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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공화국 총리 대수는 이탈리아 왕국 총리 대수를 이어서 가산한다. 이탈리아 왕국 총리 · 파시스트 정권 관련 직위: 이탈리아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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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6년 9월 29일 | |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 | ||
사망 | 2023년 6월 12일 (향년 86세) | |
이탈리아 공화국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 산 라파엘 병원 (Ospedale San Raffaele) | ||
재임기간 | 제50대 총리 1기 | |
1994년 5월 10일 ~ 1995년 1월 17일 | ||
제50대 총리 2기 | ||
2001년 6월 11일 ~ 2006년 5월 17일 | ||
제50대 총리 3기 | ||
2008년 5월 8일 ~ 2011년 11월 16일 | ||
학력 | 밀라노 대학교 ( 법학) | |
직업 | 정치인, 사업가 | |
배우자 |
카를라 달롤로 (1965~1985) 베로니카 라리오 (1990~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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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마리아나 베를루스코니 피에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바르바라 베를루스코니 엘레오노라 베를루스코니 루이지 베를루스코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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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 베를루스코니주의 | |
최종 당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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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메디아셋의 소유주 AC 밀란 구단주 AC 몬차 구단주 전진 이탈리아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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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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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기업인 겸 정치인. 제50대 총리를 역임했다.정치 권력(총리)+ 경제 권력(재벌)+ 언론 권력(최대의 언론기업 소유주)을 한 손에 틀어쥔 바 있던 이탈리아 정계의
수많은 부정부패, 반대 세력에 대한 각종 무자비한 탄압 및 여성편력 스캔들로 점철된 인물임에도, 3차례 총리 역임에 성공하며 도합 약 9년간 집권해 개인으로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장기 집권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 동시에 한때 세계 GDP 5위를 기록했던 이탈리아의 경제를 침체기에 빠뜨린 원흉으로 평가받는다.
유럽 축구 팬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좀 유명한데, 과거 이탈리아의 명문축구구단 AC 밀란의 구단주였다.[1] 허나 여자에 미쳐(...) 주축선수들을 다 팔아 버려서 팀을 망하게 할 뻔한 인물이기도 하다. AC 몬차의 구단주로 4년만에 세리에 C에서 세리에 A 승격을 이뤄내기도 했다.
2023년 6월 12일, 백혈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향년 86세.
2. 생애
2.1. 총리가 되기까지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으며 병역기피를 한 것과 크루즈선에서 가수일을 한 걸 제외하면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건설업에 뛰어들어 밀라노 교외에 밀라노2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분양을 했는데 이것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재벌이 되는 길을 열었고, 베티노 크락시 당시 밀라노 시장과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1960년대와 7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기존의 기민당과 그 연립정당을 철저하게 옹호하던 RAI에 반발한 반체제 인사들이 따로 불법 독립라디오 방송국을 차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베를루스코니가 직접적으로 자유라디오 운동에 참여한것은 아니지만 이들 반체제 인사들이 RAI와 다른 방송국을 차리면서 상당수의 청취자를 확보하는것에서 영감을 얻었고, 이후 미국과 중남미 민영방송들의 사례들을 찾아보면서 방송 진출이 큰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불법으로[2] 1973년 텔레밀라노라는 케이블 방송사를 차렸고, 1977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판결로 민영방송 금지조항이 폐지되자 방송사업을 더욱 확장해서 지상파 방송사를 차렸다.사업 확장 과정에서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 대해서 마피아 연루설, 정경유착설 등 말이 많았지만, 지주회사 핀인베스트의 복잡한 지분관계로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넘어갔고, 타 군소 민영방송사(Rete4, Italia1)들의 지분을 구입하여 최종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자신의 방송이 송출되는 광활한 방송망을 가지게 되었다. 1983년 베티노 크락시가 총리가 되자 베를루스코니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방송 규제 완화를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더욱 큰 돈을 벌게 되었다. 방송 규제 완화 규정 중 일부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세확장에 잠시 지장이 있었지만, 기민당과 사회당에 정치자금을 적절하게 제공했고 1990년 생방송 뉴스 프로그램 방영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거머쥐게 된다.
1992년 마니 풀리테 작전[3]으로 줄리오 안드레오티나 베티노 크락시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이 줄줄이 몰락하면서, 1994년 총선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의 후신인 좌파민주당[4]의 집권이 유력해진다. 이때 베를루스코니는 전진 이탈리아( 포르차 이탈리아)를 창당하고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비디오 민주주의라는 평이 나올 정도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방송망과 신문들을 총동원해서 기존 사회당[5]과 기민당 지지층을 대거 확보했고, 성공한 기업가 겸 구단주로서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총선에서 승리, 우파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총리에 취임한다.
2.2. 세 차례의 집권과 총리 재임
하지만 막상 집권 후에는 북부동맹과의 불협화음에 결국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고 1996년 총선에서 참패해버렸다. 그러나 미디어를 이용해서 좌파민주당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덕택에 2001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였다. 2기 집권 당시에는 이라크전 참전과 RAI 장악 등으로 여러모로 말이 많았고, 경제 정책도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다는 평을 받았다.그 와중에 1당을 안정적으로 차지하려고 선거법을 개정하였는데 2006년 총선에서 아슬아슬하게 패배해버렸지만 득표율이 1% 차이도 나지 않은 덕분에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2008년 총선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며 3선 총리가 되었다.[6] 세 번째로 총리가 되자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의 인민을 창당해서 두 개 당의 당대표를 지냈다. 3기 집권내내 이탈리아 경제는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청년실업률은 30-40%대까지 치솟아 결국 2년만에 총리직에서 퇴진했다. 2013년 의원 임기가 종료되자 자유의 인민을 정리했다.
2.3. 정치적 재기 시도
2017년 지방선거에서 베를루스코니가 의외로 선전을 거둔 두면서 정치적인 부활에는 성공했다는 평을 들었고, 2018년 총선에는 베를루스코니는 극우파 북부동맹을 포함하는 중도-우파 연합을 맺어 선거에 임했다. 때마침 집권 중이었던 중도좌파 민주당이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의 집권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선거법을 개정하여[7] 원내 1당에게 다수의석을 부여하는 방식의 선거법을 철폐하고 정당 연합도 표를 받을수있도록 선거법을 통과시켜놓았는데, 그 덕택에 베를루스코니하면 치를 떠는 유권자들이 많음에도 베를루스코니가 정치적으로 부활하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총선에서 우파연합이 38%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집권에는 충분치 않은 의석을 얻지 못했지만 어쨌든 나름 부활했다는 평을 받고 있고, 베를루스코니 자신의 정당인 포르자 이탈리아도 당 자체의 지지율이 저조함에도 북부 선거구에서의 압승과 중부지역 선거구에서의 선전[8]을 바탕으로 하원에서 100석, 상원에서 50석이 넘는 의석을 확보했다.
하지만 정작 단일 정당 기준 득표는 극우정당인 북부동맹이 더 많이 챙겨가고, 이 때문에 의석도 동맹이 더 많기 때문에 자신의 꼬봉을 총리로 내세울려고 하던 계획은 물거품으로 끝나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베를루스코니 자신이 선거에 나서면서 EU와 친하다는 점을 내세웠는데 동맹당은 반EU 성향인지라 EU 입장에서도 더욱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는 후문.
