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 Democrazia Cristiana(DC) |
영어 | Christian Democracy |
활동 기간 | 1943년 ~ 1994년 |
전신 | 이탈리아 인민당(1919년) |
후신 | 이탈리아 인민당(1994년) |
이념 |
기독교 민주주의 사회보수주의 반파시즘 반공주의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우파[1][2] |
종교 | 가톨릭 |
[clearfix]
1. 개요
1943년부터 1994년까지 반세기 동안 이탈리아의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가톨릭계 정당.2. 역사
1919년 기독교 민주주의 계열의 루이지 스트루초가 국민당(PPI)을 창당하면서 생겨났다. 1919년 선거에서 농촌지역의 지지를 기반으로 100석을 확보했다. 이후 파시스트와 손을 잡으라는 무솔리니의 요구에 머뭇거렸고 결국 1926년 다른 야당들과 함께 강제로 해체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기독교민주당으로 부활해 반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하다가 1948년 이탈리아 공화정 헌법이 효력을 발휘한 후 실시된 첫 총선에서 48%의 득표를 얻어 압승을 거두어 헤게모니를 장악한 뒤 이탈리아 공산당 외의 야당들과 연정을 꾸리면서 알치데 데 가스페리가 수상으로 재임하던 시절부터 해체될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기민당은 이탈리아 자유당 등의 중도우파 정당이나 이탈리아 공화당 등의 중도 정당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사회당이나 이탈리아 민주사회당 등의 온건 좌파들이 공산당과 껄끄러운 상대라는 점을 이용해서 연정을 구성하면서까지 장기집권을 유지해 왔다. 종교정당이라는 점과 공산당과 대립하는 특성상 반공주의적, 보수주의적 가치를 추구했으며 거대 집권정당이 흔히들 그렇듯 여러 파벌이 존재했는데 이는 1990년대에 당이 해체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민주당은 서유럽의 다른 보수정당들과는 다르게 빅텐트 정당이았다.
이탈리아에서 기민당이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던 이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교도라면 무조건 이 정당을 지지하고 투표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가톨릭 신자가 다른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파문 대상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불순분자 비슷하게 간주되곤 했다.[3]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국민의 대다수는 가톨릭교도였으므로 당연히 넓은 지지기반으로 오랫동안 집권하는 것이 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 총선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의 득표율이 기민당의 득표율을 넘겨 정권을 내주리라는 예측도 나왔고[4] 1980년대 초중반에도 공산당이 온건좌파정당과 연정을 구성해 기민당 정부를 무너트린다는 예상도 나왔으며 1987년 총선에서도 기민당이 공산당에 뒤쳐져 정권이 교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결국 야당들 간의 오랜 반목관계나 숨은표 등의 영향으로 계속 기독교민주당이 집권하였다.
지역적으로도 공산당의 표밭이었던 중북부 이탈리아와 북부 도시권 일부를 제외하면 가톨릭 교세가 강한 롬바르디아 동부와 베네토, 농업 의존적이고 보수적인 남이탈리아 등을 지지기반으로 포괄하면서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2차대전 이후 지지기반이 북동부 이탈리아에서 남이탈리아로 점점 이동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북부에서의 빈자리는 북부동맹이 차지하게 되었다.
1992년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 총리가 마피아와 연루되는 사건이 터지고 이탈리아 검찰들에 의한 부정부패 수사가 폭넓게 이뤄지자 당 지도부 대부분이 입건되어 정치적 사형 선고를 받았다.[5] 당의 핵심이 나가떨어지고 때마침 선거제도가 바뀌는 바람에 결국 2년 뒤인 1994년 1월 당은 해체되고 당내 좌파가 주도권을 잡아 이탈리아 인민당(PPI)을 만들어 활동했다. 2002년 ' 라 마르게리타'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민주당(Partito Democratico)으로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한 가지 웃긴 점은 민주당 창당에 동참한 정당 중 하나인 좌파민주당이 1990년대 이전까지 기독교민주당과 그렇게 반목해 왔던 공산당의 후신이라는 점이다. 한편 우익에 가까운 파벌은 당시 신생정당이었던 전진 이탈리아 등의 우익 정당에 합류했다.
