가적 인식, 즉 '동양과 달리 서양 문명에 가까운 일본'을 내세우면서도 '서양과는 다른 일본'[30]이라는 자기모순적인 관념 사이에서 벌어지는 괴리감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다. 아시아 유일의 보편자라는 일본의 국제적 위상은 제국 시절과 냉전 후반기 두 차례에 걸쳐 세계를 집어삼킬 기세로 불타올랐으나, 결국에는 1853년의 강제 개항과 1945년의 패전, 1990년대의 경제적 몰락, 그리고 구 식민지들과 이웃 국가들의 약진 속에 여러 차례 무너지고 빛이 바랬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그토록 유별나게 한국과 중국의 부정적 측면에 집착하고 구미권의 시선과 인정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은,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양과 동양, 그리고 일본과 동양 사이에서 이중의 혼란을 겪고 있는 그들의 존재론적 불안이 드러나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내적 오리엔탈리즘은 두 국가의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위상이 일본과 동등 또는 그 이상이 된 오늘날이 되어서는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우선 20세기 말부터 동아시아사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문명 발전론이나 과거의 만선사관은 설득력을 잃었다. 일본인들의 무의식 속의 '열등한' 한국 중국의 이미지 역시 실제 그들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경제 문화 강대국으로서의 한국과 중국의 모습으로 인해 점차 깨지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로 일본인들이 한국 대중문화에 20년 가까이 노출되고,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역전된 것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근대화 이래 150년간 일본인들의 민족의식에 축적된 오리엔탈리즘 담론의 잔영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이는 종종 일본이 한국과 중국이 자신들과 동등한 국가임을 망각하고 일본의 우위를 은연중에 확인하려 하는 행동의 근원적인 요인으로 작동한다. 윤석열대통령이 24년 4월 22대 총선에서 완전히 참패하자마자 일본 정부측에서 일본 정부의 라인야후 네이버 지분 매각 압박 논란과 같이 한국의 영향력이 있는 일본 내 기업을 정리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일본에 내재된 미국>>>일본>>>>>>한국, 중국(등 아시아 국가)의 서열 구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일본정부의 의식이 작용하고 있음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한미일 관계 중시를 표방하다가 서열관계를 정리하려는 일본과 모른척하는 미국의 진짜 현실을 마주한 윤석열 정권 입장에서는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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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일교포 2세 출신 국제정치학자. 와세다대학을 졸업했으며 대한민국 국적자 출신으로는 처음 도쿄대 정교수에 취임한 인물이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이었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러했듯 강상중 교수 역시 재일교포로서 한국과 일본 그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였다. 이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그의 학문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주로 베버, 푸코, 그리고 사이드를 연구했다. 현재 일본 사회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참여적 지식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대중적으로도 자주 모습을 비춘다. [2] 시카고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근현대 일본사를 전공했다. 대표적인 저서는 국내에도 발매된 <일본 동양학의 구조(Japan's Orient)>다. 현재는 절판되었다. [3] 고야스 노부쿠니,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이승연 역, 역사비평사, 2005, 27p [4] 위의 책, 85p [5] 윤명철, 〈오리엔탈리즘의 정의 및 역사적 전개-한국상황과 관련하여〉, 한국민족학회, 2010, 225p [6]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133p [7] 1865~1950. 게이오의숙 출신의 사학자. 중의원과 귀족원 의원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8] 위의 책, 69p~72p [9] 1862~1933. 일본의 외교관. 무사도를 주창하는 등 소위 '문명국' 일본의 위상 확립에 매진했던 인물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의 차등적 질서를 옹호하고 제국 식민정책에 실무자로 참가했다. [10]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도를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즉 ‘종교 없이 어떻게 도덕교육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라고.” 위의 책, 51p [11] 1874~1930. 일본의 경제학자. 뮌헨 대학교 출신으로 일본 경제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당시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복지국가론까지 주창한 인물이었으나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숨기지 않았다. [12]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9p~103p [13] 위의 책, 100p [14] 함부르크 대학교 초대 총장. 1882년부터 1890년까지 도쿄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동시기 일본 제국 농상무성의 고문으로 있었다. [15] 1894~1979. 일제강점기의 경제학자이자 북한의 정치인. 한국인에 의한 한국 경제사 연구를 개척한 인물로, 그의 연구는 훗날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한국의 자본주의 맹아론이 싹트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학계의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그의 영향력은 많이 사그라든 상태다.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초대 교육상 등 공직 생활을 했다. 8월 종파사건 도서정리사업 등의 사건으로 김씨 일가의 독재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도 숙청당하지 않고 1979년에 사망했다. 다만 최후가 아주 불명확하며, 황장엽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그 또한 결국 김일성에게 제거당했다고 본다. [16] 동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17] 위의 책, 131p [18] 1865~1942.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사학자로, 동양사학 연구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미우라 고로가 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가쿠슈인에서 교편을 잡았고, 쇼와 천황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학의 창시자이기도 하나, 그의 연구는 제국 일본의 시각에서 바라본 식민지 조선 연구라는 속성을 강하게 띄었다. [19]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9p~103p [20] 전성곤, 내적 오리엔탈리즘 그 비판적 검토, 275~283p [21] 1871~1939.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사학자로, 메이지 시대 말기에 문부성에서 국정교과서를 편찬했다. [22] 1870~1953.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사학자. 일본 내 동아시아, 특히 만주와 한반도 지역 인류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23] 1914년에 해산되었으나, 이후 도쿄제국대학에서 관련 연구를 이어받았다. 이들은 한국의 역사를 반도 내로 국한했으며, 반도의 역사는 대륙과 해양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연구결과를 통해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사학적 조선사 연구의 시초라 할 수 있는 《 조선 역사 지리》역시 만선역사지리조사실에서 경술국치 3년 후인 1913년에 펴냈다. 이 작업은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이끌었다. 이들의 연구는 현대 중국의 동북공정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24]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133p [25] 협력하고 화합하다. [26] 공동으로 번영하다. [27] 위의 책, 94p [28] 1929 ~ 2023. 교토대학 출신의 역사학자로 1963년에서 1993년까지 나라여자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 등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사를 연구했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 교정에 큰 공로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2023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29] 일본지식인층에 의한 조선정체론(朝鮮停滞論) 연구: 비문명화ㆍ비경제화ㆍ비합리화를 중심으로 [30] 이 '서양과 다르다'는 관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속성을 띈다. 근본적으로는 일본 역시 동양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열등감'의 모습을 보이며, 개항과 제국 시절 전반, 그리고 패전 직후에는 서양에 대한 '두려움'의 속성 역시 강하게 띄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와 같은 시기에는 반대로 서양에 대한 '우월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31] 1899~1980. 도쿄상과대학 출신의 경제학자. 후쿠다 도쿠조의 제자인 우에다 테이지로 밑에서 수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