결국 오성운동과 북부동맹이 서로 연립정권을 구성하기로 합의하면서 사실상 토사구팽된 상황이 되어버렸다. 또, '다른 이탈리아'(L'Altra Italia)라는 중도우파 성향의 정치 조직을 출범시켰다. #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북서부 이탈리아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 원내 최고령 의원이 되었다. 그의 정당 전진 이탈리아는 역대 최저 득표율인 8.8%를 기록하여 그를 포함해 6명이 유럽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브렉시트로 국가별 할당 의석이 재조정되면서 7명으로 증가했다.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의 정계 은퇴 선언으로 2022년 1월 예정인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그리고 우파연합에서 공식 지지했다. # 그러나, 과반 지지 확보 실패로 출마 포기 설이 나왔다. # 결국, 출마 포기했다. #
2022년 이탈리아 의회 총선거에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다. # 그리고 몬차 선거구에서 50.3%를 득표해 중도좌파 연합의 페데리카 페렐리 후보를 꺾고 9년만에 의회에 재입성하였다. 이에 같이 당선된 안토니오 타야니 전진 이탈리아 부대표와 함께 유럽의회 의원직을 사임했다.
당초 상원의장 선출가능성이 점쳐졌으나 중도우파 연합 내에 갈등이 일어나면서 양보했다. 다만 본인은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본인이 당수로 있는 전진 이탈리아에서는 베를루스코니를 포함한 2명을 제외하고는 표결에 불참했고, 참석한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을 대신해 상원의장으로 선출된 이냐치오 라 루사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
이 사건 때문인지 '라 레푸블리카'를 통해 "조르자 멜로니, 그녀의 행동 1. 고압적 2. 지배적 3. 오만 4. 공격적", "바뀌려는 의지가 없다. 그녀는 잘 지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베를루스코니의 메모가 공개되었고 중도우파 연정이 깨지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
2023년 4월 백혈병 진단을 받아 입원하였다가 5월 19일 퇴원하였다. #
2.4. 사망
2023년 6월 12일, 86세로 사망했다. # 백혈병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노환에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실비오는 가장 영향력있는 투사였으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데 두려움이 없었고, 바로 그 용기와 결단력이 그를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고 고인을 기렸다. 또한 베를루스코니의 후임자 중 한 명인 마테오 렌치 전 총리는 상대당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고, 또 미워했다. 하지만 그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스포츠, 텔레비전 등 이탈리아인의 삶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며 상대적으로 절제된 평가를 내렸다.
여러모로 국외의 전반적인 부정 평가와는 오묘하게 결이 다른 이탈리아 현지의 애증 내지는 애도 분위기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6월 14일 밀라노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국장으로 열렸다. # 국장이 치러진 후 유해는 화장되어 양친과 여동생의 묘지와 가까운 세인트 마틴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메디아셋 미디어 그룹은 장남 피에르가 물러받았다. # 아버지처럼 정계 진출 가능성도 있다.
유산은 베를루스코니가 첫 번째 아내에게서 낳은 첫째 마리나, 둘째 피에르 실비오는 기존에 보유했던 지분을 합쳐 핀인베스트 지분 53%를 공동으로 소유해 지배권을 확보하게 됐다. 나머지 지분은 베를루스코니가 두 번째 아내에게서 낳은 바르바라, 엘레오노라, 루이지에게 돌아갔다. #
3. 평가
주로 언론장악과 기행만 가십거리로 알려져 있지만, 이탈리아의 정치/경제의 대침체를 부른 장본인이다. 그를 진지한 시선으로 독재자라고 평가하는 여론은 없긴 하지만, 정경유착, 언론 장악, 회계조작, 뇌물, 분식회계, 일명 '개인법'[9] 대량 제정 등 한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리더로서 하면 안 되는 짓거리만 골라서 했다. 한마디로 선진국의 정부수반임에도 전형적인 후진국의 독재자가 저지르는 모든 짓을 다 한 인물이다.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처럼 도둑정치라는 비판도 있다.그의 재임기 당시에는 이탈리아 경제도 막장이었는데, 이탈리아는 대침체 직후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과 더불어 ' PIGS'라는 경멸스러운 칭호로 불리는 등 국력이 많이 쇠퇴했다. EU에서 혼자만 쫄딱 망한 이탈리아
이런 경제적 실정은 그의 1기, 2기때 괜찮다가 마지막 집권기에 막장이 된 것이 아니다. 그의 집권기 내내 줄곧 안 좋았다. 이탈리아의 경제성장률은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쭈욱 정체 상태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낮은 성장률을 기록해 왔다.[10] 그리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사실상 이탈리아판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청년실업은 두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탈리아가 이전에는 계속 잘만 나가다가 베를루스코니가 집권하자 갑자기 망가진 것은 아닌데, 사실 이탈리아는 이미 90년대부터 저성장 기조였다. 자세한 사항은 이탈리아/경제 문서 참조.
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대놓고 온 나라를 망하게 한 남자라고 칭했다. 참고 게다가 그의 막장정치는 그가 권좌에서 물러난 2014년까지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참고
영국 가디언지는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 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엿먹이고 있다고 했다. 참고
당연하겠지만 이탈리아 지식인들이나 개념이 박힌 사람들에게는 무능한 정치인을 넘어 공공의 적 취급을 받고 있다. 특히 현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인 난니 모레티는 거의 마이클 무어가 조지 W. 부시를 싫어하는 수준으로 이 사람을 극도로 싫어해서 4월이나 악어 같은 걸출한 베를루스코니 비판 작품을 만들었다. 움베르토 에코도 맹렬 비판자 중 하나로,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이 언론과 결합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예로 들기도 했다. # 바티칸에게도, 심지어는 한때의 동맹이었던 우파 정치인들에게까지 비난받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비난받아도 인기는 굳건하니 대부분 반쯤 체념하던 상태.
많은 지식인들을 경악 시킨 것은, 2006년에 온 힘을 모아 유능한 경제학자이자 유럽의 경륜 있는 정치가인 로마노 프로디를 총리로 하는 좌파 연립 정권을 세웠지만 베를루스코니의 언론 공세에 20개월 만에 끝나고 말았다는 점이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베를루스코니가 이전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가히 이탈리아사에서 21세기 초반의 20여년은 베를루스코니라는 지도자의 그림자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지경.
대놓고 플레이보이 행각을 벌이고 갖가지 망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것 역시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의 일부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친근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무식한 척을 한다는 말이다. 10대 슈퍼모델들과 단체로 파티를 벌이고 바람을 피우고서 어설프게 감추려다 부인한테 뽀록나서 야단맞는 모습이나,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나처럼 성공하여 어린 여자들과 결혼하면 된다"는 발언을 하거나, 심지어 쌍둥이와 성매매를 하다 폭로된 것 # 모두 "허허 우리 총리 참 상남자로군", "저 사람은 위선떨지 않고 거짓말을 못하는구먼"이라는 반응을 얻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라는 것. 이 외에도 자신은 수십년 동안 소설책 한 번 읽은 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발언을 늘어놓았던 경우를 들 수 있다.