3. 출신 인물
3.1. 기민당 소속 대통령
- 조반니 그론키
- 안토니오 세니
- 조반니 레오네
- 프란체스코 코시가
- 오스카르 루이지 스칼파로
3.2. 기민당 소속 총리
- 알치데 데 가스페리
- 주세페 펠라
- 아민토레 판파니
- 마리오 셸바
- 안토니오 세니
- 아도네 촐리
- 페르난도 탐브로니
- 조반니 레오네
- 알도 모로
- 마리아노 루모르
- 에밀리오 콜롬보
- 줄리오 안드레오티
- 프란체스코 코시가
- 아르날도 포를라니
- 조반니 고리아
- 치리아코 데 미타
3.3. 기타
4. 역대 선거 결과
4.1. 이탈리아 제헌의회
년도 | 선거 결과 |
1946 | 207/556 35.7% |
4.2. 이탈리아 의회
년도 | 선거 결과 | |
상원 | 하원 | |
1948 | 131/237 48.1%[A] | 305/574 48.5%[A] |
1953 | 116/237 40.7% | 263/590 40.1% |
1958 | 123/246 41.2% | 273/596 39.1% |
1963 | 129/315 36.6% | 260/630 38.7% |
1968 | 135/315 38.3% | 266/630 38.7% |
1972 | 135/315 38.1% | 266/630 38.3% |
1976 | 135/315 38.9% | 263/630 38.7% |
1979 | 138/315 38.3% | 262/630 38.3% |
1983 | 120/315 32.4% | 225/630 32.7% |
1987 | 125/315 33.6% | 234/630 32.9% |
1992 | 107/315 27.3%[B] | 207/630 29.7%[B] |
4.3. 유럽의회 선거
1979년 29/81 36.5%1984년 26/81 33.0%
1989년 26/81 32.9% [13]
5. 관련 문서
[1]
친사회주의적 중도~
중도좌파 계파와 반사회주의적 중도~
우파 계파가 있었다. 전자는 현재 중도좌파 정당인
민주당으로, 후자는 현재 중도우파 정당인
전진 이탈리아 쪽으로 갔다.
[2]
비록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중도우파가 아닌 단순 '중도'라고만
적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보수주의 입장에 서고 당시 경쟁 상대였던
이탈리아 공산당에 대적하는 입장에서
반공주의를 추구하였기에 단순 중도로 보긴 곤란한 측면이 있다. 다만
이탈리아 사회당과의 연정을 이루고 공산당과도 연정을 고려하는 등 여타 유럽의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들보다는 확연히 좌파적이었다는 것이 중론.
[3]
이와 대조적으로 영국과 북유럽은 국교회 신도라도 사민당이나 노동당 등 진보 정당에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었다.
[4]
1968년 이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유럽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했으므로 이러한 예측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5]
인체 비누 항목에도 나와있는 '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이라는 반부패 운동이 이 시기에 있었다.
[6]
기민당 해산 이후 올리브 연합(
좌파
민주당,
이탈리아 인민당 등이 결성한
정당연합) 및
민주당 소속으로 총리를 지냈다.
[7]
기민당 해산 이후
민주당 소속으로 총리를 지냈다.
[8]
기민당 해산 이후
무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A]
역대 최다 득표, 처음이자 마지막 단독 과반 의석 확보
[A]
[B]
역대 최저 득표 및 최저 의석 확보
[B]
[13]
81석은 유럽의회 중 이탈리아 지분으로 배분된 의석수를 의미한다.
[14]
작 저자인 조반니 과레스키가 기독교민주당 지지자였기 때문에, 기독교 민주당 지지자 입장에서 쓰여진 이야기들이 많다.