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d7b 0%, #00309a 20%, #00309a 80%, #000d7b); color: #d8d8d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제33대 |
알치데 데 가스페리 | 주세페 펠라 | 아민토레 판파니 | 마리오 스켈바 | |
제34대 | 제35대 | 제32대2 | 제34대2 | |
안토니오 세니 | 아도네 촐리 | 아민토레 판파니 | 안토니오 세니 | |
제36대 | 제32대3 | 제37대 | 제38대 | |
페르난도 탐브로니 | 아민토레 판파니 | 죠반니 레오네 | 알도 모로 | |
제37대2 | 제39대 | 제40대 | 제41대 | |
죠반니 레오네 | 마리아노 루모르 | 에밀리오 콜롬보 | 줄리오 안드레오티 | |
제39대2 | 제38대2 | 제41대2 | 제42대 | |
마리아노 루모르 | 알도 모로 | 줄리오 안드레오티 | 프란체스코 코시가 | |
제43대 | 제44대 | 제32대4 | 제45대 | |
아르날도 포를라니 | 조반니 스파돌리니 | 아민토레 판파니 | 베티노 크락시 | |
제32대5 | 제46대 | 제47대 | 제41대3 | |
아민토레 판파니 | 조반니 고리아 | 치리아코 데 미타 | 줄리오 안드레오티 | |
제48대 | 제49대 | 제50대 | 제51대 | |
줄리아노 아마토 |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 람베르토 디니 | |
제52대 | 제53대 | 제48대2 | 제50대2 | |
로마노 프로디 | 마시모 달레마 | 줄리아노 아마토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 |
제52대2 | 제50대3 | 제54대 | 제55대 | |
로마노 프로디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 마리오 몬티 | 엔리코 레타 | |
제56대 | 제57대 | 제58대 | 제59대 | |
마테오 렌치 | 파올로 젠틸로니 | 주세페 콘테 | 마리오 드라기 | |
제60대 | ||||
조르자 멜로니 | ||||
* 이탈리아 공화국 총리 대수는 이탈리아 왕국 총리 대수를 이어서 가산한다. 이탈리아 왕국 총리 · 파시스트 정권 관련 직위: 이탈리아 대통령 |
}}}}}}}}}}}} |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부소장
줄리아노 아마토 Giuliano Amato |
||
|
||
출생 | 1938년 5월 13일 ([age(1938-05-13)]세) | |
이탈리아 왕국 피에몬테 주 토리노 | ||
재임 기간 | 제48대 총리 1기 | |
1992년 6월 28일 ~ 1993년 4월 29일 | ||
제48대 총리 2기 | ||
2000년 4월 26일 ~ 2001년 6월 11일 | ||
헌법재판소 재판관 | ||
2013년 9월 18일 ~ 2022년 9월 18일 | ||
헌법재판소 부소장 | ||
2020년 9월 16일 ~ 2022년 9월 18일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피사 대학교 (
법학 /
학사) 컬럼비아 대학교 (비교법학 / 석사) |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직업 | 정치인 | |
경력 |
하원의원 상원의원 재무장관 부총리 제도개혁장관 이탈리아 제48대 총리 헌법재판소 재판관 헌법재판소 부소장 |
|
서명 |
|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 공화국의 제48대 총리이자, 이탈리아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했다.2. 생애
1958년, 이탈리아 사회당에 가입하면서 일찌감치 정치계에 발을 들였고 1983년부터는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선출직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이후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당 연정이 지속되면서 재무장관, 부총리 등을 맡으며 승승장구하다가 1992년 6월, 드디어 총리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 시기 마니 풀리테 스캔들이 터지면서 내각은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그래도 이 시기, 재정적자를 적극적으로 축소하고 리라 평가 절하에 대응하면서 이탈리아가 자체 화폐 대신 유로화를 도입하는 첫발을 떼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치사상 초유의 스캔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결국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정계에 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특히 부패 사건 수사를 정부가 직접 통제권을 행사하는 경찰로 이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했던 점[1]에서 과연 아마토 총리가 진짜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의지가 있었는 지, 아니면 그냥 덮으려했는지에 대한 의심을 받게 됐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반독점기구 수장, 제도개혁 및 재무장관을 맡으면서 정계에 남아있다가 2000년 4월, 다시 한번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때는 과거와 달리 사회복지 확대 등을 추진했지만 내각을 구성한 올리브나무 동맹 내에서 이견을 보이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2001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 연합에게 패하면서 다시 한번 총리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후 주로 유럽 무대와 학계에서 활동하다가 2013년,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이 아마토 전 총리를 헌법재판소 재판관에 임명하면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원래는 마리오 몬티의 거국중립내각 붕괴 이후 후임 총리로 물망에 오르고 있었으나 엔리코 레타 민주당 부대표가 대신 지명되면서 아예 헌법재판소 쪽으로 가게 된 것. #
2023년에 AI위원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너무 많은 나이와 IT 비전문성의 논란이 있다. #
[1]
실제로 의회를 통과했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오스카르 루이지 스칼파로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무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