한국에서도 좌우 상관없이 다 까였다. 주간조선은 이탈리아의 사례를 실패사례로 삼았고,( #) 한겨레 역시 이명박 전 대통령을 베를루스코니와 같다며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다.( #) 일각에서는 이탈리아가 G7의 일원인데도 한국에서 선진국 이미지가 매우 옅은 이유가 베를루스코니 시기 이탈리아의 이미지가 잘 알려졌기 때문 아니냐는 주장까지 내놓기도 한다.[11]
여담으로 그의 3차 집권 이전인 2008년 이탈리아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정치적 권리(PR) 38점[12], 시민 자유(CL) 54점[13], 총 92점이었으나[14] 그의 집권 후인 2009년 D와 G가 1점씩 하락해 90점으로 감소했고[15], 2010년에는 C도 1점 감소해 89점을 기록한 게 베를루스코니가 퇴임한 2011년 지표가 반영된 2012년까지 유지되었다.[16] 그의 퇴임 이후인 2013년에도 C가 또 1점 감소해 88점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2014년 A와 C가 1점씩 복구되어 90점을 기록했고, 2023년 현재 이탈리아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PR 36점[17], CL 54점,[18] 총 90점이다. 이를 감안하면 베를루스코니가, 정확히는 3차 집권기의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의 세계의 자유 지수 감점에 영향을 미친 것은 1~2점 정도이며, 점수 상승을 전혀 감안하지 않으면 4점이나 감소시킨 셈이다.[19] 선진국 지도자 중 베를루스코니도 뛰어넘는 수준으로 세계의 자유 지수를 후퇴시킨 지도자가 박근혜[20], 조지프 무스카트, 도널드 트럼프, 베냐민 네타냐후[21] 4명밖에 없을 정도니 베를루스코니가 얼마나 막장 통치자였는지 알 만하다.[22]
물론 긍정적 치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8년 리비아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하고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협정을 맺은 바가 있는데, 식민지배 자체에 대해 사과한 제국주의 국가가 거의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큰 의미가 있는 성과이긴 하다.[23] #
3.1. 언론 장악
언론 장악은 베를루스코니가 실정을 거듭했음에도 정치를 계속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베를루스코니가(家)와 그 친인척이 이탈리아 민영 언론을 독과점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상태이다.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한 메디아셋(Mediaset) 소유가 아닌 것도 친인척 손에 있다. 한편 메디아셋의 모회사인 핀인베스트라는 재벌은 현재 맏딸인 마리나가 소유하고 있다. 게다가 총리 시절에는 이탈리아의 공영방송인 RAI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은 짓이 가능했다.- 샌드위치뉴스
- 언론/ 여론 조작
3.2. 여성 편력
[25]
호색한이라서 여자 경력도 보통 경력이 아니다. 그가 건드리는 여성들은 어느 정도 배경만 있으면 정계에서 급출세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마라 카르파냐. 커머셜 모델 이른바 벨리나 #이던 그녀를 전격적으로 하원의원에 당선시키고 장관 자리까지 주었다. 물론 젊은 모델이 제대로 된 정치 경력이 있을 턱이 만무하니 욕을 엄청 먹었다. 다만 카르파냐는 살레르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기회균등부(평등부) 장관을 맡았을 당시 중간 이상은 해서 그 비정상적인 임명과정에 비해서 욕을 상당히 덜 먹은 편이다. 오히려 소가 뒷걸음질치다 쥐잡은 격으로 카르파냐의 평등부 장관직 수행은 꽤 성공적이었다. 이탈리아 보수 가톨릭계와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 동성애 혐오 금지 법안을 통과시키고 스토킹 범죄 처벌 기준을 구체적으로 마련하였으며, 나이지리아계 이민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던 길거리 매춘을 크게 감소시켰다. #[26] 이후에도 베를루스코니는 이 여자에게 '내가 유부남만 아니었으면 그대와 결혼했을 것이오 하악' 하고 추파를 던졌다가 당시의 부인(베로니카)에게 공개적으로 욕을 엄청 처먹었다. 아르헨티나의 어떤 신문사는 이 둘 사이에 성관계까지 있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 외에 젊은 여자들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들에게 수녀복이나 AC 밀란 유니폼을 입히고 스트립쇼 비슷한 짓을 시키는 것도 했다.
그러나 10대 슈퍼모델들과 단체로 붕가붕가('bunga bunga')[27]파티를 벌이고 바람을 피우는 걸 참다참다 결국 폭발한 부인 베로니카 라리오한테 2014년에 이혼당했으며 위자료 금액을 놓고 소송을 벌였다. 더 막장인 것은 이 베로니카 라리오 여사가 이혼할 의사를 밝히며 한 이야기, "자기 딸내미 결혼식에는 오지도 않으면서 자기 손주뻘인 미성년자 모델들의 18세 생일 잔치는 빠지지 않지!" 꽤 오랜 시간 결혼 생활을 유지한 데다가 이혼의 원인이 총리에게 있는 만큼 어지간히 뜯길 것이라는 게 세간의 중론이었고, 결국 매달 140만 유로(18억원)의 위자료를 물게 되었다. 인과응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베를루스코니는 항소하였고 2017년 11월에 승소하여 더이상 위자료를 주지 않게 되었으며 법원에서는 전처 라리오에게 6천만 유로(777억원)를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28] 하지만 라리오는 위자료를 계속 받겠다며 항소했다. #
거기에다 오랜 동지였던 지안프랑코 피니가 베총리의 행각에 참다참다 못해 집권당에서 뛰쳐나가는 바람에 이탈리아 의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2010년 12월 14일에 이탈리아 의회에서 신임 투표를 하게 되는데 상하원 중 하나라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 실각할 처지에 몰렸다.
그러나 우파들의 지지가 확실한 탓인지 신임 투표를 통과했고, 심지어는 베를루스코니의 미성년자 성매수 수사를 위한 베를루스코니 개인 회계사무실 압수수색 동의안도 압도적으로 부결시켜 버렸다. 전문가들은 중도우파가 확고하게 베를루스코니를 미는 만큼 2011년 봄의 선거에서도 베를루스코니가 무난하게 총리직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2011년 지방 선거에 참패하면서 정치적 타격을 받았고[29] 거기에 이탈리아 검찰이 섹스 파티를 입증할 녹음 테이프를 입수하면서 베를루스코니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2023년에 모두 무죄로 선고받았다. # 2024년. '붕가붕가 파티'와 관련해 위증을 대가로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는 모로코 출신 카루마 엘 마흐루그 등 21명에게 무죄 판결한 원심을 깨고 재심을 명령했다. #
49살 연하의 3번째 부인을 맞이하였으나, 2020년 이혼하고 # 50살 이상 어린 여성을 새 연인으로 맞았다. #
3.3. 망언
입이 매우 싼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이 때문에 외교적인 결례도 엄청나게 많이 저질렀다. 망언으로 외교적 결례를 저지르는 것은 드물진 않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의 경우에도 미국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조롱했다.[30] 하지만 베를루스코니처럼 우방도 예외 없이 디스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31] 특히 오바마에 대한 일화가 유명하다. 저런 말을 하고 어떻게 정치를 하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강대국 지도자도 예외 없이 망언의 대상이 되는 점이 자국민들에게 인기를 끄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미국, 중국은 베를루스코니가 자주 까던 대상이다.[32] 이탈리아 국민 자체가 과거 로마 제국에 대한 자부심을 지닌 동시에[33] 과거와 현실과의 괴리를 강하게 느끼고 있는데, 베를루스코니는 현실이 어떻든 간에[34] 초강대국 지도자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다니는 격이다.[35]베를루스코니는 미디어 재벌이다. 의도한 바인지 알 수는 없지만 미디어에서 써먹던 수법을 정치에서도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방적인 이탈리아 사회더라도 미디어를 장악한 베를루스코니의 지위를 고려한다면 자신이 원하다면 충분히 자신의 치부를 숨기고 윤리적이고 건전한 이미지를 미디어를 통해 선전할 수 있다. 하지반 베를루스코니는 숨기기는커녕 대놓고 망언과 문란한 삶을 산다. 성공했다면 정계를 예능으로 평정한 사람이 되었겠지만, 끝이 매우 좋지 않았다.
-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향한 선탠 드립. 오바마의 당선 직후 "젊고 잘생기고 심지어 선탠까지 제대로 한 지도자."라고 말했다. 사실 자기 딴에는 오바마가 잘생기고 선탠도 잘 됐다고 농담조로 칭찬하는 것이었지만, 인종 문제에 민감한 흑인을 대상으로 국가 지도자라는 노친네가 한 개드립이라 당연히 큰 문제가 되었다. 문제는 이게 최악의 사건도 아니고 끝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이듬해 방미 당시에는 " 미셸도 선탠했더라."라고 개드립을 쳤다. 일국의 영부인에게!
- 선탠 드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진이 나서 거의 3만 명이 집을 잃고 텐트촌에 살고 있는 상태였는데 텐트촌을 찾아가서 한 아프리카인 사제에게 "선탠이 잘 되어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뭐병. 게다가 " 이왕 이렇게 된 거 캠핑 왔다고 생각해라", "인근 해변으로 놀러가라"는 망언으로 이재민들을 분노케 했다.
- 이탈리아 파시즘의 상징인 베니토 무솔리니 존경 드립을 친 적이 있다.(...) 진짜 존경하는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무솔리니 관련해서 "인종법(반유대인법)은 무솔리니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잘한 것도 많다"고 말했다가 반대 진영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기도 했다. 이 양반 말하는거 보면 독일 나치즘과 이탈리아 파시즘은 결이 좀 다르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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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핀란드의
타르야 할로넨 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돌아온 이후 기자회담에서는 "저의 플레이보이 스킬을 외교 무대에서 썼습니다."라고 말해버렸다. 이걸 핀란드 정부에서 항의하자 베를루스코니 쪽에서 사과하며 해명한답시고 한 말은 "당연히 농담이었죠. 그 여자(타리아 할로넨 전 대통령) 얼굴을 보면 플레이보이 발언이 농담이었다는 거 다 아실 텐데요?"였다.-
해명이 더 가관-
- 유럽연합 장관급 회의에서 독일의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원이 자신을 비판하자 한 말, "우리 나라에서 나치 독일의 수용소 영화를 한 편 찍고 있거든요? 카포 역할에 당신이 어울릴 것 같군요." 심지어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농담까지 했다. 2010년 5월 바티칸의 기관지에서는 이 발언을 "구역질 난다."라고 비난했다. 공식적으로는 다른 나라인 바티칸의 기관지가 깔 정도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독일 총리는 저 소식을 듣고 외교 분쟁 직전까지 갔다.[36]
- 중국에 대해서도 한 마디 했는데, " 마오쩌둥 시절에는 아이를 삶아서 비료로 썼다. 진짜라니까?"라고 발언하였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진실이건 아니건 심각한 외교적 결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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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유세 중에는 언론에 대놓고 "선거 기간 중에는
섹스를 끊겠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성추문에 대해 말이 많자 "
게이
인 것보다는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하는 게 좋잖아요?"라고 말했다.--
영감님, 그걸 묻는게 아니잖아요.....-
- 로마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사르코지의 부인인 가수 겸 모델 카를라 브루니가 이탈리아 출신임을 빗대 "당신의 마누라는 내가 보냈다."라고 속삭여 사르코지에게 쓴웃음을 짓게 했다.
- 2007년 12월 한 시상식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전직 쇼걸이자 '전진 이탈리아 당' 의원인 마라 카르파냐에게 "내가 이미 결혼만 안 했어도 당신이랑 지금 당장 결혼했을 것이다.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가겠다!"라고 공개 구애를 했다. 사생활과 공적인 상황을 구분 못 하는 전형적인 행태이다.
- 2008년 4월 10일 TV로 생중계된 유권자와의 대화에서 "안정된 일자리가 부족한 현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한 한 젊은 여성에게 베를루스코니는 "베를루스코니의 아들과 결혼해 보도록 노력해 봐라. 그러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는 몰상식한 답변으로 방청객들의 빈축을 샀다.
- 2008년 4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스페인 각료의 과반수가 여성으로 교체된 것에 대해 "너무 선정적이다. 이탈리아에는 있을 수가 없다. 이탈리아는 우수한 남성이 넘칠 정도이고 각료에 어울리는 유능한 여성을 찾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말 자체도 헛소리지만 정작 베를루스코니는 여성 모델[37]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기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 뉴욕의 월가 투자자들에게 이탈리아에 투자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들을 제시할 때는 "우리 이탈리아엔 예쁘고 늘씬한 비서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라고 자랑하며 대 이탈리아 투자를 호소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월가 투자자들이 비서들만 보고 투자를 하는 바보일 리는 없으니 깔끔하게 무시했고 여야 여성 의원들의 항의만 잔뜩 받았다.
- 2009년 1월 이탈리아에서 빈발하고 있는 강간 사건에 대해서 의회가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시내 순찰 병력을 현재의 10배 수준으로 늘리면 여성들을 성폭력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들 숫자에 비례해서 순찰 병력을 배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이탈리아엔 미인들이 너무 많아서 성폭행 사건을 원천봉쇄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답해 야당 정치인들의 비난을 자초했다.[38] 파문이 일파만파 번지자 베를루스코니는 "사실은 우리 이탈리아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싶어 이런 말을 했던 것뿐이었다. 당연히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시도했지만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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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2일 스타디오 디노 마누치에서 열린 2010/2011 이탈리아
세리에 A 2라운드 승격팀 체세나 vs 밀란의 경기에서 밀란이 0:2로 패하자 베를루스코니는 "
좌파
심판 때문에 졌다!"라는
개드립을
쳤다.-
밀란 경기력이 엉망인걸 누구한테 책임전가 하시나.....-
- 2010년에 상술한 미성년 모델들과의 섹스 스캔들이 터지자, "게이가 되기보다는 젊은 여성을 사랑하는 것이 낫다"라고 발언했다. 링크 당시 동성애자 권리 단체에서 반발한 것은 물론, 그동안의 비리 행각에 대한 비겁한 변명이라 하여 사임 요구를 부채질했다. 사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생활이 문란하다고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총리와 관계를 맺은 미성년자가 절도죄로 붙잡히자,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석방시킨 것이 권력 남용이라고 문제가 된 것이다. 즉, 성지향성 문제는 애초에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는데, 동성애자를 방패막이로 내세워 논점일탈을 한 것이다.[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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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나하고 섹스하고 싶냐고 여성들에게 물으면 30%는 '예스'라고 하고 70%는 '뭐? 또?(What? Again?)'라고 할 거다". 사실 다른 사람이 이런
농담을 했다면 조금 저질스럽긴 해도 웃어줄 만한 재치있는 농담이긴 하다. 베를루스코니가 해서 문제지만, 어쨌든 그의 여성편력을 잘 말해주는 농담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나마 이딴게 수위가 제일 낮은거.. 솔직히 이건 좀 웃기긴 하다-
- 이집트에서 부는 민주화 바람에 찔렸는지 아니면 동병상련이라도 느꼈는지 " 무바라크는 중동의 현인" 드립을 쳤다. 다른 국가들은 "네가 원래 그렇지 뭐" 하고 무시하는 중이다. 이탈리아의 경제 성장률을 4%대로 높이는 특별한 계획을 내놓겠다 했지만 좌파들을 중심으로 퇴진 시위가 확산되었다. 아무래도 경제 성장 떡밥으로 퇴진 시위를 누를 참인 듯. 실제로 영미권 언론에서는 베를루스코니와 이탈리아의 상황을 이집트와 비교하는 기사까지 나왔다.
- 마지막까지 망언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탈리아 경제 위기가 지적되자 "이탈리아는 위기를 체감 못한다. 이탈리아 국채 수익률 급등은 지나가는 유행이 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레스토랑, 여객선에 손님이 꽉꽉 들어차고 호텔 리조트는 풀부킹되고 있다. 뭐가 위기란 말이냐?"라고 말했다.
- 2015년 5월 30일 지방선거 유세 현장을 찾은 자리에서 상대 당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가 측근으로부터 후보 이름을 잘못 전달받았다는 걸 알고는 황급히 현장을 떴다.
- 2020년 1월 지방 선거 유세 중 동료 여성 정치인을 성적으로 모욕하는 발언을 해 또 한 번 구설수에 올랐다. 요약하자면 자신과 성관계는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관계는 깊다는 내용. #
- EU 정상회담에서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 뒤에서 중지, 약지만 접은 채로 포즈를 취했는데 그 제스처의 뜻은 '니 아내가 바람핀다'라는 뜻인데 그걸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여주는 아주 대담한 행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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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그도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앞에서는 무너져 버렸으니, 자세한 사항은
그의 어록 중 베를루스코니와의 기념촬영을 참고하자.-
천상천이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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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는
푸틴에게서 생일 선물과 자신을 절친한 친구로 표현한 친서를 받았다며 좋아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젤렌스키 탓으로 돌리는 녹취가 공개되어 파문이 일었다.
# 젤렌스키 반응으로 8% 득표율의 불과해서 그걸로 됐다면서 건강하기만 했으면 하는 발언을 했다.
# 후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니 침공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다.”라며 해명했다. 사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그는 “푸틴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3.4. 보론 - 극우가 아닌 우익대중주의
베를루스코니는 좀 그렇고 그런 독재자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는 버릇이 있다. 푸틴과의 관계는 유명하며 # # # 이웃나라 리비아의 카다피와도 매우 친했던 모양. 여기까지만 보면 극우 정치인처럼 보일 수 있지만...의외로 베를루스코니는 중도우파 성향, 부정적으로 평가해도 우익대중주의의 정치인에 속한다. 정책적으로는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도널드 트럼프,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마린 르펜, 오르반 빅토르 같은 후대의 대안우파 포퓰리스트 정치인들과 비슷한 방향성을 가졌다고 보긴 어렵다. 당장 본인과 본인의 사당인 포르차 이탈리아부터 친 이민, 친유럽주의 정당이다. 또한 2013년 이후부터 시민결합을 지지해왔고 동성결혼에 있어서도 적극적 반대가 아닌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41] 다만 베를루스코니 같은 우익 포퓰리즘이 대침체와 결부되면서 한술 더 뜨는 후배들의 시대를 열었다고 본다면 그 책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성과 관련된 저질 발언은 정치성향과는 관계없이 베를루스코니의 성품 문제에 가까운데, 정책적 측면에서는 딱히 안티페미니즘 성향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점은 평가할 만 하다. 인종 관련 막말은 대체로 유럽이 영미권에 비해 말조심을 안 하는 편이란 걸 감안해야 한다. 유색인종들이 세월이 지나며 주류 사회로 편입되면서 피부색으로 농담만 해도 갑분싸가 될 수 있는 영미권과 달리, 유럽은 여전히 이런 부분에서 인식이 저조한 편이다.[42]
3.5. 축구
"정치적으로나 사생활적으로는 절대로 본받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축구사에는 분명히 한 획을 그은 사나이다."
한준희
한준희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축구를 얼마나 좋아하냐면 중동평화회담 기자회견장에서 기자 중 아무도 질문하지 않은 선수의 방출에 대해서 이야기할 정도이다.
AC 밀란의 구단 부채 중 상당수가 베를루스코니의 정치 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 돈이 부족하다 싶으면 선수를 팔았다가 나중에 스캔들이 터지거나 정치적 위기가 오면 선수를 지른다. 실제로 베를루스코니가 실각한 2007년경에 밀란은 챔피언스리그의 제왕이었다. 밀란의 성적이 올라가면 자기 지지율도 올라가니까. 그렇다고 선수를 막 지르기 보다 어느정도 보는 눈은 있는지 선수를 사고 파는 것만 보면 작두라도 탄 것 같다. 일명 베견지명.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안드리 셰브첸코. 셰브첸코는 밀란을 떠나자마자 하얀 호나우두에서 희대의 먹튀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 다른 사례가 바로 카카. 역대 2위의 어마어마한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시켰더니 카카마저 몰락했고 결국 공짜로 카카를 다시 데려왔다. 다만 이건 부구단주 아드리아노 갈리아니가 담당한다. 실제로 갈리아니의 협상력은 웬만한 축구팬 사이에서 유명한 편이다. 갈기꾼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 사실 밀란 빠들은 베를루스코니가 아니라 갈리아니를 빤다. 하지만 요즘은 구단 운영에 딸 바르바라의 입지를 키워주며 갈리아니를 거의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지라 팬들의 반발이 큰 편.
대한민국에선 주로 베를루스코니가 까이는 역할이지만 베를루스코니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옹호해 주는 경우도 잦다. 파올로 말디니나 바레시만 해도 베를루스코니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피로하곤 한다. 이는 베를루스코니가 처음 밀란을 손에 쥐었던 시기 적극적인 투자로 밀란의 황금 시대를 열었으며 세리에 A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밀란의 황금기, 베를루스코니는 유럽 무대에서 혁혁하던 밀란의 업적을 선전하며 정치도 밀란 축구하듯 유럽을 휩쓸겠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가 밀란에서의 업적만으로 집권한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밀란의 호성적이 집권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애초에 팀을 매입한 목적이 자신의 정치적 도구인 것도 사실이지만 베를루스코니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토토로 승부조작 스캔들로 기반이 붕괴되어 버린 팀이 그렇게 빨리 부활하진 못했을 것이다. 베를루스코니에 의해 부활하여 세계 최강의 팀으로 부상하고 베를루스코니의 손에 의해 유럽무대 경쟁력도 없는 그저 그런 팀으로 전락한 건 참 아이러니하다.[43]
축구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는지, 지원도 뚝 끊긴지 오래되어 팀의 주축인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티아고 실바를 PSG에 팔아버리고 자유계약선수나 A급 선수 한명도 못사는 상황에서 팀의 부진은 당연한것인데, 이 양반은 노망이 났는지 성적이 나쁘다며 레오나르두[44]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경질해버리지 않나[45], 팀에 독설을 퍼붓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밀란은 14-15시즌 멸망했다[46]. 15/16시즌 막대한 투자를 등에 얹고 코파 이탈리아 결승, 리그 6위를 하며 유로파리그 티켓 경쟁을 하던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를 갑자기 성적부진으로 경질시켰다. 그리고 또 멸망하고 있다.[47]
엄청난 까임으로 인해 자신의 자리가 위험해진것을 알았는지 15-16시즌 전에 영입을 어느정도 하는데 성공하긴 했다.그리고 지분의 대부분을 태국의 사업가 비 타에차우볼에 48%넘긴다고 했는데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다.그리고 알레산드로 네스타에게 한소리 듣고말았다. 그러나 그 영입도 무색하게 시즌이 거의 끝나가는 37라운드 시점에서의 순위는 유로파도 못 나가는 7위. 밀란빠인 와싯은 파스타에서 이새끼 안나가나라며 대놓고 깠다.
2015-16 시즌에서도 사수올로에게 밀려 유로파도 못나가는 7위의 성적으로 멸망해버렸다. 다만 시즌 말미에 인테르의 중국자본으로의 매각 건과 겹치는 시기에 AC 밀란 또한 매각 수순을 밟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밀란 팬들을 기대에 부풀게 만들었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않아 베총리 본인의 건강악화로 인한 수술을 치렀다는 기사가 떴다. 건강상 문제로 구단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지게 되어 매각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소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건강악화로 인해 정치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지면 AC 밀란에만 전념할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게 되면서 수많은 밀란 팬들을 해탈하게 만들었다.
2016년 6월 29일, 드디어 중국계 컨소시엄에 AC 밀란 매각을 결정했다. 이로써 30년동안 AC 밀란을 운영해온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시대는 끝이 나는 듯했지만 최근에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구단주는 여전히 베를루스코니로 되어있고 설상가상으로 협상 과정에서 콘소시움이 아닌 매각으로 가겠다는 입장으로 급 선회하면서 협상이 지연되었다고 한다.
콘소시움의 인수가 최종 확정 되었고[48] 잠깐이나마 구단주 자리 지켰던 베를루스코니는 완전히 물러남으로써 진짜로 밀란과 작별하며 30년 구단주 인생을 마무리 지었다.
다만 팀의 미래도 어느정도 보는 면이 있었는데,구단주 생활 말기에 영 이탈리안 정책으로 유망주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는 모습을 보였고,대표적인 예가 지안루이지 돈나룸마, 파트리크 쿠트로네, 마누엘 로카텔리, 니콜로 자넬라토.이 넷은 밀란의 미래로 평가받고 있었다...만 자넬라토는 제일 먼저 2018년에 FC 크로토네로 떠났고 로카텔리와 쿠트로네는 2019년 각각 US 사수올로 칼초와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로 떠났으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돈나룸마도 20-21 시즌 종료 후 파리 생제르맹 FC로 떠났다.
안드레아 피를로의 자서전에서 여러 번 까인다. 훈텔라르가 밀란에 오는 과정에서 피를로가 이를 상기하면서 왜 영입했는지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18년 9월 세리에 C의 AC 몬차를 인수해서 공격적인 투자로 세리에 B 승격을 이뤄냈다. 영혼의 단짝이라고 불릴만한 아드리아노 갈리아니를 재차 기용한 것은 덤. 그리고 2021-22 시즌에는 세리에 B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창단 최초로 세리에 A 승격을 이뤄냈다. 22-23시즌은 리그 11위로 잔류에 성공했지만, 베를루스코니가 죽기전에 몬차를 포기하여 결국 그가 죽은지 하룻만에 노팅엄 포레스트와 올림피아코스 구단주로 알려진 그리스 재벌인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구단주가 몬차를 인수하였다.
3.6. 집권기 3기의 실정, 위법
2009년에는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집권 40주년을 기념한답시고 덴마크에 납품 예정이었던 디젤 동차 1편성을 빼돌려서 VIP용으로 개조한 다음 카다피에게 선물했던 적이 있었다. 리비아의 철도를 비롯한 사회 기반 시설 건설에 이탈리아 기업이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뇌물의 성격도 있었다. 디젤 동차를 주문했던 덴마크 쪽에서는 전혀 몰랐던 상태였으며, 안 그래도 납기 지연과 결함에 열받아 있었던 덴마크 국철을 더 화나게 했다. 2011년 리비아 내전이 발생하면서 결국 이 편성은 덴마크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 결번 처리되었고, 이 차량을 제작했던 안살도브레다는 결국 배상금을 물어 줘야 했다.2011년 6월 원전 재가동 문제와 수자원 공급 민영화 문제, 공직자 면책권 부가 법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는데 전부 다 부결되었다. 이 법들은 베총리가 심혈을 걸고 밀어붙인 법으로 특히 공직자 면책권은 베총리 본인이 재판에 끌려나가는 걸 막으려고 만든 법이라 타격이 크다. 게다가 이번 투표 결과를 보면 이탈리아 민심도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투표율은 57% 정도이지만 그 중 반대하는 비율이 95%.
2012년 실패국가지수에서 이탈리아는 45.8점을 기록했다.[49] 이는 그로부터 5년 전인 2007년 37.1점에서 8.7점이나 상승한 것이며 이는 그 5년 기간 동안 세계에서 9번째로 크게 나빠진 것이었다. 순위 역시 같은 기간 156위에서 146위[50]로 10계단이나 상승했다. 그가 사임한 이후 2013년에는 44.6점에 147위이다. 또 2012~2020년까지 이탈리아의 부패인식지수는 르완다보다도 낮았다.[51] 이러한 상당한 폭의 상승은 베를루스코니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신용등급 강등과 더불어 잇따라 터지는 베총리의 섹스 스캔들로 이탈리아가 어수선한 가운데 사생활 보호법을 개정해 언론을 옥죄려 했다. 사법당국이 녹취한 내용을 신문이나 웹사이트에 올려 사익에 반하거나 편견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면 48시간 이내에 수정해야 하고 여기에 불응하면 구금 또는 벌금형에 처하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베를루스코니가 쏟아낸 막말이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위키피디아 이탈리아어판에 빠짐없이 그대로 올라가 그의 골머리를 앓게 한 것. 이탈리아어판 위키백과는 항의의 표시로 10월 4일부터 이틀 동안 항의 성명서를 첫 페이지로 표시하고 다른 문서 열람을 닫았다. #[52]
월가 점령 시위가 전 세계로 번져나가면서 경제가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유럽에서 호응이 높은데 이탈리아에서도 로마에 10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폭동 직전까지 갔다. 이탈리아의 경제 위기가 매우 심각한 상황인 걸 감안하면 베를루스코니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않는 한 정치적으로 큰 궁지에 몰린 것은 분명했다. 이에 따라 2010년 예산 지출 승인안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사퇴할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부인했지만 결국에는 8일(현지시간) 경제개혁안이 의회의 승인을 받으면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 기사가 나가자 떨어지던 주가가 다시 올랐다. 51번의 신임 투표에서도 살아남은 그이지만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7일 연 6.77%까지 치솟았고 정부 부채는 2조 6000억 달러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많았으며 경제성장률은 수 년째 제로로 변한 세계경제를 이끄는 G7의 위상에서 급추락하는 이탈리아의 경제가 그의 연임에 제동을 걸게 만들었다. 퇴임 이후에 AC 밀란의 구단주로 활약할 거라 했지만, 재임기간에 재판만 8번 받고 이중 상당수가 진행 중이었으며, 퇴임을 하면 기다렸다는 식으로 고소 크리를 먹을 것은 이미 확정적.
결국 2011년 11월 12일 사임했다. 사임 이후 미국의 보수 성향 시민단체인 프리덤 하우스는 이탈리아의 시민적 자유에 대한 평가를 2011년 2점에서 2012년 1점으로 올렸다.[53]그런데 다시 돌아오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49세 연하인 프란체스카 파스칼과 약혼했다.
2013년 5월 현재 재임기간중에 저질렀던 탈세, 미성년자 성관계, 불법 도청, 정치인 매수 등의 범죄행위가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고, 그 중 상당 부분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정치적 생명이 끝장날 처지에 놓여 있다. 기사
결국 밀라노 법원은 베를루스코니에게 미성년자 성매매와 권력남용 혐의로 징역 7년과 평생 피선거권 박탈이라는 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형이 확정될 때까지 형집행이 유예되기 때문에 베를루스코니는 대법원까지 항소해서 시간을 벌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사법체계는 항소해서 상급심까지 가는데 몇년이 걸리기 때문[54].
2013년 8월 이탈리아 대법원이 세금 횡령 혐의에 대해 징역 4년형 선고를 확정했으나, 사면법의 영향을 받아 1년으로 감형되었고 고령임을 감안해 교도소 수감 대신 사회 봉사로 대신하게 되었다. 기사 그리고 2015년 3월까지 알츠하이머 요양원에서의 사회봉사로 형을 대신했다.
2015년 3월 10일 이탈리아 대법원이 미성년자 성매매 및 수사 압력 행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기사 무죄 근거로는 양측이 성관계 자체를 부인하고 있으며, 당사자의 나이를 몰랐고 경찰에 전화를 건 것이 위협이 포함된 내용이 아니라는 변호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탈세로 봉사활동 몇 시간 한 거 말고는 받은 처벌이 없다.
4. 여담
- 파올로 소렌티노가 이 사람에 대한 영화를 제작해 발표했다. 제목은 그때 그들. 무려 2부작 구성이나 한국에서는 편집판으로 개봉한다. 참고로 "수부라게이트"라는 이탈리아 영화는 그를 모티브로 하는 플롯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 외, 검색엔진에서 그의 이름과 "영화"를 (잘못) 검색하면 여러편의 영화가 필모그래피[55]로 나오는데, 언론재벌답게 영화 드라마 등 미디어에 투자(주로 Excutive PD)를 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 2019년 3월, 베를루스코니 붕가붕가 섹스 스캔들의 증인이던 모로코 출신 여성 모델 이마네 파딜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는데, 부검 결과 체내에서 방사능 물질, 카드뮴, 안티모니 등이 다량 검출되어 독살임이 확실시되고 있다. 기사
- 2009년 12월 13일 누군가가 던진 조각상에 얼굴을 맞아 입술과 잇몸에 피가 흐르고 코뼈 일부와 치아 2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는데, 피습 이후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공격이 합성사진인가'먀 베를루스코니의 피습이 자작극이라는[56] 영상이 업로드 몇 시간 만에 50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
-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 앙숙이다. 2001년 총선때 "왜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총리 자격이 없는가"라는 특집기사를 냈고 유로존 위기때도 "맘마미아", "나라를 말아먹은 남자", " 광대를 보내주오"등 여러차레 표지기사로 비판을 했다. 베를루스코니도 잡지를 이코뮤니스트(Communist=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며 맏받아쳤다.
- 2016년 그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길'이 개봉했다. 본인과 지인들을 주로 인터뷰하고 있지만 반대 세력 인사들도 인터뷰했고 베를루스코니의 각종 부패 혐의를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57]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이 가능했으나 2021년 11월 7일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는 친분이 있었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이탈리아 관계는 악화되고 푸틴 대통령에게 실망했다고 밝혔다. #1 #2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돈바스 상황을 놓고 러시아 국민, 정당, 장관들에게 침공을 강요당했다며 이로 인해 "특별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 또한 전쟁을 푸틴이 아닌 젤렌스키에게 책임이 있다는 발언까지 하여 비판받고 있다. # 베를루스코니가 사망하자 푸틴은 진정한 친구를 잃었다며 애도했다. #
- 마시모 모라티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마시모의 선친 안젤로의 비서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 말펜사 국제공항이 베를루스코니의 이름을 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공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마피아와 싸우다 순직한 검사들의 이름을 붙인 팔코네 보르셀리노 국제공항이 있는 판에 마피아와 유착 의혹, 성추문이 있는 베를루스코니 이름을 붙이는게 맞는지 논란이 일었다. 심지어 장남의 말에 따르면 유가족과 협의도 없었다고 한다. #
5. 같이 보기
[1]
2017년, 중국계 투자기구 '로소네리(Rossoneri) 스포츠 인베스트먼트 룩스'에 지분을 넘겼다.
[2]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철저하게
공영방송 내지
국영방송 위주로 돌아갔으며
민영방송은
룩셈부르크,
영국,
핀란드 정도를 제외하면
동구권이든 서구권이든간에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RAI와 지역방송사들만 허가대상이었고, 나머지는 모조리 해적방송이었다.
[3]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
[4]
물론 좌파민주당도
부패에 연루되었지만 라이벌 정당인 기민당이나 사회당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부패 정도가 덜한 덕분에 유력정당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5]
사회당 지지층이라는 이야기가 왜 나왔느냐면 베를루스코니의 사업기반이
밀라노였기 때문인데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밀라노는 사회당 강세지역이었고 사회당 소속으로 총리직을 지냈던 베티노 크락시도 밀라노에서 시장직을 지내며 경력을 쌓았다.
[6]
참고로
오성운동의 창당계기가
베페 그릴로가 베를루스코니의 3선에 큰 충격을 받아서였다.
[7]
실제 정당 자체로만 본다면 오성운동의 지지율이 가장 높다.
[8]
중부지역 선거구에서 선전을 거둔 이유는 간단하다. 반 베를루스코니 성향의 유권자들이 이 지역에 우파정당 지지자들보다 훨씬 많기는 하지만 다 합쳐 60% 초반 수준인데, 이들의 표가 민주당과 오성운동으로 딱 양분된 틈을 노려 우파정당들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즉, 어부지리인 셈.
[9]
간단히 말해 특정 사람, 기업에 유리한 법을 말한다. 베를루스코니는 이 '개인법'을 자신의 사법처리 방지와 경제적 이득을 위해 이용했다.
[10]
참고로
잃어버린 10년이 20년이 되어 간다던
일본도
2000년대 이탈리아보다 2배나 빠르게 성장했다.
[11]
다만 90년대부터 이어진 저성장 기조와
코로나 19 초기 드러난 열악한 의료 인프라도 이탈리아의 선진국 이미지 희석에 큰 영향을 미쳤다.
[12]
A 12점, B 15점, C 11점
[13]
D 15점, E 12점, F 12점, G 15점
[14]
2003~2007년에도 91~92점을 유지했다.
[15]
다만 여기서 G는
은드랑게타 등 조직범죄로 인한 재산권 침해 때문에 감점된 것으로서 베를루스코니와는 무관하다.
[16]
2012년에는 D가 1점 복구되었지만 A가 1점 하락해서 점수가 똑같다.
[17]
A 12점, B 14점, C 10점
[18]
D 15점, E 12점, F 13점, G 14점
[19]
참고로 후자는 점수 상승을 감안하지 않은
마잉주,
로베르트 피초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피초면 몰라도 마잉주는 베를루스코니에 비하면 정상인이었다.
[20]
다만 이쪽도 하락 점수의 절반 가량이 회복된 상태다. 자세한 사항은
이 문서 참조.
[21]
이쪽은 점수 하락의 절반 가량이
팔레스타인과의 분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다는 궤변이라도 가능하다. 실제로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관련 하락폭을 제외하고 보면 네타냐후의 점수 하락폭은
사법개혁이 반영된 2024년 지표 이전까지는 베를루스코니 대비 딱히 높지도 않았다.
[22]
아이러니하게도 여기 언급된 선진국 지도자들이 집권한 국가들은
미니국가 몰타와
약소국 슬로바키아를 제외하면 딱
강대국의 최대(미국),
강대국의 최소(이탈리아),
지역강국의 최대(한국), 지역강국의 최소 내지
강소국의 최대(이스라엘), 미승인국의 최대(대만)에 속한다.(...) 그리고 '약소국의 최대'는
지구 최악의 독재국가다.
[23]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하더라도 식민지 시절 개개의 만행들에 한해 사과했다.
[24]
통상적으로 여야공방은 정부->여당->야당 순으로 다룬다
[25]
사진은
2008년 미스 이탈리아 '미리암 레오네' 입상 직후 모습인데 사실 베를루스코니와 연관있는 인물은 아니다. 현재는
배우로 활발히 활동 중.
[26]
게다가 카르파냐는 10년 뒤인 2021년 2월부터 남부 및 지방 단결부 장관을 맡으면서 이탈리아 내각에 또 복귀했다. 정치성향이 중도에 가까워서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27]
한국 인터넷 은어가 아니라 진짜로
"Bunga Bunga" 파티다..
[28]
패소한 이유는 전처 라리오가 굳이 매달 140만 유로나 되는 위자료를 받지 않아도 충분히 살수 있을만큼
부자이기 때문이다.
[29]
특히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밀라노와
나폴리에서도 패배했다.
[30]
다만 이 경우에는 차베스가 미국에게 쌓인 감정도 있고
IMF와
세계은행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는 빈민층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하는 일종의 쇼맨십에 가깝긴 하다. 뭐 그렇기는 해도 수위가 과격한 것은 변함이 없다.
[31]
일본의 일부 정치인이나 우고 차베스,
도널드 트럼프 등의 망언이나
폭언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행위이다. 분명 문제의 소지가 큰 망언이고, 사회 각계나 외국등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발언을 오히려 속 시원하게 여기고 공감대를 가지는 자국 내의 '집단'이 있고, 그 집단에게 어필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공감대 형성의 도구라는 것. 이 때문에 아무리 망언을 많이 내뱉어도 '최소한의 면피의 여지'는 만들어 주는 것이 망언정치의 철칙인데, 베를루스코니는 이런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이 망언을 쏟아내는 편이다. 예를 들어,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미디어 출신으로 국제 망언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도널드 트럼프를 보더라도, 최소한 공적인 장소에서 '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고 있는 상대'를 대놓고 조롱하는 발언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회담 등에서는
립서비스라도 해 주는 편이다. 당장 외교가에서도
외교적 수사라는 용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즉, 정치적 망언이란 건
농담과
모욕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 상대에게 모욕감은 주지만,
책임을 추궁당하면 농담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 정도의 선을 지킨다거나, 해당 망언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듣는 사람 모두 알지만, 정확한 대상을 특정하기에는 다소 모호하게 하는 등의 요령이 필요한데, 이 노친네는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대놓고 상대를 모욕해 버리는 편이다.
[32]
하지만 겉으로는 까면서 뒤에서는 은근히
친중적인 모습을 내비쳤다.
[33]
사실 이는
남부와 북부가 완전히 이질적인 이탈리아의 역사적 특징 때문이라도 결국 하나로 묶어줄 수단이 필요한데 그게
로마 제국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요리이다.
[34]
이탈리아의 국력은
강대국의 최소 수준이고, 심지어 그의 퇴임 후 시점에서는
대한민국이랑 비교당하는 수준으로 과거 대비 입지가 대폭 줄어들었다.
[35]
정작 로마의 집정관/황제도 최소한의 선은 지켰다는건 안 비밀.....
[36]
한국인들도 아는 사실이지만 현대 독일은 나치에 관해서 철저히 비난하고 나치의 악행을 세상에 알리는데에 누구보다 진심이어서 독일에게 나치는 건드려서 안될 역린이나 다름없다.
[37]
다만 이 사람은 법학 전공자고 실제로 정당인 활동도 했었어서 임명 과정에서의 잡음과는 별개로 정작 장관으로서의 직무 수행은 평타 이상이었다.
[38]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성폭행범은
성욕이 동하는 여자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만만하고 힘없는 여자를 노린다. 성욕보다는 지배욕 충족이 목적이니까.
[39]
한편,
2013년에 그의 친구인
푸틴은 베를루스코니가 동성애자였다면 수사를 안 받았을 것이라며 농담을 던졌다.
링크 비록 농담이라고는 하나, 애초에 부정부패 문제로 비판받는 것을 그가 게이였다면
PC주의 때문에 보호받았을 것이라며 논점일탈을 한 것이다. 유유상종
[40]
여담으로 그의 발언은 이탈리아의 전통인
가톨릭 문화하고도, 그 이전인
고대 로마의 문화의 가치관과도 맞지 않다. 애초에 고대 로마 문화나 가톨릭 문화 모두 남녀 간일지라도 자손을 남기는 것과 무관한 난잡한 성생활은 비난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란치스코(교황)은
야동을 보는 것도 교리에 근거해 공개적으로 비판한 인물이다. 물론 동성애자에 우호적인 발언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동성애자일지라도 성욕을 절제하고 양심에 따라 선량하게 살아가면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지 기존의 교리를 뒤집은 게 결코 아니다. 따라서 아무리 가톨릭이라도 난잡하게 사는 이성애자를 무조건 동성애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또한 비교적 성문화가 개방적이었다는
고대 로마였어도 베를루스코니처럼 정치를 했다면 암군이라고 비난받았을 것이므로, 끔찍한
혼종인 셈.
[41]
근데 의외로 트럼프도 동성혼 관련해선 적극 반대하진 않고 있다.
[42]
사실 아시아권도 오십보백보긴 하다. 한국만 해도 2023년까지 피부색 가지고
이규성(축구선수) 드립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43]
참고로 14-15시즌 밀란이 이적시장에서 사용한 금액은 아딜 라미의 완전 이적료인 겨우 4.5m 유로로 리그 최하위권 팀 수준의 이적료를 사용하였다. 나머지 선수들은 전부
아드리아노 갈리아니의 자유계약 작품이다.
[44]
레오나르두 시절 밀란은 그야말로
호나우지뉴,
파올로 말디니,
클라렌스 세도르프,
주세페 파발리,
크리스티안 아비아티,
알렉산드르 파투빼고는 믿을만한 선수가 단 한명도 없었다.
알레산드로 네스타는 등부상으로 시즌 아웃,
젠나로 가투소는 노쇠화 및 부상으로 인한 기량 대폭망, 피를로 역시 노예화와 부상으로 인한 폼 하락으로 인해 가용할수 있는 자원이
마티유 플라미니나 이제 겨우 유망지 딱지 때고 그냥저냥 해주던
이냐치오 아바테,
루카 안토니니,
소크라티스 파파스타토풀로스,
얀칼보또,
클라스 얀 훈텔라르,
마르코 보리엘로등 경기만 나오면 개그를 하거나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이 대부분이였다.
[45]
세도르프는 밀란 감독시절 선수들과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리그 성적이나 승률은 팀의 막장화를 보면 오히려 선방한 수준이다. 문제는 잘뛰던 선수를 설득하여 은퇴시킨 후 감독 앉혀놓고 성적이 후지다며 경질해버리고 위약금으로만 천만유로나 사용하였다.
[46]
유소년팀에서 잘만 감독하고 있던
필리포 인자기를 감독에 앉혀놓고는 10위를 했다.
[47]
이 부분은 말이 많은데 스카이 이탈리아에서 시니샤가 나간 이유는 베총리의 간섭이 싫어서라고 한다. 이 말이 일리가 있는게, 부임 초기부터 베총리가 시니샤를 대놓고 디스하고 압박했었다.
[48]
당초 일찍 매각이 확정 되었지만 베를루스코니가 끝까지 자국 출신
기업이 나오길 바라면서 두리번 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매각 하겠다던 기업은 나오지 않았고 시간만 지체되는 것 같아서 별다른 사항 없이 중국 컨소시엄에게 9,130억원의 금액으로 매각하게 되었다.
[49]
참고로 2012년 실패국가지수는 2011년을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2013년 실패국가지수는 2012년을 평가하는 것이다.
[50]
여기에는 145위로 나왔지만 146위가 맞다.
여기에는 146위로 바르게 나왔다.
[51]
2019년에는 동점이었다.
[52]
뉴스 기사에서는 폐쇄 결정을 내린 주체가 '위키피디아' 라고 모호하게 적혀있는데 명확히 하자면 이탈리아어판 편집자들의 내부 토론을 통해 폐쇄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모든 언어판
위키백과를 관리하는
위키미디어 재단은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10월 4일에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만 했다.
[53]
2012년 기준
대한민국은 2점.
[54]
공판을 몇개월 사이에서 수십 차례 열어서라도 단기간 내에 판결을 내리는
한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법정 공방이 치열하면 공판도 그만큼 한참 길어진다.
[55]
Mediterraneo, Folks!, Man Trouble, Micaela 등
[56]
실제로 사건 이후 한 여론조사에서는 베를루스코니의 지지율이 1주일 만에 이전보다 20%p 오른 66%p를 나타내기도 했다.
[57]
이 인터뷰를 바탕으로 자서전도 출간되었으나 당연히 베를루스코니 본인은 탐탁지 않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